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간의 적응 기간이 거의 끝나간다. 아이는 오늘 처음으로 내 앞에서 울음을 그치고 먹먹하지만 감정을 추스린 얼굴로 어린이집 차에 탔다. 처음 몇번 울 때 걱정됐지만 가슴이 찢어지진 않았다. 아이가 잘 할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계속 울고 울어서 어린이집을 못다니면 어쩌나란 걱정은 했다. 나는 이기적이고 손뼘만한 내 시간이 중요한 엄마였다. 20개월 동안 옆에 끼고서 아이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일에서 잠시 벗어났다. 그리고 닥치는 적막. 이제 뭘하지.

 

 어제 저녁부터 느긋하게 쌓아놓은 설겆이와 빨래, 마늘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바닐라라떼를 한잔 만들어 천천히 음미하며 마셨다. 정새난슬의 '다 큰 여자'를 읽는다. 넘치는 열정과 분노, 혼란스러움이 나와 닮은 사람. 모순된 자신을 바라보며 전진하는 사람. 그의 모습에서 나를 보며 조용한 아침을 보냈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다 SNS에 댓글을 남긴 a의 타래를 타고 그의 일상을 들여다봤다. 아기가 초등학생이 되면서 직장을 그만두고 이내 생협 위원장이 되었단다. 로망이었던 취미를 하고 역량개발 워크숍을 다니는 a의 일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조용한 아침은 들썩이기 시작했다. 자기소개란에 누군가를 부러워한적이 없다고 적을 정도로 다른 사람이 선망할만한 삶을 사는 누군가. 나처럼 흔들리지 않고 무엇으로든 성공하고 어떤 순간에도 빛나는 사람.

 

 a가 누군가의 애타는 러브콜을 받으며 일을 시작한 것과 다르게 내가 구직을 하기 위해선 엄청 애를 써야한다. 그가 하는 활동들은 나 역시 하고 싶었던 것이거나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활동들을 통해 배우지 않고 경험을 쌓지 못했다. 일이 되거가는건 더디고 관계는 어렵다. 실력은 한참 지나도 도돌이표다. 으쌰으쌰 새로운걸 만들고 기획하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걸 꿈꾸지만 다른 사람을 포용할만한 사람은 되지 못한다. 그럼 다른 사람이 내미는 손에 감동하는 시늉이라도 해야하는데 이내 삐딱선을 탄다.

 

 여전히 '인기 많고 싶은' 바람이 맘 저편에서 미약하게 팔랑이는데 인기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행동이나 말은 하지 않는다. 진짜 이율배반. 남을 배려하거나 의식적으로 듣기 좋은 말을 하지 못한다. 얼마 전 역할극을 한 적이 있다. 내가 낸 아이디어인데 나는 서브 악역을 맡으려고 했다. 누군가 '아치는 왜 누굴 때리고 구박하는 역할만 해?'라고 묻지 않았으면 생각해보지 못했을 빈틈. 나는 악역이나 서브가 편하지 주인공을 하는 건 어색하다. '못할 것도 없지 뭐.'란 생각으로 어색한 역을 맡아했는데 역시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난 막 나서고 주목받는 것 좋아하는데 숨고만 싶었다.

 

 긍정적인 기운, 밝고 명랑한 것, 또랑또랑한 건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 혹은 나는 그런걸 안 좋아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좋아한다. 나도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 삐딱선을 타고 트집을 잡아내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건 신문사설로 충분하다. 누군가 관계를 맺는데 그런 점들은 마이너스이다. 그런데 이게 난걸. 여전히 인정욕구에 허덕이고 남들의 말 한마디에 팔랑이는 사람이 나인걸 어쩐담. 시크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누군가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비판 대신 응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창밖으로 뒷동 베란다에 널린 이불이 보였다. 초여름 햇살에 바짝 말라가는 두툼한 이불이 나른해보였다. 나른하고 더없이 충분한 표정으로 당신을 응원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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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정

 

 그동안 아기는 울고 웃는 표정 밖에 짓지 않았다. 단순하고 투명한 욕구가 바로 얼굴에 나타났다. 그런데 지금은 다양하고 풍부해졌다. ‘어린이집 가서 친구들이랑 놀거야’는 물음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가 ‘그런데 엄마는 같이 못 가. 안 가.’이러면 입을 삐쭉 내밀고 슬픈 표정을 짓는다. 우는 게 아니라 표정으로 자신의 감정을 얘기한다. 이것도 몇 번 하다 보니까 처음 질문에는 고개를 끄덕이다 두 번째에는 살짝 고민하더니 씽긋 웃어버린다. 엄마가 장난치는걸 알아버린거다.

