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떠나는 철학여행 하루에 떠나는 시리즈
김영범 지음 / 페퍼민트(숨비소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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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정식으로 학문의 영역으로 자리를 잡기 전에 철학을 하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에서 철학에 매료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숙명처럼 짊어지고 갔었을 그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마땅히 내려놓을 자리를 못 잡았던 것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함께 해봅니다.

 

철학은 여전히 내게 어려운 영역이자 학문입니다. 그러나 철학을 모르고 인문, 사상(思想)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한쪽 눈으로 겨우 겨우 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철학의 여행을 떠나기 위한 가이드북, 로드 맵의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가히 철학의 계보 또는 족보 책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있겠습니다.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 현대까지의 시간 여행을 통해 수많은 철학자들과 만나게 해주고 있습니다. 책 제목이 ‘하루에 떠나는 철학여행’이라고 해서, 1박2일이 아니라고 해서 결코 가볍게 넘길 책은 아닙니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마치 바캉스용 로드맵처럼 ‘한 장으로 보는 철학 계보도 (A Map of Philosophy)’ 까지 제공해주고 있지만 당일치기로는 좀 무리입니다. 철학가의 이름이 거론되는 책들을 읽게 될 때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 누구의 영향을 받고 어떤 동기에서 철학의 대열에 들어섰는가. 어떤 생각이 그를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가를 확인해보는 자료가 되겠습니다. 그림과 사진이 곁들여져서 읽기에 지루함이 덜하더군요.

 

철학의 원조 역할을 하는 그리스 철학을 이야기하다보면 단골로 등장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미토스에서 로고스로~”입니다. 미토스(mythos)는 ‘신화’지요. 로고스(logos)는 ‘이성’이구요. 인류의 정신사가 신화에서 이성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비로소 철학이 탄생되었다고 이해를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신화와 철학이 배다른 자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완전 분리를 시킬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리스 철학은 과학적인 면과 신비주의적인 면이 뒤섞여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자 김영범 교수는 ‘들어가는 글’에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놀라운 것, 경이로운 것 앞에서 인간의 정신이 사유를 작동하기 시작한다고 가정할 때 이 시점이 철학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나는 ‘인간의 깊은 내면에 불씨가 당겨져서 뇌의 한 부분이 활성화되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최초의 철학은 오늘날 터키 지역에 해당하는 밀레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밀레투스 학파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는데, 하나는 자연(physis)을 발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설명방식보다는 이성을 통해 비판하고 논쟁했다는 것입니다. 탈레스에 얽힌 에피소드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한 것 한 가지 소개해드립니다. 사람들이 탈레스에 대해서 “뭐 하러 그런 짓거리를 하는가? 자기 앞가림도 못해 빈한하게 살고 있는 꼬락서니하고는.....” 사실 철학은 출발할 때부터 먹고 사는데 크게 도움이 안 되는 분야이긴 했습니다.(지금도 별 차이가 없다지요?) 철학은 아무 쓸모도 없다는 듯,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비난하자, 탈레스는 비수기에 올리브 짜는 기계를 헐값에 임대했습니다. 사람들은 또다시 비웃었지요.

 

“올리브가 나지도 않는 계절에 기계는 뭐 하러 임대할까?”

 

탈레스는 묵묵히 비난을 감수했지요. 그리고 계절이 바뀌어 올리브를 수확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리브는 전례 없는 대풍이 들었고, 덩달아 올리브 짜는 기계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지요. 결과는? 탈레스는 떼돈을 벌었지요. 요즘 언어로 재테크에 성공한 셈입니다. 탈레스는 세상의 비난을 감수하며 올리브의 작황을 여러 가지 데이터를 가지고 예측했던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를 철학자도 마음만 먹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해석하면 무리겠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원리를 탐구하며 살아가는 철학자들이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입증한 셈이지요.

 

 

 

이 에피소드는 박지원의 풍자소설 허생전(許生傳)을 생각나게 합니다.

