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이유미 박사


생물다양성의 보고로 알려진 경기도 포천 광릉 숲에 자리한 국립수목원의 연구관으로 생물표본연구실장을 맡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동란 이후 십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온 나라의산이 붉은 민둥산 투성이이던 시절 서울에서 태어났다.

녹화사업과 나무심기운동으로 우리 숲이 조금씩 제 모습을 찾아갈무렵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식물분류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숲은 제 모습을 찾아가지만 일반인의 숲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폭넓지 않았을때부터 우리나라의 산과 들, 도서벽지를 찾아다니며 나무와 풀에 관한 연구를 했다.

특히 사라져가는 식물의 보전 같은 식물분류학을 기반으로 하되 국가적으로 필요한 연구에 주력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여러 사람에게 알리고자 많은 글과 책을 써냈다. 또한 봄철 우리 땅에 자라는 키작은 풀처럼 차분히 겨울을 준비하는 키 큰 나무처럼 나직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강의와 글로도 많은 아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가지<한국의 야생화> <우리는 숲으로 간다>가 있으며 산림생태학을 전공한 부군 서민환 박사와 함께 쓴 <어린이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풀 백과사전> <어린이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나무 백과사전<쉽게 찾는 우리 나무> <한국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철철이 피고 지는 식물들. 그리고 그 속에 감추어진 식물들의 이야기를 엮어보자고했습니다. 그냥 문화적인 이야기나 식물학적인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늘 곁에 있어사소하거나 흔하지만, 씩씩하게 살아가는 식물들의 이야기 말입니다. 마음을 열고귀 기울이다 보면 저절로 그 속에 숨어있는 과학과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이야기.
그래서 이야기의 끝머리에서 "아하! 그렇구나"하는 새삼스런 발견의 즐거움을 알려주는 그런 이야기 말입니다.
오랫동안 식물공부를 해왔지만 어느 누구 친절하게 이러한 이야기를 알려준 사람이 없었던 까닭에 책이나 인터넷을 뒤져보아도 속 시원하게 혹은 내 입맛에 맞는 정•보는 찾아내기 어려운 까닭에 이러한 시도는 참 벅찬 일이다 싶기는 합니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제비꽃의 작은 꽃잎 속에, 바람에 날리는 민들레의 솜털달린 씨앗 속에 감추어진, 우주처럼 다양하고 재미난 세상을 알았으면 했습니다. 그래야 관심도 갖고, 사랑도 하고, 과학도, 자연사랑도, 아름다운 시와 노래도 나올수 있을 테니까요.
부족한 글머리를 열며 너무 거창한 마음을 품었나 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아우르는 제목을 생각하면서 자꾸만 꽃과 나무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꽃과 나무는

너무 흔히 쓰는 말이기에 다른 어떤 말도 이보다 자연스럽지는 않지요. 하지만 우리가 이토록 당연하게 쓰고 있는 꽃과 나무는 모순이 있는 말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아는 꽃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이미지는 풀입니다. 그상대어로 나무를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나무의 상대어는 꽃이 아니고 풀입니다. 또 꽃은 나무든 풀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달리는, 후손을 퍼뜨리기 위해몸부림치는 식물의 생식기관입니다.
벚나무나 산수유, 소나무들은 분명 나무이지만 꽃이 피구요. 민들레나 제비꽃은꽃이 피는 풀일 뿐입니다.
소나무에 꽃이 피냐구요? 물론입니다. 꽃이 피니까 솔방울 같은 열매도 맺지요. 소나무는 겉씨식물로 화려한 꽃잎을 가지고 있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을 뿐입니다. 꽃이 없다는 뜻을 가진 무화과나무도 꽃이 없는 것이 아니라 숨어 있어 눈에잘 띄지 않는 것입니다.
앞으로 ‘꽃과 나무‘가 아닌 ‘풀과 나무‘, 즉 식물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이들을구성하고 있는 꽃, 열매, 혹은 잎들의 변화무쌍한 세계를 함께 풀어갑니다. 주변에살고 있는 풀과 나무의 종류를 함께 배우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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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망자가 으레 그러하듯 고인 역시 죽은 사람답게 각별하게 묵직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다. 뻣뻣하게 굳은 팔다리는천에 감긴 채 관속에 푹 잠겨 있었고, 영원히 들지 못할 머리는 베개에 뉘여 있었다. 훤하게 드러난 누런 밀랍빛 이마와 움푹 꺼진 관자놀이, 윗입술을 내리누를 듯이 위로우뚝 솟아오른 코 역시 죽은 사람다웠다. 바싹 야윈 고인의 외관은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많이 달라 보였다. 그러나 죽은 사람의 얼굴이 으레 그러하듯 이반 일리치의 얼굴은 살아 있을 때보다 한결 잘생겨보였고 무엇보다도 훨씬 더 의미심장해 보였다. 그의 얼굴은 마치 해야 할 일을 다 했고 또 제대로 했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표정에는 산자를 향한 모종의 비난과 경고까지 담겨 있었다. 뾰뜨르 이바노비치에게는 그러한 경고가 부적절한 것으로, 적어도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 P13

이반 일리치의 가족은 모두 건강했다. 이따금 이반 일리치가 입에서 이상한 맛이 느껴지고 왼쪽 옆구리가 왠지 좀불편한 것 같다고 말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걸 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 거북한 느낌은 점점 심해졌다. 통증까지는 아니더라도, 옆구리가 묵직해진 느낌이 사라지지 않아 여간불쾌한 게 아니었다. 이반 일리치의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어 골로빈 가족이 즐기던 편안하고 유쾌하며 고상한 삶의 분위기를 망치기 시작했다. 남편과 아내는 더 자주 다투기 시작했고, 곧 이들 가족이 누리던 가벼움과 유쾌함은사라지고 품위만 간신히 유지되었다. 예전 같은 장면들이다시 반복되었다. 남편과 아내가 폭발하지 않고 잠시 쉬어갈수 있는 작은 섬들이 다시 떠오르곤 했지만 그 섬의 수는 아주 적었다. - P51

