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하고 있다, 곧 나올 것이다! 하기를 어언 일 년은 더 된 것 같다. 번역 다 끝났다, 는 소식도 들었는네 책은 안 나오고 있어서 이건 뭐야, 속셈이 있는 거야? 혼자 상상을 했다나. 한데 그렇게 기다리던 책이 어제 내 손에 들어왔다. 드디어! 마침내!!!

 

뭔 책인데 그토록 기다렸냐구? 이 작가는 내게 좀 특별하다. 이름이 있는 작가도 아니다. 사람들이 잘 모른다. 이 책이 겨우 두 번째 책이고 첫 책 《유령 비행기》는 2008년에 나왔다. 두 번째 작품인 《소년탐정 실패하다》가 곧 나올 것이라는 소식만 듣고 있었기에 늦어도 2010년엔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을 했었다. 근데 이제서야!! 내가 원서를 주르륵 읽을 줄 아는 실력이면 이미 죠 메노의 작품을 다 섭렵하고도 남았을 터인데 실력이 없으니 그러지도 못하고, 번역이 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그럼 죠 메노가 누군인지 궁금할 것이다. 그는 작가다!(크크 장난하나?! 맞다. 장난 크크). 첫 책 《유령 비행기》의 프로필에 보면 '미국 팝아트 소설가'라고 되어 있다.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잘 모르는 출판사에 처음 보는 작가, 광고도 없었고 눈을 끄는 표지도 아니었기에 읽을까 말까, 하다가 단편이니 어디 읽어봐? 하며 읽었더랬다.결과는 대박! 단편집이었는데 삽화랄까, 그림이랄까. 아니, 문학에, 단편 소설의 단행본에 삽화나 그림을 넣는 무모한 어쩌고 저쩌고 하며 좀 가볍게 여기며 읽었는데(더구나 20편이나 되는 단편이라니!) 문체가 완전 내 스탈이었다. 좋았다. 스토리도 독특했는데 스무 편의 소설이 지구상의 재앙, 그러니까 태풍이나 지진, 전쟁, 홍수 그리고 나날이 무능해지는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그 재앙으로보터 벗어나려는 의도로 기획되어 출간된 것. 그러니 독특, 그 자체일밖에. 그중 단편 하나를 읽고 리뷰라기보다는 단상을 적은 글  == >http://blog.aladin.co.kr/readersu/2436726  그때도 나는 좋은 책, 내 맘에 드는 책을 보면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고 나중에 이런 주제로 글을 썼더랬다. <내겐 너무 아까운 책>, 이런 글을 쓰게 한 작가였으니 내가 목메고 기다릴만하지 않겠는가. (암, 그렇고말고 나의 작가 편애는 끝이 없다)

 

 

 

 

언젠가 모 작가님이 내게 단편집 한 권 추천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오! 작가님이 내게?->아우, 잘난 척 크크 ->내가 신간을 워낙 많이 접하니까 가끔 물어본다) 마침 내 책상 앞 책꽂이에 꽂힌 《유령 비행기》가 보였고 그 작가님과 잘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내 취향이긴 한데 어떨지~ 하며 추천을 해줬더랬다. 나중에 다 읽고 그가 말했다. 본인 취향도 맞다고. 아주 맘에 들었다고. 좋은 책 소개, 고맙다고. 야아~ 내가 추천한 책을 읽고 공감하며 이런 말해주면 추천한 사람으로서 완전 기분 좋다. 그와 내가 비슷한 취향이구나, 오홋!!  하긴 그래서 내가 그 작가님을 좋아하지... (암튼 그의 단편집도 조만간 나올 것이다. 그때 가면 누군지 알려주겠음^0^ 억수로 인기 좋은 젊은 작가!)

 

어랏, 쓰다보니 사설이 너무 길었다. 그럼 진지하게 《소년탐정 실패하다》의 책 소개!

 

줄거리는 이렇다,

 

열 살 소년 빌리 아고는 생일선물로 탑정놀이 세트를 받는 순간부터 탐정이 되어 타고난 천재성을 발휘한다. 빌리와 여동생 캐롤라인, 동네 친구 펜튼으로 구성된 소년탐정 3인조는 거침없이 사건을 해결하면서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빌리가 범죄에 관한 체계적인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면서 그들의 화려한 유년시절은 막을 내리고, 엄청난 비극들이 들어닥친다.==> 이후의 이야긴 직접 읽어보셔야만 한다! 흥미진진하므로.

 

이 책은 국내에서는 두 번째 출간작이지만 죠 메노의 작품으로선 《유령 비행기》보다 이전에 나온 작품이다. 이 책으로 죠 메노는 2003년에 '넬슨 올그런 단편소설상'을 수상했다.

 

 


 

소년탐정 실패하다》는 처음엔 마치 '탐정놀이'에 빠지는 아이들의 이야기처럼 시작하지만

'인간세계의 모순과 사악이라는 심오한 주제'에 관한 작품이다. 유년시절의 막이 내리고 삼인조에게 닥쳐온 비극이 무엇이고, 그 비극을 빌리가 어떤 식으로 해처나오며 마지막 사건을 어떻게 종결하는지 따라가며 우리는 '절대악'이라는 본질을 알게 된다.

 

미국 작가에게 9*11테러 사건은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그걸 모티브로 수많은 스토리를 내보이고 있으니까. 죠 메노 역시 그때 가졌던 거대한 의문점을 풀어내기 위한 방편으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자국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오래 기억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작가들의 끊임없는 진실에 관한 글일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광주민주항쟁에 관한 작품이 잊을만하면 나오듯이.

 

 

 

 

이 책의 뒷부분 작품해설에는 옮긴이인 김현섭과 죠 메노가 직접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이 실려 있다. 또 흥미롭게도 부록으로 딸린 부분엔 '소년탐정과 함께 퍼즐 풀기' 라거나 '비밀 메시지 찾기', 작품 속, 인물이 만든 요리 따라 만들기 등등 재미있는 페이지가 들어있다. 그리고 뒷표지 일부분은 '소년탐정 암호해독기'를 만들어보는 페이지가 달려 있기도!! 소설이면서 이런 '창의적인' 재미까지 주다뉘. 역시 '팝아트 소설가'답다. 죠 메노에겐 정말 잘 어울리는 듯.

 

 

 

몰랐던 작가의 책을 읽고 그 작품에 빠져보는 일은 언제나 신비롭고 흥미롭다.  처음 그 작가의 책을 읽고, 감동 받아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같이 공감하는 일. 책을 읽는 독자로선 괜히 즐거운 일이다. 아직도 죠 메노를 모른다면 꼭 한번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독특하면서 흥미와 일상의 감동까지 전해주는 글들에 아마 반할지도~

 

흥미로운 것은,

빌리가 사는 곳이 '고담'이라는 도시라는 사실! 어디서 많이 듣지 않았던가??

