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 누구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일할 것인가?
제현주 지음 / 어크로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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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산업화시대를 거친 윗세대는 젊은 청년들에게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고 비난한다. 하지만 윗세대는 사람보다 일자리가 많았다. 경제는 해마다 성장하고, 기업들은 사람들이 모잘랐다.

지금 현재 청년들이 하는 일이란 윗세대의 고졸이 하던 일을 대졸 청년이, 대졸이 하던 일은 MBA나 석박사들이 하고 있다. 그만큼 고스펙을 자랑한다. 하지만 사람보다 일자리가 모자른다. 성장이 정체된 시대에 살고 있다. 문제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권이나 경제인들은 해결의 노력을 하지 않는다. 일자리를 늘릴 대책을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청년들을 비난한다.

 

어떻게 보면 청년들 스스로가 그 해법을 찾아 나서야 하는 아주 더럽고, 재수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산업사회에서 일자리를 가지려면 자본에 '고용'되어야 한다.

산업화 초기에는 일자리에 노동자를 채워 넣는 것이 관건이었다. 산업화 이전에 사람들은 고용되지 않고도 스스로 일자리를 만들어 일하며 살아왔다. 산업자본은 그런 사람들을 고용된 일자리에서 일하도록 유인하는 데 골머리를 썩었다. 탈산업화된 시대에 접어든 지금, 상황은 역전되었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원하지만 자본은 예전만큼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브루니와 자마니는 산업시대에나 탈산업화시대에나 일자리와 일의 경계가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모두에게 임금 노동의 형태로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좋게 봐주어도 순전한 유토피아적 발상이며, 나쁘게 보면 위험한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일을 고용 중심으로 규정하는 산업 시대의 사고방식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 일의 규정을 고용시장 바깥에서 벌어지는 활동까지 아우를 만큼 넓히지 않는다면 '고용없는 성장' 시대를 극복할 방법은 없다. 이를 위해서는 복지에 대한 새로운 정의, 일에 대한 새로운 보상 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지점이다. (111쪽)

 

 

소비 중심사회가 되면서 사회는 소비수준으로 사람의 수준을 결정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소비는 곧 능력이다. 그리고 고가의 제품,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록 능력있는 기업이다. 그것을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체험한다.

훌륭한 소비자가 곧 능력 있는 인간으로 치환되는 사회다. 벌어들이는 돈의 양으로 일의 성과가 측정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돈벌이를 해야 하는 우리는 모두 카지노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이다. 카지노에서 게임의 자원으로 인정받는 것은 오로지 칩 뿐이다. 무엇이 칩이고 무엇이 칩이 아닌지 결정하는 것이 바로 카지노가 지닌 권력의 핵심이다.(102쪽)

 

철학과 문학, 정치분야를 아우르는 저자이자 학습 공동체를 꾸려가는 우치다 타츠루는 <하류지향>에서 "소비하는 일로 사회 활동을 시작한 아이들은 인생의 아주 초반부터 '돈의 전능성'을 경험"하며, 이를 통해 " '사는 사람'의 위치를 선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우친다고 지적한다. (215쪽)

가정은 노동 공동체이며 교육 공동체였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소비를 위한 재원을 공유하는 소비 공동체일 뿐이다.(217쪽)

 

그러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다 같지는 않다. 문제는 그 능력이라는 것도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는 건데, 결국 좋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좋게 평가받는 쪽으로 능력이 규정되고 있다. 그런데 실상 능력에 따른 차별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경쟁에 의해 나라가 세워졌던 미국을 제외하고는(아마 한국도...) 능력에 따른 차별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사이에 세상은 능력을 따른 차별을 당연한 것을 넘어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능력이 있고, 각기 타고난 능력의 종류 자체가 다르다. 누가 누구보다 능력이 좋거나 나쁘다는 판단에는 능력의 종류 자체에 대한 선호가 바탕에 깔려 있을 수 밖에 없다. 결국 능력주의는 능력이 더 뛰어난 사람을 높이 산다기보다는 시장이 원하는 종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을 높이 사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런 능력주의가 정말 '공정한' 것일까? 부모의 재력을 무려받아 유리한 것은 비난하면서 시장이 원하는 능력을 타고나 유리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여도 되는 걸까? 더구나 능력은 설사 유전자의 덕이 아니더라도 운 좋게 누린 양육 환경의 덕이기도 하다.(144쪽)

