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 나갈 채비를 했다. 처음에 저수지인 그곳을 봤을 때는 차로 북적이는 도로와 아파트 사이에서 녹지 조성을 위해 구색을 맞춘 공원이라고만 생각했다. 가서 볼수록 낮과 밤, 저녁의 풍경이 다르고 의도적으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도도 낮춰서 소란스럽지 않고 분위기가 은은하다. 은은한 분위기 속에서 젊은 연인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는 '나만' 안다. 그 동안은 철봉에 매달리거나 공원을 한바퀴 도는게 다였지만 얼마 전부터는 에어로빅을 한다. 전에 한번씩 에어로빅을 하는 분이 지자체에서 지원을 받아 정기적으로 운영하는 것 같다.


 어두운 조명은 야외 에어로빅에 생기를 준다. 유난히 빠른 음악에 맞춰 온몸을 흔들어대는 '아는 사람'을 보면 그게 누구라도 살짝 민망할 것이다. 모두들 누군가의 민망함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저 힘차고 절도 있게 강사분을 따라하면 되는 것이다. 희미한 가로등불에 어렴풋이 보이는 격렬하게 흔들리는 엉덩이는 섹시하지 않다. 모처럼 공원에 왔거나 산책을 나온 연인들이 보기엔 생뚱맞다. 누군가 환호하지 않아도 묵묵히 동작들을 따라하고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녀들은 그렇게 그 저녁의 어둠에 빠져있었다.


 중국에 갔을 때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율동을 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어렵지 않은 동작을 부지런히 따라하는 사람들 틈에서 눈꼽도 떼지 않고 나도 같이 한 적이 있다. 전문적이지 않은 동작은 내 안에 숨겨진 댄스본능을 일깨우는건 아니고 그냥 따라해보고 싶은 의욕을 줬다. 땀날 정도는 아니지만 적당히 몸을 움직이고 안 쓰던 근육을 늘리는게, 다른 사람들이 몸을 움직이는걸 보는게 말이다. 


 에어로빅을 따라하는 사람 중에 꼬마가 한명 있었다. 자기보다 큰 자전거를 타느라 춤 추는건 거들떠보지도 않는 지희가 아이랑 같이 춤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지희는 나에게 귓속말로 어린 애가 야무지단다. 5살 먹은 아이는 동작을 곧잘 따라했다. 언니처럼 한다고 자기도 언니 귀에 귓속말도 해가며 나를 가리키며 아줌마가 언니 엄마냐며 묻는다. 발그레한 볼과 건강해보이는 긴 머리를 찰랑이며 춤을 추는 아이와 그런 아이를 야무지다고 하는 지희와 저녁을 많이 먹었으니 더 가열차게 몸을 움직여야한다는 세속적 욕망에 휩싸인 내가 그렇게 한참동안 몸을 움직였다.


 몸이 쉬이 지치자 지희에게 가자고 했다. 으례 그렇듯 나는 아이에게 엄마랑 같이 왔느냐, 엄마도 같이 에어로빅을 하냐고 물었다. 아이는 저만치에서 호수 근처 난간에 기대어 있는 남자를 가리킨다. 엄마랑 안 왔나보네. 집으로 돌아가는 횡단보도 앞. 아이를 안은 남자가 앞에 있다. 그 아이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지 얼마 안 돼 아이는 어두운 건물 속으로 들어간다. 5살이고 통통한 볼을 가진 아이였다.


 이삿집에서 다녀갔다. 포장이사를 할지 일반이사를 할지, 내가 알아본걸 보여주며 이야기를 나눴다. 화장기 없는 여자는 품이 큰 작업 바지를 입었다. 목에는 튀어나온 점이 몇개 있고 손가락은 부어 있었다. 설득적이지도 저자세로 계약할걸 사정하지도 않았다. 나는 이런 류의 감정이 낯설다. 더 이상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분과 계약을 했다. 정자체로 또박또박 써진 글씨와 이사를 할 때 준비해야할걸 말하는 정감있는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여자는 나가면서 아이들이 어렸을 때 맛있는걸 많이 해주지 못한게 아쉽다는 말을 했다. 먹고 살기 바빠서 소홀했는데 지금은 다 커서 알아서 먹고 다니는게 서운하다고. 저녁마다 뭘 해먹어야할지 고민하던게 떠올랐다. 


