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엽 감는 새 연대기 3 - 새 잡이 사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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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잡이 사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김난주 (옮김) | 민음사 (펴냄)

3권의 세트 도서로 시선을 사로잡는 디자인의 <태엽감는 새 연대기>.

일시적 인기나 붐으로 잠시 읽히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20년 동안 꾸준하게 읽히며 사랑받아 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1권 도둑까치, 2권 예언하는 새를 지나 3권 새 잡이 사내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장소, 시대적 배경을 넘나들면서 전개되는 스토리는 등장 인물들 간의 연관성을 쉽게 찾기 힘들어 도대체 무라카미 하루키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언지 맥을 짚어내기가 힘들었다. 깨어있는 의식의 작가라는 그의 명성에 기대어 생각을 해보면서, 언급되는 노몬한 사건을 중심으로 이해해 보려하면 사라진 구미코와 사라졌다가 돌아온 고양이, 도오루가 우물을 통해 꿈과 현실의 경계없는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등의 설정이 쉽게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연관 있으리라는 느낌에 각 사건과 등장인물들을 연결해 보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도오루의 주변에 등장하는 여자들.

처음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의 전화를 시작으로 이웃집 소녀 가사하라 메이, 가노 마르타와 가노 크레타 그리고 본명 대신 넛메이라 불리는 여인까지, 도오루와 얽히며 미스터리는 계속된다. 그리고 미야와키 빈집(일명 목매다는 집)의 말라버린 우물과 도오루의 얼굴에 생겨난 푸른 멍은 세계 대전의 어두운 과거로의 시간까지 더듬으면서 현재로 이어진다.

주변의 다른 집들과는 다르게 유독 목매다는 집의 우물만이 말라버렸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이 나오지 않는 집. 그 집의 우물에서 얻은 푸른 멍은 도오루를 넛메이에게 인도하고 우물에 물이 차오르자 멍도 사라진다. 개인의 신비한 체험으로만 이해하기에는 '태엽감는 새 연대기'의 이야기는 방대하고도 방대하다.

폭력. 무라카미 하루키는 폭력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싶었을까?

세계대전. 총탄이 빗발치는 그 참혹한 전쟁터의 현장 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나들이와 가족 소풍의 장소로 이용하는 동물원도 피해갈 수 없었던 죽음. 어느날은 피해자였다가 다음날은 가해자가 되는 전쟁.

오빠인 와타야 노보루를 죽여야만 한다는 아내 구미코의 마지막 편지에는 조종당해왔던 과거를 끝내 벗어나지 못했던 소리없는 비명이 담겨있다.

가족에 의한 가스라이팅. 그것도 폭력일테니 말이다.

현실에서의 멍은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에서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넛메이의 아버지의 얼굴에 있던 것은 파란 반점이었던 것과 달리 도오루의 것은 파란 멍이라고만 표현되었던 것은 사건의 해결을 암시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미스터리 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넘쳐나는 비밀과 의혹들은 어려워도 책을 놓을 수 없는 매력이 충분했다.

조금의 내공을 더 쌓은 후에 반드시 재독하리라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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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 후회 없는 삶을 위해 죽음을 배우다
리디아 더그데일 지음, 김한슬기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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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까지, 눈이 부시게

리디아 더그데일 (지음) | 김한슬기(옮김) | 현대지성 (펴냄)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죽음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을 하는 '의사'가 쓴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의 경험과 사례를 들어 죽음을 준비하는 환자와 가족 그리고 공동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돌연사로 전혀 준비없이 맞닥뜨리는 죽음이 아닌, 치유할 수 없는 병이나 노환으로 인한 죽음은 준비하여 맞을 수 있을까?

주변에서 고액의 복권이 당첨되었다는 사람은 없어도 누구누구가 세상을 달리했다는 말은 드물지 않게 듣는다. 죽음은 생각보다 늘 가까이 있음에도 내 얘기는 아닌듯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듯이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막연히 먼 얘기일 거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사람들은 언제부터인지 죽음에 대한 얘기조차도 회피한다. 대화를 나누기에 불편한 주제가 된 것이다. 죽음이 가까운 사람일수록 죽음을 거론하는 것을 더욱 꺼린다. 그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가지로 나뉜다. 전쟁이라도 치를듯이 맞서 싸우거나 회피하거나.

