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유물을 낳고
유물은 역사를 증언한다.

2023년 초겨울
유홍준

답사 당일 아침 10시까지 신청자들이 개별적으로 정림사지 주차장에 집결하면 나의 인솔과 해설을 받으며 부여의 유적지들을 두루 답사한 뒤 오후 5시에 다시 정림사지 주차장으로 돌아와 끝나는 당일 답사다. 초창기엔 버스 2대80명이었으나, 요즘은 인솔하기 버거워서 버스 1대 40명으로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답사 코스는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국립부여박물관만이 기본이고 매번 다르다. 서쪽으로는 만수산 무량사, 반교마을 돌담길, 홍산 관아, 남쪽으로는 임천의 대조사와 장하리 석탑, 동쪽으로는 송국리 청동기시대 유적지와 능산리 백제왕릉 등이 주요 답사처다. 때로는 부여군을 벗어나 보령의 성주사지, 논산의 관촉사,
공주의 무령왕릉과 공산성, 서천 비인의 오층석탑, 익산 나바위성당까지 다녀오기도 한다. - P13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우아한 자태로 우리를 맞이한다. 책에서 사진으로 볼 때는 왜소한 인상을 주지만실물은 키가 훤칠하고 5층의 체감율이 단아한 비례감을 자아내어 백제 미술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백제의 마지막 왕도 사비성의 존재를 증언해주는 가장 확실한 유물이자 백제의 아름다움을 실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다시 말해서 정림사지 오층석탑이있기에 부여가 고도로서 존재감을 갖고 백제의 미학이 살아나는 것이다. - P16

이 향로의 발견으로 우리는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顧 華而不侈)‘의 미학을 지녔다는 백제 아름다움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 실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이 향로는 높이 61.8센티미터, 무게는 11.85킬로그램이나 되는대작으로 다른 향로들과 비교할 때 부피가 2배 가까이 된다. 향로의 구조는 받침, 몸체, 뚜껑 3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뚜껑이 닫힌 상태에서 보면 용의 입에서 탐스러운 꽃봉오리를 분출하는 듯한데, 맨 위에 봉황이 올라앉아 있는 3단 구조다. 이 향로는 기본적으로 한나라 때부터 유행한 박산향로(博山香爐)의 형식을 따른 것이다. 중국의 박산향로는 대개 바다를 상징하는 승반(承盤) 위에 박산을 상징하는 중첩된 산봉우리가 얹혀 있는 모습이다. 박산은 중국의 동쪽바다 한가운데 불로장생의 신선이 살았다는 이상향으로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 등 삼신산을 말한다. - P46

백제금동대향로는 이런 도교적인 상징성을 갖는 박산향로에불교적 이미지인 연꽃을 결합시키면서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형식을 구현한 것이다. 받침대의 용은 힘껏 용틀임하면서 치솟아오르는 강한 동세를 보여주며, 뚜껑 꼭지의 봉황은 부리와 목사이에 구슬을 끼고 있는 상태에서 날갯짓을 하기 위해 꼬리를 한껏 치켜 올린 모습이다.
이에 반해 몸체와 뚜껑으로 이루어진 꽃봉오리는 풍만하면서도 팽팽한 입체감이 넘친다. 이처럼 받침대와 몸체는 동(動)과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뚜껑에는 신선의 세계를 나타내 - P46

는 무수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여기에 나오는 도상은 백제인의관념 속에 있는 신선 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영원불멸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담겨 있는 것이다.

‘명작은 디테일이 아름답다‘라는 명제를 이 백제금동대향로만큼 잘 보여주는 것이 없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추사(秋史)김정희는 명작 감상을 할 때는 ‘금강역사의 부릅뜬 눈으로, 혹독한 세리(稅吏)의 손끝처럼 치밀하게‘ 보아야 그 진수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했다고, 홈런 타자가 공을 끝까지 보듯이 작품의 구석구석을 끝까지 보라고 하면서, 내가 말하는 대로 백제금동대향로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살펴보라고 했다. 보면 다 보일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는 조용히 낱낱 도상을 읽으며 답사객들의 눈을 이끌었다. - P48

위덕왕 재위기는 진실로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다. 지금 나성에서 떠올리는 유적과 유물 외에 ‘백제의 미소‘로 칭송받는 ‘서산마애삼존불‘, ‘미스 백제‘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규암 출토 금동보살입상‘, 비록 국적과 시대가 명확지 않지만 저 유명한 ‘금동미륵반가사유상‘ 등이 6세기 후반 백제 미술로 추정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위덕왕 때 유물이다.
그럼에도 백제의 이미지를 말할 때면 멸망할 때의 의자왕을 - P58

