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랬나. 케이팝과 응원봉의 물결을 보며 축제 같다고. 그런 면도 물론 있지만 이 집회의 가장 깊은 근원을 나는 그 순간에 본 것 같았다. 슬픔. 저마다 지닌 것 중에 가장 빛나는 것을 가지고 나간다는 그 자리에 내가 바로 그것을 쥐고 나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의 무사를 바라며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 남아 밤샘 집회를 하고 있다. 눈 내린다. 파주에도 서울에도 - P85
공식 집회가 끝나고 나는 자리를 떴지만 많은 이들이 어젯밤, 한강진 관저 앞을 떠나지 않았다.
‘한강진 대첩‘과 ‘키세스단‘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아침뉴스를 통해 그들을 보았다. 서울 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날 사람들 몸을 덮은 은박 담요 위로 눈이 쌓여 있었다. 전날처럼 또 누군가는 남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게 많은 이들이 그런 모습으로 밤을 보낼 줄은 몰랐다. 그렇게 다시 서로를 돕고 살피며 밤을 보낼 줄은. 남태령 이후로도 이런 사건을 목격했다는 것은 이 나라 구성원으로서 내가 누리는 복일까. 도대체 이 마음을 어떻게 글이나 말로 정리해야 할지모르겠다. 너무 미안하고. 놀랍고. 고맙고. 그리고 미안하고, 고맙고. - P87
1월 15일 오후 여섯시 칠분 윤석열이 오늘 한남동 관저에서 체포되었다. 오전 열시삼십칠분. 그를 체포하러 공수처가 들고 간 수색영장에 ‘내란우두머리‘로 죄명이 기록되어 있다. - P98
목적이 뭘까. 뉴스를 읽고 보는 동안 어리벙벙해 계속 생각했다. 이 폭동이 자기들 목적에 어떻게 이로울 수가 있나, ‘국민의 저항권‘(저항권이야, 씨발)을 운운한 모양인데 어떻게 이토록 멍청할 수가. 영상 뉴스를 끝까지 보기가 어려웠다. 떼로 모여 바글바글 들끓는 것 같은 뒷모습들을 보며 여러번 껐다 말았다했다. 그 폭력들이 화면을 넘어 바로 곁으로 다가오는 것같았다. 법원 안을 뒤지고 돌아다니며 구속영장을 발부한판사의 이름을 외치는 목소리가 너무 끔찍했다. 그 말투, 그 거리낌 없음, 그 오만함, 반드시 찾아내 치명적 상처를 입히고 말겠다는 적의며 앙심. 굳이 책상을 밟고 올라가 사무용품들을 내던지고 발로 차는 모습도 그 모든 게 내게는 정치적 입장의 표출이 아니고 어떤 욕구를 충족하려는 영역 표시로 보였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고, 세상에 그 모습을 흩뿌리는 것 외에 목적이랄 게 없는 파괴들. - P101
현장에서 체포된 사람 중 절반 이상이 이삼십대 남성이라는 뉴스 보도가 있었다. 같은 세대 여성들이 이 나라 민주주의와 헌법을 지키려고 추운 날 거리를 돌아다니고 서로를 돌보며 밤을 새우고는 할 때, 저들은 비틀린 세계인식과 자아 인식으로 국가기관인 사법부에서 난동을 부렸다. 대가를 치를 것이다. 동시에 이 광경을 봐야 하는 사회구성원들도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누가 그들에게 그렇게 해도 된다고 가르쳐온 걸까. 1월 19일 새벽, 우리 사회가 그간 육성해온 일부가 크게 자라나 이 괴상망측한 열매를 거뒀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다, 이것도 과정이지, 결과도 아닐 것이다. 젊은 남성들의 이 고집스러운 고립이 징그럽다. 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냉소와 혐오와 자기연민과 기만으로 가득한그들이 놀이 삼아 자신과 타인의 삶을 조롱하고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이제 더 보고 싶지 않다. 불법 계엄이라는 국가폭력이 그들과 너무도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스펙트럼으로 이 내란을 보면 윤석열이 그들의 일면이기도 할 테니까. - P102
