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시장 여자
정도상 지음 / 창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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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시체' 라는 이미지가 각인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튀어나온 눈과 온 몸의 멍 자국, 그리고 사람의 그것이라고 보기는 힘든 부어오른 얼굴이 사진 속에 있었다. 토악질을 간신히 참으며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며칠간 그 이미지는 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훗날 대학에 가서야 내가 봤던 그 사진은 이철규열사의 사진이었음을 알았다. 이철규 열사는 수배중 경찰에게 검문 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온 몸의 멍자국에 대한 어떠한 해명도 없이 의문사가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나는 또 한번 의문사를 경험해야 했다. 강제로 노점상 철거에 저항하던 한 청년이 용역깡패들과 경찰을 피해 탈출하려 하였으나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팔에 포승자국과 온몸의 멍은 의학적 상식이 없는 일반인이 보더라도 타살이었지만 시체는 인천 길병원 영안실에서 전경들에 의해 탈취되고 되돌아온 시신은 장기 모두가 들어내진 상태로 꿰매져 돌아왔다. 그리고 이덕인열사 역시 의문사가 되었다.

 

정도상의 소설은, 내가 당시 느꼈던 분노를 뭉근히 가라앉혀 주던 소설이었다. '십오방이야기'를 시작으로 정도상과 만난 나는 <아메리칸 드림>, <친구는 멀리 갔어도> 등을 읽으며, 내 안의 분노들이 침잠하여 정제되는 느낌을 느꼈다.

 

그로부터 15년이 훌쩍 흘러갔다.

정도상의 소설을 사면서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나는 변했을지라도 왠지 정도상이란 소설가만은, 옛날, 그 분노의 중심에 그대로 있기를 바랐던 것일까.

 

공지영같은 비루한 장사꾼이 된 것은 아니지만, 정도상은 자신이 가장 잘 쓸 수 있는 것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위태로워 보이며, 그걸 드러내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예전에 산맥과 같이 우뚝해 보이던 그였는데, 지금은 인간적 고뇌가 느껴진다. 그리나 그 인간적 고뇌가 너무나 인간적임을 알기에, 나는 이후에도 정도상의 소설을 살 것이다. 전북대학교 총학생회 사회부장을 하던 때의, 시커먼 물을 들인 야상을 입은 정도상의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꼭 빼닯은 소설들을 나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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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
김형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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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경의 소설을 읽다보면 미우라 아야코의 말이 떠오른다.미우라 아야코의 소설에서 '책을 읽지 않으면 생각을 할 수 없다'는 문구를 읽고 고개를 끄덕인 기억이 나는데, 김형경의 책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판단과 선택을 해야만 한다. 때로는 마음 가는 대로, 때로는 마음을 다스리면서... 우리는 초등학교 때 살아가면서 해도 되는 것과 해서는 안되는 일들의 대부분을 배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신산하다. 삶은 '관계'에 기초하기 때문일 것이며, 그 '관계'를 이루는 우리의 '욕망'은 도덕을 거스르려 하기 때문일 것이다.

<외출>의 소재는 매우 자극적이다. 어느날 아내 수진의 교통사고 소식을 듣고 강원도의 한 병원을 달려간 인수는 수진에게 동승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인수는 수진이 출장을 갔던 것이 아니라 휴가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동승자 경호는 내연의 남자였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경호의 아내 서영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남편의 부정을 알게 된다. 아침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김형경의 소설이 가볍지 않은 이유는, 상처받은 인수와 서영이 어떻게 상처를 치유해 나가야 하는지 관심을 갖고 그들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진지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순간순간 선택을 하며 그들이 겪어야만 하는 인간적 고뇌에서, 작가 역시 고뇌하는 것이 보이기에 더욱 그렇다. '나라면 어땠을까' 라는 의문을 끊임 없이 하며 자주 책을 덮어야만 했다는 데에서 이 책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마크 트웨인은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책은 당신으로 하여금 가장 많이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라는 말을 했다. 김형경의 <외출>에 어울리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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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의 연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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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를 싫어하면서도 그의 소설을 가끔씩 서점에서 사다가 읽는 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읽은 후 그 의문이 어느 정도 해결된 듯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이겠지만, <스푸트니크의 연인>이야 말로 가장 무라카미 하루키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으며, 그런 이유로 앞으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속임수를 더 이상 읽지 않아도 될 듯 하다.

