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내게로 왔다 3 - 내가 사랑하는 젊은 시 시가 내게로 왔다 3
김용택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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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가본다. 저자 김용택 시인의 촌평 내지는 감상부터 적어본다.

“유하는 〈말죽거리 잔혹사〉 〈쌍화점〉등 영화를 만든 감독이기도 하다. 배짱도 좋다. 영화판이 어떤 곳이라고 거기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아마 유하는 가슴속에 잉잉거리는 호박벌 떼를 키우고 있는지 모른다. 호박벌 떼를 가두어놓고 있으니, 속이 얼마나 잉잉거리고 복잡하고 뜨겁겠는가. 그는 그런 자기의 속을 황홀한 감옥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지옥

- 유하


정신없이 호박꽃 속으로 들어간 꿀벌 한 마리

나는 짓궂게 호박꽃을 오므려 입구를 닫아버린다

꿀의 주막이 금세 환멸의 지옥으로 뒤바뀌었는가

노란 꽃잎의 진동이 그 잉잉거림이

내 손끝을 타고 올라와 가슴을 친다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감옥에 갇혀 운다


.................................................................


윤제림 시인의 시를 옮겨본다.


[가족]

 

새로 담근 김치를 들고 아버지가 오셨다.

눈에 익은 양복을 걸치셨다.

내 옷이다. 한 번 입은 건데 아범은 잘 안 입는다며

아내가 드린 모양이다.


아들아이가 학원에 간다며 인사를 한다.

눈에 익은 셔츠를 걸쳤다.

내 옷이다. 한 번 입고 어제 벗어놓은 건데

빨랫줄에서 걷어 입은 모양이다.


저자의 멘트를 본다.

“이 시에 대해서 할 말 없다. 이 시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은 각자가 알아서들 하고, 할 말들 다 각자 알아서 하라.”

그래서 내가 몇 마디 덧붙여본다. 이 시의 1연과 2연의 공통점은 ‘딱 한번’이다. 한번씩 밖에 안 입은 옷들이다. 시인의 서운한 마음? 아니다. 그런 건 안 보인다. 그냥 정겹다. 여유롭지 않은 삶 속에서 어렵게 장만한 옷 한두 벌,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온 식구들 거다. 같은 상황도 해석하기 나름이고, 소화시키기 나름이다. 그래서 시의 제목이 ‘가족’이다.


이 책의 저자 김용택은 시인이자 선생이다. 선생은 2008년도에 정년퇴직했다.

책 띠지에 있는 저자 사진은 그의 나이를 다시 보게 만든다. 동안이다. 웃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다. 진짜 웃음이다. 1948년생이니까 64살?

정년퇴임 스케치를 일간지 문화면에서 본 듯하다. 그가 가르쳤던 초등학생이 성년이 되어서(시인이 되었다던가?)퇴임식에 참석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던 것 같다. 산골에서 선생을 하면서 문학에 빠져들어 14년을 혼자 공부했다. 1982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21인 신작 시집’ 『꺼지지 않는 횃불』에 「섬진강」외 8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그 후 여러 권의 시집, 산문집을 출간했다.

산골마을 초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단순히 ‘지도’라고 표현하기엔 그의 역할이 컸다)순박하고 부드러운 그 마음속에 시 씨앗을 심어주었다. 아이들이 쓴 시를 읽어보고 가슴이 찌르르 하던 기억이 있다. 김용택의 책상엔 로댕의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있다.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사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인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누구나 살고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그는 안다. 그는 자존심과 열정, 그리고 의지로 충만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이 시집은 그가 평소 아껴온 시들을 모으고 그만의 감상평을 붙인 시선집 이다.

앞서 출간된 『시가 내게로 왔다』 1,2권은 우리나라 근대 서정시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김소월, 이용악에서 박용래와 김수영, 서정주와 고은을 거쳐 장석남, 유하에 이르기까지 근대 초창기 시에서부터 근, 현대 시사(詩史) 100년에 빛나는 아름다운 시들을 두루 엮었다.

이 책은 그 시리즈 3권이다. ‘내가 사랑하는 젊은 시’라고 되어 있다. 저자의 아는, 모르는 시인후배들의 시작품이리라. 이 책에서처럼 현시대에서 시를 자아내는 젊은 시인들의 목소리를 들어봄직하다. 저자의 감상평은 덤이다.



