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토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7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방곤 옮김 / 문예출판사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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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중앙 유럽, 북아프리카, 그리고 극동 지방을 여행하고 나서 18세기의 인물 드 로르봉 후작에 관한 역사 연구를 완성하고자 3년째 항구도시 부빌에 체류하고 있던 로캉탱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일기는 1932년 1월에 시작된다.

 

드 로르봉 후작에 관한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끊임없는 의심이 고개를 쳐든다. 그는 역사를 재구성하는 일 자체에 의문을 품기에 이른다. 여관 여주인과 단속적인 성관계를 맺거나, 미술관에서 초상화를 보거나, 도서관에서 우연히 만난 독서광과 간혹 대화를 나눈다. 그는 독서광이 이야기하는 바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한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조약돌을 던지며 놀고 있는 아이들 흉내를 내려고 돌을 집어들다가 알 수 없는 구토감을 느낀다. 그는 그 구토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다. 헤어진 연인 안니가 몇 년만에 편지를 보내온다.

로캉탱은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를 보다가 다시 구토를 일으킨다. 그리고 비로소 구토의 원인을 깨닫는다. 사물의 존재 자체가 원인이었다.

다시 만난 안니와 '완전한 순간'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안니는 새로 생긴 남자와 떠나고, 로캉탱은 안니에게 미련을 두지 않는다.

독서광이 어린 소년에게 성적인 접촉을 가한 사건이 일어난다. 로캉탱은 그것이 성적 접촉이 아니라 독서광이 휴머니스트이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드 로르봉 후작에 관한 역사책을 쓰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로캉탱은 부빌을 떠나 파리에 가기로 결심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들은 후 그는 역사에 관한 논문이 아닌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한다. 내일 부빌에는 비가 올 것이다.

 

로캉탱이 조약돌을 집으면서 느낀 구토 경험은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로 이어지고 마침내 자신이 왜 구토를 느끼는지 깨닫는다. 

인간은 사물을 인식할 때 언어를 매개로 인식한다. 에스키모인은 눈 이름만 해도 수십 가지가 있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볼 때에 그 수십 가지 중의 하나로 인식한다. 하지만 남한 사람이라면 기껏해야 함박눈이나 진눈개비 등 몇 가지 범주의 인식밖에 할 수 없다. 

로캉탱은 마로니에 나무의 뿌리를 바라보며 마찬가지로 언어를 매개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이 부여한 '연약한 기호'인 언어가 사라지고, '가공되지 않은' 날것 자체의 '존재'로서 마로니에 뿌리가 자신을 주장하기 시작하게 되면 로캉탱과 마로니에 나무 뿌리는 아무런 연관도 없이 동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마로니에 뿌리가 왜 그곳에 있어야 하는지 누구도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단지 그것은 '존재'할 뿐이며 부조리하고 우연적이다. 샤르트르는 있는 그대로의 것이고 자기 속에 안주하는 고정된 것이며 설명될 수 없는 사물을 '즉자존재'라 지칭한다.

반면에 로캉탱은 의식을 지닌 존재이다. 인간의 의식은 항상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샤르트르는 인간을 '즉자존재'와 대비시켜 '대자존재'라 칭한다. '대자존재'는 자의식을 가진 존재이며 자기 자신을 항구적으로 '부정'한다.

사물인 '즉자존재'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떠한 말로 가둘 수가 없으며 그 자체로 충만한 것이기에 의식을 가진 '대자존재'인 인간은 사물과 관계를 맺을 때 그 설명할 수 없음에 부조리함을 느끼며 구토를 느끼게 된다.

 

십여 년 전 삼중당 문고본에 붉은 볼펜으로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었지만 이백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이해불가를 선언하며 작파했다가, 문예출판사 판본으로 다시 읽는다. 역자는 두 권 모두 방곤이다.