온갖 범죄와 악당들이 판을 치는 배트맨의 어두운 도시~

 

우리 도시의 일간지에는 죽은 자들과 대화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제공하는 전문 서비스에 대한 광고가 실려 있다. 그런 광고들은 사라진 자동차 기계 연결부를 다시 복구해준다는 광고 옆에 있다. 그들의 사무실에는 가구가 없다. 그들의 사무실은 조용한 회색 방으로 바닥에는 전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에서 온, 혹은 그렇게 보이는, 수십 개의 라디오가 놓여 있을 뿐이다. 바로 이런 이상한 사무실에서 직업에 어울리는 옷을 입은 여인이 당신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서 목숨을 잃었는지 물어볼 것이며, 그 다음에는 줄지어 있는 이상한 형태의 라디오들을 응시하면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다음에 손으로 가리킬 것이다. "아이슬란드에서부터"라고 그녀가 말할 것이다. "아이슬란드에서 죽은 사람들은 결국 모두 이곳으로 오지." 당신은 라디오 스피커의 십자무늬에 귀를 기울릴 것이다. 그녀는 한두 마디를 외치고 나서 스위치를 켤 것이다. 그러면 곧 놀랍게도 당신은 낯익은 목소리가 말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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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영화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의 결말을 보면서 떠오른 책이 있다. 그리고 뜬금없이 '젊음'과 '늙음'에 관해 조잘대는 것은 오늘 아침에 읽은 책 때문이다. 그 책들에 대해선 이따가 얘기하고 우선, 어제 본 영화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시작하자면 이렇다.

 

젊음, 특히 여자들이 느끼는 노화의 공포(!)로 인해 젊어지고자 하는 욕심 혹은 관심이랄까, 어떻게 하면 더 젊어보이고 동안이라는 소릴 들을까, 하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거다. 특히 나처럼 20대 이후로 변화 한 것이라고는 나이 먹은 것밖에 없는 노츠자로서는 마음은 아직도 스무 살인데 몸과 모습은 자꾸만 변해가는 것이 너무나 못마땅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으니 그들보다 훨씬 젊어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젠 눈에 보이게 뚜렷해지는 늙음(!)으로의 진행.

 

아가씨에서 아줌마, 간혹 딴엔 잘 불러준다고 어머니나 사모님이란 말로 나를 지칭할때, 충분히 경기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젠 할머니 소리 들을 날 얼마 남지 않아, 조금은 나이 같은 것 초월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또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그래서 내가 사악한 그 여왕의 마음을 이해한다. 이해 백만번하고도 남는다. 누군들 그런 마음이 없겠어,. 젊고 싶고, 오래도록 살고 싶은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질 수 있는 욕망일테니까. 조물주께서 인간을 만들 때, 모습은 30대로 두고(내가 보기엔 30대가 가장 아름다운 듯) 나이와 보이지 않는 곳의 몸에만 늙음을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겉 모습에 드러나는 늙음 때문에 고민하지 않,.... 근데 그렇다고 해도 몸이 늙으니 젊은 몸을 욕심내긴 하겠다;;

 

아무튼 어차피 늙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곱게 늙어야지, 하고 맨날 생각한다. 정말 잘 늙었구나. 얼굴에 나타나는 그런 얼굴로. 그러려면 항상 웃고 긍정적이고 그래야만 하는데...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에서(앗, 이것은 스포일러가 들어갈 수도!) 사악한 여왕은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마을 어린 여자애들을 잡아와 그녀들의 기를 빨아마신다. 그러면 주름살이 펴지고 순식간에 탱탱한 피부로 변한다. 하지만 기를 빼앗긴 소녀들은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한다. 아마 영화에서 봤을 때, 사악한 여왕은 권력과 자신의 욕망을 위해 절대악과 거래를 한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웬만해서는 죽지 않는다. 자신을 위해 무조건적으로 봉사하는 동생에게마저 치유의 힘을 발휘하는 걸로 봐서는 대단한 절대악. 그 모습을 보면서 떠오른 책은 바로 얼마 전에 읽은 《스타터스》이다.

 

 

미래의 어느 날, 20살과 60세 사이의 인간은 멸종을 하고 20살 이전의 아이들과 60세 이상의 노인들만 남는다. 이런 구성에서 힘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부를 축적한 노인들이다. 그 노인들이 사회의 주축이 되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세상이 된 것이다. 과학의 발달로 수명도 거의 200세까지 산다. 그러니 쪼글쪼글해지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절망을 할까. 그래서 그들은 나름의 방법을 계발한다. 바로 젊은 아이의 몸을 지배(!)하는 거다. 그니까 정신은 노인, 몸은 젊은이. 그러다가 급기야 그들이 생각해낸 것은 아예 몸을 바꿔치기 하는 거다. 그게 성공하게 되었는지는 책을 읽어보시고.

 

 

이 책을 읽으면서 노인들의 욕심(!)에 너무나 소름이 끼쳤다. 아무리 200세까지 삶이 연장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라도 살고 싶은 걸까? (라고 이렇게 겉으로는 말하지만 솔직히 나도 요즘 입가의 주름이며 눈밑의 주름을 볼 때마다 주사라도 맞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지난주 만난 친구가 각진 턱 때문에 주사를 맞았는데 그 주사 한방에 어찌나 달라보이던지 정말이지 내 곳간에 돈이 넘쳐흐르면 한번은 맞아보고 싶은(곳간이 텅텅 비었길 망정이지) 마음이 생기더라) 한데 그런다고 해서 내 몸이 다시 젊음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200세가 되면 죽고 말 것인데(라고 말은 하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젊게 살고 싶기도 하지 ㅋ)

 

 

나도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것 같다. 판타지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어제 영화에 관해 말하면서 최악의 영화였다, 재미 드럽게 없었다,고 했는데 찾아보니 원작이 있다. 영화도 3부작으로 나올 예정이란다. 어제 글에 탑에 갇혀 지냈던 공주가 어떻게 뜬금없이 쌈 잘하는 공주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며 툴툴거렸는데 원작엔 이렇게 나온다. "여왕에 의해 탑에 유폐되어 있던 공주는 백마 탄 왕자님에 의해 구출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망을 쳐서 검술을 배운다. 여왕의 통치로 인해 폐허가 된 왕국 곳곳을 지나면서 백성들을 위해 여왕과 맞설 것을 다짐하고 전사로서 각성한다" 내가 어제 온갖 동화의 패러디판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백설공주> 의 현대판이란다. 원작에서처럼 왕자에 의해 구출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망을 치고 검술도 배우고 앞장 서서 여왕을 물리치는. 이제서야 아하, 이해가 되었다. 차라리 원작을 읽고 영화를 봤으면 훨씬 재미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너무나 많은 것을 생략한다. 더구나 판타지 영화에서의 사소한 생략은 의문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러므로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을 보고 이해가 안 된다면 원작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리고 영화에서나 책에서나 사악한 여왕으로 나오지만 그녀도 알고 보면 정복전쟁(!)의 희생자.

우연히 얻게 된 젊음의 욕망에 매몰되어 가는 조금은 가엾은 여인이나 근본은 역시 사악한 듯.

