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의 정치 썰전 - 보수와 진보를 향한 촌철살인 돌직구 이철희의 정치 썰전 1
이철희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뉴스를 통해서 보는 정치는 참 한심하다. 심지어는 정치가 이 나라의 걸림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럴까?

 

 정치불신, 그 중에서도 특히 국회에 대한 불신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국회가 잘하는 게 없으니 불신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회가 왜 못하는지는 짚어볼 문제다. 입법부가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표현처럼 한국은 행정부 우위의 심리적 토대가 아주 튼튼하다. 국회도 국민의 대표로 구성되는 만큼 그들의 판단대로 입법 과정을 처리할 권한을 갖고 있다. 행정부는 잘하려고 하는데 입법부가 당리당략 때문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식의 이해는 심각한 왜곡이다. 군사독재정권의 잔재다. 헌법에 입법권은 국회에 있다는 산순한 사실에 비춰보더라도, 입법부는 행정부가 하는 일에 열심히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과거 정통성이 부족한 군사정권의 독재자들은 입법부를 거수하는 '통법부;로 만들었다. 걸핏하면 날치기를 일삼았다. 몸싸움이 벌어지는 국회를 누군들 좋아하랴. 국회 불신이 높아질수록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높아지고, 대통령이 국민의 대변자라는 인식은 강해졌다. 군사정부가 아니더라도 대통령은 입법부와 제도적으로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입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수록 득을 보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행정부는 끊임없이 '지질한' 국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52쪽)

 

행정부가 하고 싶은 일은 입법부인 국회에 발목이 잡히고, 사법부가 입법부의 구성원인 국회의원들의 범죄 등 치부를 드러낼때면 과연 국회의원들이 왜 필요할까 싶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행정부, 사법부가 자기멋대로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입법부 즉, 국회가 꼭 필요하다. 국회에 대한 증오가 넘칠 수록 덕을 보는 이들은 따로 있다.

대통령제는 삼권분립, 특히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제도적 경쟁을 전제로 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모두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되기 때문이다. 이중적 정통성이다. 그 때문에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국정 운영을 놓고 경쟁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대통령제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자 단점이다. 둘이 극단적으로 대립할 경우 이를 해소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 두 기관의 대립을 파국으로 이끌지 않도록 하는 거의 유일한 동력이 바로 여론이다. 여론의 압박을 의식해 이러다가 다음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타협이 이루어진다. 미국은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이 제도의 단점을 해결해왔다. 한국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정계 개편 또는 탄핵이었다. (51쪽)

 

이 국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정당정치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여당인 새누리당은 기본적인 정당이라 하기 어렵다.

회사의 오너가 '내 회사 내 마음대로 하다'는 생각은 틀렸다. 전근대적 사고다. 일반 기업도 이럴진대 하물며 개인의 사유재산이 아닌 정당은 더더욱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정당은 사유재가 아니라 공공재다. 정당에 국민 세금을 지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오늘의 새누리당이 있기까지 얼마나 큰 공헌을 했든, 자신이 얼마나 새누리당을 아끼든 상관없이, 당은 그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적소유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공당公黨이 아니라 사당私黨이 된다. (138쪽)

 

대한민국의 여당은 현재 박근혜 개인 사당에 가깝다.

그렇다면 새정치민주연합은 무능하고 게으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지난 2012년 대선에서 행해진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 줄기차게 매달렸다. 정보기관의 대선 개입은 국기 문란의 행위다.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딜 수 없는 부벙이다. 그런데 그첢 중요한 사건에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은 당황했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터져도 유권자, 특히 야권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4·29 재·보궐 선거 때 투표장에 적극 나오지 않은 현상에도 그들은 당황스러워했다. 상대가 잘못하고, 그를 악마로 지목하기만 하면 유권자들이 분노의 응징 투표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짧은 생각이다. 악마화와 음모론은 무지르 숨기는 변명이자 위험한 자위다.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상대방의 그것과 차별화되는 해법을 선명하게 제시하는 등 유권자가 투표 동기를 갖게 만드는 것은 정당의 몫이다. ... 이런 역량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정말 무능하고 게으르다. (248~249쪽)