이번 독서에서도 <구토>가 이야기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이해의 피안 저쪽에 머물던 책을 조금쯤 내 쪽으로 끌어당긴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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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게 한걸음 -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 수상작
서유미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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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그저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연수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이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남자친구와 헤어진 연수는 다니던 회사마저 그만 두고 백수가 된다. 무언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던 중 영화평론에 뜻을 두고 도서관을 다닌다. 그곳에서 대학 동기 동남을 만나게 된다. 동남은 공무원 공부를 한다고 했는데 아버지의 성화로 일반회사에 취직하기로 한다. 최종면접을 보고 난 동남이 자살한다. 장례식을 마친 후 연수는 인생을 멋지게 꾸려가보기로 결심하며 숨을 가다듬고 일보 전진하기로 한다. 삶에 아무런 의미도 없이 막을 내리게 하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전형적인, 아니 진부한 75년생, 94학번의 드라마이다. 94학번에 관한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 있었다. 열심히 학력고사 준비를 하니 수능으로 바뀌었고, 대학 취직해서 청춘을 구가해보려 하니 IMF가 터져 집안이 망했고, 어쩔 수 없이 방위로 군입대를 하려하니 방위가 없어진 대신 기간이 무진장 긴 공익근무가 생겨났고, 어찌어찌 졸업하여 취직을 하고 나니 금융위기가 터져 회사에서 짤렸다는 식의 스토리인데 이를 소설의 형식을 빌어 죽 옮겨 적어보면 <쿨하게 한걸음>쯤 될 것이다.

 

<쿨하게 한걸음>의 한계는 역사의식의 철저한 부재이다. 현상을 걸터듬으며 스토리는 이어나가지만 개개인의 삶이 왜 그러한 상황에 처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작가는 기껏해야 의사 남편을 만나 팔자를 편 친구와 연수의 초라한 삶을 대비시킬 뿐이다. 딱히 기승전결이랄 것 없이 이어지던 스토리는 동남의 생뚱맞은 자살에서 작위의 극을 이룬다. 자살 이후 장례식을 다녀온 연수는 인생의 '쿨한 한걸음'을 내딛겠다는 결심을 한다. 작가의 역사의식 부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결국 연수는 영화평론공모에 당선되어 인생의 의미를 찾든지, 아니면 최소한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해봤다는 것에 의미를 두든지가 소설 바깥에 준비된 결말일 것인데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특히나 창비 장편소설상 수상작이라는 점에 비추어 봤을 때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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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의 눈 바벨의 도서관 8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 지음, 최재경 옮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획 / 바다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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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 5월 29일 런던에서 태어난 길버트 키스 체스터튼은 회화에 골몰하다가 문학 쪽으로 진로를 바꾼다. 처음에는 시를 썼고, 그 다음에 소설을 썼다.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사제이자 탐정인 브라운 신부를 창조하는데, 그는 소설을 통해 가톨릭을 전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로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기에 로마에 오랫동안 체류하기도 한다. 1936년 7월 14일 런던에서 사망한다.

 

<아폴로의 눈>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선정한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벼랑 위의 세 기병>은 민족주의적인 시인을 사형시켜 왕권을 강화시키려는 그로크 사령관과 그를 사면하여 왕권의 관대함을 보여주려는 왕자의 의지가 충돌하는 이야기이다. 세 명의 전령이 출발한다. 시인을 사형시키라는 명을 받은 전령에 뒤이어 그를 사면하라는 전령이 그를 쫓고, 마지막으로 사면령을 갖고 있는 전령을 살해하려는 전령이 출발한다. 사면령을 가지고 있던 전령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사면된다. 과연 외길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이상한 발걸음 소리>는 수상쩍은 발걸음 만으로 도둑을 잡는 이야기이다. 묵직하고 둔중한 발걸음이 이어지나가 뛰는 듯한 발걸임이 이어지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발걸음은 모두 한 사람이 내는 소리이다. "열두 명의 진정한 어부들" 클럽 회원들이 초록색 재킷을 입게 된 이유가 바로 이 사건에서 유래된다.

 

<이스라엘 가우의 명예>는 성주의 죽음과 이상한 단서들에 관한 환상적인 이야기이다. 세상과  단절하고 살아가던 성주가 죽는데 그가 남긴 것은 알맹이만 남은 보석, 주머니에 들어있지 않은 코담배, 작은 금속 조각과 스프링, 받침대 없는 양초들이다. 병적이리만치 정직한 하인에게 그 비밀의 열쇠가 있다.

 

<아폴로의 눈>은 이상한 종교와 거기에 빠진 여인의 죽음 이야기이다. 어느 날 타이피스트가 엘리베이터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유력한 용의자인 종교 지도자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고, 그의 동생 역시 종교 지도자와 함께 있었다. 그녀가 남긴 유언장은 이상하게도 쓰이다가 중단되어 있다. 작은 범죄와 큰 범죄가 한 명의 여인을 죽음에 몰아넣는다.

