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 중에 직원 협동조합이란게 있다. 협동조합 형식을 취하지만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받는 형태이다. 협동조합의 자발성을 추구하지만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아 고용 안전성을 확보하는 취지라는데 이게 참 묘하다. 근로의 주체이면서 고용의 객체인 형태로 일을 하는 아이러니. 자발적인 협동조합에서 노동법의 노동3권을 주장하는게 어렵기 때문에 이 둘을 합친거라고 하는데 자발성도, 노동권도 보장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근로기준법은 최소한의 권익 보호를 위해 존재한다. 노동의 사각 지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법이지만 자영업자나 자발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특히 이곳 농촌에서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어떤 분은 농촌에선 퇴근이 없다고 했는데 실제 그랬다. 이 뜨거운 날에도 밖에 나가서 밭일을 하는 분들 앞에서 정시 출근, 정시 퇴근 주5일 근무 등을 얘기하는건 좀 겸연쩍다. 같은 일을 하는 모임에서 사람들이 여름 휴가 얘기를 하는데 나는 어떻게 하면 농사 짓는 분들을 더 도울 수 있을지에 대해 얘기하는게 더 건설적이지 않을까란 의문을 품었다. 우선 일하는 사람들이 일할 만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는데 동의하면서도 좀 더 헌신적이고 적극적으로 하는걸 바란다.

 

  큰 소명의식이 아니라 책에서 본 것처럼, 신나고 다르게 살고 싶은 바람에서 시작한 일치고 지금 일이 무척 재미있다. 잘하는 것과는 별개로 잘하고 싶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얼마 전에 이곳에서 내는 잡지 취재기자로 인터뷰이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다음날 그분은 고추를 따러간다고 했다. 새벽부터 고추를 따야하나, 잠깐 둘러본 고추밭의 풀은 그렇다치고 살짝 발만 들였는데도 성난 모기들이 우왁스럽게 물어뜯으니 엄두가 안 났다. 그날 내로 마무리지어야할 일도 있었다. 도와드려야하나, 내 일을 해도 되나. 어정쩡하게 있는데 그분이 말씀하셨다. 자신이 편하고 하고 싶은대로 하라고. 그분이 땀내 풀풀 날리며 일하고 있을 때 시원한 오미자차를 먹으며 원고를 썼다.

 

 점심을 차리며 호박으로 나물을 했다.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밥을 달게 먹었다.

 

 그날 그분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느끼는바가 많았지만 그 중 가장 기억나는건 바로 '사명감으로 일하지 말라는 것. 내가 하면 된다는 것이 어느 순간 내가 다 한다로 바뀌면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추구하거나 우리가 바라는 꿈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과 같이 앞으로 나가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고 안달내면 일이 될까. 느리지만 지치지 않게 가는 길. 조바심 내고 다른 사람을 채근해선 안 될 일이다. 변화는 그렇게 조금씩 일어난다.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맘이 무진장 믿기지 않을 정도로 편안해 보여  대체 당신은 바라는 것도 없냐고 (분노와 열등감에 휩싸여서)물었더니 역시나 평온한 얼굴로 이런다.

- 풀이 안 났으면 좋겠어.

 아니, 풀은 불가항력이잖아요.

그 순간, 나는 얼마나 많은 불가항력들을 바랐는지 가슴이 찌릿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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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3-10-04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 맞아요, 그 사명감으로 일하는 이들 때문에 주변에서 얼마나 피로감을 자주 느끼는지, 당사자들은 모른다는 게 함정.

Arch 2013-10-07 14:5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유형이랑 좀 비슷해서 엄청 찌릿했어요.
 

