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이 나날들에 오웰은 여러 명의 여자를 "아일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수전은 리처드를 사랑하지만, 리처드의 돌봄에 있어 의견 차이가 생길 때는 오웰의 뜻에 따른다. 오웰은 리처드에게 애착 장난감으로 가지고 자라고 목공 작업실에 있던 망치를 주었다. 수전이 그애에게 곰 인형을 사주자고 제안하자 오웰은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날이 정말로 추워진 어느 날, 수전은 오웰이 리처드의 나무 장난감 몇 개를 난롯불에 태우고 있는 걸 보게 되고, "좀 잔인한 일 아닌가" 생각한다. 오웰은 자신이 결핵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수전에게 말하지 않는다. - P498
오웰은 늦잠을 자고 있다. 수전은 심부름꾼이 전해주고 간끈으로 묶인 꾸러미 하나를 차가 담긴 쟁반과 함께 가져다준다. 수전이 방을 나가자 오웰은 침대에서 꾸러미를 열어본다. 그토록 여러 번 거절당한 끝에 마침내 그것이 여기 있다. 우아한 회색과 녹색 표지에 싸인 《동물농장: 동화>가. 아일린은 동화를 좋아했고, 거기 깃들어 있는 심층적인 우화 구조를, 그가벼운 언어를, 그것이 가두고 있는 어두운 두려움들을 이해했다. 오웰은 책을 아무 곳이나 펼친다. - P498
아일린의 존재감에 오웰은 멍해진다. 아일린은 고개를 뒤로젖히고 새하얀 목을 훤히 드러낸 채 웃곤 했다. 아일린이 정보부에서 했던 일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사실들을 보이지 않게정리하고 공적인 기록을 변경하는 일. 오웰은 일어나 앉는다. 그러다 나무로 된 침대 프레임에 머리를 박는다. 그들은 이 침대에서 함께 작업을 했었다. 오웰은 손을 뻗어 침대 협탁 서랍을 연다. 아일린은 잠깐여기 있을 것이다. 오웰은 아일린의 마지막 편지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읽기 시작한 참이다. 오늘은 이 부분이다. 난 당신이 다시 책을 쓰는 게 정말로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오웰은 편지들을 이리저리 뒤적인다. 마지막 편지가 그를사로잡는다. 그는 그것을 몇 번이고, 끝까지, 읽고 또 읽는다. 난롯불이랑 시계도 보이고요. - P499
그들은 이 책에 관해 여러 해 동안 이야기를 나누어 왔다. 아니, 나누어 왔었다. <1984>라는 아일린의 시가 있었다. 아일린은 오웰을 만나기 전에 쓴 그 시에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투영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가 훨씬 더 선명해진 건 아일린이 정보부에 근무하던 시절, 세너트 하우스에서 뉴스를 삭제하던 시절이었다. 나, 다시 책을 쓰고 있어요! 오웰은 아일린에게 말해준다. 이제 그들이 소통하게 된, 말하지 않으면서 말하는 방식으로.
여름의 끝 무렵, 원고는 열두 페이지가 된다. 오웰은 뉴캐슬어폰타인에 있는 아일린의 무덤에 찾아가 들장미 한 송이를 그곳에 심는다. 하지만 그는 깨닫는다. 그는 아일린대해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 개인적인 노트에도, 편지에도, 일기에도, 한 단어도 쓸 수가 없다. 그가 11월에 어느 에세이에 썼듯, "불행하게도, 한 사람의 감정이 정말로 어떤 상태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종종 어떤 구체적인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가 되면 이미 너무 늦어 있다. - P500
수전은 오웰이 필요로 하는 것 가운데 집안일과 관련된 부분을제공해 준다. 그리고 이제, 아내 노릇에 포함되는 다른 역할들도 채워져야 한다. 1945년에서 1946년에 이르는 그다음 몇 달 동안, 오웰은 적어도 네 명의 여자를 덮친 다음 청혼한다. 거의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이지만, 그에게는 써야 할 책이 있고, 그래서 사람을 구해야 한다. 시도들이 거절당하자, 오웰은 자신의 아내라는 일자리를,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들과 받게 될 보상, 일이 시작될 날짜와 예상되는 종료 날짜 등 점점 더 내밀한 세부사항을 넣어가며 설명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그 일은 쉽지 않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나열하는 과정에서 그는 아일린이 자신을 위해 무엇을 해주었는지를, 전에는 인정하지 않았던 사실들을 적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일린의 이름은 오웰이 그 여자들에게 청혼하며 하는 말들 속에서, 때로는 그가 쓴 가장 사적인 편지들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오웰은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 충격적인 사실을 동시에 직면(혹은 외면)해야만 한다. 전에 그 일자리를 맡았던 사람이 과로와 방치 속에 사망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 역시 오래 살지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P502