 

아기의 감정이 다양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내용은 선명하다. 감정을 숨길줄 모른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으면 바닥에 뒹굴고 기분이 좋으면 원숭이처럼 킥킥거린다. 웃음소리가 커졌고 감정의 폭이 넓어졌다.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고 들여다볼줄 아는 아기로 자랐으면 좋겠다.

 

한계

 

  아기가 말을 알아듣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면서 한계 짓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전부터 안전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영역에서는 경계를 정하고 그 외에는 자율적으로 지내도록 했는데 최근 식사와 잠자리 습관을 들이면서 어느 선의 한계가 적당한지 고민을 했다. 특히 감기 기운으로 입맛이 떨어졌을 때는 정말 헷갈렸다. 밥은 먹는 둥 마는 둥이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장난을 친다. 밥을 뱉고 수저로 식탁을 친다. 일어나는 건 안전에 관한거니까 제재했지만 밥을 뱉는 건? 밥을 잘 안 먹는 건? 밥을 먹는 시간을 정해주고 그때까지 다 먹지 않으면 그릇을 치우는 방법으로 써보았다. 처음에는 계속 배고프다고 칭얼대거나 여전히 장난을 쳤지만 점점 익숙해지면서 앉은 자리에서 밥을 잘 먹는다.

 

 그 다음에 잠자리. 앞에 썼지만 그동안 잘 때 아기 스스로 자지 못하는걸 감안해서 자는데 도움이 되는 건 다 수용한 편이었다. 앉았다 일어났다, 엉덩이를 두드렸다 어부바를 했다, 책을 읽다 노래를 불렀다, 물을 가져오는 것 등등. 그런데 내가 아기라면 굉장히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어떤 욕구든 한계 없이 다 들어주는게 과연 좋은걸까. 오히려 한계 없는 욕구가 아기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한밤중에 악을 쓰면서 우는 것도 그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잘 때는 자기 잠자리에서 잔다’ 외에는 다 허용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양한 요구를 하다가 며칠 지나니 편하게 잠이 든다.

 

 a는 이러한 육아방식이 아기의 기를 죽일 수 있다고 한다. ‘안 돼’란 말을 남용하면 자신이 하고 싶은걸 생각하기 전에 엄마 눈치를 볼거라고 한다. 아기가 눈치를 볼 정도로 ‘안 돼’의 영향력이 센 걸까. 자신의 행동이 어느 선까지 수용되는지 확인하고 그 경계를 인정하는게 좀 더 안정적이지 않을까. 정말이지 육아는 답이 없다. 나 역시 아기와의 관계로 서로의 한계와 접점을 찾아가며 맞춰가는 수 밖에 없다.

 

넛지

 

 넛지는 ‘주위를 환기시킨다’는 영어로 강압하지 않고 부드러운 개입으로 사람들이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뜻한다. 밥을 먹고 이를 닦는다거나 제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활동을 아기 스스로 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아기가 어렸을 때는 내가 직접하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들을 수월하게 했다. 하지만 걷기 시작하고 자유의지가 생긴데다 장난치고 싶은 꾸러기가 숨겨져 있는 20개월에는 모든 것을 설득해야한다.

 

 기저귀를 갈자고 하면 도망을 간다.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데 관심 없던 자동차를 탄다고 한다. 밥을 먹으랬더니 뱉고 자랬더니 물을 먹는다, 나갔다온다, 어부바를 하겠다 난리난리다.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가 차라리 낫다. 바르지 않은 행동은 감정을 읽어준 다음 제지를 하면 된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을 안 할 때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쫓아다니면서 밥을 먹이고 이를 닦이고 옷을 입히고 싶지 않다. 그래서 고안한 게 바로 넛지.

