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다 키트가 그보다 훨씬 더 야심만만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늘 그랬다. 하지만 리처드의 전화가 왔을 때, 스리랑카에서 출발하는 첫 번째 비행기에 그를 태운 것도 키트였다. 프로듀서들에게 제작을 일주일 동안 중지하게 해서 그가 뉴욕에 다녀올 수 있게 한 것도 키트였다.
"화나게 하려는 건 아니지만, 윌럼." 키트는 조심스레 말했다. "네가 주드를 사랑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좀. 뭐 네 일생의사랑이라거나 하면 이해하겠어. 하지만 이건 너무 극단적이야,
네 경력을 이런 식으로 막는 건."
하지만 그는 가끔 자기가 누군가를 주드만큼 사랑할 수 있을까 싶었다. 물론 주드 자체가 좋지만, 주드와 같이 지내는 게, 자기를 그렇게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이 있다는 게, 그날 자기의모습을 늘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거라 믿을 수 있는 사람이있다는 게 편안했다. 그의 일, 그의 삶 자체가 가장과 가면극이었다. 그와 그를 둘러싼 상황은 모든 게 끊임없이 변했다. 머리, - P22

몸, 그날 밤 어디서 잘지. 가끔 그는 자기가 밝은색 병에서 밝은색 병으로 계속해서 따라지고 있는 액체, 한 번 옮길 때마다 조금은 홀리고 조금은 남는 액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주드와의 우정은 자기에게도 진짜배기,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가장으로 이루어진 삶 속에도 본질적인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자기가 못 볼 때조차 주드는 알아봐주는 뭔가가 있다는 느낌을 줬다. 마치 주드가 지켜봐주고 있다는 게 자기를진짜로 만드는 것 같았다.
대학원 때 한 선생님은 최고의 배우들은 가장 지루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배우는 자아를 사라지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자의식이 강한 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배우는 자신을 캐릭터에 녹아들게 해야 한다. "개성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팝스타가 돼라." 선생님은 말했다. - P23

그는 그 말에 담긴 지혜를 이해했고, 지금도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다 자아를 갈망했다. 배우 생활을 오래할수록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으로부터 정처 없이 멀어져가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가 더 어려워진다. 그렇게 많은 동료들이 다 그렇게 망가진 게 과연 놀랄 일일까? 그들은 다른 사람 흉내를 내면서 돈을 벌고 인생을 살고 자기의 정체성을 만든다. 그렇다면 그들이 자기 인생을 모양 짓기 위해 끝없이 다음촬영장, 다음 무대를 필요로 하는 게 놀랄 일인가? 그게 없다면그들은 무엇이며 누구란 말인가? 그래서 그들은 뭔가 자기만의것을 가지려고 종교를, 여자친구를, 대의를 찾는다. 그들은 자지도, 멈추지도 않고, 혼자 있는 걸, 자기가 누구인지 질문해야만 하는 걸 두려워한다. ("배우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듣는사람이 없으면, 그래도 배우일까?" 한번은 친구 로먼이 물었다. - P23

그는 가끔 그게 궁금했다.)
하지만 주드에게. 그는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그의 친구였고, 그 정체성이 다른 모든 것을 대신했다. 그건 그가 너무 오래 살아온 역할이라 지울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됐다. 주드에게는,
주드 자신이 일차적으로 변호사가 아니듯이 그도 일차적으로 배우가 아니었다. 그건 그들이 상대방을 묘사할 첫 번째도, 두번째, 세 번째 방식도 아니었다. 다른 사람인 척하면서 인생을 살기 전 그의 모습 ㅡ형이 있는 사람, 부모가 있는 사람,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인상적이고 흥미진진하게 보던 사람 ㅡ 이 어땠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주드였다. 자기의 과거 모습, 다른사람이 되려고 굳게 결심했던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원하지 않는 배우들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일깨워주는 사람을 원했다. 그는 절대 자기가 배우라는 사실을 가장 흥미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을 사람 옆에 있고 싶었다. - P24

정직히 말해서, 그는 주드와 함께 오는 사람들, 해럴드와 줄리아도 사랑했다. 주드의 입양은 그가 처음으로 주드가 가진 것에 부러움을 느꼈던 일이었다. 그는 주드가 가진 것들-그의지성과 사려 깊음, 풍부한 지식을 늘 대단하게 생각했지만, 그를 질투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해럴드와 줄리아가 주드와함께 있는 모습을, 주드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을 때조차 그를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을 보면서, 그는 공허함 같은 걸 느꼈다. 주드는 부모님이 없었고 대부분 그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살았지만, 자신에게 부모님은 소원하기는 해도 적어도 그를 그의 삶에 붙들어 매어주는 존재였다는 걸 느꼈다. 가족이 사라지자, 그는 공중을 부유하는 종잇조각, 바람이 휙 불 때마다 위로 - P24

날아가는 종잇조각이었다. 그와 주드는 그 점에서 하나였다.
물론 이 부러움이 말도 안 되고 터무니없이 치사하다는 건 알았다. 그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고, 주드는 아니었다. 그리고 해럴드와 줄리아가 자신이 품은 애정만큼이나 그를 사랑한다는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의 영화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봤고, 그의 연기에 대한 칭찬과 동료 연기자들과 촬영 기술에 대한 지적인 논평을 포함한 길고 자세한 감상을 보냈다. (그들이 절대 보지 않은 ㅡ적어도 논평하지 않은 ㅡ 유일한 영화는 주드가 자살하려 했을 때 찍고 있었던 영화 <시나몬 왕자>였다. 그도 그 영화는 한 번도 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에 관한 기사 ㅡ 리뷰와 마찬가지로 그는 기사들도 피했다 ㅡ는 다 읽었고, 그의 기사를 실은 잡지란 잡지는 다 샀다. 생일에는 전화를 걸어 뭘 하면서 축하할 거냐고 물었고, 해럴드는 그가 몇 살이 되는 건지 상기시키곤 했다. 크리스마스에는 늘 책과 함께, 전화할 때나 메이크업 의자에 앉아 있을 때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릴 수 있는 웃기는 조그만 선물이나 재치 있는 장난감 같은 걸 보냈다.  - P25