‘엮으면서’중 일부를 옮긴다.

“모아진 시들을 다 읽고 나서 세상을 둘러보니 나는 딴 세상에 와 있었다. 세상이 얼마나 달라져 있는지, 답답한 굴속에서 막 빠져나온 후련함을 맛보았다. 젊은 시인들의 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나는 쉽게 말해왔다. 우리 시가, 우리가 어디에 와 있는지도 모르고 쉽게도 젊은 시인들을 외면해왔다. 추억은 사람들을 게으르게 하고 이것저것 쓸데없이 ‘보수’하게 만든다. (‥‥) 젊은 시인들의 시 속에서 나는 근대를 넘어선 현대의 짙은 음영을 본다. 자본이 만든 도시의 음울하고 잔인한 음모가, 그 검은 손길이 인간을 넘보는 불안과 긴장의 냄새를 맡는다. 정말 너무나 난감해서 감당하기 힘든 문명 이전 같은 이 야만의 시대에 낯선 시들이 찾아와 나를, 내 온몸을 떨게 한다. 시인에게 꿈은 욕이다. 그러나 이 어인 헛것인가. 저기 저 강굽이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흐르는 물 위로 늘어져 물을 보며 새 눈을 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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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어당김 Attraction
안진환.이현주 편저, 나폴레온 힐 외 원저 / 생각의나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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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원제인 Attraction 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을) 끄는 힘, 매력, 끌어당김, 흡인 등이다.

‘끌어당김’을 책의 제목으로 번역했다. 원저자들의 면모는 화려하다.

나폴레온 힐 - 세계최고 거부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학을 수립하였고, 일생동안, 강연, 연구, 저술활동을 통해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성공철학의 거장이 되었다.

로버트 콜리에 - 자기 치유법과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에 관한 글을 써서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어네스트 홈즈 - 종교과학과 관련된 영적 운동에 깊은 관심을 보여 많은 사람들에게 관련 이론을 설파한 베스트셀러 작가.

월레스 워틀스 - 세계적인 사상가와 여러 종교를 연구한 후 수많은 성공철학서를 저술하여 자기계발 분야를 대표하는 선구적 인물이 됨.

찰스 하넬 - 철학, 심리학, 인과법칙, 삶과 인간성에 관한 과학, 마음에 관한 과학 등에 대한 글을 썼고, 이 모든 분야를 하나의 철학체계로 정립하여 우리의 일상생활에 바로 적용 할 수 있도록 했다.


책은 세 파트로 되어 있다.

1) 우리를 성공으로 이끄는 ‘끌어당김’을 위하여

2) 잠든 우리를 일깨우는 ‘끌어당김’을 더욱 당기며

3) 우주와 신의 에너지를 불러오는 ‘끌어당김’을 믿으며


이 책은‘자기계발서’이다. 성공을 향한 힘의 출처를 ‘우주와 신의 에너지’를 불러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주와 신의 에너지’는 자칫 오해의 소지 내지는 거부 반응이 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냥 순수하게 받아들임이 좋을 듯하다. 어차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와 우주는 에너지로 채워져 있고, 둘러싸여있다. 그 에너지 중 내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에너지를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 나쁜 일은 아니리라.


“어디서나 빛이 나는 사람이 있다. 시련이 다가왔을 때 찾아가면 진정한 도움을 주는 사람, 누구에게나 지혜와 통찰력과 능력을 지녔다고 인정받는 사람 말이다. 요란하게 말로 떠들지 않아도 누구나 그가 훌륭한 품성과 뛰어난 능력을 갖췄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작고 사소한 일을 해도 그 과정과 행동에서 자연스럽게 훌륭함이 배어난다. 또 상황만 갖춰지면 큰일도 해낸다.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물론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공의 원동력은 우리가 요청하는 만큼의 능력만 우리에게 준다. 우리가 작고 보잘것없는 일을 행하려고 하면 작고 보잘것없는 능력을 주고, 뛰어난 성공을 하려고 하면 거기에 필요한 뛰어난 능력을 준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든 것은 내면에 있던 생각이 표현된 결과물이다. 훌륭하게 행동하려면 무엇보다 명료하고 진실하게 생각해야 한다. 고결하게 행동하기 바란다면 고결한 생각을 해야 한다.” - 윌리엄 엘러리 채닝


