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자 - 개정판 카프카 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한석종 옮김 / 솔출판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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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종자
프란츠 카프카 (지음) | 한석종 (옮김) | 솔출판사 (펴냄)




《33. "내 사랑하는 조카는 그의 부모로부터 쫓겨난 것이지요. 마치 우리가 기분 상한다고 고양이를 문밖에다 버리는 식으로 말입니다."》

17살의 카알 로스만은 35살의 하녀 요하나 브루머의 유혹에 넘어가 임신을 시켰다. 양육비의 부담과 스캔들을 피하기 위해 그의 부모는 카알을 미국으로 보냈다. 배에서 내리기도 전에 잃어버린 트렁크는 앞으로 그가 잃어버릴 다른 무언가를 상징하는 걸까?
화부의 억울함을 대변하려던 자리에서 운 좋게도 외삼촌 야콥을 만났다. 더구나 삼촌은 성공한 상원의원이다!
외삼촌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서류가 미비한 카알은 본국으로 송환되었을지도 모른다.
외삼촌 집에서 머물며 발코니로 내다뵈는 야경과 최상급의 미국식 책상,피아노,영어 습득을 위한 젊은 교수의 과외 등 많은 혜택을 누린다.
어느 날 외삼촌의 사업장에 방문한 폴룬더에게서 별장 초대를 받게 되었다. 외삼촌이 마땅치 않아 하는 것을 알면서도 폴룬더를 따라 나섰다. 이 호기심에 찬 외출은 아버지에 이어 외삼촌에게서 또 한번의 추방을 부르게 된다.


여객선에서 만난 화부의 억울한 사연에 귀기울이고, 폴룬더 씨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하고, 실수를 깨닫고 폴룬더 씨의 별장을 떠나려 했을때 그린 씨와 폴룬더 씨가 잡는 것을 냉정히 뿌리치지 못한다. 그리고 로빈슨과 들라마르쉬에게 어이없는 갈취를 당하면서도 냉정하게 그들과 갈라서지 못하고 한동안 끌려다닌다. 옥시덴탈 호텔의 엘리베이터 보이 일자리도 결국은 술에 취해 찾아온 로빈슨을 돌보다 해고 당하고 만다. 호텔에서 엘리베이터 보이라는 부속품인 그의 변명은 필요치 않다. 여객선에서 만났던 화부의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남의 얘기를 들어주고 배려하는 카알의 성품은 착하게 살면 복을 받으리라는 보편적 교훈과는 정반대로 그의 인생을 점점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호텔에서 쫒겨나 일자리만을 생각하게 되는 카알은 인생의 목표가 '실종'되어 간다.
들라마르쉬와 브루넬라가 동거하는 집에서 하인이 되기를 종용받으며 감금되기에 이른다. 몰래 탈출을 시도하다가 걸려서 정신을 잃도록 구타당하고 나서 새벽에 정신이 든 그는 건너편 발코니에서 공부하던 대학생과 대화를 하게 된다. 공부와 직업 중에 선택하라면 단연코 일이라는 대학생은 하인으로 일하라고 말한다.

《286. 카알은 의심할 여지없이 정확히 일을 해야만 주인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이 어떻게 준비되는지 나는 처음이라 몰랐어요. 다음번에는 더 잘하겠어요." 하지만 이야기하는 동안 그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생각했다. 그는 일 자체에 너무 사로잡혀 있었다. 브루넬다는 만족하여 들라마르쉬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카알에게 그 대가로 한 줌의 비스킷을 건네주었다.》

관계에서의 연속된 추방은 카알이 가졌던 정체성의 '실종'으로 이어지는 듯하다. 후반의 추가 단편에 실린 카알의 모습은 <실종자>초반부에 보였던 모습과는 판이하다. 외적인 모습은 제쳐두더라도 들라마르쉬와 로빈슨마저 떠나버린 브루넬라를 수레에 태워 이사하는 모습이나 오클라하마 극장에 일자리를 얻기 위해 채용 부스를 떠도는 모습은 '자아의 실종'이 분명해 보인다. 이제 그는 인간의 정체성이 실종된 오클라하마 극장의 부품인 '기능직 노동자, 니그로'이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솔출판사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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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망다랭 2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이송이 옮김 / 현암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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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망다랭2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 이송이 (옮김) | 현암사 (펴냄)​





<레 망다랭1>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혼란한 정세 속에서 갈등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레 망다랭2> 에서는 고뇌하고 번민하던 지식인들이 변절하거나 혹은 현실에 적응하거나 자기 파괴적인 모습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그들 곁에서 관찰자나 말없는 소극적 조력자로 등장하던 안이 여성으로서의 삶과 사랑을 찾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정신분석 학회 참석을 위해 미국을 방문한 안은 그곳에서 젊은 작가 루이스 브로건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토록 쉽게 사랑에 빠져든 이유는 뭘까? 영향력있는 남자 뒤브뢰유의 아내로 살아오며 많은 여자들이 그러했듯이 누구의 아내일 뿐, 안 자신으로 대해주지 않는 관계들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루이스는 안을 안 자체로 보며 그녀에게 여성으로서의 사랑받음을 일깨워 주었다. 안은 사랑받음과 동시에 살아있음을 느꼈다. 일년에 한번 만난다는 애틋함도 처음에는 한 몫 했을 것이다. 