월럼이 얼음 넣은 위스키 두 잔을 들고 돌아온다. 그는 셔츠를 입었다. 잠시 그들은 소파에 앉아 술만 홀짝거린다. 혈관에 열기가 오르는 게 느껴진다. "말해줄게." 그가 윌럼에게 말하자, 윌럼은 고개를 끄덕인다. 말하기 전 그는 몸을 기울여 윌럼에게 키스한다. 평생 그가 먼저 키스한 건 처음이었고, 그는 이걸로 어둠 속에서조차, 회색빛 여명 속에서조차 말할 수 없는모든 것들, 수치스러운 모든 일들, 감사하는 모든 마음을 다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에는 그도 눈을 감는다. 어딘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키스할 때, 섹스할 때 간다고 하는 그곳으로자기도 곧 갈 수 있을 거라 상상한다. 그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이자 보고 싶은 곳, 그에게 영원히 금지되어 있지 않았으면하는 그 세계로. - P60

"알아." 그는 말했다. 그는 늘 맬컴의 집들을 사랑했고, 오래전 그의 열일곱 번째 생일 때 맬컴이 선물로 만들어준 첫 번째집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바보 같지 않아." 맬컴에게 그 집들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그건 통제력에 대한 주장, 인생의 온갖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완벽하게 조종할 수 있는, 말로는 할 수 없는 것을 늘 표현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는것을 상기시켜주는 물건들이었다. "맬컴이 걱정할 게 뭐가 있어?" 맬컴이 뭔가 불안해하면 제이비는 묻곤 했지만, 그는 알았다. 맬컴이 걱정하는 건 살아가는 것 자체가 걱정이기 때문이었다. 삶은 두려운 것, 알 수 없는 것이다. 맬컴의 돈도 완벽한 면역이 될 순 없다. 인생은 그에게 벌어질 테고, 나머지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그에 답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그들 모두는 ㅡ맬컴은 자기의 집들로, 윌럼은 여자친구들에게서, 제이비는 그림에서, 그는 면도날로 ㅡ위안을, 자기만의 것을, 세상의무시무시한 거대함, 불가능성, 그 세상의 분들과 시간들, 날들의 가차 없음을 저지할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 P116

삶이 상실을 보상해준다는 해럴드의 주장을 떠올리고, 그 말이옳았다는 걸 깨닫곤 했다. 하지만 때로는 삶이 그냥 보상 정도가 아니라 터무니없이 과한 보상을 해주는 것 같았다. 마치 인생이 그에게 용서해달라고 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인생을 원망하지 않도록, 인생이 계속 앞으로 가게 허락해주도록 금은보화를 쌓아놓고 온갖 아름답고 근사하고 바라던 물건들로 그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친절하게 대해주는사람들을 따라갔다. 또 사람들을 믿었다. 다시 섹스를 했다. 구원을 희망했다. 물론 매번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건 옳은 선택이었다. 그는 자주 과거의 교훈을 무시했고, 그로 인해보상받았다. 그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았다. 섹스마저도 희망을 가지고 했으니까, 그에게 모든 걸 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했으니까. - P203

윌럼과 연인이 된 직후 어느 날 밤, 그들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만 격식 없이 모여 시끄럽게 즐기는 리처드의 디너파티에 가 있었다. 제이비와 맬컴과 블랙 헨리 영과 아시안 헨리영과 페드라와 알리와 그들의 남자친구, 여자친구, 남편, 부인들이 다 와 있었다. 부엌에서 리처드가 디저트 준비하는 걸 돕고 있는데, 약간 술에 취한 제이비가 들어와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뺨에 키스했다. "주디" 그가 말했다. "너 결국 정말 다 가졌구나, 안 그래? 일, 돈, 아파트, 남자, 어떻게 그렇게 운이 좋냐?" 제이비가 그를 보고 싱긋 웃었고, 그도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윌럼이 그 말을 듣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었다. 윌럼은 그말을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보다 인생이 수월하고, 주드는 그누구보다 더 복 받은 사람이라는 제이비의 확신과 질투로 받아들이고 짜증을 낼 게 뻔했기 때문이다. - P203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제이비 나름의 아이러니, 축하 방식이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과다하지만 그가 깊이 감사하고 있다는 걸 두 사람 다 아는 행운에 대한 축하. 정직하게 말하면, 제이비의 질투에 기분이 우쭐하기도 했다. 제이비 눈에 그는 비참한 달리기로 엄청난 보상을 받은 절름발이가 아니었다. 제이비에게 그는 부럽기만 할 뿐, 동정할 거리는 전혀 없는 동등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제이비 말이 맞다. 어쩌다 그는 그렇게 운이 좋았을까? 어쩌다 이 모든 걸 다 가지게됐을까? 절대 알 수 없다. 언제나 궁금할 것이다.
"모르겠어, 제이비." 그는 미소 지었고 먼저 자른 케이크 한조각을 주면서 말했다. 식당에서는 윌럼이 뭐라고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가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들렸다. 순수한 기쁨의 웃음소리였다. "하지만 알잖아, 난 평생 운이 좋았거든."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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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케일럽은 그의 걸음걸이는 싫어하지만 휠체어는 혐오한다. 케일럽이 처음 낮에 집에 왔던 날, 그는 아파트를 구경시켜줬다. 그는 그 아파트가 자랑스러웠고, 매일 거기서 사는 게 감사했고, 그게 자기 것이라는 게 계속 믿기지가 않았다. 맬컴은 윌럼 방 ㅡ그들은 그렇게 불렀다ㅡ은 그 자리에 그대로 뒀지만 더 확장해서 엘리베이터 가까운 북쪽 구석에 서재를 덧붙였다. 그러고는 피아노가 놓인 길고 개방된 공간과 남향 거실, 창문들이 없는 북쪽에 맬컴이 디자인해서 놓은 테이블이 있고, 그 뒤로는 부엌까지 벽 전체를 책장이 덮고 있었는데, 거기에는친구들, 그리고 친구들의 친구들의 작품들과 여러 해에 걸쳐 사들인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아파트 동쪽은 모두 그의 공간이었다. 침실에서 북쪽 방향으로 옷방을 가로지르면 동향과 남향 창문이 있는 욕실이 나온다. 아파트의 블라인드는 대부분 내려놓지만 한꺼번에 열릴 수 있게 되어 있고, 그러면 공간 전체가 환한 빛의 사각형 같고 자신과 바깥세상 사이의 베일이 홀릴 듯이 - P466