 맹장이 낫고 있었다. 흡입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묵직하면서도 쿡쿡 찌르는 듯한 통증, 저 익숙하고 오래되고집요하고 조용하고 지독한 통증이 찾아왔다. 입안에서는예의 그 익숙한 역겨운 맛이 다시 느껴졌다. 심장이 조여들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오, 맙소사, 하느님, 맙소사!>그는 중얼거렸다. 또, 또 시작이야, 절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러자 갑자기 문제가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맹장? 신장?> 그는 혼잣말을 했다. <이건 맹장문제도 아니고 신장 문제도 아니야. 이건 삶, 그리고...... 죽음의 문제야. 그래, 삶이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자꾸만 도망가고있어. 나는 그걸 붙잡아둘 수가 없어. 그래. 뭣 하러나를 속여? 나만 빼고 모두들 내가 죽어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남은 시간이 몇 주냐, 며칠이냐, 그것만이 문제야.
어쩌면 지금 당장일 수도 있어. 빛이 있었지만 이제 캄캄 - P69

한 어둠뿐이야. 나도 여기 있었지만, 곧 그리로 가겠지! 그런데 그게 어디지?>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고 숨이 멎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는 소리만 들렸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지? 아무것도 없다는 건가? 내가 없어진다면 나는 어디에 있게되는 거지? 정말 죽는 걸까? 안 돼, 싫어.> 그는 벌떡 일어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여기저기 더듬으며 초를 찾다가 초와 촛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다시 베게 위로벌렁 드러누웠다. <불은 켜면 뭐해? 다 마찬가진걸> 두눈을 부릅뜨고 어둠을 응시하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죽음, 그래, 죽음, 저들은 아무도 몰라. 알고 싶어 하지도않아. 날 불쌍하게 여기지도 않아. 그냥 놀 따름이야(깔깔거리는 소리와 음악 소리가 문 너머에서 어렴풋이 들려왔다). 저들도 똑같아, 똑같이 죽게 될 거라고, 멍청이들, 내가 조금 먼저 가고, 저들은 조금 늦게 갈 뿐, 결국엔 다 마찬가지야. 그런데도 저렇게 좋을까, 짐승 같은 것들!> 울화가치밀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참을 수 없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세상 모든 인간이 이토록 끔찍한 공포를 겪어야하는 운명을 타고났을 턱이 없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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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잘 모르겠는데, 주드." 해럴드가 걱정스럽게 말한다.
"그냥 가요, 해럴드." 그가 말한다. "첫 번째 벤치까지만요"
맬컴은 집 뒤까지 숲을 터서 낸 길을 따라 벤치 세 개를 설치했다. 첫 번째는 호수를 끼고 도는 길 3분의 1지점에 있고, 두 번째는 딱 중간에, 세 번째는 3분의 2 지점에 있다. "천천히 가요.
지팡이도 가지고 가고요." 지팡이를 쓸 필요가 없어진 지는 수년이 흘렀지만 ㅡ10대 시절 이후로는 안 썼다 ㅡ이제는 50미터만 넘어도 지팡이가 필요하다. 결국 해럴드도 그러자고 하고, 그는 해럴드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스카프와 코트를 쥔다.
바깥에 나가자, 행복감이 더 고취된다. 그는 이 집이 좋다. 집의 모양이, 고요함이, 무엇보다 자기와 윌럼의 집이라는 게 좋다.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로 리스페너드 스트리트에서 멀어졌지만, 그 집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의 집, 함께 만들었고 함께 사는 집이다. 두 번째 다른 숲을 바라보고 있는 그 집은 일련의 유 - P248

리 큐브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앞에는 숲을 통과해 지그재그로 들어오는 긴 진입로가 있어서 어떤 각도에서는 일부밖에 보이지 않고 다른 각도에서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밤에 불을 켜면 온 집이 랜턴처럼 빛나서, 맬컴은 논문에서 이 집을 ‘랜턴 하우스‘라고 명명했다. 집 뒤쪽은 넓은 잔디밭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너머에는 호수가 있다. 잔디밭 끝에는 슬레이트 판을 붙인수영장이 있어 무덥기 짝이 없는 날에도 물이 늘 시원하고 맑았고, 헛간에는 실내수영장과 거실이 있다. 헛간 벽은 다 들어 올려 치울 수 있게 되어 있어서 실내 전체가 야외로, 봄이면 주위에 온통 피어나는 모란과 라일락 덤불을 향해, 초여름에는 지붕에서 늘어지는 등나무 원추꽃차례를 향해 하나로 연결된다. 집오른편에는 7월이면 양귀비로 온통 빨갛게 물드는 들판이 있고, 왼편에는 윌럼과 함께 코스모스와 데이지, 디기탈리스, 야생당근 등 야생화 씨를 수천 개 뿌려놓은 들판이 있다.  - P249

이사 온직후 어느 주말, 그들은 집 앞과 뒤의 숲을 돌아다니며 참나무와 느릅나무 주위 이끼 낀 둔덕 근처에는 은방울꽃을 심고, 사방에 박하 씨를 뿌렸다. 맬컴은 이런 식의 조경이 감상적이고진부하다고 찬성하지 않았고, 맬컴이 아마 옳을지도 모른다는걸 알았지만,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공기가 향기로운 봄과 여름이면, 그들은 호전적으로 추한 리스페너드 스트리트를 이런곳을 그려볼 시각적 상상력조차 없었던 자신들을 생각한다. 이곳에서 아름다움은 너무 단순하고 너무 명백해서 때로는 환영같았다.
그는 해럴드와 숲을 향해 출발한다. 숲의 험한 산책로는 공사가 시작됐을 때보다 훨씬 더 다니기 편해졌다. 그래도 그는 집중해야 한다.  - P249

