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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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여, 노래여, 울음이여

                                   -김훈의 ‘칼의 노래’를 읽고-


 노래여, 노래여,,,,,,, 아! 징~징~징~ 울리는 울음이 되고 마는 노래여.
 "칼의 무늬가 내 몸의 무늬를 건너갈 때"
 두 쪽으로 나누어지는 순간, 칼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다. 더 이상 칼로는 베어지지 않는 것들의 세상, 노래는 저 홀로 흐느끼고, 간절한 노래 없이는 도저히 해독되지 않는 저 문장들 속을 나는 오래 오래 서성인다.
 동사와 주어로만 이루어진 단문.
 어떤 수사보다 화려한 내 모국어의 단순 명료함은 황홀하다. 정신을 잃고 노래를 듣는다. 밑줄 그어진 그 노래는 칼의 노래였다가 언어의 노래가 되었다가 역사의 노래가 된다. 마침내 한 사람의 노래가 된다. 이순신의 것도 아니고, 김훈의 것도 아닌 나의 노래일 뿐이다. 내 노래는 징~징~ 울면서
 "사랑이여 아득한 적이여! 너의 모든 생명의 함대는 바람불고 물결 높은 날 내 마지막 바다 노량으로 오라. 오라. 내 거기서 한 줄기 일자진으로 적을 맞으리." 나를 부른다.
 벌써 황사가 시작된 봄바람이 지천으로 흔드는 그런 날, 나는 노량으로 달려간다. 나의 사랑도 나의 적도 결국은 내 안에서 내가 맞서 싸울 대상이었다.

 노량에서 내가 만난 사내는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一揮掃蕩 血染山河 일휘소탕 혈염산하)" 는 무늬를 내 몸에 남길 칼을 차고서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칼을 비추네”
 노래를 부른다. 그의 노래는 처연하고, 그의 노래는 허무하다.
 아, 그의 이름은 이순신.
 광화문 네거리에서 공해를 몸으로 견디며 서 있는 장군도 아니고, 많은 곳에서 많은 상징으로 추앙받는 성웅은 더더구나 아닌 그저 인간 이. 순. 신.
 단순 명료한 점을 찍듯 그의 앞에서 수없이 울던 칼은 이제 피를 뚝뚝 떨어뜨리며 김훈을 지나 내 머리에서 발끝을 적신다. 그의 핏자국을 따라 나는 명량으로, 옥포로, 고하도를 지나, 영산강 하구로, 해남으로, 진도로, 노량까지 저 홀로 꽃이 피는 무수한 버려진 섬들 사이 바다를 지나간다. 산맥으로 출렁이는 바람을 맞으며 적들이 수런거리는 기척을 느낀다. 다가오지 않는 적의 기척에, 희망은 멀어서 보이지 않고 희망 없는 세상에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날들을 겨우겨우 흘려보내는 그가 흘리는 땀 냄새를 맡는다.

 “명량에서, 나는 이긴 것인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들이 명량으로 몰려왔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적들이 명량에서 죽었다. 남동 썰물에 밀려갔던 적의 시체들이 다시 북서밀물에 밀려 명량을 뒤덮었다. 죽을 때, 적들은 각자 죽었을 것이다. 적선이 깨어지고 불타서 기울 때 물로 뛰어든 적병들이 모두 적의 깃발에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죽어서 물 위에 뜬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 적어도, 널빤지에 매달려서 덤벼들다가 내 부하들의 창검과 화살을 받는 순간부터 숨이 끊어질 때까지 그들의 살아있는 고통과 무서움은 각자의 몫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몫들은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무서움이었다하더라도, 서로 소통될 수 없는 저마다의 몫이었을 것이다. 저마다의 끝은 적막했고, 적막한 끝들이 끝나서 쓰레기로 바다를 덮었다. 그 소통되지 않는 고통과 무서움의 운명 위에서, 혹시라도 칼을 버리고 적과 화해할 수도 있을 테지만 죽음은 끝내 소통되지 않는 각자의 몫이었고 나는 여전히 적의 적이었으며 이 쓰레기의 바다 위에서 나는 칼을 차고 있어야 했다. 죽이되, 죽음을 벨 수 있는 칼이 나에게는 없었다. 나의 연안은 이승의 바다였다.”