 

<허쉬 박사의 결투>는 소리 나지 않는 폭탄을 발명한 박사와 그가 독일의 첩자라는 탄원서를 갖고온 대령 사이의 결투 이야기다. 브라운 신부는 그 대결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면서 거짓은 진실과 완전히 반대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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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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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소련에 침공당한 체코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을 보여주며 역사와 인간, 사랑에 대한 담론들을 이야기한다. 소설의 도입부는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이다......영원한 회귀의 세상에서는 몸짓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책임의 짐을 떠맡는다. 바로 그 때문에 니체는 영원 회귀의 사상은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영원한 회귀가 가장 무거운 짐이라면, 이를 배경으로 거느린 우리 삶은 찬란한 가벼움 속에서 그 자태를 드러낸다......모든 것이 일순간, 난생 처음으로, 준비도 없이 닥친 것이다. 그런데 인생의 첫 번째 리허설이 인생 그 자체라면 인생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 einmal ist keinmal. 한 번은 중요치 않다. 한 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 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작가는 작품의 초입을 자신이 이야기하려는 바에 할애한다. 영원성과 일회성, 무거움과 가벼움.

 

외과의사 토마시는 부인과 이혼하고 아들도 그리워 하지 않는다. 그는 독신으로 맘에 맞는 여성과 얽매임 없이 성교하며 사는 것이 자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테레자라는 여인이 갑자기 나타난다. 그녀는 마치 신화 속 '바구니에 담겨져 물에 떠내려온 아이' 처럼 나타난다. 토마시는 테레자와 성교 뿐 아니라 함께 잠을 잘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테레자와 함께 한다고 해서 토마시의 바람기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비나와의 관계는 더욱 끊기가 어려웠다. 토마시는 성교와 사랑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테레자는 그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녀의 질투심은 그녀를 피폐하게 만든다. 그녀는 카레닌이라는 개에게 애정을 쏟는다.

그런 시기에 소련이 체코를 침공한다. 테레자는 소련군의 사진을 찍으며 그들의 만행을 기록하고자 한다. 얼마 후 토마시가 스위스 취리히의 괜찮은 병원에 일자리를 얻게 되자 둘은 스위스로 떠난다. 그러나 토마시는 그곳에서도 사비나와 관계를 맺으며 부적절한 행각을 이어가고, 마침내 테레자가 혼자서 체코로 떠나버린다.

토마시는 스위스에 그대로 남아서 안정된 직업과 자유로운 성교를 즐길 것인지, 아니면 테레자를 뒤따라가야 할지 망설이다 결국은 테레자를 선택한다. 되돌아온 체코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도로 이름이 소련식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유명한 작가가 자신의 거실에서 나눈 개인적인 대화가 도청된 후 라디오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벽에도 비밀경찰들의 눈과 귀가 있는 사회로 변질된 것이다.  토마시 역시 신문에 발표한 글 때문에 곤란에 처한다. 그것은 바로 오이디푸스 왕 신화에 빗대 공산주의자들을 비판한 내용이었다.

 

버려진 갓난 아이를 발견한 왕이 폴리보스 왕에게 데려간다. 왕이 아이를 키운다.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어느 산 속 오솔길에서 여행 중이던 낯모르는 왕을 만나는데 말다툼 끝에 오이디푸스가 왕을 죽인다. 오이디푸스는 이오카스테 여왕과 결혼하고 테베의 왕이 된다. 그런데 그가 죽인 왕이 사실은 자기의 아버지였고, 자신이 동침한 여자가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찌르고 영원히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난다.

 

여기서 문제시 되는 것은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던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다. 몰랐기 때문에 오이디푸스에게는 죄가 없는가?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과오를 나중에야 알았지만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됨으로서 속죄의 길을 택한다. 토마시는 체코 검사들이 러시아 비밀경찰들에게 기만당했고 자신들도 속았다고 주장한다고 해서 그들이 저지른 죄과가 없어지는지를 <오이디푸스 신화>에 빗대어 이야기한 것이다.