 대부분의 저녁엔 그저 가만히 밤이 깊어가기를 기다린다. 숙제를 끝낸 아이들이 다투지 않고 조용히 잠들기를, 나 역시 졸음이 스스르 몰려오길 말이다. 어떤 날은 10시만 지나도 잠이 쏟아지고 다른 날은 12시가 넘어도 잠이 오질 않는다. 어쨌든 베개에 머리를 대면 바로 잠이 든다. 엄마가 싸다고 산 편백나무 베개이다. 황토색 물이 들었고 베갯잇을 묶어서 속을 고정시키는 옛날식 베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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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10-31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에서든 좋은 밤을 즐겁게 누리시기를 빌어요.
새 보금자리도 옛 보금자리도
모두 내 삶을 예쁘게 이끄는
아름다운 곳이겠지요.

Arch 2012-10-31 10: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맥거핀 2012-10-31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글이 참 좋아요.

Arch 2012-11-01 19:49   좋아요 0 | URL
다른 누구보다 맥거핀님이 그렇게 말해주니까 저는 완전 좋아요 ^^
 

 지난한 연애를 돌아봤을 때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뭘 감당할 수 있고, 어떤걸 좋아하는지 모르면서도 연애 상대에겐 그 모든 해답을 구해왔다. 연애지상주의자가 아니라 연애구원주의자였다. 구해왔는지조차 몰랐는데 그랬더라고, 싶은 마음. 자립적이고 주체적인 어엿한 여성이란 희미한 자아상은 그럴 때마다 뒷걸음치기 일쑤였다. 어쩌면 내것을 바쳐서 누군가를 사랑하기보다는 내 감정대로 하고 싶은, 내가 우선인 연애만 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지금의 그를 만났다. 


 우리 관계에는 부침과 싸움과 봄기운 충만한 순간들이 반복하며 찾아왔다. 직장처럼 너무 익숙해서 얼굴 표정만 봐도 몇시간 후에 어떤 증상이-우울, 시기, 질투, 분노 등등- 나올지 예감할 수 있는 관계 말이다. 지금 표정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내 기분도 모르겠는데 표정만으로 상대를 어떻게 읽어. 심리게임을 자주 했으며 자주 하다보니 우리가 게임을 하는건지 진심으로 서로를 대하는지 헷갈릴 때도 있았다. 안 먹던 술을 심심할 때마다 먹어대고 장사를 할까, 이사를 갈까, 다 때려치우고 여행을 갈까하면서 적금 통장의 늘어나지 않은 잔고를 걱정했다. 욕구불만일 때는 그의 팔뚝을 꼬집으며 내겐 부족한 사랑을 바라는 이 사람 때문에, 혹시 그런건 아닐까란 지지부진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신기'를 동원한 누군가의 말로 지지부진한 우리 관계가 정말 잘못된건 아닐까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고 급기야는 '정말 헤어지는' 일까지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정말 헤어지진 않았다. 또 하지만, 맘 속엔 항상 이 사람은 정말 내가 평생동안 같이 지낼 수 있는 사람일까란 미심쩍음이 분수도 모르고 자라기 시작했다. 옷차림을, 활동반경을 터치하는 것도 못참겠고 전망이 보이지 않는 관계란 것도 견딜 수 없었다. 전자야 평균적인 가정에서 그럭저럭 자란 대한민국 남자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후자는 상당부분 내 책임인데 나는 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기 시작했다. 남 탓하기가 이렇게 쉬우니 동생들보다 훨씬 키가 작아 옥찌에게 뭐가 부족하냐는 질문을 들어먹을 정도인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어제 '연탄구이 갈매기살집'에서 사장님한테 속내를 털어놓을 때까지도 나는 꿍해 있었다. 불안한 현재, 사그라들어버린 총기 같은 것, 옥찌들과 잘 지내지 못하고 어떻게 살아야할지 감도 못잡고 있을 때 그가 길을 알려줬으면 하는 바람 등등. 그러다 결국 말해버렸다. 그런 것, 혹시 서로에게 잘 맞는 사람이 있는데 삽질하는건 아닐까란. 사장님은 통속적인 얘기를 해주셨다. 이 사람은 따뜻하니까 다른 미욱함도 덜어줄만큼 따뜻하니까 그걸로 된거라고. 나는 자꾸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했는데, 그것만으로 될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어쩌면 나는 주체적이고 자립적이며 합리적이기까지 한 여자 사람이 되고 싶지만 남자 하나 잘 만나 신세 펴고 싶은 만만치 않은 꿈을 꿨는지도 모르겠다. 제길, 난 어리지도 않은데. 누군가 내 삶에 영향을 줘서 나를 좌지우지하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밥벌이의 곤란함을 덜었으면 하는 안이한 맘도 있었다. 취집이란 말에 열을 냈지만 나도 다르지 않다는걸 인정하자니 캥겼고 인정하지 않자니 욕구불만이 생겨버렸다. 결국 애먼 사람만 힘들게하고 말았다. 성향 문제보다 조건이, 현재 감정보다는 안정성이 중요했던거다.