의사는 오웰이 결핵으로 "위중한 상태"라고 진단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 길을 따라 반힐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길에 난 구멍에만 빠져도 출혈이 일어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오웰은아르들루사에 머무르고 싶어 하지 않는다. 플레처 부부의 아이들을비롯해 그곳에 있는 모두를 감염시키고 싶지는 않다는 것이다. 마거릿 플레처는 오웰이 쓰는 식사 도구 일체를 삶아 소독하고 침구류는 버리겠다고 말하며 계속 설득한다. 그날 밤, 로빈 플레처가 오웰의 방에 이야기를 나누러 간다. 방에서 나온 로빈은 마거릿에게말한다. "저 친구도 알아."오웰이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오웰은 거기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환자로 지내기는 싫다는 것이다. 집이란 그 사람이 만들어가는삶이고, 자기 집에 있는 한 그는 여전히 자신의 삶 속에 있을 수 있다. 오웰을 태우고 그 끔찍한 길을 달려가는 동안 리스의 얼굴은 두려움으로 굳어진다. - P542
빌과 에이브릴이 이제 다섯 살 반이 된 리처드와 함께 오웰을 차에 태워 아르들루사의 대저택으로 데려간다. 그들이 탄 빌의 오스틴 12는 도중에 수렁에 빠지고 만다. 빌과 에이브릴은 차를 끌어낼 농장 트럭을 가져오기 위해 6킬로미터를 걸어서 되돌아간다. 리처드는 그때 아버지와 함께 차 안에 앉아 기다리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우린 그냥 거기 같이 앉아서 이야기를 했어요. 비가내리고 있었죠. 날씨가 추웠고, 아버지가 사탕을 주신 기억이 나요. 아버지는 몸이 무척 편찮으셨지만 저랑 계실 때는 아주 쾌활하셨어요. 아무 문제도 없는 척하려고 애를 쓰셨죠. 에이브릴 고모랑 빌 아저씨가 트럭을 몰고 돌아왔을 때는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어요.‘ 리처드가 기억하는 게 있다면 사랑이다. 하지만 그가 문 닫힌차 안에 함께 앉아 아버지의 병든 숨결을 들이마시고 있을 때, 그사랑은 해로움에 너무도 가까이 있다. - P546
지금은 늦은 오후다. 노라는 정원에 앉아 있다. 하루가 끝나가고 있다. 책 역시 끝나가고 있다. 노라는 오웰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의 작품들을, 특히 <동물농장>을 즐겁게 읽었다. 하지만 점점 커져가는 자신의 불안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동안, 노라는 자신이 지금껏 리스의 책을 읽고 있었던 건 아일린을 만나기 위해서였음을 깨닫는다. 이제 두 페이지 남았다. 아일린이 언급되는 건 단 한 번이다. 노라는 페이지를 뒤로넘겨 그 부분을 찾아낸다. 여기 있다. 리스가 스페인에 있던 아일린의 직장을 찾아가는 장면이다. 아일린은 "내게 그 위험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리스는 쓴다. 그때 아일린은 "정치적인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노라는 무언가가 훅 밀려드는 걸 느낀다. 차가운 건지 뜨거운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아니, 뜨거운 게 맞다. 하루의 열기는 이미 식었지만 말이다. 콰터스말대로라면 갱년기는 이미 지났을 텐데. 고개를 들자 콰터스가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주방 창문 너머에서 흐릿하게 움직이는, 위로가 되는 그 실루엣이. - P568
노라는 마지막 페이지를 펼친다. 리스는 오웰의 "과도한 명예의식"을 거론하며 책을 끝맺고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명예의식은 "자기 자신을 향했던 오웰의 가혹함과, 어쩌면 그가 이따금 타인에게 드러냈던 배려 없는 태도까지도 설명해준다. 그럼에도 그의 배려 없는태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많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의 아내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노라는 숨을 죽인다. 이게 다인 걸까? "...그리고 자신의 건강과 안전에 무관심했던 그의 태도를꺾고 싶어 했던 다른 사람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없다. 아일린은 거기 없다. - P569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말들이 나온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며 예외적일 만큼 사심 없고 용기 있는 남자와 엮이는 일은 때로 커다란 대가를 요구하기도한다. 남다른 성품의 소유자가 삶을 헤치고 나아갈 때, 그 과정이 평범한 사람의 무기력한 여정보다 한층 충격적인 여파를남기리라는 건 예상 가능한 일이다. " 노라는 페이지를 넘긴다. 거기에는 오직 텅 빈 면지들만 있을 뿐이다. 물론 죽음은 우리 모두를 사라지게 만들 것이다. 죽음이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그토록 고약한 속임수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노라는 자신이 그 속임수를 뒤집어줄 말들을 기대하고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 순간, 기억이 떠오른다. 노라에게도 그런 말들이 조금은 - P569
있다. 그 말들은 저 안에, 책상 맨 위칸에 들어 있다. 노라는 방으로 들어가 열쇠로 그 칸을 연다.