 임진년, 그가 크게 이긴 명량에서, 싸움이 끝난 바다를 보는 그의 시선에 전율한다.
 왜 전쟁을 하는지도 모르는채, 전쟁이라는 거대한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당장 눈앞에 닥치는 살욕에 의해 베어지는 백성들, 일본백성들은 그 앞에 적이었다. 그들은 그가 쳐 죽여야 할 적이었지만, 또한 우리 백성과 마찬가지로 무고한, 순박한 개인일 뿐이었다.
 지금, 우리는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이라크 파병을 결정한 국가와 국회를 대신해 전쟁을 해야 한다. 소통될 수없는 저마다의 몫으로 고통스러운 현실을 사는 우리는, 각자의 전쟁만으로도 부족해서 전쟁을 위한 명분 없는 전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고뇌는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허무 또한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400년 후에도 여전히 그는 고뇌에 찬 잠자리로 등판에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 한기로 새벽을 맞는다.
 "... 그 개별성 앞에서 나는 참담했다. 내가 그 개별성 앞에서 무너진다면 나는 나의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때, 나는 칼을 버리고 저 병신년 이후의 곽재우처럼 안개 내린 산속으로 숨어들어가 개울물을 퍼먹는 신선이 되어야 마땅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의 적은 적의 개별성이었다. 울음을 우는 포로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적의 개별성이야말로 나의 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전쟁, 어느 군대에서나 장수는 용감하게 싸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부하만 챙겨서 되는 일이 아니라, 백성까지 돌봐야하고, 정치적 처세도 할 줄 알아야하며, 선전용 제스쳐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는 왕이 아니면서, 왕이어야 하고, 왕의 권력은 갖지 못하면서, 왕의 의무를 져야한다. ‘의주’ 피난지에서도 궁녀를 탐하는 왕을 위해, 아니 왕의 울음을 위해서 싸워야 하고, 살기를 애원하는 백성들의 울음을 위해서도 그는 싸워야 한다. 울음에 둘러싸인 그는 고독하다. 왜군만이 적이 아니라 울음을 우는 그 모두가 그가 맞서야 할 그의 적이다. 하지만 적은 그에게 자신의 존재이유이며 곧 목숨이다.
 그는 죽기로서 살고자 한다. 적의 적으로서 죽기를 원한 그의 죽음은 내면에 희망을 갖지 않고 절망으로서 절망을 돌파할 수밖에 없는 칼의 단순명료함이다. 칼에서 비린 피 냄새가 난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현실. 그를 따라 다니며 나는 눈물겹다.
 새벽 순찰, 봄 바다 비린 안개 속을 나아가면서 그가 맡는 살아있는 목숨의 냄새만큼이나 죽은 여진이 썩는 냄새나, 아들 면의 젖 냄새와 비벼지는 화약 냄새는 너무 멀어서 서럽다.

 그가 수행하는 역사 속 전쟁에서 된장을 만드는 개별의 손을 만나고, 푸근한 아낙이 내어오는 장터의 국밥을 먹고, 옥수수 밭이랑이 바람에 눕는 썰물소리를 듣는다. 가만히 흔들리는 갑판에 누운 몸 위로 달빛이 내린다. 그의 노래는 아득하게 멀어져 간다.
 “세상의 끝이...이처럼...가볍고...또 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이 세상에 남겨놓고...관음포의 노을이...적들 쪽으로...”
 긴 소절, 여운 진한 그의 노래는 여기서 끝이지만 끝이 아니다.
 일자진으로도 학익진으로도 맞설 수 없는 거대한 힘의 세상, 남은 세상의 복잡한 권력은 여전하다. 그 힘의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게 면사첩 위에 걸려있는 칼은 그저 고철로 녹슬어 가는 것으로 보여도 결코 노래를 멈추지는 않는다. 이순신의 것이고 김훈의 것이고 내 것이고,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한 이 노래. 각자의 절망 앞에 놓인 개별의 노래는 마침내 합창으로 울려 퍼진다. 칼의 노래를 듣는다.
 징~징~징~ 칼은 울면서 노래한다.
 모든 전쟁의 아픔을 담고 칼은 노래한다. 죽어 간 모든 이의 소망을 노래한다. 절망을 노래한다.


                                                         2004. 2. 15.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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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집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9
손석춘 지음 / 들녘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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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직 오지 않은 당신에게.

                        --- 손석춘의 소설 아름다운 집을 읽고 ---



 

 이 책, ‘아름다운 집’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다.

 처음 책방에서 이 책 제목을 보고 당시에 유행한 한옥들에 관한 이야기를 묶은 책인 줄로 지레 짐작을 했다. 오래 구독한 한겨레신문의 문화부장이리라는 생각보다 목수의 이름일 것이다로 단정했다. 그리고 한참 후 좋아하는 지인의 문방에서 그 책을 읽은 소감을 읽고는 내 생각이 틀린 것을 알고 실소를 훔쳤다.

 ‘좋은 책이구나. 기회 되면 읽어야지.’ 그렇게 미뤄두고 있는 사이 다른 지인은 몇 편에 나눠 그 책들을 분석하고 책이 준 감동을 생생하게 전하는 글을 만났다.

 ‘꼭 읽어야지.’ 의 시간이 일년을 가까이 보내고서야 겨우 잡게 된 이 책을 밤을 새워 읽었다.