알게 느껴진다. 종종 이 아파트 자체가 거짓 같은 기분이 든다.
아파트를 보면 그 주인이 열려 있고 활기 넘치고 뭐든 대답해주는 사람일 것 같지만, 그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다. 반쯤 가려진 골방들과 어두침침한 미로들과 너무 여러 번 칠해서 나방과벌레가 페인트 층들 사이에 매장되어 생긴 울퉁불퉁한 이랑과기포가 만져지는 벽들이 있는 리스페너드 스트리트가 그를 훨씬 더 정확하게 반영하는 공간이다.
케일럽이 오기 전 그는 아파트에 햇빛이 희미하게 반짝이도록 해뒀고, 케일럽은 그걸 보고 경탄했다. 그들은 천천히 아파트 안을 돌아봤고, 케일럽은 미술작품들을 구경하며 어디서 샀는지, 누가 만든 건지 물었고, 자기가 알아볼 수 있는 작품들에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P467

그는 내내 자신의 오만, 다른 사람들이 가진 걸 자기도 가질수 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일종의 벌을 기다리고 있었고, 여기-마침내 그게 온 것이다. ‘이게 네가 받을 대가야.‘ 머릿속 목소리는 말했다. ‘네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대가야.‘ 제이비가 잭슨을 얼마나 두려워했었는지 생각난다. 그는 제이비의 공포를, 다른 인간에게 꼼짝없이 잡힐 수 있다는 그 공포를 너무나 잘 이해했다. 너무 쉬워 보이는 것-그냥 떠나버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 수 있는지 그는 안다. 예전에 루크 수사에게 느꼈던 감정을 케일럽에게 느낀다. 경솔하게 자신을 맡긴 사람, 너무 큰 희망을 걸었던 사람, 자기를 구해주길 바랐던 사람.  - P477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게 분명해졌을 때도, 희망이 썩어 들어갔을 때도, 그는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떠날 수가 없었다. 그와 케일럽은 잘 맞아떨어지는 짝이다. 망가진 사람과 망가뜨리는 사람, 쓰레기 더미와그 주위를 킁킁대는 자칼이다. 그들은 서로에게만 존재한다. 그는 케일럽 인생의 어떤 사람도 만나지 않았고, 자기 사람들에게도 케일럽을 소개시키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게 뭔가 창피한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들은 혐오와 불쾌감으로 서로 묶여 있다. 케일럽은 그의 육체를 참아주고, 그는케일럽의 혐오를 안내한다.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다면, 교환을 해야만 한다. 늘 알고 있다. 앞으로도 케일럽 이상의 사람은 절대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적어도 케일럽은 기형도 아니고 사디스트도 아니다. 지금 그가당하는 일들 중 이전에 당해보지 않은 일들은 없다. 그는 이 생각을 되새기고, 또 되새긴다. - P477

고통과 공포로 문틀 가장자리를 붙들고 애처롭게 호소하고있는데, 케일럽이 뒤로 물러났다가 달려오는 게, 보이는 게 아니라 들린다. 그의 발이 그의 등을 차고, 그는 캄캄한 계단 안으로 날아간다. 
솟구쳐 오르는 순간 갑자기 카센 박사가 생각난다. 딱히 카센박사 생각이라기보다는 그의 지도를 받으려고 신청할 때 그가 했던 질문이 생각난다. 가장 좋아하는 공리가 뭔가? (얼간이 골라내기 질문이라고, 시엠은 한때 말했었다.)
"등식의 공리입니다." 그가 말하자 카센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공리지." 그는 말했다. - P497

등식의 공리란 X는 항상 X와 같다는 것이다. 이 공리는 X라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항상 자신과 등치해야 한다고, 자신만의 독특성을 가진다고, 도저히 환원할 수 없는 어떤 성질을지니고 있어서 그것은 항상 절대적으로, 불변으로 그 자신과 등치한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고, 그 기본성이 절대 바뀔 수 없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그것을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 항상, 절대, 결코, 이것들은 숫자들만큼이나 수학의 세계를 구성하는단어들이다. 모두가 등식의 공리 - 리 박사는 한번은 그걸 수줍고 새침한 공리, 공리계의 나체부채춤이라고 불렀다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늘 그 공리의 알 듯 말 듯한 측면이, 그 방정식 자체의 아름다움이 그걸 증명하려는 시도에 의해좌절된다는 게 늘 마음에 들었다. 그건 사람을 미치게 만들 수있는, 사람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쉽게 인생 전체가 될 수있는 그런 공리였다. - P497

하지만 이제 그는 그 공리가 얼마나 진실한지 확실히 이해한다. 그 자신, 그의 삶 자체가 그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나는 늘 현재의 나다. 그는 깨닫는다. 문맥은 바뀔 수 있다. 이 아파트에서 살 수도 있고, 즐겁고 보수도 좋은 일을 할 수도 있고, 사랑하는 부모와 친구들도 있을 수 있다. 존경받을 수도 있다. 법정에서는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똑같은 사람,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사람, 미움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공중에 떠 있는 그 찰나의 순간, 높이 떠 있는 황홀함과 끔찍할 게 분명한 착륙 사이에서, 그는 x는 항상 x와 같을 거라는 걸 이해한다. 그
가 뭘 하든, 수도원에서, 루크 수사로부터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돈을 얼마나 많이 벌든 얼마나 잊으려고 노력하든, X는 항상 X와 같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그의 어깨는 우지직하며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치고, 순간 고맙게도 세상이 그의 아래에서 휙 멀어져간다. x=x, 그는 생각한다. x=x, x=x. - P498

"일주일‘에 몇 번!" 나는 말하다 뚝 멈췄어. 갑자기 거기서나갈 수밖에 없었어. 의자에서 코트를 들고 가방을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어. "돌아올 때 여기 있는 게 좋을 거야." 그렇게 말하고난 나가버렸어. (주드는 도망자였거든. 줄리아와 내가 자기 때문에 기분이 안 좋다고 생각할 때마다. 최대한 빨리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려고 애썼어. 마치 자기가 얼른 치워야 하는 불쾌한 물건인 것처럼.)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해변으로 갔고, 자신의 한없는 무능함을, 명백한 잘못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그런 분노를 느끼며 모래사장을 헤맸어. 그때 처음으로 주드가 우리 옆에서 두 사람처럼 사는 한, 우리도 그냥 주드 옆에 있는 두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지. 우린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봤고 다른 건 그냥 안 봤어. 너무 준비가 안 되어 있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쉬워, 그 사람들 불행은 우리 불행이고, 그 슬픔은 이해할 수 있고 한 번씩 자기혐오에 빠져도 그건 빨리 지나가고 타협할 만하지. 하지만 주드는 그렇지 않았어. 그의 문제들을 진단하는데 필요한 상상력이 없어서 도와줄 방법조차 알 수가 없었어.
하지만 이건 그냥 변명에 불과해. - P525

