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
박일문 지음 / 민음사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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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雲水)는 종교시간에 법사님으로부터 <시인 이탁오의 생애>라는 책과 출가하게 된 경위를 듣는다. 법사님은 어느 날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이 강렬한 햇살을 받아 점점 작아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허정과 적멸의 세계를 보았고, 그 길로 출가했다고 들려준다. 부모님을 잃은 후 의지하던 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운수는 영주 부석사를 찾아가 출가의 뜻을 밝힌다. 

학능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 운수는 과격하고 파격적인 무애스님과 더불어 행동하다가 삼천배를 올리는 벌을 자주 받게 된다. 운수는 삼천배를 하면서 몸이 힘든 순간이 지난 후에는 어느 순간 힘듬을 잊게 되고, 자신의 내부로 침잠하여 궁구하고,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경험 한다.

우란분절 법회에서 조실스님이 '<선(禪)의 자유>가 대채 무엇인가' 라는 화두들 던진다. 스님은 베트남의 광둑스님 이야기를 하며 삶과 죽음을 하나로 쓰는 용무생사(用無生死)야 말로 진정한 자유, 진정한 선의 자유, 진정한 인간의 자기해탈이며 유정 무정 인간해방이라는 취지의 이야기를 한다.

얼마 후 적묵스님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소신공양을 한다. 적묵스님의 곁에는 선묘여인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였다고 했다. 선묘여인은 세속적인 사랑을 바랐지만 적묵스님은 자신이 움켜진 화두와 선에 몰두하여 묵언, 면벽, 단식을 반복하고 있었다. 

한편 무애스님은 스승인 조실스님을 찾아가 스승이 보시바라밀을 한 적이 있었는가 묻는다. 조실스님은 말이 없었고 무애스님은 스승의 귀를 취모검으로 베어낸다. 운수는 얼마 후 계를 받는다. 법명은 이름인 운수(雲水) 그대로를 쓴다.

운수는 승적을 유지한 채 대학생이 되고, 70년대 말과 80년의 혼란스런 시대 상황을 살게 된다. 운수는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공부한다.

조실스님이 무애스님을 찾는다. 무애스님은 조실스님에게 왜 자신의 칼을 피하지 않았는지 묻는다. 조실스님은 그 칼을 피했더라면 무애스님이 설익은 지식을 갖고 세상으로 뛰쳐나가 식광(識狂)이 되었을 것이며, 그 칼을 받음으로 인해 당신 스스로도 반성을 했으니 둘 모두를 살린 것이라 담담히 말한다.

무애스님은 자신이 깨달은 바를 피력하는 바, 그것은 세상으로 나가 대승적인 불교를 실천하겠다는 것이었다. 조실스님이 자신의 의발을 무애스님에게 물려주고자 하나 무애스님은 그것마저 거절한다.

선묘여인이 끝내 자살하고, 사구재를 지내기 직전 운수와 무애가 함께 길을 걷는다. 무애는 운수에게 출가 전의 일을 묻는다.

적묵스님의 출가 전 속명이 운수라는 것, 선묘여인이 무애의 동생이라는 것, 운수와 그들의 고향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은 연기(緣起)의 법칙 속에 있는 것이다.

 

<적멸>은 구도소설이자 불교계의 자기모순을 고발한 소설이며, 작가 자신의 세계관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는 소설이다. 초반부의 불교적 구도(求道) 부분과 중반 이후의 대승적 불교에 대한 의견이 성긴 느낌이나, 이만한 수준의 불교적 구도(求道)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는 고은 정도가 아닐까 한다. 박일문은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십오년에 걸쳐 출세간과 출출세간을 거듭한 전력이 있는 작가로 불교와 그 세속적 실천에 대해 고민했던 작가이다.

<달은 도둑놈이다>에서 읽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도서관에 틀어 박혀 고시공부하듯 글을 썼던' 그는 표절 시비작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이후 몇몇 스타일리쉬한 작품을 남긴다. 하지만 지금은 문단에서 사라졌다.

장정일과의 표절 논쟁이 고발 운운으로 지저분하게 끝난 후, 역시 자신이 남긴 글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로 법정 구속되어 이름을 더럽힌 끝에 이제는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적멸>에서 하이데거의 나치 옹호 행위와 관련해 '결국에는 그 사람이 가진 지식을 가지고 판단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삶의 내용으로 판단해야 한다'라는 말빚을 남겼으니, 문단에 돌아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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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어 앉은 오후 - 제4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이신조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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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같은 아파트에 사는 중년여인 윤자와 20대인 은해의 이야기다.

