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자 생리학 인간 생리학
루이 후아르트 지음, 류재화 옮김 / 페이퍼로드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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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생리학

루이 후아르트 (지음) | 류재화 (옮김) | 페이퍼로드 (펴냄)

산책자는, 그러니까 진정한 소요자는 생각을 많이 하고, 말은 적게 한다.

-<산책자 생리학>본문 201페이지

하루 24시간이 모자라 '하루가 26시간이었으면, 아니 30시간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 나만은 아닐테다.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가며 살아도 할 일은 줄어들지 않고, 시간은 늘어나지 않으니 잠을 줄여가며 버텨내는 일과는 피로만 늘어갈 뿐이다. 그래서일까? '산책'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여유와 휴식'이지만 왠지 나와는 상관없는 먼 이야기로만 느껴진다.

루이 후아르트가 얘기하는 산책과 산책자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어쨌거나 루이 후아르트 덕분에 책을 통한 산책을 하고 난 느낌이다. 물리적인 산책은 아니었지만 정서적인 산책을 하고 나니 '여유'란 것에 대한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고나 할까? 바쁘게 살아가는 일상의 빡빡함의 이유가 사실은 일의 누적과 시간의 부족이 아닌 내 맘의 여유부족이 아니었는가 하고 말이다.

고전문학이나 과거 철학자들의 글들을 읽으며 거의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몇 세기(혹은 그보다 더 긴 시간)라는 시간의 차이가 별 의미없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루이 후아르트의 <산책자 생리학>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산책과 빈둥거림의 차이를 꼬집고, 산책하며 만날 수 있는 여러 인간의 부류와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려내듯 말한다. 지금이라도 거리를 나가보면 루이 후아르트가 <산책자 생리학>에서 묘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산책에 대해 얘기하고 있지만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수 많은 에피소드와 변수, 주의점 등 지금 귀기울여 들어봐도 유익할 이야기들이 루이 후아르트의 유머가 더해져 지루할 틈이 없다.

사람은 산책할 시간이 없어도 키우는 반려견을 산책시키기 위해서는 시간을 내는 사람들, 생계를 위해 도시로 몰려들던 사람들이 산책을 위해 공원 주위의 숲세권의 거주를 선호하는 일 등이 최근에 생긴 변화라면 변화일 수 있겠다.

진정한 산책은 되도록 혼자하거나 부득이한 경우에만 둘이어야 하고 그 이상이 되면 산책이 아니라는 루이 후아르트의 말에 공감한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살피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으며 걷기만 하는 것 역시 산책이 아니라는 말에도.

"바쁘다 바뻐", "빨리 빨리"를 입버릇 처럼 달고 살면서 정작 그 바쁨이 누구를 위함이었는지 무엇을 위함이었는지 잊을 때가 많다. 언제인가부터 사라져간 산책이 코로나19로 인해 강제로 할 수 없게 되면서 더 소중하고 갈구하는 것이 되었다. 자의로 하지 않는 것과 타의에 의해 멈춰버린 것의 차이는 그 소중함을 느끼는 데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바쁘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멈췄던 밤산책을 다시 시작해봐야겠다. 인간은 두 발 달린 깃털 없는 자, 그리고 외투 입고 담배 피우며, 산책하는 자(본문 32페이 지)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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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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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에리크 뷔야르 (지음) |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펴냄)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함락의 현장.

역사를 만들었으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름없는 군중의 외침이 생생히 울려 퍼진다.

-<7월 14일> 뒷표지글 중에서

프랑스 혁명은 남의 나라, 과거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시험에 나오니까 외우고 길고 긴 역사의 무수히 많은 사건들 중의 하나로 그저 먼 타인의 얘기였다. 성인이 되어서 다시보는 역사는 내 나라든 남의 나라든 국경없이 반복되는 아픔이 있었다.