 인사하는 건 쉽다. 낯선 어른에게도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지으며 깍듯하게 인사를 할 수 있다. 시골 어른들은 반갑게 인사하는걸 넘어서서 잘 알지 못하는 내게 안부를 묻고 지금 뭘 하고 있는지 설명을 해준다. 짐을 들어드리는 것도 쉽다. 평상시 비실거리기 일쑤지만 어른들 짐이 그.렇.게 무겁지 않으니 번쩍 들어올릴 수 있다. 가끔 너무 무거워서 대체 이걸 어떻게 집까지 들고갈지 걱정스러울 때도 있지만. 동네 개들과 일일히 인사하고 머리 한번씩 쓰다듬고 고원의 볕이 따갑긴 하지만 그럭저럭 자전거 타면서 출퇴근하는 것도 즐겁다. 그런데 그 다음.

 

 무시로 방을 열어본다거나 처음 본 내게 결혼해서 애를 낳아야한다고 훈계를 한다거나 오지랖 넓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오랜 기간 묵혀둔 애증의 관계 사이에 섰을 때. 시골이 아니라 사람이 있는 곳 어디서나 있음직한 일들이 좀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벌어지는 곳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처신을 해야할지 어렵다.

 

 강아지들과도 마찬가지다. 나만 보면 짖어대고 분을 어쩌지 못해 한바퀴씩 빙빙 돌아대는 강아지가 있었다. 무섭다기보다는 화내는 것마저 귀여운 강아지였다. 일미터도 안 되는 줄에 묶여 하루종일 집을 지키는 강아지가 짠해서 우리집 멍멍이한테 하듯이 얼르고 예뻐해주자 이젠 짖지 않는다. 손을 내밀면 귀를 내리고 다소곳히 있다가 손을 핥느라 정신이 없다. 하지만 요즘엔 무슨 일인지 대문이 잠겨있어 잘 지내는지 볼 수도 없다.

 

 길들이다. 나도 그들도 서로에게 길들여져간다. 대개는 내가 길들여져 간다.

 

 아침마다 서로 인사를 하는 아저씨는 '안녕하세요'란 인사말에서 끝나지 않는다. 어디를 이렇게 일찍 가요, 열심히 자전거 타네, 오늘은 좀 늦었네요, 날마나 일하느라 힘들것어요. 등등. 얼마 전 동네 입구에서부터 아저씨를 만나서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아저씨의 검둥이와 흰둥이가 얼마 전에 아이를 낳았다, 검둥이는 복날에 만오천원에 팔렸다, 검둥이 사료값을 내기가 어려웠다. 눈 주위가 빨간 흰둥이는 폐자재로 만든 집 흙바닥에 누워 있었다. 손가락만한 까만 새끼 강아지들이 쌕쌕 소리를 내며 엄마 젖을 찾는다. 인사만으로도 나는 아저씨가 좋은 사람인걸 안다. 그래서 흰둥이와 강아지들에게 괜찮은 깔개가 필요하고 검둥이는 그렇게 팔면 안 될 것 같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큰 테두리의 이야기를 작게 쪼개면 작은 이야기가 되는 게 아니라 복잡한 이야기가 된다.

 

 어른들은 직접적으로 뭐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대신 빙 돌려서 말한다. 눈치가 없는 나는 반박자 늦고 한박자 후에야 아차 싶다. 툭툭 뱉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켜 화가 났다. 그 말을 전해준 사람한테도 화가 났다.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추접스럽게 술자리에서 뒷말을 해서 정말 서럽고 화가 났다. 하지만 뒷말 말고는 내가 옳지 않았다. 그래서 말을 참는다. 조금씩 참다보니 나중에는 그게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었나 싶은거다. 돋보이고 싶거나 분위기 전환이라는건데 과연 그 말이 그 순간 그런 기능을 했나 싶다. 독하거나 세지 못한 말로 남들을 당황시키며 티끌만한 자존감을 세우려고 했다는건데 대개는 안 먹혔다. 더 세고 독한 말에 찔끔할 뿐이었다.