 

 

 

아무튼 내가 뜬금없이 늙음과 젊음에 대해 주절대는 것은 오늘 읽기 시작한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의 영향이다. 그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남자들이 더 이상 날 쳐다보지 않아." 이 얼마나 가슴 아픈 말인가? 라며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보면 나 역시 젊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 나의 어리석은 멘션에 띠동갑 젊은 친구가 내게 말했다. "저런 말에 공감하기엔 언니는 너무 젊잖아요. ^--^" 위로가 된다. 어쩌면 저런 말을 노리고 이런 글을 써대는지도 몰라. 그러니 친구들, 뭔 댓글을 달아야 하는지는 알쥐? ^0^

 

아놔, 근데 어째 바다로 갈 글이 산으로 간 느낌;;;

한두 번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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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6-05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이 더 이상 날 쳐다보지 않아." 란 이 페이퍼의 인용문을 보니, 저는 몇 년전에 보았던 프랑스 영화 [미스트리스]가 생각나요. 거기엔 대단히 예쁜, 그러나 이제는 나이 들어 화려했던 과거처럼 남자들을 유혹할 수 없는 여자가 나오는데요, 그녀를 보고 한 여자가 자신의 친구에게 그녀의 시절은 갔다며 이렇게 말해요.

"서른 여섯. 더이상 남자를 후릴 수 없는 나이지."

아......정말이지 가슴이 턱, 막혀버렸지 뭡니까!

readersu 2012-06-05 15:41   좋아요 0 | URL
아아, 제가 서른여섯이라면 세상의 모든 남자들을 다 후리고도 남았을.....^^;;;수 있었을까요? 서른여섯이라는 나이도 무진장 부러운 저는, 역시 젊음에의 욕망이 매우 강한 노츠자;;;

저 글에 친구가 답하길,
남자들이 널 쳐다보지 않으면 너가 남자를 쳐다보면 되지 뭔 걱정이냐! 하더군요.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바보 같은 소릴 했는데..그것은 살짝 뭐랄까, 자존심이 좀 상하면서..근데 아 정말, 저도 쓸데 없는 돈만 있으면 몸을 바꾸고도 남을 인간이지 뭐예요;;;

[미스트리스], 어떤 영화인지 찾아봐야겠어요.
 

 

어젯밤부터 김두식 교수의 욕망해도 괜찮아를 읽기 시작했다. 마침 읽고 있던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_한 남자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었고 원래 문어발 독서를 좋아하는지라 그 책은 출퇴근용이니 잠자리에선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는 나름의 규칙으로 인해서였다. 책을 곁에 둔지는 며칠 되었다. 읽어본 친구들이 다들, 넘 재밌다고(!) 평을 남겨 빨리 읽어야지, 하고 있었음에도 미루고 있던 책이었으므로 졸음을 참으며 3장까지 읽었다. 재미있는 것은 3장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문득 떠오르던 책이 있었으니 그 책이 바로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_한 남자였다. 한데 그 책을 떠올리자 몇 주 전부터 읽은 책들이 우수수 기다렸다는 듯이 머릿속으로 떨어졌는데 하! 이런 우연이 있나?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러고선 빨리 아침이 되길 기다렸다. 글쓰기가 본업이 아닌지라 매번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으로 나름의 글쓰기 욕망을 표출하고 있던 바였으므로 어쩌다 발견한 이 '우연의 연속'에 대해 신이 나서 혼자라도 떠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에 공감의 반응을 보여준다면 일이 아닌, 나 좋아서 하는 일에 더 할 수 없이 고마움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시작은 이렇다. 몇 년을 도서관 근처에 살면서도 대출증을 만들 생각도 안 하다가 필요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대출증을 만들고 책을 빌리게 되었다. 도서관을 이용해본 분이시라면 다 읽은 책을 갖다 주고 그냥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설령 읽지 않은 책이 집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해도, 읽지도 못하고 다시 반납할지언정 한 권이라도 챙겨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 그날도 그랬다. 대출증을 만든 일은 끝났고 굳이 책을 빌릴 이유가 없었음에도 뭔가를 들고 나가야 한다는 괜한 의무감이 들었다. 뭘 빌리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읽었으나 기억이 안 나는 궁금한 책을 빌리기로 했다. 마침 트윗으로 아니 에르노의 책에 관해 조잘대는 친구들의 멘션을 본 터라, 맞아, 아니 에르노의 책은 얇았지. 구입을 하기엔 좀 아까우니 빌려보자, 라는 단순한 생각에(물론 얇아서 빌린 것. 도서관에서 두꺼운 책은 필요와 궁금에 의하지 않으면 도저히 빌리기가 힘들다. 나는;;) 아니 에르노의 책을 빌렸더랬다. 단순한 열정탐닉, 한데 뭣도 모르고 빌린 두 권의 책이 우연하게도 서로 연관이 있던 책이라 너무 재밌게 읽었고 그 책들을 읽다 보니 다시 궁금해진 필립 빌랭의 포옹까지 읽게 되었다. 세 권의 책을 읽은 느낌은 한마디로 그랬다. “아아, 인간의 참을 수 없는 욕망이라니!!”

 

아니 에르노의 책을 다 읽을 무렵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_한 남자를 읽기 시작했다. 남자 입장에서 결혼의 상태를 분석했다. 알랭 드 보통의 분석적인 문체가 너무 마음에 들어 아주 책속으로 들어가면서 읽고 있던 중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인터넷 포르노 사이트에 관해 대부분의 남자들이 인식하는 내용을 죽 설명한 뒤 이어지는 주인공 벤의 외도였다. 출장길에 있었던 안면 있는 젊은 여자와의 하룻밤. 그날의 상황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이렇게 말한다. (이건 뒤에 말하겠지만, 김두식 교수가 말하는 중년 남성의 내면에 남아 있는 소년의 탄생(!)하고도 비슷하다)

 

자정 무렵, 그들은 손님이라곤 두 사람뿐인 바에서 와인을 마셨다. 추파를 던지는 그의 방식은 정확하고 간결했다. 웃고 칭찬해주고 희롱했다. 결혼한 중년 남자가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유혹할 때 보이는 대범함을 자신감과 혼동해선 안 된다. 그것은 다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생이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을 것만 같았던 때에는 자의식을 느끼며 수줍어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이제껏 감히 시도해본적 없는 과감함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 벤은 이제껏 감히 시도해본적 없는 과감함을 드러낸 걸까. 물론 결론은 단 하나이다. 단지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와의 섹스를 위해서. 그땐 그동안 숨어 있던 소년의 모습으로 자신감이 솟아난 것?!(움 내가 중년 남성은 아니니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정황상 그런 것 같다)

 

아무튼 그러다 지난 주 여행을 가면서 어떤 책을 들고 갈까 고민하다가 단지 얇다는 이유로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들고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읽기 시작하고 연휴 마지막에 책을 덮었다. 제목처럼 슬픈이야기가 내 맘을 울렸더랬다. 읽으면서 내내 아니 에르노가 생각났음은 물론이다(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고 이러는 걸까,^^;;). 그리고 어젯밤 김두식 교수의 욕망해도 괜찮아를 읽었다. 이쯤에서 언급한 책들을 읽은 사람들이라면 이 책들의 공통점을 알 것이다(알랭 드 보통이나 김두식 교수의 책에선 일부분이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긴 이 부분이다. 미약하나마 대체로 공감을 하며 아, 명쾌하다! 라는 생각을 들게 한 김두식 교수의 말,

 

중년 남성의 내면에 남아 있는 소년은 지랄총량의 법칙으로 알려진 지랄이기도 하고, ‘에너지이기도 하며, ‘청춘이기도 하고, 프로이트(S. Freud)가 말하는 이드’(id)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 즉 욕망의 영역에 속한 힘이죠.”