무력 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권력자들의 무력은 자신들만의 타당성을 내세우며 손에 쥔 권력과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했다. 소위 있는자들의 우는 소리는 역사도 깊다. 얼마전 읽은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에서 합당한 임금 인상과 안전을 위한 처우 개선을 주장하는 광부들에게 죽는 소리를 하는 탄광 소유주들은 더이상 없을 수가 없는 '진짜 없는 자'들의 목숨값으로 자신들의 풍요를 지속시켰다. 과연 소설 속, 과거 역사 속 이야기이기만 할까.

언제인가부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라는 말이 일상에서 흔히 쓰이고 있다. 누구는 힘 있는 부모 덕에 얼마 일하지 않은 직장에서 퇴직금으로 50억을 받고, 누구는 등록금을 벌어보겠다고 나간 일터에서 목숨을 잃고도 변변한 보상과 위로도 받지 못했다. 이름이 있어도 기억되지 못한채 잊혀지고 지워진 이름들은 얼마나 많을까.

역사는 몇몇의 위대한 위인들의 업적과 활약으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전쟁의 명장 뒤에는 그를 따르며 이름없이 죽어간 병사들이 있었고 수많은 조력자들이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자신들의 불편을 감수하지 않으려 타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일은 지금 여기에도 분명히 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 혁명과 전쟁이라는 폭력적인 방법으로 목소리를 내던 일들이 시위와 촛불이라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응은 반대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듯 보인다.) 2016년 10월에 시작되어 2017년 4월에 이르는 6개월간의 촛불 시위는 촛불 혁명이라 불리며 피 대신 빛으로 쓴 역사가 되었다.

이름 없는 군중의 외침이란 이런 것이지 않을까.

바스티유를 둘러싸고 벌어진 7월 14일 하루 동안의 이야기. 그 폭발적인 하루의 원인은 오래된 날들의 억울함과 고통의 누적이었을 것이다. 행정가와 실무자들의 핵심은 쏙 뺀 수박 겉 핥는 정책 브리핑은 1789년 그때나 2022년 지금이나 판에 박은 듯 똑같다. 본문을 읽으며 지금과 다르지 않다고 느껴지는 대목들이 많았다.

p44. 추상적 주제를 거만한 태도로 난해한 전문 용어를 써가며 세 시간 동안 이야기해~(중략) 핵심 문제는 아예 건드리지도 않았다.

p59. 나라는 파산 지경인데 지주들은 불평거리가 없었다.

바스티유를 습격한 시민들을 향한 총알에 쓰러져간 목숨 중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살기 위해 빵을 달라던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총알이었다. 왜 나는 이 대목에서 1980년 5월 18일이 떠오르는가.

소설 <7월 14일>에는 특별한 주인공이 없다. 이웃의 아무개가 군중을 이루는 한 사람이 되어 역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의 우리, 이름없는 군중은 어떤 역사를 써야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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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3
버지니아 울프 지음, 공경희 옮김, 정희진 분류와 해설 / 열린책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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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음) | (옮김) | 열린책들 (펴냄)

의식의 흐름이라는 수식어 만큼이나 버지니아 울프에게 붙는 또 하나의 꼬리표, 페미니즘 작가. 그러나 정작 그녀는 자신이 페미니즘 작가로 불리우는 것을 원치 않았었다고 한다. 여성의 차별에 대한 부당함을 말하고 싶었다기 보다는 그저 남자와 여자를 떠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얘기가 하고 싶었던 것일지 모르겠다. 진정한 페미니스트는 약자라는 이유로 여성이 보호받고 면책의 특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에 받는 차별이 없는 것이어야 한다. 무조건적인 배려와 양보, 보호도 차별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역차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평등도 기대할 수 없다.

버지니아 울프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자기만의 방>.

도서관 이용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여성들의 처지로 시작해 남성의 소유 아닌 소유물로, 명령을 거부하면 방에 감금되어지고 폭력에 시달리는 사실이 별다른 사건 사고랄 것도 없이 평범함이던 시대들. 고양이에게 조차 있는 영혼이 여성에겐 없다는 무시와 여성이 쓰는 글을 누가 읽어주겠냐는 비아냥 속에서도 자의식을 가진 여성들의 고뇌와 번민 속에 오늘날이 되었다.