 

 은유를 이해 못해서 소설이 어렵다고 하는 나는 어쩌면 너무 쉽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하고 싶은 말 다하고, 내키지 않으면 안 하고 혼자 흥분해서 볼을 붉히기 일쑤였다. 직관적인 것에 마음을 열고 자신이 믿는바대로 행동하는 건 아니었다. 내가 믿는 것을 의심하면서 남들처럼은 안 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웠고 고집대로 끝까지 나아가지도 못했다. '내가 하는 게 다 그렇지 뭐'가 일상이었다. 그런데 이젠 인사 정도로 끝나면 안 될 것 같다. 사회적 책임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이젠 좀 알겠으니까. 이건 내 서재의 주제 같은거였던가. 예전에도 느꼈던걸 다시 나답게 호들갑 떨면서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는걸까. 

 

 

 

 

 

 

p.s 불량주부님 책 내신거 축하드려요. 불량주부님 글을 좋아했는데 한권의 책으로 묶여서 나온다니 무척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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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8-05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이네요, 아치님.
:)

Arch 2013-08-07 15:0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다락방님 ^^

네꼬 2013-08-05 1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치님이 보시는 강아지, 저도 보고 싶어요. 인사보다 조금 더 스며드신 다음에 또 얘기해주세요!

Arch 2013-08-07 15:08   좋아요 0 | URL
얘는 나를 보면 고민해요. 짖어야 하나, 꼬리를 흔들어야하나. 그 짧은 순간 이 애 맘이 읽힐 때면 이 아이가 참 사랑스러워져요.
 

 

 체제가 구성원들에게 좀 더 높은 수준의 교양 지식을 요구했다면 태동하지 않았을 어떤 자의식이 생겨나는 것. 객관적인 자기 인식 없이 낭만화된 자기 긍정은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중2병'으로 향하는 지름길.

따라서 정말로 자신을 긍정하는 길은 자기 행위의 무의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한윤형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글과 내가 조우하는 순간이 첫페이지의 딱 이 부분밖에 없었다는 것이 문제. 새로운 언어를 재기발랄하게 설명하는걸 기대했던 탓도 크다. '은근 리얼 버라이어티 강남소녀'와 비슷한 느낌이다. 자기 얘기를 사회적 시류와 섞어 설명하는건데 일단 '자기 얘기'를 하는 당사자의 이야기가 흥미롭지 않다면 그 뒷 이야기에 포인트를 둘 수 없을 것 같다. '키보드 워리어'에서처럼 진영논리나 구태의연한 의견에 기대지 않은 점은 신선했지만 그 역시 아직 여물지 않은 느낌이 든다. 기존의 '말하는 입'과 다른점은 있지만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소문이 대단했던 '이별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역시 마찬가지. 존경받는 언론인 김선주의 세상이야기라는데 날카롭거나 깊지 않다. 사람은 좋을지 모르겠지만 책은 별로였다.

 

 생각을 쓴 글에는 비판적이면서 소설에는 관대한 이유는 뭘까.

 

  얼마 전 정희진 선생님의 '어떤 메모'를 보고 용서에 대해 다시 생각했는데 이 책에도 그와 비슷한 얘기가 나온다. 천지를 잃은 엄마가 화연 엄마에게 하는 말 중

 

사과하실 거면 하지 마세요. 말로 하는 사과는요, 용서가 가능할 때 하는 겁니다. 받을 수 없는 사과를 받으면 억장에 꽂힙니다. 더군다나 상대가 사과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일방적으로 하는 사과, 그거 저 숨을 구멍 슬쩍 파놓고 장난치는 거예요. 나는 사과했어, 그 여자가 안 받았지. 너무 비열하지 않나요?

 

 '완득이'에서 보여준 착한 사람들의 씩씩함, 뻔하지 않은 인물, 직유가 아닌 은유를 쉽고 간명하게 풀어내는 재주는 여전했다. 눈에 보이는 폭력 뿐 아니라 사람 맘 속에 있는 온갖 것들이 제각각 다른 이름으로 밖으로 표출될 때 생기는 긴장감을 잘 풀어냈다. 사람 사이의 미묘한 지점을 잘 짚어내는건 작가의 재능이다. 김려령은 그런 부분을 아주 잘 살린다.