윤자는 비행기 사고로 딸을 잃는다. 딸은 미술사를 공부했었는데 유부남과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된다. 딸의 죽음으로 받은 보상금은 남편의 부도 직전인 회사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남편과 아들은 딸이 죽은 후에도 일상을 어찌어찌 꾸려가는 듯 보였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윤자는 상실감을 왜곡된 형태로 표출하는가 하면 필요치 않은 물건들을 훔치는 도벽이 생긴다.

은해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두번째 부인이었다. 외양어선을 타는 아버지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집에 들렀고, 의붓오빠들은 공공연히 은해의 어머니를 화류계 여자 취급을 한다. 은해의 어머니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타인의 시선 때문에 은해에게 비뚤어진 성적 관념을 심어준다. 은해는 그런 어머니에 대한 반발로 포르노 영화의 더빙 아르바이트를 하는가 하면 수영강사에게 아무런 감동 없이 몸을 내맡기기도 한다. 

은해와 윤자는 몇 번인가 만난다. 수영 강습을 통해서, 백화점에서, 둘은 스쳐가기도 하고 쇼핑을 함께 하기도 한다. 은해가 수영강사와 함께 있는 것을 본 윤자는 위태로움을 느낀다. 수영강사에게 몸을 내맡긴 날로부터 얼마 후 은해는 수영장에서 윤자와 만난다. 은해가 하혈을 하고 응급실에 실려간다. 윤자는 환자와의 관계란에 母라고 적어 넣는다.

 

소설의 주제는 상실의 극복이다. 윤자는 딸아이를 잃은 후에 딸이 누구를 사랑했는지,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알게 된다. 자신만이 슬픔을 견디고 있다고 생각한 윤자는 남편과 아들에게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만들어 주는 비뚤어진 복수를 꾀한다. 그리고 높이 뛰기 선수를 보며 자신도 땅에서 훌쩍 벗어나고 싶다는 탈출의 욕구를 느낀다. 하지만 어느날인가 엉망으로 취한 아들의 모습을 보고 딸의 죽음을 견뎌내고 있는 것이 자신 혼자만이 아님을 깨닫는다. 윤자가 은해와의 관계를 母라고 적어 넣는 것은 그녀가 딸의 죽음을 고통스럽지만 극복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은해의 경우는 재취 자리로 들어와 화류계 여자 쯤으로 취급받던 은해의 어머니가 은해에게 과도하게 성적인 순결을 강조한 것이 화근이 된다. 억압되고 비뚤어진 은해의 성(性)은 기형적으로 표출된다. 그녀는 돈이 목적이 아니면서도 포르노 영화를 더빙하고 그다지 호감을 느끼지도 않은 남자에게 몸을 허락한다. 은해는 수영강사가 자신의 처녀혈을 보고 만족해하는 상황을 원치 않는다. 아버지의 가죽 장갑을 끼고 자위행위를 통해 처녀를 파괴하는 모습이 내게는 그로테스크하게 보인다. 어머니의 성적 억압이 아버지에 대한 성적 동경으로 왜곡된 것인지도 모른다.

 

소설의 흠이라면 인물의 형상화가 부족하고 아픔의 깊이에 그다지 공감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십줄에 접어든 윤자가 딸을 잃은 슬픔이 관념적으로 흘러가다보니 사춘기 소녀의 그것과 비슷하게 읽히고, 은해의 트라우마는 구체성이 부족해 그녀의 아픔이 와닿지 않는다. 무겁고 진중하게 소설을 써내려가려는 작가의 노력은 이러한 흠결로 인해 독자에게는 가볍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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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6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임종기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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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섭게 추운 2월 어느 날 이른 아침, 어떤 낯선 이가 코치 앤 호시스 여관을 들어선다. 그는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옷이나 붕대로 감쌌고 그가 쓴 중절모는 코를 제외한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흥정이 끝난 후 손님은 비사교적인 태도로 주인을 몰아내더니 수상쩍은 실험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방에서는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고 절망적인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수상쩍은 손님은 돈이 있는 동안은 여관 주인의 인내심을 돈으로 달래가며 정체 불명의 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지만 돈이 떨어지자 여관 주인은 경찰을 불러 그를 방에서 쫓아내려 한다. 난투극 끝에 그가 투명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투명인간은 몸이 보이지 않는 이점을 이용해 토마스 마블이라는 변변치 못한 사내를 협박하여 자신의 연구노트를 여관에서 되찾은 뒤 돈을 훔치고 소동을 일으킨다. 하지만 마블이 달아나자 대학 동창인 켐프 박사를 방문하여 몸을 의탁한 뒤 자신이 연구한 결과와 계획을 털어놓는다.