주소를 적어놓은 지도 상당히 오래됐네. 그 뒤로 난 고양이 세 마리랑 놀았고, 담배 한 대를 말았고(요즘은 담배를 말아피워, 맨손으로는 아니지만), 난롯불을 뒤적였고, 에릭, 그러니까 조지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어. 모두 사실은 무슨 말을써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겠지. 늦지 않게 편지를 쓰던 습관을 결혼하고 첫 몇 주 동안 잃어버렸나 봐. 에릭이랑 너무도 끊임없이, 정말이지 격렬하게 싸워댔거든. 살인이나 별거가 성사되면 편지를 딱 한 통 써서 모두에게 보내는 편이 시간절약이 되겠다는 생각까지 들지 뭐야....
아니, 노라는 생각한다. 편지를 든 손이 무릎으로 떨어진다. 아니야. 아일린이 그 대신 이뤄낸 건 삶 그 자체였어.
이제 뭘 해야 할까? - P570
이 책은 출간과 함께 오웰 애호가들로부터 여러 공격을 받기도했다. 어떤 사람들은 왜 오웰과 아일린이 실제로 했다는 증거가 없는 말과 행동을 마치 실제인 것처럼 써놓았느냐고 저자를 비난한다. 그러나 애나 펀더는 그 부분들이 ‘픽션‘임을 명확히 밝히고 있으며, 역사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 사실의 큰 틀 안에서 역사를 자신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세부사항을 창조해 낼 자유가 있다. 그리고사실상 이 책은 남성 작가 조지 오웰과 후대 여성 작가 애나 펀더의 싸움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웰의 여러 전기 작가들과 아일린의전기 작가 애나 펀더의 싸움, 공식화된 평가와 재평가의 싸움, 남성예술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추앙과 그 추앙 속에서 사라진 한 여성을 되살리려는 시도의 싸움에 가깝다. 실제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자 빛나는 부분 중 하나는, 전기 작가들이 오웰의 과오를 덮고 아일린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문장의 시제를 바꾸고 수동태와 사물 주어를 사용해가며 무리한 서술을 이어간 지점들을 저자가 낱낱이 밝혀내는 부분이다. 그 전기 작가들은 후대에 이런 재평가가 이루어질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놀라움과 분노를 넘어 쓴웃음이 지어질 뿐이다. - P583
그동안 ‘여성서사‘에 해당하는 여러 작품을 번역해 왔지만 이토록 강렬하게 모든 감각을 파고드는 고통을 선사하는 작품은 처음이었다. 거의 모든 페이지가 그곳에 적혀 있는 구체적인 사실들이, 원치 않았지만 나 역시 이 괴로운 ‘이중고‘에 한데 얽힌 공범이라는 실감이 악몽처럼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내 머릿속에 맺혀 끝내사라지지 않았던 질문 한 가지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평범한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보다는 유명작가가 내뱉는 별 의미 없는 한 마디 말을 더 가치 있게 여기고, 거기에 귀를 기울인다. 이 책의 말미에는 "아일린이 이뤄낸 것은 삶자체였다는 말이 나온다. 저자는 왜 이 당연한 사실을 이토록 많은페이지를 들여 말해야만 했던 걸까? 왜 작가가 아니었던, 그저 ‘삶‘을 살았던 아일린이 존중받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다지도 어려운 일일까? 한 사람이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 존재만으로 존중받는일이 불가능하다면, 한 유명인의 재능과 성취에 대한 추앙이 수천, 수만의 타인의 삶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대체해 버리는 일이 계속된다면, 그 낡디 낡은 검은 상자의 흑마술은 언제까지나 끝나지않을 것이다. 부디 이 작품이 독자들에게 예리하고 의미 있고 풍성한 질문들로 남기를 바란다. - P58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