난 그걸 묵인했어. 그가 그런 짓을 한다는 걸 잊어버리기로 한 거야.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해결책을 찾는게 너무 힘들어서, 나 편한 대로 그를 보고 싶어서 말이야.
그가 수천 번의 밤 동안 자기 존엄성을 희생하고 있다는 걸 잊어버리려 하면서도, 내가 그의 존엄을 지켜주고 있다고 변명했어. 그런 게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반박하고 설득하려고 했고, 그걸 알면서도 다른 방법, 더 과격한 방법, 나와 주드를 멀어지게 만들 수도 있는 방법을 취해보려 하지 않았어. 내가겁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 그 가방에 대해서, 그날 밤 트루로에서 알게 된 사실에 대해 줄리아에게 절대 말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결국에는 줄리아도 알게 됐고, 줄리아가 그렇게 화내는모습은 정말 거의 보지 못했어. "이런 걸 어떻게 계속 내버려둘수가 있어?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내버려둘 수 있었어?" 내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묻지는 않았지만, 난 알았어. 어떻게 안그럴 수 있겠어? 나도 그랬는걸.
이제 난 여기 주드의 아파트로, 몇 시간 전 내가 아직 잠에서깨서 누워 있을 때 그가 두들겨 맞고 있던 곳으로 돌아왔어. 나는 손에 전화를 들고 소파에 앉아서 앤디가 주드가 집에 돌아갈준비가 다 됐다고, 병원에서 나와 내 간호를 받을 준비가 됐다고 전화해주길 기다렸지. 블라인드를 걷고 앉아 강철 같은 하늘을 바라봤어. 구름이 다음 구름과 합쳐지면서 흐릿해졌고, 마침내 낮이 서서히 밤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회색 안개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 P531

잊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상상력없게도) 아치형 천장을 상상했고, 하루가 끝나고 나면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이미지들과 장면들, 말들을 모아 무거운 쇠문을 빼꼼 열고 서둘러 그것들을 몰아넣은 다음 재빨리 단단히 닫았다. 하지만 이 방법은 별로 효과적이지 않아서, 그래도 기억들은 서서히 새어 나왔다. 중요한 건 그저 저장하는 게 아니라 없애는 거라는 걸. 그는 깨닫게 됐다.
그래서 그는 해결책을 발명했다. 어떤 기억들ㅡ 사소한 무시, 모욕ㅡ은 무효가 될 때까지, 너무 많이 반복해서 거의 의미가없어질 때까지,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고 자기는 방금 들었을 뿐인 일이라고 믿게 될 때까지 되새기고 또 되새긴다.
더 큰 기억들은 필름 조각들처럼 머릿속에 담고 있다가 한 커트, 한 커트 지워나가기 시작한다. 둘 다 쉽지 않았다. 예를 들어, 삭제 작업 중간에 멈추고 자기가 뭘 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 기억의 일부를 펼쳐보기 시작하면서 과거 일들의 덫에 걸리지않기를 바랄 수는 없다. 당연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밤마다 그 작업을 해야 한다.
물론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더 멀어졌다. 좀 봐달라고 잡아당기고, 무시하면 눈앞에 뛰어들고, 너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해서 다른 생각을 하는 게 불가능해질 지경으로 유령처럼 따라다니지 않게 된다. - P555

그는 오랫동안 기다렸고, 조금 울었다. 피곤하고 겁에 질렸기 때문에, 갈 준비가 떠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그는 눈을 비비고 시작했다. 왼팔부터 시작했다. 먼저 한 줄을그었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아파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를 그었다. 스카치를 한 모금 더 마셨다. 피는 끈적끈적했다. 액체라기보다는 젤라틴 같았고, 환하게 어른어른 빛나는 오일 같은 검은색이었다. 바지는 벌써 피에 흠뻑 젖었고, 칼을 잡는 손에 이미 힘이 빠지고 있었다. 그는 세 번째 선을그었다.
양쪽 팔을 다 끝내고 나자, 그는 샤워실 벽에 털썩 기댔다. 난데없이 베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카치와 자기가 흘린 피 때문에 몸이 더웠고, 다리를 돌며 웅덩이를 이룬피가 몸에 부딪혀 출렁거렸다. 몸 안쪽과 바깥쪽의 만남, 안쪽이 바깥쪽을 씻어주고 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뒤에서 하이에나들이 그를 향해 사납게 울부짖었다. 앞에는 문 열린 집이 있었다. 아직은 가깝지 않았지만, 전보다는 가까웠다. 안이 보일정도로 가까웠다. 쉴 수 있는, 오랜 달리기 후에 누워서 잠들 수있는, 그리고 평생 처음으로 안전할 수 있는 침대가 보였다. - P574

그는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이건 윌럼이야. 그는 되뇌었다. 윌럼은 절대 널 해치지 않을 거야, 절대. 때가 됐어. 때가.
"좋아." 그는 마침내 말했다. "좋아. 물어봐."
그는 윌럼이 의자에 기대앉아 그를 쳐다보며, 한 친구가 다른친구에게 물을 수 있어야 하는. 하지만 절대 질문을 허락받지 못했던 수백 가지 질문들 중 무엇을 고를 건지 고심하는 모습을 봤다. 그러자 눈물이 고였다. 자기가 이 우정을 이렇게 치우치게 만들어서, 그가 달아날 때도, 근원을 밝힐 수 없는 문제들로 도움을 요청할 때도 한 해 또 한 해 윌럼이 너무나 오랫동안그의 옆을 지켜줘서 눈물이 났다. 새 인생에서는 친구들에게 덜요구하겠다고, 더 베풀겠다고 그는 다짐했다. 친구들이 무엇을원하든 줄 것이다. 윌럼이 정보를 원하면 받게 될 거고, 그 정보를 어떻게 줄지 궁리하는 건 그에게 달린 일이다. 그는 상처 받고 또 상처 받겠지만 ㅡ 모두가 그렇다 ㅡ노력하려면, 살아 있으 - P608