뒤이은 침묵 속에서 그는 자기가 해야 하는 말을, 늘 생각했지만 한 번도 하지 못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다. "말도 안 되게들리리라는 거 아는데, "그가 입을 열자, 윌럼이 그를 쳐다본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시간이 지났는데도, 난 여전히 내가불구라는 생각이 안 들어. 그러니까 내 말은, 불구인 건 알아. 그렇다는 건 안다고. 불구가 아니었던 시간보다 불구로 산 게 두 배는 더 되니까. 그게 네가 알아온 내 모습이지. 도움이 필요한 그런 사람으로. 하지만 내 기억 속엔 뛸 수 있었던 사람, 원할 때마다 걸을 수 있었던 사람이었던 내가 있어.
불구가 된 사람들은 다들 뭘 빼앗긴 것같이 생각할 거야. 하지만 난 늘 그랬어. 불구인 걸 인정해버리면, 트레일러 박사에게 패배를 인정하면, 그가 내 삶의 모습을 규정하게 만들어버릴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그래서 아닌 척하는 거야. 그 사람을 만나기 전의 나인 척하는 거야. 그게 논리적이지도, 실제적이지도않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게 이기적인 생각이라는 것도 알아. 미안해. 내가 아닌 척하고 있는 대가를 네가 치르고 있는 걸 알아. 그래서, 그만두려고." 그는 심호흡을 하고, 눈을 감았다 뜬다. "난 불구야." 그는 말한다. "난 장애인이야." 정말 바보 같지만, 울음이 터질 것 같다. 그는 결국 마흔일곱이고, 이걸 스스로 인정하는 데 32년이 걸렸다. - P253

그날 밤 야스민이 떠난 후, 그는 정말 오랜만에 팔을 긋는다. 그리고 피가 대리석을 따라 흘러 배수구로 들어가는 걸 지켜본다. 수도 없는 문제를 일으킨 이 다리를, 수많은 시간, 수많은돈, 수많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는 이 다리를 그대로 가지고 가려는 게 얼마나 비합리적인 바람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그건 그의 다리다. 그 자신이다. 어떻게 자신의 일부를 기꺼이 잘라낼 수 있겠는가? 수년에 걸쳐 이미 수많은 부분을 잘라왔다. 살, 피부, 흉터들을. 하지만 이건 왠지 다르다. 다리를희생하면 트레일러 박사가 이겼다는 걸 인정하는 게 될 것이다. 그에게, 그날 밤 그 들판, 그 차에 굴복하는 게 될 것이다.
이건 다르다. 일단 다리를 잃고 나면 더 이상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다시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더 나아질 거라고 기만할 수 없다. 불구가 아닌 척할 수 없다. 그의 기형쇼 점수는 또 한 번 올라갈 것이다. 언제나, 그 무엇보다도, - P258

자신이 잃은 것으로 정의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친다. 걷는 법을 또 배워야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빠질 체중을 늘리려고 애쓰고 싶지 않다. 첫 번째 골수염때 빠진 몸무게도 힘들여 되돌려놨더니 두 번째 발병으로 다시다 잃었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싶지 않다. 혼란스럽고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깨어나고 싶지 않다. 한밤중에 공포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 동료들에게 또 아프다고 설명하고 싶지 않다. 몇 달 동안이나 기운 없이, 평정을 회복하려 애쓰며 살고 싶지 않다. 다리 없는 모습을 윌럼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다. 윌럼이 극복해야 할 또 다른 도전을, 또 다른 기괴함을 주고 싶지 않다. 정상이 되고 싶다. 그저 정상이 되고 싶은 것뿐인데, 그는 해가 갈수록 정상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마음과 몸을 별개로, 서로경쟁하는 존재로 생각하는 게 틀렸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가 없다. 몸이 또 한 번 전투에서 승리하는 게, 자기 대신 결정을 내리는 게, 이런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게 싫다. 윌럼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다. - P259

거의 매해 여름마다 그는 생각한다. 올해 여름이 최고라고. 하지만 이번 여름은 정말로 최고다. 여름뿐만이 아니다. 봄도, 겨울도, 가을도 최고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인생을 점점 더 일련의 회상들로 바라보게 된다. 계절들이 포도주 제조연도인 것처럼 한 계절이 지나갈 때마다 평가하고, 살아온 세월을 역사적시대로 나눈다. 야심찬 시절. 불안한 시절. 영광의 시절. 미혹의시절. 희망찬 시절.
이 이야기를 해주자 주드는 빙긋 웃었다. "지금 우리는 어느 시절을 살고 있는데?" 그가 묻자, 윌럼도 그를 보며 빙긋 웃었다. "모르겠어. 아직 이름을 못 붙였거든."
하지만 적어도 끔찍한 시절을 지나왔다는 데는 둘 다 동의했다. 2년 전 바로 이 주말 노동절 주간에 그는 어퍼이스트사이드 병원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옥색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와 잡역부들이 건물 밖에 모여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바로 그 건물 위에 그의 연인을 포함해 죽어가고 있는 온갖사람들이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먹고 담배 피우고 전화 통화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너무 증오심이 치밀어 올라 속이 뒤집히는것 같았다. 그 순간 주드는 불덩어리 같은 몸을 하고 인위적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고, 마지막으로 눈을 뜬 건 수술실에서 나온다음 날인 나흘 전이었다. - P272