 처음엔 책상에 앉아서 진득하게 보다가, 어느 사이 누워서 뒹굴며보다 걷잡을 수 없는 눈물이 홍수를 이뤄, 책상다리를 한 채 앉아서 다 읽은 다음 퉁퉁 부은 눈을 수습하지도 못하고 일하러 갔다.

 책을 읽은 지 두 달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누군가의 아픈 일기를 훔쳐보는 팽팽한 긴장감과 아프게 떨려오는 감정의 파장들...

 책을 읽기시작하면서는 표지에 ‘손석춘의 소설’이라 표기한 것이 참 거슬린다는 지인의 의견에 동감했다. ‘

 편집자’ 라면 몰라도...

 그 책은 리진선 이라는 한 눈 맑은 사회주의 혁명가의 자서전이요, 명상록이요, 일대기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기록을 떠나 분단국가, 우리 역사의 현장을 살아간 한 피맺힌 절규의 기록들이라는 생각에 내내 거슬렸다.

 그러나 책을 덮으면서 논픽션을 가장한 형식의 픽션... 소설인 것을 알았다.

 끝끝내 혼동을 주는 픽션이냐? 논픽션이냐? 하는 문제는 이 책에서 그리 중요한 문제가 못된다는 것을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겨우 알아챘다.

 이 책에서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는 리진선의 일기는 1938년 4월 1일 금요일.

 ‘나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 어디에 있는가. 오늘 조선에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연희 전문에 등록한 오늘 마치 운명처럼 먹장구름이 엄습해왔다....’ 로 시작 된다.

 식민지 시대에 지식인이 나아갈 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이상을 모색한 그는 모두가 완전하게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사회주의자가 된다. 그런 너무나 순박한 사회주의자의 이상은 그가 죽음을 선택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의 몽상적인 이상은

 “아들이 혁명이 뭔지 알까?"

 "그럼요. 왜 몰라요." 서돌이의 해맑은 눈이 다소 진지해졌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잘살게 아름다운 집을 짓는 거예요. 맞죠?" 를 통해서 보여주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그 날의 대화 속 그 ‘아름다운 집’ 이었다.

 그가, 그 시대를 살아간 한 지식인의 꿈과 이상이 어떻게 굴절되고 권력에 이용되는지를 읽어가면서 나는 그를 지켜보는 헌신적인 아내 신여린이 되었다가, 그를 평생토록 사모해서 가슴에 묻어 둔 최진이 되었다가, 꼭 살아서 독자적인 혁명사상을 가져달라고 나직하고도 힘찬 목소리로 당부하는 박헌영이 되기도 했고, 권력으로 사위어 가는 조선혁명의 불씨를 그의 가슴 안에서 타오르기를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이현상이 되기도 했지만, 간절하게 해맑은 눈으로 아버지를 지켜보는 4살짜리 서돌이다.

 아버지로서 자식으로서 지아비로서 현실의 벽에 부딪혀 지켜가지 못하는 것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은가. 지금도 골목 모퉁이 집 플라스틱의자에 엉덩이를 겨우 걸치고 술잔을 비우고 있을 수많은 등들이 보였다.

 ‘나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를 화두처럼 짊어지고 가는 굽은 등들이.

 "나는 당신의 사상에 반대한다. 하지만 당신이 그 사상 때문에 탄압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편에 서서 싸울 것이다. --볼테르--"

 이 자막으로 시작 되는 영화 '선택'을 보면서 사상  때문에 탄압 받는 청년 김선명, 해방이 되던 해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다는 말에 매료 되어 북한을 선택한 그 선택 때문에 43년 10개월을 감방에서 보낸 그와 리진선이 겹쳐보여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다. 볼테르처럼 싸우지도 못하는 소시민인 나는 그저 울기만 했다.

 전 세계 역사상 얼마나 많은 혁명가들이 이 아름다운 집을 꿈꾸고 짓기 위해 자신의 청춘과 생명을 불살랐을까. ‘혁명가’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저 한 개개인 삶들이... 이상들이...

 노예의 삶을 벗어나기 위해서, 봉건영주에 저항하고 식민주의자에 대항하고, 그리고 만민평등의  사회주의를 따랐던 숱한 사람들.....

 필연적으로 선택해야 하는 이상의 옳고 그름은 먼 훗날 역사가 평가한다.

 ‘선택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이상의 선택에 맡긴 사람들의 선택.

 김선명의 선택...

 리진선의 선택... 

 나라면...

 너라면...

 그렇게 박헌영도 되고, 이현상도 되어보는 과정을 겪으면서 어린 시절 이데올로기가 주는 공포와 편협의 그릇된 시선을 벗어던졌다.  

