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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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
(하권 308쪽)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들었다. 솔직히 이런 소설은 읽기에 거북함이 앞선다. 사회에 대한 일종의 부채의식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간에 90년대 후반학번이라는 이유로 사회에 대한 무관심과 함께 아무런 노력도 없이 어느덧 절차상의 민주화가 진행된 이땅에 무임승차했다는 일종의 부채감을 지우기는 힘들다.

오히려 역사서적이나 사회과학서적을 읽을 때야 머리 대 머리로 이해하기에 부채감의 무게를 애써 무시할 수 있지만,소설이나 시를 대할때면 정서 대 정서로 읽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읽어내려가기엔 정서적 부채감이 크다.  

오래된 정원을 오랜시간 동안 책꽂이에 방치한 변명아닌 변명이다.

책을 읽다가 특정 사실들을 접하면 작가의 행적을 더듬는 버릇이 있다. 오래된 정원을 보면서도 오현우의 수감생활은 황석영씨의 방북사건으로 인한 5-6년간의 옥에서의 삶이 투영되었으리라는, 그리고 한윤희의 독일생활은 방북후 베를린에 거쳐했을 때의 경험이 귀한 체험으로 소설에 녹아있구나 하고 작가의 생활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1980년 광주 그리고 대통령 직선제, 올림픽, 동구의 몰락, 문민정부, IMF 경제체제까지 20여년 동안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6-70년대의 변화가 독재와 새마을 운동을 기반으로 한 닫힌 사회에서의 경제상의 변화였다면 8-90년대는 절차상의 민주화를 확보해내면서 열린 사회로의 문화상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80년 이후 절차상의 민주화가 확보될 때 쯤 동구의 몰락이라는 사건은 운동을 통해 사회를 뜨겁게 사랑했던 이들을 구석으로 몰아넣었고, 결국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자조와 함께 IMF 경제위기에 에둘렸고, 경제위기 이후 부자아빠야 말로 아빠로서 인정받고, 20대 부터 재테크에 미쳐야하는 21세기에 황석영씨는 그 20년(오현우의 옥생활은 18년이죠)을 수감생활을 했던 한 인물을 불쑥 내밀었다.

아직도 희망은 있는 것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주인공 오현우는 70년대 지하운동조직의 수괴로 검거되어 18년만에 석방된다. 그는 18년전 사랑했던 연인 한윤희와 함께 했던 갈뫼를 찾고 그곳에서 그녀의 노트를 발견한다. 오현우는 70년대 후반 자신의 활동을 추억하고, 자신의 수감생활이후 한윤희의 눈을 통해 그리고 그녀의 삶을 통해 자신이 부재했던 세상을 기억해낸다. 그리고 둘의 희망인 딸 은결이를 만나는 장면까지..

책을 덮고선 지금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추억해내는 모습은 지금 이 곳에서 역사를 기억해내는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그리고 오현우의 삶은 그의 부재속에서도 한윤희를 통해 사회속에서 지속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윤희의 삶을 통해선 자신의 삶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 치열하게 살아간 한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오래된 정원은 더 나은 삶에 대한 꿈을 추구한 세대의 초상이 될 것이다(작가 후기)라는 말처럼 소설 [오래된 정원]은 읽는 이에게 그 초상을 기억하게 해 주기도, 때로는 처음 초상을 보여주기도, 그리고 실재하는 초상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서의 짊을 한 번 탁탁 털어 구겨진곳 다시 펴내곤 깔끔하게 환기시켰다. 그 부채감을 잊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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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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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손님마마라고 천연두를 부르는 말이다. 소설은 1950년 신천대학살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황해도 신천에서 있었던 사건을 주인공 류요섭의 50년만의 고국방문을 통해 풀어간다. 그의 고국방문은 신천대학살 사건에 대한 화해의 의도이고, 주인공은 화해를 위해 그의 고향에서의 사건을 정확히 기억해낸다.

주인공 류요섭의 가족은 기독교의 한국 포교와 더불어 기독교인이 되었고, 신천은 이런 기독교인들이 많았던 지역이다. 해방이 되고 황해도 지역엔 소련의 세력이 되면서 공산주의가 정치적인 이념이 된다.
이 과정에서 본래 지주들과 소작농 사이의 갈등이 시작된다. 인민위원들에 의한 토지접수가 시작되고 지주들과 기독교는 탄압을 받게 된다.(지주들이 대체로 기독교였던 점도 있지만)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전쟁 초반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후 북진하면서 상황은 역전된다. 기독청년단은 자신들이 십자군인양 착각하게 되고 12세기 십자군이 그랬던 것 처럼 공산주의자들을 마귀로 지칭하면서 성전(聖戰)이라는 이름 하에 동족에 대한 잔인한 살육이 전개된다.