려면, 더 강해져야 했다. 준비해야 했다. 이게 삶이라는 거래의 일부라는 걸 받아들어야만 했다.
"좋아, 하나 생각했어." 윌럼이 말하더니, 똑바로 앉아 준비했다. "손등에 상처는 어떻게 하다 생긴 거야?"
그는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질문이 뭐가 될지 몰랐지만, 막상 주어지자 마음이 놓였다. 요즘에는 그 흉터는 거의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제 그는 호박단처럼 반질반질 윤나는 상처를 바라보며 손가락 끝으로 쓸었고, 그 흉터가 얼마나 많은 다른 문제들로, 그리고 루크 수사에게로, 그리고 고아원으로, 그리고 필라델피아로, 그 모든 것들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에서 더 크고 더 슬픈 다른 이야기와 연결되지 않은게 뭐가 있단 말인가? 윌럼이 묻는 건 그저 이 이야기 하나였다. 다른 모든 것들, 으르렁대는 거대하고 추한 문제점들을그 뒤로 끌고 들어올 필요 없었다.
그는 입을 열기 전 머릿속에서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지, 어떻게 이야기를 엮어나갈지 생각했다. 마침내 그는 준비가 됐다.
"난 항상 욕심 많은 아이였어."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고, 식탁너머에서 윌럼이 팔꿈치를 기대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친구가 된 이래 처음으로 윌럼이 청자,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됐다. - P609

애너를 믿게 되고 나서, 그는 루크 수사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를 해줬다. 하지만 다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무에게도이야기하지 않았다. 자기가 바보여서 루크를 따라갔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루크는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끔찍한 짓들을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겪으면서도,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루크가 정말로 그를 사랑했다고, 그 부분만은 정말이라고, 곡해나 합리화가 아니라 진짜라고 믿고 싶었다. 그는 애너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말하듯이 하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괴물이었어, 주드 사람들이 널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널 조종하기 위해서야. 모르겠어? 그게 소아성애자들이 하는 짓이야. 그런 식으로 아이들을 먹이로 삼는 거라고." 어른이 되어서도 그는 여전히 루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 그는 나쁜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른 수사들보다 더 나빴나? 그가 ‘정말로‘ 잘못된 결정을 했나?
수도원에 있었더라면 ‘정말로‘ 더 나았을까? 거기 있었다면 더망가졌을까, 덜 망가졌을까? 루크의 유산은 그가 하는 모든 것, 그의 존재 자체에 남아 있었다. 책과 음악, 수학, 정원일, 언어에 대한 사랑 ㅡ그건 루크였다. 자해, 증오심, 수치심, 두려움,
병, 정상적인 성생활을 할 수 없는,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 없는것 ㅡ 그것도 루크였다. 루크는 인생의 즐거움을 찾는 법을 가르쳐줬고, 한편으로는 즐거움을 완전히 제거해버렸다.
그는 그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지만, 때때 - P618

로 그 생각을 했고,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나도, 루크의 미소 짓는 얼굴이 순식간에 마법처럼 떠오르곤했다. 그는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고 있던 시절, 그가 너무 순진하고 너무 외롭고 너무 애정이 그리운 어린아이여서 아무것도 모른 채 유혹당하던 시절의 루크를 생각했다. 그는 온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문을 열고 있었다. 꽃들의 온기와 향기가 그를 망토처럼 둘러쌌다. 그건 그가 그토록 소박하게 행복했던, 복잡할 것 전혀 없는 기쁨을 알았던 마지막 순간이었다. "우리 꼬마 미남이 왔구나!" 루크는 외쳤다. "아, 주드 ㅡ널 보니 너무 행복하다."


<2권에 계속> - P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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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에 대해 그가 알지 못했던 사실은 성공이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실패도 물론 사람들을 지루하게 만들지만, 그 방식은 다르다. 실패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성공 한가지를 위해 분투한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들 또한 그 성공을 유지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차이점은 달리기와 제자리달리기라는 것이고, 달리는 건 어쨌거나 지루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달리는 사람은 다른 경치들을 통과하며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다시 돌아가자면, 주드와 윌럼에게는 그에게 없는 뭔가가 성공의 숨 막히는 권태로부터 보호해줄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잠에서 깨서 자기가 성공했다는 걸 깨닫는, 여기서 멈추면 자신은 더 이상 성공자가 아니라 실패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 성공한 일이 무엇이건 그걸 매일 계속해야 한다는 걸 깨닫는 그 지루함에서 보호해줄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때로 주드와 윌럼이 그와 맬컴과 진짜로 다른 점은 인종이나 부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끝없는 감탄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비교할 때 그들의 어린 시절은 너무도 하찮고 회색빛이어서, 그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끊임없이 감탄할 수 있는 것 같았다.  - P390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자기가 어디 있는지 몰랐다. 숨쉬기가힘들었다. 코에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만져보려고손을 들려고 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손목이결박되어 있었다. 그제야 그는 자기가 병원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눈을 감고 기억을 되살렸다. 윌럼이 그를 쳤다. 이유도생각났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울부짖었지만 소리가 나오지않았다.
그 순간이 지나가고,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고개를 왼쪽으로돌리자 못생긴 파란 커튼이 쳐져 있어 문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오른쪽, 이른 아침 햇살 쪽을 향해 돌리자, 주드가침대 옆 의자에 잠들어 있었다. 의자가 너무 작아서, 끔찍한 자세로 몸을 구기고 있었다. 무릎은 가슴에 바싹 붙이고, 가슴은무릎 위에 올리고 팔로 종아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자면 안 되는 거 알잖아, 주드‘ 그는 머릿속으로 말했다. ‘일어나면 허리가 아플 거라고. 하지만 팔을 뻗어 그를 - P412