켐프 박사는 투명인간을 안심시킨 뒤 은밀히 편지를 내어 경찰을 불러들이는 한편 그를 잡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자신이 속았음을 알게 된 투명인간은 켐프 박사에게 복수하려 하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사람들에게 잡혀 만신창이가 되어 죽고 만다.

 

옮긴이 임종기는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 모티프를 이야기한다.

양치기 기게스는 심한 뇌우와 지진이 있은 뒤에 생긴 갈라진 틈에서 청동 말을 발견하는데, 그 말에 있는 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니 손가락에 금반지를 낀 송장이 하나 있었다. 그가 반지를 빼어 끼게 되니 그는 투명인간으로 변신하게 된다. 반지의 위력을 깨달은 그는 결국 왕비와 간통하고 그녀와 공모하여 왕을 살해한 후 왕의 자리를 차지한다. 기게스가 반지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그는 순박한 양치기의 모습으로 두 번 다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이 기게스의 반지 모티프는 J.R.R.톨킨의 절대반지가 어디서 연원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투명인간은 자신이 보이지 않게 됨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달리 커다란 이점을 취하리라 믿었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날씨에 저항할 수 없게 되었고 식사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며 불의의 사고에 노출되고 만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는 괴물처럼 취급되었고 부당한 박해를 받는다. 그는 자신의 '다름'을 이용하여 공포정치를 행하겠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고 이를 켐프에게 고백하는데 켐프는 투명인간을 배신하고 만다. 그는 기게스가 양치기가 될 수 없었던 것처럼 두 번 다시 정상인이 되지 못한채 죽고 만다.

제목의 적절한 번역은 어쩌면 <투명인간> 보다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보인다'는 정상 범주와 '보이지 않는다'는 비정상 범주 사이의 긴장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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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 평전
강대석 지음 / 한얼미디어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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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남주는 1946년 10월 16일 전남 해남군에서 태어나 명문 광주제일고등학교에 입학하나, 입시 위주 교육에 반발해 이듬해 자퇴한다. 

1969년 24세의 나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전남대학교 영문과에 입학한다. 그가 영문과에 입학한 이유는 영어로 번역된 진보적인 책들을 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972년 27세에 친구 이강과 함께 지하신문 <함성>을,  1973년에 <고발>지를 제작하며 반유신투쟁에 나선 후 도피 중 검거되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대학에서는 제적된다.

고향에 내려온 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진혼가><잿더미> 등 7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하는 한편 사회과학 서점 <카프카>를 개점한다. 서점은 경영이 잘 되지 않아 망한다.

1977년 32세에 해남농민회를 결성하고 황석영, 최권행과 함께 민중문화 연구소를 개설한다.

1978년에는 상경하여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에 가입하고, 조직 내 별동대인 '혜성대' 맴버가 되어 동아건설 사장 집을 털려 하였지만 실패한다.

1979년 34세에 남민전 조직원으로 활동 중 검거되어 15년을 선고받는다. 1984년 첫 시집인 <진혼가>, 1987년 제2시집 <나의 칼 나의 피>, 1988년 제3시집 <조국은 하나다> 출간.

1988년 12월 21일 형집행정지로 투옥생활 9년 3개월만에 출감한 후 옥바라지를 해준 박광숙씨와 44세의 나이로 결혼한다. 제4시집 <솔직히 말하자> 출간.

1991년 제5시집 <사상의 거처>, 1992년 제6시집<이 좋은 세상에>가 출간된다.

1994년 2월 13일 49세의 나이에 췌장암으로 사망한다.

 

평전은 1부와 2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 <격동기의 삶>은 주로 시인 김남주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2부 <투쟁의 무기>는 저자 강대석이 바라본 김남주 시와 세계관의 해설이 씌여 있다. 

 

특히 저자는 2부에서 반제 반봉건을 바탕으로 자주, 민주, 통일을 역설하고 있는데 대학 초년생들에게 읽히기 위한 사회과학 개론서로서 손색이 없다. 