2월 27일 목요일 오후 여덟시 오분 지난 2월 25일. 헌법재판소에서 윤석열 탄핵 재판의 최후 변론이 있었다. 국회 측 대리인인 장순욱 변호사의 최후 변론이 내게무척 아름다웠다. "오염"이라는 말로 내 상처의 원인을 부드럽게 짚어주는 것 같았다. 말헌법의 오염. 바로 그것을 내가 견디기 어려웠다. 정확한 말이 건네는 위안을 받았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피청구인은 자유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언동을 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말했습니다. 헌법을 파괴하는 순간에도 헌법 수호를 말했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헌법의 말, 헌법의 풍경을 오염시킨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노래 가사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 풍경 중에서 제일 아름다운 풍경,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이 노랫말처럼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우리도하루 빨리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그 첫 단추가 권력자가 오염시킨 헌법의 말들을 그 말들이 가지는 원래의 숭고한 의미로 돌려놓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국민과 함께 이 사건 탄핵 결정문에서피청구인이 오염시킨 헌법의 말과 헌법의 풍경이 제자리를찾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 P112
3월 7일 금요일 오후 여섯시 이십오분 윤석열의 구속이 취소되었다. 지귀연 판사,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5부 재판장.
어제는 경찰 쪽에 윤석열 라인이 대거 승진했다는 뉴스가 있었는데 오늘 법원에서 이런 판결이 있으니 몹시 불안하다. 사람들이 어떤 노력을 해 그를 구속했는데, 한 판사가, 전례 없고 법에도 없는 방식으로 구속 기간을 ‘날‘이 아닌 ‘시간‘으로 셈을 해 그를 석방하기로 했다. 각종 뉴스에 출연한 법조계 사람들도 이유를 몰라 당혹스럽다는 반응이다. 이 상황을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시민들의 불안이 얼마나 큰가. 사회를 향한 이 불신의 값을 누가, 어떻게 치르나. 그저 한때 공부를 잘해 그 자리에 들어간 한 사람이, 한사회 시스템과 공동체의 정서를 이렇게나 뒤흔들고 있다. 계속, 계속. 이것 봐. 나는 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싶은 사람도 아닌데. 시스템이 고루하다고 믿는 입장이고,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인데. 이 시국의 몇몇 사람들이 내게 다른 입장을 - P113
가능하지 않게 만든다.
읽을 책을 고르려고 책장을 넘기다가 우연히 본 문장. "연결성이라는 사슬로 이어져 모두가 동등하다." 나도 이런 말을 쓰고 싶다. 이런 시선과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인간을 향해 돌돌 구부러드는 생각은 접어두고, 보고 듣는 것만을, 찰나의 생각만을 기록하며, 삶이 내게 주는 감각을 편견 없이 흠뻑 음미하고, 그렇게 살고, 쓰고 싶다. 그런데 자꾸 더러워진다. 산다는 건 결국 더러워진다는 것이지만, 더러운 도랑물을 마시며 사는 것이지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물줄기, 다른삶에서 내 삶으로 흘러드는 물을, 타인의 삶에서 흘러나온피가 스며든 도랑의 물을 내 도랑의 물로 받아 마시며 사는 일이고, 그래서 내가 받아들이거나 말거나 삶이란 끊임없이 더러워지는 일이지만. 이런 오염은 싫다. - P114
이름들을 기록해두고 싶다. 윤석열, 한덕수, 최상목, 심우정, 이제 지귀연.