 하지만 정말 이게 다일까. 어쩌면 나는 이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하기 위해 다른 외부적 요인을 가져다 변명하는건 아닐까. 감정이 식었다는걸 인정할 수 없어서, 어떻게 그렇게 살뜰하고 따뜻한 맘이 식을 수 있냐며 항의하는건 아닐까. 


 이런저런 부침을 겪으며 깨닫는건 나는 내가 희생하고 있다는 희생제의에 익숙해서 지금의 관계들도 그 틀로 봐버렸다는 것. 일이 일찍 끝나 옥찌들을 다른 어른보다 좀 더 많이보는건 맞다. 하지만 감정적으론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있다. 그냥 애들 옆에 붙어있는 정도. 애인과 동생과의 관계에서 나만 뭔가를 하는게 아니었다. 내 잘못을 지적하는 대신 그 감정을 받아주는 것도 그들이고 내 생각대로만 하려고 아집을 피울 때 먼저 양보하는 것도 그들이다. 나의 속좁음과 농담에 죽자고 덤비는 객기를 웃음으로 무마하는 것도 그들이고 온갖 불평을 늘어놓는데도 다 듣고 다독여주는 것도 그들이다.


 나는 나보다 더한 감정노동 무임승차자에게 한번 더 데어봐야 좀 멀쩡해지려는지, 그런 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이모양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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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2-10-1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탄구이 사장님과 그런 심오한 이야기를 나누시다니, 아치 님은 제가 막연히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소탈한 데가 있나 봐요! ^^

저는 너무나도 의존적인 스스로를 사십 다 돼서 알았는 걸요, 그동안 삽질한 생각하믄.....^^;; 아치 님, 저같은 사람도 있으니 힘 내요.

Arch 2012-10-14 09:40   좋아요 0 | URL
사장님이 소탈하셔요! 제가 먼저 소탈하진 못해요.

저는 제가 의존적인 스타일인줄 몰랐어요. 어떻게 보면 여성성을 벗어나려고 했는데 사소하고 예민한 지점들에선 여성적인 행동보다는 얌체짓을 종종 하더라구요.

맥거핀 2012-10-13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연탄구이 갈매기살은 맛있지 않던가요, 라고 물어보려니 벌써 입에 침이 괴는군요.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장님이 있는 연탄구이 갈매기살집 좋군요. (물론 막상 가면 그깟 사장님 따위..하며 갈매기살에 정신이 팔리겠지요.)

Arch 2012-10-14 09:44   좋아요 0 | URL
그 거리가 연탄구이 목살집들이 즐비해요. 그런데 그 집은 갈매기살을 주로 팔더라구요. 갈매기살은 생소했는데 한번 먹어보고 완전 반했어요. 고기 먹는 것도 좋았지만 엄마인데 자식에 대한 편견이나 집착없이 얘기 들어주고 얘기하는 엄마 같은 사장님도 좋았구요. 반찬 나르고 예쁜짓하면 소주 한병을 서비스로 딱!

연탄구이 좋아하는 맥거핀님, 뭔가 안 어울려요. ^^

숲노래 2012-10-14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쓰면서 마음이 풀렸기를 빌어요.
글도 쓰고 말도 하면서
맺고 풀기를 슬기롭게 하시기를 또 빌어요.