 

 기저귀를 갈아야하는데 벌써 눈치 채고 저만치 도망가는 아기. 쫓아가서 데려올 수 있지만아기가 스스로 오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 넛지를 시도해보았다. 동물들과 대화를 한다거나 비닐 소리를 내면서 먹는 시늉을 하는거였다. 처음 몇 번 아기는 호기심에 내 옆으로 와서 슬쩍 본다. 하지만 비슷한 수법이 반복되자 아기는 동물이랑 얘기하며 먹는 소리를 내는 내게 토끼 인형을 던져주고 갔다. 시늉을 할거면 인형이라도 데리고 하라는건가. 넛지 실패. 넛지는 처음 몇 번 반짝이는 아이디어 수준이었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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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a보다 어린 아이가 있는 집에 놀러갔다. 이제 막 뒤집기를 시작하고 앉을 줄 아는 어린 동생 b는 a를 보고 방긋방긋 웃었다. a를 데리고 다니면 자식을 다 키운 분들이 아기를 어떻게 키운지 모르겠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나 역시 a가 저만할 때가 불과 1년 전인데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아기 사이에서 1년은 엄청 큰 차이인지 b는 이내 a가 내는 소리와 움직임에 심기가 불편해졌나보다. 우는 일이 별로 없다는데 계속 칭얼댔다. a는 a대로 놀만한거리가 없으니까 심심해했다.

 

 나와의 관계, a 또래와의 관계에서 a는 똑똑하거나 야무지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다. 하지만 웬일인지 b랑 있으니 a의 문제 행동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괜히 누워있는 b의 머리카락을 밟는다거나 손으로 눈을 찌르고 아, 예쁘다 하는 척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 간만에 다른 아리 엄마 집에 놀러왔는데 좌불안석이었다. b의 엄마가 b가 왜 우는지 살피기보다는 조금만 우는 시늉을 보여도 바로 안는 통에 a는 아무 짓을 안 해도 좀 뻘쭘해지기 시작했다.

 

 a가 또래랑 있을 때는 안 그랬는데 동생이라 그런건가.

 

 b의 엄마가 a에게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a 딴에는 자신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다고 느꼈나보다. 자신의 존재를 밀쳐내는 동생과 어른,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엄마 사이에서 a가 선택할 수 있는 몇가지 방법 중 하나가 동생을 자극하는거였을까. 그런 것까지 생각한건 아니고 a의 자연스러운 소리와 움직임이 b에게 낯선 것 뿐이었을까.

 

 얼마 전부터 아기는 어린이집을 다닌다. 적응 기간 동안 아기랑 어린이집에 앉아 있는데 가끔 지나가는 말처럼 선생님이 그런다.

- 누구가 어머니한테 자꾸 안기는건 일찍 엄마랑 떨어져서 그래요.

- 어머니도 알겠지만 누구가 발달이 좀 늦어요.

 

 아기를 이 선생님한테 맡겨도 되는지 심각하게 고민을 했다. 선생님 말로는 a가 애착 형성이 잘 돼서 어린이집 적응을 잘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 기준에서 벗어난다면 어떻게 되는걸까. 선생님이 귀뜸한 아기들은 사랑스럽고 순진하다. 일부러 자세히 봐서 선생님이 얘기한 지점을 확인하려 들면 못할 것도 없지만 다른 아이들도 정도만 다를 뿐 다 갖고 있는 특징이다. 별 일 아닌데 소란스러워지면 선생님은 특정한 아기한테 이유를 묻고 아기의 감정과 별개로 타이르거나 훈육을 했다. 며칠 봤는데 그랬다.

