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록강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강물은 조금도 사납거나 험한데가 없다. 세상에 이처럼 유순한 흐름과 명징한 물빛을 가진 강이 또 있을까 싶다. 예로부터 압록강을 ‘처녀의 강‘이라고 불렀다는이유도 알 만했다. 압록강은 한반도에서 제일 긴 강이다. 전체 길이는 925.5킬로미터다. 직선거리로는 400킬로미터 정도이나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중국의 임강(린장), 우리나라 중강진에 이르는 상류 쪽이 심한 곡류를 이루므로 실제 강 길이는 직선거리의 두 배에 가깝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압록수(鴨綠水)로 나오는데, "물빛이 오리머리색과 같다"며 압록수로 바뀌었다. - P218
이에 반해 대동여지도에는 대총강(大摠江)으로 나와 있어 중국문헌에 나오는 명칭과 고구려 이래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에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압록鴨綠)‘이란 이름은 ‘크다‘는 의미를 지닌 아리(阿利)에서 나온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압록이라 했고 중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야뤼(鴨綠)‘로 불려 영어로는 ‘얄루(Yalu)‘라고 표기되고 있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그날도 압록강은 짙푸른 빛을 띠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강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니 민둥산 산비탈에 옥수수들이 힘겹게 자라고 있었다. 느린 동작으로 옥수수를 따고 있던 북한 주민들이 - P218
하던 일손을 멈추고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산장성은 단동에서 북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호산(虎山)에 있다. 호산은 표고 146미터 정도 되는 낮은 산인데 산의 생김새가 마치 누워 있는 호랑이 모습과 같다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산은 낮아도 여기에 오르면 압록강 북쪽으로 펼쳐지는만주 벌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쌓은고구려 박작성이 지금은 호산장성으로 불리고 있다. - P219
(백두산 천지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저 산줄기를 넘으면 우리가 답사를 시작한 심양에 이르게 된다. 그 주변에 산 하나 없는 너른 평원이 바로 요하평원이다. (...) 요하를 건너면 다시 요서 산지와 그북쪽으로 대흥안령산맥이 펼쳐지니, 이곳의 초원을 터전으로 삼아살아온 사람들이 동호족(東)이다. 흉노족의 동쪽에 거주하였기때문에 ‘동쪽의 오랑캐‘란 이름이 붙여졌으니, 시대에 따라 선비. 오환 • 거란 • 실위 • 몽골족으로 불렸다. 역사상에 유명한 요나라와 원나라, 그리고 남북조시대의 북조 국가들인 북위(北)·북주(北周)·후연(後燕)과 같은 나라들을 세운 주인공들이다. 그중 북위(386~534)를 세워 중국의 반을 150년간 지배했던 선비족의 탁발씨들은 스스로 한화(化)되어 역사 속에 사라졌다. - P227
이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역시 산줄기 저 너머에 목단강과 송화강 하류에 형성된 분지들이 등장한다. 거기에 뿌리를 박고 살아왔던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숙신족(肅愼族)이라 부른다. 이들도 시대에 따라 읍루. 물길 · 말갈. 여진· 만주족으로 불리면서, 발해건국에 참여하였고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다. 지금 만족(滿族)이 - P228
라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 후예이다. 이 두 집단을 사이에 두고 만주 한가운데에 살림을 차린 사람들이 예맥족(濊貊族)이다. 송화강 중류에 자리 잡았던 부여, 압록강 중류에서 일어난 고구려, 그 후예가 말갈과 연합하여 세운 발해가바로 이들이 건설한 나라이다. 한반도의 6배가 넘는 광활한 대지에 역사를 꾸려갔던 주인공은 이처럼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뉜다. 우리의 핏줄이 된 예맥족은 동부의 숙신족, 서부의 동호족을 좌우의 날개로 삼으며, 지금의 길림성과 요동지방을 무대로 오르내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발해의 멸망과 함께 그들의 발자취는 한반도로 움츠러들어버렸고, 그 대신에 중원의 한족(漢族)들이 그 자리를 메워버렸다. - P229
"앞으로 우리는 본격적으로 고구려 유적을 보게 될 것인데, 고구려적인 신비감이나 스케일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두 곳 있습니다. 어디일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질문에 일행들은 저마다 고구려의 시각적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 같았다. 광개토대왕릉비, 장수왕릉인 장군총, 수렵도로 유명한 고구려 고분벽화...... 그러나 송 교수의 답은 달랐다.