 

이렇게 계속 진보(?)가 무능하다면 미국, 영국처럼 되어 버린다. 여야 할 것 없이 보수, 기업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말이다. 그런 것을 막기 위해서는 강한 야당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처럼 반정부 노선보다는 전략과 리더십이 필요하다. 의제를 선점하고 추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한 개인의 노력에 의해 인생의 성패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격차 때문에 개인의 노력은 애당초 변수조차 되지 못하는 현실, 이것을 두고 요즘엔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쓴다. 암울한 현실에 눌려 자기 자신을 쥐어짜며 자학하지 말고 더불어 손잡고 함께 나서야 한다. 고립된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함께하는 노력과 사회적 해법이 바로 정치다. 정치를 통해 우리 삶을 바꿔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를 외면하고 좋은 사회나 내 삶이 편안한 복지국가를 만들 수 없다. 이제 정치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10쪽)

 

* 책을 읽는게 그렇게 편하지는 않다. 박근혜나 새누리당에 대한 비판은 이미 많이 접했지만, 새정치의 민낯을 보는 것은 마음 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을 받아들여 이겨나야 한다. 물론 586친노꼰대들이 장악한 새정치가 과연 극복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민주당은 참 무능하다. 정치는 크게 선거 정치와 일상 정치로 나눌 수 있다. 대충 짚어봐도 2004년 총선 승리 이후 숱하게 치른 선거에서 거의 대부분 패배했다. 패배 친화적 정당 또는 만년 야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일상 정치는 어떤가? 128석이란 거대 의석을 거느린 정당임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에 맞는 정책을 입법화시킨 예가 없다. 선거 정치와 일상 정치 모두에서 역사상 이처럼 무능한 정당이 있는지 의문이다.(223쪽)

 총선과 대선 연패가 두 차례나 있었는데, 그 패배 후에도 야당에선 새로움이 낡음을 대체하려는 치열한 시도, 즉 세대교체의 시도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1980년대 학생운동 출신의 당내그룹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386이 486을 지나 586으로 접어들었건만 무얼 남겼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찬란했던 숭고함은 어디가고 따분한 무능으로 허벅지 살만 불렸다. ...
친노 대 비노의 퇴행적 갈등구도는 굳...건하게 유지되었다. 친노 대 비노의 진영 대결은 돌부처도 돌아앉게 할 정도의 꼴사나운 드잡이 행태를 비호하는 숙주였고, 새 인물의 등장을 막는 방벽이었다.(231~23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뭐라도 합시다
이철희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야당과 여당, 그리고 각 정당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질이다. 꼴보기 사납나? 난, 싸움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뭐 새누리당이야 사람으로 모이니 정책 보다는 사람들간의 헤게모니 싸움일 것이고,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은 각 계파마다 생각이 다르다. 당연히 싸움이 날 수 밖에 없는 구조 아닌가. 사람도 지역문제를 우선에 두는 사람이 있고, 경제문제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열심히 싸우는 게 정치인의 바른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싸움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누가 생떼를 쓰는지, 누가 다른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 봐야 할 것이다.

의회는 원래 시끄러운 도떼기시장이다. 지역에서 각 세력과 대표들이 와서 자원을 배분받기 위해 법을 만드는 이곳에서는 서로 많이 가져가기 위해 싸울 수 밖에 없다. 비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더라도 말이다. 싸운다는 것은 노력한다는 뜻이다. 국회에 모인사람들은 개인이 아니라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며, 따라서 누군가의 이익을 지켜줘야 할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16쪽)

 

우리나라 진보의 역사는 짧지 않다. 보수가 오랫동안 권력을 잡아서 그렇지, 진보 역시 오랫동안 존재한 엄연한 정치집단이다. 그러나 최근의 선거를 보면 지고만 있다. 김대중, 노무현의 리더십을 넘어서는 인물도 보이지 않고, 정책도 시민과 유리되어 있다. 자신들만의 세상에 갖혀 버린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 최근 안철수의 탈당으로 새정치에 사람들이 모여들고는 있지만 내부의 혁신이 없는 새정치가 어떤 정책이나 리더십을 보일 지 걱정된다.