깨울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그는 생각했다. 세상에,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안해, 주드.‘ 그는 머릿속으로 말했고, 이번에는 제대로 울수 있었다. 눈물이 입으로 흘러 들어가고, 닦을 수 없는 콧물이콧방울을 만들며 그 위로 같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미안해, 주드, 미안해, 주드.‘ 그는혼자 계속해서 말했고, 그러고는 커다랗게, 하지만 조용하게 속삭였다. 너무 조용해서 입이 벌어지고 닫히는 소리밖에 들리지않았다. ‘용서해줘, 주드, 용서해줘.‘
용서해줘.
용서해줘.
용서해줘. - P413

몇 달 동안이나 제이비는 얼굴도 본 적 없었다. 물론 소식은듣는다. 맬컴을 통해서, 리처드를 통해서, 블랙 헨리 영을 통해서. 하지만 더 이상 보지는 않는다. 거의 3년이 지났지만 용서할 수가 없다.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자기가 얼마나 고집불통이고 비열하고 무자비하게 굴고 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수가 없다. 제이비를 보면, 자기를 흉내 내던 그 모습이 보인다.
자기가 어떻게 보일까 두려워하던 생각들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할지 두려워하던 생각들이 다 옳았다는 걸 단번에 확인시켜주던 그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친구들이 자기를 그렇게 보고 있으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면적어도 자기에게 그걸 말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그 정확한 흉내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지지만, 그걸 제이비가 했다는 사실에 그는 망연자실한다. 밤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종종 제이비가 입을 헤벌린 채 침을 흘리며 손을 앞으로 내밀고 발을 질질 끌며 구부정하게 걷는 모습이 보인다. ‘내가 주드다. 내가 주드 세인트 프랜시스다.‘ - P423

때로 이 외로움이란 게 그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는 사실, 지금 그의 삶에 뭔가 이상하고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았다면 느끼지 않을 감정 같다. 자기가 원한다고, 자기가 가질 수 있다고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이 그렇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늘 있다. 해럴드와 맬컴은 물론이고 인디아라는 동료 예술가와 동거를 시작한 리처드, 자주 보지 않는 사람들 -시티즌과 일라이저, 페드라, 심지어 설리번판사 판사실의 옛 동료 케리건까지도. 몇몇은 그를 동정하며 묻고, 몇몇은 의심하며 묻는다. 첫 번째 그룹은 그가 혼자인 게 자신의 결정이 아니라 외부적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그를 가엾게 여기고, 두 번째 그룹은 그에게 일종의 적의를 품는다. 그들은 그가 혼자인 게 자신의 결정이며 성인기의 근본법칙을 도전적으로 위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쪽이건, 나이 마흔에 혼자라는 건 나이 서른에 혼자인것과는 다르고, 해가 갈수록 더 이해할 수 없는 일, 덜 부럽고, 더 안됐고, 더 부적절한 일이 되어간다. 지난 5년 동안 그는 모든 파트너변호사 디너에 혼자 참석했고, 작년에 형평법 파트너변호사가 됐을 때는 연례 수련회에도 혼자 참석했다.  - P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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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설리번 판사는 말하곤했다. "쉽게 믿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내 법정에서는 믿음이 중요해. 모든 것들에 대한 믿음이."
그는 자주 이렇게 선언했고, 그러고 나면 끙끙대다가 -판사는 굉장히 뚱뚱했다- 방에서 어정어정 나갔다. 주로 하루 일과, 적어도 설리번 판사의 일과가 끝날 때 보는 광경이었다. 판사는 퇴근길에 판사실에서 나와 재판연구원과 이야기를 나누러 와서는 책상 모서리에 걸터앉아 애매모호한 연설을 늘어놓았는데, 마치 거기 있는 재판연구원들이 서기라서 그가 하는 말을 받아 적어야 하는 것처럼 말 사이를 자주 끊고 쉬었다. 하지만 필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셋 중 판사의 충실한 신도이자 제일 보수주의자인 케리건마저 하지 않았다.
판사가 나가고 나면, 그는 방 건너편에 있는 토머스에게 싱긋미소 지었고 그러면 그는 뭐 어쩌겠느냐며 미안하다는 듯이 눈알을 위로 굴리곤 했다. 토머스도 보수적이었지만, 자기는 "생각하는 보수주의자"라며 "그런 구분을 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완전 우울하다"고 말했다. - P162

하지만 그럼에도, 종종 그는 해럴드가 거기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로스쿨 시절을 추억하고 그에 수반되는 활동인, 로스쿨 재학 당시 본인의 업적을 자랑하는 건 사무실 최고의 오락이었고, 수많은 동료들이 같은 학교를 다녔고 많은 수가 해럴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그리고 나머지는 그에 대해 들었기 때문예). 그는 때로 해럴드의 수업을 들었던 이야기나 얼마나 수업준비를 열심히 했는지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그러면 해럴드가 자랑스러웠고, 비록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건 알지만, 그를 아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다음 해면 헌법에 대한헤럴드의 저서가 출판될 테고, 그러면 사무실의 모두가 헌사를읽고 그의 이름을 보게 될 테고, 그러면 그와 해럴드의 관계가밝혀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심쩍게 생각할 테고, 그러면그는 그의 앞에서 해럴드에 대해 무슨 소리를 했었는지 기억하려고 애쓰는 근심 가득한 얼굴들을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자기 힘으로 사무실에서 자리를 굳힌 거라고, 시티즌과 로즈 옆에 자기 자리를 찾은 거라고. 마셜과 독자적으로 관계를 맺은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 P195

줄리아가 돌아왔을 때, 그는 해럴드가 그의 멍청하고 서투른 짓을 이야기하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저녁식사때 해럴드는 평소 모습이랑 전혀 다르지 않았지만, 그는 리스페너드 스트리트로 돌아가서 해럴드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진짜제대로 된 편지를 써서 부쳤다.
며칠 후 그는 정식 편지 형식으로 된 답장을 받았다. 나중에 평생토록 간직하게 될 편지였다.
"주드에게." 해럴드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됐다. "(필요 없긴해도) 아름다운 편지 고맙게 받았다. 그 편지에 쓰인 모든 말들다 고맙다. 네 말이 맞아. 그 머그는 내겐 정말 소중한 거야. 하지만 너는 더 소중해, 그러니 더 이상 자기를 고문하지 마라.
내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면, 이 모든 사고가 인생 일반에대한 은유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물건들은 깨지고, 때로는 수리되고, 대부분의 경우엔 어떤 게 망가지더라도 삶이 스스로 변화하면서 그 상실을 보상해주지. 때로는 아주 근사한 방식으로 말이야.
사실, 어쩌면 나도 결국 그런 종류의 사람인지 몰라.
사랑을 담아, 해럴드." - P199