먼저 기억하고 위덕왕 시대의 백제문화 전성기에 대해서는 말이없다. 이는 그동안 우리가 역사를 연대기로 나열하면서 전란과정변을 중심으로 한 정치·전쟁사, 비유컨대 ‘사건 및 사고의 역사‘에만 치중하고 문화사로 익히지 않았던 병폐라고 생각한다.
내가 부여로 내려가 지금까지 50회에 걸쳐 봄가을로 백제문화답사를 이끌어온 것은 백제문화의 꽃과 영광을 온 국민에게 전도하고자 함이었다. 실로 이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남겨준 위덕왕치세의 백제인들에게 보내는 감사와 존경의 마음이 그지없다.
나의 느린 걸음을 앞질러 나성을 내려간 답사객들은 김인권국장의 인솔 아래 능사 터 옆으로 길게 난 긴 도랑의 다리 옆에모여 나의 다음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 옛날 나무다리가 있었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유구와 목재가 발견되었다. 이를 토대로 이 도랑과 다리를 복원한 것이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것이 있음으로써 능사 터는 더욱 진정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항시 시간을 체크하며 늦을까봐 마음 졸이는 이미영 팀장이12시가 다 되어간다고 했다. 우리는 서둘러 부여 왕릉원 주차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점심식사를 위하여 관북리 유적지와 부소산이 훤히 바라다보이는 향우정 식당을 향해 떠났다. - P59

명작은 명작을 낳는다고 백제금동대향로를 주제로 무수한 사진 작품과 도록이 발간되었고, 이를 소재로 한 단독 저서(서정록『백제금동대향로』, 학고재 2001)도 나왔으며, 방송국의 역사 프로그램의 단골 주제로 이 향로가 등장하기도 했다. 그중 내게 가장 감동적인 프로그램은 대전방송(TJB)에서 향로의 악사 5명이 들고있는 악기를 재현한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국악 연구자들은 봉황의 바로 밑에 위치한 악사부터 짧은 피리는 ‘배소‘, 긴 피리는 ‘종적(縱)‘, 기타비슷한 악기는 ‘완함‘, 그 왼쪽은 북, 다시 그 왼쪽은 거문고로 고증했다. 그리고 이 악기들을 인간문화재가 직접 만들었고,
국립국악원의 연주자가 백제 「산유화가」에 맞추어 연주했다. 지금은 유튜브로 모든 게 다 검색되어 이 글을 쓰기 전에 다시 한번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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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은 정말로 아름다웠다. 강물은 조금도 사납거나 험한데가 없다. 세상에 이처럼 유순한 흐름과 명징한 물빛을 가진 강이 또 있을까 싶다. 예로부터 압록강을 ‘처녀의 강‘이라고 불렀다는이유도 알 만했다.
압록강은 한반도에서 제일 긴 강이다. 전체 길이는 925.5킬로미터다. 직선거리로는 400킬로미터 정도이나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중국의 임강(린장), 우리나라 중강진에 이르는 상류 쪽이 심한 곡류를 이루므로 실제 강 길이는 직선거리의 두 배에 가깝다. 『신당서(新唐書)』에는 압록수(鴨綠水)로 나오는데, "물빛이 오리머리색과 같다"며 압록수로 바뀌었다. - P218

이에 반해 대동여지도에는 대총강(大摠江)으로 나와 있어 중국문헌에 나오는 명칭과 고구려 이래 우리나라에서 부르는 명칭에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압록鴨綠)‘이란 이름은 ‘크다‘는 의미를 지닌 아리(阿利)에서 나온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러나 이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압록이라 했고 중국에서도 오래 전부터 ‘야뤼(鴨綠)‘로 불려 영어로는
‘얄루(Yalu)‘라고 표기되고 있어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그날도 압록강은 짙푸른 빛을 띠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강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니 민둥산 산비탈에 옥수수들이 힘겹게 자라고 있었다. 느린 동작으로 옥수수를 따고 있던 북한 주민들이 - P218

하던 일손을 멈추고 우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산장성은 단동에서 북동쪽으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호산(虎山)에 있다. 호산은 표고 146미터 정도 되는 낮은 산인데 산의 생김새가 마치 누워 있는 호랑이 모습과 같다 하여 이런 이름을 얻었다. 산은 낮아도 여기에 오르면 압록강 북쪽으로 펼쳐지는만주 벌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쌓은고구려 박작성이 지금은 호산장성으로 불리고 있다. - P219

(백두산 천지에서) 왼편으로 보이는 저 산줄기를 넘으면 우리가 답사를 시작한 심양에 이르게 된다. 그 주변에 산 하나 없는 너른 평원이 바로 요하평원이다. (...) 요하를 건너면 다시 요서 산지와 그북쪽으로 대흥안령산맥이 펼쳐지니, 이곳의 초원을 터전으로 삼아살아온 사람들이 동호족(東)이다. 흉노족의 동쪽에 거주하였기때문에 ‘동쪽의 오랑캐‘란 이름이 붙여졌으니, 시대에 따라 선비. 오환 • 거란 • 실위 • 몽골족으로 불렸다. 역사상에 유명한 요나라와 원나라, 그리고 남북조시대의 북조 국가들인 북위(北)·북주(北周)·후연(後燕)과 같은 나라들을 세운 주인공들이다. 그중 북위(386~534)를 세워 중국의 반을 150년간 지배했던 선비족의 탁발씨들은 스스로 한화(化)되어 역사 속에 사라졌다. - P227