즐거운 삶을 이루는 벗인지
사랑스러운 꿈을 함께 빚는 이슬떨이인지
빛나는 하루를 찬찬히 일구는 옆지기인지
여러모로 잘 살펴보셔요.

Arch 님 마음속에서는 벌써 어떤 '결론'이 내려졌을 텐데,
그 결론은 두려워할 것도 싫어할 것도 아닌 만큼,
아무쪼록 씩씩하게 새 하루도 맞이하시기를 거듭 빌어요.
 

 저녁을 후딱 먹고 옥찌들과 까미랑 집근처 저수지겸 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 공원에서 옥찌들은 개처럼 뛰어다니고 까미는 애처럼 사랑을 받는다.(어색한 호응) 옥찌들은 운동기구를 하거나 잡기놀이를 한다. 어제는 반년 동안 고장난줄 알고 묵혀둔 자전거에 바람만 넣었더니 씽씽 앞으로 나가서 아이들은 자전거 타는 재미에 밤 깊어지는줄도 몰르고 정신없이 놀았다. 한명씩 돌아가며 자전거를 타고 나는 까미랑 놀거나 운동기구를 했다. 옥찌가 내 곁으로 슬쩍 오더니 이모도 이거 할 수 있냐는 표정으로 철봉 묘기를 선보인다. 묘기라기보다는 그 나이 아이들이면 다 할 수 있는 다리 걸어 거꾸로 매달리기다. 그 나이면 다할 수 있는걸 그 나이의 나는 못해봤다. 한번쯤,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보고 싶었다.


 철봉은 두 다리에 단단한 콘크리트를 바르고 꼿꼿하게 서 있다. 웬만한 무게나 흔들림에도 꿈쩍 안 한다. 나는 철봉의 양팔을 잡고 (그것, 그녀, 그의) 다리를 탄다. 신발이 자꾸 미끄러져 양말을 벗고 매달려본다. 가까스로 철봉 팔에 걸친 다리에 힘을 줘서 간신히 다리를 걸었다. 손에 힘을 주고 몸을 늘어뜨렸다. 아, 나도 철봉에 거꾸로 매달릴 수 있다. 에게, 아무것도 아니잖아. 국민학교 다닐 때는 철봉타는 사람이 정말 대단하게 보였는데. 그때 시도하지 못한 철봉을 서른이 넘어서 타보고 에게, 시시하다고 한다. 


 어쩌면 어렸던 나는 철봉 그거 아무것도 아니니까 한번 해보라는 누군가의 말을 귀담아 듣지 못해서, 누군가의 말이 아니더라도 선뜻 매달려서 해보려고 하지 않아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건 아닐까란 생각을 잠시 해봤다. (정신분석 돋네)


 철봉처럼 땅 위에 굳건히 버티고 서서 어떤 매달림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권태롭다고 징징대기 일쑤인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안정된 직장 대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한다며 공무원 시험 준비하는 친구들한테 일장연설을 해놓고 지금은 평생 나를 고용해주는 직장이 있다면 좋겠단 생각을 가끔씩 한다. 내가 그 티켓을 움켜쥘 수 있느냐는 문제는 뒷전, 그만한 능력도 없으면서 타성에 젖어서 큰일이라고 호들갑을 떤다.


 철봉에 매달려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는 까미를 바라본다. 철봉을 잡은 손을 빼놓고 몸의 다른 부분은 축 늘어뜨린다. 거꾸로 바라보는 풍경은 익숙한 시각으로 바라본 일상적인 풍경과 다르다. 이렇게 살고 싶다. 철봉처럼 살 수 없다면 조금 다르게, 내가 그다지 다른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믿고 꿈꾸는대로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 '몇십년 만에 철봉도 매달려봤는데 조금 다르게 살기가 뭐 어렵겠어.' 막 이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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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10-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스케이트 타면서 비슷한 생각 했어요. 몇번 넘어지면 되는데 넘어지는 게 무서워서 아무것도 못하는구나.
근데 철봉, 전 어릴 떄는 잘 매달리고 돌고 했는데 지금은 못할 것 같은데요. 서른 넘어서 한 게 더 대단해보이는데요.
이런 제가 이상한 건가효 ㅠㅠ

Arch 2012-10-14 09:32   좋아요 0 | URL
옆에서 이모를 놀리는 조카들이 없었다면 저도 스케이트를 못탔을거에요. 놀리면 의지가 샘솟는 유형인지. 지금은 잘 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다시 타려고 하면 또 넘어질게 걱정되고 그러니까.

