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를 전공한 근엄한 교수는 아내가 아닌 어린 정부의 집에서 하루 종일 <우먼센스>를 탐독한다. 말러 음악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한 고전음악 애호가는 심수봉의 목소리를 모창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트로트 가수를 정부로 두고 있으면서, 그녀와 함게 하루 종일 트로트를 듣는다. 집안에서는 물론이고 몸에 해롭다는 커피를 어느 장소에서도 마시지 않는 어떤 남자는 애인의 집에 들를 때마다 커피를 청해 마신다... 등등의, 이런 이중적 행동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남편이 아내에게 (혹은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행동과 정부에게 하는 행동이 전혀 틀리는 것은 흔히 관찰된다. 그래서 결혼한 친구가 숨겨 둔 애인을 데리고 와서 우리에게 보여 줄 때나, 그 관계가 우연히 목격되었을 때 우리는 "뭔가 언밸런스하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된다. 하여 충고랍시고 그 친구에게 "네 타입이 아니야!"라고 말해 준다. 하이데거를 전공한 교수나 말러만을 듣던 고전음악 애호가 또는 저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던 어떤 사람이 그렇게 돌변하는 것은 원래 인간이 다중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이란 하나의 자아, 그것도 서로 견딜 수 있는 하나의 자아만을 서로 보여 주고, 또 받아들이기로 한 타엽(연기)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결혼 생활이 서로에겐 속박이 아닐 수 없고, 그 생활이 갑갑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한 인간 속에 깃든 다중적 자아를 한 사람이 다 맡아 보살펴 주면 다행이겠지만, 예를 들면 한 명의 아내가 어머니. 누나. 여동생. 소꼽 친구. 비서. 간호사. 창녀...(점점, 이 무슨 코스프레?)가 되어 남편의 다면적 자아를 모두 어루만져 주면 좋지만, 다면체로서의 남편을 파악하는 일도 쉽지 않을 뿐 아니라 혼자서 그 모든 역할을 다 감당하기란 너무 힘든다. 정부란, 애인이란 그 사람의 또 다른 자아를 분출하고 실현하는 곳이다. 가진 거라고는 돈밖에 없는 재벌 회장님이 빈민가의 옥탑방에 방을 얻어 놓고 정부와 몇 시간씩을 보낸다면,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다. 집안에 미스 코리아를 모셔 둔 남편이 곰보딱지의 못난 여자와 몰래 데이트를 한데도 나는 웃음 지을 수 있다. 아내는 물론 가족과 친지로부터 "인간도 아니야!"라고 매도되는 그 남자들, 그 남자들을 이해한다. (여자라도 물론이다.) 

 당신 남편 혹은 아내의 정부는 당신 배우자의 또 다른(억눌린) 자아를 보살펴 주는 해방자다. 남편은 아내와 정부를 넘나들며 자신의 다중적인 자아에 젖을 먹인다. 그게 일부일처 사회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바람의 정체다. 재미있게도 바람을 피우는 배우자가 아내나 남편에에게 들키게 되는 것도, 그가 지금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전현 낯선 흔적을 어저다 남겨 놓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서다. 

 글을 마치자. 나는 이 재미없는 글을 통해, 바람 피운 남자가 아내에게 잘해 주는 것은 '죄책감'을 상쇄하고자 하는 보상심리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상식을 공박하고자 했다. 물론 그것이 보상심리를 포함할 수도 있지만, 이제는 다른 해석도 허용되어야 한다. 억눌려 있는 또 다른 자아가 마음껏 뛰놀며 물을 마시고 풀을 뜯었으니, 지금 그 사람은 행복한거다. 그래서 부드러워지고 여유만만해진 것이다. 그러니 아내에게 잘해 줄 수밖에. 김수영의 어떤 시 한 편은(귀찮아서 찾지 않는다.), 바람을 피운 혹은 정부를 둔 한국 남자들이 가진 일반적인 심리상태를 포착하고 있는데, 그 시를 통해 추출할 수 있는 한국 문화의 특징은 '주눅듦'이다. 한국인은 대체, 정부를 지니고도 마냥 즐거워할 줄 모른다. 천진난만 즐겁기는커녕 마음 한 켠에 배우자에 대한 죄의식과 보상심리만 잔뜩 키운 채, 그걸 사리처럼 짊어지고 있다. 바람을 피우고 안 피우고를 떠나,