글을 쓰는 행위가 여성에게는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쓰고 읽는 것을 감추어야 했던 여성들이라고 해서 그것들에 대한 욕구마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자신을 드러내고 당당하기를 원했던 여성들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이유로 많은 질타와 모욕을 감수해야만 했다.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여성들은 똑똑함을 인정받지 못하고 되바라짐의 대표 명사처럼 되었다. 외국의 여성들에게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나혜석과 전혜린 등 그런 여성들의 예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아를 찾는 것이나 자아를 드러내는 것과도 통할지 모르겠다. 버지니아 울프는 '살아있음'을 쓰는 행위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성이 자유로워지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돈과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자기만의 방>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것들을 통해 버지니아 울프가 진정으로 원했던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가 아니었을까? 현대를 살아가며 무엇에도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런 자유가 존재할 수는 있을까?

울프가 현재에 다시 글을 쓴다면 거기에 보태어 시간도 필요하다고 할지 모르겠다. 돈을 벌기 위해 시간과 맞바꾸는 일은 자기만의 공간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줄어드는 아이러니가 되어 버렸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그 돈을 위해 시간을 지불함으로써 정작 하고 싶은 일을 할 시간이 없는 아이러니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공감하는 일이 되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 자유를 저당잡히는 삶이라니...

그녀의 글에선 왠지 인간의 외로움이 느껴진다. 굳이 여성이 아니더라도 군중 속에서 익명으로 살아가는 불특정 다수가 자유를 위해 돈과 개인적인 공간이 필요한 것은 이제 남녀 모두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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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버 - 어느 평범한 학생의 기막힌 이야기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 지음, 한미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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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버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 (지음) | 한미희 (옮김) | 문예출판사 (펴냄)

누구나 당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우리 중 한 사람에게 일어난다면, 그건 더는 개인의 일이 아니야.

-<게르버> 본문 262페이지

중학생 때였나 고등학생 때였나 그때쯤 꽤나 인기 있었던 영화가 있었다. 흥행의 성공은 책으로 이어져 여주인공의 사진이 도서표지가 되어 책도 불티나게 팔렸었다. 바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이다.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당시 청소년의 마음도 대변하는 듯했다.

<게르버>를 읽으며 그때 읽었던 그 책이 떠올랐던건 중년의 나도 한때는 게르버의 나이이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르버의 고민과 분노와 걱정이 이해되는 것 또한 그때의 나도 같은 고민과 분노를 품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쿠퍼신이라 불리는 쿠퍼 교수의 선 넘는 권력 남용은 분노를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현실의 우리에게는 장영란법이 생기면서 껄끄러운 관계가 어느 정도는 개선되었지만 부담으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 것은 아니다. 물론 쿠퍼가 물질적인 무언가를 바라고 휘두른 권력은 아니다. 그러나 학교 안에서만 절대신처럼 사용할 수 있었던 권력을 상대적 약자인 학생과 학부모를 협박하기 위해 사용했다는 측면에서 그에게는 선생이라는 직함이 아까울 뿐이다. 본디 우리가 선생을 선생님이라 높여 부르는 이유는 나이를 불문하고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부족한 부분을 메워주는 귀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쿠퍼가 자신이 맛 볼 승리감을 위해 차셰를 궁지에 몰아넣고, 열리지도 않은 교수회의를 들먹이며 게르버에게 구류 처분을 내리는 대목에선 있어서는 안될 선생을 실제로 이미 여럿 겪고 보아온 터라 분노까지 더해진 답답한 가슴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책임과 의무는 뒤로한채 학교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휘두르는 권력에 취한 쿠퍼를 보면서 '이런 류의 일들이 과연 학교만의 문제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직장과 이런저런 이름의 사회 단체, 정치적 집단 등 주변에서 부딪히게 되는 쿠퍼신은 의외로 적지않다.