아니었다고 할 수는 없지." 그는 주드를 쳐다봤고, 그 순간 주도와 주드의 지난 인생에 대해 정말로 생각할 때 가끔 느끼곤하는 감정을 느꼈다. 슬픔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동정하는 ㅣ슬픔이 아니었다. 그건 더 큰 슬픔이었다. 고군분투하고 있는가엾은 사람들, 자기도 모르는,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을 다 감싸 안는 것 같은 슬픔이었다. 매일매일이 너무나 힘들 때에도, 상황이 너무나 비참할 때도, 사방에서사람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생각하면 느끼게 되는 경탄과 경외심이 뒤섞인 그런 슬픔이었다. 인생이란 너무 슬프구나. 그런 순간이면 그는 생각했다. 너무 슬프지만, 그래도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 거지. 삶에 매달리고, 위안거리를 찾고.
하지만 물론 이런 말을 하진 않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주드의 얼굴을 잡고 키스한 뒤 다시 베개에 기댔다. "넌 어쩌다 그렇게 똑똑해졌어?" 주드에게 묻자, 그는 빙긋 웃기만 했다. - P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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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 다 키트가 그보다 훨씬 더 야심만만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늘 그랬다. 하지만 리처드의 전화가 왔을 때, 스리랑카에서 출발하는 첫 번째 비행기에 그를 태운 것도 키트였다. 프로듀서들에게 제작을 일주일 동안 중지하게 해서 그가 뉴욕에 다녀올 수 있게 한 것도 키트였다.
"화나게 하려는 건 아니지만, 윌럼." 키트는 조심스레 말했다. "네가 주드를 사랑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좀. 뭐 네 일생의사랑이라거나 하면 이해하겠어. 하지만 이건 너무 극단적이야,
네 경력을 이런 식으로 막는 건."
하지만 그는 가끔 자기가 누군가를 주드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싶었다. 물론 주드 자체가 좋지만, 주드와 같이 지내는 게, 자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이 있다는 게, 그날 자기의모습을 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거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있다는 게 편안했다. 그의 일, 그의 삶 자체가 가장과 가면극이었다. 그와 그를 둘러싼 상황은 모든 게 끊임없이 변했다. 머리, - P22

몸, 그날 밤 어디서 잘지. 가끔 그는 자기가 밝은색 병에서 밝은색 병으로 계속해서 따라지고 있는 액체, 한 번 옮길 때마다 조금은 홀리고 조금은 남는 액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주드와의 우정은 자기에게도 진짜배기,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가장으로 이루어진 삶 속에도 본질적인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자기가 못 볼 때조차 주드는 알아봐주는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줬다. 마치 주드가 지켜봐주고 있다는 게 자기를진짜로 만드는 것 같았다.
대학원 때 한 선생님은 최고의 배우들은 가장 지루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배우는 자아를 사라지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의식이 강한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배우는 자신을 캐릭터에 녹아들게 해야 한다. "개성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팝스타가 돼라." 선생님은 말했다. - P23

그는 그 말에 담긴 지혜를 이해했고, 지금도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다 자아를 갈망했다. 배우 생활을 오래할수록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으로부터 정처 없이 멀어져가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렇게 많은 동료들이 다 그렇게 망가진 게 과연 놀랄 일일까? 그들은 다른 사람 흉내를 내면서 돈을 벌고 인생을 살고 자기의 정체성을 만든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기 인생을 모양 짓기 위해 끝없이 다음촬영장, 다음 무대를 필요로 하는 게 놀랄 일인가? 그게 없다면그들은 무엇이며 누구란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뭔가 자기만의것을 가지려고 종교를, 여자친구를, 대의를 찾는다. 그들은 자지도, 멈추지도 않고, 혼자 있는 걸, 자기가 누구인지 질문해야만 하는 걸 두려워한다. ("배우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듣는사람이 없으면, 그래도 배우일까?" 한번은 친구 로먼이 물었다. - P23

그는 가끔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주드에게. 그는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친구였고, 그 정체성이 다른 모든 것을 대신했다. 그건 그가 너무 오래 살아온 역할이라 지울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됐다. 주드에게는,
주드 자신이 일차적으로 변호사가 아니듯이 그도 일차적으로 배우가 아니었다. 그건 그들이 상대방을 묘사할 첫 번째도, 두번째, 세 번째 방식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인 척하면서 인생을 살기 전 그의 모습 ㅡ형이 있는 사람, 부모가 있는 사람,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인상적이고 흥미진진하게 보던 사람 ㅡ 이 어땠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주드였다. 자기의 과거 모습, 다른사람이 되려고 굳게 결심했던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원하지 않는 배우들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일깨워주는 사람을 원했다. 그는 절대 자기가 배우라는 사실을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을 사람 옆에 있고 싶었다. - P24

정직히 말해서, 그는 주드와 함께 오는 사람들, 해럴드와 줄리아도 사랑했다. 주드의 입양은 그가 처음으로 주드가 가진 것에 부러움을 느꼈던 일이었다. 그는 주드가 가진 것들-그의지성과 사려 깊음, 풍부한 지식을 늘 대단하게 생각했지만, 그를 질투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해럴드와 줄리아가 주드와함께 있는 모습을, 주드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을 때조차 그를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을 보면서, 그는 공허함 같은 걸 느꼈다. 주드는 부모님이 없었고 대부분 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살았지만, 자신에게 부모님은 소원하기는 해도 적어도 그를 그의 삶에 붙들어 매어주는 존재였다는 걸 느꼈다. 가족이 사라지자, 그는 공중을 부유하는 종잇조각, 바람이 휙 불 때마다 위로 - P24