그 사건의 중앙에 있었던 류요섭의 형 류요한은 그 아픔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미국에서의 외로운 생활을 한다. 그리고 남아있던 류요한의 가족들은 신천학살의 주인공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힘든 생활을 하고. 신천학살의 당사자였다 살아남은 사람들도 그 아픔을 공산주의의 선전물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아픔을 겪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인 그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의 동생이고, 동생이 기억의 저편들을 더듬어가며 화해의 손짓을 한다. 이 점은 아마도 역사의 당사자들이 이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지금의 현대인들의 모습이며 기억의 저편을 더듬는 과정은 역사를 다시 복원해야 하는 그리고 복원된 역사를 가지고 화해해야 하는 숙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또 하나 손님 즉 나쁜 의미의 손님마마는 우리 민족을 갈라놓았던 기독교와 공산주의였고, 손님마마는 현재도 여전히 우리 땅에 남아 우리민족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황석영의 <손님>은 어쩌면 일종의 주술행위이다. 소설이 황해도의 진지노귀굿의 흐름을 따랐다는 점에서 역사를 기억하고 민족간의 화해를 바라는 그런 굿을 소설을 통해 하고 있다. 역사속에서 화해를 바라며... 그리고 손님마마의 해꼬지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민족을 향해 굿판을 한판 벌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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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Mr. Know 세계문학 5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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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에 관심이 있는 사람치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스에 대한 소개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인 조르바이다. 혹자는 완벽한 자유인이라고도 하고 많은 예술가들에게 원초적인 자유의 영감을 주는 인물 조르바.

 그런 조르바를 이제야 만났다. 조르바에 대해 건네 들은것이 벌써 스무해는 다되었을텐데 말이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삶에 있어 새로운 시간을 갖고자 하는(새로운 깨달음 혹은 좀 더 깊은 생각을 위해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자 하는) 작가('두목')가 크레타 섬에 도착하면서 묘한 인물 '조르바'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해 그와 함께하며 나눈 일상과 대화, 그리고 헤어짐을 다룬다. 즉 조르바와의 만남부터 헤어짐까지 조르바로 가득찬 책이다. 

 지식과 생각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고자 하는 '두목'에게 '조르바'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언제나 거침없는 행동속에 숨겨진 자유와 무엇에든 얽메이지 않는 원초적인 자유를 누리는 '조르바'를 통해 '두목'은 자유의 본질과 마주친다. 진리를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자유가 바로 조르바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하지만 두목은 그 자유를 인정할 수 없어(자신이 추구해온 진리탐구가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어서일까?) 사색과 글쓰기에 끈덕지게 매달린다. 

 '자유'란 무엇인가? 본질적인 자유란? '조르바'는 그 어떤 것에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추구한다. 그는 결혼이라는 사회적 제약, 국가라는 지리적 그리고 사상적 제약, 식욕과 성욕이라는 육체적 제약을 극복했다. 심지어 그는 도자기를 만드는데 제약되는 손가락을 잘라버리므로 꿈의 제약마저 벗어났다. 그와 달리 진리를 통해 자유를 얻고자 하는 두목은 도덕과 사회적 제도라는 줄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다. 

 두목 "당신과 함께 갈 수도 있어요. 나는 자유로우니까"

 조르바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두목 "언젠가는 자를 거요"

 조르바 "두목, 어려워요.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아시겠어요? 모든 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 (339쪽)


 조르바는 진리를 통해 자유를 추구하는 두목이 바로 그 줄에 묶여 있음을 알고 있다. 진정 자유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 줄을 잘라야 하는데 두목은 그렇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줄은 사회적 제약일지 모르지만 사회적 제도속에서 안정하고자 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다. 미지의 세계로 나가는 것은 바로 도박이니까. 본질적 인간이 아닌 사회적 인간(사회에 의해 제약되지만 한편으로는 보호받는)일 뿐이다.

 
 조르바 "처음부터 분명히 말해 놓겠는데, 마음이 내켜야 해요. 분명히 해 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두목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조르바 "자유라는 거지!" (25쪽)

 바로 본질적 인간은 자유 그 자체다.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줄을 잘라야 하지만 그 줄을 자를 생각은 없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적 자유속에 만족하며 산다. 조르바는 '박제된 자유인'일 뿐이다. 우리는 그의 자유를 부러워하지만 그와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조르바를 끊임없이 꿈꾼다. 조르바를 구경꺼리 유명한 작품처럼 벽에 걸어놓고 그의 자유를 이야기하고 토론하고 꿈꾼다. 하지만 그는 우리에게 박제되었을 뿐이다.