 

주인공인 허생은 10년 계획을 세우고 글공부에 몰두하지만 7년째 되 어느 날 가난한 살림에 지친 아내가 허생 에게 도둑질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 오라고 구박을 합니다. 이에 허생은 글공부를 중단하고 장안의 갑부인 변씨를 찾아가서 1만 냥의 돈을 빌립니다. 허생은 1만 냥으로 시장에 나가서 매점 매석으로 독점시장을 형성하여 큰돈을 벌면서 무역이 잘 되지 않는 조선 땅의 현실에 한탄을 합니다. 그 뒤 허생이 한 뱃사공을 만나 살기 좋은 섬으로 남쪽의 어느 작은 무인도를 소개받게 되는데, 마침 그때 조선 땅에 수천의 도둑떼가 들끓어, 허생이 그들을 회유하여 뱃사공이 소개해 준 무인도로 데려가서 새로운 섬나라를 세우고 그 곳에서 난 작물들을 흉년이 든 일본의 한 지방에 팔아 큰돈을 벌고는 허생 혼자서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조선에 돌아와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남은 10만 냥의 돈은 변씨에게 갚습니다. 오...이런 허생 영감 따라가다 길을 잃을지 모르니 그만 돌아와야겠습니다.

 

시대를 넘어 넘어 현대 철학으로 옵니다. 이 책에서 제일 막내로 이름이 올라있는 인물은 ‘차이와 생성'의 철학자 들뢰즈(1925~1995)입니다, 함께 들뢰즈를 만나볼까요. 푸코가 들뢰즈를 향해 한 말이 있습니다.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1995년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철학사가로 출발했던 들뢰즈는 철학사에서 만나는 철학자들을 이리저리 비틀었습니다. 만일 철학자들이 무덤에서 나온다면, “오, 이것이 나의 사상이었다는 말인가!” 하고 탄식을 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랍니다.

 

들뢰즈는 현대적 사유를 펼친 최첨단 사상가지만, 그의 문제의식과 토대는 매우 고전적입니다. 평생 줄기차게 고전적 물음에 매달렸습니다. 이는 마치 플라톤이 이데아를 평생의 화두로 삼아 자신의 존재론을 펼쳐나갔던 것에 비견됩니다. 역설적이지만 들뢰즈와 플라톤은 이데아에서 서로 만납니다. 플라톤에게 이데아가 ‘영원부동의 실재’를 의미한다면, 들뢰즈에게 이데아란 ‘차이’를 의미합니다, 들뢰즈가 의미하는 차이는 통상적인 개념의 차이. 즉, 같음과 다른 차이, 동일자를 전제한 차이, 차이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차이 등으로 이해해선 안 됩니다. 이 정도 ‘차이’면 감히 철가 동네에 접근을 못하지요.

 

들뢰즈에게 ‘차이’란 그 존재론적 위상이 이데아, 본질, 절대적 진실의 수준으로 표현됩니다. 그가 말하는 차이는 어떤 존재자가 현실화되어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저 동일자의 바깥에 타자로서 존재하는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것은 어떤 보편성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동일자로 환원되지도 않으면서 존재자들이 존재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존재의 심연입니다. 차이란 어떤 존재가 동일성으로 규정되기 이전에 그 동일성을 가능하게 해주며 그 근거가 되는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즉 차이야말로 존재 그 자체이며 개별적인 존재자의 의미가 되고 그러한 존재자들을 가능해주는 조건이라고 합니다.

 

뭔 이야긴지 접수가 잘 안되신다구요? 더 알아듣기 쉬운 말로 표현을 하고 싶어도 마땅히 대체하기가 쉽지 않군요. 차후에 들뢰즈의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정리 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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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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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명한 작가를 인터뷰하러온 젊은 기자가 작가 서재의 사방 벽은 물론 겹겹이 에워싼 책들을 보고 놀라 묻는다. “선생님께서 이 책을 다 읽으셨어요?” “아니요, 다 읽은 책들은 이 방에 있을 필요가 없지요.”