왜 사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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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0-06-05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쭉 정독하다 보니 급 우울해 집니다요. 왜사는지 모르겠다 ㅠㅠ
이론은 쉬운데 관계는 쉽지않죠. 주역 배울때 선생님이 맨날맨날 바람피우라고. 상대방도 바람피게 냅듀라고 하셨는데 성공한 적이 난 있는데 상대방을 냅두는건 매번 실패하더라고요.

Arch 2010-06-08 10:17   좋아요 0 | URL
나도나도. 나는 성공했는데(죄의식도 없었다구요!) 늘 의심하고, 사건 조작하고, 시나리오 작성하고 그래요.

Forgettable. 2010-06-08 11:56   좋아요 0 | URL
시나리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ㅠㅠ

뷰리풀말미잘 2010-06-05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서민을 위한 정부가 필요한 것이죠!

Arch 2010-06-08 10:17   좋아요 0 | URL
피식 ^^
 


커피

하루에 원두커피 두 잔을 기준으로 할 때, 한 달이면 커피나무 한 그루에서 나는 한 해 수확량을 다 마시는 것이 된다. 1년 동안 당신의 커피를 대는 12그루의 커피나무를 키우기 위해, 콜롬비아 농장 노동자들이 5킬로그램의 화학 비료를 사용한다. 커피 재배를 위해서 80년대부터 남미의 원시림들이 베어졌으며 그 바람에 키 큰 나무들에서만 서식하는 새들의 95%가 멸종되었다.


패스트 패션

티셔츠의 원료가 되는 합성섬유 폴리에스테르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폴리에스테르 무게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질소, 유황산화물, 탄화수소, 먼지, 일산화탄소, 중금속이 대기 속에 방출된다. 이산화탄소는 무려 10배. 몇 번 입다 버려지는 '패스트 패션'은 그 자체로 쓰레기를 늘린다.


나무젓가락

나무젓가락은 대개 중국산 백양목, 자작목으로 만들어진다. 메이드인차이나라서 문제가 아니라 중국의 나무들이 베어지는 게 문제다. 중국 대륙에서 숲이 하나 사라지면 그 땅은 모래언덕으로 변해 봄마다 우리나라고 날아드는 황사가 된다. 게다가 버려진 나무젓가락이 다 썩는 데는 20년이 걸린다. 만드는 과정에서는 표백제가 사용된다.


화장지

미용 티슈나 식탁용 냅킨, 주방용 종이타월 등에는 엄청난 화학 첨가제가 들어간다. 물을 잘 흡수하면서도 찢어지는 일이 없도록 습기에 강하게 만드는 습윤지력 증강제를 넣는 것. 화장실용 휴지에는 반대로 물에 잘 녹는 유연제를 첨가한다. 게다가 대체로 한번 인쇄된 종이의 잉크 잔여물을 없애고 재가공해서 만드는데, 그 과정에서 중금속이 미세하게 남는다.




2004년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세계 사회 포럼에서는 '당신의 오줌이 세계 11억 명이 날마다 마시는 물보다 깨끗하다'는 포스터가 내걸렸다. 실제로 물이 부족한 개발도상국 국민 한 사람이 하루 종일 씻고 마시고 청소하고 요리하는 데 드는 물의 양은, 선진국 사람들이 변기를 사용하고 한번 내리는 물의 양과 비슷한 13리터다.