 더 이상 인간의 본질적인 자유는 없다. 독재정권을 겪으면서 우리에게 자유는 민주적 자유가 전부였다. 90년대 후반 경제위기를 겪은 후 이제 자유는 '경제적 자유'일 뿐이다. 자유에 대한 정의에서조차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더 더욱 조르바가 그리워진다. '인간은 자유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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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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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재미있는 이 책은 인지과학 측면에서 지은이 자신의 학문인 인지언어학을 정치현실에 적용하여 나온 책이다. 2000년 미국 대선을 보면서 지은이는 사람들의 투표 성향을 분석하기 시작한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후보에게 투표하지 않는 것일까? 가난한 사람들이 왜 부자를 위한 정당에 투표하는 것일까? 에 대한 의문에서 사람들을 살펴본 지은이는 프레임이라는 해석틀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로 그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주는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과 일치하는 정당을 지지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양대정당 공화당과 민주당은 각각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공화당은 '엄격한 아버지' 그리고 민주당은 '자상한 아버지'라는 프레임을 가지고 있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대부분의 정책은 그러한 프레임과 맞아 떨어진다.
 
'엄격한 아버지 프레임'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역할이 강화되는 것과 같이 사회속에 나타난다. 사회에는 도덕적 질서가 필요하다. 그런 도덕적 질서를 위해서는 규율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그런 도덕적 질서를 바로잡을 의무가 있다. 즉, 사회적으로 능력(혹은 부)에 의한 차별은 당연한 것이다. 남녀간의 성차와 동성애, 낙태와 같은 부도덕한 현상은 용납할 수 없다. 부는 경쟁에 의한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위해 돕는 행위는 부도덕한 일이다. 정부의 역할은 규율을 따르는 모든 미국 국민들의 생명과 사유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다. 국제정치적으로도 미국은 그런 엄격한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미국의 권위에 도전하는 집단은 응징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달리 민주당은 '자상한 아버지의 프레임'이다. 아버지는 가족 내에서 어머니와 함께 가족에 대해 상의하고 자녀를 보살피고 사회적 책무를 다한다. 바람직한 사회관계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 다시말해,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해야 하고, 사회적 협의를 거쳐 교육, 의료보장 등의 혜택을 모든 국민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 다른 나라들과 협력해야 한다.
 
지은이의 이런 프레임 분석은 우리에게 시사점을 던져준다. 즉, 나의 처지가 사회적약자거나 그렇지 않거나 내가 추구하는 바가 '엄격한 아버지의 프레임'이라면 나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과거 민주당이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우리의 정책이 사회적 약자를 위한 정책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만 애썼지 이런 프레임의 틀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보수주의는 이런 프레임의 영향력을 오래전에 깨달았다. 3~40여년 전 부터 돈많은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많은 돈을 들여 연구소 등을 설립하였고, 그들의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결과적으로 TV에 출연하는 지식인들의 80%이상이 이런 보수주의 학자들이다. 그들은 프레임의 영향력을 잘 이해하였고 몇 십년간 프레임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그들은 TV나 언론에 등장하여 그런 프레임을 전파하고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세금구제'라는 프레임이다. 세금은 누구나 기피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프레임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그런 세금에서 구원해주겠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국민들에게는 세금이라는 고통에서 구원해줄 공화당이라는 프레임이 이미 형성되었기 때문에 세금을 통해서 사회보장프로그램 등을 확충하겠다는 진실은 중요한 요소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공화당은 그런 세금의 부족분을 모두 사회보장프로그램을 제거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국방 등의 예산을 더욱 늘리는데 사용된다는 사실은 프레임속에 은폐된다. 공화당은 '세금구제'라는 은유적인 언어활동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 '엄격한 아버지의 프레임'을 완벽하게 수행해 나간다.
 
지은이는 인지과학의 프레임이론을 통해 이런 정치적 현실에 뛰어든다. 아무리 민주당이 사실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런 사실 보다는 자신의 프레임을 따른다. 미국사회에서 이런 보수주의 프레임은 9·11 테러를 겪으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라크에 관련된 수많은 진실들이 알려지고 있지만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국민들의 지지는 압도적이었지 않는가.
 