“성공에 이르는 길은 ‘끌어당김’의 다른 이름인 ‘생각’에 있다. 내면이 차 있지 않은 사람은 훌륭한 생각을 할 수 없고,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내면적으로 성숙해질 수 없다. 아무리 좋은 교육을 받고 아무리 많은 책을 읽어도 생각하고 사색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깊이 생각해야만 우주와 신과 조화로운 합일을 할 수 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끌어당김’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이 말을 피상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쉽지만 진정으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사람들은 흔히 외부의 어딘가에서 우주와 신을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우주와 신과 만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주와 신은 분명히 그 안에 있다. 이는 곧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힘과 에너지가 이미 당신 내면에 들어 있다는 의미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바라는 목표를 이루거나 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힘과 능력을 얻을 방법을 애써 고민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저 그 내면의 힘을 올바르게 활용할 방법만 알면 된다. 진실을 볼 줄 아는 우리 내면의 힘을 꺼내 사용하라. 그러면 반드시 보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 그 진실에 맞는 삶을 살면, 내일은 더 많은 진실을 보게 된다.”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성공’이라는 단어가 자주 반복되어 나오긴 하는데, 정작 그 ‘성공’의 실체에 대해선 설명이 없다는 것이다. 뭔가 붕 떠있는 느낌이다. 하나하나 들어보면 좋은 내용이긴 하나 조합이 잘 안 된다. 구심점이 없는 듯한 느낌도 든다. 그러나 원저자들에게서 내 삶에 힘과 도움이 되는 한 마디씩만 참고해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모두 좋은 이야기, 그러나 막상 내 삶의 현장에선 실행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점검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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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대를 꽃에 비하리
전민정 지음 / 창조문예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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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발레리가 시인(詩人)을 표현하길, “정신이 살짝 엿본 데 불과한 것을 그들의 말로 사로잡는 일” 이라고 했다. 혹자는 “시(詩)는 소중한 삶의 노래며, 자연의 신비에 대한 찬미, 또한 우리가 꿈꾸는 세계의 아름다운 표상이다”라고 표현했다.

전민정 시인의 시는 참 맑고 깨끗하다. 탁하지가 않다. 시를 읽다보면 그대로 그림이 그려진다. 시를 따라가다가 발에 툭하고 걸리는 걸림돌이 없다. 

“문득 둘러본 세상이 / 시로 가득 합니다 / 서둘러 가을 낙엽을 밟으며 / 산길을 걷노라면 / 발등에 스스로 떨어지는 이름들이 / 내 안에서 길을 만듭니다.”  (시집 ‘서두’에서..부분)

 시인의 눈에는 모두가 시의 재료요, 향기이다. 때론 발밑에 만들어진 길보다, 내 안에서 만들어진 길이 더욱 길고, 깊다. 우린 그 안에서 모두 길가는 벗이자, 나그네이다.

“아직은 작은 그릇 / 투박하기 그지없는 상념들..”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상념의 편린들은 시인이 걸어온 삶의 여정과 걸어가고 싶은 길들을 밝게 비춰주고 있다.

 

“위로 위로 솟아서 / 하늘과 가까운 너 / 나는 너에게 귀 기울여 / 천상의 소리를 듣는다 //
 긴 겨울 모질게 견딘 후 / 두 손 모으고 솟아오른 겸손의 기도 //
 그러나 어찌하랴 / 삶의 빈 공간 채우지 못하고 / 마디로 남겨진 내 상처들 //
 변치 않는 푸르름의 길을 따라 / 사색의 깊은 숲에 이르면 //
 댓잎소리에 잠시 멈춘 발길 / 나는 긴 호흡을 한다”      (‘대나무 숲으로 간다’ - 전문)
왜 아니랴, 누군들 마디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마디 덕분에 다시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산등성이와 어깨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 빈 공간이 시인은 내내 아쉽다. 그래서 이렇게 시를 쓰면서 그 공간을 채우고 싶은 모양이다.