 

이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화자인 나와 스미레, 그리고 뮤이다.

 

먼저 '나'를 보자. 무라카미 소설의 여느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나'는 귀찮은게 싫으므로 주어진 예습 복습을 마지 못해 하였으며, 그런 결과로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있다. 본인은 너무나 평범하다고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으나 그의 누나는 변호사이며, 그의 부모도 중산층 이상의 유복한 계층이다. 특별하달 것 없는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본인도 알 수 없는 성적 매력이 있는지 여러명의 여자와 잠자리를 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주인공은 역시나 쿨한 성격인지라 그런 여자들과 깊은 관계에 빠져들 수가 없다.

스미레 역시 비범한 인물임에 틀림 없다. 아버지는 치과의사이며, 새어머니는 신기하게도 스미레에게 단 한차례의 구박도 하지 않는다. 학교를 다니지만 주변 인물들과 동화할 수 없어(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뿐이지 수준이 맞지 않아서) 자퇴를 하고 글을 쓰려고 한다.

뮤라는 여자는 더욱 더 가관이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일본에서 자랐으며 어렸을 적부터 유럽 쪽에서 음악 유학을 한다.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학창 시절에 단 한차례도 차별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 그의 아버지는 무역을 꽤나 크게 하고 있으며, 한국의 북쪽 마을 태생인데 많은 돈을 그 마을에 기부한 덕분에 '동상'을 마을 사람들이 광장에 세워주었다고 한다!

한국의 북쪽이라 해도 북한에서 김일성 이외의 인물 동상이 세워질 리는 없으므로, 남한이란 얘기인데 한국이란 나라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낸다. ('한국인들은 고양이를 먹는다는데...' 라는 대사도 나온다)

 

이렇듯 각 등장인물의 인생사 자체가 무척이나 부유하며 그들의 인생살이에 고달픈 삶의 애환 따위는 끼어들 틈이 전혀 없다. 이들이 만나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더욱 더 가관이다. 뮤는 스미레를 보더니 단박에 얼굴만 봐도 대충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으니 내일부터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라는 제의를 한다. 알고보니 스미레는 대학 중퇴를 했지만 스페인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탈리아어 강습을 받는게 좋겠다는 뮤의 말에 기껏 두어달 강습을 받았지만 이탈리아 여행에서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취업이라는 것 자체가 인생에 있어 사느냐 죽느냐 하는 각박한 현실 따윈 전혀 없이, 그저 얼굴 한 번 대면한 후 바로 채용이 되는 것이다. 그러더니 둘은 영혼의 어떤 공통분모를 느낀 것인지 어쩐 것인지 유럽 여행을 떠나게 되며(말은 사업상이지만 실제는 여행이다) 그 비용 일체도 뮤가 대준다.  

 

그러던 중 스미레가 그리스의 한 섬에서 사라지자, 주인공인 '나'는 그리스로 떠나게 되는데 놀랍게도 주인공 역시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하고 있으며 아무런 의사소통에 장애를 겪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특징이 그야말로 그대로 드러나는 바, 특징을 대충 거칠게 나마 정리해보면

 

1. 중산층 이상, 혹은 최상류층의 등장인물. 단 주인공은 중산층에 한정하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야 할 때도 본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아르바이트를 해나간다.(심지어 잔디를 깎더라도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속도와 방식으로)

2. 그들은 모두 독서와 음악의 애호가이며, 독서는 최근 작가는 제외하고 음악은 재즈와 클레식, 70년대의 록음악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다.

3. 그들은 진정한 의사소통에 장애를 겪는 경우가 다반사인바, 이는 현실의 문제로 인한 장애가 아닌 형이상학적 인간존재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그들의 장애가 해소되는 경우는 있을 수 없다.