그래서 지은이는 바로 이런 프레임에 입각해서 대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화당이 세금구제라는 은유를 들고 나왔을 때 그 프레임안에서 대응해서는 상대방의 프레임만을 강화시켜줄 뿐이다. 세금에 대한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우리 부모들의 세금으로 도로가 만들어졌고, 인터넷이 개발되었고, 우주개발의 시대가 열렸다. 결국 우리의 세금은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라는 은유를 만들어야 하고 보수주의자들이 TV에 나와서 매일 말하는 것처럼 광고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야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은이의 프레임이론은 여러면에서 생각해볼 만하다. 흔히 어떤 사실을 이야기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것 만으로 정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프레임이라는 생각의 틀이 중요하다는 점을 주지시키고 있다. 즉, 인지과학(비단 과학 뿐이 아니라 인지적 관점은 심리학 및 언어학에도 중요한 영역이다.)이라는 학문적은 차원에서의 접근도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지은이가 말하는 프레임은 각 정당의 정체성을 한번에 볼 수 있는 중요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정책이 아닌 프레임 입장에서 보면 한나라당과 신당,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프레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씽크탱크를 장악한 것 처럼 요즘의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모습은 분명해 보인다. 삼성의 부도덕한 문제가 터져나왔을 때 우리나라의 모든 경제신문들은 비자금 등의 문제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또 다시 국가경제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태도와 삼성의 시시콜콜한 사회봉사까지도 기사화 하고 있다. 조중동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결국 보수주의 프레임이 삶 속에서 강화되어가고 있다.
 
물론 이 책은 약간의 한계를 갖는다. 일단 지은이가 이야기하는 보수, 진보의 관점은 철저하게 미국내에서만 유효할 뿐이다. 지은이가 진보라고 이야기하는 민주당 조차 우리나라 민주노동당에 비교해보면 전혀 진보라고 할 수 없다. 북유럽에 비해보자면 오히려 보수에 해당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진실을 알려고 노력하고 진실에 따라(때로는 왜곡된 진실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투표하기도 한다.
 
이 책은 점차 보수주의 프레임이 확산되어 가고 있고, 진보연구단체들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그리고 2007 대선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설득력있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보수화과정 속에서 중도 혹은 진보세력이 어떤 방향으로 시민들에게 접근해야 할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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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 - 초기의 작가들에서 20세기 SF까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김홍근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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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문학사를 쉽게 이해할 수 없을까 하는 고민중에 찾아낸 책이다. 영문학을 전공으로 할 것도 아니기에 학문적인 책 보다는 교양수준에서 다루고 있는 책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가끔씩 문학사나 문화지도 등을 잘 정리해내는 일본의 출판계가 부럽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 책은 아르헨티나의 작가 보르헤스가 미국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두껍지 않은 두께에 간략한 작가에 대한 평들을 겸하고 있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20세기 중반 작가들까지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20세기 후반의 작가들을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어느 정도 미국 문학사의 틀을 형성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다. 벤자민 프랭클린으로 부터 시작한 그의 이야기는 20세기 초반 작가들 존 스타인 벡, 유진 오닐 등에 까지 이르런다. 짧은 작가에 대한 소개와 그 작품이 가지는 의미들을 짤막짤막하게 소개해준다. 청교도주의의 호손과 환상과 탐미의 포, 초월주의의 에머슨과 소로, 위대한 시인 휘트먼과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을 대비하여 소개한다. 이 후 서부시대(당시 서부의 의미는 동부에 대한 반대의미로 미시시피강 유역을 이야기한다)를 대표하는, 미국식 언어를 구사한 효시로 평가받고 있는  마크 트웨인으로 이루어진다. 

사실 미국문학은 영미문학이라는 틀에서 이해되어왔다. 우리나라에서는 미국문학이라기 보다는 영문학의 한 갈래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때로는 영국작가와 미국작가간의 혼돈이 있기도 했다. 예를 들어 에밀리 디킨슨이라는 시인은 영국시인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문학은 유럽의 문학에 비애 약간은 떨어진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하지만 이는 문학이 반영하고 있는 시대상황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만큼 미국문학에 대한 배경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뿐만 아니라 미국문학이 세계문학에 끼친 영향도 있다는 점이다. 에드거 앨런 포의 탐미정신은 보들레르에 영감을 주었고, 휘트먼의 참여문학은 네루다에까지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그런점에 있어 우리에게 미국문학은 너무 거리가 멀었었다.

이 책의 의미는 바로 저자 서문에 잘 드러나 있다.

"문학 작품은 다양한 삶에서 열리는 자연스런 열매다. 따라서 우리는 작품 자체가 우리를 끌어당기는 매력에 충실하고자 한다. 물론 한 나라의 문학사는 그 뿌리에 해당하는 그 나라 고유의 역사와 무관할 수 없다. 그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관련 사항을 소개했다.

비록 이 책의 분량은 적지만, 두꺼운 문학사 책에는 잘 포함되지 않은 주제들을 포괄하고 있다. 예를 들어, 탐정소설, SF(공상과학소설), 웨스턴(서부문학)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시들도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10쪽~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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