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 아리스토텔레스 - 아테네의 피
마가렛 두디 지음, 이은선 옮김 / 시공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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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에 있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좀 더 낮았더라면' 하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역사의 발전은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것과 같아서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사건이 역사의 방향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 인사의 암살로 인하여 전쟁이 발발했다라는 식의 역사적 인식은 조잡하기 그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역사적 사실에 이런 저런 가정을 해보게 되는데, 역사추리소설이라는 장르는 그런 점에서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할 수 있다.

일전에 줄리오 레오니의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을 읽고 조악한 상상력에 진저리가 났었는데, 마가렛 두디의 <탐정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기의 정치적 상황 및 풍속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건을 전개시켜 나가기에 재미있게 읽어나갔다.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의 전쟁 와중에 '트라이어아크(선박의 건조에 필요한 비용을 대는 자로서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지위이다)' 가 살해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촌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변호를 맡게 되는 '스테파노스'는 한 때 자신이 가르침을 받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움을 받아 재판을 진행하게 된다. 소설에서 묘사된대로라면 아테네 법정의 4차에 걸친 심리와 공판은 상당히 합리적인 절차를 밟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배심원제도와 증인의 심리 과정은 현대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이다.

재미 있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할이다. 간단히 말해 소설 속의 '아리스토텔레스' 대신 누군가 다른 인물이 끼어 들어도 이 소설은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기왕 탐정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까지 붙였으니, 사건의 해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면 안될 무언가,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방식을 추리에 적용한다든가 그런 면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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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 상 스티븐 킹 걸작선 7
스티븐 킹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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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켓에 놀러 갔을 때 보트에서 물에 뛰어들었다가 예상외로 물이 깊어 당황했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자연스러운 자세를 아직 찾지 못해 머리가 물 속으로 쳐박혔고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나는 당황을 넘어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당시 느꼈던 공포는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공포였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질식에의 두려움 등.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그런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공포보다는 우리가 상상속에서 만들어낸 공포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겁이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미국의 데리시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끔찍한 일들과 '그것'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26~7년 마다 주기적으로 데리시에 참사를 가져오는데, 그 참사를 일으키는 '그것'의 실체는 보는 사람에 따라 이런 저런 다른 모습을 띈다. 때로는 거대한 새로, 때로는 늑대인간으로, 때로는 미이라로... 보는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형체를 띄고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의 존재를 알게 된 데리시의 아이들, 빌, 리차드, 마이클, 비벌리, 벤, 에드, 스텐리 7명의 아이들은 '그것'을 없애기 위해 모였고,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했지만...

'그것'은 다시 힘을 되찾게 되고 27년 후 아이들은 잃었던 기억을 되찾으면서 다시 데리시로 모여들게 된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를 절묘하게 교차시켜 긴장감 있게 끌어내는 작가의 능력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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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개 이외수 장편소설 컬렉션 2
이외수 지음 / 해냄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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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일요일, 오랜만에 아벨서점에 갔다가 온전한 외양으로 꽂혀 있길래 이천원을 주고 사왔다. '정한이선배로부터'라는 여자글씨가 화이트로 지워져 있었다. 95년 중판 발행본인 이 책을 내 나이 또래의 정한이라는 사람이 여자 후배에게 선물하고, 10여년이 흘러 그 관계의 끈은 끊어졌는지... 헌책방에까지 흘러들어, 결국은 내 손에 이르게 되었다. 

 

이외수의 <들개>의 초판 발행은 89년이다. 89년이라면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가 극한까지 갔던 때이다. 이러한 극한의 부조리 상황에서, 이외수는 사회에 대한 얘기는 접어둔 채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그리고 현실사회의 모든 제약을 의지로 극복하고 예술 그 자체에 집중하여 예술과 예술가가 몰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른, 한마디로 뼈를 깎는 고통이 담긴 예술만이 진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들개>의 주인공 남자는 청량음료의 광고를 그리다가, 진정한 예술을 하기 위해 회사를 나오고, 외부와 단절한채 일년간 그림만 그리다가 그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 자살로 삶을 마감한다.

 

의도한바는 아니지만 이외수의 이러한 예술관은 독재자의 정치관과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레닌의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을 보면 엘리트주의와 테러리즘의 유사성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대중을 믿지 못하고 대리주의에 빠져든다는 점에서, 그리고 스스로를 그런 대중들과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극좌와 극우는 서로 통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데아'와 흡사하다. 정치는 정치를 가장 잘할수 있는자가 해야하므로, 민주주의는 '바보들의 합창'인 것이다.