 물론 그릇된 이상을 갖고 있었음에도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이상이 옳았다고 생각하며 아무 것도 모른 채 죽어간 사람도 우리 역사에는 숱하게 많을 것이다. 누구도 수많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 권력을 움켜쥔 악랄한 사람들은 이렇게 숱한 순진한 사람들의 순수한 이상을 사욕을 위해 악용했고 순수한 이상의 깃발을 전체라는 이름으로 짓밟는 과정을 우리는 고스란히 지켜 보아 왔다. 

 리진선의 일기는 그 실체를 똑똑히 보여주면서 아직 오지 않은 그대, 바로 나일지도 모르고 너 일지도 모르는 그 그대들, 당신에게 쓴 편지로 끝을 맺는다.

 그 끝은 바로 인류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다.

 ‘이미 사라진 수많은 이들이 제 몸속에 살아 숨쉬었듯이 저 또한 당신의 몸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삶은 그 뿌리부터 나눔이요, 사랑인 까닭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존경하는 지인은 이 책 독후감의 제목을 ‘바다로 지는 달’로 썼었다. (퍼다 두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그 싸이트의 폐쇄로 현재의 나로선 찾을 수가 없다.) 

 ‘바다로 지는 달은 고혹적이오.’ (이런 낭만적인 문장의 표현들 때문에 중간에 이 글이 픽션인 것을 눈치 채게 됐지만... 그 제목을 차용하고 싶었는데 그 지인께 양해를 구할 수 없어서  아쉽게도 포기했다.)

 지리산 빨치산의 대명사로 남아버린 이름, 이현상은 해남 달마산 정상에서 시나브로 바다로 뚝뚝 떨어지는 달을 보며 말한다.

 처음 도보 여행을 나섰을때 내 곁에서 든든한 수묵화처럼 따라오던 그 아름다운 달마산...  톱니같은 달마산 정상에서 바다로 지는 달의 모습이 보인다.

 이 땅의 백두대간의 끝인 장소에서 우리에게 완고한 인상의 전형으로만 그려지는 실천적 사회주의 혁명가를, 작가는 인간의 여린 품성을 가진 역사를 살아 간 혁명가의 시선으로 그린다. 시종일관 역사 속 역사를 바라보게 하면서도 내내 소설적 긴장감과 운명의 끈으로 연결된 소설적 상상력으로 완급을 유지하며 책을 붙잡게 했다.

 좋은 책이 주는 감동으로 떨리고 벅차  오르는 여운을 아는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나는 여전히 ‘아름다운 집’을 꿈꾸는 눈 맑은 몽상주의자를 기다린다. 

 아직 오지 않은 나의 그대가 만들어 줄 '아름다운 집'을 꿈꾼다.

 그러나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내가 꿈꾸는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아직 오지 않은 당신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 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상으로 더운 가슴을 가진 미완의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2004. 7. 16.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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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는다 세트 - 전3권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고정아 옮김 / 효형출판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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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반의 뒷모습.

             --나는 걷는다.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고정아, 임수현 옮김. (효형출판)

             --길을 지우며 길을 걷는다. 이원규 지음. (좋은생각)

 길.

 길.......

 하루도 길을 걷지 않은 날이 없건만 길은 늘 그리움이고, 목마름이고, 안타까움이고, 설렘이다. 그 길에서 도반을 만났다. 그 도반들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갈한 뒤태를 가졌는지, 어지러운 발자국을 함부로 남기던 내 뒷모습이 부끄럽다.

 ‘나는 걷는다.’

 이 책을 신문의 서평에서 처음 만났던가? 이스탄불에서 시안까지 느림, 비움, 침묵의 1099일이라는 부제와 실크로드를 걸어서 기록한 내용이라는 것도 마음을 끌었지만, 아직 한번도 실망을 안겨주지 않은 효형출판 이라서 안심하고 인터넷 주문을 했다. 책을 받고 보니 400페이지가 넘는 두께에다 여백이 거의 없는 빽빽한 글씨들, (여행기라서 사진이 반도 넘을 거라 예상했다.) 재생지를 이용한 편안한 제본이 역시 효형출판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거기다 만원미만의 책값도 맘에 들었고. (상업적인 출판사였다면 적어도 6권 이상의 원색 현란한 책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겉에서부터 흡족한 이 책 세권은 두 달여 동안 나에게 말 없음 속에 무수한 말들을 건네는 동행이었다. 출퇴근의 버스 안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벤치에서, 쌍계루 기둥에 기대어 앉아서, 기차에서, 친구네 방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서, 일하는 짬짬이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조금씩 낡아가면서 발자국을 남겼다. 내가 있는 곳에 베르나르도 있었고 그가 가는 곳에 나도 동행이 되었다.

 실크로드 1만 2천키로. 실크로드....... 상상속의 그 매력적인 비단길.

