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慕
ㅡ물의 안쪽


바퀴가 굴러간다고 할 수밖에
어디로든 갈 것 같은 물렁물렁한 바퀴
무릎은 있으나 물의 몸에는 뼈가 없네 뼈가 없으니
물소리를 맛있게 먹을 때 이(齒)는 감추시게
물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네
미끌미끌한 물의 속살 속으로
물을 열고 들어가 물을 닫고
하나의 돌같이 내 몸이 젖네
귀도 눈도 만지는 손도 혀도 사라지네
물속까지 들어오는 여린 볕처럼 살다 갔으면
물비늘처럼 그대 눈빛에 잠시 어리다 갔으면
내가 예전엔 한번도 만져보지 못했던
낮고 부드럽고 움직이는 고요 - P11

수련


작은 독에 더 작은 수련을 심고 며칠을 보냈네
얼음이 얼듯 수련은 누웠네

오오 내가 사랑하는 이 평면의 힘!

골똘히 들여다보니
커다란 바퀴가 물 위를 굴러가네 - P12

바깥


장대비 속을
멧새 한 마리가 날아간다
彈丸처럼 빠르다
너무 빠른 것은 슬프다
갈 곳이 멀리
마음이 멀리에 있기 때문이다
하얀 참깨꽃 핀 한 가지에서
도무지 틈이 없는
빗속으로
소용돌이쳐 뚫고 날아가는
멧새 한 마리
저 全速력의 힘
그리움의 힘으로
멧새는 어디에 가 닿을까
집으로?
오동잎같이 넓고 고요한 집으로?
中心으로?
아, - P20

다시 생각해도
나는
너무 먼
바깥까지 왔다 - P21

극빈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들라고 내준 무릎이 - P22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 P23

벌레詩社


시인이랍시고 종일 하얀 종이만 갉아먹던 나에게
작은채마밭을 가꾸는 행복이 생겼다
내가 찾고 왕왕 벌레가 찾아
밭은 나와 벌레가 함께 쓰는 밥상이요 모임이 되었다
선비들의 亭子모임처럼 그럴듯하게
벌레와 나의 공동 소유인 밭을 벌레詩社라 불러주었다
나와 벌레는 한 젖을 먹는 관계요
나와 벌레는 無縫의 푸른 구멍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노동은 단단한 턱으로 물렁물렁한 구멍을 만드는 일
꽃과 잎과 문장의 숨통을 둥그렇게 터주는 일
한올 한올 다 끄집어내면 환하고 푸르게 흩어지는 그늘의 잎맥들 - P26

묽다


새가 전선 위에 앉아 있다
한 마리가 외롭고 움직임이 없다
어두워지고 있다 샘물이
들판에서 하늘로 검은 샘물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논에 못물이 들어가듯 흘러들어가
차고 어두운 물이
미지근하고 환한 물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물을
섞이면서 아주 더디게 밀고 있다
더 어두워지고 있다
환하고 어두운 것
차고 미지근한 것
그 경계는 바깥보다 안에 있어
뒤섞이고 허물어지고
밀고 밀렸다는 것은
한참 후에나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다릴 수 없도록 너무
늦지는 않아 벌써
새가 묽다 - P32




배꽃이거나 석류꽃이 내려오는 길이 따로 
있어
오디가 익듯 마을에 천천히 여럿 빛깔 내려오는 길이 있어서
가난한 집의 밥 짓는 연기가 벌판까지 나가보기도하는 그런 길이 분명코 있어서
그 길이 이 세상 어디에 어떻게 나 있나 쓸쓸함이생기기도 하여서
그때 걸어가본 논두렁길이나 소소한 산길에서 봄 여름 다 가고
아, 서리가 올 때쯤이면 알게 될는지
독사에 물린 것처럼 굳어진 길의 몸을 - P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 겨울 오전에


나목이 한그루 이따금씩 나와 마주하고 있다
그이는 잘 생략된 문장처럼 있다
그이의 둘레에는 겨울이 차갑게 있고
그이의 저 뒤쪽으로는 밋밋한 능선이 있다
나는 온갖 일을 하느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한번은 나목을 본다
또 한번은 먼 능선까지를 본다
그나마 이때가 내겐 조용한 때이다
나는 이 조용한 칸에 시를 쓰고 싶다
그러나 오전의 시간은
언덕을 넘어 평지 쪽으로 퍼져 금세 사라진다 - P18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