 

나는 확실하게 졌다. 그 작가가 부러워졌기 때문이다. 나의 서재에도 책이 제법 있다. 올 해 들어서 전공 서적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거의 100권이상의 책이 늘었다. 여러 해 전만해도 다 읽은 책은 미련 없이 남에게 주곤 했다. 사실 상대방이 꼭 원하지 않는 한 새 책이고 헌책이고 간에 남에게 책을 준다는 것은 조심스럽다. 각기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면서도 “과연 이 사람이 언제 이 책을 읽을까?”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리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고 나서는 다른 이들에게 책을 주는 일이 조심스러워졌다. 리뷰를 쓰다보면 이미 읽은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더러 리뷰에 인용할 부분도 찾게 된다. 그래서 요즈음은 남에게 잘 안준다. 열심히 서가에 꽂아 놓는다. 아직 못 읽은 책, 조만간 읽어야 할 책은 책상 옆 서가에 눕혀 놓는다. 누워 기다리게 한다. 다 읽은 후에는 책들끼리 서로 등 기대고 서 있으라고 꽂아놓는다. 나에겐 읽은 책이 압도적으로 많다. 80%는 읽은 책이다.

 

이 책 “삶을 바꾸는 책 읽기”로 들어가 본다. 부제는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이라고 되어있다. 문득, 딴죽을 걸고 싶어진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래?..책을 읽으면 삶이 바뀐다고?. 믿어도 돼? 그럼 한 번 읽어볼까?” 물론 저자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중엔 책을 읽어서 삶이 바뀐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삶이 바뀐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고통, 고난과 어려움을 대하는 시각과 생각의 방향이 바꿔진 것이다. 결국 삶이 달라지긴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점이 앞선다.

 

책을 읽으면 어찌 되느니, 어떻게 되느니 하는 현학적인 이야기보다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삶이, 그들이 삶을 받아들이고 변화되는 과정이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들이 좋다.

 

 

일흔이 넘은 뒤 처음으로 한글을 배우신 할머니. 한충자 할머니는 한글을 배우신 정도가 아니라 시까지 쓰신다. 한글을 배우면서 본인이 한글을 모른다는 것을 모른 그의 남편이(뒤늦게 그 사실을 알긴 했지만) 군 입대 후 수없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을 못 보낸 것이 안타까워 50년 만에 남편에게 답장을 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편지를 보낸 당신.”

 

한 해고 노동자의 가슴 저린 고백도 있다.

“....우리는 이제 남들이 우리 일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처지에 몰렸어요. 공장에 돌아간다 해도 예전과 다른 인간이 되어서 돌아가고 싶어요. 다른 인간이 되어서 살아보고 싶어요. 나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고 살면 안돼요. 우린 그렇게 살면 안 돼요.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책 좀 읽으면서 세상을 배우고 싶습니다.”

 

 

여중생 때 동네 오빠에게 납치되어 결혼까지 하게 된 여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안타까웠다. 열여덟 살에 딸을 하나 낳았다.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뒤 수많은 삶의 굴곡 속에 결국 이혼을 했다. 힘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쌓이는 스트레스를 등산과 여행으로 달랬다. 혼자 있을 때 책도 읽기 시작했다. “1년에 열권은 봤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빨리는 못 읽어. 모르면 되돌아가서 자꾸 봐.” 이 대목에서 호흡이 멈춰졌다. 되돌아가서 본다는 부분. 지나온 삶과 흘려보낸 시간들은 되돌아 가봤자 남은 것이 없다. 내 입으로 뱉은 말도 내가 볼 수는 없다. 어딘가 다른 이 마음엔 남아 있을지 몰라도. 그러나 책은 얌전히 기다려준다. 내 서가에도 수십 년이 넘게 얌전히 꽂혀있는 책도 상당하다. 그렇게 뒤를 돌아다봐주기를 기다리는 책들이 있다.

 

이미 나처럼 강제성을 띄고 책을 읽는 사람들에겐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로움을 느껴봄직한 시간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그렇다. 아직 책과 친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왜 도대체 책을 봐야 한다는 거야. 사는데 별 불편 없음 그만이지. 그럴까? 하긴 사는 것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갖고 사느냐가 중요하지. 먹고 사는 문제? 업무를 위해 부득이 봐야하는 매뉴얼은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책의 범주엔 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먹고 사는데 별 지장 없는 책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위의 한 해고노동자의 말을 다시 인용.

“나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고 살면 안돼요. 우린 그렇게 살면 안 돼요.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책 좀 읽으면서 세상을 배우고 싶습니다.”