 

즉각 토마시는 체제전복 세력으로 분류되어 온갖 회유와 협박이 이어지고, 토마시는 스스로 외과의사 자리를 내려놓고 유리창 닦이가 된다. 하지만 유리창 닦이가 된 그는 더욱 반체제 인사처럼 여겨졌고, 오래전에 헤어진 아들 역시 토마시를 그런 이유로 존경하고 그에게서 인정받으려 한다. 하지만 토마시는 반체제 인사연 하는 자들에게 자신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은 반체제 인사로서 서명에 동참하는 따위의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외과의사로서 그들을 수술했을을 때였다며 그들과도 선을 긋는다. 그의 여성편력도 계속된다. 비밀경찰의 간계가 테레자에게까지 미치자(혹은 테레자가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을 정도의 사회 분위기가 되자) 그들은 시골로 내려간다. 그 이면에는 시골로 가게 되면 토마시가 더 이상 여자들과의 질펀한 정사를 이어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테레자의 속셈도 있었다.

시골에서의 전원적인 생활을 해나가던 어느 날 카레닌이 암에 걸려 죽고 토마시와 테레자도 트럭 사고로 사망한다. 토마시의 아들은 토마시의 묘비명에 '그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왕국을 원했다'라는 비문을 세긴다. 토마시는 결고 그런 비문을 원치 않았을 것이고, 그 사실은 아들 역시 알고 있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위와 같지만 소설에서는 사비나와 프란츠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할애되어 있다. 사비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에서 일탈된 예술 세계에서 개인의 자유로움을 엿본 이후 끝내 정치와 국가를 외면하는 인물이고, 프란츠는 사비나에 매료된 인물로 그녀를 위한 반공산주의(그렇다고 친자본주의는 아니다)적 활동에 참여하다 어이없게도 노상 강도에게 살해당하는 인물이다.

 

1982년에 체코어로 발표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체코에서 출간 금지가 되었고 1984년 쿤데라가 참여한 프랑스어판이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되었다. 1996년에 민음사에서 간행된 송동준의 번역서를 읽었는데 당시에는 책 자체가 무척이나 난해하고 반동적으로 느껴졌었다. 소설 이해에 도움이 될까 싶어 본 필립 카우프만 감독의 영화 <프라하의 봄>은 사실상 원작과 무관한 영화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번에 이재룡 번역본으로 다시 읽으면서 처음 읽을 때 보다 많은 부분을 공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프란츠의 죽음과 <오이디푸스 신화>와 관련된 부분이 그렇다.

프란츠가 '대장정'에 참가하는 과정은 하나의 거대한 아이러니이다. 제국주의 미국을 사실상 패퇴시킨 베트남이 아이러니하게도 캄보디아를 침공한다. 베트남의 비인도적인 침략 행위에 항의하며 의사들이 캄보디아에 의료 봉사를 위해 떠나는데 의사 수 보다도 기자들이 더 많고 심지어 유명 스타마저 참가한다. 그들은 의료 봉사를 통해 몇 명을 구출하는가 보다 자신들이 그러한 대장정 행렬에서 어떤 모습으로 대중에게 비춰지는가가 더욱 중요한 인물들이다.(밥 딜런은 이런 류의 이미지 메이킹에 가장 성공한 인물 중 하나이다) 프란츠의 죽음은 이런 상황을 우의적으로 표현한다. 그는 캄보디아에서 엉뚱하게도 노상 강도를 당해 돈을 빼앗기지 않으려다 죽고 만다.

<오이디푸스 신화>와 관련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기자는 토마시에게 진보적 인사들의 서명에 동참하라고 말하지만 기자 자신도 그 서명이 구속된 사람들의 석방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토마시는 개인적인 이유로 참가하지 않는다.

 