건조기

티셔츠를 세탁하고 전기로 건조할 때는 처음 생산 과정보다 10배가량의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빨래할 때 세탁기에 드는 에너지보다, 전기 건조기에서 2배의 에너지를 사용한다. 가장 좋은 것은 빨랫줄에 널어 자연광에 말리는 것. 40분 동안 내리쬐는 햇볕은 1년 동안 모든 화석 연료에서 얻은 에너지보다 더 큰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컴퓨터

'스크린 세이버'는 '에너지 세이버'가 아니다. 화면 보호장치도 결국 동영상 같은 걸 모니터에 띄우는거니 절전 효과는 없다. 컴퓨터를 자주 껐다 켰다 하는 것이 기계에 나쁘다고 믿어 사용하지 않을 때도 컴퓨터를 켜진 채로 내버려두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못된 믿음. 사용하지 않을 때는 컴퓨터의 전원을 차단해 열과 기계적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편이 오히려 기계에 좋다.


휴대폰

휴대폰의 원료로 쓰이는 원자재 콜탄이 주로 콩고에서 나는데, 이걸 채굴하기 위해 세계 문화 유산인 카우지-비에가 국립공원을 파헤치고 있다. 지구상에 남아 있는 고릴라의 마지막 서식지가 훼손되고 있는 것. 게다가 정부군인 후투족과 반정부군인 투치족의 내전에 전쟁자금을 대주는 것도 이 비싼 콜탄.


마트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다 보면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구입하게 된다. 대량으로 묶어서 팔기 때문에 넉넉하게 사 와 버리게 되는 식재료도 많다. 마트에 오가는 사이 차를 운전하면서 연료를 소모하는 것도 물론.


건물이 아니라 몸을 시원하게, 혹은 따뜻하게 만드는 냉난방을 한다. 한겨울에 반팔을 입는 건 하나도 멋지지 않다.


가급적 차를 몰 일을 줄인다.


노트북은 에너지 소모량이 데스크톱의 1/3이다.


물고기를 잡았다 그냥 놓아줘도 사람의 체온 때문에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설거지, 샤워, 면도, 양치질 할 때는 거품 내고 비누질 할 동안은 수도꼭지를 잠가둔다. 양치질 할 때는 물을 컵에 받아서 입을 헹군다. (이건 Arch 겉절이)


몇 년 전 바자의 지구의 날 특집 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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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그레이효과 2010-06-08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고기를 잡았다 그냥 놓아줘도 사람의 체온 때문에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오 이것 몰랐던 정보군요. '생명'이란 이렇게 보면 참 놀라워요.

Arch 2010-06-09 11:34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알았어요. 손맛이 뭐길래, 낚시하는 사람들 잘 이해 못하겠어요.
 

 작년 이맘때쯤이었던가. 친구가 메신저로 쌈싸페에서 믿을 수 없는 그룹이 나왔다는 말을 전했다. 친구가 말하길 그들의 랩은 웅얼거림과 본격 랩을 넘어선 미치도록 열광할만한거였고, 퍼포먼스는 이전의 인디씬에선 볼 수 없었던 파격 자체였다고 했다. 파격, 비일상, 좀 다른 것, 엇나가고 뒤틀린거라면 환장하는 나로선 친구의 뽐뿌질에 흔쾌히 동참, 그들의 음악을 찾아들었다. 아주 진기한 노래, '싸구려 커피'는 이렇게 내게 다가왔다. 물론 노래만큼이나 홀쭉해진 장기하의 시큰둥한 표정이 더 맘에 들었다. 

 이 책은 장기하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딴따라질'을 추구하는 붕가붕가 레코드의 이야기를 담았다.  책은 군데군데 설익은 냄새를 풍기다 중반을 넘어서 속도를 내기 시작하더니 결국 이 얘기를 하고 싶었구나란, 기승전결 뚜렷하기보다는 인내하여 끝까지 읽는자에게 복이 있으리란 구성을 보이고 있다. 오해할까 말하는데 마지막에 좀 더 분명히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거지 초반에 책이 재미없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한다면 어떨까. 지금 나로선 하고 싶은 일이 도대체 뭔지,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것 같지 않고, 현상유지로도 좀 어려운 처지지만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떨까.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의 함정이었다. 지속하는 데 너무 집중하다 보니 자꾸만 모든 궁리가 돈을 벌어 살아남는 것으로 향하게 됐다. 결국 이런 식이라면 일반적인 음악 사업과 다를 게 없다.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우리가 애초에 하고자 했던 건 그게 아니었잖아. 