다만 능력주의가 절대적인 공정성을 의미하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 책(국가의 숨겨진 부)에는 흥미로운 설문 결과도 나온다. "같은 일을 하는 두 명의 비서 중에 일을 더 잘하는 비서가 돈을 더 많이 받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십니까?"나는 질문에 대...해 세계 각국 사람들이 어떻게 답변했는지, 1980년대 초반에서 2000년대 초반으로 오며 그 답변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준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1980년대 초반만 해도 '그렇다'고 대답한 비율이 그리 높지 않았던 이탈리아,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등(50-60퍼센트 내외)도 시간이 흐르며 점점 미국 사람들과 비슷한 견해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1980년대 초반에는 '그렇다'는 답변 비율이 70퍼센트 미만인 나라가 18개국 중 11개국이나 됐다.(2000년대 초반 즈음에는 단 한 나라도 없다.) 능력주의가 공정 사회와 같은 말이 된 것이 그리 역사가 오래된 현상은 아닌 모양이다.(145쪽)

 

우리는 모두 내리막길에 서 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전 세대보다 돈을 못 버는 세대의 등장. 그런 우리에게 세상은 자기계발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세상이 원하는 논리에 맞춘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자기계발을 설파하는 목소리들은 빠짐없이 '자기 주도'를 말하고, 자유롭게 꿈을 추구하여 '자기를 실현'하는 개인을 이상화한다. '내가 주인공인 인생'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대표적이다. 이 말의 이면에는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숨어 있다. 자신의 주인공이 된 하나의 드라마를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 그 드라마 속의 나는 인정받아야 하고 그럴 만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언제나 관객을 전제로 한다. 웃거나 울거나, 박수를 보내거나 야유하는 관객이 있어야만 드라마는 성립한다. 고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려면 늘 관객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사실 드라마의 '주인'이 아닌 것이다.(207쪽)

 

이 책에서는 이런 규정화된 직업을 떠나 자신만의 삶의 영역을 개척하는 이들이 소개된다. 저자 역시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이런 노력을 모두가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미 우리는 내리막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먼저 내려가든 행여 재수좋게 오르막길에 올라타던 서로 연대해야 한다는 희망을 던져준다. 같이 살아야 한다.

원해서든 아니든,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고정된 일터 없이 일해야 한다는 현실을 맞이할 것이다. 고정된 일터가 없더라도 여전히 활동으로서의 일은 존재한다. 따라서 동료도 있고, 고객도 있으며, 돈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한 세트로 주어지지 않는다. 매번 자신에게 맞는 일을 능동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 앞의 말대로 `능동적 자유`가 엄청나게 확대되는 셈이다. 자신이 가진 여러 능력을 여러 일을 통해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이 능동적 자유는 본성상 불안전성을 품고 있다. 여기서의 불안정성이란 당연히 경제적 불안전성도 포함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불안정성이다. 고정된 장소, 고정된 관계망의 밖에서 일함으로써 느끼는 불안정성은 단순히 경제적 불안정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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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조직 - 조직은 어떻게 우리를 속이고 병들게 하는가?
앤 윌슨 섀프 & 다이앤 패설 지음, 강수돌 옮김 / 이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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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동안 비전기업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성과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조직구성원들 모두가 비전을 공유하고 그 비전을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오랫동안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조직원이 조직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믿어 왔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초일류 기업은 일에 대한 집착을 바람직한 것으로 촉진하려는 경향이 있다. 피터스와 오스틴*은 기업에 대한 헌신이 사람들의 삶에 목적을 부여하며 자아 존중감을 회복하게 해 준다고까지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런 태도에 의문을 품는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은, 여태껏 기업들에서 수용가능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겨져 온 것들이 사실은 개인과 조직이 갖고 있는 치명적인 질병, 그것도 빠르게 진행되는 질병이란 점이다. (40쪽)

(* 우리가 혁신의 문제를 좀 더 완전하게 숙고하려면 피터스와 워터스만이 쓴 "초우량기업의 조건"이나 피터스와 오스틴이 쓴 "탁월성을 향한 열정"같은 책도 검토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 조직이 돌아가는 것은 그렇지 못하다. 비전기업이 대두되면서 조직은 점점 더 실제와 거리가 먼 비전을 강조한다. 실제와 동 떨어진. 