 

 그래도 아기는 적응을 잘한다니 괜찮지 않을까란 맘 이면에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자리잡았다. 정상에서 탈락하면 어쩌나란 염려. 나 역시 정상 혹은 일반에서 멀었는데 되물림 되는건 아닐까란 걱정.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a가 아무리 잘해도 한번 눈 밖에 난다면 어떡하지. 이 선생님은 아기들의 다른 여건을 포용하기 보다는 규제할 것 같은데.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아기를 계속 어린이집에 보냈다. 시간이 지나 선생님과 얘기하며 내가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다는걸 알게 됐다. 선생님이 조금 다른 아이들한테 유난스럽게 구는 건 아니었다. 인권 어쩌고, 내가 과민했다. 아니아니, 말 몇마디로 그 사람에 대해 판단하기에 어린이집 선생님의 업무량과 기대치, 근무조건이 너무 열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a는 나랑 떨어져 어린이집 차를 탈 때마다 눈물바다가 된다. 씩씩하고 개구지고 엉뚱한 아이가 어느 순간 감정이 복받쳐 앙하고 울어버린다. 고집을 부리는, 엉성하게 우는 흉내 내는 것도 아닌 울음. 아기에게 슬픔이 생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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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막한 밤에 위로가 되지만 계속 보기에는 좀 수다스럽고 자의식 과잉인데 애정결핍인 언니가 있다. 마침 언니랑 내 컨디션과 제반상황과 여건, 에너지가 기가 막히게 잘 맞으면 보이는 것 너머의 이야기를 건넬 수 있는데 어쩌다 오늘이 그랬다.

 

 난 언니가 주변상황을 의식해서 큰소리로 말한다거나 전화통화를 크게 하는걸 안 좋아했다. 자기 과시 같고 내 귀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남편놈이(이야기의 매끄러운 흐름을 위해 놈을 붙일 수 밖에 없다.) 머리 아파서 상태가 메롱인데 언니는 계속 그 놈을 걱정하고 챙겼다. 마치 '자상한 아내' 역할에 빠져있는 듯 보였다. 평소에는 참깨 볶는 것처럼 달달달 볶았는데 말이다. 사실 조금 떨어져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오늘은 그녀가 무려 2주만에 쉬는 날이었다. 남편과 꽃놀이를 가던가 같이 콧바람을 쐴 기대를 했을 것이다. 헌데 남편놈은 전날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다. 그리고는 오늘 몸이 안 좋다며 아침부터 뻗대고 있는거다. 내 성질 같아선 바로 무시하고 차를 갖고 어딘가로 휙 떠나버리거나 대판 싸우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게할텐데 언니는 걱정만 하고 있는거다.

 

 언니는 모처럼 쉬는 날을 어영부영 보내고 말았다. 저녁을 먹는데 남편놈이 술을 시켰다. 한나절 지나 좀 살만해지니 다시 술이 생각난 모양. 언니는 참았던 화를 쏟아내는 대신 침묵했다. 무덤 옆에서 밥을 먹는 것처럼, 젖가락이 코로 들어가는지 귀로 들어가는지 확인해야할 정도로 어색한 자리였다.

 

 전조는 여러 번 있었다. 남편놈은 상태가 멜롱이 아니어도 언니 말을 잘 안 듣는다. 한번은 언니가 정색을 하며 남편놈에게 말을 하길래 내가 물었다.

 

- 남편놈, 당신이 왜 언니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지 알아?

- 글쎄, 술에 취해 있어서.

- 아니. 그래도 되니까.

- 응?

- 그래도 되니까. 말 안 하고 상대방 답답하게 만들어도 언니가 풀어주고 다시 얘기할걸 아니까 그러는거라고.

 

 언니 이야기만은 아니다. 결혼 전에는 너스레라도 떨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 결혼 후 일상적으로 필요한 말을 하거나 듣는데도 상당한 문제를 일으킨다. 상대방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체념하게 만드는 이기적인 전략을 선택하는건 대개 생물학적으로 남성일 경우가 많다. 왜? 그래도 되니까. 여성이 더 소통을 잘하니까?

 

 아니.

 

 경청과 대꾸도 일종의 감정노동이다. 나는 내 얘기를 더 많이 하고 싶은 욕구가 많기도 하지만 체질적으로 누군가의 얘기를 잘 못듣는다. 좀이 쑤시고 흥미가 떨어진다. 일방적인 얘기를 들을 때는 엉덩이가 들썩거린다. 하지만 최대한 들으려고 노력한다. 왜?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래야하니까. 소통 능력 운운하면서 무슨 화성에서 온 남자 찾고 하는데 간단한 예가 있지 않은가. 말대꾸조차 귀찮아하는 남자들이 상사한테도 그러느냐고. 상사에게는 감정이입과 요란한 리액션은 기본, 언제든 웃을 준비까지 되어있지 않나.