이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역시 산줄기 저 너머에 목단강과 송화강 하류에 형성된 분지들이 등장한다. 거기에 뿌리를 박고 살아왔던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숙신족(肅愼族)이라 부른다. 이들도 시대에 따라 읍루. 물길 · 말갈. 여진· 만주족으로 불리면서, 발해건국에 참여하였고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웠다. 지금 만족(滿族)이 - P228

라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 후예이다.
이 두 집단을 사이에 두고 만주 한가운데에 살림을 차린 사람들이 예맥족(濊貊族)이다. 송화강 중류에 자리 잡았던 부여, 압록강 중류에서 일어난 고구려, 그 후예가 말갈과 연합하여 세운 발해가바로 이들이 건설한 나라이다.
한반도의 6배가 넘는 광활한 대지에 역사를 꾸려갔던 주인공은 이처럼 크게 세 집단으로 나뉜다. 우리의 핏줄이 된 예맥족은 동부의 숙신족, 서부의 동호족을 좌우의 날개로 삼으며, 지금의 길림성과 요동지방을 무대로 오르내렸다. 그러나 아쉽게도 발해의 멸망과 함께 그들의 발자취는 한반도로 움츠러들어버렸고, 그 대신에 중원의 한족(漢族)들이 그 자리를 메워버렸다. - P229

"앞으로 우리는 본격적으로 고구려 유적을 보게 될 것인데, 고구려적인 신비감이나 스케일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두 곳 있습니다. 어디일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질문에 일행들은 저마다 고구려의 시각적 이미지를 그려보는 것 같았다. 광개토대왕릉비, 장수왕릉인 장군총, 수렵도로 유명한 고구려 고분벽화...... 그러나 송 교수의 답은 달랐다.

"하나는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이고, 또 하나는 집안에 있는 적석총입니다. 집안 통구에 가서 수천 기의 고구려 적석총이 무리지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장대함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경주의 신라왕릉과는 또 다른 역사적 신비감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우리가 오르게 될 환인의 오녀산성에서는 주변을 압도하는 풍광에 절로 탄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막연히 상상했던 것보다 웅혼한 기상을 느끼며 고구려 시조 주몽이 왜 이곳을 첫 도움으로 택했는지 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 P231

산 정상 못미처에는 천지(天池)라는 큰 못(높이 12미터, 너비 5미터, 깊이 2미터)이 있었다. 산성의 필수가 우물인데 여기는 아예 사철 마르지 않는 천지가 있으니 산성으로 이보다 더 좋은 입지는없을 성싶다.
정상에 다다르니 거짓말처럼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높이1천 미터, 폭 3백 미터에 달하니 잠실운동장 서너 개를 옮겨놓은 넓이다. 여기에 왕궁터, 병사 주둔지, 장대 등 많은 성곽시설 건물들이 있던 자리에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정말로 놀라웠다. 내가 이제까지 알고 있는 삼국시대 산성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장엄한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봉황산성(오골성), 호산장성(박작성), 환도산성, 안시성, 요동성 등 고구려의 수좋은 산성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이었다. - P235

귀국 후 일행들이 돌아가며 신문에 기고한 글을 보면 한결같이 ‘집안에서 추석을 하루 앞둔 보름달빛 아래 보았던 압록강 건너 만포 땅 미루나무 늘어진 강마을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격한감격들을 말했다. 여기가 국경의 마을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가볍게 불어오는 온화한 가을바람을 맞으면서 절로
‘집안은 과연 만주의 강남으로 4백년 도읍지가 될 만했구나‘라는생각이 들었다. 집안 압록강변의 풍경은 그렇게 평생 잊히지 않는 한 폭의 풍경화로 지금도 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 P254

환도산성의 정문인 남문으로 들어가니 바로 앞에 화강암으로멋지게 쌓은 점장대(將臺)가 나왔다. 점장대에서 산기슭으로 더올라가니 넓은 궁전 터가 나왔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밭이 되어있었다. 좀 더 올라가 북쪽을 바라보자 산자락 아래로 수천기의적석총이 무리지어 있었다. 집안 산성하 고분군이었다. 그 장대함은 송기호 교수가 환인의 오녀산성과 함께 고구려의 웅혼한 기 - P266

상을 보여주는 두 가지 중 하나로 지목한 것이다. 경주 신라 대릉원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집체미, 백제의 공주 송산리 고분과 부여 능산리 고분의 우아한 능선과 달리 고구려의 강인함과 장대함이 절로 다가온다.
나는 통구 들판에 무리 지어 있는 적석총이 장대한 파노라마로 전개되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환도산성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곳에는 사과 과수원이 있었다. 아직 수확하지 않은 사과들이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나무 밭을 무작정 오르고 있는데 저 아래에서 한 할아버지가 소리를 질렀다. 사과 떨어트린다고 얼른내려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염려 말라는 손짓을 보이고 끝 - P267