철봉은 참 좋은 기구예요. 막 매달려도 꿈쩍도 안하고 말이죠. 아 도는거, 저 그거 정말 해보고 싶어요! 매달리기 밖에 못하고 있어요.
 

 회사에서 그림자처럼 지내고 있다. 자기 일만 하는게 아니라 같이 어울리는 것도 일의 한 부분이건만 그 노릇을 안 하니 있는 듯 없는 듯 할 수 밖에 없다. 항상 낯선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며 여행을 꿈꿨었다. 학교 졸업하면 안 올줄 알았던 모두와 어색해요 상황. 어른이 되고서 찾아온 낯선 상황에서 나는 수동적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너희들과 친해지겠어, 의례적으로 잘 지내보겠어란 제스처도 없다. 내 책임이다. 커다란 벽이 있다면 하얀 분필로 '다 내 잘못이야'라고 쓰고 싶다. 나와 등을 진 사람이 호들갑을 떨며 사람들을 불러모을 때 콧방귀를 꼈고 얼마 안 가 서로 소원해질거란 잘못된 예상을 했다. 나와 등을 진 사람과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이 조직을 견딜 수 없어하기만 했던, 견딜 수 없지만 조직에 속해야한다면 참을만한 수준으로 만들 노력을 하지 않았던 내 잘못이 더 크다.


 그래서 페이퍼를 쓸 수 없었다. (그래서 페이퍼를 쓸 수 없었다 시리즈라도?) 책을 꾸준히 읽고 일기도 가끔 쓰는데 페이퍼를 쓸 수는 없었다.  실제로는 물론 추상적으로도 행복하지 않았고 쌓인 감정들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게 늘 우악스러워서 내가 쓰는 글에도 자신이 없었다. 그저 끄적이는걸 두고 자신 운운에 살짝 민망하기도 하지만 좀 그랬다. 


 그들과는 애매하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그럭저럭 잘 지내는 것 같다. 거의 아빠뻘 되는 아저씨들은 나의 고지식함을 '바르고 똑소리남'으로 받아준다. 그게 문득문득 고마울 때가 있다. 격 없이 구는 것도 귀엽거나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예의바른 행동이 아니면 어떡하지, 이런 말을 꺼냈다고 나를 미워하면 어떡하지 고민하고 있는데 너무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말하는게 더 좋다고 얘기해주는 어른도 있다. 자식 이야기에 돈 버는 이야기 하다가도 딸뻘 되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고 투정을 부리면 당신 살아온 얘기를 한다. 어, 그건 내 얘기랑 상관 없다고 생각하다가 위로가 너무 흔해서 위로 받았다는 말은 순도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 말에 위로받는다.


 나는 아저씨들이 얘기할 때마다 '우린 형님 세대랑 달라요', '자기계발 책에서 다 나온 말이에요.' 라고 저항을 한다.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라고 하는데 사회적 안전망이 안 되어있는데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고 건방을 떨기도 했다. 책에서 읽은 얘기를 앵무새처럼 읊으며 나의 게으름을 변명한다. 하지만 그 모든 얘기가 '하면 된다'에서 나온 게 아니란걸 어렴풋이 느낀다. 개인을 벼랑 끝으로 밀어놓고 '하면 된다'라고 세뇌시킬 땐 자기계발 피로가 더해지지만 내가 할 수 있는한 힘껏 하지 않는 사람은, 그래서 더더욱 자책하는 사람한테는 때론 '하면 된다'가 지금을 이겨내는 주문이 될 수도 있으니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다시마와 멸치, 아몬드를 같이 먹으면 묘한 맛이 난다. 이 조합을 권해준건 직장내 다른 부서의 어른이었다. 몸에 좋은 것만 드시는 것 같아 맛없지 않냐고, 생다시마까진 좀 그렇다고 했는데 한입 먹는 순간 나도 반하고 말았다. 다시마의 질긴 감촉이 입에서 흐물해지는 동안 짭짤한 멸치를 씹는다. 둘의 짜고 강한 맛을 아몬드의 텁텁함이 쓱 잡아주면 아, 이거는 어른만이 아는 맛이구나 싶어진다. 이건 이래서 힘들고 이건 저래서 고달프다고 징징거려도 웃으면서 받아준다. 그리고 나를 비난하거나 평가하는 대신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나는 지금을 견딜 수 없어서 자꾸 핑계를 대고 이유를 찾고 의미를 갖는다며 회피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아, 너무 심각해.