이외수의 예술관 역시 이러한 사상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예술가는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 자체를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 그럴 각오가 있지 않은 일반 대중은 예술을 하더라도 '가짜' 예술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은 대중들과 호흡하는 예술이 아닌, 하늘 위에 둥실 떠오른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그래서인지 <들개>는 지루하다. 예술을 위해 칩거한 화가와, 글을 쓰기 위해 스스로 차폐의 길을 택한 여자 주인공의 얘기이기 때문에, 주로 둘 사이의 의식의 흐름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왜 여자주인공은 끝끝내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인가? 정답은 바로 칩거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닐까. 20대 초반의 여성이 글을 쓰는데 있어 '부딪혀 깨어지는 것' 과 '스스로 침잠해 들어가는 것' 어느 것이 올바른 길일까. 글을 쓰겠다고 산으로 들어가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하면 글이 써지는 것일까. 그리고 설령 글이 씌어진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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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더린 2012-04-07 0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다 만 소설,,지루한 건 참겠는데 유치하건 못 참을수없었다. 요즘시대의 글빨로는 도저히 소설이라 부를 수 없는 ,,요샌 물만난 고기처럼 설익은 멘토 역활을 하는데 토나올 지경이다.
 
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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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때, 보일러가 고장난 방에서 살았다. 어느해 겨울이던가 전기장판에 온몸을 이리저리 뒹굴려 가며, 추위에 떨며 생각했었다. 꼭 그럴싸한 '방'으로 이사가리라. 그러나 7년간 그 '방'에 살았고, 직장에 다니고 있는 현재도 나의 거처는 '집'이 아니라 '방'에 가깝다. 김애란 소설의 촛점은 '집'이 아니라 '방'이다. 김애란의 소설집을 벼르고 별러 산 이유가 그것이다.

가끔, 내가 지방의 그곳에서, 어머니가 해주는 밥을 먹고 대학을 다녔더라면 나의 인생이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그랬더라면 나의 인생도 '집'을 중심으로 이어져나가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난 인천으로 올라왔고, 나의 인생은 '방'을 중심으로 이어져가고 있다. '집'은 어쩐지 완결된 느낌, 안정된 느낌을 준다. 거기엔 가족이 있고, 돌아가면 불이 켜있을 것 같다. 그러나 '방'은 조금 쓸쓸하다. 돌아가면 불은 꺼있고, 내 소유의 무엇인가를 정해진 위치에 놓아둘 수도 없다. 잦은 이사와 이런저런 말썽들. 그런 신산한 느낌들은 쫓기는 듯한 느낌으로 자리잡는다.

김애란 소설은 이러한 '방'의 느낌을 정말 잘 살린 소설이다. 게다가 이 '방'들의 주인공은 현재, '집'으로 표현될만한 곳으로 가기 위해 '방'을 거쳐가는 중이다. '집'의 완결성, 정착성을 획득하기 위해 '방'의 주인공들이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은 취직이다. 정규직으로,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출근할 수 있는 직장을 얻는 순간, 그들은 '방'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재의 그들은 그러한 정규직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므로, '방'에서 살며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학원 강사'등을 하고 있거나, 시험 준비에 매달리고 있다. 시험을 준비해본 사람들은 알리라. 합격 이후의 달라진 상황들에서 한껀 고양된 감정을 맛보다가 추리닝 차림의 후줄근한 내 모습을 보고, 영원히 이런 상태가 계속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에 시달리는 그 달뜬 상태를. 그러나 그들 역시 현재를 살아가기에 연애도 하고, 미래도 설계하고, 남들 하는 것은 다 하고 있거나 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슬프다. 피난민 살림은 언제나 '임시'에 불과하므로, 정말 구체적인 소망과 계획은 전부 보류되기 때문이다.

김애란 소설을 좋아하게 된 이유로 과도한 자의식의 배제이다. 젊은 작가, 게다가 순전희 나의 편견 상의 개념이지만 '여성 작가'가 이런 자의식을 절제한 글을 본 것은 오랫만이다.