 저 오래 전에는 동, 서양의 교역이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낙타 등에 문화와 문명을 싣고 오고갔고, 그 다음에는 총칼을 앞세운 정복자의 말발굽들이 가득 채웠고, 여전히 국가간의, 민족간의, 종교 간의 분쟁이 생성됐다 소멸되면서 진행 중인 길. 

 참 여러 사람들이 그 길을 따라갔지만 단편적인 것들로만 아련하게 그려서 늘 조갈난 사람처럼 더 갈증이 나도록 아득한 길.     

 그길, 일만 이천 키로를 걸어서 간다. 낙타도 없이, 일행도 없이, 무기도 없이, 달랑 정확하지도 않은 지도 한 장을 들고 마르코 폴로를, 대상의 흔적을 찾아간다....... 그저 걸어서 간다.

 그 무모한 계획의 3년 여정을 그의 뒤를 따라 세세하게 기록한 그의 글들과 함께한 두 달.

 나는 어디에 있든지 그의 걸음 속 고독한 사막에 있었고 정수리를 쪼아대는 뜨거운 햇볕을 아끼는 모자 하나로 막았다. 내일의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한 쿠르드인들이 나그네를 반갑게 맞으며 내놓은 식사를 허겁지겁 먹고 세간 없는 옹색한 주인의 침상을 차지하고 잠을 잤다. 낯선 도보 여행자를 향한 궁금증에 모여든 사람들의 질문 공세를 받으며 길거리 식당의자에 앉아 짧은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우정을 나누고,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그의 걸음에 끼여서 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군인들의 제지를 받고, 불의를 따지는 정년퇴임한 사회부 기자의 눈으로 세상의 변방을 본 그의 생각에 동의했고 걸음걸음에 담긴 자연과 환경, 문화와 역사의 충돌과 보전을 생각했다. 천년의 세월과 함께 사라져가는 문화, 대상들의 숙소, 환경을 보는 안타까운 지구인으로서 우리는 동의하기도 했지만 동, 서양 사고의 관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재인식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좋은 도반이었다. 같은 길을, 때로는 같은 생각으로 때로는 다른 시선으로 함께 가는 도반, 우리는 개별의 홀로이고 동시에 여럿인 동행이다.    

 길....... 책....... 문화....... 역사....... 세상....... 영토....... 분쟁....... 정치....... 환경....... 지도....... 언어....... 종교....... 생활....... 그리고 사람들. 무엇보다 그 모든 것을 채워가고, 바로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 땀내 나는 모든 사람들이 동행이다. 길은 바로 그 사이에 놓여있었다.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

 이 책을 책방에서 집어든 것은 제목에 끌려 눈길을 사로잡은 표지였고, 사게 만든 것은 4장에 걸쳐있는 지리산 세석의 강렬한 원색이었다. 접힌 표지를 펴면 피아에서 만났을 법한 나무숲 속 길이 열린다. 언제나 그리운 지리의 길들, 피아 계곡의 그 강렬한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찾고 싶은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길이요, 길을 지워 본 사람만이 마침내 찾을 수 있는 길인 것이다.

 ‘지리산 편지’라는 부제가 붙은 시인의 편지를 받아 든 내내 뚜벅뚜벅 발자국을 찍으며 나무사이에서 길을 잃고, 나무의 언어, 책을 들고 서있는 내게 길이 말을 걸었다.

 지리와 섬진의 길들에 찍힌 그의 무수한 발자국들 하나하나는 시어로 말 걸어왔고 깨달음의 풀씨들은 산문으로 들렸다. 발바닥이 곧 날개인 시인의 비상은 거친 실크로드를 오래 따라 걸은 내게 이번의 ‘길을 지우며 걷는 길은’ 푹신한 오솔길이면서 황토 흙 매끈한 우리 산야, 바로 내 땅의 순한 길을 보여준 것이다. 굉음으로 질주하는 트럭들이 산을 관통하는 길을 걸어도, 구비구비 산꼭대기까지 이어지는 승용차물결속을 걸어도 그 모든 길들은 내 안으로, 세상 안으로 날아가는 길이라는 것을 말한다. 길은 말 걸기를 시작했다. 

 길.

 그는 지금 길에 있다. 지난 3월1일. 삼인행(三人行) 이면 서로 스승이자 제자이며 도반이라는데 도법스님, 수경스님과 함께 “생명 평화의 탁발 순례”를 시작해서 지금, 어느 이름을 알지 못하는 마을을 지나는 먼 길을 가고 있을 것이다. 시작은 있으되 끝은 없는 만행의 고행 길, 그 길들을 따라 꽃은 피었다가 지고 단풍은 걷는 속도로 남하해 내려올 것이다. 그들의 한 걸음 한 걸음에 얹히는 생명들의 무게와 평화의 날개가 이 땅, 사람들의 마을에, 사람들의 가슴에 차곡차곡 내려앉을 것이다. 