 어제는 그 분의 지도(?) 아래 15일 동안 전기밥솥에 보온으로 숙성시킨 마늘을 깠다. 바로 꺼낸 마늘은 따뜻하고 촉촉했다. 혹시 그 마늘을 먹어본 사람이 있을까. 다시마와 멸치, 아몬드 조합보다 더 맛있다. 젤리처럼 촉촉한데 알싸한 마늘향이 나고 뒤끝이 흔적없이 옅게 아린 마늘 말이다. 좋은거 먹고 고민 대신 생각만 하고 누구 미워하지 않으면서 살면 좋겠다. 그냥 살면서 천천히 알아가면 되는데 재미없게 늘 심각하다. 어떨땐 내용도 없다. 그냥 살았다고 말한 누구는 요즘 외롭다고 온갖 곳에 푸념을 하고 다닌다. 그걸 보면 또 그냥 살면 안 될 것 같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십오 초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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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2-09-21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Arch님 하얀 분필로 다 내잘못이야 하고 쓰신다면 제가 슬쩍 다가가서 흔적없이 싹싹 지우고 싶은데요....왠지 막 그러고 싶어요...(' ');;;;

Arch 2012-09-24 11:10   좋아요 0 | URL
아른님, 너무 감동적이에요. 감동적이란 말이 식상하고 쓸데없고 빈번하다는거 정말 잘 알지만, 그렇네요.

Forgettable. 2012-09-21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싱크로율 백프로 직장생활인데요?? 만나야겠음ㅋㅋㅋㅋㅋㅋ

Arch 2012-09-24 11:13   좋아요 0 | URL
말만~ ㅋㅋ
뽀는 잘 하고 있을 것 같은데... 조만간 꼭 봐요

맥거핀 2012-09-22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에 들으니 좋네요. 좋은 주말 보내세요.^^

Arch 2012-09-24 11:14   좋아요 0 | URL
좋아요, 좋아... 저는 아침에 듣는데도 참 좋네요.
맥거핀님 고맙습니다.

2012-10-24 1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24 17: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직장인 메뉴얼




  오랜만에 z를 만났다. 예전에 우린 둘 다 직설적이고 센스는 국에 넣으려고해도 넣을 수 없는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z는 정말 싫은 사람과도 의례적으로 얘기할 수 있을만큼 사회성 근육을 키운 직장인 7년차. 그에 비해 나는 아직도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이 못하는 직장생활을 한지 가까스로 2년이 다 돼간다. 나로 말하자면 조금씩 쌓여가던 사회성 마일리지도 한꺼번에 몽땅 잃어버리기 일쑤니 말 다했다. 게다가 z는 경제적인 여유에서 나오는 느긋함까지 솔솔 풍기니 정말 어른 같았다.