흥미롭게도 우리는 조직이 내세우는 사명이 고상할수록 실제 행동은 표리부동할 확률이 높다는 점을 발견했다. 여기서 표리부동은 명시적 목표와 비명시적 목표가 일치하지 않을 때 발생할 때 두 목표가 일치하지 않을 때, 조직은 경직된 부인의 시스템으로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그런 행동에는 꼭 과장된 허장성세가 뒤따른다.

...

사명이라는 이름의 허장성세는 일종의 마약과 같다. 사명감은 우리가 중요한 사람이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한다. 이러한 착각이 조직이 내세우는 사명이나 목표의 본질적 목적이다.(184쪽)

 

조직자체가 사람들에게 일종의 중독물로 기능하는 경우, 조직의 사명이나 비전을 계속 강조하는 일은 그 조직의 유지에 매우 중요하다. 직원들이 조직의 전망에 눈이 멀어 있는 한, 현실에 존재하는 괴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시 구성원이 눈치를 챈다 할지라도 조직 내에 별 탈 없이 머물기 위해 아마도 침묵하는 편을 선택할 것이다. 조직의 사명은 조직 구성원들에게 일체감을 부여하는 강력한 원천이다. (186쪽)

 

우리 사회가 청년들에게 강요하는 것 중의 하나가 미쳐야 한다. 아니 사실 중년들에게도 미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성공한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에만,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 정치적인 문제에는 관심을 갖지 말라는 말이다. 알콜중독자가 알콜 하나에만 관심을 갖듯이 그렇게 사회에 중독을 강요한다.

 

우리의 사회 시스템 자체가 중독을 조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면밀히 살펴보면 사회는 분명 중독을 촉진한다. 사회 생활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이란 따지고 보면 죽은 것도 아니요. 산 것도 아닌 존재, 그저 무감각한 좀비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당신이 죽은 존재라면 당신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일을 전혀 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만약 당신이 완전히 살아 있는 존재라면 당신을 사회가 요구하는 숱한 일들이나 돌아가는 과정(일례로 인종차별, 환경오염, 핵 위협, 군비경쟁, 식수 오염, 발암 음식 섭취 등)에 대해 계속해서 '아니오'라고 말할 것이다. '모난 돌을 정으로 쳐 내고','중독물fixes'에 휩쓸리게 하고, 우리를 '넋이 나간' 좀비처럼 만드는 것은 이 사회의 이익과도 일치한다. 결국 사회 자체가 중독을 적극 부채질할 뿐 아니라 중독자로도 기능하는 것이다. (92쪽)

 

그리고 성공하기 위한 조건으로 일에 미쳐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중독을 강요하고, 조직의 문제를 발견하기 보다는 조직의 지속을 위해 일에만 집중하기를 강요한다.

일중독이란 다루기가 대단히 까다로운 중독이다. 일중독자들은 설사 그 질병이 그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할지라도 일중독에 빠져 있을 때라야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194쪽)

 

중독 시스템 안에서는 어떤 개이이나 아이디어에서 무언가 잘못된 점을 발견할 경우, 그 사람이나 아이디어가 완전히 폐기 처분되기도 한다. 그 역도 성립하는데, 한 가지만 좋으면 모두 좋은 것처럼 평가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일중독에서 뭔가 한 가지라도 좋은 게 발견되면, 그 전체 과정이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

일중독의 밑바탕에는 누구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애착이 자리하고 있기에 일중독을 부정하거나 숨기는 일이 그만큼 어렵다. 그 애착이란 다름아닌 경제에 기반한 시스템, 즉 자본주의이며 그 시스템을 뒷받침하는 사회구조이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노동윤리와 기독교가 이 둘을 모두 지탱한다.(201쪽)

 

사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런 중독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사회가, 특히 조직구성원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결국은 중독을 강요하는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래서 저자의 첫번째 진단은 중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중독 조직이 아픈 조직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273쪽)

 

이 책은 1988년에 나왔다. 그런데 지금 읽어도 굉장히 뛰어난 지적으로 느껴진다. 아니,우 오히려 사회는 점점 더 중독되기를 강조한다. 점점 더 세상을 가혹하게 만들고 있다.