당신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하네
요를 깔고 아주 가벼운 이불을 덮고 있네
한층의 재가 당신의 몸을 덮은 듯하네
눈도 입도 코도 가늘어지고 작아지고 낮아
졌네
당신은 아무런 표정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네
서리가 빛에 차차 마르듯이 숨결이 마르고 있네
당신은 평범해지고 희미해지네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의 몸이 된 당신을 보네
오래 잊지 말자는 말은 못하겠네
당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네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을 보네 - P23

시월


수풀은 매일매일 말라가요 풀벌레 소리도 야위어가요 나뭇잎은 물들어요 마지막 매미는 나무 아래에 떨어져요 나는 그것을 주워들어요 이별은 부서져요 속울음을 울어요 빛의 반지를 벗어놓고서 내가 잡고 있었던 그러나 가늘고차가워진 당신의 손가락과 비켜간 어제 - P27

이 시간에 이 햇살은


마른 산수국과 축축한 돌이끼에 햇살이 쏟아지네
묏둥과 무덤을 두른 산담에 햇살이 쏟아지네
끔적끔적 슬쩍 감았다 뜨는 눈 위에 햇살이 쏟아지네
나의 움직이는 그림자와 걸음 소리에 햇살은 쏟아지네
서럽고 섭섭하고 기다라니 훌쭉한 햇살은 쏟아지네
외할머니의 흰 머리칼에 꽂은 은비녀 같은 햇살은 쏟아지네
이 시간에 이 햇살은 쏟아지네
찬 마룻바닥에 덩그러니 앉으니 따라와 바깥에 서 있네 - P38

여행자의 노래


나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다네
하루의 첫음절인 아침, 고갯마루인 정오, 저녁의 어둑어둑함, 외로운 조각달
이별한 두 형제, 과일처럼 매달린 절망, 그럼에도 내일이라는 신(神)과 기도
미열과 두통, 접착력이 좋은 생활, 그리고 여무는 해바라기
나는 이 모든 것을 여행가방에 넣네
나는 드리워진 커튼을 열어젖히고 반대편으로 가네
이 모든 것과의 새로운 대화를 위해 이국(異國)으로 가네
낯선 시간, 그 속의 갈림길
그리고 넓은 해풍(海風)이 서 있는 곳 - P77

시인의 말


세해 동안 쓴 것을 이렇게 한권으로 묶으니 나는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다. 홀가분하다.

시에게 간소한 언어의 옷을 입혀보려는 마음이 조금은 있었지 않았나 싶다. 대상과 세계에게 솔직한 말을 걸고 싶었다. 둘러대지 말고 짧게 선명하게.

시련이 왔었지만 회복되었다. 빚진 인연들에게 고마움을전한다. 시를 쓰는 일이 다시 내 앞에 있다.

2015년 4월
문태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친구 태준이라면 늘 나보다 큰 사람으로 느껴졌다. 몸도 그렇거니와마음도 하지만 우리가 처음 친구로 만나던 중학 시절에는 날렵하기가태준이나 나나 비슷했다. 어느 틈엔가 태준이는 저 혼자서 커져 있었던것이다. 물론 나도 약간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 저 혼자서 커지고 무거워지던 시절에, 우리는 단순한 기쁨을 몰랐다. 적어도 나는 "가늘어지고작아지고 낮아지는 일. "평범해지고 희미해지고 "혼자의 몸"우리들의마지막 얼굴이 되는 일. 거기에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마지막 얼굴쯤을하고 있을 때는 그 사실을 진심으로 좋아할까? 쉽진 않겠지. 처음은 모르겠지만, 중간이든 마지막이든, 우리의 얼굴은 무표정하기 일쑤니까.
그렇다면, 이봐, 여기 시가 있어, 들어봐, 여기 시가 있어. "나에게는 많은 재산이 있다네"(「여행자의 노래」라고 시작하는 시, "나는 내가 좋다"(나는 내가 좋다고 선언하는 시. 어때? 좋아? 그러게. 좋네. 좋아, 계속해봐.
그렇게 먼 훗날 기쁨이 될 기쁨의 시가 여기에 있다.