날아가는 종잇조각이었다. 그와 주드는 그 점에서 하나였다.
물론 이 부러움이 말도 안 되고 터무니없이 치사하다는 건 알았다. 그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주드는 아니었다. 그리고 해럴드와 줄리아가 자신이 품은 애정만큼이나 그를 사랑한다는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영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봤고, 그의 연기에 대한 칭찬과 동료 연기자들과 촬영 기술에 대한 지적인 논평을 포함한 길고 자세한 감상을 보냈다. (그들이 절대 보지 않은 ㅡ적어도 논평하지 않은 ㅡ 유일한 영화는 주드가 자살하려 했을 때 찍고 있었던 영화 <시나몬 왕자>였다. 그도 그 영화는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에 관한 기사 ㅡ 리뷰와 마찬가지로 그는 기사들도 피했다 ㅡ는 다 읽었고, 그의 기사를 실은 잡지란 잡지는 다 샀다. 생일에는 전화를 걸어 뭘 하면서 축하할 거냐고 물었고, 해럴드는 그가 몇 살이 되는 건지 상기시키곤 했다. 크리스마스에는 늘 책과 함께, 전화할 때나 메이크업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릴 수 있는 웃기는 조그만 선물이나 재치 있는 장난감 같은 걸 보냈다.  - P25

월럼이 얼음 넣은 위스키 두 잔을 들고 돌아온다. 그는 셔츠를 입었다. 잠시 그들은 소파에 앉아 술만 홀짝거린다. 혈관에 열기가 오르는 게 느껴진다. "말해줄게." 그가 윌럼에게 말하자, 윌럼은 고개를 끄덕인다. 말하기 전 그는 몸을 기울여 윌럼에게 키스한다. 평생 그가 먼저 키스한 건 처음이었고, 그는 이걸로 어둠 속에서조차, 회색빛 여명 속에서조차 말할 수 없는모든 것들, 수치스러운 모든 일들, 감사하는 모든 마음을 다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에는 그도 눈을 감는다. 어딘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키스할 때, 섹스할 때 간다고 하는 그곳으로자기도 곧 갈 수 있을 거라 상상한다. 그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이자 보고 싶은 곳, 그에게 영원히 금지되어 있지 않았으면하는 그 세계로. - P60

"알아." 그는 말했다. 그는 늘 맬컴의 집들을 사랑했고, 오래전 그의 열일곱 번째 생일 때 맬컴이 선물로 만들어준 첫 번째집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바보 같지 않아." 맬컴에게 그 집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건 통제력에 대한 주장, 인생의 온갖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는,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을 늘 표현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는것을 상기시켜주는 물건들이었다. "맬컴이 걱정할 게 뭐가 있어?" 맬컴이 뭔가 불안해하면 제이비는 묻곤 했지만, 그는 알았다. 맬컴이 걱정하는 건 살아가는 것 자체가 걱정이기 때문이었다. 삶은 두려운 것, 알 수 없는 것이다. 맬컴의 돈도 완벽한 면역이 될 순 없다. 인생은 그에게 벌어질 테고, 나머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그에 답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그들 모두는 ㅡ맬컴은 자기의 집들로, 윌럼은 여자친구들에게서, 제이비는 그림에서, 그는 면도날로 ㅡ위안을, 자기만의 것을, 세상의무시무시한 거대함, 불가능성, 그 세상의 분들과 시간들, 날들의 가차 없음을 저지할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 P116

삶이 상실을 보상해준다는 해럴드의 주장을 떠올리고, 그 말이옳았다는 걸 깨닫곤 했다. 하지만 때로는 삶이 그냥 보상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없이 과한 보상을 해주는 것 같았다. 마치 인생이 그에게 용서해달라고 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인생을 원망하지 않도록, 인생이 계속 앞으로 가게 허락해주도록 금은보화를 쌓아놓고 온갖 아름답고 근사하고 바라던 물건들로 그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친절하게 대해주는사람들을 따라갔다. 또 사람들을 믿었다. 다시 섹스를 했다. 구원을 희망했다. 물론 매번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건 옳은 선택이었다. 그는 자주 과거의 교훈을 무시했고, 그로 인해보상받았다. 그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섹스마저도 희망을 가지고 했으니까, 그에게 모든 걸 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했으니까. - P203

윌럼과 연인이 된 직후 어느 날 밤, 그들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만 격식 없이 모여 시끄럽게 즐기는 리처드의 디너파티에 가 있었다. 제이비와 맬컴과 블랙 헨리 영과 아시안 헨리영과 페드라와 알리와 그들의 남자친구, 여자친구, 남편, 부인들이 다 와 있었다. 부엌에서 리처드가 디저트 준비하는 걸 돕고 있는데, 약간 술에 취한 제이비가 들어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뺨에 키스했다. "주디" 그가 말했다. "너 결국 정말 다 가졌구나, 안 그래? 일, 돈, 아파트, 남자, 어떻게 그렇게 운이 좋냐?" 제이비가 그를 보고 싱긋 웃었고, 그도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윌럼이 그 말을 듣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윌럼은 그말을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보다 인생이 수월하고, 주드는 그누구보다 더 복 받은 사람이라는 제이비의 확신과 질투로 받아들이고 짜증을 낼 게 뻔했기 때문이다. - P203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제이비 나름의 아이러니, 축하 방식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과다하지만 그가 깊이 감사하고 있다는 걸 두 사람 다 아는 행운에 대한 축하. 정직하게 말하면, 제이비의 질투에 기분이 우쭐하기도 했다. 제이비 눈에 그는 비참한 달리기로 엄청난 보상을 받은 절름발이가 아니었다. 제이비에게 그는 부럽기만 할 뿐, 동정할 거리는 전혀 없는 동등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제이비 말이 맞다. 어쩌다 그는 그렇게 운이 좋았을까? 어쩌다 이 모든 걸 다 가지게됐을까? 절대 알 수 없다. 언제나 궁금할 것이다.
"모르겠어, 제이비." 그는 미소 지었고 먼저 자른 케이크 한조각을 주면서 말했다. 식당에서는 윌럼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가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수한 기쁨의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알잖아, 난 평생 운이 좋았거든."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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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케일럽은 그의 걸음걸이는 싫어하지만 휠체어는 혐오한다. 케일럽이 처음 낮에 집에 왔던 날, 그는 아파트를 구경시켜줬다. 그는 그 아파트가 자랑스러웠고, 매일 거기서 사는 게 감사했고, 그게 자기 것이라는 게 계속 믿기지가 않았다. 맬컴은 윌럼 방 ㅡ그들은 그렇게 불렀다ㅡ은 그 자리에 그대로 뒀지만 더 확장해서 엘리베이터 가까운 북쪽 구석에 서재를 덧붙였다. 그러고는 피아노가 놓인 길고 개방된 공간과 남향 거실, 창문들이 없는 북쪽에 맬컴이 디자인해서 놓은 테이블이 있고, 그 뒤로는 부엌까지 벽 전체를 책장이 덮고 있었는데, 거기에는친구들, 그리고 친구들의 친구들의 작품들과 여러 해에 걸쳐 사들인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아파트 동쪽은 모두 그의 공간이었다. 침실에서 북쪽 방향으로 옷방을 가로지르면 동향과 남향 창문이 있는 욕실이 나온다. 아파트의 블라인드는 대부분 내려놓지만 한꺼번에 열릴 수 있게 되어 있고, 그러면 공간 전체가 환한 빛의 사각형 같고 자신과 바깥세상 사이의 베일이 홀릴 듯이 - P466