 

 언니의 남편놈이 언니를 상사처럼 대하란 얘기는 아니다. 적어도 성의는 갖고 있었음 좋겠다는거다. 그건 너무 기본 중 기본이라 설명하기도 입 아픈거니까. 미운 언닌데 오늘은 안쓰러워보였다.

 

 

 

 

 

* 비밀댓글 남겨준 분.

적어준 내용을 읽는데 맘이 훈훈해졌습니다.

대댓글이 안 달아지고 혹시나해서 방명록에 갔는데 자판이 영어로 나와서 (빌어먹을 알땡땡) 여기에 남겨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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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짧은 치마를 입고서 계단을 오를 때면 가방이나 손으로 엉덩이 부근을 가린다. 행여 속옷이 보일지도 모르니까. 요즘이야 짧은 속바지를 입어서 괜찮지만 그래도 ‘왠지’ 가려야할 것 같다. 왠지 가려야할 이유에 대해선 생각해본적이 없지만 가리는 행위의 근저에는 ‘내가 짧은 치마를 입었지만, 그렇게 헤프게 속옷을 보여주는 여자는 아니야.’란 생각이 깔려있다. 그렇게 불편하고, 귀찮으면 안 입으면 될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난 짧은 치마를 입고, 치맛자락을 팔랑거리거나 조금쯤은 섹시해 보이는게 좋다. 내가 좋아하는걸 하기 위해서 몇 가지의 불편한 점을 감수하는건 일도 아니다.

 문제는 그걸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다. 가리는건 여자 맘인데, 지나친 배려라거나 불쾌한 친절로 보인다고 하는건 약과다. 자신을 잠재적 치한으로 몰았다고 억울해하니 말이다. 가리는걸 왜 치한으로부터 자신을 가리기 위한 행위로 연결하는걸까? 여자들이 그렇게 오지랖은 아닐텐데 말이다. 정말이지, 내 옷 내가 가리고, 내 몸 내가 안 보여준다는건데. 입는 것도 내 맘, 보여주는 것도 가리는 것도 다 내 맘인걸.

  예를 들어 지하철에 서 있을 때, 뒤에서 누가 움직이면서 건든다고 가정을 해보자. 뭐지, 하고 뒤돌아볼 수 있다. 이건 일반적인 일. 하지만 여기에 성별이 개입되면 다르게 해석된다. 남자는 자신이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여자한테 오해받고 있다고, 치한으로 몰렸다고 지레짐작 겁을 먹는다. 불편한 기분이 든다고, 아무 짓도 안 한 선량한 자신을 오해했다고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가해 망상 뺨친다.

  얼마 전 G씨가 자신의 블로그에 ‘똥꼬치마’-지금은 삭제되었다.-와 관련된 글을 올렸다. 누가 볼 것도 아니고, 관심도 없는데, 여자들이 계단을 오르며 자기를 흘끗 쳐다보는게 불쾌하다 등등의 이야기를 적은 글이었다. 정말 남자들은 그렇게 느낄까? 직장 동료들은 대부분 무엇을 입든 여자 맘이지만 속옷이 보일 때는 눈이 갈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걔중 평소에 기분이 나쁜걸 생리하는 것 같아 등등으로 표현해 내게 질문 공격을 당한 Ch는, 만약에 여자가 봤냐고 추궁하면 안 봤다고 우길거라고 얼굴이 벌개지며 덧붙이기까지 했다. 노출을 바라보는 시선은 예외로 한다고 해도 난 정말 궁금했다. 내 속옷, 내가 가리는거야를 넘어서 그토록 은밀하고 완고한 입장은 뭘지.