김연수 소설가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노랗게 잘 익은 오렌지가 떨어져 있네
붉고 새콤한 자두가 떨어져 있네
자줏빛 아이리스 꽃이 활짝 피어 있네
나는 곤충으로 변해 설탕을 탐하고 싶네
누가 이걸 발견하랴,
몸을 굽히지 않는다면
태양이 몸을 굽힌, 미지근한 어스름도 때마침 좋네
누가 이걸, 또 자신을 주우랴,
몸을 굽혀 균형을 맞추지 않는다면 - P10

유자


노오란 유자가 달려 있네
내일의 예고가 이러했으면

낮 열두시의 혈색
낮 열두시의 과육
이상한 달콤함
낮 열두시의 잠

이 한알의영혼,
영혼의캐스터네츠

나가서 만져보리라
스스로 기뻐하는 높이에 달린
노오란 유자를 - P11

아침을 기리는 노래


시간은 꼭 같은 개수의 과일을 나누어주시네
햇볕, 입술 같은 꽃, 바람 같은 새, 밥, 풀잎 같은 잠을

나는 매일 아침 샘에 가 한통의 물을 길어오네
물의 평화와 물의 음악과 물의 미소와 물의 맑음을

내 앞에는 오늘 내가 고를 수 있는 물건들이 있네
갈림길과 건널목, 1월 혹은 3월 혹은 9월 혹은 눈송이, 첫번째, 분수와 광장, 거울
그리고 당신

당신이라는 만남
당신이라는 귀
당신이라는 열쇠 - P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랫동안 깊이 생각함


이제는 아주 작은 바람만을 남겨둘 것

흐르는 물에 징검돌을 놓고 건너올 사람을 기다릴 것

여름 자두를 따서 돌아오다 늦게 돌아오는 새를 기다릴 것

꽉 끼고 있던 깍지를 풀 것

너의 가는 팔목에 꽃팔찌의 시간을 채워줄 것

구름수레에 실려가듯 계절을 갈 것

저 풀밭의 여치에게도 눈물을 보태는 일이 없을 것

누구를 앞서겠다는 생각을 반절 접어둘 것 - P38

꽃들


모스끄바 거리에는 꽃집이 유난히 많았다
스물네시간 꽃을 판다고 했다
꽃집마다 ‘꽃들‘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고 순한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꽃들‘이라는 말의 둘레라면
세상의 어떤 꽃인들 피지 못하겠는가
그 말은 은하처럼 크고 찬찬한 말씨여서
‘꽃들‘이라는 이름의 꽃가게 안으로 들어섰을 때
야생의 언덕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 말의 보살핌을 보았다
내 어머니가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을 두루 덥히듯이
밥 먹어라, 부르는 목소리가 저녁연기 사이로 퍼져나가듯이
그리하여 어린 꽃들이
밥상머리에 모두 둘러앉는 것을 보았다 - P40




조용하여라
저 가슴
꽃 그림자는 물속에 내렸다
누구도 캐내지 않는 바위처럼
누구든
외로워라
매양
사랑이라 불리는
저 섬은 - P52

물가


내게 귓속말하는 수면이 있다면
내게 남몰래 촉촉이 젖은 눈 뜨는 수면이 있다면

물속에 잠긴 푸른 산은 움직이지 아니하고
산은 고운 강모래가 반짝이는 물가로는 아니 나오고

하늘도 흰 물새도 함께 사는 수면이 하나 있다면

나를 눕히어 서성이는 발등까지 되비춰다오
잔잔함이여 - P64

가을 모과


울퉁불퉁한 가을 모과 하나를 보았지요
내가 꼭 모과 같았지요
나는 보자기를 풀듯
울퉁불퉁한 모과를 풀어보았지요
시큼하고 떫고 단
모과 향기
볕과 바람과 서리와 달빛의
조각 향기
볕은 둥글고
바람은 모나고
서리는 조급하고
달빛은 냉정하고
이 천들을 잇대서 짠
보자기 모과
외양이 울퉁불퉁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나는 모과를 쥐고
뛰는 심장 가까이 대보았지요
울퉁불퉁하게 뛰는 심장 소리는
모과를 꼭 빼닮았더군요 - P66

사과밭에서


가을 수도사들의 붉고 고운 입술
사과를 보고 있으니
퇴원하고 싶다
문득 이 병원에서 퇴원하고 싶다
상한 정신을 환자복과 함께 하얀 침대 위에 곱게 개켜놓고서 - P74

사무친 말


나는 한동안 병실에서 생활했다 돌밭 같은 눈 메마른 손 헝클어진 채 자란 머리카락 누덕누덕한 시간들 앞뒤 없는곡경 속에서

희망을 끊어버리고 연고 없는 사람처럼 빈들빈들 돌아다녔다 축축하게 비 오는 어느날 그가 내게 말했다 뭐든 돋아 내밀듯이 돋아 내밀듯이 살아가자고 - P75

징검돌을 놓으며


물속에 돌을 내려놓았다
동쪽도 서쪽도 생겨난다
돌을 하나 더 내려놓았다
옆이 생겨난다
옆에
아직은 없는 옆이 생겨난다
눈썰미가 좋은 당신은
연이어 내려놓을 돌을 들어올릴 테지만
당신의 사랑은 몰아가는 것이지만
나는 그처럼 갈 수 없다
안목이여,
두번째 돌 위에 있게 해다오
근중한 여름을 내려놓으니
호리호리한 가을이 보인다 - P78

