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서곡


   누가 오는데 이처럼들 부산스러운가요.

   목수는 널판지를 재며 콧노래를 부르고
   하나같이 가로수들은 초록빛
   새 옷들을 받아 들었습니다.

   선량한 친구들이 거리로 거리로 쏟아집니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더 야단입니까?
   나는 鋪道에서 현기증이 납니다.

   삼월의 햇볕아래
   모든 이지러졌던 것들이 솟아오릅니다.
   보리는 그 윤나는 머리를 풀어 헤쳤습니다.

   바람이 마음대로 붙잡고 속삭입니다
   어디서 종다리 한놈 포루루 떠오르지 않나요
   꺼어먼 살구남기에 곧
   올연한분홍「베일」이 씌워질까 봅니다.

   詩 : 노천명



황주리 - 식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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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03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鋪道에서 현기증이 납니다.
... 포루루
... 올연한분홍「베일」

아, 나는 봄시에 현기증이 납니다. ^^;

플레져 2005-04-03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웨이브님, 목련이 곧 필 거에요. 생각만해도 아찔 해요 ^^;;
 

슬픔이 나를 깨운다

 

 

슬픔이 나를 깨운다.

벌써!

매일 새벽 나를 깨우러 오는 슬픔은

그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슬픔은 분명 과로하고 있다.

소리없이 나를 흔들고, 깨어나는 나를 지켜보는 슬픔은

공손이 읍하고 온종일 나를 떠나지 않는다.

슬픔은 잠시 나를 그대로 누워 있게 하고

어제와 그제, 그끄제, 그 전날의 일들을 노래해준다.

슬픔의 나직하고 쉰 목소리에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슬픔은 가볍게 한숨지며 노래를 그친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을 할 것인지 묻는다.

모르겠어...... 나는 중얼거린다.

 

슬픔은 나를 일으키고

창문을 열고 담요를 정리한다.

슬픔은 책을 펼쳐주고, 전화를 받아주고, 세숫물을 데워준다.

그리고 조심스레 

식사를 하시지 않겠냐고 권한다.

나는 슬픔이 해주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내가 외출을 할 때도 따라나서는 슬픔이

어느 결엔가 눈에 띄지 않기도 하지만

내 방을 향하여 한발 한발 돌아갈 때

나는 그곳에서 슬픔이

방안 가득히 웅크리고 곱다랗게 기다리고 있음을 안다.

 

詩 :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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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달 2005-03-31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즘 고독과 친한데... 슬픔도 종종 찾아오지요.. ^-^

마태우스 2005-04-01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낚시하는 사람이 괜히 슬퍼 보입니다....

stella.K 2005-04-0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는데요?^^

플레져 2005-04-01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달님, 고독과 슬픔이 어깨동무 하는 사이지요? ^^
마태우스님, 낚시하는 모든 사람의 뒷모습은 슬퍼보여요, 제게는.
스텔라님, 님도 멋있어요 ^^
 

 먼 산 먼 길

  어린 시절 텅 빈 마루에서 홀로 잠이 들면
  호랑이 한 마리 산에서 내려와 나를 물고 갔다 한다
  고요한 한낮 지나 서서히 해가 저물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사방을 두리번거리면
  호랭이한테 물려갔다 돌아온 게지
  식구들은 웃으며 말하곤 했다
 
  내가 잠이 든 다음
  살그머니 수풀을 헤치고 내려온 호랑이 한 마리
  시내를 건너고 신작로를 가로지르고
  비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살짝 열린 대문을 지나
  햇살 눈부신 저편 마루에서 곤히 자고 있는 나를
  저윽이 바라본 것일까
 
  뜨거운 호랑이 아가리에 물린 채
  몇 개의 산과 들을 뛰어넘는 동안에도
  나의 깊은 잠은 끝없고
  오직 지나가는 바람만이 귓가에 윙윙거릴 뿐
 
  제 집 동굴에서도 여전히 잠만 자는 나를
  호랑이는 이리 굴려보고 저리 굴려보고
  혀로 핥아도 보았다가
  너무 심심한 나머지 다시 돌려주기로 한 것일까
 
  호랑이 입에 물려
  집으로 오는 동안
  화르르 져내리는 꽃잎 속에 아슴아슴 먼 길이 떠오르고
  마악 대문을 열고 마실 나서는 어머니가
  에그머니나 놀라 외치는 소리에 옛다 내던지고
  호랑이는 다시 먼 산으로 가버린 것일까
 
  지금도 잠이 들면
  나를 데려가기 위해 다가오는 호랑이의 나직한
  발소리가 들린다 내 귓가를 맴도는 더운 숨결 내 몸에 와 닿는
  타는 눈빛 내 잠 속에서 한껏 아가리를 벌리고
  단숨에 나를 삼켜버리는
  저 호랑이

  詩 : 남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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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9 0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 부질없는 시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슬퍼할 수 있으랴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시로서
무엇을 버릴 수 있으며
혹은 세울 수 있고
허물어뜨릴 수 있으랴
죽음으로 죽음을 사랑할 수 없고
삶으로 삶을 사랑할 수 없고
슬픔으로 슬픔을 슬퍼 못하고
시로 시를 사랑 못한다면
시로서 무엇을 사랑할 수 있으랴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詩 : 정현종



밤새도록 시만 읽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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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05-03-18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이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나는 것은...

마태우스 2005-03-18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현종 씨 참 시 잘쓰는 분이죠? 제가 시에는 문외한이지만 이분의 명성은 알아요. 왠지 시의 역할을 부정하는 듯한 이 시, 참 마음에 드네요^^

2005-03-18 17: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레져 2005-03-18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노래 좀 불러주세요, 복순이언니님 ^^ 저두 무척 좋아하는 노래에요. 김광석의 노래 중에서...
마태우스님, 저는 이제서야 그분의 시를 읽는답니다.
 

민들레 압정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 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 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 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詩 : 이문재



* 위 사진은 하도 많이 올려서 민망하기까지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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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5-03-17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의 눈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저렇게 작은 것에서 우주보다 큰 진리를 잡아내는 걸 볼때마다 마냥 부럽습니다. 퍼갈께요.^^

파란여우 2005-03-17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들레를 노래하는 시인의 정서와 개망초꽃의 사진이 묘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플레져 2005-03-17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 때 마다 좋아해주셔서 감사해요, 새벽별님.
저두 감탄을 했다지요. 시인의 눈을 파는 가게는 없겠지요? 잉크냄새님.
파란여우님의 댓글도 이 시와 잘 어울립니다.

icaru 2005-03-18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좋지만 사진 좋으네요^^
이문재 시인하면... 김형경이 생각나요... (제가 너무 가십에만 강한 걸까요~ )
제가 갖고 있는 민들레 올려요~ 저도 민들레 얘기 나올 때마다 꺼내보는 사진인데.. 민망할까요^^;;



플레져 2005-03-19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코 민망하지 않아요. 고마워요, 복순이언니님...^^ 가끔 저두 써먹을래요~

icaru 2005-03-19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사진도 이 시에 어울리죠오~ ??

플레져 2005-03-19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상입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