공부를 잘한다는 건 뭘까. 내란 이후로 엘리트 카르텔과 부패의 면면을 이렇게 속속 확인하고 보니 이 사회의 ‘공부‘가 틀렸다는 걸 새삼, 정말로 뼈가 아프게 알겠다. 이제 이 사회에서 어떤 이가 공부를 잘하고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건, 그를 양육한 보호자들에게 경제적, 문화적, 인적자원이 충분했다는 것 말고,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그가 구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안심되는 일이었는가를 오늘 알겠다. 윤석열이 구속되고 내가 꼬박 이틀을 잤다. 계엄 이후로 오늘이 가장 불안하다. - P115
3월 10일 월요일 오후 세시 사십이분 윤석열은 금요일에 구속 취소가 결정되고 하루도 되지않아 석방되었다. 일주일은 구속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며그 사이에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판결이 있을 수 있다는희망 어린 예측들이 있었으나 그는 석방을 미리 준비한 것처럼 바로 빠져나갔다. 개선장군처럼 퍼레이드를 하며,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초법적 존재들. 초법적 운명 공동체들. 초법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며 온갖 위법한 일을저지른 자들이 법의 보호를 이토록 꼼꼼하게 받아내고 있다는 것이, 내게 너무나 큰 무력감을 안긴다. 이 사회에 강고하게, 혹은 헐겁더라도 분명하게 장벽으로 존재했던 상식, 규범, 법규. 하지만 어떤 이들은 그 모든 것을 홀로그램인양 관통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걸 지금 매일 목격하고 있다. 저들에게는 저들의 도덕률이 있다. 나머지 다수의 세계가 비난하고 경악해도, 자기들끼리는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주고받고 납득하는, 되니까 되는, - P116
어떤 도덕, 어떤 상식, 어떤 자연율이 저들에게 따로 있다.
윤석열이라는 이름으로 일기를 시작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매일 부르고 싶다.
정신에 척력으로 작용하는 이 괴리를 다스리려고, 고사리 화분을 책상 근처에 잔뜩 가져다두었다. 이게 내 요즘의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을 보고자, 그런 것을 곁에 두고자하는 욕심으로 고사리를 키우고 있다. 매일 만지고, 물을 주고, 흙 상태를 살핀다. 다바나 고사리가 가장 좋다. 만지면 고불고불한 잎이 종이처럼 사각거린다. 블루스타펀의 제멋대로 뻗친 청록색 이파리들도 그 굴곡이 멋지고 사자 고사리의 애교가 느껴지는 긴 줄기도, 에버잼 고사리의 기세있는 초록도 모두 좋다. 그간 적록색 잎에 분홍 반점이 흩어진 베고니아 잎의 아름다움을 알아보게 되었고 필로덴드론 이파리 두장 사이로 새 잎이 올라오는 것을 기대하며 기다리게 되었다. 스푼 아이비도 한 포트 받았는데 나는 아이비와 관계가 좋지 못해서 잘 클지 좀 걱정이다. - P117
윤석열의 석방 장면이 내게 그랬던 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안긴 충격이 상당한가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까지 매일 동십자각에서 저녁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다.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는 메시지인 것 같다. 내란에 저항하는 모두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지난 토요일 집회에서는 비상행동 의장단이 단식투쟁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동십자각 앞에서 듣고 눈물이 찔끔 났다. 사람들이 또 몸을 다치는구나. 그게 싫다. 이날 행진은 평소보다 좀 길었는데 김보리는 잘 걷지 못했다.
오늘도 수 차례 가정한다. "탄핵이 인용되지 않는다면" 자,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걸 고민하면서 살아야하겠지. 지금보다 더.
머릿속이 맑지 않다. 제대로 생각하고 싶다. - P120
4월 4일 금요일 시간기록없음 윤석열이 오늘 파면되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 일치로 오전 열한시 이십이분에 선고되었다.
불신과 환멸과 걱정과 불안으로 말라 죽을 것 같던 마음이 단숨에 차올랐다. 세상을 향한 감이 그렇게 또 뒤집혀서, 나는 정말 얄팍하구나, 생각했다. 헌재 앞에 모인 사람들의 함성을 뉴스로 들었다. "당신들하고 동시대를 산 덕분에 이걸 보았어, 영광입니다." 그 말을 내 집 거실에서 광장의 함성에 보탰다.
그 이름으로 시작되는 마지막 일기가 되기를 바라며 이만 마침. - P1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