 그 기원이 가슴 벅차다.

 그 길의 말들이 소중하게 들려온다.

 길.

 나는 언제나 길 위에 있다. 그 모든 길들은 결국은 세상에게서 사람에게로 이어지는 개별의 독립적인 길이고 공유와 연대의 길이다.

 길을 잃고 막막하게 서 있을 때, 그저 서 있을 때 도반은 속삭인다.

 “잠시 가던 길을 잃었다고 무어 그리 조급할 게 있겠습니까.

 잃은 길도 길입니다. 살다보면 눈앞이 깜깜할 때가 있겠지요.

 그럴 때는 눈앞이 깜깜할 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 길이 아니겠는지요.”

 잠시 속삭이면서 스치는 듯 떠나는 도반의 뒷모습은 단정하다. 오래 걸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뒤태.......

 걷고 또 걷다보면 나도 언젠가는 도반의 뒷모습을 닮아있을 것인가.

 나는 오늘도 실크로드 속으로, 체념을 통해 세상을 다 가진 노인들과 당산나무가 지키는 마을 속으로 길을 따라 간다.

 그대는 어디쯤 가시는지.......요.

 "먼 길의 그대를 위해 군불을 지핍니다.

 천식의 그대여,

 오늘만이라도 모든 짐을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2004. 7. 30.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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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1
김남희 지음 / 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내게 말 걸어오는 길. 
                           --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김남희 지음. (미래 M&B)

 사실 이 책을 사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대부분 오마이 뉴스에서 읽었고 그런 종류의 책은 바람의 딸 한비야로 충분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내가 생각을 바꾼 것은 책의 판매 수익금이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사귄 친구 빼마와 자미안이 티베트 노인들을 위한 공동체를 지을 때 건물 한 층을 올려주겠다 한 약속’ 에 쓰고 싶다는 작가의 말을 전해들은 순간이었다. 그것이 하나의 상술에 불과하고 과연 몇 퍼센트가 그들에게 전해질지 의심 많은 나로서는 미심쩍기는 해도 믿기로 했다. 그들을 직접 도울 수는 없지만 내가 좋아 산 책 한권이, 작은 돈을 보태 누군가에게 쓰일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은가. 그러나 일반 서점에서 책을 사는 일은 이제는 무모한 것처럼 여겨진다.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해놓고 기다리는 동안 예상보다 늦었다고 적립금을 2000원이나 더 올려주는 횡재도 누렸으니 서점이 사라지는 속도는 인터넷보다 빠를지 모른다. 책들을 받아놓고 이틀, 하고 있는 마음 바쁜 일에 겉만 훑어보고 상자 째 멀찌감치 모른 척 밀어두고 있었다. 그런데 자꾸만 모니터로 본 것과 같은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그것만 확인하자하고 펼쳐든 순간, 재생지 오래된 책 냄새가 나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내용이나 사진은 거의 그대로 본 것임에도 불구하고 두어 시간을 책 속에 고개를 묻고 있었다. 나는 확실히 아날로그임을 끄덕이면서.

 이 책의 제목은 제법 길다. 위에 적은 것 앞에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이라는 말이 덧붙어 있다. 아무리 용감하고 씩씩한 척 무장해도 우리들은 대부분 소심하고 겁 많다. 그리고 나름대로 살아오면서 지켜온 습관이라든가 원칙을 고수하는 까탈스러움을 가지고 있다. 거기다 여자 혼자라는 상황을 생각하면 참으로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여행자가 되고 만다. 출판사에서야 호기심을 끌려고 그런 제목을 덧붙인 것일 테지만 여행을 준비하는 우리는 모두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과 소심함을 갖는다. 미지에 대한 큰 호기심과 비례해서 잔걱정들이 그만 포기하고 싶게도 만드는 것이다.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러운’ 은 소수의 특이함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함이다.

 그렇게 내가 아는 모습을 한, 자칭 까탈이인 한 여자가 거기 있었다. 홀로 가는 길이 외롭고 무섭더라도 행복한 순간을 더 많이 깨달으면서 걸어가는 여자, 그는 김남희 이기도 하고 바로 내 자신이기도 하다. 그가 걷는 많은 길들을 이어서는 아니더라도 구간 별로 나도 많이 걸어보았다. 그 길 위의 내가 보이고 한 여자가 보이고 그 길이 주던 행복한 시간들이 떠올랐다. 한비야처럼 다변가가 아닌 김남희의 길이 거기에 오롯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그 생각들을 엿보자, 길이 내게 말을 건다.

 “6월 9일 토요일, 맑다.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 사자봉 땅끝.

 토말비 앞에 서서 무사귀환을 기원하고 나니 8시. 출발이다. 813번 지방도로를 따라 걷는다. 태양은 아직 구름 뒤에 남아 있고,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하다. 도로를 달리는 차도 보이지 않는다. 상쾌하다.”