  내가 사는 곳의 면면을 z눈을 통해 낯설게 봤다. 생경하고 설레는 일이었다. 인생이 빛나려다 다시 어지럽혀진 책상과 벽에 걸린 사진, 조카들의 간식 취향을 알 수 있는 오디오(오디오 스피커가 얼룩져서)와 새까만 까미까지. z는 그동안 여행한 곳과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의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슬슬 부아가 나기 시작했다. z가 말하는 삶을 나도 꿈꾸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행은 커녕 저녁 시간을 뺄 여유조차 없다. 지구에 노임팩트하고 싶으니 비행기 타는건 좀 그렇다며 여행가서 내가 보고 듣는게 얼마나 되겠냐며 자기합리화를 하는 사이 누군가는 여행을 가고 친구를 사귄다. 내가 여행을 정말 가고 싶은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간절하게 바랐던 도시를 여행한 z가 사정없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며칠 전에는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있는데도 생활 면면이 블링블링한 블로거의 글과 사진을 봤다. 저렇게 예쁘게 꾸미려면 이것저것 많이 사야할텐데 그럼 임팩트 아냐,란 생각은 잠시. 저런 센스, 저런 부지런함, 저럼 의욕과 그 모든걸 가졌으면서도 사실 별거 아니란 태도까지. 아,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일까. EBS에서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자존감 따위가 희박한 나로선 바람부는대로 우왕좌왕한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한탄을 늘어놓고 다니니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다. 그런데도 난 아직 뭔가 뿅하고 바뀌기를, 지금과 다른 인생이 펼쳐지길 바란다. 구체적으로 뭔가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강렬하지도 않다. 그저 지금만 아니면 될 것 같은 바람. 아, 지질지질 아치. 게다가 난 점점 꼰대가 되고 있다. 며칠 전 봉사활동 온 친구들이 열심히 안 하니까 너네 학교 사람 안다며 으름장을 놓는 사람 앞에서 나는 실소했다. 헌데 그 아이들이 아주 본격적으로 까불대니까 나 역시 나이 좀 먹은 어른처럼 굴었다. 아,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


 안철수가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프로를 봤다. 설레거나 가슴이 뜨거워지기보다는 원래 그래야되는거 아닌가 싶었다. 원래 그렇지 않은게 이상한건데 원래 그렇지 않은 일들이 왕왕 일어나니 원래 그랬던게 신선한거다. 신선한 이야기 중에 돈을 좇는 것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다보면 돈이 생기는게 아닐까란 이야기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직장 다니기 싫지만 월급 보고 다닌다며 사람들과 어울리려 노력하는 것도, 직무에 충실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생각났다. 안철수 말대로라면 돈 벌려고 값싼 재료를 넣어 마진 많이 남기는 음식을 만드는 것과 다를바 없이 살고 있었던거다. 신선한 재료로 정성을 듬뿍 담아 조리한 음식이 최고라고 말하고 다니면서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다.


 그러니 누군가의 삶이, 그럴 듯하지 않더라도 의욕이 넘치거나 그저  제대로 살고 있는 삶이 미치도록 부러울수밖에.


 본사에 들러붙어 밥을 먹긴 하는데 딱히 할말은 없는 아까 그 사람이 본사직원에게 빈말드립을 친다. 대답이 영 신통치 않으니 걸음이 빨라진다. 나도 덩달아 걸음이 빨라진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땐 의례적인 관계의 역동적인 드립력에 빵 터졌는데. 그동안은 왜 그렇게 진저리를 치고 여봐란 듯 위악을 부려댔을까. 일 역시 할 수 있는데까지, 지금 내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자는건 자기개발 문구이고......회피하고 나는 돈만 벌 뿐이야가 아니라 처음의 절박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해야겠다. 일이든 생활이든 옥찌들과 같이 지내는 부분이든. 


 오전에 봉사하러온 친구들과 아이스크림을 나눠먹고 TNT폭탄으로 광물을 캐는 스마트폰 게임을 구경했다. 이건 이렇게 바꾸면 좋겠다고, 모처럼 창의력 돋는거 아닐까 싶은 일 계획도 세웠다. 의례적인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진실을 알 때까지 툭툭 던지는 말을 해대는건 모자라보인다고 생각하니 한결 맘이 편해졌다. 알고 있었고 예전에도 다짐했지만 말이다. 며칠 이러다 말까, 아니면 정말 조금은 달라질 수 있을까. 어쨌든






아치, 의지를 보여줘~ 그런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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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2012-08-0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쳇바퀴 돌듯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진짜 여행이 간절해지죠. 어디든 여기가 아니라면! 돈 벌기는 어렵고 쓰기는 이렇게 쉬운데. 나의 생기를 팔아서 돈을 버는 것 같아요. 흑흑.

Arch 2012-08-03 09:48   좋아요 0 | URL
전 돈 쓰기도 좀 어려워요. 돈 쓰고 후회 안 하기도 어렵고. 선택지는 많은데 만족할만한 것은 없고 저게 꼭 필요할까에서 망설여지죠. 생기, 생기. 팔딱거리는게 사라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