그러자 루크 수사는 일어섰고, 이번에는 좀 더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주드, 들어봐. 보여줄 게 있어. 같이 가자." 그러고는 온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뒤를 돌아보며 그가 따라오고있는지 확인했다. "주드." 그가 다시 불렀다. "같이 가자." 그래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를 따라 온실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너무나 잘 아는 온실인데도 마치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처럼 낮선 갈망이 솟아올랐다.
어른이 되어 그는 정확히 언제부터 일이 잘못되기 시작했는지 짚어내는 데 집착하기 시작했다. 마치 그 순간을 동결시켜 - P227

세균배양기 안에 보존했다가 교실 앞에서 들고 가르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바로 그 일이 벌어졌던 때야. 이게 바로그 일이 시작된 곳이야.‘ 그는 생각하곤 했다. 크래커를 훔쳤을때였을까? 루크의 수선화를 망쳐놓았을 때였을까? 처음으로분노발작을 일으켰을 때였을까? 더 말도 안 되지만, 뭔지 모르지만 엄마가 날 그 잡화상 뒤에 버리게 만든 그 짓을 저질렀을때였을까? 그건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건 그날 오후 그 온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호위를 받으며 자기 발로 들어갔을 때, 루크 수사를 따라가기 위해 모든 걸 포기했을 때였다. 그때가 그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는 결코 전과 같지 않았다. - P228

"주디." 앤디는 오늘은 상냥모드일 테고, 어떤 연설도 하지않을 것이다. 그는 앤디가 이끄는 대로 텅 빈 대기실을 지나 아직 열지 않은 진찰실로 들어가, 그의 부축을 받으며 여러 시간을, 여러 날을 보냈던 진찰대 위에 올라가고, 심지어 앤디가 옷을 벗기도록 내버려둔 채 눈을 감고 그가 다리에서 붕대를 풀고 쓰라린 피부에서 흠뻑 젖은 거즈를 떼어내기를 기다릴 것이다.
내 인생, 그는 생각할 것이다. 내 인생.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을 것이고, 그저 그 말만 일부는 찬송처럼, 일부는 저주처럼, 일부는 확신을 바라는 것처럼ㅡ 반복 - P230

하다 그런 극심한 고통을 겪을 때면 찾아가는 다른 세상으로, 자기 세상에서 결코 멀지 않지만 나중에 결코 기억나지 않는 그세상으로 스르르 들어갈 것이다. 내 인생. - P231

둘 다 자연을, 야외를 좋아했고, 둘 다 동물들을 사랑했지. 그런데 어느 순간 네가 주드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더니 주드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한쪽 신발의 풀어진 끈을 매주고는 다시 뒤로 가서 줄리아와 발맞춰 걷기 시작하더군. 정말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별것 아닌 행동이었어. 앞으로 한 걸음 나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가, 줄리아 옆으로 다시 물러나는 것. 너한텐 아무것도 아니었어. 넌 아마 생각도 안 했을 거야. 심지어 하던 대화를 중단하지도 않았어. 넌 항상 주드를 지켜보고 있었지(하지만 너희들 모두 그랬어). 여러 가지 세심한 방식으로 보살폈어. 그 며칠 사이에 난 그걸 다 봤어. 하지만 이 일을 네가 기억할 것 같진 않네.
하지만 네가 그러고 있을 동안, 주드는 나를 봤어. 그때 주드의 표정이라니. 그 순간이 아니고서는 아직도 그 표정을 뭐라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 안에서 뭔가가. 마치 너무 높이 쌓아 올린 축축한 모래탑처럼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어. 주드를 위해, 너를 위해, 나를 위해서도, 주드의 얼굴을 보며 난 나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리라는 걸 알았어. 다른 사람을 위해그런 걸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우아하게 해줄 수 있는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표정을! 주드를 봤을 때, 난 제이컵이 죽은 후 처음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 P234

같다는 말의 의미를, 뭔가가 가슴을 찢어놓을 수 있다는 말의의미를 이해했어. 늘 지나치게 감상적인 말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순간 나는 그게 감상적일지는 몰라도 진실이라는 걸 깨달았지.
그때 알았던 것 같아. - P235

물론 결국엔 걱정할 필요도 없었어. 주드는 그런 생각들을 통제하는 법을 배웠고, 옳고 그름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게 됐으•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런 성향을 가지고도 좋은 변호사가 됐고. 하지만 나중에 종종 그를 생각하면, 그리고 나를 생각하면 슬퍼졌어. 로스쿨을 그만두라고 강력하게 말했더라면 좋았을걸, 드래이먼 241호 비슷한 곳으로 가라고 말했더라면좋았을걸. 내가 준 기술들은 결국은 그에게 필요한 기술이 아니었어. 그의 정신이 있는 그대로 유연하게, 지루한 사고방식으로 스스로를 동여맬 필요가 없는 방향으로 밀어줬더라면 좋았을걸. 한때 개를 그릴 줄 알았던 사람을 형태만 그릴 줄 아는 사람으로 바꿔놓은 기분이야.
그에 관해서라면 난 많은 죄를 저질렀어. 하지만 때로 비논리적이게도 그중 가장 죄책감이 드는 일은 이거야. 내가 밴 문을 열고, 그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어. 난 길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를 태우고 어딘가 황량하고 추운 무채색의 장소로 데려가서 거기다 두고 온 거야. 예전에 내가 그를 태웠을 때는 풍경이 온통 색으로 아른아른 반짝이고 하늘에선 불꽃이 쉬잇하고 터졌고, 그는 경이로운 눈으로 입을 벌린 채 서 있었던 바로 그 똑같은 장소에다가. - P250