까지 올라가 이 천하의 장관을 카메라와 가슴속에 깊이 담아두었다. 세계 어디에 이처럼 비장감 감도는 죽음의 유적이 있을까.
우리는 환도산성을 내려가 적석총을 가까이 보러 갔다. 고구려 적석총은 3세기 이전까지는 무기단식 적석총이었으나 기단식으로 발전하고 또 계단식으로 발전하여 세 가지 형식이 공존하고 있다. 이것을 시대적 추이라기보다 계급적 차이로 생각하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시신을 안치하는 무덤의 매장부를 지하가 아니라 돌무지 위의 석실로 만들어 고인을 정중하게 모셨다. 그러나 이로 인해 고구려 적석총은 훗날 거의 다 도굴되는 피해를 입었다.
경주 시내에 있는 신라 마립간 시기의 대형 고분들이 적석목곽분(돌무지덧널무덤)으로 만들어져 매장주체부가 무덤 깊이 감추어져 있어 도굴 피해를 입지 않은 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당대에는 거룩하게 모신다는 마음만 있었지 훗날 손을 타리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무리 지어 있는 적석총 사이는 전체가 다 옥수수밭이어서 더욱 싱그럽고 아름답고 강인해 보였다(2003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정비하면서 지금은 잔디밭이 되었다고 한다). - P270

고구려의 죽음의 문화가 남겨놓은 이 유산은 삶의 자취, 이를테면 국내성 터나 어느 절터보다도 강렬한 데가 있었다. 집안에서는 무려 1만 1천 3백 기에 달하는 고구려 고분을 확인했는데, 대체로 다섯 구역으로 나뉜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통구 환도산성 아래 산성하 고분군에 - P270

1천 5백 기, 칠성산과 통구하 사이의 만보정 고분군에 1천 5백기, 국내성에서 압록강 상류로 올라가 우산(山) 아래에 있는 우산하 고분군에 3천 9백 기, 국내성에서 압록강 하류로 내려가 처음 만나는 칠성산 고분군에 1천 7백 기, 그리고 더 하류로 내려가마선향(鄕) 마을에 있는 마선구 고분군에 2천 5백 기 등이다.
그중에 천추묘(千秋), 서대묘(西大墓), 태왕릉(太王陵), 장군총(將軍) 등 10여 기의 대형 고분은 고구려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는 고구려 적석총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천추묘가 있는 마선구 고분군부터 답사하기로 했다. - P271

집안 기차역을 조금 지나니 육중한 우산 아래로 고구려 고분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중 오회분 다섯 기의 무덤은 마치 5개의 투구가 놓여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지금은 ‘집안 다섯무덤‘이라 부르고 있다. 그중 4호와 5호 무덤은 거의 같은 구조에 같은 벽화 내용을 담고 있는데, 1칸 구조의 돌방무덤으로 네 벽에 사신도를 주제로 한 그림이 있고 귀퉁이와 고임돌에 온갖 상상의 신선들을 그려 넣어 신비로운 천상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오회분 1~3호분에서는 벽화가 발견되지 않았다. - P287

5호분의 벽화는 책에서 도판으로 볼 때보다 
훨씬 색채가 선명하고 도상이 또렷했다.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서 곡식 이삭을 쥐고 앞으로 나아가는 농사신, 횃불을 들고 날아가는 불의신, 벌겋게 달구어진 쇳덩이를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리는 대장장이신, 바퀴를 매만지는 수레바퀴신, 용을 탄 신선, 장구치는 신선, 춤추는 신선 등 상상의 신과 신선을 실감나게 그렸다. 색채도 아름답게 구사되어 낱낱 장면이 한 폭의 신선도라고해도 좋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역시 복희와 여와를 형상화한 해신과 달신의 만남이었다. 동그라미 속에 삼족오(三足烏)를 그린 해를 머리에인 해신과 역시 동그라미 속에 두꺼비를 그린 달을 머리에 인 - P287

달신이 마치 천상에서 다이빙하듯 내려왔다가 다시 몸을 솟구쳐가슴을 마주 대하며 치솟아오르는 듯한 장면이 극적이기 그지없다. 고구려의 강한 기상과 서정을 남김없이 보여주면서, 이제 고구려 고분벽화가 상상의 날개를 펴 어디론가 더 비약하고 있다는느낌을 준다.
5호분 답사를 마친 뒤 우리는 비록 무덤 내부로는 들어가지 못할지언정 다른 벽화고분들을 둘러보았다. 사냥 그림으로 유명한 춤무덤과 씨름무덤은 쌍둥이처럼 붙어 있었다. 저쪽으로 돌아 나가니 사신도의 현무 그림이 현란하게 그려진 것으로 유명한 통구사신무덤이 있고 그 옆에 산연화(散蓮花)무덤이 있었다. - P288

이 산연화무덤 벽에는 사면 흩날리는 연꽃잎 그림만 장식되었는데, 1907년 프랑스의 대표적인 동양학자인 에두아르 샤반(Edouard Chavannes)이 중국에 문화재 조사를 나왔다가 이를 우연히 발견하여 이듬해 논문으로 발표함으로써 고구려 고분벽화가 있다는 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 고구려 벽화고분을 왕릉이 아니라 귀족무덤으로 단정 지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때 명칭을 ‘고구려 귀족무덤‘이라고 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생각할 때마다 드는 의문과 아쉬움은 어느날 급작스럽게 벽화고분이 만들어지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에서온다. 미술사에서 모든 양식은 초기의 생성기, 중기의 발전기, 후 - P289