사랑이 전부라는 루이스는 그녀에게 프랑스에서의 삶을 접고 자신과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안은 그럴 수 없다. 두개의 인생을 살려는 안과 기다림과 헤어짐이 싫은 루이스의 사랑의 끝은 이미 예견된 것인지 모른다.



소련의 수용소에 대한 폭로기사에 대해 같은 좌파이지만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앙리와 대의를 위해 침묵해야 한다는 뒤브뢰유는 의견이 갈리며 한동안 결별한다. 정의와 양심을 강조하던 앙리는 사랑하는 조제트를 위해 양심을 져버리고 게슈타포 끄나풀인 남자의 무죄 방면을 위해 위증하는 위선을 보인다. 자신에게 헌신적인 사랑(건강한 사랑은 아니었지만)을 보이던 폴에게는 보여주지 않은 너그러움을 조제트와 나딘에게는 보인다. 이 남자에게는 사랑이 참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란 생각이 든다.



앙리에 대한 사랑이 집착으로 번진 폴은 그 정도를 넘어서 망상과 편집증, 피해 망상까지 이르러 정신병원에 가게 된다. 이런 폴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하고 마음아파하던 안이지만 '더 이상 사랑하진 않는다'는 루이스에게 보이는 그녀의 태도는 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앙리와의 정치적 결별이후 별다른 활동없이 은둔적인 생활을 하던 뒤브뢰유는 정치적 미련을 놓지 못한다. 조국을 위함인지 체제를 위함인지 자신의 명성을 위함인지 모호하다. 

뱅상은 한 때 동료이던 세즈나크 마저도 대독 협력자라는 이유로 살해하는 냉소적인 사람이 되었다.

언론부터 장악하고 차지하려는 체제간의 완력 다툼속에 앙리는 레스푸아를 잃고, 도피하듯 이탈리아행을 결심해 보지만 남은 생애를 아무리 도피하며 살아도 결코 피난처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정면으로 받아들일 삶은 주변을 실망시켜가는 모습에서 달라질 수 있을까?



폴의 자살을 막으려 빼앗았던 약병으로 생을 마감하려는 안. 잃어버린 사랑때문도 아니고 전쟁의 위협도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 의욕도 없이 살아가는 삶 그 자체가 이미 죽은 삶이 아니었을까? 가족을 보며 다시 살아보리라 맘을 먹어보는 안.

모든 아픔과 슬픔속에서도 결국은 가족이 힘이 되는가. 주변인이 아닌 주인공이 되는 삶을 살아가길 바래본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출판사 현암사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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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흄 - 인간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자 한 철학자 클래식 클라우드 25
줄리언 바지니 지음, 오수원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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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흄 
줄리언 바지니 (지음) | 오수원 (옮김) | 아르테 (펴냄)​


에든버러는 흄의 인생에서 출발점이자 종착점이었다. 전체를 구성하는 종합적 학문이라는 관점에서 철학을 본다면, 철학자의 생애와 저작, 사상과 실천을 살펴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당시의 철학은 학문간의 경계를 넘나들었으며 오늘날 '과학'이라고 부르는 분야도 '자연철학'으로 간주되었다.

흄이 지향하는 철학은 언제나 인간 본성이었으며 정확한 이해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흄은 인간을 아는 것이야말로 다른 것들을 알기 위한 유일한 기초이며 인간을 알기 위한 유일한 기초는 경험과 관찰이어야 한다고 주장해 데카르트가 '인간은 사유하는 (생각하는)존재이다.' 라고 추상적 원리에 기본을 두는 것에 반발했다. 흄은 자연과학의 실험방법을 철학의 영역으로 도입한 셈이다. 흄과 데카르트 둘 모두 지식의 기반을 찾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실험이 없다는 것이 흄의 약점이었다.