둘 중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할 수는 없다. 개인이 살아온 역사는 개인의 가치관에 영향을 끼치며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도 그러할 것이다. 죽음을 예고받게 되면 분노와 좌절을 지나 인정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죽음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들은 안락사나 조력자살을 통해 죽음을 통제함으로써 공포에서 벗어나려 한다.

사람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

현실의 문제나 고통을 끝내고 싶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죽음이 그 끝을 주지 못한다면? 어떤 결과를 줄 지 알 수 없다는 그 불확실성이 죽음을 두려운 대상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삶에 대한 강한 집착은 살고 싶다는 욕구보다 죽음으로 부터 멀어지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고독사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외로운 죽음도 슬퍼할 일이지만 발견하는 데까지 시간이 걸려 죽음이 방치되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삶에 존엄이 있듯이 죽음에도 존엄이 필요하다.

가까운 시일 내에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 중에는 생명 연장 치료나 기구에 의한 연명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삶이 싫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삶 만큼이나 죽음도 존엄하게 맞이하고 싶은 것이리라.

같은 상황에 놓여진다면 나 역시도 존중받은 죽음으로 삶이 훼손당하지 않게 하고 싶다.

잘 죽는 비결이 잘 사는 데 있다는 것은 개인의 삶이 죽음 이후에 살아있는 자들에게 남겨질 기억과 평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뜻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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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134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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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하)

레프 똘스또이 (지음) |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펴냄)

부활(상)에서는 마슬로바와 네흘류도프, 두 사람의 얘기가 중심이 되어 흐르는 것에 비해 (하)에서는 시베리아로 유형을 떠나는 마슬로바를 따라 함께 길을 떠나는 네흘류도프가 느끼는 여러 감정과 생각들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억울한 옥살이와 말도 안되는 행정상의 오류들로 인한 수감, 가난과 무지에서 오는 민중의 범죄, 수감자들을 대하는 공무원들의 (기본적인 인간애 마저 배제된) 의무적인 행동 등 답답한 체증을 유발하는 요소가 한가득이다.

젊은 날의 욕망으로 까츄샤를 농락했던 네흘류도프는 그녀에게 용서받고 참회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찾아가며 청혼을 한다. 창녀로 살아온 세월은 그녀의 순수함을 앗아갔고 네흘류도프를 다시 보게 되며 잠자고 있던 원망은 다시 사랑으로 옮겨간다.

네흘류도프와의 사이에서 생겼던 그 아이가 죽지 않았더라면 까쮸샤의 삶은 달랐을까? 어미로서 가지는 모성애가 좀 더 책임감 있는 삶을 살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해본다.

네흘류도프의 반성의 시작에는 자기 도취적인 마음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반성과 참회의 마음은 진심이 되고 죄책감에 괴로워 한다.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으면서 괴로움에 자기 분열로 망가져가는 고전 속 다른 주인공들과 달리 네흘류도프의 반성은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다. 마슬로바의 상고를 위해 열심히 움직이고 그녀와 같은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의 억울함과 가엾은 처지를 개선해 주기 위해 돈과 인맥을 활용하며 기꺼이 희생한다. 한 번 베푼 선행은 입소문을 타고 모두 네흘류도프의 도움을 바란다. 진심이 아니었다면 수고스러운 그 일들을 끝까지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슬로바 역시 네흘류도프와의 재회 후 변화한다. 아름다운 외모를 이용해 남자들을 이용의 수단으로만 보던 과거와 달리 간호장과의 불미스러운 일을 오해받을까 속상해하고 네흘류도프의 인생을 망치지 않으려 그의 청혼을 거듭 거절한다.

사람들에게 있어 도덕의 기준은 뭘까?

자기가 속한 집단과 사회의 다수가 옳다고 여기며 행하는 것들이 아닐까? 그래서 처음에는 순수했던 까쮸샤가 창녀로 사는동안 부끄러움을 모르고, 네흘류도프 역시도 귀족계급의 타성에 젖어 큰 죄의식없이 방탕한 삶을 살았던게 아니었을까 싶다. 마찬가지로 감옥의 소장과 간수들도 그들 내부의 규칙을 따르느라 편법과 비인간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일수도.

부활을 직접 읽어보기 전까지는 단순히 마슬로바와 네흘류도프의 사랑과 참회의 얘기가 전부인 줄 알았다. 레프 똘스또이가 인생의 전환점을 지나 노년에 쓴 작품이어서 그런지 후반부로 갈수록 종교적인 그의 사상이 많이 녹아있다.