알게 느껴진다. 종종 이 아파트 자체가 거짓 같은 기분이 든다.
아파트를 보면 그 주인이 열려 있고 활기 넘치고 뭐든 대답해주는 사람일 것 같지만, 그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반쯤 가려진 골방들과 어두침침한 미로들과 너무 여러 번 칠해서 나방과벌레가 페인트 층들 사이에 매장되어 생긴 울퉁불퉁한 이랑과기포가 만져지는 벽들이 있는 리스페너드 스트리트가 그를 훨씬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 공간이다.
케일럽이 오기 전 그는 아파트에 햇빛이 희미하게 반짝이도록 해뒀고, 케일럽은 그걸 보고 경탄했다. 그들은 천천히 아파트 안을 돌아봤고, 케일럽은 미술작품들을 구경하며 어디서 샀는지, 누가 만든 건지 물었고, 자기가 알아볼 수 있는 작품들에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P467

그는 내내 자신의 오만, 다른 사람들이 가진 걸 자기도 가질수 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일종의 벌을 기다리고 있었고, 여기-마침내 그게 온 것이다. ‘이게 네가 받을 대가야.‘ 머릿속 목소리는 말했다.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대가야.‘ 제이비가 잭슨을 얼마나 두려워했었는지 생각난다. 그는 제이비의 공포를, 다른 인간에게 꼼짝없이 잡힐 수 있다는 그 공포를 너무나 잘 이해했다. 너무 쉬워 보이는 것-그냥 떠나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수 있는지 그는 안다. 예전에 루크 수사에게 느꼈던 감정을 케일럽에게 느낀다. 경솔하게 자신을 맡긴 사람, 너무 큰 희망을 걸었던 사람, 자기를 구해주길 바랐던 사람.  - P477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게 분명해졌을 때도, 희망이 썩어 들어갔을 때도, 그는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떠날 수가 없었다. 그와 케일럽은 잘 맞아떨어지는 짝이다. 망가진 사람과 망가뜨리는 사람, 쓰레기 더미와그 주위를 킁킁대는 자칼이다. 그들은 서로에게만 존재한다. 그는 케일럽 인생의 어떤 사람도 만나지 않았고, 자기 사람들에게도 케일럽을 소개시키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게 뭔가 창피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은 혐오와 불쾌감으로 서로 묶여 있다. 케일럽은 그의 육체를 참아주고, 그는케일럽의 혐오를 안내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면, 교환을 해야만 한다. 늘 알고 있다. 앞으로도 케일럽 이상의 사람은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케일럽은 기형도 아니고 사디스트도 아니다. 지금 그가당하는 일들 중 이전에 당해보지 않은 일들은 없다. 그는 이 생각을 되새기고, 또 되새긴다. - P477

고통과 공포로 문틀 가장자리를 붙들고 애처롭게 호소하고있는데, 케일럽이 뒤로 물러났다가 달려오는 게, 보이는 게 아니라 들린다. 그의 발이 그의 등을 차고, 그는 캄캄한 계단 안으로 날아간다. 
솟구쳐 오르는 순간 갑자기 카센 박사가 생각난다. 딱히 카센박사 생각이라기보다는 그의 지도를 받으려고 신청할 때 그가 했던 질문이 생각난다. 가장 좋아하는 공리가 뭔가? (얼간이 골라내기 질문이라고, 시엠은 한때 말했었다.)
"등식의 공리입니다." 그가 말하자 카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공리지." 그는 말했다. - P497

등식의 공리란 X는 항상 X와 같다는 것이다. 이 공리는 X라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항상 자신과 등치해야 한다고, 자신만의 독특성을 가진다고, 도저히 환원할 수 없는 어떤 성질을지니고 있어서 그것은 항상 절대적으로, 불변으로 그 자신과 등치한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고, 그 기본성이 절대 바뀔 수 없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 항상, 절대, 결코, 이것들은 숫자들만큼이나 수학의 세계를 구성하는단어들이다. 모두가 등식의 공리 - 리 박사는 한번은 그걸 수줍고 새침한 공리, 공리계의 나체부채춤이라고 불렀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늘 그 공리의 알 듯 말 듯한 측면이, 그 방정식 자체의 아름다움이 그걸 증명하려는 시도에 의해좌절된다는 게 늘 마음에 들었다. 그건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있는,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쉽게 인생 전체가 될 수있는 그런 공리였다. - P497