​흄의 도덕 철학은 사소하지만 반복적으로 실천되는 습관이야말로 올바른 행동의 열쇠라고 보았다. 규범과 미덕들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수학은 증명이 필요하지만 철학의 중요 문제들은 경험적 추론에 바탕을 둔다. 원인과 결과라는 귀납법적인 사고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를 각각의 다른 사건으로 본다면 이 둘을 연결하는 것은 '상상'이며 지나친 상상은 오류와 모순과 모호함을 낳고,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는 것만 믿는다면 '회의론'에 빠지게 된다. 추론대신 경험으로 사건의 연속성을 만드는 것, 그래서 과거의 유사성이 미래에도 벌어지리라 예상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을 '습관'이라는 원칙뿐이라 보는 것이다. 그는 이성이 모든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는 합리주의의 관념을 거부했다. (이성을 반박하는 주장을 할 때 이성이 필요하다는 역설이 존재하긴 하지만!)



《88. 논증의 타당성을 판단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은 없다.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을 판단하는 주체는 결국 우리 자신이지만,이러한 판단에 도달하려면 다른 이들의 반론에 귀를 기울이면서 논쟁을 벌여야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를 철학의 기반으로 두고 싶어했던 흄은 인간이 관념을 어디서 얻는지 규명해야 했고, 모든 앎의 원천이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성은 감정의 노예이며 감정,정념에 따른 판단이 이성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흄은 신을 믿지 않았지만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신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계는 존재하는 전부가 아니라 우리가 아는 전부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것의 범위를 아는 것에 국한 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현대에 와서 흄의 주저로 인정받는 '인성론'은 안타깝게도 회의론을 구축해 놓았다는 오해를 받으며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영국사'가 베스트셀러가 되며 철학을 포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흄이 꿈꾸던 문필가는 철학을 버린 문필가가 아니라 철학적인 문필가였다. 인간 본성을 탐구하던 철학자 흄이 그리던 이상 세계는 사회주의를 방불케하지만 지상의 행복을 위해선 경제적 안정을 꼽았다. 다른 철학들에 비해 비교적 현실적인 부분이 많았고 그래서 그의 정언들이 구체적으로 다가왔는지 모르겠다. <데이비드 흄>. 낯선 이름이었지만 덕분에 철학에 한 발 다가설 수 있었던 책으로의 여행이었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출판사 아르테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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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대하여 톨스토이 사상 선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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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대하여
레프 톨스토이 (지음) | 이강은 (옮김) | 바다출판사 (펴냄)


러시아의 대문호로만 알아왔던 톨스토이에 대해서 감탄을 아낄 수 없는 독서였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세계관'이라는 것이 있고, 그 세계관에 입각한 글쓰기 때문에 독자 또한 세계관이 비슷한 작가의 글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인생에 대하여>를 읽으며 톨스토이가 바라보는 인생관은 여느 철학자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옳다 그르다의 문제가 아닌 어디까지나 자신의 인생관이긴 하지만.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이 진리에 대해서는 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지, 타인의 행복을 추구하며 살지는 않는다. 간혹 지나친 희생과 이타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들도 타인의 행복을 보며 자신이 행복감을 느낀다는 점에 대해서는 결국 자신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것과는 반대로 타인의 행복을 빼앗아 자신의 행복으로 갈취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닌 거짓 행복이라고 톨스토이는 말하고 있다. 내가 남의 행복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은 타인도 나의 행복을 빼앗을 수 있다는 점에서 행복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존재에 의해 언제든 박탈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종교에서 말하는 내세를 위한 삶은 현재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한다면 이 세상 모두가 개인의 행복만을 추구할 것이므로 그 또한 무의미 해진다. 
생명을 가진 모두는 자신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지만 결국은 서로 의존해 있기 때문에 관계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생명을 출생과 죽음 사이로만 인식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답이 없는 모순 속에서 답을 찾는 인생을 살아갈 것인가? 
종교와 철학, 과학과 지식. 인생의 행복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행복을 추구하며 산다." 그렇다면 산다는 것은 무얼까?
단순한 생명 활동을 넘어선 이성적 판단.

《51. 인생이 무엇이며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파도 위에서 아무런 방향도 없이 떠다니는 사람이 자기가 가야 할 방향으로,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와 다를 바 없는 일이다.》

​《78. 인간에게 이성은 하나의 법칙이며, 인간의 생명은 그 법칙을 따라 완성되어진다.》

《96. 사람은 동물성을 복종시키는 이성적 의식으로서, 이성적 의식에 복종하는 동물성으로서, 동물성에 복종하는 사물로서 세계를 인식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우리가 먼저 인식해야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이다.

