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태준이라면 늘 나보다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몸도 그렇거니와마음도 하지만 우리가 처음 친구로 만나던 중학 시절에는 날렵하기가태준이나 나나 비슷했다. 어느 틈엔가 태준이는 저 혼자서 커져 있었던것이다. 물론 나도 약간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 저 혼자서 커지고 무거워지던 시절에, 우리는 단순한 기쁨을 몰랐다. 적어도 나는 "가늘어지고작아지고 낮아지는 일. "평범해지고 희미해지고 "혼자의 몸"우리들의마지막 얼굴이 되는 일. 거기에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마지막 얼굴쯤을하고 있을 때는 그 사실을 진심으로 좋아할까? 쉽진 않겠지. 처음은 모르겠지만, 중간이든 마지막이든, 우리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일쑤니까. 그렇다면, 이봐, 여기 시가 있어, 들어봐, 여기 시가 있어. "나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다네"(「여행자의 노래」라고 시작하는 시, "나는 내가 좋다"(나는 내가 좋다고 선언하는 시. 어때? 좋아? 그러게. 좋네. 좋아, 계속해봐. 그렇게 먼 훗날 기쁨이 될 기쁨의 시가 여기에 있다. 김연수 소설가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 P10
유자
노오란 유자가 달려 있네 내일의 예고가 이러했으면
낮 열두시의 혈색 낮 열두시의 과육 이상한 달콤함 낮 열두시의 잠
이 한알의영혼, 영혼의캐스터네츠
나가서 만져보리라 스스로 기뻐하는 높이에 달린 노오란 유자를 - P11
아침을 기리는 노래
시간은 꼭 같은 개수의 과일을 나누어주시네 햇볕, 입술 같은 꽃, 바람 같은 새, 밥, 풀잎 같은 잠을
나는 매일 아침 샘에 가 한통의 물을 길어오네 물의 평화와 물의 음악과 물의 미소와 물의 맑음을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갈림길과 건널목, 1월 혹은 3월 혹은 9월 혹은 눈송이, 첫번째, 분수와 광장, 거울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는 만남 당신이라는 귀 당신이라는 열쇠 -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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