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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
천운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8월
평점 :
품절
할머니를 땅에 묻을 수는 없었다. 그녀 몸을 짓눌렀을 흙더미와 돌덩이로도 충분했다. 엄마는 인부에게 웃돈을 얹어주며 곱게 빻아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의 유골 상자를 받아든 엄마는 폭우처럼 눈물을 쏟아냈다. 곱게 빻아진 그녀의 뼈는 꼭 흰 명랑 가루 같았다. 납골당에 넣기 전, 나는 그녀의 뼛가루를 조금 덜어내 작은 상자 안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이 생각날 때마다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손가락에 침을 묻힌 다음 혓바닥으로 맛을 보곤 했다.
내 내부에는 언제나 나를 바라보며 침묵하는 그녀가 있다. 그녀는 내 속에서 숨쉬고 내 속에서 잠을 잔다. 그녀는 가끔 내 속에서 버선발을 내밀기도 한다. 나는 내 속에 있는 그녀를 위해 명랑을 먹는다. 설탕처럼 하얗고 반짝이는 명랑 가루에서는 그녀의 냄새가 난다.
천운영 소설집 -명랑 중에서... 명랑의 부분 발췌 (문학과 지성사)
첫 번째 소설집'바늘'을 읽었을 때 이 작가에게 빠져들었다. 이 젊은 작가에게는 뭔가가 있다. 딱 꼬집을 수 없는 끌림으로 나를 이끈다. 촘촘한 바늘로, 표정 없는 몸뚱이에 영혼을 실리게 하는 문신의 힘이 있다.
잔혹하다고 비명 지르며 도망쳐버릴 수 없게 만드는 흡입력이 있다. 그의 두 번째 소설집도 '바늘' 처럼 사로잡을 것인가? 첫 번째 수록 작품'명랑'에서 엄마가 후식처럼 드시던 '뇌신'과 '소다'를 떠올린다. 푸른빛을 띠는 파리한 형광등 불빛을 닮은 흰색, 입 안에 탁 털어 넣고 혀에 닿았을 때는 진저리치게 쓰다. 다시는, 다시는 먹지 말아야지 생각하고 있다가도 어느 새 또 진저리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공통의 조건을 가진 '뇌신' '명랑' '소다'.......
이 소설'명랑'도 그것들과 같기를 기대한다. 아니,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유골을 먹는 그녀, 벌써 속이 거북한 듯 느껴진다. '소다'를 먹어야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