 

이 책의 번역은 강수돌 교수께서 했다. 그동안 자본주의 경제속에서 주체적 개인에 고민을 하셨던, 그의 이야기가 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중독 시스템 처럼 보인다. 기업은 이윤과 경쟁에 중독되어 전 구성원을 일중독이나 돈 중독으로 몰아간다. 조직 구성원들은 조직 자체에 중독되기도 한다. ...

그리하여 온 사회가 중독 분위기에 물든다. .. 길거리에서 쉽게 마주치는 광고들은 우리에게 소비를 통해 누추하고 비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식의 광고는 소비 중독뿐 아니라 소비를 통해 얻어지는 권력 중독까지 정당화한다.(338쪽)

 

내가 이 책을 본격적으로 번역해야 겠다고 결심한 것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이후이다. 세월호 사건의 발생 원인과 그 이후의 대응 과정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총체적으로 병들어 있는지 절감했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는 대한민국이라는 배가 성장과 부에 중독되어 침몰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끔찍한 신호였다. 대한민국 전체가 일종의 중독 조직이요. 중독 사회였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시기라는 생각이 절박하게 들었다. 그리고 이 책이야말로 그 과정에서 중요한 디딤돌이 될 것이라 보았다.

물론, 이 책 하나가 중독조직과 중독가 개인, 나아가 중독 사회를 치유해 주지는 못한다. 이 책은 다만 입문서일 뿐이다. 그러나 이 책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개념과 통찰을 가지고 우리 자신과 조직의 현실을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면.... 우리 삶의 사각지대, 조식 생활의 사각지대를 구석구석 비춰주는 손전등이 될 것이다. (340~3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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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잠의 종말
조너선 크레리 지음, 김성호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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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후 잠은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 중에 하나였다. 어둠이 오랫동안 깔리는 시베리아 지역의 개발을 위해 소련은 백야를 연구하기도 했고, 미국은 잠을 안자고 비행하는 철새의 비밀을 연구하기도 했다.

목적은 사람들이 잠을 안 자고 지내는 동시에 생산적이고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14쪽)

 

잠은 근대의 적이었다. 17세기 중엽이후 철학자들은 잠이 정신적인 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폄하 했다. 잠으로 인생의 1/3을 허비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사회에 전반적인 생각이다.

 

잠이 항상 적으로 취급된 것은 아니다. 산업화의 속도와 더불어 자본주의는 휴식이 생산성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휴식시간을 보장하는 정책들을 펼쳐나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위기 이후 그리고 테크놀로지의 발전으로 산업은 잠과 상관없이 발전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24시간 근무체제를 향해 나가고 있다.

 

자본주의는 왜 이토록 잠을 못살게 구는 것일까? 잠의 기본적인 속성은 아무것도 안함이다. 사실은 그 동안에 뇌와 몸의 각 기관들은 쉬임없이 역할을 수행하지만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큰 장애물이다.

 

잠은 심오하게 무용하고 본래 수동적이며 생산시간, 유통, 소비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하기 때문에 24/7 세계의 요구와 언제나 충돌하게 마련이다. 우리 삶의 크나큰 일부분으로서 우리가 가짜 필요의 늪에서 해방되어 잠을 자면서 보내는 시간은 현시대 자본주의의 게걸스러움에 인간이 가하는 심대한 모욕들 가운데 하나로서 존속한다. 잠은 자본주의가 우리의 시간을 도둑질해가는 것을 비타협적으로 방해한다. 인간의 삶에 필연적인 불변의 요소로 보이는 것의 대부분은 상품화되거나 금융화된 형태로 개조되어왔다. 잠은 식민화하여 수익성의 거대한 엔진에 연결해 활용하는 게 불가능한 인간적 필요와 막간의 관념을 제기하며, 그리하여 전 세계적인 현재 안에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변칙이자 위기의 현장으로 남는다. 이 분야의 모든 과학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잠은 그것을 이용하거나 변형하고자 하는 일체의 전략을 좌절시키고 곤경에 빠트린다.(26쪽)