기의 난숙기, 그리고 말기의 쇠퇴기라는 리듬을 갖는다. 이것은하나의 법칙 같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말기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즉, 고구려는 문화가 정점에 도달한 순간 막을 내린 것이다. 김원용 선생은 고구려 문화사가 마치 ‘사고사(事故死)‘를 당한 것처럼 허무하게 끝났다고 했는데 고분벽화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 P290

태왕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마어마한 크기다. 바닥 길이가장군총의 약 두 배씩이며 각 면에 3개씩 기대놓은 자연석 호분석(護石)이 이 무덤의 위용을 말해준다. 무덤의 내부에는 장군총과 마찬가지로 돌방이 구축되어 있는데, 1990년 중국에서 조사했을 당시 돌방에서 맞배지붕을 가진 형태의 석곽(돌덧널)이 발견되었고 관을 올려놓는 관대(臺)가 2개 있는 것으로 보아 부부합장묘였음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태왕릉에서 북동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곳에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어 이 능은 광개토대왕릉으로 생각된다. 무덤의 방향과 광개토대왕릉비의 방향이 정반대라는 점에서 이론을 제기하는 학자도 있지만 태왕릉이라고 새긴 전돌이 나왔기 때문에 아직은 광개토대왕릉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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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울주군 언양읍언양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이라고 해야 하는데 나에겐그냥 언양이라고 입에 붙어 있다. 이건 내가 나이 많은 옛날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학, 고고학, 미술사학, 민속학 등 국학을전공하는 분들은 다 마찬가지일 것이다.
본래 조선시대 언양현은 경상도의 당당한 고을로, 1895년에는언양군이 되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울산군에 통합되었다. 그러다 1962년 울산읍이울산만을 끼고 있는 방어진, 대현면, 하상면 등과 합쳐 울산시로독립하고 나머지 지역은 울주군이 되는 바람에 이번에는 울주군 언양면이 되었다. - P117

그리고 조선시대만 해도 언양은 교통의 요충지여서 사람과 물화의 왕래가 많은 곳으로 자연히 객주가 발달했고 이에 따라 독특한 향토음식을 낳았으니 그것이 언양불고기다. 언양바로 북쪽은 소고기 산지로 유명한 울주군 두동면 봉계리인데 사실 두동면은 조선시대엔 경주에 속한 지역으로 울산과는 아무 연관이 없었다. 이 봉계는 생고기의 산지로서 유명한 것이고 언양은 조리법으로 이름을 얻은 것이다.
언양불고기는 껍질과 속을 제거하고 강판에 간 배에 잘게(3×5센티미터) 썬 쇠고기를 30분 정도 재워둔 뒤 양념장에 버무리고가열된 석쇠에 구워 만든다(본래는 한지에 물을 묻혀가며 구웠다). 그리고 구운 고기 위에 통깨를 뿌린다. 그래서 고소하고 먹기편하다. 서울 음식으로 석쇠에 굽는 바싹불고기와 비슷한데 배가들어가서 많이 달고 부드럽다. 그래서 언양에 가면 나는 언양읍성가까이 있는 언양불고기집에서 점심을 먹는다. 그래야 언양에 온것 같다. - P120

우리의 답사 목표는 천전리 각석이지만 이곳 안내판에서는 ‘천전리 공룡 발자국 화석‘이 더 눈에 띈다. 천전리와 반구대의 대곡천변에서는 중생대 쥐라기 (2억~1억 4천 5백만 년 전)와 백악기 (1억4천 5백만~6천 5백만 년 전)에 살던 공룡의 발자국이 약 130개 확인되었다. 스마트폰에서 ‘천전리 백악기 AR 공룡체험‘ 앱을 다운로드하고 실행시키면 백악기 공룡들의 모습을 증강현실로 만나볼 수 있는 장치도 설치되어 있었다.
천전리 각석 맞은편 바위 위에도 여러 개의 공룡 발자국을 볼수 있는데 나는 대개 여기서 천전리 답사를 시작한다. 그것은 공룡 발자국도 발자국이지만 이곳 너럭바위 위에서 계곡 건너 각석 - P135

을 바라보면서 대곡천의 물소리를 들으면 천고의 자연과 벗하는기분으로 너무도 마음 편하고 한가로워지기 때문이다. 기암절벽이 즐비한 천하의 절경은 아니지만 전형적인 우리나라 산천의 맑은 계곡이 갖고 있는 정취와 그윽한 멋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이는 나만이 느끼는 감정도 아니고, 오늘날의 답사객들만의 생각도 아니다. 1,500년 전 신라의 왕족과 화랑도 똑같이 이 계곡을 사랑하여 자신들이 다녀간 자취를 저 넓은 바위 절벽에 글로새겨놓았다. 그것이 천전리 각석이다. - P136