“생각만 해도 / 왜 이토록 간절해질까 / 네 뒷모습을 보며 / 기도하는 나날 //
 고열에 들떠 응급실에 실려 갈 때 / 달려가는 맨발 / 하늘은 온통 노란 절망 이었다 /
 그런 나를 책망하시던 음성 / 주님은 늘 너와 함께하셨다 //
 이제는 까치발을 올려도 닿지 않을 만큼 /
 훌쩍 커버린 아들아 //
 숱한 세월이 지나가도 / 네가 손을 뻗으면 / 
 나는 항상 그 곳에 있다.”         (‘나는 항상 그곳에 있다’ - 전문)
시인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응급실에 실려 가던 아들을 염려하던 엄마의 마음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주님의 마음이다. ‘숱한 세월이 지나가도 / 네가 손을 뻗으면 / 나는 항상 그 곳에 있다’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위안을 받는다. 아들이 엄마의 사랑을 의심 안하듯 시인 역시 어떤 위기상황과 절망적인 여건에서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 또한 시인의 손을 굳게 잡아 주시리라는 것을 믿고 있다.

“친구가 그리운 날에는 / 남한산성에 오릅니다 /
높게 쌓은 돌탑위에 / 내 마음도 하나 얹어 두고 옵니다 /
계곡의 젖은 흙내음 맡으며 / 우리가 함께 걸었던 길은 /
오늘도 그대로입니다//
길가에 흘러내린 돌 하나 /
무너지는 내 마음인양 눈에 밟혀 /
슬며시 집어 다시 올려놓습니다 /
어디서 무얼 하며 사는지 /
안부 전하듯 //
슬프게 내려앉은 산 그림자 기척에 /
너무 오래 무심했던 속내 들킨 듯 /
쭈뼛쭈뼛 산을 내려옵니다.”            (‘너 그리운 날이면’ - 전문)
 살아가며 누군가 문득 그리운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삶은 퍽이나 건조하리라. 그것은 아직도 지나친 자기애와 아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른 시인의 시집에서 보았던 시가 한 편 그려진다. 시인이 지하철역에서 20여년 만에 반가운 얼굴을 마주쳤다. 그러나 어쩌랴..서로 손 한번 맞잡아보곤, 언제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없이 그리 스치고 지나갔단다. 이젠 다시 만날 기회와 시간이 정말 얼마 안 남았는데 하는 마음과 함께..
‘슬프게 내려앉은 산 그림자 기척’..석양이 지는 모습은 슬프다. 발길도 빨라진다. 어두워지는 것은 잠깐이기 때문이다.

“봄날은 / 햇살을 안고 / 내게로 다가오는 / 아픈 사랑이다 //
 움 돋는 기다림으로 삭은 / 나를 날려버리고 //
 시샘하는 바람 다독여 / 햇살을 부른다 //
 목련이 흔들리는 어느 날 / 모든 것 다 잃는다 해도 /
 지금 내 봄날은 / 행복한 오후다.”   (‘지금 내 봄날은’ - 전문)
봄은 누구에게나 희망이 될 수 있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도 기지개를 펴며, 숨을 고르는데 난들 그리 못할 이유가 없다. 봄은 무엇인가 기대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 느낌을 꽃이 먼저 전해준다. 지금 내가 가진 것, 내가 사랑했던 존재들이 사라져간다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현재라는 시간이다. ‘내 봄날은 간다.’가  아닌, 내 봄날은 행복한 오후라고 이름 붙이는 순간. 행복은 나와 함께 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 마주서면 / 내가 가진 것은 검불뿐 / 안다고 믿었던 것들은 /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 목발 딛고 일어서서 걸으려하면 /
 세상이 수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 내 절망은 거친 바람 소리 같았습니다. //
 마주치는 수많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 이유도 계산도 조건도 없이 /
 오로지 듣기만 하는 귀가 되도록 / 높은 곳을 향해 두 손을 모았습니다.//
 살아가면서 눈뜨는 지혜 / 굳게 닫았던 마음의 문고리 / 이제야 조금씩 열어봅니다.
                                          (‘이제야 조금씩’ - 전문)
때로 우리 몸이 아파서 환자가 될 때 배울 것은 겸손이다. 그렇지 못하고 몸 뻣뻣 마음 뻣뻣한 채로 살아간다면, 참으로 딱한 일이다. 시인은 ‘죽음의 문턱에서..검불하나 밖에 가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놓는다. 검불하나가 나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한발 한발 내딛는 것이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힘든 걸음을 걷던 낙타의 등위로 새 한 마리 지나가며 떨어뜨린 깃털하나가 그를 무릎 꿇게 한다는 말이 있다. 검불하나의 위력이 그렇게 나타날 때도 있지만, 그 실체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하찮은 존재. 결국 내가 소중하게 생각되었던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시인은 깨닫는다.