"하나는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이고, 또 하나는 집안에 있는 적석총입니다. 집안 통구에 가서 수천 기의 고구려 적석총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장대함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경주의 신라왕릉과는 또 다른 역사적 신비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우리가 오르게 될 환인의 오녀산성에서는 주변을 압도하는 풍광에 절로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웅혼한 기상을 느끼며 고구려 시조 주몽이 왜 이곳을 첫 도움으로 택했는지 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 P231
산 정상 못미처에는 천지(天池)라는 큰 못(높이 12미터, 너비 5미터, 깊이 2미터)이 있었다. 산성의 필수가 우물인데 여기는 아예 사철 마르지 않는 천지가 있으니 산성으로 이보다 더 좋은 입지는없을 성싶다. 정상에 다다르니 거짓말처럼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높이1천 미터, 폭 3백 미터에 달하니 잠실운동장 서너 개를 옮겨놓은 넓이다. 여기에 왕궁터, 병사 주둔지, 장대 등 많은 성곽시설 건물들이 있던 자리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정말로 놀라웠다. 내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삼국시대 산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장엄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봉황산성(오골성), 호산장성(박작성), 환도산성, 안시성, 요동성 등 고구려의 수좋은 산성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었다. - P235
귀국 후 일행들이 돌아가며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면 한결같이 ‘집안에서 추석을 하루 앞둔 보름달빛 아래 보았던 압록강 건너 만포 땅 미루나무 늘어진 강마을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격한감격들을 말했다. 여기가 국경의 마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가볍게 불어오는 온화한 가을바람을 맞으면서 절로 ‘집안은 과연 만주의 강남으로 4백년 도읍지가 될 만했구나‘라는생각이 들었다. 집안 압록강변의 풍경은 그렇게 평생 잊히지 않는 한 폭의 풍경화로 지금도 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 P254
환도산성의 정문인 남문으로 들어가니 바로 앞에 화강암으로멋지게 쌓은 점장대(將臺)가 나왔다. 점장대에서 산기슭으로 더올라가니 넓은 궁전 터가 나왔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밭이 되어있었다. 좀 더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자 산자락 아래로 수천기의적석총이 무리지어 있었다. 집안 산성하 고분군이었다. 그 장대함은 송기호 교수가 환인의 오녀산성과 함께 고구려의 웅혼한 기 - P266
상을 보여주는 두 가지 중 하나로 지목한 것이다. 경주 신라 대릉원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집체미, 백제의 공주 송산리 고분과 부여 능산리 고분의 우아한 능선과 달리 고구려의 강인함과 장대함이 절로 다가온다. 나는 통구 들판에 무리 지어 있는 적석총이 장대한 파노라마로 전개되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환도산성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곳에는 사과 과수원이 있었다. 아직 수확하지 않은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나무 밭을 무작정 오르고 있는데 저 아래에서 한 할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사과 떨어트린다고 얼른내려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염려 말라는 손짓을 보이고 끝 - P267
까지 올라가 이 천하의 장관을 카메라와 가슴속에 깊이 담아두었다. 세계 어디에 이처럼 비장감 감도는 죽음의 유적이 있을까. 우리는 환도산성을 내려가 적석총을 가까이 보러 갔다. 고구려 적석총은 3세기 이전까지는 무기단식 적석총이었으나 기단식으로 발전하고 또 계단식으로 발전하여 세 가지 형식이 공존하고 있다. 이것을 시대적 추이라기보다 계급적 차이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의 매장부를 지하가 아니라 돌무지 위의 석실로 만들어 고인을 정중하게 모셨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고구려 적석총은 훗날 거의 다 도굴되는 피해를 입었다. 경주 시내에 있는 신라 마립간 시기의 대형 고분들이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으로 만들어져 매장주체부가 무덤 깊이 감추어져 있어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당대에는 거룩하게 모신다는 마음만 있었지 훗날 손을 타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무리 지어 있는 적석총 사이는 전체가 다 옥수수밭이어서 더욱 싱그럽고 아름답고 강인해 보였다(200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정비하면서 지금은 잔디밭이 되었다고 한다). - P270