 

사실은 세상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배우는 것이다. 나를 아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변덕스럽고, 못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나처럼 힘들고 외로울 때 다른 이들은 어찌 견뎌내었는가를 소설, 인문학 등등에서 배우는 것이다.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인물도 있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누군가를 닮았다. 나를 닮기도 하고, 그 사람을 닮기도 했다. 나는 인문, 철학 쪽 책을 읽다보면 먹고 사는 문제 말고도 참 으로 깊고 그윽한 사색을 하며 살아간 또는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개를 숙인다. 그들이 그 글을 쓸 때 그 간소한 공간과 허전한 배와 불편했을 몸을 생각한다. 글을 써본 사람은 안다. 배가 너무 불러도 글이 안 써진다. 그리고 글을 쓰는 일 자체가 노동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볼 때 가급적이면 아니 거의 책상에 정좌하고 앉아 독서대를 이용해서 책을 본다. 그렇게라도 저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싶다.

 

저자가 각 챕터의 질문으로 뽑은 것은 책에 관한 한 다소 유치한 듯 원초적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나? 책 읽는 능력이 없는데 어떡하나? 삶이 불안한데도 책을 읽어야 하나? 책이 정말 위로가 될까? 책이 쓸모가 있나? 읽은 책을 오래 기억하는 법이 있나?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

누가 나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면 굳이 안 읽어도 좋다. 그러나 글~쎄?? 가 떠오르면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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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데이비드 흄 지음, 김혜숙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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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히 알아들었다는 뜻인가?

그 앞뒤 사정까지도 생각이 보태진다는 뜻인가?

 

흄에 의하면 인간 이성이 다루는 모든 탐구 대상들은 근본적으로 두 부류, 즉 관념들의 관계(Relations of Ideas)를 다루는 것들이거나 사태(Matters of Facts)를 다루는 것들이다. 관념들의 관계에 해당하는 것들로는 기하학, 대수학, 그리고 산수와 같은 학문이 있다. 즉, 직관적으로나 논증적으로 긍정되는 것들에 대한 모든 주장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사태는 어떤가? 관념과 같은 방법으로 확인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갖는 그 진리에 대한 확실성 또한 그것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관념들의 관계에 대한 탐구가 갖는 확실성만큼 크지 않다. 따라서 사태에 관한 모든 추론은 인과 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듯 하다고 한다.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은 추론에 의해서 선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특정한 대상들이 서로 지속적으로 결합된다는 것을 발견할 때 얻어지는 경험으로부터 생긴다. (......) 어떤 대상이든 감각에 나타나는 성질들만 가지고서는 대상을 산출해 낸 원인을 밝혀낼 수 없으며, 그 대상으로부터 나올 결과도 밝힐 수 없다.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이성은 사실적 존재나 사태에 어떤 추론도 해낼 수 없다.”

 

여러 관념들은 세 가지의 관념 연합의 법칙에 의해 섞이고 복잡해지며 확장된다. 연상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이 세 가지 법칙은 유사성의 법칙, 근접성의 법칙,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다. 연상 법칙이란 객관적 실재 세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느낌에 의존한 법칙이다. 흄은 인간의 앎 전부를 인상들과 관념들, 그리고 연상 법칙에 의한 관념들의 연합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의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진리는 주관적인 것, 심리적인 것이 된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1711년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을 일찍 여윈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교육받았다. 법률가 가정 출신이고 교육열이 높았던 그의 어머니는 흄이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으나, 그는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늘 그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어 했다. 이런 바람으로 흄은 늘 글쓰기에 게으르지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했고, 그 결과 많지 않은 나이인 25세에 대작 《인간 본성론》을 완성하게 되었다.

 

흄이 역사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역사 공부의 당위성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시대나 장소를 초월하여 거의 모두 같고 역사는 어떤 특정 시대나 장소에서도 특별나고 새로운 사건이 벌어진 바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인간의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본성을 발견하는 데에는 역사가 주로 많이 이용된다. 역사는 온갖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여러 정황에서 묘사해주고,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고 인간의 행동과 행위의 규칙적인 발생 원천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자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흄은 인간의 본성은 그 원리들이나 작용들에 있어서 늘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된다고 한다. 같은 동기는 항상 같은 행위를 낳는다. 동일한 사건들이 같은 원인들에서 생긴다. 이는 여러 가지로 얽혀 있으며,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야망, 탐욕, 이기심, 허영심, 우정, 관용, 공공 정신 등과 같은 정념은 태초부터 계속해서 인류에게서 관찰되는 모든 행위와 모험심의 원천이다.