천전리 각석은 계곡 위쪽에 길이 9.5미터, 높이 2.7미터의 넓적한 바위가 땅바닥을 향해 15도로 기울어진 상태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천전리 각석이 풍화를 피해 잘 보존되어온 것은 바로이 기울기 덕분이었다. 바위 위쪽에는 청동기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여러 형태의 추상무늬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일부신석기시대의 사실적인 그림들이 새겨져 있다. 하단부에는 훗날 신라 사람들이 새긴 글씨가 낙서처럼 어지러운 가운데, 명확하게구획을 짓고 마치 책을 펼쳐놓은 모양으로 전후 두 차례에 걸쳐 써 놓은 긴 글이 있다. 이 두 글은 서로 연결되어 먼저 쓴 것을 원명(原銘), 나중 쓴 것을 추명(銘)이라고 부른다.
1970년 발견 직후 당시 (1988년에 울진 봉평리 신라비가 발견되기 - P136

전)로서는 가장 오래된 신라 금석문의 발견이었기 때문에 학계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수영, 임창순, 이기백 등 원로 금석학자와 역사학자가 달려들어 글자를 해독했는데, 그 내용이6세기 전반 신라 법흥왕 때 왕가의 이야기여서 세상을 더욱 놀라게 했다. 학자들에게는 엄청난 기쁨이었다. 청명 임창순 선생이1971년 6월 8일 천전리에 다녀오면서 탁본의 여백에 쓴 소견에는 그런 기쁨이 절절히 들어 있다.
이후 수많은 학자가 후속 연구를 진행하여 대략 원명은 12행107자, 추명은 11행 184자 정도가 판독되고 있다. 글자의 판독과 해석에는 학자마다 차이를 보이지만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 P137

반구대암각화의 전체 구성을 보면, 화면 오른쪽에는 고래 그림이 다양하게 나오고 왼쪽으로 갈수록 고래의 양이 적어진 반면에 멧돼지 등 물짐승 그림이 대부분을 이룬다. 이는 주된 사냥 대상이 어로에서 수렵으로 점점 바뀌어간 것을 반영한다. 새김 기법도 면새김에서 점차 선새김 위주로 바뀌었다.
반구대암각화에 대한 연구는 아주 풍부히 이루어져 이와 관련된 저술과 논문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다큐멘터리로도 여러 번 방영되어 지금도 유튜브(YouTube)를 통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또 이 그림들의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외국의 선례들을 참고할 필요가 있는데,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의 암각화에 비슷한 예가 있어 도상 내용의 유사성과 연대측정 등에서 더 면밀한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
반구대암각화에 그려진 작살 맞은 고래는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의 창에 꽂힌 들소 그림을 연상케 한다. 원시인류 사회에서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유사한 행위는 유사한 결과를 낳는다‘는 믿음이다. 그들은 그림 속에서 사냥감을 죽임으 - P163

로써 실제 사냥에서 풍성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뉴기니의 원주민들은 타조를 사냥할 때 타조 춤을 춘다고한다. 이러한 것들을 유감주술(呪術, homocopathic magic)‘이라고 한다.
반구대암각화에 나타난 동물들 그림을 보면 최대한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지만 인간의 모습은 동작을 설명하는 정도만 소략하게 그렸을 뿐이다. 즉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사냥감이었고 인간은 동작만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뱃머리에서 손을 눈위에 얹고 고래가 어디에 있나 관찰하는 사람은 얼굴, 몸, 다리, - P164

손으로만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선사인들에게 성(性)은 생산의 근원이기에 고래 있는 곳을 관찰하는 인물은 남근이 강조되어 있고, 한쪽엔 돼지가 교미하는 모습도 그려져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반구대암각화가 그려진 이 바위는 신석기인들이 신성하게 여겨 제의를 올리던 곳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심각한 식량 위기를 겪으면 여기에 사냥감을 그리면서 제사를드리는 주술 행위를 했을 것이다. 어로와 수렵을 생활의 주요 방편으로 삼았던 신석기인은 풍요롭고 성공적인 사냥을 위하여 이신성한 곳에 장구한 세월에 걸쳐 그림을 되풀이하여 그렸던 것은아닐까. 모든 생명체는 영혼이 있다는 애니미즘, 영혼과 대화하며 기원하는 샤머니즘, 그리고 영혼을 신성하게 모시는 토테미즘모두 이 반구대암각화에 서려 있는 것이 아닐까.
반구대암각화를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보는 견해가 계속 제기되고 있지만, 청동기시대는 본격적으로 농경이 이루어진 시기인데 반구대암각화의 내용은 모두 어로와 수렵에 관한 그림일 뿐이고 농경에 관한 그림이나 청동기시대의 추상무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보는 시각이 더 설득력 있다. - P165

동북삼성이란 요령성(遼寧省, 랴오닝성), 길림성(吉林省, 지린성), 흑룡강성(黑龍江省, 헤이룽장성)을 말한다. 그런데 중국은 역사의격변을 거칠 때마다 통치 방침에 따라 곧잘 지명을 바꿔 불렀다.
본래 이곳 이름은 만주(滿洲)인데 오늘날 의도적으로 거의 사용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동북삼성이라고 한다. 우리 입장에서는 넓은 의미의 간도 땅이다.  - P178