 

이 책을 읽는 것은 쉽지 않다. 원래 책이 좀 어렵게 쓰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사용되는 단어들도 익숙하지 않고, 그럼에도 이 책이 의미가 있는 것은 일반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잠에 대해 보다 직관적으로 바라보고 있고, 자본주의와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어렵지만 읽어봐야 할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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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 느린걸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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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라는 이름은 여러 차례 들어봤지만 그의 책을 실제로 읽은 것은 처음이다. 하지만 읽기 시작하자 곧 충격에 빠졌다. 경쟁이라는 학생시절을 거쳐 어렵사리 취업을 하지만 사회생활 역시 만만치 않다. 자영업도 마찬가지, 현재 우리는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고 있다.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바로 플러그 인 되어 버렸다. 이런 구조를 타파하려고 하면 겉은로는 용기있는 사람이라고 불리지만 뒤돌아서면 있는집 자식 아니면 미친 놈 취급을 받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현대화된 가난'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 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현대의 이 새로운 무력함은 너무나도 깊이 경험되는 것이라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6쪽)

·········

현대의 새로운 가난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상품에 중독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죄악이거나, 또는 두가지 다 일수 있다. 소비를 하지 않고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경제성장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곳 어디서든, 직장에 다니지 않거나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는 인간으로 취급된다. (8쪽)

 

하지만 현대 산업사회는 이런 구조를 공고히 할 뿐이다. 사람은 없어지고 생산과 소비라는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고, 생존을 하기 위해서는 그 시스템에 들어갈 수 밖에 없다.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풍요에 사람들이 중독되고 그것이 문화 속으로 한번 배어들면 '가난의 현대화'가 생겨난다. 현대화된 가난은 상품이 확산하면서 어김없이 발생하는 부정가치의 형태이다. (34쪽)

 

'현대화된 가난'이 주요하게 가난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때는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알아차릴 수 없으며 그 본성 또한 파악하기 어렵다. 일상 대화에서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발전이나 현대화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면 그때까지만 해도 시장 경제에서 배제되어도 생존할 수 있던 이들은 구매 시스템으로 끌려 들어가 물건을 사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게 체계적으로 강요를 당한다. 이제부터 그들은 시장에서 나오는 찌꺼기를 가져다 살 수 밖에 없게 된다. 학교라는 곳에 가본 적 없던 멕시코 오악사카주 인디언이 지금은 졸업장을 '따기'위해 학교에 끌려간다. 이들에게 졸업장이란 자신들이 도시인보다 얼마나 열등한지를 정확하게 측정해주는 증서이다. 그나마 이 종이 한 장이라도 없으면 도시에 나가 빌딩 청소부도 할 수 없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이런 것이다. '필요'가 현대화될 때마다 가난에는 새로운 차별이 하나씩 더 붙는다. (35쪽)

 

그리고 그 어떤 결정도 내릴 수 없다. 사회는 끝없이 분화되고, 이반 일리치는 그것을 전문가의 시대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공동체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미래의 역사가는 전문가의 시대를 정치 소멸의 시대라 부를 것이다. 유권자들이 대학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자신의 필요를 법률로 제정할 권력과 누가 무엇이 필요할지를 결정할 권한, 그리고 그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에 대한 독점권을 기술관료에게 위임한 시대라고 말할 것이다. 이 시대는 학교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인생의 3분의 1은 무엇을 처방받아야 할지 배우고, 나머지 3분의 2는 자신의 습관을 관리하는 저명한 전문가의 고객으로 살았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55쪽)

 

심지어는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진 처방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조금 늦은 아이로 평가받았던 이들이 요즘은 ADHD라는 질병으로 진단되어 치료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결혼 준비도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결혼생활이며 육아 모두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결국 전문가에 의해 진단받고, 그 처방에 의해 살아가야 하는 세상.

 

검붉은 표지에 활자만 있는 책, 두께도 140쪽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40년전에 쓰여졌다. 하지만 놀랍다. 지금 현대의 문제가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의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성찰이다. 그리고 삶의 주체성, 자율성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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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봤어? - 내일을 바꾸기 위해 오늘 꼭 알아야 할 우리 시대의 지식
노회찬.유시민.진중권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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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유진의 정치카페 처음엔 이 분들이 잘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한가닥씩 하는 분들 아닌가. 어디가서 말빨에서 밀리지도 않을 분들이 모여서

그런데 막상 들으니 은근히 재미있다.