훗날 그는 그 일을 일종의 지레받침대,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관계 사이의 경첩 같은 걸로 돌이켜보곤 했다. 제이비와의우정은 물론이고 윌럼과의 우정에 대해. 20대의 어느 순간,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도 순수하고 깊은 만족감이 들어서, 모든 것이 평형을 이루고 친구들에 대한 그의 애정도 완벽한 그순간에서 누구도 움직이지 않아도 되도록 그 주위 세상이 그냥멈춰버렸으면 하는 때들이 있었다. 하지만 한 박자 후에는 모든게 움직이고, 그 순간은 고요히 사라져버린다.
이 일 이후 제이비가 그의 마음속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영원히 줄어들었다고 말하면 너무 과장 같고, 너무 최종적인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이 믿게 된 사람들이 언젠가는 어떤 식으로든 그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걸 이해하게 됐고,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런 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도, 그래도 인생은 쉼 없이 앞으로 나간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실망시킨 사람이 나타날 때마다 적어도 절대 그러지 않을 사람이 하나는 있었기 때문이다.
- P262

그는 집에 돌아와 있다. 윌럼이 함께 있다. 그는 두 번째 성 주드 조상을 가지고 와서 부엌에 뒀다. 하지만 이 성 주드는 더크고 텅 빈 도자기 재질이고, 머리 뒤에는 기다란 홈이 뚫려 있어서, 하루를 마친 후 그들은 남은 동전을 여기 넣는다. 조상이다 차면 정말 좋은 와인을 사서 마시기로, 그리고 다시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지금은 모르고 있지만, 앞으로 그는 해럴드가 공언한 애정을시험하고 또 시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한결같은지 보려고 약속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는 그렇게 할 것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절대 해럴드와 줄리아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러고 싶어도, 아무리 그렇다고 생각해도 그는그러지 못하고 결국엔 그들이 그에게 지칠 거라고 늘 확신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을 시험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관계가 결국끝나고 나면 그걸 돌이켜보면서 자기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올. 그뿐만 아니라 그 원인이 된 구체적 사건도 확실히 알게 될테니까. 그러면 그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뭘 더 잘할 수 있을지다시는 궁금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이다. 지금 그의 행복은 완전무결하다. - P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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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잖아. 베었다고."
"하지만, 심해?"
주드는 어깨를 으쓱했고, 윌럼은 처음으로 주드의 입술색이이상한 색, 아니 색이라 할 수 없는 색이라는 걸 눈치챘다. 어쩌면 북쪽을 향해 달리는 택시 안에서 주드의 얼굴을 때리고 노란색, 황토색, 유충처럼 창백한 흰색 멍 자국을 남기고 미끄러져지나가는 가로등 불빛 탓인지도 모른다. 주드는 창문에 머리를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월럼은 정확히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갑자기 메스꺼움이, 두려움이 치밀어 올랐다. 아는것이라곤 그저 택시를 타고 업타운 쪽으로 가고 있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뭔가 나쁜 일이라는것, 자기가 뭔가 중요하고 핵심적인 걸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것, 몇 시간 전의 축축한 따스함은 사라졌고 세상은 다시 얼음장 같은 혹독함으로, 연말의 날것 그대로의 잔혹함으로 돌아갔다는 것뿐이었다. - P105

 하지만 또(또다시!) 그는 아무행동도 하지 않았고, 거실 소파에 누운 주드(잠든 척하는 걸까.실제로 자는 걸까?)를 지나쳐 가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다음 날에도 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많은 날들이 그의 눈앞에서 휴지처럼 깨끗이 풀려 나가 펼쳐졌고, 매일매일 그는 아무말도, 아무 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3년 전에, 8년 전에 뭔가를(무엇을?) 했다면, 이런 일이 생겼을까? 이게 정확히 뭘까?
하지만 이번에는 뭐라고 말할 것이다. 이번에는 증거가 있으니까. 이번에도 주드가 빠져나가 그를 피하게 만든다면, 만약무슨 일이 생겼을 때 그건 다 그의 잘못이 된다.
이렇게 결정하고 나자, 피곤이 몰려왔고, 지난밤의 걱정과 불안, 좌절감이 그 피곤 속에서 지워졌다. 그날은 한 해의 마지막날이었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느낀건 그렇게 빨리 잠들 수 있다는 데 대한 놀라움이었다. - P114

토요일은 일을 했지만, 일요일은 산책하는 날이었다. 산책은 5년 전 그가 이 도시에 이사 와서 거의 아무것도 몰랐을 때 필요에 의해 시작한 일이었다. 그는 매주 다른 구역을 선택해 리스페너드 스트리트에서 거기까지 걸어갔고, 그 주변을 정확하게 다 둘러본 다음 다시 집으로 왔다. 험한 날씨 때문에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라면 한 주도 거르지 않고 산책을 했고, 맨해튼의 모든 구역은 물론, 브루클린과 퀸스의 여러 구역들까지걸어본 지금도 매주 일요일 10시면 집을 떠나 정해놓은 노선을다 끝내고서야 돌아왔다. 산책은 이미 오래전부터 좋아서 하는일이 아니라, 그냥 하는 일이 됐다-그렇다고 즐기지 않는 건아니지만, 한동안 그는 이 산책이 뭔가 운동 이상의, 어쩌면 아마추어 물리치료처럼 회복에 도움을 주는 일과가 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가졌다. 앤디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고 사실산책 자체에 반대했다. "다리 운동을 하고 싶어 하는 건 괜찮아." 앤디는 말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수영을 해야지, 다리를 끌고 보도를 왔다 갔다 할 게 아니라." 사실 수영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그가 혼자서만 수영할 수 있는 곳이 없었고, 그래서 그는 하지 않았다. - P127

몇 달이 지나면서 그 기분은 누그러졌지만, 그래도 절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건 얇게 낀 곰팡이처럼 그의 마음속에서 계속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받아들일 만해질수록 다른 게더 힘들어졌다. 그는 자기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아도 될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 애너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애너는 그가이제껏 살아온 삶을 온몸에 두르고 있다는 걸, 그의 전기가 살과 뼈에 새겨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애너라면 쪄 죽을 것 같은 날씨에도 왜 짧은 소매를 입지 않느냐고, 왜 신체 접촉을 싫•어하느냐고 절대 묻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의 다리나 등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절대 묻지 않을 것이다. 애너는 이미다 알고 있었다. 애너와 있을 때는 다른 모든 사람들 옆에서 형벌처럼 느껴야만 하는 끝없는 불안이나 경계심을 전혀 느끼지않았다. 늘 곤두서 있느라 진이 빠졌지만, 결국 그 경계심은 그냥 삶의 한 부분이, 바른 자세 같은 습관이 됐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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