‘말을 하는 것이 지식의 영역이라면, 듣는 것은 지혜의 특권이다.’ 라는 말이 있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며 ‘오로지 듣기만 하는 귀’가 나의 주체가 되는 삶을 계획한다. 그리고 그동안 닫았던 마음의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글쓴이의 심상(心想)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장르는 시(詩)라고 생각한다. 전민정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기억 속 편린들과 삶을 바라보는 겸허함, 믿음, 내려놓음 등을 느낄 수 있다. 좋은 시를 읽는 것은 우리 마음 자락, 감성지대를 개척하는 길이기도 하다.
시인의 다음 시집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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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용법 - 한 편집자의 독서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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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책은 자신이 보지 못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맡는다.
감성에는 지적인 자극이 반드시 필요하다. 삶이라는 감각을 질료로 하여 지적인 자극 끝에 감성이 만들어진다.”

원초적인 질문을 해본다. 책은 왜 읽는가?
저자의 말을 옮겨본다. “책은 인류 진화의 산물이다. 책은 나날이 변화하고 있다. 그것은 고착되는 법이 없이 살아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곁에서 호흡하며 몸을 뒤척이고 있다. 특히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책이 주는 균형 감각이다. 한 두 권의 책을 읽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책을 섭렵하고 얻은 지식은 지혜가 되어 삶을 보는 균형감각을 준다. 여기에서 말 그대로 건전한 비판의식이 싹튼다. 또한 고전이나 문학작품은 조악한 이론이 보여주지 못하는 삶의 진경들을 펼쳐 보인다. 이것은 사이비 이론, 남이 불러준 이론, 한두 권의 책에 치우친 이론을 ‘물리치는 독서’를 가능케 해준다.”
이 말엔 전적으로 동감한다. 나는 다른 북 리뷰에서 독서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피력하면서 비슷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좀 덜 잘못하고, 덜 후회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삶을 책에서 배우고 있다.”

저자 정은숙은 대단한 책 마니아이다.
26년차에 이른 편집자이자 〈마음산책〉대표.  전주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1985년 편집자로 출판계에 입문했으며, 2000년〈마음산책〉을 창업하여 오늘까지 책에 대한 고민과 사랑을 껴안고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책이 지닌 아우라를 극대화하면서도 너무 무겁지 않은, 정보전달의 효능은 최대화하면서도 그 모양새와 품위를 다시 보게 되는 책을 펴내려고 애쓰고 있다. 책을 만드는 일은 책을 읽는 작업의 연장이다. 원고를 읽으며 완성될 책의 형태를 꿈꾸듯, 세상의 책들을 읽으며 새로운 삶을 꿈꾸었다. 책과 떨어져 살 수 없는 운명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렇듯 책 모서리를 접고 포스트잇을 끊임없이 붙인결과, 『책 사용법』 을 쓰기에 이르렀다.

1992년〈작가세계〉를 통해 문단에 데뷔한 후 시집 『비밀을 사랑한 이유』(1994), 『나만의 것』(1999)과 편집자 세계를 그린 『편집자 분투기』(2004)를 펴냈다.  

우린 보통 ~사용법, 매뉴얼에 무관심한 편이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하는 신기한 제품이 아닌 이상 잘 읽지도 않거니와, 정작 필요해서 찾으려면 그땐 어디다 두었나? 찾느라고 법석이다. 이 책의 제목은 책 사용법이다. 책을 사용하기 위해선 책이 곁에 있어야한다. 책도 없고, 안 읽어도 사는데 별 지장 없으니 책 사용법도 필요 없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럼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우선 책 사용법을 한 번 읽어보자. 그리고 책과 친구해보자.
“이 책에서 나는 책의 사용에 대한 많은 길들을 보여주고 싶다. 특히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읽었던 책들의 이야기를 많이 삽입하여 독자가 직접 그 책들을 찾아보게 되기를 바란다. 그런 과정에서 어슴푸레 우리 책읽기의 외연을 넓힐 수 있기를 감히 꿈꿔본다. 나는 이 책읽기를 통해, 또 책을 사용하면서 얻은 많은 진실을 전해보려고 행간에 꿈을 싣는다.”