노회찬과 유시민이 거들먹거리며 잘난척할 때 진중권이 상황을 잘 정리한다.

(이 과정에서 기본적인 지식들과 이론들 생각해봐야 할 점들이 딱 들어온다)

 

김대식교수가 출연했던 인공지능에 대한 부분이 책에 실리지 않아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만,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면서 생각해봐야 할~

생각했다면 그 생각의 방향이나 깊이를 되돌아보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는 의미있는 책이다.

 

먼저 기본적인 생각이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출연했을 때

"노회찬 : 그런데 사실 시험 잘 치는 학생과 못 치는 학생을 섞어 놓았을 때 교육적 효과가 더 크다는 것은 다른 나라의 실험에서도 많이 확인된 바에요. 무엇보다 성적 잘 나오는 사람만 솎아내고 나머지를 포기하는 건 공교육이 할 바가 아니거니와, 공부 잘하는 사람에게 꼭 좋지도 않다는 거죠."(251쪽)

그간 교육을 학습이랑 헷갈려서 생각해왔던 게 아닐까.

어떤 TV 프로그램에서는 상위15%만을 위한 교육이라는 지적도 있었는데,

그건 공교육의 본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둘째,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정태인 : 부는 아래 세대로 물려주게 되잖아요. 그런데 부가 상위 1%, 10%에 심하게 집중돼 있으면, 각 개인의 출발점의 차이가 너무 커진다는 거죠. 쉽게 말해 은수저를 물고 나온 애한테 이길 방법이 없는데, 은수저 정도로 표현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그렇게 되고 있고요. 베타값 7.5라는 게 바로 그런 상황을 보여주는 거죠.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이념 중의 하나가 능력주의인데, 이것이 위협받는 거죠.

또한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건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인데, 이 민주주의가 약화됩니다. 돈이 집중되면, 그에 따라 권력도 집중되죠. 그러면 돈을 가진 이들이 의회를 장악하고, 자신들을 위한 법을 통과시키게 ...되죠.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는 형식적으로만 유지됩니다. 즉, 19세기 말의 귀족 자본주의와 뭐가 다르냐는 거에요. (113쪽)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두고 이야기를 하는 부분인데,

현재의 자본주의가 돌아가는 상황은 자본주의의 기본을 헤치고 있다.

경쟁은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한 축인데,

부의 상속으로 경쟁을 하지 않아도 게임의 승자가 되는 이상한 구조가 되어버렸다.

 

셋째,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이다.

소련의 붕괴, 북한 군사력의 저하 등 여러 배경이 있는데 그 속에서 주한 미군의 역할 자체를 변경한 거죠. 이제까지 주한 미군이 존재해 온 유일한 이유는 북한의 침공에 대비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북한의 침공 가능성이 낮아지고, 북한도 과거에 비해 약화됐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주한 미군을 북한을 막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군대가 아니라, 세계 어디나 갈 수 있는 군대로 재편성하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병 2사단이 평택으로 내려가는 것이고요. 이러한 맥락에서 작전지휘권우리에게 주겠다는 겁니다. 또한 과거에는 주일 미군과 주한 미군이 수평적 관계였다면, 이제는 주일 미군 지휘 아래 주한 미군이 배치되는, 동북아 지도에서 미군 배치의 개념이 바뀌는 과정과 맞물려 있는 거죠." (67쪽)

미국의 태평양정책이 바뀌었다. 일본과 호주를 중심으로 재편이 되었다.

주일미군으로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군대도 없는 일본은 전작권이 있다. 주일미군과 협의해서 진행해야 하는 구조이다.

대한민국은 전작권이 없다. 만약 주한미군이 주일미군에 따른다면

일본의 지휘를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외에도 새 교황에 대한 이야기나 시위에 능숙한 어버이연합(일베 설명 도중에 나오는) 등도 재미있다.

 

노유진 관련 한겨레 기사 "“우리는 사람들이 더 똑똑해지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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