 

그렇다. 어쩌다 그동안 읽은 책들에 죄다 중년 남성이 나온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유부남이며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들, 중년 남성들은 지랄인지 에너지인지 혹은 청춘인지 모를 에 빠져든다. 아마 소년의 마음이 강하겠지. 사랑의 기초_한 남자에서는 출장에서의 한번 가진 외도일 뿐이지만 욕망해도 괜찮아사랑에 빠진 아저씨들을 보면 죄다 진심처럼 보인다. 정신적인 것보다는 육체적인 욕망에 관한 한. 아니 에르노의 남자는 거의 일치하고 모니카 마론의 작품 속 남자는 조금은 예외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욕망해도 괜찮아의 부분을 읽으면서 혼자 그동안 읽은 책들을 떠올리며 신기해하고 우연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혼자 낄낄거린 것이다(, 뭐야, 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김두식 교수의 책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워낙 소설이나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이름은 익히 들었음에도 읽으려 하지 않았던 분야였기에 이번 독서는 제목 때문에라도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게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 나도 욕망이 궁금한 인간이므로. 하여 읽기 시작한 욕망해도 괜찮아는 들어가는 부분부터 굉장히 공감을 했다. 특히 이번 글을 통해 멘토가 아니라 여전히 자라는 과정에 있는 40대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습니다. 우리 안에서 정리되지 않은 채 불타고 있는 소년 소녀의 열정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그 열정과 욕망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싶습니다.“라는 말. 내 나이는 서른을 넘기면서부터 먹지 않고 있지만 그런 나를 보며 아직도 소녀라는 둥, 철이 없다는 둥 하여도 그건 당연한 말이라고 넘기는 나로서는 정리되지 않은 채 불타고 있는 소녀의 열정을 나눠보고 싶다고 하시니 하, 이런! 교수님, 정말 반갑습니다. 라고나 할까.

 

그가 말하는 우리나라에서 남자로 태어나 남자어른으로 살아가는 일에 대해 읽으면서 대체로 공감을 했다. 그건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 그가 말하는 벤의 아빠, 남편, 아들, 한 남자로서의 상황과 거의 비슷했으므로. 어쩌면 그들의 말에 슬쩍 세뇌(!)라면 세뇌당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아래는 김두식 교수의 글, 아아, 글쿠나! 중년 남성들의 욕망을 이해하겠어. 그래그래^^; 

 

“10대 중반부터 20대 후반까지 소년은 남성의 내면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춥니다. 조물주의 설계에 따르자면 바로 그 즈음에 가장 자연스럽게 분출되어야 하는 에너지입니다. 이몽룡과 성춘향이 그랬던 것처럼 주로는 섹스를 통해서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욕망을 찍어누른 사람만이 성공이란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섹스를 통해 분출되어야 할 에너지는 엉뚱하게도 도서관, 고시원, 영어학원에서 대부분 소비됩니다. 그런 에너지 소비가 건강한것으로 권장되기도 합니다.

남녀 불문하고 다들 비슷한 형편이라 어차피 연애할 상대방도 시간도 공간도 찾기 어렵습니다. 취직, 고시, 유학 준비에 몰두하며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과정에서 젊은이들은 더욱 에 속한 인간으로 변해갑니다. 그런 극심한 경쟁을 거쳐서 겨우 결혼할 여유를 갖게 되었을 때, 상대방을 고르는 기준도 보다는 에 속한 것들입니다. 어떤 집안 출신인지, 어떤 대학을 나왔는지, 직장은 어디인지, 얼마나 장래성이 있는지, 건강한지, 품성이 안정적인지 등등을 빼놓은 배우자 선택이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에 속한 청년들은 이 모든 것에 외모를 더하여,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괜찮은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합니다. 한눈에 반했다거나, 불꽃같은 연애를 했다는 사람들도 이런 기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강한 끌림, 성적 매력 같은 것을 배우자 선택의 기준으로 삼으면 덜떨어진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입니다. 연애와 결혼은 구분된다는 가치관도 결국은 에 대한 의 영원한 승리를 의미할 뿐입니다.()

그런 소년이 어느날 소녀를 만납니다. 일 때문에 우연히 만난 여성이 덥석 소년의 손을 잡는 순간, 평생 의 세계에서 살아온 이 규범남은 거짓말처럼 우르르 무너집니다. 그리고 일순간 의 세계로 몸을 던집니다. 좋게 보면 순수하고, 나쁘게 보면 한없이 유치한 사랑놀이가 시작됩니다. 상대방과 나 사이의 자아경계가 무너지는 상태를 뒤늦게 경험합니다. 10대 소년들이 느끼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퇴행도 경험합니다. 그녀 앞에 서면 어린 아이가 됩니다. 남이 유치해서 쓰러질 편지를 쓰고, 낯 뜨거운 애칭을 부르며 서로를 갈망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 사랑의 결과 많은 것을 잃기도 합니다.

대체로 이들이 갈구하는 것은 육체적인 사랑입니다. 문자 그대로 입니다.“ _욕망해도 괜찮아

 

첫 장부터 거의 200%(특히 난 솔로이고 나이를 먹었고 지분거림을 당했던 신정아의 심정도 이해가 가고, 한겨레 김선주 선생이 쓰셨다는 칼럼 중 다부지고 단호하게 자르면 혹은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면 어떤 사회지도층 인사도 더 이상 지분거리지 않는다.”라는 말에도 지극히) 공감하면서(물론 그럼에도 말기(!) 못 알아듣는 중년 남자들 많지만) 더불어 사랑의 기초_한 남자의 벤이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중년 남성의 인생, 사랑, 욕망까지도 그래그래, 얼마나 힘드냐. 남자로서 아버지로서 아들로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자신의 욕망을 감추고 살아간다는 것이, 라며 넓은 마음으로 끄덕끄덕(물론 이 모든 공감과 이해는 평범한(!) 중년 남성들에 대한 것일 뿐. 아니 어쩌면 알랭 드 보통과 김두식 교수의 이야기에 괜히 솔깃한 것일지도-.-;;;). 했다. 

 

《욕망해도 괜찮아》와 사랑의 기초_한 남자》는 남자의 입장에서 풀어놓은 남자들의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공감을 하는 이유는 내 동생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하고 아내의 입장이었다면 이해가 좀 덜 되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맨 처음 떠오르는 인물은 바로 동생이었던 것. 동생도 매한가지이지 않을까, 싶은. 살짝 동정심이 가고 또 안쓰럽기도 하면서. 김두식 교수의 글보다는 아래 알랭 드 보통의 글을 읽으면서 말이다.