 

진보는 자신이 옳은 쪽, 선한 쪽이라는 믿음이 교조로 굳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이 진보에 팽배해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선거 때 마다 '어떻게 박근혜에게 표를 줄 수 있느냐'는 식의 얘기를 꺼내 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유권자에게 투표는 가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선이고 악이냐를 따지는 과넘이 아닌 누가 현실적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를 가리는 관점에서 '왜 박근혜를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했다.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라고 얕보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대중을 욕할 게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 독재자의 딸에게 표를 던질 정도로 진보가 못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19쪽)

 

 

 2000년대 이후로만 보면 의제도 잘 설정하는 등 시민에 대한 전략, 선거에 대한 전략은 진보보다 몇 수 위다. 시민들이 원하는 바를 콕 집어낸다. 하지만 태생적 한계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한민국 보수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사림, 그중에서도 노론이 대한민국 보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500년 중 300년 가까이 집권한 노론은 조선 말 나라를 잃자 곧 친일파로 변신한다. 해방 이후에는 김구 중심의 통일 노선과 충돌하는 이승만 중심의 단정 노선의 주축이 되는데 이들이 바로 친미 세력으로 발전한다. 이처럼 노론, 친일, 단정, 친미로 이어지는 일련의 세려이 대한민국 보수의 역사, 보수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근대사로 들어오면 이들은 '성장'이란 아젠다를 내세운 산업화 세력으로 발전한다.
...
북한을 공포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반공논리는 한편으로는 야당을 믿을 수 없다는 논리로 발전하기도 한다. 자신의 장점을 내세우기보다는 여전히 상대를 부정하는 논리로 자신의 정당성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보수의 태생적 비극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의 보수가 승승장구하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이런 논리가 그나마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산업화와 고도성장 덕분이다. 보릿고개를 넘겼다는 자부심은 보수의 존재 이유가 됐다. 문제는 이것이 생명을 다했다는 것ㅇ다. 우리 사회의 담론은 산업화를 거쳐 이미 민주화로 넘어간 지 오래다. 그런데 보수는 산업화 이후 다른 어젠다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여전히 헤매고 있는 것이다.
....
지금의 새누리당은 역대 여당 중 가장 공격적인 여당이라 할 만하다. 야당도 아닌 여당이 싸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긍정적인 자기 플랜이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시대 담론을담보하지 못한 부작용이 지금의 호전적인 여당을 만들어냈다. (107~109쪽)

 

이명박 정부를 넘어 박근혜 정부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관료사회의 부활이다. 행정부를 입법부, 사법부의 위에 두는 행포 역시 관료사회와 다르지 않다.

관료 중심의 국가 발전은 어느 정도의 소득수준으로 성장하는 데는 매우 유효한 전략이다. 조직이 전문화될 수록 더 큰 역량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접어들어 사회가 다원화되기 시작하면 관료 중심체제는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법안을 만들어내는 전문적인 테크닉보다 서로의 입장이 상충되는 이해관계자들이 집단적으로 자기 의견을 표출하고 걸러내는 작업이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다름의 문제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은 전문화된 관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 일은 행정부가 아닌 의회의 몫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들의 논의를 통해 걸러져야 한다. 따라서 한 사회가 발전할 수록 관료의 손에서 선출직 대표에게로 권한이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10쪽)

 

사실 관료주의의 결과는 1997년 IMF 경제위기였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에서 부활한 관료주의 이명박정권에서는 미국발 금융위기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박근혜 정권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고, 나라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관료주의의 폐해를 시민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가난한 홍길동이 자기 삶을 바꾸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개미처럼 일해서 열심히 부를 축적하는 것, 흔히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다. 개미처럼 일하면 성공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자기계발서가 유행하던 시대, 이른바 국민성공시대도 있었다. 성패의 기준을 내 노력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러한 시대에도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였을 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맛봐야 했다. 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 수록 계층간의 이동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소득의 양극화가 심해져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을 볼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아메리칸 드림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자 자기계발서가 퇴조하고 인문사회 서적이 부상했다. 개인의 실패에 대한 문제를 사회구조 속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났다. 개인의 행불행의 문제는 이제 사회적 해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외침이 커졌다. 제레미 리프킨의 비유를 빌리면,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유러피안 드림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사회를 꿈꾼다면 경제와 정치의 긴장관계는 더욱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결국 정치 시스템을 이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64쪽)