 나 역시 마찬가지다. 전통술 만드는걸 배우러 다니고, 글을 계속 쓰고 싶다. 옥찌들이랑도 잘 지내고 싶고, 옥찌들이랑 동생이랑 아빠집을 나와서 살고 싶다. 이 모든 것을 지속하려니 나도 돈 벌 궁리만 하고 있다. 이럴 바엔 차라리 선 돈 벌 궁리, 후 하고 싶은 일이란 프로세스라도 되어있으면 좋으련만. 내가 하고 싶은걸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엄살만 피우고 있다는 생각에 잠도 안 온다. 엄살 아니라고 백번 말해도 내가 엄살이라고 느낀다. 하기 싫은 일 하면서 좀 다져질 수 있는데, 지금도 이렇게 열심히 사는게 아니면서 자꾸 하고 싶은 일로 당면한 과제를 회피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루는 것보다는 나아지는 게 우리가 재미를 느끼는 종류의 일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제 조금씩 나를 알 것 같으니까 다른 내가 되기보다는 지금껏 있는 나를 좀 더 추스려서 살아봐야겠다. 이건 뭐, 고민하느라 지속가능한 즐거운 짓할 시간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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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0-05-06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게. 지속 가능한, 이라는 말에 저런 함정도 숨어 있었군요. 그건 또 생각 못했네.

가끔 (저는 종교가 있으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모냥으로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하고 싶은 일을, 혹은 의미 있는 일을 한다는 건 대부분 돈과 연결되지 않는. 그리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과의 삶을 하고 싶은 것, 과는 무관하게 살아가야 하는. (의사, 변호사, 이런 것들이 진짜 '하고 싶었던'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겠지만요) 그리고, 그건, 어쩌면, 그렇게 그 선택을 어렵게 만듦으로 인해, 정말로 하고 싶은 사람들이 할 수 있도록, 그리하여 그들이 선택한 삶이 더 빛날 수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한 건 아닐까, 뭐 이런 생각. 뭐 좀 두서 없고 정리 안됐긴 한데, 뭐 암튼 아치님 글 읽으니 그렇게 생각했던 게 생각났어요. 아치님은 반짝반짝 빛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거니까, 그것만으로도 내겐 대단하고 훌륭하게 느껴져요.

오랜만에 와서는 이런 쓸데없는 소리만 하다 가요. 잘 지내시죠? 지민이도 잘 있죠? ㅎㅎ

Arch 2010-05-06 16:20   좋아요 0 | URL
두서없고 정리 안 되는건 내가 최고니까 그런 말 마셔요. ^^ 무슨 말인지 어렴풋이 느껴져요. 웬디양님, 오랜만의 댓글뿐 아니라 '이런 댓글' 달아줘서 고마워요.

네, 민이는 병원도 잘 다니고, 가끔 이모랑 싸우긴 하지만 잘 지내요.

머큐리 2010-05-07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나가고 뒤틀린 것이라면 환장하는 아치님이니까...ㅎㅎ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하지 않을까 기대되요
혹 알게되면 저랑 공유하기에요...^^
 