눈 내리는 밤


말간 눈을 한
애인이여,
동공에 살던 은빛 비늘이여
오늘은 눈이 내린다
눈은 밤새 내린다
목에 하얀수건을 둘러놓고 얼굴을 씻겨주던
가난한 애인이여,
외로운 천체에
성스러운 고요가 내린다
나는 눈을 감는다
손길이 나의 얼굴을 다 씻겨주는 시간을 - P84

시인의 말


눈앞의 것에 연연했으나 이제 기다려본다. 되울려오는 것을. 귀와 눈과 가슴께로 미동처럼 오는 것을. 그것을 내가 세계로 나아가는 혹은 세계가 나에게 와닿는 초입이라 부들수 있을까.
생활은 눈보라처럼 격렬하게 내게 불어닥쳤으나 시의 악흥(樂興)을 빌려 그나마 숨통을 열어온 게 아닌가 싶다. 그 빚의 일부를 갚고 싶다. 새로운 시집을 내니 난(蘭)에 새촉이 난 듯하다. 바야흐로 새싹이 돋아나오는 때이다. 움트는 언어여. 오늘 나의 영혼이 간절히 생각하는 먼 곳이여.

2012년 2월
문태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의 시들은 느슨한 시인, 나를 단련시킨다. 그의 ‘시로 씌어진 제사(祭祀)‘를 읽으며 나는 달리기를 준비한다. 신발끈을 조이며 겨울모자를 쓴다. 한 시인이 도착한 어느 순간에 동반하기 위하여 정결하게 옷깃을 여민다. 나의 폐활량이 충분하여 이 달리기가 그곳으로 이르길 바란다. 짧고 간결한 제사, 투명하게 슬픈 제사, 풀벌레와 새소리, 낙과와 울퉁불퉁한 과일과 쓸쓸한 어머니를 위한 제사. 이 아득한 아름다움은 본래 우리의 것이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전에 아름다움은 우리를 떠나갔나. 태준의 시들은 그 ‘본래 아름다운‘ 것들을 우리 앞으로 데려온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않더라도 심란하지 않게 저녁을 잘 보내라는 안부인사다. 이런 짧은 안부인사가 시의 어떤 힘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시인들이여, 왜 세계는 가장 가난하고 아름다운 연인으로 우리를 기억하겠는가. 허수경 시인

아침


새떼가 우르르 내려앉았다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나무상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누군가 들고 가는 양동이의 물처럼
한번 또 한번 출렁했다
서 있던 나도 네 모서리가 한번 출렁했다
출렁출렁하는 한 양동이의 물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 P10

빈집


주인도
내객(來客)도 없다
겨울 아침
오늘의 첫 햇살이
흘러오는
찬 마루
쪽창 낸 듯
볕 드는 한쪽
몸을 둥글게 말아
웅크린
들고양이
여객(旅客)처럼
지나가고
지나가는
- P13

먼곳


오늘은 이별의 말이 공중에 꽉 차 있다
나는 이별의 말을 한움큼, 한움큼, 호흡한다
먼 곳이 생겨난다
나를 조금조금 밀어내며 먼 곳이 생겨난다
새로 돋은 첫 잎과 그 입술과 부끄러워하는 붉은 뺨과 눈웃음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대기는 살얼음판 같은 가슴을 세워들고 내 앞을 지나간다
나목은 다 벗고 다 벗고 바위는 돌 그림자의 먹빛을 거느리고
갈 데 없는 벤치는 종일 누구도 앉힌 적이 없는 몸으로 한곳에 앉아 있다
손은 떨리고 눈언저리는 젖고 말문은 막혔다
모두가 이별을 말할 때
먼 곳은 생겨난다
헤아려 내다볼 수 없는 곳 - P18

그 아무것도 없는 11월


눕고 선 잎잎이 차가운 기운뿐
저녁 지나 나는 밤의 잎에 앉아 있었고
나의 11월은 그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무덤에 불과하고

오로지 풀벌레 소리여
여러번 말해다오
실 잣는 이의 마음을

지금은 이슬의 시간이 서리의 시간으로 옮아가는 때
지금은 아직 이 세계가 큰 풀잎 한장의 탄력에 앉아 있는 때

내 낱잎의 몸에서 붉은 실을 뽑아
풀벌레여, 나를 다시 짜다오
너에게는 단 한 타래의 실을 옮겨 감을 시간만 남아 있느니 - P2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