4. 등장인물들은 편견과 지역적 한계로부터 자유롭기에 동성애등 당시의 이슈에 대해 너그러우며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다원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정치적 견해 차이로 갈등을 빚는 경우는 없다. 종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세계시민으로서의 면모에 걸맞게 영어, 스페인어 등 각국의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기본적 전제를 바탕으로 그들은 이미지의 화신이 된다. 실체 없는 이미지는 마약과 같다. 프랑스요리를 먹으며,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고, 와인의 맛을 알며, 재즈와 클레식을 사랑하는 주인공은 경제적 어려움마저 없다. 그들은 고독한 존재들이다. 고독한 존재들의 연애는 쿨하다.

 

줄거리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로 다가오는 <스푸트니크의 연인>과 같은 소설을 읽는 이유는, 현실에 없는 그 이미지들이 때로 그립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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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 아리스토텔레스 - 아테네의 피
마가렛 두디 지음, 이은선 옮김 / 시공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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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에 있어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좀 더 낮았더라면' 하는 가정은 무의미하다. 역사의 발전은 거대한 수레바퀴가 굴러가는 것과 같아서 우연적이고 개별적인 사건이 역사의 방향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 인사의 암살로 인하여 전쟁이 발발했다라는 식의 역사적 인식은 조잡하기 그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호기심과 상상력은 역사적 사실에 이런 저런 가정을 해보게 되는데, 역사추리소설이라는 장르는 그런 점에서 상당히 흥미진진하다 할 수 있다.

일전에 줄리오 레오니의 <단테의 모자이크 살인>을 읽고 조악한 상상력에 진저리가 났었는데, 마가렛 두디의 <탐정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기의 정치적 상황 및 풍속에 대한 해박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건을 전개시켜 나가기에 재미있게 읽어나갔다.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의 전쟁 와중에 '트라이어아크(선박의 건조에 필요한 비용을 대는 자로서 시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지위이다)' 가 살해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촌이 범인으로 지목되어 변호를 맡게 되는 '스테파노스'는 한 때 자신이 가르침을 받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도움을 받아 재판을 진행하게 된다. 소설에서 묘사된대로라면 아테네 법정의 4차에 걸친 심리와 공판은 상당히 합리적인 절차를 밟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특히 배심원제도와 증인의 심리 과정은 현대의 그것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정도이다.

재미 있는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할이다. 간단히 말해 소설 속의 '아리스토텔레스' 대신 누군가 다른 인물이 끼어 들어도 이 소설은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이다. 기왕 탐정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이름까지 붙였으니, 사건의 해결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면 안될 무언가,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방식을 추리에 적용한다든가 그런 면이 아쉽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053326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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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 - 상 스티븐 킹 걸작선 7
스티븐 킹 지음, 정진영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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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켓에 놀러 갔을 때 보트에서 물에 뛰어들었다가 예상외로 물이 깊어 당황했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자연스러운 자세를 아직 찾지 못해 머리가 물 속으로 쳐박혔고 수영을 하지 못하는 나는 당황을 넘어 공포를 느끼게 되었다. 당시 느꼈던 공포는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공포였다.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질식에의 두려움 등.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그런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공포보다는 우리가 상상속에서 만들어낸 공포가 더 많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겁이 더 많은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미국의 데리시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끔찍한 일들과 '그것'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것'은 26~7년 마다 주기적으로 데리시에 참사를 가져오는데, 그 참사를 일으키는 '그것'의 실체는 보는 사람에 따라 이런 저런 다른 모습을 띈다. 때로는 거대한 새로, 때로는 늑대인간으로, 때로는 미이라로... 보는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형체를 띄고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의 존재를 알게 된 데리시의 아이들, 빌, 리차드, 마이클, 비벌리, 벤, 에드, 스텐리 7명의 아이들은 '그것'을 없애기 위해 모였고, 어느 정도 성공한 듯 했지만...

'그것'은 다시 힘을 되찾게 되고 27년 후 아이들은 잃었던 기억을 되찾으면서 다시 데리시로 모여들게 된다. 자칫 지루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과거와 현재를 절묘하게 교차시켜 긴장감 있게 끌어내는 작가의 능력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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