책의 기능이라는 타이틀 글들 중 ‘치유로서의 책’에선 저자가 무엇이라고 하나 들어본다.
“책이 병을 낫게 한다. 나는 주위에서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을 몇 보았다. 어느 직장인은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안 아픈 곳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다 대도시를 떠나 지방에 정착하고 긴 시간 열차를 타고 다니면서 ‘노자’를 읽기 시작했는데, 신통하게도 그 많은 병들이 말끔히 나았다고 한다. 맑은 공기와 성큼 가까워진 대자연도 분명 큰 영향을 미쳤을 테지만, 나는 그가 절박한 심정으로 읽은 ‘노자’가 마음에서 싹튼 병을 낫게 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 자신 또한 이렇게 믿고 있다.”

“현실의 두꺼운 벽을 느낄 때마다 나는 책을 펴든다. 현실 도피? 아마 그런 점도 조금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고 많은 현실 도피 방법보다 더 쉽고 또 현실 복귀도 빠르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책을 잘 읽기 위한 계명’ 중 하나를 옮겨본다.
“책읽기의 멘토로서 고전만 한 책이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고전을 읽지 않고 독서의 기초를 말할 수는 없는 법이다. 건조한 현실을 위한 책들을 의무적으로 봐야 했을 때 나는 그 책읽기가 끝나자마자 고전을 펴들어 균형을 잡으려 노력했다. 즉 책으로 책을 해독하는 행위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런 고전 읽기를 통해 나는 책읽기의 상위한 층위들을 파악하면서 또 다른 책읽기의 차원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 책에 대한『로쟈의 인문학 서재』이현우의 짧은 글이 책 뒤표지에 실려 있다.
“인생은 짧고 책은 너무 많다. 거의 무한이다. 책에 대한 사랑은 덩달아 무한한 사랑이고 무한에 이르는 사랑이다. 이 책에는 저자가 오랜 세월동안 ‘꼬깃꼬깃’ 품어온 책 사랑이 다림질을 해놓은 것처럼 단정하게 펼쳐져 있다. 알맞게 재단해놓지 않았다면 무한히 펼쳐졌을 사랑이다. 아마도 기침만큼이나 숨길 수 없는 사랑이었으리라.
하여 『책 사용법』을 『책 사랑법』으로 고쳐 읽는다. 연애에도 가이드가 필요하다면, 이 책이 바로 그런 가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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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용기 도모생애교육신서 11
폴 틸리히 지음, 차성구 옮김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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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용기는 올바른 두려움과 마찬가지로 완벽한 생명력의 표현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존재의 용기는 생명력의 기능이다. 생명력이 감소하면 결국 용기도 감소한다. 생명력을 강화한다는 것은 존재의 용기를 강화한다는 의미이다. 신경과민적인 사람들과 신경과민적인 시기에는 생명력이 부족하다. 그들의 생물학적인 실체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몸은 마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마음은 몸을 따라간다. 따라서 심신(心身)은 함께한다.
옛사람들은 ‘용기’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렸을까? 용기는 하나의 윤리적 실체(reality)지만 인간 실존의 전 영역에, 그리고 존재 그 자체의 구조 속에 뿌리 내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용기를 윤리학적으로 이해하려면 먼저 존재론적으로 고찰해야한다고 한다.

저자 폴 틸리히는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린 철학가이며 신학자이다. 1886년에 독일에서 출생. 1912년에 루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나치에 의해 교수직을 박탈당한 1933년까지 독일 여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다. 라인홀드 니버를 통해 뉴욕에 있는 유니온 신학교에서 1933년부터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한 후 퇴임하여 하버드 대학교의 석좌교수로 초빙되었다. 1962년에 하버드 대학교를 퇴임하고 시카고 대학교로 옮겨 1965년 사망하기 전까지 신학을 가르침.