하지만 이제 그는 그 공리가 얼마나 진실한지 확실히 이해한다. 그 자신, 그의 삶 자체가 그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늘 현재의 나다. 그는 깨닫는다. 문맥은 바뀔 수 있다. 이 아파트에서 살 수도 있고, 즐겁고 보수도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부모와 친구들도 있을 수 있다. 존경받을 수도 있다. 법정에서는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똑같은 사람,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사람, 미움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공중에 떠 있는 그 찰나의 순간, 높이 떠 있는 황홀함과 끔찍할 게 분명한 착륙 사이에서, 그는 x는 항상 x와 같을 거라는 걸 이해한다. 그
가 뭘 하든, 수도원에서, 루크 수사로부터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돈을 얼마나 많이 벌든 얼마나 잊으려고 노력하든, X는 항상 X와 같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의 어깨는 우지직하며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치고, 순간 고맙게도 세상이 그의 아래에서 휙 멀어져간다. x=x, 그는 생각한다. x=x, x=x. - P498

"일주일‘에 몇 번!" 나는 말하다 뚝 멈췄어. 갑자기 거기서나갈 수밖에 없었어. 의자에서 코트를 들고 가방을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어. "돌아올 때 여기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난 나가버렸어. (주드는 도망자였거든. 줄리아와 내가 자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다고 생각할 때마다. 최대한 빨리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려고 애썼어. 마치 자기가 얼른 치워야 하는 불쾌한 물건인 것처럼.)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해변으로 갔고, 자신의 한없는 무능함을, 명백한 잘못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그런 분노를 느끼며 모래사장을 헤맸어. 그때 처음으로 주드가 우리 옆에서 두 사람처럼 사는 한, 우리도 그냥 주드 옆에 있는 두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지. 우린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봤고 다른 건 그냥 안 봤어.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워, 그 사람들 불행은 우리 불행이고, 그 슬픔은 이해할 수 있고 한 번씩 자기혐오에 빠져도 그건 빨리 지나가고 타협할 만하지. 하지만 주드는 그렇지 않았어. 그의 문제들을 진단하는데 필요한 상상력이 없어서 도와줄 방법조차 알 수가 없었어.
하지만 이건 그냥 변명에 불과해. - P525

난 그걸 묵인했어. 그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걸 잊어버리기로 한 거야.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해결책을 찾는게 너무 힘들어서, 나 편한 대로 그를 보고 싶어서 말이야.
그가 수천 번의 밤 동안 자기 존엄성을 희생하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려 하면서도, 내가 그의 존엄을 지켜주고 있다고 변명했어. 그런 게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반박하고 설득하려고 했고, 그걸 알면서도 다른 방법, 더 과격한 방법, 나와 주드를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는 방법을 취해보려 하지 않았어. 내가겁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 그 가방에 대해서, 그날 밤 트루로에서 알게 된 사실에 대해 줄리아에게 절대 말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결국에는 줄리아도 알게 됐고, 줄리아가 그렇게 화내는모습은 정말 거의 보지 못했어. "이런 걸 어떻게 계속 내버려둘수가 있어?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내버려둘 수 있었어?" 내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묻지는 않았지만, 난 알았어. 어떻게 안그럴 수 있겠어? 나도 그랬는걸.
이제 난 여기 주드의 아파트로, 몇 시간 전 내가 아직 잠에서깨서 누워 있을 때 그가 두들겨 맞고 있던 곳으로 돌아왔어. 나는 손에 전화를 들고 소파에 앉아서 앤디가 주드가 집에 돌아갈준비가 다 됐다고, 병원에서 나와 내 간호를 받을 준비가 됐다고 전화해주길 기다렸지. 블라인드를 걷고 앉아 강철 같은 하늘을 바라봤어. 구름이 다음 구름과 합쳐지면서 흐릿해졌고, 마침내 낮이 서서히 밤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회색 안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 P531

잊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상상력없게도) 아치형 천장을 상상했고, 하루가 끝나고 나면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미지들과 장면들, 말들을 모아 무거운 쇠문을 빼꼼 열고 서둘러 그것들을 몰아넣은 다음 재빨리 단단히 닫았다. 하지만 이 방법은 별로 효과적이지 않아서, 그래도 기억들은 서서히 새어 나왔다. 중요한 건 그저 저장하는 게 아니라 없애는 거라는 걸. 그는 깨닫게 됐다.
그래서 그는 해결책을 발명했다. 어떤 기억들ㅡ 사소한 무시, 모욕ㅡ은 무효가 될 때까지, 너무 많이 반복해서 거의 의미가없어질 때까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고 자기는 방금 들었을 뿐인 일이라고 믿게 될 때까지 되새기고 또 되새긴다.
더 큰 기억들은 필름 조각들처럼 머릿속에 담고 있다가 한 커트, 한 커트 지워나가기 시작한다. 둘 다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삭제 작업 중간에 멈추고 자기가 뭘 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기억의 일부를 펼쳐보기 시작하면서 과거 일들의 덫에 걸리지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밤마다 그 작업을 해야 한다.
물론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더 멀어졌다. 좀 봐달라고 잡아당기고, 무시하면 눈앞에 뛰어들고,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해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게 불가능해질 지경으로 유령처럼 따라다니지 않게 된다. - P555

