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미
김천의료원 6인실 302호에 산소마스크를 쓰고 암투병 중인 그녀가 누워 있다 바닥에 바짝 엎드린 가재미처럼 그녀가 누워 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한 마리 가재미로 눕는다 가재미가 가재미에게 눈길을 건네자 그녀가 울컥 눈물을 쏟아낸다 한쪽 눈이 다른 한쪽 눈으로 옮아 붙은 야윈 그녀가운다 그녀는 죽음만을 보고 있고 나는 그녀가 살아온 파랑 같은 날들을 보고 있다 좌우를 흔들며 살던 그녀의 물속 삶을 나는 떠올린다 그녀의 오솔길이며 그 길에 돋아나던 대낮의 뻐꾸기소리며 가늘은 국수를 삶던 저녁이며 흙담조차 없었던 그녀 누대의 가계를 떠올린다 두 다리는 서서히 멀어져 가랑이지고 폭설을 견디지 못하는 나뭇가지처럼 등뼈가 구부정해지던 그 겨울 어느 날을 생각한다 - P40
그녀의 숨소리가 느릅나무 껍질처럼 점점 거칠어진다 나는 그녀가 죽음 바깥의 세상을 이제 볼 수 없다는 것을 안다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으로 캄캄하게 쏠려버렸다는 것을 안다 나는 다만 좌우를 흔들며 헤엄쳐 가 그녀의 물속에 나란히 눕는다 산소호흡기로 들이마신 물을 마른 내 몸 위에 그녀가 가만히 적셔준다 - P41
가재미 2
꽃잎, 꽃상여 그녀를 위해 마지막으로 한 벌의 옷을 장만했다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옷, 꽃상여 그녀의 몸은 얼었지만 꽃잎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있다
두꺼운 땅거죽을 열고 독 같은 고요 속으로 천천히 그녀가 걸어 들어가 유서처럼 눕는다 울지 마라, 나의 아이야 울지 마라 꽃상여는 하늘로 불타오른다 그녀의 몸에서 더 이상 그림자가 나오지 않는다
붉은 흙 물고기
상두꾼들이 그녀의 무덤을 등 둥근 물고기로 만들어주었다 세상의 모든 무덤은 붉은 흙 물고기이니 물 없는 하늘을 헤엄쳐 그녀는 어디로든 갈 것이다 - P42
개를 데려오다
석양 아래 묶인 한 마리 개가 늦가을 억새 같다 털갈이를 하느라 작은 몸이 더 파리하다 석양 아래 빛이 바뀌고 있다 그녀가 정붙이고 살던 개를 데리고 골목을 지나 내집으로 돌아오다 - P43
가재미 3. ㅡ아궁이의 재를 끌어내다
그녀의 함석집 귀퉁배기에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방고래에 불 들어가듯 고욤나무 한 그루에 눈보라가 며칠째 밀리며 밀리며 몰아치는 오후
그녀는 없다. 나는 그녀의 빈집에 홀로 들어선다
물은 얼어 끊어지고, 숯검댕이 아궁이는 퀭하다
저 먼 나라에는 춥지 않은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끌어낸다
이 세상 저물 때 그녀는 바람벽처럼 서럽도록 추웠으므로 - P44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식은 재를 끌어내 그녀가 불의 감각을 잊도록 하는 것
저 먼 나라에는 눈보라조차 메밀꽃처럼 따뜻한 그녀의 방이 있는지 모른다
저 먼 나라에서 그녀는 오늘처럼 밖이 추운 날 방으로 들어서며 맨 처음 맨손바닥으로 방바닥을 쓸어볼지모르지만, 습관처럼 그럴 줄 모르지만
이제 그녀를 위해 나는 그녀의 집 아궁이의 재를 모두 끌어낸다
그녀는 나로부터도 자유로이 빈집이 되었다 - P45
바닥
가을에는 바닥이 잘 보인다 그대를 사랑했으나 다 옛일이 되었다 나는 홀로 의자에 앉아 산 밑 뒤뜰에 가랑잎 지는 걸 보고 있다 우수수 떨어지는 가랑잎 바람이 있고 나는 눈을 감는다 떨어지는 가랑잎이 아직 매달린 가랑잎에게 그대가 나에게 몸이 몸을 만질 때 숨결이 숨결을 스칠 때 스쳐서 비로소 생겨나는 소리 그대가 나를 받아주었듯 누군가 받아주어서 생겨나는 소리 가랑잎이 지는데 땅바닥이 받아주는 굵은 빗소리 같다 후두둑 후두둑 듣는 빗소리가 공중에 무수히 생겨난다 - P64
저 소리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 옛일이 되었다 가을에는 공중에도 바닥이 있다 - P65
꽃이 핀다
뜰이 고요하다 꽃이 피는 동안은
하루가 볕바른 마루 같다
맨살의 하늘이 해종일 꽃 속으로 들어간다 꽃의 입시울이 젖는다
하늘이 향기 나는 알을 꽃 속에 슬어놓는다
그리운 이 만나는 일 저처럼이면 좋다 - P80
바람이 나에게
한때는 바람 한 점 없는 날 맑은 날 좋았는데 오늘 바람 많은 평야에 홀로 서 있네 수많은 까마귀 떼가 땅 끝으로 십 리를 가는 하늘 나는 십 리를 가는 꿈도 잃고 나귀처럼 긴 귀를 가진 바람을 보네 다급한 목숨이 있다면 늙은 어머니는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들판을 재우며 부르는 이 거칠은 바람의 노래를 - P114
시인의 말
헤어졌다 만났다 다시 헤어졌다. 손 놓고 맞잡는 사이 손마디가 굵어졌다. 그것을 오늘은 본다.
울퉁불퉁한 뼈 같은 시여,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구나.
2006년 여름 행신동에서 문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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