   

지하철 안에서 그는 남은 저녁시간을 근사하게 보내는 공상에 잠겼다. 커다란 백조 등에 올라타면 새는 날개를 퍼덕여 하늘을 날아 새하얀 솜털로 채워진 방에 사뿐히 그를 내려놓는다. 그는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아도 되고, 혼자 가만히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낮 동안 제쳐두었거나 제대로 정리할 수 없었던 생각들이 스스로 꼴을 갖춰나갈 것이다. 재스민이나 라벤더향이 풍겨도 좋겠다. 모든 것이 더없이 부드럽고 순결하다. 종이 한 묶음을 옆에 놓고 고민거리들을 끼적일 수도 있다. 느긋하게 곱씹어보면 해결책은 저절로 떠오를 것이다. 알프스산맥의 맑은 물과 연결된 기다란 빨대, 백포도주 한 잔 또는 우유 한 자, 거기에 수프와 회 몇 점이 담긴 쟁반이 천장에서 내려오면 금상첨화겠다. 따뜻한 물이 찰랑이는 수영장에 발을 담그면, 형체는 없지만 모든 걸 다 받아줄 것만 같은 너그러운 두 팔이 그를 감싸안으며 안쓰러움이 담뿍 담긴 목소리로 감미롭게 속삭일 것이다. ‘이해해…….’

 

 

 

하지만 현실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다음과 같았다.

두 아이, 조금 지친 아내, 그리고 모종의 위기. _사랑의 기초_한 남자

 

 

어쨌든 세상의 중년 남성들, 힘내라! 다만, 그 '색'에 관한 욕망은 집안에서만 발산하시길, 쓸데 없이 남의 '츠자'에게 보이지 말고. 아무리 소년의 감정이 되살아난다고 해도 말이다.

 

 

 

사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라 쓰고 보니 뭔소리인지 모르겠다. 길다고 좋은 것도 아닌데 요즘은 어째 글만 쓰면 쓸데없이 길어진다. 암튼 책을 읽다가 이렇게 묶어보는 일은 늘 즐겁다. 왠지 뿌듯하고. 자기만족.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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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야말로 사치스럽게 사는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같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_《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끝을 맺는다. 《단순한 열정》을 읽으면서 내내 이 여자의 폭풍과도 같은 열정적인 사랑, 일상을 사로잡아버린 사랑에 내가 다 미칠 지경이었다. 누구나 사랑을 시작하면 어느 정도 상대에게 몰입할 수 있다. 이해는 하면서도 그래도 그렇지, 라는 말이 내 입에서 나올 정도라면 어느 정도인지 내 스무살 때 친구들이 보면 '너보다 더 하단 말야?'라며 경악할 것이다.


물론 《단순한 열정》에서의 남녀 관계는 일반적인 남녀의 관계가 아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불륜'이다. 아내가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아니 에르노. 그것도 속물 근성을 가진 소련 외교관에 13살이나 어린 남자다. 왔다가 돌아갈 때는 꼭 아니 에르노의 말보로 담배를 몽땅 다 챙겨가며, 큰 차를 좋아하고, 브랜드의 옷을 말끔히 입는 것으로 자신의 지위를 나타내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촌부 같은 그런 남자에게 아니 에르노는 빠져서 속을 끓인다. 이유가 뭘까? A는 그녀가 좋아하는 외모도 아니고, 지적으로 통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속궁합인가? 글쎄,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길어야 서너 시간 만나고 헤어져야 하는 관계인데다 그녀의 글 속에 담긴 욕망이 그러하므로. 그것 외엔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단순한 열정》의 상세판(!)이라고 할 수 있는 《탐닉》에 나오는 A였다가 S가 된 그에 관한 아니 에르노의 인상은 이렇다.


그는 나의 가장 '유치한' 부분, 그리고 가장 사춘기적인 부분을 대변한다. 별로 지적이지 않고, 큰 자동차를 좋아하고, 운전하면서 음악을 틀어놓고,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그는 '내 젊은 시절의 남자'이며, 금발이고 약간 촌스럽다(손과 네모난 손톱들). 그러나 나의 쾌락을 한층 증폭시켜주기 때문에 이런 지성의 부재에 대해 더이상 불평하고 싶지 않다._《탐닉》


그렇다면, 어쩌면, 어릴 때 그녀가 생각했던 '유치한' 부분이 아니 에르노를 사로잡았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열정》을 읽고 그녀와 사귀었다가 헤어진 후《포옹》이라는, 《단순한 열정》을 꼭 닮은 소설을 펴낸 필립 빌랭의 글에 보면 이런 글이 나온다.


나는 그녀가 A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그 남자가 상징하는 혁명적 이상이 그녀의 유년기 첫사랑의 추억에 접목되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자위했다. 아, 그러나 그것은 매번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은 내게 비수로 돌아와 A에게 신화적 힘만을 부여했고 그의 영웅적 위상을 깎아내리기는커녕 오히려 강화시켜주는 꼴이 되었다. A는 A.E를 그녀의 어린 시절로, 출신세계로 이어주는 사람이었다._《포옹》


 

그러니까 필립 빌랭의 말을 빌리면 그녀가 A의 촌스러움과 지적 부재에 따위보다는 '그녀의 유년기 첫사랑의 추억'으로 이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한다(이 글을 읽으니 아니 에르노의 이전 작품들이 더 궁금해지고 말았다) 아무튼 그녀가 그 남자 A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가 있는 남자의 집으로 전화를 할 수도 없으며, 소비에트라는 나라에 소속되어 있던 때라 그가 근무하는 곳에도 함부로 전화를 못한다. 그저 A가 전화를(그것도 가끔은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공중전화로) 해서 언제, 몇 시에 갈게. 라고 해야만 만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 아니 에르노의 집착과도 같은 그 사랑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A를 향한 온갖 상상, 연락이 없으면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다가 전화라도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변하고 마는 감정. 읽는 이가 질리도록 천국과 지옥을 오고가는 그 감정들!


때로, 그사람이 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는 게 아닐까 자문해보기도 했다. 나는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태연히 잠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하고 웃는 그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한시도 그 사람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와의 차이 때문에 너무나 불안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아니다. 그 사람도 분명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 생각만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랄 것이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내 태도가 옳은 건지 그 사람이 옳은 건지 굳이 가려낼 필요는 없다. 그저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_《단순한 열정》


물론 이 정도의 생각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이 문장은 전체적으로 봤을 때 가장 정상적인(!)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깊이 빠진 듯 하~아, 한숨이 나오는 문장들이 많지만 그래도 《탐닉》에 비하면 《단순한 열정》의 글들은 정말 '단순'하다. 그 책을 출간하고 십 여 년이나 지나 펴낸 《탐닉》에선 그 감정의 변화가 말도 못한다. 매일이다시피 써 놓은 그녀의 일기를 읽으면 감정의 변화가 어찌나 변화무쌍한지 읽으면서 내내 이 여자를 어쩌면 좋아! 와 같은, 측은함이라면 좀 웃기고, 누군가를 사랑하면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그 마음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암튼 책을 다 읽고 덮으면서 난 앞으로 누군가를 그보다 내가 더 사랑하게 되면 절대로 '일기' 따위는 쓰지 않으리라, 맘 먹을 정도였다.

 

아니 에르노는 《단순한 열정》에서 한 남자와의 사랑의 경험을 열정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미친듯이 써내려 갔지만 《탐닉》에서는 그 남자를 벌거벗기고 만다. A가 아니 에르노에게 했던 모든 행동들, 그녀가 A에게 느낀 수많은 감정들이 정제되지 않은 채 날 것 그대로 묘사된다. 아니 에르노는 일기야말로 '삶을, 혹은 가장 가까운 무엇을 허무에서 구해내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십 여년이 지나 《탐닉》을 발표한 이유가 '허무'때문이었을까? …어쩌면, 그럴 수도ㅡ

 


A와 필립과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에서 아니 에르노는 이렇게 말했다.