고구려의 죽음의 문화가 남겨놓은 이 유산은 삶의 자취, 이를테면 국내성 터나 어느 절터보다도 강렬한 데가 있었다. 집안에서는 무려 1만 1천 3백 기에 달하는 고구려 고분을 확인했는데, 대체로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통구 환도산성 아래 산성하 고분군에 - P270
1천 5백 기, 칠성산과 통구하 사이의 만보정 고분군에 1천 5백기, 국내성에서 압록강 상류로 올라가 우산(山) 아래에 있는 우산하 고분군에 3천 9백 기, 국내성에서 압록강 하류로 내려가 처음 만나는 칠성산 고분군에 1천 7백 기, 그리고 더 하류로 내려가마선향(鄕) 마을에 있는 마선구 고분군에 2천 5백 기 등이다. 그중에 천추묘(千秋), 서대묘(西大墓), 태왕릉(太王陵), 장군총(將軍) 등 10여 기의 대형 고분은 고구려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는 고구려 적석총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천추묘가 있는 마선구 고분군부터 답사하기로 했다. - P271
집안 기차역을 조금 지나니 육중한 우산 아래로 고구려 고분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중 오회분 다섯 기의 무덤은 마치 5개의 투구가 놓여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지금은 ‘집안 다섯무덤‘이라 부르고 있다. 그중 4호와 5호 무덤은 거의 같은 구조에 같은 벽화 내용을 담고 있는데, 1칸 구조의 돌방무덤으로 네 벽에 사신도를 주제로 한 그림이 있고 귀퉁이와 고임돌에 온갖 상상의 신선들을 그려 넣어 신비로운 천상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오회분 1~3호분에서는 벽화가 발견되지 않았다. - P287
5호분의 벽화는 책에서 도판으로 볼 때보다 훨씬 색채가 선명하고 도상이 또렷했다.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서 곡식 이삭을 쥐고 앞으로 나아가는 농사신, 횃불을 들고 날아가는 불의신, 벌겋게 달구어진 쇳덩이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리는 대장장이신, 바퀴를 매만지는 수레바퀴신, 용을 탄 신선, 장구치는 신선, 춤추는 신선 등 상상의 신과 신선을 실감나게 그렸다. 색채도 아름답게 구사되어 낱낱 장면이 한 폭의 신선도라고해도 좋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복희와 여와를 형상화한 해신과 달신의 만남이었다. 동그라미 속에 삼족오(三足烏)를 그린 해를 머리에인 해신과 역시 동그라미 속에 두꺼비를 그린 달을 머리에 인 - P287
달신이 마치 천상에서 다이빙하듯 내려왔다가 다시 몸을 솟구쳐가슴을 마주 대하며 치솟아오르는 듯한 장면이 극적이기 그지없다. 고구려의 강한 기상과 서정을 남김없이 보여주면서, 이제 고구려 고분벽화가 상상의 날개를 펴 어디론가 더 비약하고 있다는느낌을 준다. 5호분 답사를 마친 뒤 우리는 비록 무덤 내부로는 들어가지 못할지언정 다른 벽화고분들을 둘러보았다. 사냥 그림으로 유명한 춤무덤과 씨름무덤은 쌍둥이처럼 붙어 있었다. 저쪽으로 돌아 나가니 사신도의 현무 그림이 현란하게 그려진 것으로 유명한 통구사신무덤이 있고 그 옆에 산연화(散蓮花)무덤이 있었다. - P288
이 산연화무덤 벽에는 사면 흩날리는 연꽃잎 그림만 장식되었는데, 1907년 프랑스의 대표적인 동양학자인 에두아르 샤반(Edouard Chavannes)이 중국에 문화재 조사를 나왔다가 이를 우연히 발견하여 이듬해 논문으로 발표함으로써 고구려 고분벽화가 있다는 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 고구려 벽화고분을 왕릉이 아니라 귀족무덤으로 단정 지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때 명칭을 ‘고구려 귀족무덤‘이라고 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생각할 때마다 드는 의문과 아쉬움은 어느날 급작스럽게 벽화고분이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서온다. 미술사에서 모든 양식은 초기의 생성기, 중기의 발전기, 후 - P289
기의 난숙기, 그리고 말기의 쇠퇴기라는 리듬을 갖는다. 이것은하나의 법칙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말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즉, 고구려는 문화가 정점에 도달한 순간 막을 내린 것이다. 김원용 선생은 고구려 문화사가 마치 ‘사고사(事故死)‘를 당한 것처럼 허무하게 끝났다고 했는데 고분벽화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 P290
태왕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크기다. 바닥 길이가장군총의 약 두 배씩이며 각 면에 3개씩 기대놓은 자연석 호분석(護石)이 이 무덤의 위용을 말해준다. 무덤의 내부에는 장군총과 마찬가지로 돌방이 구축되어 있는데, 1990년 중국에서 조사했을 당시 돌방에서 맞배지붕을 가진 형태의 석곽(돌덧널)이 발견되었고 관을 올려놓는 관대(臺)가 2개 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합장묘였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태왕릉에서 북동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곳에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어 이 능은 광개토대왕릉으로 생각된다. 무덤의 방향과 광개토대왕릉비의 방향이 정반대라는 점에서 이론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지만 태왕릉이라고 새긴 전돌이 나왔기 때문에 아직은 광개토대왕릉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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