 “6월 18일 월요일, 비 오다.

 짐을 다 싸놓고도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한 시간 넘게 마음을 잡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빗줄기가 좀 약해진다 싶어 마음을 다 잡고 나서니 8시 반. 다시 비는 세차게 쏟아진다. 길 위에 나선지 5분도 채 되지 않아 신발까지 다 젖었다. 피하거나 돌아설 틈도 없이 다 젖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하다.”

 “6월 19일 화요일, 비.

 지금까지 330킬로미터를 걸었다. 아직 남은 20여 일. 여전히 나는 걸을 것이며,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남길 것이다. 좀 더 편하고 싶다는, 좀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깨끗한 잠자리에 몸을 누이고 싶다는 욕망 또한 내 안에서 바글댈 것이다. 그 갈등과 욕망을 때로는 누르며, 때로는 인정하며, 내 한계와 수준 속에서 이 길을 걸어 갈 것이다. 하지만 더 이상 눈치 보지 않을 것이다. 그저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도록 노력할 것이다.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내 모습을 들여다봄으로써, 남들에게로 나가는 문을 열수 있도록.”

 “6월 25일 월요일, 흐리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이 바뀐다. 희망을 품고 열정으로 살아가는 사람 곁에 서면 나도 희망에 들뜬다. 정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내 삶의 희망이여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내 좋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인가.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고 싶다는 큰 꿈을 가져본다.

 오늘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본다. 길 위에 서면 날마다 새롭다. 늘 비슷한 것 같은 길도 다 다르고, 다 같은 사람살이 어디가나 비슷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새롭다. 산다는 건 끝이 없는 학교이자, 희망을 배우는 긴 길이다. 이 길 위에 오르길 참 잘했다.”

 “7월 1일 일요일, 흐리다.

 지친 몸과 마음으로 걷는 길. 아스팔트 위로 기어 나온 여치를 피하려다 밟아 죽였다. 풀 섶에 가만히 있지, 그 안에서 그냥 다른 여치들처럼 그게 세상의 전부인줄 알고 살아갈 것이지, 기어이 밖으로 나가다 밟혀 죽은 여치가 꼭 나 같아서 도로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길 위에서 울며 보낸 오후가 저문다.”

 “7월 3일 화요일, 비온 후 개다.

  ....... 오늘 그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릴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

 “7월 5일 목요일, 오락가락 하는 비.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같이 나누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얼마간 거리를 유지한 채 앞서거니 뒷 서거니 걷고 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거리가 필요하다는 걸, 말과 말 사이에는 침묵이 필요하다는 걸 형이 알고 있는 듯해 고맙다........ 살아 있음이 이유도 없이 고마운 밤이 깊어간다. 생은 내게 얼마나 더 자주 예고도 없는 선물을 던져주고 갈 것인지.”

 “7월 7일 토요일, 눈부시게 푸른 하늘.

 뭔가 멋진 말을 스스로에게 들려주리라 다짐했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여기까지 걸어서 오고야 말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어리둥절할 뿐이다. 옆에서 누군가 먼 산을 가리키며 금강산이라고 말을 한다. 나는 여름 햇살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는 산을 눈에 두고 오래오래 앉아 있다. 언젠가 북녘 땅을 가로질러 걸으리라 새로운 다짐을 가슴에 담은 채.”

 “길은 위대한 학교였다.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스승이었다.

 세상에 나온 모든 목숨이 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누구에게나 배울 점이 있음을, 나누며 사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이며 사람들은 누구나 소통을 꿈꾼다는 것을 길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 ........

 820킬로미터를 걸어 다다른 길의 끝. 길의 끝에서 내가 본 것. 철조망을 넘나들며 노래하는 새와 막힘없이 이어지던 푸른 하늘과 바다. 언젠가는 북녘 땅 넘어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에서 아프리카까지 자유롭게 갈 수 있는 날을 꿈꾸어 본다. 익숙한 것들과의 헤어짐을 꿈꿀 수 있는 용기가 그때에도 내게 남아 있기를. 서른둘의 찬란한 여름, 그 여름을 통과하며 나는 여기까지 걸어와 가로막힌 벽 사이의 작은 틈을 발견했다. 그 작은 틈으로 호흡하며 벽 바깥의 세계를 상상하며 맑은 공기를 받아들인다. 그 틈으로 내 몸을 조심스레 디밀어본다. 아직은 틈이 내 몸에 비해 너무 작다. 몸을 구겨 넣어야 할 것도 같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손이나 팔을 다치기도 하겠지만 더 이상 겁내지 않으리라.

 나는 곧 세상 밖으로 나갈 것이며, 그곳에서 내가 볼 최초의 것이 사람의 얼굴이기를 꿈꾸어본다.”