A는 지금도 이 세상 어디엔가 살고 있다. 나는 그 사람의 신분을 드러낼 수도 있는 예민한 정보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할 수 없다. 그 사람은 이제 '그의 삶'을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지금의 그에게 자신의 삶을 값지고 성공적인 것으로 이끄는 일보다 더 소중한 일은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입장이 나와 다르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그 사람의 신분을 밝힐 수 없게 만든다. 나는 그 사람을 내 존재를 위해 선택한 것이지 책의 등장인물로 만들기 위해 선택한 것은 아니다._《단순한 열정》


이때만해도 아니 에르노의 마음엔 A가 남아 있었다. 비록 그에 관한 글을 쓰면서도 그를 보호해주려고 하는 그런 마음. 하지만 십여 년이 지나 그녀는 A를 만나면서부터 거의 매일 쓰다시피한 일기를 공개한다. 그 일기가 바로 《탐닉》이다. 물론 그녀는 '체험적 글쓰기'를 하는 작가였다. 마치 미래의 출판을 위해 일기를 쓰듯 어쩌면 출판을 목적으로 일기를 썼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A에 관한 소설(!)을 펴내고서 다시, 그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 아니 A와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라고밖에 할 수 없는 소설(!)을 펴낸 의도는 뭘까. 출간 연도 순으로 따지고 보면 《탐닉》은 필립 빌랭이 아니 에르노와 헤어지고 난 후 발표한《포옹》이라는 소설이후에 나온 작품이다. 《포옹》에서 필립 빌랭은 아니 에르노와 사귈 때, 절대로 A의 이야기를 담은 '일기'를 펴내지 말라고 졸랐다(필립은 아니 에르노가 A를 못 잊는다고 생각했다. 그 대부분의 오해(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는 《단순한 열정》때문이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요구에 따라 '그녀는 A와 관련된 부분의 일기를 나중에라도 출간하지 않기로 했다.'고 했다. 한데 그녀는 결국 출간했다. 왜?


그 시절엔 줄곧 나 자신이 둘로 분열되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다른 두 사람ㅡ죄수이자 간수ㅡ이라고 느껴졌다.

집에 신문기자나 사진기자가 오면 그녀는 나더러 아래층 방에 있으라고 요구했다. 인터뷰가 길어지면 나는 전봇대에 오줌을 싸서 자기 영역을 표시하는 개처럼 변기 물을 내리고 문을 소리나게 여닫으며 내 존재를 상기시켰다.(또한 미래의 그녀 애인들을 생각하며 나는 내 영역을 표시하기 위해 이 책을 쓰고 있다. 그들은 그녀가 내 것이었으며, 내가 이렇게 쓴 책 속에 감금당했음을 알게 될 터이다. 또한 그녀가 자기들과 하는 것은 나와 했던 일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내 글은 출판된 뒤에도 여전히 힘을 행사 할 것이다.)_《포옹》


필립 빌랭은《포옹》에 이런 문장을 넣었다. 그가 아니 에르노를 만나면서 A의 존재에 대해 얼마나 질투를 하고 있었으며 결국 5년 동안의 만남이 끝나버린 것은(물론 5년이란 기간동안 필립 빌랭이 본인에겐 소설 속 인물이나 마찬가지인 A에 대해 아니 에르노가 잊었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단순한 열정》의 장면장면을 떠올리며 굉장히 질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쉬웠을지도) 아니 에르노의 지갑 속에 들어 있던 A의 사진때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 그리하여 '출판된 뒤에도 여전히 힘을 행사 할' 글을 쓴 것이겠지.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사랑일까? 집착일까? 주목받고 싶었을까? 제2의 A가 되고 싶었을까?) 말이다,


A.E와 멀리 떨어져 루앙에 있으면 나 자신이 쓸모없어서 버림받은 존재로 느껴졌다. 그녀는 "우리 커플을 유지하기 위해서 오직 좋은 시간"만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이를 "사치스럽게 사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삶'의 규칙성으로부터 도망친 우리는 역시 단조롭고 보다 음흉하고 어떤 놀라움도 없는 또다른 규칙성을 만들고 말았다._《포옹》


A와 아니 에르노가 헤어진 후 한 번 만나고 두 번 다시 못 본 것처럼(십여 년이 지나 펴낸 《탐닉》에도 더이상 A에 관한 글이 나오지 않으니 아마도 만나지 못한 것 같다) 필립 빌랭과 아니 에르노도 만나지 못했을까? 러시아에 살고 있는 A와는 다르게 필립 빌랭은 같은 나라에서 같은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말이다. 추리 소설도 아닌데 자꾸만 추리를 하게 만드는 이 세 권의 책, 아니 에르노가 십여 년이 흐른 후 《탐닉》을 내보낸 진짜 이유는 어쩌면 A보다는 필립 빌랭을 향한 것은 아닐까. 그의 요구에 따라 'A와 관련된 부분의 일기'는 출간하지 않기로 했다는 약속을 깨기 위해(날 엿먹였으니 너도 엿먹어봐라. 내 진짜 사랑은 역시 A였다. 뭐 이런-.-;;->아, 소설(!)을 넘 마이 읽었다;) 아니 에르노는 《탐닉》을 출간하게 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2000년 1월인가 2월, 나는 5년 전부터 들춰보지 않았던, S에 대한 나의 열정의 시간에 해당되는 일기장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여기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이유로 일기장은 내 손이 닿지 않는 장소에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이 페이지들 속에 《단순한 열정》에 들어 있지 않은 다른 '진실'이 내포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정제되지 않고 암울한,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어떤 제물 같은 무엇이 있었다. 나는 이것도 언젠가는 출판하리라고 마음먹었다.

(...)

이 글에서 외부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내게는 언제든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시사적인 사건들보다는 그날그날의 생각이나 몸짓, 그리고 열정 그 자체인 삶에 관한 이 글에 담긴 세세한 부분ㅡ자동차 안에서 욕정을 주체할 수 없어 섹스를 했을 때 그가 신고 있었던 양말 같은 것ㅡ들이 더 중요해 보인다.

나는 일종의 내적 필요에 의해 이 일기장을 공개한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S가 느낄 감정에 개의치 않고 당연히 그는 문학적 권력의 남용이라거나, 더 나아가서 배신이라고까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성욕 해소용으로 그녀를 만났을 뿐이야"라고 웃어넘기면서 자신을 변호하는 것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는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그 몇 달 동안 그가 자신도 모르게 나의 경이롭고도 무서운 욕망과 죽음, 그리고 글쓰기의 근원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바랄 뿐이다._《탐닉》


'5년 전부터 들춰보지 않았던', '여기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이유'. 세 권의 소설을 차례로 읽으면서 나는 사랑의 강자와 약자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단순한 열정》에서 '약자'였던 아니 에르노는《탐닉》에서는 그 반대로 '강자'가 되어 있었다. 아니 에르노가 겪었던 모든 감정의 변화를 필립 빌랭이 겪고 있었음을 몰랐을리 없겠지만 A의 만남과 비교해볼 때 필립 빌랭과의 5년은 결코 짧은 기간도 아닌데 그에 관한 글은 하나도 없으니(어쩌면 그것 또한 그녀의 손에 닿지 않는 어느 곳에 보관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 혹은 그녀에게 필립 빌랭은 '성욕 해소용'일지도. 《포옹》이 츨간 되었을 때 아니 에르노의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도 안 되지만 결코 좋은 감정은 아니었을 거다. 필립 빌랭의 글은 아니 에르노와 는 차원이 다른, 질투에 눈먼 한 남자의 멍청한 짓으로밖에 안 보이니 ). 나의 상상은 끝없이 펼쳐진다.