구조주의 문예 이론가이자 사상가인 츠베탕 토도로프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 내부의 적』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치의 범죄, 특히 강제수용소의 실상이 밝혀졌을 때, 서구 여론은 자신들을 나치즘의 괴물과 구분 지으려고 애썼다. 오늘날까지도 역사가, 소설가, 영화감독이 나치 주모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동기로 그러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할 때마다 항의가 빗발친다. 그래서 누군가 과거사건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심지어는 단순히 당시의 맥락을 고려하기만 해도 그가 사건을 변호한다고 선언해버린다. 히틀러가 우리와 같은 특징을 가진 인간이었다는 생각에 우리는 분노한다. 히틀러가 저지른 악은 끔찍하다. 사람들은 그를 우리의 본성과 역사의 외부에 있는 비정상적인 괴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더라도 소수자의 목소리가 정반대의 실상을 명백하게 증언한다. 세계대전 때 자유프랑스 전선에서 싸운 로맹 가리는 첫 소설에서부터 적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인간성을 지녔다는 사실과 인간들의 잔인함을 고발했다. 그의 소설 『튤립』에서 할렘의 흑인 낫(Nat) 삼촌은 “독일에서 범죄자는 바로 인간이야.” 라고 말하며 소설 『절반』에서는 알제리인 라통이 친구 뤽에게 “너 이 세상에 독일 놈들이 몇 명이지 알아? 30억이 넘어.”라고 말한다.

 

흄은 이 책에서 철학의 여러 종류에 관해, 관념의 기원과 연합에 관해, 이해력의 작용에 대한 회의적 의심에 관해, 불확실한 것들에 대한 회의적 해결에 관해, 개연성 그리고 필연적 연관성이라는 관념에 관해, 자유와 필연성에 관해, 아카데미 철학 혹은 회의적 철학에 관한 깊은 내용들을 비교적 쉬운 설명과 문체로 우리의 사고(思考)를 인도해주고 있다. 역자 김혜숙 교수는 이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는 칸트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칸트 자신이 술회한 바처럼 그를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이 책은 영어로 된 철학 저술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을 만큼 중요한 저서이므로 누구나 반드시 읽어 봐야할 필독서라고 추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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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경제학 - 경제학자들도 모르는 부동산의 비밀
전강수 지음 / 돌베개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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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와 관련된 문학작품은 국내에도 여럿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은 책이 한 권 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이다.

 

존 스타인벡의 나이 37세 때 출판된 〈분노의 포도〉는 그의 열한 번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출간과 동시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작품 속에 나오는 죠드 가족의 이주과정은 작가가 실제로 동행한 길이다. 그는 철저한 현장체험으로 이 글을 집필했던 것이다.

〈분노의 포도〉가 발표된 1930년대는 1928년의 경제공황의 뒤를 이어서 세계적으로 대불황이었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대상황 때문에 정치가뿐 아니라 문학자, 일반 대중도 당연히 경제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농촌의 생활상은 심각했다. 오클라호마의 땅을 빼앗기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온 25만의 빈농들의 문제는 커다란 사회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그들은 더러운 오우키들이라고 멸시를 당하고 있었으며, 온 식구가 나가서 해가 저물도록 쉬지 않고 일을 해도 겨우 한 끼를 먹기 힘들 정도였고 그나마 그런 일자리라도 걸리면 다행이었다. 이렇게 시달리는 오우키들의 굶주림은 차차 분노로 변했고 캘리포니아의 벌판에 포도는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건만 이주농민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분노만 무르익더라는 이야기다.