 이런 말들을 따라가다 보니 김남희의 것이 아닌 내게 거는 길의 말이었다. 나 아닌 누구라도 길에서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내게 말 거는 길들이 역마의 피들을 달래준다. 820킬로미터를 29일간 걸어서 여행을 할 여력이 없는 지금의 내게 아침가리, 미천골, 대관령 옛길의 속살거림을 들려준다. 귀가 점점 커지는 것 같다.

 ‘혼자라면 더욱 좋다. 마음이 움직이는 그 순간, 길을 나서자.’ 그 다짐을 새겨 넣으며 책을 덮는다. 덮은 손 위로 길이 놓이고 길들은 12월, 오후 햇살처럼 포근하게 퍼져간다. 나는 그 길들을 따라 세상과 소통할 것이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 속으로.

 아, 언제 길 위로 나가서 수업을 받지. 나머지 공부에 매달려있는 요즘이다.

 2004. 12. 3.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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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15권 양장본 세트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인 이야기 10 권의 제목이다.
 월드컵의 열기속에서 현재의 로마, 이탈리아가 하는 행동들을 지켜보면서 고대로마가 그리웠다.
 봄부터 책상 위에 놓여있는 이 책을 집어든 것은 당연한 결론이었을 것이다.
 책 표지를 장식한 아피아 가도를 따라 한 없이 걸으면 고대로마를 만나게 될까.
 수돗물이 쉬지않고 콸콸 쏟아지는 로마 거리를 보게 될까.
 기대로 시작한 책읽기는 무리한 인내심을 요구했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거의 논문에 가까운 연구서였던 것이다.
 연작이 아니라면 도저히 읽을 수 없고 아마 손도 대지 않을 취향이었다.
 지극히 싫어하는 공부를 해야하는 심정으로 억지로 끼적거리며 먹기 싫은 밥, 퍼먹듯 시작했다가 어느 순간 허겁지겁 먹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연필로 밑줄까지 좍좍그어가며 읽었다.
 그것이 나나미의 작가적 역량 이라는데 생각이 미친다.
 전문가 정신, 독자를 사로잡는 능력을 그는 가졌다.

 로마를 이해하기 위해 팍스로마나를 실현한 로마를 알기위해서,
반드시 거쳐가야 할 로마적 사고가

정복한 나라에 도로를 만들고, 마실수있는 수도를 끌어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 되는 걸 알 수있었다.
 정복한 나라를 속국으로만 보지 않고 세계인, 로마인으로 동화 시키는 힘은 바로 거기,
동등한 주권을 주고 길을 내어 누구나 왕래가 가능케하고 그 권리를 즐길수 있도록 유지 관리 하게 한것이다. 군주가 바뀐다고 정책을 바꾸지 않고 일관성 있게 계속 한 그 힘이 로마에게 천 년의 영광을 주었구나하는 확신이 생긴다.

 일회적으로 생겨났다 소멸되는 그 많은 입법 사안들.
소파협정 개정하라고 목이쉬게 외치는 목소리, 채 피어나지도 않은 여린 목숨들이 길바닥에 내동이쳐도 모르쇠하고 니잘났니 나잘났네 하고있는 금배지의 군주들.
 열흘씩이나 물에 잠겨 목숨 같은 것들은 악취를 풍기고 썩어가는데 몇 푼의 돈으로 할일 다한 것처럼 늦여름 휴가를 가려는 나의 몰염치성에도 민족이라는 이름을 붙일수 있을까.

 길이 인프라임을 확신하고 그 기반 위에 나라를 구축한 로마.
 로마인 이라는 자긍심에 어떤 길 하나 대충 만들지 않고 지형에 맞게 소재에 맞게 길을 만들고 다리를 놓은 융통성, 그런 것들의 부재를 뼈아프게 각성케한다.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고 어리석은자는 경험에서 배운다는 격언이 있다지만,

나는 역사와 경험 양쪽에서 배우지않으면 정말로 배우는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지식이지만 그것을 피가 통하는 산 지식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경험이라고 생각 하기 때문이다."
 나나미의 이 말이 오래도록 귓전에 울린다.

 제국의 심장, 로마.
 그 곳으로 이르는 길은 잘 닦여있고 100년동안 관리를 안해도
유지가 가능케한 기술자들의 프로정신이 묻혀있다.
 지금도 이탈리아의 국도는 당시의 가도를 주축으로 하고 있다니 놀랍지도 않고 부럽다는 생각이든다.
 그렇게 로마로 가는 길들은 살아서 내게로 걸어오라 한다.
 그것이 꼭 로마를 향해서든 이상을 향해서든.
 정말 마음에 꼭 드는 아피아가도를 내 가슴에도 놓아야겠다.

 그 지형에 맞게 주변 소재에 맞게.


                                                       2002. 8. 21.  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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