 

글을 쓰기 시작한 지도 넉 달이 지났다. 소설 형식이긴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공개하면서 무엇인가를 파괴하고 있는 셈이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랐다. 언젠가 이 글이 책으로 출간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나를 증오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의 결정적 종말을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글쓰기는 그녀와 나 자신을 향한 위험이다. 이별 장면을 쓰면서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다시 되살려, 필경 한 사람은 죽여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죽어야만 하는 원형 경기장 속에 두 인물을 내던진 것이다.

나는 그녀를 좀더 내 곁에 간직하고 우리가 함께 했던 모든 것, 우리가 가보았던 모든 장소, 우리가 사랑을 나누었던 모든 호텔 방을 회상하고자 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면 이 책과는 전혀 다른 책을 썼을 것이다.

 

그녀를 통해, 그리고 내 질투심을 통해, 나는 너무 늦게서야 행복이었음을 깨달은 사라진 세계에 대한 분명한 신호를 정말적으로 찾아 헤매고 있다._《포옹》

 

짧은 기간의 열정적인 사랑, 그 사랑의 책이 인연이 된 또 다른 사랑. 사랑에 있어 승자와 패자가 어디있겠으며 세월이 흐른 후엔 그 모든 것이 오로지 추억으로 남을 뿐인 허무한(!) 사랑인데(그들의 책을 보고 느낀 점이랄까. 진짜 허무했다. 죽을만큼 서로 사랑했지만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너무나 일상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열정이 사라지고 만다. 글을 쓸 때까지도 그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이 남아 있는 듯 보였지만 결국엔 과거에 있었던 빛바랜 사랑의 추억일 뿐으로 보인다. 사랑은 그런 것 같다. 순수하든 열정적이든 순간의 행복이 지나면 그저 똑같은 일상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사랑에 관련한 소설은 이별을 던져주는 마지막 보다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을 갖게 해주는 게 좋은 것 같다. 체험적 글쓰기인지라 끝이 분명한 소설들이었지만 시작과 과정과 끝이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조금은 불편했던. 하지만 그 불편함 때문에 더 마음에 오래 남는) 왜 그토록 집착하고 잊지 못하는 걸까. '한 사람은 죽여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죽어야만 하는'게 사랑이라면 어느 누가 사랑따위를 할 것인가.


우연히 읽게 된 세 권의 책으로 인해 며칠 동안 나는 즐거웠다. 사랑이 무엇이고 집착과 욕망이 무엇인지 이 세 권의 책에 너무나도 잘 나와 있다. 이 이야기들이 모두 허구가 아니라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 더 놀라웠고 이런 글을 두려움없이 펴내는 아니 에르노가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녀의 이전 책들이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소설이라는 허구의 구성을 무시하고 체험적 글쓰기를 하게 만들었는지. 왜 지극히 사적인 부분을 드러내면서까지 글을 써야만 했는지에 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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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계절의 여왕 오월, 열두 달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다. 오월이 오면 언제나 마음이 들떠 있다. 나의 일년 중 시작은 항상 오월부터였으니까. 겨울을 싫어해서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 오월은 회생의 달이며 희망의 달이다. 그런 오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가슴 아프고 힘든 달일테지.

 

언젠가 읽은 SF 소설이 생각난다.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 천국도 지옥도 아닌 그곳엔 누군가 '죽은 나'를 기억해주어야만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살아 있는 누군가가 '죽은 나'를 기억하면 나는 그곳에서 마치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처럼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처음엔 많은 사람들이 '죽은 나'를 기억해준다. 그래서 그곳에서의 삶은 살아 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게 바쁘다. 하지만 그 어떤 사건도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지나면 다들 잊게 마련이다. 사느라 바빠서, 또 다른 사건들로.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기억에서 조금씩 멀어지게 된다. 그러면 그곳에서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던 '죽은 나'도 서서히 사라진다. 마치 뚜렷했던 물체가 점점 투명해져 모습이 옅어지는 거다. 그러다 어느 순간 '죽은 나'는 이제,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엔 스토리의 상상력에 너무 황당했다. SF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한데 이상했다. 다 읽고 책을 덮으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다. 잊는다는 것,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고 잊히는 존재가 되기 마련이지만, 절대로 잊지 않을게, 하면서도 나 역시 모르는 사이에 잊으면서 살아가지만.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억하는 일, 기억해주는 그 사람마저 죽어버리면 끝인 그 허무함.

 

시작부터 괜히 사설이 많아졌는데 그런 기억에 관한 거다. 이미 많은 사람이 잊고 있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되새겨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잊지 말아야 할, 그러니까, 오월엔 한번쯤 그날을 생각해보자는. '죽은 그들'이 투명하게 사라지지 않도록.

 

알고 있는 책들이 많지는 않아 내가 읽은 것들을 위주로 골랐고 덧붙여 같이 읽을만한 책을 넣었다. 부끄럽게도 그동안 관심이 얕았으므로 깊이는 별로 없다. 그래서 이런 책을 한번쯤은 읽어봐주세요. 하는 정도밖에 되지 못한다.


 

“군인들은 뛰어내리자마자 사람들에게 달려갔다.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몰라 그대로 서 있었다.

먼저 회사원과 중년 남자들이 얻어맞고 나자빠졌다. 중국집 배달부는 배달통과 함께 넘어졌다. 자전거 바퀴가 허공에서 돌고 우동 국물이 쏟아졌으며 뒤이어 머리통이 깨졌고 군화에 짓밟혀 다리가 부러졌다. (…) 언니의 손을 잡고 가던 소녀가 넘어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소녀를 일으켜세우는 언니의 어깻죽지를 군인이 곤봉으로 때렸다. 언니는 소녀 위로 넘어졌고 다른 군인이 자매를 밟고 넘어갔다. (…) 한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그의 뒤통수를 쳤다.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감싼 손에서 붉은 피가 떨어져내렸고, 그 속에 동그란 눈알이 들어 있었다.“

 

한창훈 작가의 《꽃의 나라》는 '폭력'에 물든 한 소년의 성장기다. 그 소년이 가정과 학교에서 나중엔 사회와 국가에서 당하는 '폭력'에 관한 이야기를 다뤘다. 그중 가장 '거대'하고 끔찍한 폭력은 바로 '국가의 폭력'이었다.

그동안 많은 책을 읽어왔지만 그 당시 그 반대편 도시에 살고 있던 어린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몰랐다는 게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늦게 깨달았다. 자칫하면 그조차 모르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무심결에 폭력에 관한 단순한 소설일 거라는 기대로 읽다가 나타난 무시무시한 국가의 폭력 장면 앞에서 너무 놀라고 말았다. 