​동물적 개체성은 생명의 도구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동물적 개체성은 행복을 추구하는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 자체를 포기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성적 의식으로 할 수 있는 감정적 활동은 사랑이 대표적이고, 사랑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있는 위대함 이기도 하다. 인간이라면 동물과 구별되어지는 이성과 사랑에서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한 통찰과 사랑이 전제된 사랑이 우선되어야 하겠지만 이룰 수 없는 동물적 개체의 행복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이 그래서 힘든 것이다. 동물적 개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의 동물적 행복을 위해 타인을 강제하고 착취하기에 위험해 질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죽음을 인식하는 사람은 없다.톨스토이는 그러므로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알지 못하는 것이기에 두려운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인간은 무지에서 오는 공포를 더 두려워하니 말이다. 동물적 죽음이 아닌 진짜 죽음은 진정한 생명의 행복이 더 이상 증대될 수 없을 때 뿐이다. 톨스토이는 인생을 생명, 사랑에 집중해 보고 있지만 이 둘 모두 '나와 다른 존재 간의 관계' 안에서 이성적 의식이 함께 일 때 더 빛난다.
행복에 이르기 위한 인생, 어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바다출판사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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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열린책들 파트리크 쥐스킨트 리뉴얼 시리즈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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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 김인순 (옮김) | 열린책들 (펴냄)


보통의 다른 단편들에 비교해도 현저히 짧은 단편들이다.
그럼에도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주는 철학적 깊이는 장편들과 나란히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깊이에의 강요]

《당신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직 깊이가 부족합니다.》

처음에는 듣고도 잊어버렸던 말이 여러사람들의 입에 오르자 깊이에 대한 그녀 자신의 평가를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다. 
남의 말을 특히 전문가라고 불리우는 사람의 말을 뜻도 모른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그렇게하면 덩달아 전문가처럼 보이고 지식이 풍부하게 있어보인다고 여기는 걸까? 그녀는 남들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자신의 작품에 확신이 없었을까?

《139미터 높이의 방송탑에서 투신한 그녀는 바람에실려 탑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넓은 귀리밭을 가로질러 숲 가장자리까지 날려 가 전나무 숲속으로 떨어졌다. 그런데도 그녀는 즉사했다.​》

바람에 날려갈 정도로 내면이 텅 비어버린 탓일까? 그 가벼움에도 즉사한 그녀의 사망 원인은 추락이 아닌 공허,자괴감 이었을 것이다. 비슷한 책 제목이 떠오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닿는다고 얘기했던 그 평론가는 그녀가 죽자 태도를 바꾼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그림은 변함이 없는데 상황에 따라 다른 해석이라니!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그 깊이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죽음으로까지 몰고가서야 느닷없이 보이는 깊이라니!


[승부]

외모로 그 사람의 실력을 짐작한다. 무식하리만치 단순함이 주는 대범함을 무언가 작전이 있을거라고 체스판에 모인 구경꾼들은 한마음으로 생각한다. 심지어 적으로서 체스를 두는 장 까지도.
도전할 수 있는 젊음이라는 무기와 연륜이 주는 진지함, 그리고 용기도 진지함도 없는 구경꾼.
어떤 모습으로 삶을 대할 것인가?
뒤엎고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젊음이 주는 특권일 것이다.
자신이 졌다는 표시로 킹을 쓰러뜨리는 것은 아주 무례하고 상스러운 행동이었다. 뒤늦게 체스 게임을 전부 뒤엎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무례를 저지르고는 그 젊은이는 눈길한번, 인사도 없이 자리를 떠났다. 이 승리가 장에게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이 되었다.그것을 피하기 위해 체스를 두는 동안 내내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를 낮추고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풋내기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다.장은 자신이 오늘 실제로는 패배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문학의 건망증]

감명깊게 읽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누구였더라? 무엇이었더라? 하는 건망증.

《69.곧 나는 좋은 책을, 그것도 아주 썩 좋은 것을 집었다고 깨닫는다. 그것은 완벽한 문장과 지극히 명확한 사고의 흐름으로 짜여있다. 결코 알지 못했던 흥미 있는 지식으로 가득 차 있고 굉장한 놀라움이 넘친다. 유감스럽게도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 책 제목이나 저자의 이름이나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

《72.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 언젠가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읽었었다. 지금 나는 알렉산더 대왕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면 어떠한가? 읽은 책 또 읽으며 나이 들어감에 따라 매번 다른 감동과 깨달음을 주는책도 있으니!
기억하고 외우기 위해 읽는 것은 아닐 것이다. 느끼고 깊이 생각하고 간접 체험해 본 것만으로 충만하지 않을까?
문학을 비롯한 독서의 건망증이 비롯 나뿐만이 아니라는 것에 위로가 된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이라는 말에 동의한다.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말에도!
독서가 아니라면 무엇으로 변화시킬 것인가.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출판사 열린책들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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