 플릿크래프트씨는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에 사무용 건물을 짓는 공사장 앞을 지나게 되었다. 건물은 아직 골격만 있었다. 그때 빔인가 뭔가 하는 게 10층 정도 높이에서 떨어져서 플릿크래프트 앞의 보도를 박살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지만 플릿크래프트에게 직접 닿지는 않았다. 깨진 보도 조각이 튀어 올라 뺨을 강타했을 뿐이었다. 플릿크래프트는 당연히 머리가 쭈뼛 섰지만, 경악했다기보다는 충격을 받았다. 누군가 인생의 어두운 문을 열고 그 안을 보여 준 것 같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플릿크래프트는 훌륭한 시민이자 좋은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던건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주변 환경에 맞추어 사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교육을 받고 자랐다. 주변 사람들도 그와 같았다. 그가 아는 인생은 공평하고 정연하고 이성적이고 책임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철제 빔의 추락은 인생을 본래 그런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훌륭한 시민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인 그도 사무실에서 식당에 가다가 떨어지는 빔에 맞아 즉사할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는 죽음은 그렇게 마구잡이로 찾아오며, 사람은 눈먼 운명이 허락하는 동안만 목숨을 부지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를 가장 괴롭힌 것은 그런 운명의 불공평함이 아니었다. 최초의 충격이 지난 뒤 그 점은 받아들였다. 그를 괴롭힌 것은 그가 영위해 온 정연한 일상이라는 게 인생의 본래의 길이 아니라 인생을 벗어난 길이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철제 빔이 추락한 장소에서 5미터도 가기 전에 이 새로운 발견에 따라 자기 인생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다시 평화를 되찾지 못하리란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점심 식사를 마쳤을 때 변화의 방법을 찾았다. 인생은 난데없는 빔의 추락으로 그 자리에서 끝날 수도 있으니 그 자신도 난데없이 살던 곳을 떠나서 인생을 바꾸겠다는 것이었다. 그도 남들만큼 가족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 정도 재산을 남겨 주고 떠나면 생활에 문제가 없다는 걸 알았고, 그의 가족애는 결별을 못 견딜 만큼 남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날 오후 그는 시애틀에 갔다. 거기서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그는 두 해 동안 정처 없이 떠돌다가 다시 북서부를 흘러든 뒤 스포케인에 정착해서 결혼을 했다. 두 번째 부인의 외모는 첫 부인과 달랐지만, 두 사람은 차이점보다는 같은 점이 더 많았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충분히 합리적인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결국 타코마에 두고 떠난 것과 똑같은 생활로 빠져 들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건 바로 그 때문이다. 그 사람은 철제 빔 사건 때문에 인생을 바꾸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빔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빔이 떨어지지 않는 생활에 인생을 맞춘 것이다.

<셰익스피어 배케이션>에서 김경은 이 이야기의 첫 부분을 읽고 인생의 의외성에 눈을 떴다고 했다. 그 뒤로 계속 몰타의 매를 읽고 싶었다. 추리소설이다. 게다가 반절이 넘었는데도 스페이드란 작자의 대범함만 기술될 뿐 사건의 전말이며 몰타의 매가 의미하는바에 대해 하나도 알려주지 않는다. 눈동자의 색과 표정으로 사람의 심리 상태를 여지없이 보여준다는 서술 역시 뭔가 마뜩치 않다. 그렇지만 주소를 잘못 기재한 우편물처럼 삽입된 이 부분은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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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 출장 갔을 때였다. 뭣도 모르고 사람들을 따라나섰다 안마를 받게 되었다. 1시간 넘게 안마를 받는데 참 불편했다. 스트레칭 하고 평소 건강 관리를 잘 하면 될 것을 돈 내고 호사를 누린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색다른 경험치고는 상대방의 수고가 몸에 진득하게 남아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원하기보다는 불편한 안마였다. 이 사람이 하루종일 고생하며 일을 하면 몇만원을 벌 수 있다는게, 한국에 가는걸 소원으로 여기는게, 한국에 있는 조선족과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모른다는게 불편했다. 돈으로 누군가의 수고를 살 수 있고, 사는게 관광이라는 방식이 불편했다. 호텔에서 서빙을 하느라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서버를 보면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이 서비스 정신이 없네, 너무 게을러터졌네, 우리 같았음 난리났네라며 찧고 까불었다. 서빙하는 사람들은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 하루종일 서있는 듯 했다.
 
 중국에서의 불편한 경험은 내가 여행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게 했다. 여행을 많이 다니진 않았지만 적어도 어딘가로 떠난다면 내가 쓰는 돈이 정당한 방식으로 그 지역 사람들에게 쓰여지고, 자연이나 동식물을 해치지 않는 여행. 관광보다는 여행을 하리라 맘 먹었다. 

 그리고 고대했던 이 책을 만났다.