아직은 젊기에 군데 군데 어색한 상황이나 표현도 눈에 띈다. <도도한 생활>에서 피아노를 삼촌과 여주인공 둘이 들어서 지하로 옮기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경험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피아노는 전문인력이 아니라면 장정 둘이 위로 들어올리는 것도 버겁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에서는 '5급공무원시험준비' 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역시 간접적인 경험에서 기인한 것 같다. 5급공무원시험이 바로 고시이며, 행시나 사시 등 시험의 종류로 구분해 부르거나 고시준비라 부르지 '5급공무원준비' 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그리고 막상 공무원이 되면 5급이라는 말 자체를 거의 쓰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실수에도 불구하고 김애란의 소설의 미덕은 엄청나게 많다. <성탄 특선>에서 가벼워보이는 문체를 구사할 때 조차 기지가 번득여 결코 경박해보이지 않고, <칼자국>에서는 언뜻 김주영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원숙함마저 내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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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이야기 - 편지와 우체국의 역사에서 세계 우편의 현주소까지
이종탁 지음 / 황소자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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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을 다니는 나로선 무척 흥미로운 책이었다. 정보통신이나 우표일반에 얽매이지 않고 우체국의 기원, 우표의 역사, 각국의 우체국, 최근 우체국의 동향 등 우정인이라면 꼭 한번 읽어봐야 할 책이다. 물론 우정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우체국에서 제공받는 보편적 서비스의 폭과 깊이가 얼마만큼인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난 김에 우체국 민영화 얘기를 해보자.

 

최근 민영화 바람이 거세다. 왜 민영화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고, 그저 민영화를 하면 막연히 좋아지는 것처럼 말들을 한다. 그러나 우체국은 결코 민영화 되어선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언급하며 민영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의 우체국과 우리나라의 우체국은 엄연히 다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차이점을 보자.

 

첫째, 일본의 우체국은 정규직원 26만에 보유자금 360조엔의 거대 공룡이었다. 일본의 4대 은행과 4대 생명보험자산을 합한 액수보다 커서 시장을 기형적으로 독점하고 있었다. 반면 우리 우체국은 예금7위, 보험5위의 수준이며 주 대상도 서민층과 농어촌 주민들이다. 우체국이 은행과 보험을 위협하기 보단 시중 은행과 보험사가 외면하는 서민층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전국 우체국 개수는 2800여개이다. 전국적으로  어떤 은행보다도 많다. 하지만 서울지역 우체국 개수는 은행에 밀려 4위다. 그만큼 지방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는 얘기다. 돈이 안되면 지점조차 개설하지 않는 은행과는 엄연히 다르다.

 

둘째, 일본의 우체국은 대대손손 세습하는 경우가 많다. 시험도 보지 않고 아버지가 국장이면 아들도 국장을 하는 식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신분을 유지한다. 엄청난 규모의 국가 사업체를 그냥 물려받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우정족'이란 말까지 있었으며, 그들이 정치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체국 하면 정겨운 집배원 아저씨가 떠오르지 무지막지한 금권과 권력을 휘두르는 누군가는 떠올리려야 떠올리기 힘들다. 빈잔을 앞에 놓고 앉아 있는 사람보고 '우체국장'이라고 하는 말도 있다. 관공서 공무원들의 빈잔은 금방금방 옆에서 따라주지만 우체국장은 잘 보일 필요가 없으니 잔을 채워주지 않는다는 자조섞인 말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우체국은 권력, 금권과는 거리가 멀다.

 

셋째, 우리나라에선 우체국 민영화를 국민이 나서서 외친 적이 한번도 없다. 왜인고 하니 우체국 직원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봉급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민간 기업과 똑같이 수익을 내서 거기서 월급을 받는다. 게다가 9년 연속 흑자이니, 공무원이면서 흑자를 내는데다가 국민의 세금을 한푼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남는 금액을 세금에 보태주는 유일한 공무원이다. 그래서 우체국은 비효율적이며, 민영화를 하여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은 어디서도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최근 공무원수를 감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엉뚱하게 공무원수가 많아 보이는 우체국을 겨냥하여 무조건 민영화 하자는 얘기가 나온 것이다. 주먹구구식으로 우체국을 민영화하면 공무원수가 확 준다는 단순논리이다. 수익을 내며 세금을 한푼도 낭비하지 않고 오히려 보태주는 공무원을 전부 민간인으로 바꿔버리면 그것이 공무원 감축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영국에선 마을 주민들이 우체국을 없애지 말아달라고 시위를 벌인다. 영국은 민영화가 되었기 때문에 수익이 나지 않는 산간 우체국은 죄다 없애려 하기 때문이다. 은행과 택배회사들이 외면하는 지방 소읍, 산간마을의 다정한 이웃이 공무원감축은 무조건 좋다는 이상한 논리에 사라지는 일이 없기를... 

 

http://blog.naver.com/rainsky94/80052243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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