 

 

이 책을 읽는다면 우리나라 정치를 한번에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은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보이고, 지역감정의 근원을 알수 있는 등 참 유용하다. 그리고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랄 같은 사실은 내가 정치를 외면할수록 누군가 이득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사회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몇 가지 안 된다. 시위에 나서는 직접적 행동도 있고, 단체를 만들어 활동할 수도 있지만 부담이 만만치 않다. 이 중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쉬운길이 투표나 정치참여다. 어차피 내 삶에 영향을 주는 법률은 국회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그 국회에서 내 입장을 살펴서 법을 만들도록 하는게 유효한 방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적 결정이 미뤄지지는 않는다. 많이 가진 이들이 더 열심히 투표하는 현상에서 알 수 있듯이, 불행하게도 정치는 참여하는 이들의 의견만 반영되기 마련이다. 결국 내 삶을 돕겠다고 하는 정당과 후보에 표를 주고, 지지를 보내는 정치참여야 말로 내 삶을 바꾸는 가장 쉽고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다. 그래서 싫어도 외면해선 안되는 것이 정치다.(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 책읽기에서 글쓰기까지 나를 발견하는 시간
장석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읽기와 쓰기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17쪽)

 

맥락의 독서법은 이것과 저것, 이 세계와 저 세계 사이의 상호 관련성을 이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삶과 세계에 대한 인식을 깊게 만든다. ... 문장의 수사법과 기교를 익히기 전에 먼저 다양한 맥락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19쪽)

 

책읽기는 나와는 다른 타자와의 접속, 그리고 세계와의 접속을 의미한다. 아울러 책읽기는 "자신의 무의식을, 그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것"인데, 마치 "찌르듯이, 어쩌면 찔리는 듯 이루어지는 접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강렬한 경험이다. 즉 진짜 제대로 된 책을 읽는 일은 의식과 무의식에 텍스트가 찌르듯이, 혹은 찔리는 듯이 밀려들어오는 것이고, 자기고 모르게 제 안의 인지적 지형을 바꾼느 압도적인 경험인 것이다.(24쪽)

 

책 속의 이야기들이 우리 삶에 겹쳐질수록 우리 경험의 시공은 무한대로 확장된다. 책읽기는, 즉 유한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몇 겹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준다.(25쪽)

 

내 경험에 비춰 말하자면, 세상의 하고 많은 일들 중에서 책읽기를 선택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이기보다는 본능이지 운명이다. 책읽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제 삶의 작은 틈새들과 주름들 안으로 숨어서 남들이 알 수 없는 비밀스러운 삶을 사는 자들이다.(25쪽)

 

 

추상 개념들과 관념들을 무작정 따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구체적 경험에 귀를 기울여라. 경험이 만들어내는 삶의 이야기, 경험이 들려주는 지혜의 말들, 풍부한 독서를 통한 다양한 간접경험. 이런 것들이 글쓰기의 아주 중요한 자산이다. (77쪽)

 

 

눈으로만 글을 읽는 게 아니라 언어의 소리 그 자체를 즐기는 게 중요하다. 언어란 메세지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메시지이다. 언어의 형식은 소리이다. 운문뿐 아니라 산문에서도 말의 소리와 리듬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메시지에 더 큰 주의를 기울인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말의 소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언어는 의미와 소리가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성이나 의미는 홀로 고립될 수 없다. 즉 두요소가 하나로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좋은 문장이 만들어진다. (104쪽)

 

또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문장뿐만 아니라 각 문단 간에도 리듬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문단은 문장들의 한 묶음으로, 하나의 생각, 하나의 주제를 이루는 단위이다. 글의 흐름이 달라지는 곳에서는 꼭 문단을 나누어야 한다. (105쪽)