나는 짧은 치마를 입는다. 약간 불편하게 움직이는 느낌이 좋고 내가 예뻐보여서 좋다. 남들이 나를 예쁘게 보는 것도 좋다. 좋은 와중에도 내 체형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많은 비난거리가 말풍선 모양으로 내 주위를 떠돈다. 신경쓰며 위축되거나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것보다 좋은건 무시하기다. 무시면 간단하지만, 어찌나 견고한 조직처럼 일사분란하게 재단하는지.

 가끔씩은 그저, 내 몸이고, 그 사람의 입장이고, 그 사람의 취향일 뿐이니까 너 하던대로 그냥 살라고 말해주고 싶다.

2009년 아치 페이퍼

 

 캐치볼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언젠가 쓴 것 같아서 찾아보다 이런 글을 발견했다. 요즘처럼 여성혐오가 본격적이기 전에 쓴 글인데 요즘 읽어도 전혀 낯설지가 않다. 지금은 편한 바지, 편한 바지만 찾는데 그땐 그랬구나. 짧은 치마 입고 섹시한 느낌을 좋아했구나. 섹시한 느낌은 내 느낌인걸까, 누군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걸까. 지금은 생각이 복잡한데 글이 단조롭다면 예전엔 생각은 단순했지만 글은 촘촘했달까. 이게 다 출산의 영향인걸까.

 

 제시카 발렌티의 성적 대상을 읽고 있는데 번역 문제인지 작가가 은유적으로 글을 써선지 잘 읽히지 않는다.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큰 코를 혐오했다고 한다. 작가에게 큰 코가 있었다면 나는 큰 엉덩이가 있었다. 언제부터 내가 정말 엉덩이가 크다고 인식을 했을까.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아치는 엉덩이가 커서 아기를 잘 낳겠네'라고 했던가. 그때 나는 중학생인가 그랬을 땐데 다른 때 같으면 촌철살인? 같은 말을 곧잘 내뱉어서 발화 당사자를 웃음거리로 만들었는데 그때는 얼굴이 빨개져서 황급하게 윗도리를 내려 엉덩이를 가렸다.

 

 세상에나, 아직 중학생 밖에 안 된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한 어른의 정신 상태는 대체 어떤걸까. 게다가 내가 아기를 낳을지 엉덩이로 이름을 쓸지 지가 무슨 상관이람. 하지만 나는 어렸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시기라 '아, 내 엉덩이가 정말 크구나.'라고 수긍하고 말았다. 얼마동안 엉덩이를 숨기고 최대한 사람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엉덩이 좌절감은 다른 신체부위? 칭찬으로 상쇄하다 유야무야 없어졌다.

 

 생각없는 말 한마디에 내 몸을 미워하고 내 존재를 부정했던 경험, 여자들은 한번씩 있지 않을까. 오십이 다 된 언니들도 살을 빼고 피부를 좋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걸 보면 끊임없는 성적대상으로 본인 스스로를 자리매김한건 아닐까. 남자 꼬마들의 바지 앞섶을 보며 장차 섹시한 남자가 되겠네라던가의 훈수를 두지 않을걸 보면 말이다. 남자는 그냥 인간인데 여성은 대상화 된다.

 

 작가는 본인이 겪은걸 되물림 하기 싫어 간절하게 아들을 바랐다고 하는데 나는 딸을 바랐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충분히 걱정되고 염려됐지만 그럼에도 딸이었으면 했다. 내가 여자로 살면서 느끼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기분이 때때로 비참하지만 나 자신의 인식론적 자산이 되는 것처럼 내 딸 역시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이기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내 딸이 성적 위험과 자존감의 위협을 최대한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이다. 페미니즘을 확장하고 혐오 발언을 하면 땅속을 파고 들어가서 자책할 정도로 창피함을 느끼게 만드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아기에게 위험이 닥친다면 충분히 공감하고 위로해주고 싶다. 그런 다음 괜찮다고 말해줄 것이다. 이것은 여자들의 슬픈 역사라고 회한을 섞어 말하는 대신 같이 싸우며 성장할 것이다. 반성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하는거지 네가 하는게 아니라고, 스스로 자책감을 갖거나 자신한테서 원인을 찾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싶다. 그리고 널 사랑한다고, 꼭 얘기해줄거다.

 

 간만에 고양됐네.

페이퍼 재활용까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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