 천지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수순이 좀 도식적이다. 요즘 세상은 자살이 전염병처럼 퍼진 마당이지만 작가로선 설명이 좀 필요했을 것 같다. 오랜만에 새벽까지 읽은 책. 아쉽게도 내 주위엔 책 좋아하는 사람 천진데 다들 완득이를 안 읽어봤단다.

 

 샐럽의 시크한 매력 운운하는 케이블 방송을 볼 때마다 선망 뒤에 항상 무시가 따라왔다. 그래봤자 난 시크함을 위해 노력하지 않을거야. 이러면서.

 

출근하면서 버스 터미널에서 흰머리를 쪽진 할머니를 봤다.

벤치에 앉아 다리 한쪽을 올려놓고선 할머니는 담배를 폈다.

이곳은 시골이고 누군가의 아내이거나 어머니인 그녀는, 혹은 그저 아무도 아닌 그녀는

그렇게 담배를 폈다.

셀럽의 시크함이 매체가 강요하고 주입한 정형화된 시크함이라면

흰머리 그녀는 그냥 멋진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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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 대출증을 만들었다. 처음으로 빌린 책은 두 권.  

 

 이곳 지자체 직원들이 공부를 한다는 책과 언젠가 한번 읽어보고 싶었던 김현의 책. '행복한 책 읽기'에 김현의 사진은 안 실렸다면 좋았겠다 싶다. 날카롭고 섬세한 비평을 읽다 작가 사진을 보니 왠지 어색했다. 작가의 얼굴을 상상한건 아닌데도 말이다. 거즘 내가 다 모르는 소설이라 김훈에 대한 이야기와 김현의 일상을 적은 부분에서 책 귀퉁이를 접었다. 직관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다. 치기로 가득찬 단문이 아니라 확신있지만 오만하지 않고 견고한 문장이다.

 

  얼마 전 한겨레 신문에서도 꾸리찌바에 대해 나왔다. 공유가치창출,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사람들 등. esc만 부지런히 본다. 꾸리찌바를 공부하던 사람들은 그곳으로 배낭여행을 간다.  관광이 아닌 여행을 그것도 태만해보이는 집단의 사람들이 간다는건 내 얘기가 아님에도 좀 설렜다.

 

 

 예전 한겨레21을 읽고 있다, 고 생각했는데 이 기사는 얼마 되지 않았다.

 

 

 

 

 

 

 

 

 파키스탄 총선 얘기가 흥미롭다. 무슬림 국가 가운데 유일한 핵무기 보유국인 파키스탄에는 100여개의 정당이 선거를 치뤘다. 총리로 당선된 펀자브의 사자 미안 무함마드 나와즈 샤리프는 강경한 외교정책을 고수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본 신문 기사에서 버락 오바마가 무인항공기를 이용한 표적암살을 안 하도록 의회를 설득한다고 한다. 샤리프의 강경한 외교정책 영향으로 보인다. 파키스탄은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간 침공의 대테러 전쟁의 병참이자 전진기지였다. 만약 파키스탄이 미국을 돕지 않는다면 아프간에서 병력과 군사장비를 빼오는거나 탈레반의 복귀를 막고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도 없게 된다. 미국으로선 자구책으로 파키스탄이 원하는 '무인항공기 폭격 금지'(안)을 택할 수 밖에 없었을터. 오바마가 국제관계를 평화적으로 풀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속내가 있는 듯하다.  