레닌이 구체화시킨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의 요체는 결정 전 토론의 자유와, 결정 후 행동의 일치가 아닐까 한다. 그런데 문제는 토론의 자유 단계에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지 못할 때는 어떻게 되는가이다. 누가 토론을 끝낼 결정권을 갖는가? 토론을 끝내고 행동의 단계로 돌입하는 적절한 시점은 누가 판단하는가? 그 판단이 다수결에 의한다면 토론의 자유라는 것은 사실상 형식적인 장치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제를 통한 행동에 진저리를 친 작가가 이문열과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이문열은 그러한 행동에 대해 '홍위군'이라며 질색 팔색을 했고(그런 의미에서 이문열을 보수우파로 단순히 분류하기가 저어된다. 그는 언제나 보수우익이 제안하는 장관 자리를 신경질적으로 거절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전공투의 수업 반대 투쟁에 대해 수업 받을 권리는 묵살되는 것이냐고 항변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역사 속에서 개인이 단 한번 밖에 삶의 선택을 할 수 없다는 비극에 대해 이야기한다. 토마시는 사비나를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테레자를 선택한다. 그런데 인생에서의 선택은 바둑에서 잘못 둔 수를 물리듯 되돌릴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인생은 너무나 부조리하다. 자신이 다른 선택을 했을 때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부조리가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이러한 불가역성을 가진 개인의 삶은 그렇다면 우연으로 점철되는 것은 아닐까? 테레자에게서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강을 떠내려온 바구니 속의 아이'와 같은 필연성을 느낀 토마시는 어느 날 문득 테레자와의 만남이 사실은 여섯 번의 우연 끝에 이루어진 결과는 아닌지 의심한다.

개인의 선택이 이러할 진대 역사 속 개인의 임무와 역할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한 것일까? 소련에 침공당한 체코의 개인이라면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야한다는 도식이 가능한 것일까?

작가는 끊임 없이 의문을 던진다. 그 의문이 반동적으로 느껴졌던 것이 1996년의 '나'였다면, 지금의 '나'는 그런 의문들을 곰곰히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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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임무를 마치고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
하인리히 뵐 지음, 정찬종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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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은 마을 비르글라르의 가구수선공 요한 그룰과 그의 아들이자 연방군 병사인 게오르크 그룰이 연방군 지프를 방화한 죄목으로 기소되어 재판이 열린다. 그들은 구류 기간 동안 가혹한 대접을 받지도 않았고 심지어 식사를 날라다 주는 아가씨는 게오르크의 아이를 임신하기까지 한다. 그들은 순순한 태도로 자신들의 범행을 시인했고 재판과정에도 협조적이었다. 증인으로 소환된 마을 주민들은 그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으며, 시골 법정은 사건의 핵심에서 벗어난 증언들로 시장터를 방불케 한다.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게오르크 그룰이 사실은 이미 제대했어야 옳다는 증언이 나온다. 그가 아버지의 병환 때문에 얻은 휴가가 잘못 계산되었으므로 연방군 지프를 불태울 당시에는 이미 민간인이었어야 맞다는 것이다.

신부와 경제학자, 집달관 등이 차례로 어수선한 증언을 계속한다. 경제학자의 증언으로 요한 그룰이 왜 파산에 처하게 되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요한 그룰은 잘못된 조세 정책 때문에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제학자의 날카로운 분석은 곧 판사에 의해 제지되고 만다.

지프를 태운 행위가 차츰 예술적 행위가 아니었는가 하는 방향으로 재판이 진행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교수가 증언을 한다. 그는 그룰 부자가 지프를 태운 행위가 하나의 '해프닝'이었고, 그 행위를 충분히 예술행위로 볼 수 있다고 증언한다. 점차 사건이 축소되는 분위기 속에서 검사가 마침내 '못해먹겠다'면서 뒤로 나자빠지기까지 하지만 결국 그룰 부자는 6주간의 구류와 벌금형이라는 가벼운 처벌만을 받게 된다.

 

요한 그룰은 전쟁에 참가하여 적들과 싸운 것이 아니라 독일군이 빼돌린 가구 수선에 골몰했고, 그의 아들 게오르크 그룰 역시 자동차 점검을 받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동차 운행 킬로수를 조작하는 일이 주임무였다. 잘못된 조세 정책으로 그룰 부자는 소득의 대부분을 세금으로 뜯겨 일을 하면 할수록 가난해지는 상태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룰 부자가 군용 지프를 불태우자 국가는 그룰 부자의 행위가 국가에 대한 저항으로 해석될 것을 우려하여 그들의 행위가 예술적 표현인양 포장하여 얼렁뚱땅 재판을 처리하고 만다. 먼저 날짜 계산이 잘못 되었다며 게오르크가 사실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라고 우기고, 그들이 군용 지프를 태운 행동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예술적 표현의 한 형태라고 어거지를 쓰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예술 행위의 소재를 적법한 절차를 통해 입수하도록 충고하며 가벼운 처벌로 재판은 마무리되는데, 이러한 블랙코미디를 통해 작가는 예술작품을 통한 저항의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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