"고구려는 산성의 나라였습니다. 후기에 들어오면 전국을 5부(部) 176성(城)으로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5개 권역 아래 주요 거점들로 안시성(安市城), 백암성(白巖城), 오골성(烏骨城), 박작성城) 등을 설치했는데, 우리가 가고 있는 봉황산성이 오골성으로 비정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일 우리가 단동을 떠날 때 들르게될 호산장성(長城)은 박작성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박작성은 압록강변에 바짝 붙어 있어 강 건너 의주성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평양성에서 의주성, 박작성, 오골성, 안시성을 거쳐 요동성에 이르는 방어선에 고구려의 주요 산성들이 있습니다." - P189

안시성은 645년 당 태종이 직접 이끄는 대군이 고구려 정벌에나섰지만 전설적인 양만춘(楊萬) 장군의 통솔력과 병사들의 투지로 뚫지 못했다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그 전까지 정복 전쟁에서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던 당 태종이 3개월 만에 아무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물러난 곳으로 유명하다.
병자호란 이후 민족의식이 확대되면서 안시성 전투가 전설적으로 회자되는 가운데 이계 홍양호(洪良浩)의 『이계집(耳溪集)』이나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봉황산성을 안시성으로 비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구만(萬), 김창업등은 이 견해를 의심했고, 연암 박지원(朴趾源)은 『당서(唐書)』와 『한서(漢書』 「지리지」 등을 인용하면서 안시성은 봉황산성 서북쪽에 위치한 개주(州) 일대에 있다고 주장했다.
현재는 여기에서 서쪽으로 100여 킬로미터 떨어져 요동반도의 해성, 하이청)에 있는 영성자산성(山城)을 안시성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유력하다. 바로 그 북쪽에 있는 성이 요동성이라고 한다. - P196

요단 2호에서 내려 우리는 다시 압록강단교로 가 끊어진 다리끝까지 걸어가며 원 없이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거기서 다시 신의주를 바라보며 북한 주민들의 움직임을 망연히 지켜보고 나선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압록강공원 초입에 대기하고있는 버스에 올랐다. 모두들 방망이로 머리를 맞은 사람처럼 멍한 눈빛으로 자기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우리의 버스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마음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을 느꼈다. - P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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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2023년 초겨울 유홍준

국토국토박물관 순례를 시대순으로 찾아 나서자니 그 첫 번째 답사는 당연히 구석기시대 유적지로 향한다. 한반도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적지는 무려 120곳이 넘는다. 일찍이 1933년 함경북도종성에서 구석기시대 동물 뼈와 흑요석 석기가 발견되었으나 당시 일제는 우리 역사가 일본보다 앞선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않아 이 사실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해방 후 북한에서 본격적으로 함경북도 지역의 고고학발굴에 나서 1963년에는 웅기군(오늘날 라선시) 굴포리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을 발견했다. 1966년에는 평양 인근의 상원군 흑우리(里)의 검은모루동굴에서 50만 년 전(북한 학계에서는 100만 - P13

년 전)으로 추정되는 동물 화석이 발견되어 크게 주목받았고, 뒤이어 상원군 용곡리, 평양 승호구역의 만달산 등에서 구석기시대 인골이 유물과 함께 발견되어 이를 ‘용곡인‘ ‘만달인‘이라 명명했다.
남한에서는 1964년에 연세대 손보기 교수가 공주 석장리 금강변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지를 발굴했고, 이어 1973년에는 제천 점말동굴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1982년에는 충북대 이융조 교수가 청원 두루봉동굴에서 구석기 유물과함께 5세가량의 어린아이 인골을 발견했다. 이 유골의 연대측정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지만 발 - P14

굴자는 약 4만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유골은 동굴의 최초발견자 이름을 따 ‘홍수 아이‘라 명명되었다.
그리고 1978년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 한탄강변에서 한 미군병사가 주먹도끼를 발견한 후 이곳에서 30년간 발굴 작업이 이어져 약 8천 점의 구석기 유물이 출토되었고, 이곳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구석기 유적지가 되었다. 특히 여기서 나온 주먹도끼는 세계 고고학 지도를 바꾸어놓았다. 이에 연천 전곡리 구석기시대 유적을 국토박물관 순례 일번지로 삼아 답사를 떠난다. - P15

이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약 1백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 처음 나타나 유럽, 중동, 인도까지 퍼져나갔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의 자바원인, 북경원인 등은 ‘찍개(chopper)‘를 사용했다. 그래서 하버드대학 모비우스(Hallam Movius) 교수는 구석기 문화를 아슐리안주먹도끼 문화와 찌개 문화로 분류했다. 이것이 이른바 세계 고고학 지도의 ‘모비우스 라인‘(Movius Line)이다. 그런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연천 전곡리에서 나왔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P17

‘선사시대로 떠나는 은빛 타임머신‘은 유선형을 그리는 금속건물로 언제나 햇빛을 받아 밝게 빛나고 있다. 평면은 크고 작은2개의 주머니가 마치 아메바처럼 이어진 구조지만 정면관(파사드)은 달나라로 가는 우주선을 연상케 한다. 내부는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연면적 5천 제곱미터 규모이며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 고고학 체험실, 다목적 강당, 도서실 등을 갖춘 쾌적한 복합문화관으로 제법 큰 규모다. 시(市)도 아닌 군(郡)에, 그것도 휴전선을 맞대고 있는 이 외진 고을에 이처럼 멋지고 당당한 박물관이 있다는 것은 연천군의 자랑이자 국토박물관의 긍지다. - P30