폴 틸리히는 그를 따르던 신학자들에게서 ‘신학자들의 신학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러한 호칭은 사실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국내의 시인 한 사람이 시를 읽지 않는 사회 분위기와 읽히지 않는 시만 쏟아내는 시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시는 더 이상 시가 아니다. 시인들끼리 주고받는 메시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저자는 신학자들끼리 주고받는 차원에서 벗어나 기독교 신학과 철학의 많은 부분에 접근하지 못하고 관련성을 찾지 못하던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했다.
저자는 새롭고 역동적인 신학용어들을 창조하여 현대 사회가 지닌 불안의 위기를 진단했고, 신학을 학문에서 해방시켜 현대적인 담론 속에서 새로운 청중과 새로운 관련성이라는 두 영역에 전달해주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책은 1950년대에 예일 대학교에서 테리 재단(Terry Foundation)의 후원으로 열린 몇 편의 강연내용으로 시작되었다. 이때는 미국문화와 종교생활이 가장 역설적인 시기라고 한다. 교회의 출석률이 급증하고 교회 건물을 신축하는 분위기가 미국 전역에 전염병처럼 확산되었다. 타임(Time)지는 이를 미국의 종교적인 ‘거대건물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저자는 이 당시 미국이 누리고 있는 신앙적인 부흥의 깊이나 영성에 대해 그리 확신하지 못했다. 이를 저자는 “종교속의 상실된 차원”이라고 표현했다.

저자는 ‘용기’라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자기긍정, 즉 자아가 자신을 긍정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자기 긍정이라고 한다. 용기와 대립되는 것은 두려움과 불안이다. 저자는 불안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운명과 죽음의 불안〉〈공허함과 무의미함의 불안〉〈죄의식과 정죄의 불안〉등이다.

불안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신학과 의학 사이에 있는 협력의 원리 가운데 몇 가지는 존재론적 분석에서 이끌어 낼 수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원리는 실존적인 불안은 의사가 의사로서 관심을 기울일 사안 - 비록 그가 충분히 그것을 알고 있어야하지만 - 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모든 유형의 신경과민적인 불안은 목회자가 목회자로서 관심을 기울일 문제 - 비록 그가 충분히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하지만 - 또한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목회자는 실존적인 불안을 그 자체 속으로 이끌어 들이는 존재의 용기에 관한 질문을 제기하고, 의사는 신경과민적인 불안을 제거하는 존재의 용기에 관한 질문을 제기해야한다고 한다. 저자는 불안증상에 대응하는 의사의 기능과 역할보다 목회자의 그것에 비중을 높이 두고 있다. 따라서 온전한 목회의 기능은 자신의 기능은 물론이고 의학적인 기능까지도 포함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극히 타당한 이야기긴 하나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책의 마지막 챕터는 “용기와 초월”이다. ‘용납됨을 용납하는 용기’라고 되어 있다. 용기는 또한 비존재의 실제에도 불구하고 행하는 존재의 자기 긍정이라고 한다. 그것은 개별적인 자아가 포괄적인 전체의 일부로서 혹은 개별적인 자아성 속에서 자신을 긍정함으로써 비존재의 불안을 떠맡는 행위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용기는 언제나 위험을 내포하게 된다. 용기는 존재의 힘이 필요하다. 그 힘은 비존재를 초월하는 힘이어야 한다. 비존재는 운명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경험되며, 공허함과 무의미함의 불안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죄의식과 정죄의 불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한다.

저자는 마르틴 루터를 예로 들고 있다.
루터는 로마 가톨릭 체계속의 객관적이고, 양적이고, 비인격적인 요소들을 공격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위해 싸웠다. 그에게서 나타난 확신의 용기는 기독교 사상사에서 최고조에 달한다. 루터의 모든 작품, 특히 그의 초기 저작들은 그와 같은 용기로 가득 차있다. 그는 계속해서 트로츠(trotz), 즉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가 경험한 모든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서 자기 긍정의 힘을 이끌어냈다.  

저자는 ‘존재의 용기’에 대해 책 말미에 이렇게 표현했다. 이 책의 내용을 매우 깊고,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의 용기는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때에 나타나신 
         

                                하나님 안에 뿌리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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