 

왜냐하면 한국의 비극은 봉건사회의 잔재를 철저히 청산하고 시민사회로 넘어 갈 수 있는 견인차가 되는 시민혁명이 없었으며...봉건사회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채 자본주의가 외세의 강요에 의해서 우리에게 급작스럽게 주입...결국 봉건 잔재와 급조된 자본주의가 혼란스럽게 뒤섞여 있는 것이 우리의 역사적 현실이다(207p)


저자의 세계관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소련과 소련의 해체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또는 애매한 태도), 북한에 대한 미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 이유는 소련, 중국, 북한을 국가자본주의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론적 한계 때문으로 생각되는데, 책 곳곳에서 이러한 한계가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아시아의 자존심을 어느 정도 지켜주고 있는 나라가 중국이며, 아시아 최고의 자존심은 역시 북한에서 유지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275p)

 

왜 같은 조선 사람인데 북한사람들은 그렇게 순진할까? 왜 북한 여성은 세계에서도 가장 정조가 깊은 여성으로 소문이 나 있을까?(371p)

 

대학에 입학해서 처음 동아리방에 같을 때 책꽂이에 시집은 몇 권 없었는데 김남주와 박노해, 백무산이 었던 걸로 기억한다. 교과서에서 읽던 시들에 밑줄을 그어가며 주석을 달고 달달 외워 시험을 보는 것에 익숙했던 나는 <시의 길을 여는 새벽별 하나>라는 책에서 '시를 읽는 것은 사과를 먹는 것과 같다' 라는 말에 자신감을 얻어 박노해와 김남주의 시들을 읽었는데 그 시들의 파격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박노해가 구설에 오르고 김지하가 혀짧은 소리를 해대는 지금 시인 김남주가 죽는 순간까지 신념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연상케 하는 김남주 시인의 <이 가을에 나는>을 읽으며 울컥했었던 과거의 나를 떠올려 본다.

 

이 가을에 나는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오라에 묶여 손목이 사슬에 묶여

또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번에는

전주옥일까 대전옥일까 아니면 대구옥일까

 

나를 태운 압송차가

낯익은 거리 산과 강을 끼고

들판 가운데를 달린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저만큼에서

고추를 따고 있는 어머니의 밭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숫돌에 낫을 갈아 벼를 베고 있는 아버지의 논으로 가고 싶다

아 내리고 싶다 여기서 차에서 내려

염소에게 뿔싸움을 시키고 있는 아이들의 방죽가로 가고 싶다

 

가서 그들과 함께 나도 일하고 싶다

이 허리 이 손목에서 오라 풀고 사슬 풀고

발목이 시도록 들길 한번 나도 걷고 싶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리고 논둑길 밭둑길을 내달리고 싶다

가다가 숨이 차면 아픈 다리 쉬었다 가고

가다가 목이 마르면 샘물에 갈증을 적시고

가다가 가다가 배라도 고프면

하늘로 웃자란 하얀 무를 뽑아먹고

날 저물어 지치면 귀소의 새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 나의 집으로

 

그러나 나를 태운 압송차는 멈추지를 않는다

내를 끼고 강을 건너 땅거미가 내리는 산기슭을 돈다

저 건너 마을에서 저녁밥을 짓고 있는가 연기가 피어오르고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이 가을에 나는 푸른 옷의 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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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뽀로 여인숙
하성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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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명은 어느 날 인도를 덮친 트럭에 의해 쌍둥이 남동생 선명을 잃고 만다. 진명은 고등학교 3학년의 남은 시간을 달리기와 문제집 풀이로 보내며 상실감을 달랜다. 김동휘라는 남학생은 선명의 별명이 '달리는 아이'라고 알려준다. 

무난히 합격하리라던 담임의 장담과 달리 대학에 떨어진 진명은 작은 무역회사의 경리가 되어 차를 타고 은행 심부름을 한다. 은행 마감시간을 넘겨 은행 안을 들여다보던 진명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함께 은행을 털자는 엉뚱한 제안을 한다. 그는 진명이 다니는 무역회사 건물에 사무실을 갖고 있고 이름은 김정인이라 했다.

진명은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고 나면 텔렉스를 읽으며 영어 약자를 외워보기도 하고 다른 이의 책상에 앉아 하릴 없이 서류를 읽어보기도 한다. 직원들이 모두 외근 나간 날, 브라운이라는 미국인의 전화를 잘 응대한 덕분에 그의 호감을 사고 미스캣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한편 김정인은 진명에게 호감으로 대하고 그녀에게 일자리를 제안한다. 김정인과는 해와 달처럼 거의 만나지 못했고 서로 메모를 주고 받으며 일처리를 해나간다.