 

분노의 포도는 여전히 열리고 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은행잔고는 두 번째다. 부동산 소유의 많고 적음이 부의 판단이다. 부동산도 강남땅이냐 빌딩이냐 저 산간벽지의 임야냐에 따라 달라진다. 많이 가진 자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내 삶이 더 팍팍해진다. 비교하는 것은 싫다. 단지 그들이 페어 플레이를 하지 않는 것이 맘에 안 든다. 비중 있는 공직자 청문회 때 단골메뉴는 부동산 투기와 위장 전입이다.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땅’이다. 그 땅도 보통 땅이 아니다. 귀하신 ‘몸 땅’이다. 곧 개발 될 예정지(일반에겐 공표가 안 된)는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본인 이름으로 매입하면 티가 나니까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줘서 사거나 정보 제공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다. 이런 문제가 문제인 것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무지함과 어긋난 욕심에 의해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시장만능주의자’와 ‘가격규제만능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이 두 부류 모두 몹시 맘에 안 든다. 한 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한 쪽 면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있음이 훤히 보인다.

 

“지식인들의 무관심과 침묵은 사회가 내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징후인데,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보이고 있으니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이 책을 통해 ‘헨리 조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헨리 조지라는 걸출한 경제학자는 고전학파의 토지이론을 완성했다. 헨리 조지는 당시 영미권에서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에 버금가는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헨리 조지의 엄청난 영향력에 위협을 느낀 미국의 막강 지주세력이 당시 엘리트로 꼽히던 경제학자들을 고용해서 헨리 조지 경제학을 무너뜨리는 작전을 전개했다. 고매한 학자마저도 해결사로 움직이게 하는 돈의 위력이다. 미국에서 헨리 조지의 휴매니티 정신이 가득한 토지이론을 뒤집어엎고 일어선 것이 신고전학파이다. 이들은 주류경제학에서 토지를 빼버리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 기세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를 위한 일등공신이다.

 

 

“토지의 천부성(토지는 창조주가 인류에게 공짜로 준 것이다)과 공급고정성(토지의 공급은 일정하다)은 인류가 토지를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 가르쳐준다. 토지는 일반 재화나 자본처럼 개인에게 절대적. 배타적 소유권을 인정해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 옳다.”

 

토지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토지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다. 단지 시간이 문제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토지의 가격이 전체 경제에 막강한 힘을 휘두른다는 점에 있다.

“토지 소유와 토지 가치는 소득과 자산의 분배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토지와 부동산 가격의 변화는 소비, 투자, 금리, 임금 등 주요 거시경제 변수들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경기변동에 큰 영향을 준다. 토지를 이용목적이 아니라 투기목적으로 보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것은 토지 이용 양태와 환경에 영향을 끼친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들어서는 정부마다 돌려막기식의 단기성 대책 말고 장기적으로 상생의 묘안이 없을까? 저자는 이런 의견을 제안한다.

 

“토지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서는, 토지의 사용권을 민간에게 부여하되 사용료를 공적으로 징수하면 된다. 토지의 수익권을 공공이 갖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지가의 문제나 토지 불로소득 같은 문제들은 바로 사라진다. 토지 매매시장은 극도로 위축되거나 소멸하겠지만, 토지 임대시장이 남아서 작동하기 때문에 가격을 매개로 하는 토지의 효율적 배분은 아무런 문제없이 이뤄진다. 뿐만 아니라 투기 목적으로 토지를 보유하려는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고, 토지 사용자는 그때그때 사용료를 납부해야 하므로 토지를 최선의 용도로 사용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토지가치공유제(토지가치세제와 토지공공임대제)는 토지의 사용권을 민간에게 부여하되 사용료를 공적으로 징수하는 것을 가능케하는 대표적인 수단이다. 이런 제도야말로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만드는 시장친화적인 토지제도가 아닌가?”

 

이 땅에 회복되어야만 할 정의 중에 토지정의가 우선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소위 좋은 땅, 괜찮은 땅은 모두 죽은 땅이다. 거대한 건물과 고층 아파트에 짓눌려있다. 코르타르로 빈틈없이 메워져있다. 도회지 땅의 소유자는 땅이 돈으로 보인다. 그러니 들풀이 자라는 것조차도 용납 못한다. 땅은 이렇게 절규한다.

 

“나 숨 좀 쉬게 해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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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코 (천줄읽기) 지만지 고전선집 486
서보 머그더 지음, 정방규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소설은 열세 시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이다. 주인공 어누슈커가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6시 45분에서 부다페스트행 밤 기차가 떠나는 저녁 8시까지. 어누슈커는 순간순간 무엇과 마주칠 때마다 연상되는 과거의 묵은 씨앗들이 마음속 깊은 잠에서 깨어 새롭게 살아난다.