민중의 가난과 무지가 민중의 탓이 아니라 소수에 집중된 부에서 비롯된 계급사회의 문제라는 지적과 공무를 집행하는 공무원들의 인간애가 결여된 의무, 종교적 신념 등은 네흘류도프의 생각과 입을 빌어 레프 똘스또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 모른다.

사랑을 위해 희생하려던 네흘류도프. 그리고 사랑을 위해 그 희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까츄샤. 사랑은 희생 위에서만 완성되어야 하는가...

타락했던 그들의 영혼은 희생과 사랑으로 부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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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인문학 수업 : 뉴노멀 - 대전환의 시대, 새로운 표준에 대한 인문학적 사고 퇴근길 인문학 수업
김경미 외 지음, 백상경제연구원 엮음 / 한빛비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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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 인문학 수업.뉴노멀

백상경제연구원 (편저) | 한빛비즈 (펴냄)

퇴근길 인문학 수업 시리즈의 마지막권.

"드디어 끝났다"고 하기엔 강의 하나하나 재미있게 읽어서 아쉬움은 남지만 꾸준히 읽어온 기간이 3개월 남짓 되어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대전환의 시대,

새로운 표준에 대한 인문학적 사고

표지글

뉴노멀. 새로운 표준.

이 시대를 살아가며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와 각종 정보는 나처럼 한 템포씩 늦은 사람에게는 따라가기도 숨찰 정도다.

발전하지 않고 제자리 걸음하는 것만으로도 도태되기 쉬운 시대에 나다움을 잃지 않으며 새로운 표준에 적응해가는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나를 포함한 다수의 많은 이들이 인문학에서 그 답을 찾으려 하고 있다.

온라인으로 대상, 시간, 장소에 구애받지않는 폭넓은 소통과 연결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그 깊이는 가늠할 수 없다. 손쉽게 다양하고 전문적인 정보를 취할 수도 있지만 진짜에 몸을 숨긴 가짜가 진짜인 양 목소리를 높이는 뉴스와 정보도 넘쳐나기 때문이다. 알기 위해 누비는 정보의 바다에서 알아야 당하지 않는 묘한 아이러니가 생긴다.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은 긍정과 희망으로만 그려지지 않는다. 매번 AI가 주제로 화두에 오를때마다 가장 뜨겁게 거론되는 것은 일자리 문제다. 생계와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하고 청년실업, 노년실업 문제가 현재에도 걱정이기 때문이다.

모든 기술은 반드시 부작용을 동반한다. 부작용과 단점만을 우려해 다가오는 미래를 부정하거나 역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가오는 미래를 걱정하기보다는 러다이트 운동에도 불구하고 기계화를 막을 수 없었던 산업혁명을 돌아보며 현명하게 대처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을 위한 기술이 사람을 소외시키지 않도록.

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맞이하게 된 수명의 연장에도 마냥 기뻐하기만 할 수가 없다. 생산 활동은 하지 못하면서 소비 활동은 계속되는 현실은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저출산과 수명연장으로 인한 고령화 사회의 문제점을 복지를 통해 해결하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점차 줄어드는 청장년층의 감소는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비혼이 증가하며 1인 가구가 증가하는 것을 단지 경제적인 문제로만 보아야 할까? 개인의 가치와 삶이 우선시 되는 분위기에서 가족을 위한 희생과 봉사보다 나를 위한 삶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기 위한 비혼을 단지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해석하는 것도 문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제되는 것들이 유독 우리 문화에는 많은 것 같다. 부모가 자식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소유로 여기고 상하관계를 넘어선 주종관계를 이루는 모습을 흔치 않게 본다. 따르지 않으면 불효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며, 요즘 뜨거운 이슈이기도 한 가스라이팅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관계다. 더구나 자식이 미성년자일 경우에는 법의 보호가 끼어들 여지가 현저히 적다. 가족 간의 갈등을 불효와 패륜으로만 몰고가는 시각에서 벗어나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하는 법을 배워야할 때다.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불편을 감내해야 하지만 결코 그것이 당연하다거나 차별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소수가 존재하지 않는 획일적인 의견이나 정체성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는 할까?

말로는 의견의 "다양화를 추구한다"고 하고 "너와 나의 다름을 개성으로 존중한다"고 하면서 행동으로는 손가락질하고 다름을 틀림으로 규정하면서 틀안에 끼워 맞추려한다.