이성적 사유능력. 이것은 모든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가장중요한 특징이자 자랑이다. 이성의 탄생에는 경험의 축적, 시행착오, 상대평가 등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독버섯을 먹으면 죽는다는 사실은 먹고 죽는 것을 본 경험의 축적으로 알게 되었다. 짧은 막대기보다 긴 막대기가 더 높이 달린 열매를 딸 수 있다는 생각은 초보적인 상대평가였다. 특히 인류는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아 끊임없이 자연을 개조하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도 개조해가며 오늘날 우리에 이르렀다. - P31

구석기시대에 이은 국토박물관 순례의 다음 행로는 당연히 신석기시대다.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지는 약150곳으로 대부분 강변과 바닷가에 위치해 있다. 강변의 신석기시대 유적지로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자연히 드러난 서울암사동 유적지가 일찍부터 유명하고, 해안 유적지는 동해안의함경북도 웅기 굴포리, 강원도 양양 오산리, 부산 영도 동삼동, 그리고 섬으로는 통영 욕지도와 제주도 고산리가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 중 어느 곳을 국토박물관 순례의 신석기시대 유적지로 삼을까 많은 고민을 한 끝에 부산 영도 동삼동 패총을 택했다.  - P67

영도 동삼동 유적에서는 초기 신석기시대의 덧띠무늬토기는물론이고 한반도 신석기시대 토기의 보편적 양식인 빗살무늬토기도 발견되었다. 고래를 잡아먹은 자취가 있을 정도로 활발한 어로 활동의 흔적이 확인되었으며, 일본과 교류하여 날카로운 흑요석 도구를 사용하거나, 조개껍데기로 팔찌를 만들어 치장하고,
가리비로 사람 얼굴 형상을 만드는 조형 활동도 있었음을 추정할수 있다.
특히 신석기시대 유적의 또 다른 상징인 패총(貝塚, shellmidden)의 자취가 여기 남아 있다. 패총이란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나 생활 쓰레기들이 쌓인 것으로, 조개더미 또는 조개무지라고도 부른다. 한반도에서 패총이 가장 많이 발견되는 곳이 부산이다. - P69

일본인이 갖고 있던 이 덧띠무늬토기는 돌고 돌아 한국전쟁중 고물상에 매물로 나와 있는 것을 동아대학교 설립자인 석당정재환 박사가 구입하여 현재는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영도구에서는 이 덧띠무늬토기 복제품을 영도를 상징하는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판매하고 있다.
나는 패총 터를 알려주는 비석을 앞뒤로 사진 찍고 문화재 안내판도 찬찬히 다 읽어보았다. 새롭게 안 사항은 없었지만 나로서는 지난 세월 한국미술사를 강의할 때면 줄곧 신석기시대 맨 첫 머리에 소개하는 이 유물의 고향을 다녀간다는 사실 자체로 오랫동안 묵혀둔 숙제를 마친 듯한 후련함이 있었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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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은 가파른 낭떠러지인데 까마득한 낭떠러지 아래는 말할 필요도 없이 급류가 바위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고, 뒤는 높다란 절벽이 우뚝 솟아 있는데가느다란 폭포가 절벽을 타고 곧게 떨어지고 있었다. 절벽은 오래전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 일대를 지금 절정인 단풍이 알록달록 다채롭게 장식하고 있었다. 표고가 높은 한랭지에 적응할 수 있는 나무만뿌리를 내려서 붉은색 단풍을 비롯해 노란색 단풍,
갈색 단풍, 주홍색 단풍이 어우러진 가운데 침엽의 진녹색도 적당히 섞여 있다. 수종은 다양하지만 모두 크게 자라지는 않고 표준 크기보다 작게 자라 분재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절벽이라는 두려운 조건을 바탕으로, 절벽 위를 장식하는 단풍의 아름다움이란! 절로 탄식이 나오는 수려한 풍경이었다. - P138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이 어떤 힘에 의해 갑자기 붕괴되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발밑의 계곡을 내려다보니 섬뜩할 정도로 깊었다. 뒤를 돌아보자 절벽의 단풍은 비단에 수를 놓은것 같았다.
위험 지대를 수놓는 단풍의 아름다움은 각별했다. 위험성을 정확하고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이 옆에있어 가르쳐주었기에 호들갑을 피우지는 않았지만, 만약 아무것도 몰랐다면 나는 역시나 호들갑스레 행동했을 것이다. 나무는 역시 속이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 P140

거대한 목재는 수백 년의 세월에 걸친 그만한 위용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저 젊은 목수를 압박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압박하면서 그와 동시에 젊은 목수의 담력과 기력을 키워주고 있다. 이것이 놓칠 수 없는 중요한 점이라고 설명한다. 그 증거로 한번 거대한 목재를 다뤄본 젊은이는 그만큼 정신이 안정된다고 한다. 나무는 알게 모르게목수를 키워준다고, 나라지로 씨는 말하고 싶어다. 어지간히 나무에게 다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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