 

시는 즐거움을 주는 언어의 놀이이다. 있음의 오롯함이고, 그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어떤 시는 사물을 꿰뚫고 지나가는 직관의 순간을 보여주고, 어떤 시는 상상력의 다채로움과 오묘함을 보여준다. (167쪽)

 

 

스타일이란 작품의 내적 구정 원리요, 형식을 지배하는 원칙이다. 작가의 의지와 개성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게 좋은 스타일이다. 작가의 스타일이란 바로 작가 자신이다.(194쪽)

 

바흐의 음악과 베토벤의 음악이 다르다고 느낄 때 그것은 두 거장의 음악 스타일이 드러내는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처럼 당신이 무엇을 아느냐는 핵심적인 요소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스타일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바탕과 관련이 있다. 당연히 스타일은 작가의 개성과 기질의 차이에서 달라진다. 스타일은 그런 바탕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 사람의 전부를 말하는 것이다. 글쓰기가 스타일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195쪽)

 

김연수의 문장들은 보고 겪은 것들에 대한 반향을 품어 안는다. 그 문장들은 감각적인 디테일에서 돋보인다. 그에게 소설 쓰기는 한마디로 "감각적인 표현으로서의 치환"이다. 그는 사물과 현상들, 그리고 사람의 일들을 감각의 그물로 포획해서 디테일이 풍부한 문장으로 그려내는데, 그게 바로 김연수의 스타일이다.

 

문장이란 시간의 압축이고, 시간의 경과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의 메아리를 경청하는 일이다. 그것은 욕망과 동기들의 화음을 듣고 받아 적는 일이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작가란 날마다 무엇인가를 쓰고 고치는 사람을 뜻한다.(198쪽)

 

 

글쓰기란, 문장의 예술이자 기술이며 제작이다. 누구나 훈련을 쌓고 연습을 하면 좋은 문장 쓰는 법을 익힐 수 있다. 단, 그것을 배우는 데는 일생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다 할지라도 지레 포기하지 마라. 글쓰기는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공부요, 평생 그것을 배울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일이다.(10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민적 글쓰기 -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
서민 지음 / 생각정원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민을 처음 알게 되는 것은 저자의 책에서 흑역사로 나오는 한겨레신문 칼럼을 통해서 였다. 그다지 큰 관심은 없었다. 그러다 케이블TV에 그가 나왔다. 수줍은 태도로 애정어린 마음으로 기생충을 설명하는데, 그 때 처음 서민과 기생충에 관심이 생겼다. 아... 기생충에 대한 나의 생각이 선입견이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어느샌가 그는 유명한 방송인이 되었다. 서민같은 외모. 과학자(의사이기도 하지만)가 재미로 방송을 종횡무진하는게 나쁘지 않았다. '기생충 한마리 키워보실래요?' TV를 보면서 '네' 할뻔 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매력은 글에서 나온다. 90년대 진중권, 강준만, 박노자, 유시민의 글에 푹 빠져 살았다면 2000년대는 생각보다 심심했다. 물론 괜찮은 글쟁이들이 나오긴 했지만, 그리고 2010년대 중반 빵! 하고 서민이 나타났다.

 

 

그의 글 중 미국에서 청와대 대변인이 성추행을 한 사실을 다룬 윤창중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http://seomin.khan.kr/195 를 통해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놀랐다. 이거야 말로 촌철살인이다.

 

 

사실 서민은 몇 권의 책을 낸 경력이 있다. 소설 <마태우스>가 있었고, <헬리코박터를 위한 변명>, <대통령과 기생충>이 있다. 물론 본인은 실패했다고 말하지만,

 

하여간, 서민은 본격적인 글쓰기 훈련에 들어간다. 종이신문 칼럼을 열심히 읽고, 블로그에 자신의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알라딘서재에서 그의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책에서는 바로 다음에 읽기를 강조한다. 즉, 글쓰기 훈련만 한다고 되는게 아니라 머리속에 집어넣고 생각할 것이 많아야 한다는 것을 바로 뒤에 붙여서 이야기한다.