 

이 책은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상투적인 예술이 아니라, 변화하는 시대와 함께 갈등하고 고민하는 인간의 모습을 깊은 이해로 그려 심리학의 연구 대상이 될 만한 인물들을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헝가리의 작가로서 외국에 많이 알려진 여성 작가 서보 머그더의 작품. 서보는 시, 아동문학, 드라마, 여행기, 에세이 등 문학전반에서 업적을 남겼다.

 

글의 전개는 과거와 현재가 경계 없이 넘나든다. 그래서 여간 주의를 하지 않으면 다소 혼란스럽다. 엄마의 장례식 때문에 고향을 내려온 주인공이 느닷없이 학교로 뛰어간다.

“그녀는 달려갔고 비스듬히 총총하게 땋은 머리는 등 뒤에서 흔들거렸다. 그녀가 학교의 문을 막 들어서는 순간 종은 다시 울렸다. 그것은 이미 8시가 되었음을 알리는 종이었다. 이때부터 진짜 아침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누슈크는 그녀가 고향을 떠날 때 예순 네 살이었던 언주라는 사람과의 재회에서 만큼은 평안함을 찾는 듯하다. 지금은 일흔 세살의 머리가 하얀 노인네가 된 언주. 이 소설에선 이 두 사람이 주요 인물이다. 어누슈크와 언주. 어누슈크는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해서 목사인 그의 아버지한테 구타를 당할 정도의 반항아적 기질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그의 딸 어누슈크에게 지독하게 욕심이 많은 아이, 너무 못된 아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잣대로 재보기엔 그랬다. 누구나 성장과정 중에서 받은 상처는 오래 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소설을 성장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유럽이 동서로 갈라지면서 공산권의 문학에서 두드러진 작품은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과 비평위주였다. 따라서 그 저항정신의 높이에 따라 문학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그러나 저자인 서보의 소설을 접한 서방세계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 건설에의 기여라는 목적이 앞선 나머지 예술이라고 부르기엔 턱도 없는 현실의 공산권 헝가리에서 이렇듯 완벽한 문학이 태어났구나 하는 놀라움 때문이었다. 이 소설의 특징은 화자의 입을 통해 서술 형식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많이 기대하는 대화체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운문(韻文)체다. ‘의식의 흐름’기법이다.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 이 글이 쓰인 시대적 배경은 공산권인 헝가리이다. 출판의 자유가 억압되었던 기간 동안에 썼던 글들은 저자의 책상 서랍 깊숙이 들어 있다가 1956년 헝가리 혁명이후 출판이 허가되자 연달아 작품을 발표했다. 훌륭한 작품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느낌과 감동을 줄 수 있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 아무 때나 혼자서 훌륭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어누슈커가 집을 떠난지(가출) 9년 만에 찾은 고향, 가족은 뒤로 변화해가고 있다. 야심으로 한 꺼풀 덧입힌 욕심과 일단 나 혼자만 살고보자는 이기주의만 남아 있었다. 어쩌면 저자는 공산주의 치하에서 살아가는 군상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을 것이다. 적당히 따라가는 척 하면서 내 앞가림만 챙기고 있다. 나눔과 희망은 안 보인다. 그나마 인간적인 냄새는 어누슈커와 그의 은밀한 동조자인 언주뿐이다.

 

 

“그녀(어누슈커)에게는 모든 사람이 색깔이었고 색깔로서 그녀의 안에 살아있다. 어머니는 노랗고 아버지는 새까맣고 연커는 회색, 고아는 초록, 늙은 커티는 베이지, 쿤 라슬로는 붉은색. 그러나 할머니는 색깔이 없다.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언주는 하얗다. 하얗기는 아담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그녀의 주변 인물들을 색깔로 표시했기에 그녀의 마음속에 투영된 그들의 이미지가 어떤지를 알 수 있고, 그들의 심성을 짐작할 수 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기에, 아니 그녀의 가슴 속에 커다란 어두움으로 자리 잡고 있기에 아버지는 ‘새까맣다.’

 

나는 그대 가슴에 어떤 빛깔로 남아있을지 궁금해진다.

굳이 그대가 좋아하는 깔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새까맣게’ 칠해져있지는 말아야 할 텐데 라는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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