같은 반 벤다의 죽음에도 친구들의 애도는 없었다. 슐라이히가 당한 모욕에도 친구들은 침묵했다. 소극적인 반항이 있었지만 불의에 대항할 힘을 모으지 않았고 쿠퍼라는 권력 앞에 술라이히가 항복하고 말았다. 피해자가 사죄해야 하는 모순이 과연 현실에는 없을까?

소설 <게르버>의 결말은 내게 충격이었다. 신문에 실린 몇 줄의 기사가 게르버의 선택에 대한 이유를 다 설명해주진 못한다. 어떤 한 사건을 1분도 안되는 시간에 뉴스로 보는 것과 1시간짜리 시사프로그램에서 보는 것이 다르듯이.

리자를 사랑했던 다른 남자들과는 다른 사랑을 주고 싶었던 게르버, 아버지를 사랑해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던 게르버. 리자 또한 게르버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를 이해하려하진 않았고 아버지도 아들을 아꼈지만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아들을 재단했을 뿐이었다.

게르버의 최후 선택은 졸업시험 낙제에 대한 부담감이 아니라 그들의 기준에 맞춰진 학교와 세상에 합격할 의지와 용기를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한 학교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었다가 맞게된 현타는 고민과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한때 게르버였던 사람, 현재 게르버 연령대의 자녀를 키우고 있는 사람 모두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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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하 열린책들 세계문학 5
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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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하)

제임스 미치너 (지음) |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펴냄)

작가와 편집자의 이야기를 담아내었던 상권에 이어 하권에서는 비평가와 독자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의 시점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책이라는 공통의 분모를 가지고 있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책에 대한 애정과 접근법의 방식은 차이를 보인다.

각 장의 화자를 만나게 될 때마다 그들이 어떻게 책을 처음 만났고 그들의 인생에 어떻게 책이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는지 사연을 알아가는 재미가 퍽 컸다.

강의실 벽면에 그려놓은 아트레우스 가의 계보도를 활용한 칼 스트라이버트의 강의법은 실제의 강의에서 사용되어도 꽤 효과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지 마라. 대신 글로 발표하라.> 글로 써서 남기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본문 309페이지), 출판사는 위대한 작품을 출판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쓰레기 같은 글들을 파는 것일세(본문 328페이지). 등 비평가 칼 스트라이버트를 통해 제임스 미치너의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티모시 툴과 제니 소어킨의 재능을 일찍 알아보고 이들을 편집자 이본 마멜에게 소개해준 칼의 안목은 높이 살 만하지만 요더를 향한 질투와 비평가로 만족하지 못하고 작가로 등단한 무리수에서 천재라 불리운 지식인도 피해가지 못한 인간적인 욕망을 보았다. 그러나 요더를 향한 독설이 단순히 개인적인 질투가 아니라 문학이라는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정체되지 않고 나아가는 변화를 바라고 있었음이기에 이해도 된다.

보통의 사람들은 주로 독자의 입장이고 독자의 시선에서 책을 읽는다. 우연히 읽게된 책 한권으로 인생책을 만나기도 하고 애정하는 작가의 책들을 모조리 섭렵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한다.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티모시 툴의 미완성 유작 원고를 출판하려는 사연에서는 얼마전 읽은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이 떠올랐다. 아마 이본 마멜이 칼 스트라이버트와 제니 소어킨의 협조를 받아 티모시 툴의 유작 원고를 출판하였듯이 그런 과정을 통해 <최초의 인간>도 세상의 빛을 보았을 테니 말이다.

루카스 요더가 독자들에게 받은 편지의 내용은 마치 이쪽 세상 독자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속 시점은 작가, 편집자, 비평가, 독자이지만 이들의 얘기를 보는 나는 이들의 얘기조차도 독자의 시점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책을 바라보는 시각, 접근법은 모두 다르지만 책을 향한 진심은 모두가 같지 않았을까? 소설 속의 그들도, 소설 밖의 독자인 나도.

※네이버독서카페 리딩투데이의 친구들과 함께 읽는 함유도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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