 

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체가 화려한가'가 아니라, 글에 '자기 생각을 담고 있는가'다. 자기 생각이 없으면 좋은 글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글이란 독자와 대화하며 독자를 설득하는 수단인데, 자기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대화와 설득이 가능하겠는가?

...

경험이 많으면 자기 생각이 만들어지고, 자기 생각이 있으면 글쓰기도 잘한다. 하지만 삶이란 유한한 법이고, 온갖 경험을 하기는 불가능하다. 글을 잘 쓸 정도로 여러 경험을 하려면 최소한 일흔까지는 살아야 하는데, 그때쯤엔 펜을 들 힘이 달린다. 그래서 책을 읽어야 한다. 책은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함으로써 주인공의 경험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통로다.

(139~140쪽)

 

내가 최근 빠져 있는 그의 글은 일종의 정치풍자글이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조금은 거창해 보이지만, 글을 제대로 쓰기 위해서는 누구나 한번쯤 가져봐야 할 질문이다. 조지 오웰의 네 가지 동기가 나의 사례에 딱히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이 프레임으로 이야기하자면, 네 번째 이유인 '정치성'에 가깝다. 정치성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타인의 생각에 영향을 주는 적극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나의 생각을 타인과 공유하면서 설 영향을 주고 받는 쌍방향적 소통이 전제된다. 나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세상의 가치들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삶을 한 차원 높은 곳으로 고양시키는 것이다. (19~20쪽)

 

<서민적 글쓰기>는 두 파트로 나뉜다. 글쓰기에 대한 생각(본인의 감추고 싶은 과거를 포함한, 그런데 감추고 싶어하지 않는)과 실제 글쓰기를 하는 방법이다. 첫번째 파트는 그냥 쭉 읽게 만든다. 두번째 파트는 뭔가 노트를 하고 싶어진다.

 

이제 서민의 칼럼이 책으로 묶여 나오길 기대해본다.

그의 전매특허 '돌려까기'에 제대로 맞아 보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글쓰기의 즐거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면서 새로운 생각을 만든다.(8쪽)

또한 글쓰기는 소통과 검증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 기회를 이용한 건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글쓰기의 즐거움을 누리는 분들이 많아지길 기다린다. (뒷표지)

 

왕성한 글쓰기를 보여주는 강준만이 들려주는 글쓰기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막상 들여다 보면 즐겁지 않다. 제대로 된 글을 쓴 다는 것이 쉽지 않다. 각 챕터마다 사례들을 보여주는데, 낯 뜨겁다. 내 글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런 문제가 보이지 않지만, 치열하지 않고, 문제의식이 없는 글들이 너무 많다.

 

일단 글은 쉽게 써야 한다. 물론 전문가들, 특히 대학교수 중에는 대중을 위한 책을 썼다고 폄하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은 글은 쉽게 써야 한다. 앞에서 말한 것 처럼 쉽게 쓰는 것은 완전히 이해했다는 것을 뜻한다.

 

중고생을 가르쳐본 경험이 있는 대학생이라면 알고는 있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걸 느껴봤을 것이다. 글쓰기는 그런 설명을 위한 표현 연습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사고력까지 키울수 있다.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121쪽)

 

그럼, 글쓰기를 위해 본격적으로 공부해 보자면, 강준만은 신문 칼럼을 말한다. 되도록이면 신문으로 읽기를 권한다. 칼럼은 한정된 지면에 문제제기와 논리와 함께 들어있다. 압축적 글쓰기. 좋은 글을 쓰고 싶다면 칼럼을 공부하자.

때마침 아주 좋은 책이 출간되었다. '정의를 부탁해'

 

신문 사설의 최대강점은 '압축적 글쓰기'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것 하나만으로도 배울 게 아주 많다. '비판적 읽기'를 통해 신문 사설의 강점을 최대한 이용하자. ...