주워온 개 토마와 함께 조용히 살아가는 진명의 삶에 가끔 알 수 없는 환영과 환청이 끼어든다. 진명은 그의 이름이 고스케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만난적도 없었고 그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진명은 선명이 남긴 유품을 정리하다가 선명이 기념 삼아 산 종이 모두 네 개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는 자신이, 다른 하나는 선명이 가졌으니 나머지 두 개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선명이 남긴 편지를 통해 미래라는 이름의 고등학교 동창이 선명을 좋아했음을 알게 된다.

윤미래가 진명을 찾아온다. 그녀에게 또 하나의 종이 있었다. 윤미래는 진명에게서 죽은 선명을 본다. 윤미래는 차츰 진명의 삶 속으로 스며들지만 어느 날 진명이 자신의 이름을 똑바로 불러보라는 요구에 주춤한다.

 

사무실에 놓여 있던 구두의 임자가 찾아온다. 그녀의 이름은 최태경이었고 김정인과 격하게 다툰다. 그녀는 김정인의 몸에 상처를 내서라도 자신을 기억하도록 만들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다. 최태경을 피해 떠난 길에서 김동휘를 다시 만난다. 김동휘와는 끝내 우연한 곳에서 우연한 시간에 만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김정인과 최태경의 다툼이 격해지고 급기야 최태경이 진명에게 상처를 내는 사건이 벌어진다. 진명은 사무실을 떠나면서 아주 잠깐 자신이 김정인을 사랑했었는지 궁금해한다.

 

토마가 어느 날 죽은 채 발견된다. 토마를 예전에 김정인과 찾아갔던 모텔 부근에 묻어주기 위해 떠난 길에서 윤미래를 만난다. 그녀는 바로 어제 헤어진 것처럼 7년 간의 공백을 무시하고 진명을 대한다. 그녀는 곧 외국으로 갈 것이라 했다. 얼마 후 신문에 윤미래가 안나푸르나 제1봉에서 실종되었다는 기사가 난다.

 

진명은 마침내 삿뽀로로 떠난다. 그녀는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날 것이라 생각했다. 윤미래를 닮은 여자를 따라갔다가 삿뽀로 여인숙에 묵게 된다. 그곳에서 진명은 고스케로 짐작되는 남자를 본다. 고스케의 방에서 선명의 편지를 발견한다. 편지에는 선명이 불길한 꿈을 꾸었다는 것과, 곧 하늘을 속이는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네 번째 종이 바로 고스케에게 전해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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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삿뽀로 여인숙>은 어느 모로 보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선명의 죽음에 호들갑스러워 하지 않으며 달리기를 하는 진명의 모습이나, 상실감을 드러내지 않으며 삶 자체가 조용하게 진행되는 분위기, 하찮은 일을 하면서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처리하고 그런 모습 덕택에 좋은 평판을 얻게 되나 정작 자신은 별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 등이 그렇다.

그러한 분위기만으로 소설을 계속 끌어나갔더라면 어땠을까? 최태경과 김정인의 다툼, 그리고 김정인의 도피 장면이 전체적인 분위기에 잘 들어 맞지 않는다.

<고스케는 누구인가?> 에 대한 대답은 끝내 명확하지 않다. 선명의 편지에 쓰여 있는 '하늘을 속이는 일을 할 것이다'가 키워드이겠는데,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늘이 주관하는 것이 인간의 목숨이라 했을 때, 불길한 꿈을 꾼 선명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고 따라서 자신이 사고사로 죽었다고 모두를-심지어 하늘까지도- 믿게 만들지 않는다면 죽음을 피해가지 못하리라 느꼈을 수 있다.

고스케가 곧 진명인가 라고 물었을 때는 별도의 인물인 것으로 생각된다. 선명은 고스케를 상대로 편지를 보냈고, 고스케의 성장기 사진을 보고 진명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자신의 사진이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스케와 선명의 접점은 어디인가 라는 질문이 추가되는데,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생략되어 있다.

다른 가능한 해석은 선명이 꿈에서 본 것이 진명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하늘을 속인다는 의미는 진명이 아닌 자신이 차에 부딪혀 죽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이쪽이 여러모로 설득력이 있으나 작가는 확실한 답을 독자에게 제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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