 책임 여행이란 단어를 이 책에서 처음 알았다. 인권, 경제, 환경, 정치, 문화, 배움의 주제별로 나눠진 이 책은 내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깨닫게 했다. 착한 여행이 아니라 당연히 내가 해야할 여행에 대해, 점심시간 10분을 빼놓고 계속 다림질을 하는 꿈의 리조트 세탁부 직원에 대해, 자신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 전통 춤을 보여주는 것으로 수입을 대신하는 부시맨에 대해, 여성을 위한 트래킹여행사 쓰리시스터즈의 멋진 희망에 대해, 지역 농산물로 운영하는 호텔에 대해, 파잔 의식(다섯 살 무렵의 코끼리를 엄마에게서 떼어놓아 작은 나무 우리에 밀어넣고 쇠고리같은 따거로 머리와 귀를 찍고 긁어내며 거부할 수 없는 공포를 학습시킴)으로 이젠 코끼리의 나라 태국에서조차 자취를 감춘 코끼리를 살리려는 운동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더 해야할 말이 많은 희망과 이제는 그만둬야할 탐욕에 대해 이 책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것이다.

 식객12의 '진수 성찬 옥자' 편에 보면 네팔 트레킹이 나온다. 

- 포터들은 이렇게 자동차 지붕 위에 타고 여러 시간을 견디며 달립니다. 포터를 위해서 따로 차량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트레킹족의 입맛을 위해 식자재며 조리도구를 이고 지며 산을 오르는 포터를 보며 진수가) 저렇게 머리에 무게를 주면 목 디스크가 생길 텐데! 
라고 말하자, 여행사 사장은 
- 괜찮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런 식으로 짐을 드니까 단련이 됐다고 합니다.

 '희망을 여행하라'를 읽기 전에는 정말 포터들 몫의 자동차까지 마련할 수 없다고, 정말 단련이 되어서 무거운 것도 잘 드는거라고 믿었다.  이 책의 인권 부분에서 네팔 트레킹의 포터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동상이 걸리고, 죽을 고비를 넘기지만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하는 포터들. 이것저것 떼고 나면 몇 루피 밖에 손에 못쥐는 포터들. 통계만 없을 뿐이지 트레킹 중 사망한 포터들은 부지기수일거란 얘기도 나왔다. 다음은 영국의 관광감시 NGO투어리즘 컨선의 활동가의 말이다.

"사람들은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포터들은 보통 사람과 달리 무거운 짐을 가볍게 나를 수 있고, 높은 고도에서도 고산증 따윈 상관 없고, 영하의 날씨 속에서 슬리퍼에 면바지만 입어도 감기에 걸리지도 동상에 걸리지도 않는 슈퍼맨 같은 존재라는 이상한 믿음을. 하지만 히말리아를 오르는 많은 포터들은 낮은 구릉지대에서 농사를 짓다가 가난에 못 이겨 산에 오르는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죠."

 그들을 가난하게 만든건 어처구니없는 다국적 기업과 관광 개발을 위해 그들을 살던 지역에서 쫓아낸 자기 나라의 정부다. 하지만 그들을 외롭고 쓸쓸하게 하는건 멋진 여행을 하겠다고 다른 것들은 눈감아버리는 관광객들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본다. 굳이 다른 나라까지 가서 고추장을 찾고 우리나라 음식 아니면 안 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한국 사람들. 무서운 여행욕의 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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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3-23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좋았어요. 별 다섯이 아깝지 않은 책.
너무 극성스러운 것 아닌가, 하며 집어들었으나 그 `극성'이 나의 무식임을 알게 되었습지요. 읽은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코끼리 길들이기는 아직도 생각나요. 생후 몇개월짜리 아기 코끼리를 거의 죽음에 몰아 훈련시키는 것. 이 책으로, 생명과 윤리에 대한 개념을 좀 얻게 되어 그나마 다행입니다.(제가 그렇단 이야기)

Arch 2010-03-23 10:22   좋아요 0 | URL
저도요. 막 읽고 싶긴 했는데 이거 너무 오바하는거 아닌가 싶었거든요. 결국 쥬드님 말처럼 저도 그냥 제가 무식하고 모자란 탓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걸 알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