다시 말하자면, 인터넷으로 사설을 대충 읽는 건 별로 도움이 안 된다. 밑줄 그어가며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는 등 아날로그식으로 공부하는 게 좋다. (33쪽)

 

글을 쓰다보면 조심해야 될 것이 큰 틀과 작은 세계가 혼동해서는 안되는 것이고, 그 둘을 아우를줄 알아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공부가 필요하다. 저자가 배경지식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도 그런 이유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세부적으로 볼 수 있고, 또 큰 틀로도 볼 수 있다.

 

가장 바람직한 건 필요에 따라 '거시'와 '미시' 담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사회현상을 분석할 때에도 탁월한 안목을 제공해준다. 사회현상을 분석할 때에도 탁월한 안목을 제공해준다. 사회현상을 거시적으로 보고 미시적으로도 보는 이른바 '차원구분'을 시도해보자.

...

문명 차원에선 한국이 다양하고 미국이 획일적이다. 반면 일상 차원에선 한국이 획일적이고 미국이 다양하다. 이렇게 차원 구분을 해 줘야 교통정리가 제대로 된다.

...

한국인은 대단히 개방적인 동시에 대한히 폐쇄적이다.

...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건 '거대담론' 편향성에 대한 경계다. 거시와 미시, 추상과 구체를 동시에 사랑하자. 그것들은 서로 가로지르면서 뒤섞이기도 한다는 걸 유념하자. 세상은 예술이다. 복잡하게 보자. 역설 같지만 그래야 단순하게 이해된다. 처음부터 단순하게 보면 뒤죽박죽이 돼 세상을 이해하는 걸 아예 포기하게 된다.(90~91쪽)

 

종종 논쟁적 글이 확 다가온다. 하지만 강준만은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막싸움이 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금은 당황스럽다. 논쟁적 글쓰기에 앞장선 강준만이 이런 소리를 하다니. 잘 생각해보면 강준만은 논쟁적 글쓰기에서도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논쟁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몰입의 쾌락을 만끽하는 동시에 그 위험도 경계해야 한다. 몰입은 그 어떤 장점에도 불구하고 시야를 좁게 만드는 문제가 있다. 넓게 보고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성찰없는 논쟁적 글쓰기는 글로 하는 막싸움에 다름 아니다.(146쪽)

 

강준만의 책에서 가장 관심있게 본 부분은 책의 첫부분이다. 글의 특성이 살아나지 않는 글들, 긴장이 없는 글들.

뭐랄까 리듬이라고 할까. 강하게 쳐주고 약하게 받쳐주고. 실상은 쉽지 않다. 회사에서 글을 쓰건, 사회에서 글을 쓰건, 뭔가 표준 특색없는 일반적인 글로 흘러버리고 만다. 긴장감 있는 글을 쓰고 싶다.

 

팽팽한 긴장은 추리소설만의 필수 요소가 아니다. 논술문이라도 글의 흐름을 살려야 논리가 부각된다. 채점자는 흐름이 끊긴 글을 두세번 읽어가면서 일관성을 찾아내줄 정도로 한가하지 않다. 흐름은 곧 팽팽한 긴장이다.(62쪽)

 

이 책이 글쓰기 공부에 좋은 것은 사례를 들어 설명하기 때문이다. 각 글쓰기 팁마다 그에 맞는 사례들이 있다. 얼핏보면 문제없어 보이는 글들이지만, 설명을 듣고 보면 문제가 있다. 그래서 글쓰기의 교본이다.

 

사례1 :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학법 개정안의 반대파들이 그 이유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사례2 : 그들이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반대하는 이유는 위에 열거한 부정축재의 도구들이 공개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례1)의 경우 '억지 주장'은 누가 봐도 '억지'라고 생각하게끔 차분하게 논박하면 된다. 예의를 갖춰 논박할수록 설득력은 더 높아진다. 굳이 내가 나서서 '억지'라고 말할 필요도 없고 또 그래선 안된다.

 

(사례2)의 글쓰기는 개정안 반대자들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왔는가? 아니다. 그렇게 짐작하는 것 뿐이다. 반대자들의 이유가 다 똑같진 않을 것이다. 나름의 정당한 이유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도 위와 같이 욕먹어야 한다는 건 지나치지 않는가?(152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