책은 그런 것 같다. 어느 순간에 가슴을 후벼파며 들어오는 책이 있다. 다른 때 읽었으면 아무것도 아닌 채 지나가버릴 그런 글들이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을 뒤흔드는. 그래서 작가의 도리란, 되풀이되고 똑같은 내용에 뻔한 스토리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잊지 않도록 자꾸 끄집어내고 드러내야 한다는 것. 겨우 한 사람만이 공감하고 충격을 받을지언정.

그가 아니었으면 난 올해의 오월도 그렇게 개인적으로 찬란을 운운하며 보내고 있을지 모르니까.    

 

 

'자기가 죽인 자의 자식… 용서를 빈다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

"자네에게도 해줄 말이 있네. 26년 전 자네가 쐈던 아기를 안고 있던 여자, 기억하나? 잊을 수가 없겠지. 저기 주차타워에 있는 저격수, 그때 자네가 죽인 그 여자의 아이라네. 그 여자 아이가 커서 지금 저곳에 있다네."

'…… 내가 죽인 자의 자식! 그, 그 아이가!'

"그리고 난 내가 죽인 자의 자식에게 용서를 받았다네. 내가 먼저 용서를 빌었기 때문이지. 자네와 나의 길은 26년 전 그날 이후로 나뉘어졌네. 나는 용서를 빌기 위해 노력했고, 자네는 용서받을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살았어… 자네도 용서를 빌게. 그것이… 옳아. 저기…주차타워에 올라가 있는 저 아이는 평생을… 복수만을 생각하고 살았더군. 자네는 저 아이에게 평생의 고통과 슬픔을 안겨준 사람이야. 용서를 빌게. 자네가 방법을 찾아서."

(…)

"그날로 부터 그래서 내 나이 26살이오. 이전을 잊고 새로 시작하려고 해도 계속 과거는 따라오고 말았소. 당신은 분명히 기억해야 하오. 당신의 욕심이 어떤 아픔과 슬픔을 남겼는지 그때가 당신이 살거나 죽게되는 날일 것이오."

 

강풀의 만화 <26년>은 시각적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가슴이 아팠다. 몇 장 넘기지도 못하고 먹먹해지는 마음으로 인해 읽기가 주저댈 정도였다. 강풀은 이 만화에서 '단죄와 복수, 이해와 용서'에 관해 들려준다. 단순히 역사적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상처를 통해 용서와 이해를 보여주는 거다.

가해자와 피해자. 어쩔 수 없이 상부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그럼에도 가해자가 되어 살아가는 또 다른 피해자와 그날의 상황을 합리화하고 용서를 빌 줄 모르는 가해자들. 그때의 상처를 안고 26년이란 세월을 오로지 복수와 단죄를 위해 살아온 사람들을 통해 역사의 비극과 용서란 무엇인가를 감동적으로 풀어냈다.

이 만화를 아직도 '용서'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분이 꼭 읽어보길 바라는 마음 간절.   



그가 말했지. 그는 그날 걸어가면서 자기가 외운 것들을 내게 들려줬어. 그건 광주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이야기였어. 고통과 피와 눈물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지금도 종로 거리를 걷다보면 그때의 우울과 멜랑콜리가, 그다음에는 열에 들떠 자기가 들은 이야기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내게 들려주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라. 뜨거운 여름이었지. 나도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의 이야기를 들었어. 그때 나는 뜨거운 여름 안에 있었지. 그때 나의 영원을 생각하고 있었어. 하늘이나 바다 같은 것, 혹은 시간이나 공간, 우주 같은 것, 어쩌면 사랑 같은 것.


김연수 작가의 <원더보이>는 1984년에서 1987년까지의 이야기지만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과거는 1970년대로 넘어가 1980년을 거쳐온다. 그 시기, 박정희군부독재정권에서 벌어진 많은 사건들로부터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아직도 잘못을 모르는 사람이 대통령을 하던 그때까지. 

김연수 작가는 이 책 이전에도 그날의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줬다. 왜 그렇게 작품마다 내비치는가 궁금했는데 <원더보이>  낭독회에서 그 의문이 풀렸다.


11살 때, 박대통령이 서거한 후 아버지의 권유로 신문 스크랩을 했단다. 중요한 사건이므로 자료를 모아두면 나중에 쓸 일이 생길거라는. 그 당시 계엄이 확대되고 1월부터는 대학생 시위가 있었는데 그걸 모두 스크랩하고 있었다. 그러다 1980년 봄이 왔다. 그 봄의 신문에 '춘래불사춘'이란 글자가 나왔는데 그 말이 유행했단다. 그것은 3김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다음 대통령 자리를 두고 세력 다툼을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뉴스가 나오니 스크랩이 재미없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스크랩에 점점 지쳐갈 무렵, 대학생 시위가 격화되던 어느날 뉴스에서 광주 MBC가 불타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11살 소년의 눈엔 뭔가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다음날 신문엔 별다른 기사가 없었다. 그러다가 광주에서 계엄군이 물러난 뒤에야 신문에 소식이 나왔다. 그건 광주가 폭도들의 손에 넘어갔다는 기사였다. 이후 신문에 실린 유언비어에 관한 기사들. 총 들고 있는 시민군 사진 같은 기사들을 스크랩했다. 며칠 지나 평온을 찾은 광주 기사까지.  그 이후엔 다른 소식들이 올라오지 않았다. 스크랩이 재미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김연수 작가가 광주에 관한 이야기를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대학에 들어가서였다. 그건 아마도 모든 지방에 살았던, 특히나 경상도 지역에서 올라온 아이들이 대학에 가서 제일 먼저 받는 충격적인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 사실을 알고 문학을 하게 되면 광주에 대한 이야길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단다. 그래서 자주 작품에 등장하는 것이란다. 매번 쓸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잊어가고는 있지만 작가가 된 가장 원초적인 사건이기에 모른 척하며 살지는 않을 것 같단다.



이외에도 그날의 봄에 관한 작품들은 그날을 잊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꾸준히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 관심은 점점 적어진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고 이젠 잊고 살자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올해는 더욱 그런 것 같다. 진보를 운운하는 당에선 자기들만의 세력을 위해 정신이 없고 대선을 앞두고 다들 자기 앞가름하느라 바쁘다. 어차피 그들은 생색내기일 테니 그렇다면 우리라도 오월엔 한번쯤 그때를 기억해주자. 처음 접했던 그때의 충격을 떠올리고, 관련 책을 읽거나 영화라도 보면서. 그래서 오월만은, 죽은 자의 나라에서 우리의 기억으로 많은 '죽은 자'들이 살아 움직일 수 있도록. 오월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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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라 2012-05-14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

readersu 2012-05-15 10:22   좋아요 0 | URL
아, 오월이 되면서 야심차게(!) 써볼려고 했는데
다른 책은 아직 마무리도 못하고;;;
너무 바빠서 글이고 뭐고 쓸 시간이 없었어요.
오타도 많고(하면서 고치지도 않고;;)
다른 책도 링크할려고 했는데 빼먹고 에공에공
그래도 미흡한 글에 추천해주고 캄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