무조건적인 인정이 관용이 아니듯 그럴듯한 걱정으로 포장한 비난도 진심이 아닐때에는 그 어느 흉기보다도 날카로운 비수일 뿐이다.

"382. 우리가 혐오하는 사람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믿지 않는 것이다" 약자와 소수의 편에 서는 것이 항상 정의는 아니다. 다만, 표현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매너를 지키고 인신공격을 하는 등의 본질을 벗어난 비난과 방법을 접었으면 한다.

본문에서는 범죄자의 인권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그 부분에서 나는 필자와 의견이 다르다. 지켜져야 하는 인권은 '다른 인권을 침해하지 않았을 때'라고 말하고 싶다. 지켜져야할 것을 지키는 울타리가 있어야 진짜 보호받고 지켜져야할 나머지가 안심할 수 있다. 소수와 다수의 문제가 아닌 '가치'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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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33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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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상)

레프 똘스또이 (지음) |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펴냄)

<부활>은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과 함께 거론되는 일이 잦은 작품이다. "죄와 벌"은 아직 읽지 못했고 <부활>은 이번에 처음 읽었다. 똘스또이의 전작 "안나 까레니나"는 읽었지만 그 작품과 분위기는 다르다. 방탕하게 살던 젊은날과 다른 노년의 삶이 <부활>에 영향을 끼친것으로 보여진다.

부활은 꺄쮸샤와 네흘류도프, 두 사람의 이야기가 중심 축이 되어 흐른다.

순수했던 까쮸샤가 네흘류도프 공작에게 범해지고 버려지면서 창녀 마슬로바로 타락해가는 과정과 역시 순수했고 정직하며 희생 정신이 강했던 네흘류도프가 자신보다 타인을 신뢰하게 되고 같은 계급과 부류의 이들과 어울리게 되면서 타락해가는 과정 중 우연히 보게 된 까쮸샤를 통해 회개하려는 이야기가 상권에서 펼쳐진다.

젖도 못 먹고 죽을 수도 있었던 어린 생명이던 까쮸샤를 양녀로 들였던 이바노브나 지주 자매는 임신으로 배가 불러오던 그녀를 내친다. 십여년을 한지붕 아래에서 살아왔던 정이 필요가 불필요로 변하자 매몰차게 버린 것이다.

마슬로바를 대하는 네흘류도프의 마음은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오가기를 반복한다. 너무나 변해버린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죄책감으로 괴롭지만 그런 죄책감을 느끼는 자신에게 감동하며 창녀인 그녀와 결혼하는 것으로 용서를 구하려 한다.

살인죄로 기소된 마슬로바를 재판부도 배심윈단도 살해의도는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절차상의 실수로 <유죄이나 살해할 의도는 없었음>이라는 한 줄을 답변서에 붙이지 못해 그녀는 유형에 처해진다. 절차상의 실수 아닌 실수, 법의 구멍은 가진것이 없는 자와 신분이 미천한 자들에게 유독 융통성도 관용도 없다.

마슬로바가 수감된 감옥에는 짓지 않은 죄로 잡혀있거나 정당방위의 이들이 많고도 많았다. 의붓딸을 겁간한 남편을 죽인 죄로 들어온 노파, 불이 날 때 있지도 않았는데 방화범으로 몰린 모자, 증명서가 기한이 넘었다는 이유로 감금된 자들 등 진실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없고 모두 절차와 과실만을 탓하며 바로잡을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똘스또이가 부활을 통해 전하고 싶은 것은 뿌리깊은 계급사회와 사회적 병폐가 아닌가 싶다. 지주 자매의 집에서 쫒겨나 하녀로 일하며 살아보려던 까츄샤가 결국 매춘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구조는 그 시대 민중의 현실이기도 하다.

창녀라는 처지는 수치스러워하지 않으면서 죄수라는 처지는 수치스러워하는 까쮸샤를 일반적인 시선으로 본다면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같은 부류들과 지내다보면 가치관과 도덕관이 그 집단내의 기준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본다면 모든 것을 그녀 탓으로만 돌릴수는 없다.

자꾸만 찾아오는 네흘류도프로 인해 묻어두었던 상처가 다시 깨어나며 원망도 분노도 다시 일어난다. 네흘류도프가 회개하려는 것처럼 마슬로바도 순수했던 영혼으로 회귀할 수 있을까? 그 어느 때보다 하권이 궁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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