그는 오랫동안 기다렸고, 조금 울었다. 피곤하고 겁에 질렸기 때문에, 갈 준비가 떠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그는 눈을 비비고 시작했다. 왼팔부터 시작했다. 먼저 한 줄을그었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아파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를 그었다. 스카치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피는 끈적끈적했다. 액체라기보다는 젤라틴 같았고, 환하게 어른어른 빛나는 오일 같은 검은색이었다. 바지는 벌써 피에 흠뻑 젖었고, 칼을 잡는 손에 이미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는 세 번째 선을그었다.
양쪽 팔을 다 끝내고 나자, 그는 샤워실 벽에 털썩 기댔다. 난데없이 베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카치와 자기가 흘린 피 때문에 몸이 더웠고, 다리를 돌며 웅덩이를 이룬피가 몸에 부딪혀 출렁거렸다. 몸 안쪽과 바깥쪽의 만남, 안쪽이 바깥쪽을 씻어주고 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뒤에서 하이에나들이 그를 향해 사납게 울부짖었다. 앞에는 문 열린 집이 있었다. 아직은 가깝지 않았지만, 전보다는 가까웠다. 안이 보일정도로 가까웠다. 쉴 수 있는, 오랜 달리기 후에 누워서 잠들 수있는, 그리고 평생 처음으로 안전할 수 있는 침대가 보였다. - P574

그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이건 윌럼이야. 그는 되뇌었다. 윌럼은 절대 널 해치지 않을 거야, 절대. 때가 됐어. 때가.
"좋아." 그는 마침내 말했다. "좋아. 물어봐."
그는 윌럼이 의자에 기대앉아 그를 쳐다보며, 한 친구가 다른친구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하는. 하지만 절대 질문을 허락받지 못했던 수백 가지 질문들 중 무엇을 고를 건지 고심하는 모습을 봤다. 그러자 눈물이 고였다. 자기가 이 우정을 이렇게 치우치게 만들어서, 그가 달아날 때도, 근원을 밝힐 수 없는 문제들로 도움을 요청할 때도 한 해 또 한 해 윌럼이 너무나 오랫동안그의 옆을 지켜줘서 눈물이 났다. 새 인생에서는 친구들에게 덜요구하겠다고, 더 베풀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친구들이 무엇을원하든 줄 것이다. 윌럼이 정보를 원하면 받게 될 거고, 그 정보를 어떻게 줄지 궁리하는 건 그에게 달린 일이다. 그는 상처 받고 또 상처 받겠지만 ㅡ 모두가 그렇다 ㅡ노력하려면, 살아 있으 - P608

려면, 더 강해져야 했다. 준비해야 했다. 이게 삶이라는 거래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어야만 했다.
"좋아, 하나 생각했어." 윌럼이 말하더니, 똑바로 앉아 준비했다. "손등에 상처는 어떻게 하다 생긴 거야?"
그는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질문이 뭐가 될지 몰랐지만, 막상 주어지자 마음이 놓였다. 요즘에는 그 흉터는 거의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그는 호박단처럼 반질반질 윤나는 상처를 바라보며 손가락 끝으로 쓸었고, 그 흉터가 얼마나 많은 다른 문제들로, 그리고 루크 수사에게로, 그리고 고아원으로, 그리고 필라델피아로, 그 모든 것들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에서 더 크고 더 슬픈 다른 이야기와 연결되지 않은게 뭐가 있단 말인가? 윌럼이 묻는 건 그저 이 이야기 하나였다. 다른 모든 것들, 으르렁대는 거대하고 추한 문제점들을그 뒤로 끌고 들어올 필요 없었다.
그는 입을 열기 전 머릿속에서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어떻게 이야기를 엮어나갈지 생각했다. 마침내 그는 준비가 됐다.
"난 항상 욕심 많은 아이였어."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식탁너머에서 윌럼이 팔꿈치를 기대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친구가 된 이래 처음으로 윌럼이 청자,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됐다. - P609

애너를 믿게 되고 나서, 그는 루크 수사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해줬다. 하지만 다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에게도이야기하지 않았다. 자기가 바보여서 루크를 따라갔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루크는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끔찍한 짓들을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겪으면서도,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루크가 정말로 그를 사랑했다고, 그 부분만은 정말이라고, 곡해나 합리화가 아니라 진짜라고 믿고 싶었다. 그는 애너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듯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괴물이었어, 주드 사람들이 널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널 조종하기 위해서야. 모르겠어? 그게 소아성애자들이 하는 짓이야.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먹이로 삼는 거라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루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그는 나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른 수사들보다 더 나빴나? 그가 ‘정말로‘ 잘못된 결정을 했나?
수도원에 있었더라면 ‘정말로‘ 더 나았을까? 거기 있었다면 더망가졌을까, 덜 망가졌을까? 루크의 유산은 그가 하는 모든 것, 그의 존재 자체에 남아 있었다. 책과 음악, 수학, 정원일, 언어에 대한 사랑 ㅡ그건 루크였다. 자해, 증오심, 수치심, 두려움,
병, 정상적인 성생활을 할 수 없는,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는것 ㅡ 그것도 루크였다. 루크는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 법을 가르쳐줬고, 한편으로는 즐거움을 완전히 제거해버렸다.
그는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때때 - P618

로 그 생각을 했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도, 루크의 미소 짓는 얼굴이 순식간에 마법처럼 떠오르곤했다. 그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있던 시절, 그가 너무 순진하고 너무 외롭고 너무 애정이 그리운 어린아이여서 아무것도 모른 채 유혹당하던 시절의 루크를 생각했다. 그는 온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문을 열고 있었다. 꽃들의 온기와 향기가 그를 망토처럼 둘러쌌다. 그건 그가 그토록 소박하게 행복했던, 복잡할 것 전혀 없는 기쁨을 알았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우리 꼬마 미남이 왔구나!" 루크는 외쳤다. "아, 주드 ㅡ널 보니 너무 행복하다."


<2권에 계속> - P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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