 

  과테말라 법원은 86살 먹은 몬트 전 대통령에 80년형을 선고했다고 한다. 30년전 집권 당시 저지른 학살과 반인도 범죄혐의를 인정한 결과라는 것. 재산을 빼돌리고 수억원의 경비비용을 쓰는 누구와 비교되는 대목. 그걸 계속 보도해가며 여론의 공분을 일으키지만 법적으로는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니 살인죄로 수감중인데도 지방의 재벌뻘이란 사람은 감옥을 수시로 드나들었다. 암수술 후에 고열에 시달리던 사람의 형집행, 그것도 부도나서 사기죄로 들어간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도 형집행정지가 어렵다는 말만 하더만. 유전무죄, 무전유죄만이 진리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때때로 믿음이 굉장한 설득력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광주의 지혜학교 선생님을 인터뷰한 기사에서는 '지식은 많지만 타자에 대한 배려도 역사의식도 없다면 지식 괴물'에 불과하다는 말이 나온다. '윤창중들은 계속될 것이다' 연속 기사에서 이진경씨는 '뻔뻔한 사회, 한줌의 정치'란 책을 통해  '사적인 이익을 위해 노골적으로 권력을 이용하는 뻔뻔함이 위선을 대신해 권력 행사의 전면에 드러난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나는 내 책도 아니고 내 사돈팔촌의 책이 아님에도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를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나처럼 세상 돌아가는거 모르고 국정원 선거개입에 대해 인터넷 글로만 훓고 있는 사람도 이 책을 읽으면 다른 나라에 대한 안목이 생기니까. 다른 나라를 앎으로써 우리를 알고, 역사를 앎으로써 지금의 상황을 지혜롭게 바라볼 수 있다. (뭔가 좀 두서없는 책 광고다)

 

  윗글과 관련은 없지만 이 책의 많은 미덕 중 한부분을 옮긴다.

 

 우리는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고 컴퓨터를 사용하고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마치 과거와는 다른 존재로 진화한 듯 여긴다. 하지만 진보한 것은 사회에서 주창되는 가치일 뿐 개인의 덕성이 아니며 인간 개개인의 자질은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개인의 주변을 둘러싼 사회의 가치관이 바뀌어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을 뿐, 그것이 효력을 발휘하기 힘든 전장이나 혼란 상황에서 인간의 심리는 쉽게 중세로 회귀하고 만다.

특히 사회가 성숙하지 못할수록 이런 특성은 자주 전면에 표출된다. 우리 사회도 공개적, 사회적으로 증오의 발산이 용인된 대상인 북한과 일본 등이 있다. 이들은 무조건적으로 저주해도 무방하고 때로는 무고한 시민마저 죽어 마땅한 존재로 전락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 스스로의 인간성과 영혼을 훼손하는 짓이다. 비판해선 안 되는 대상은 없지만 마음대로 증오해도 되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잊었을 때 우리는 쉽게 증오 자체의 포로가 되고 만다.

한 문명의 수준은 그 문명이 증오를 얼마나 통제하고 있느냐에서 결정된다. 부의 재분배라든가 사회적 기회의 확보와 함께, 증오를 현명하게 통제하는 문명에서는 일상에서의 평화와 행복을 구가할 가능성이 크다.

중세는 과연 끝났는가. 십자군과 마녀사냥은 과거의 역사일 뿐인가. 나의 증오가 이데올로기.신념으로 포장되어 미움과 폭력으로 발휘되는 일은 이제 다시 없을 것인가. 이 질문의 답은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갈 세상이 던져줄 것이다. 이념이나 이론, 슬로건이나 명분이 아닌 삶 자체가 말이다.

 

 

 그리고 보자마자 설레고 고마웠던 개정판.

 

 정희진이 연재하는 '어떤 메모'에서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에 얽힌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 피해자에게만 평화와 용서를 강요하는 문제의식을 접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암묵적으로든 노골적으로든 용서를 강요하는 상황은 낯선 일이 아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대표적인 예다.

 나는 용서가 저주보다 바람직한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해자의 권력은 자기 회개와 피해자의 용서를 같은 의무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여성주의는 여성우월주의나 얌체 여성을 변호하기 위한 입장이 아니다. '다른 목소리'는 우리 인식이 지평을 넓혀주고 풍요롭게 해주며 자기 중심주의를 돌아보게 한다. 여성주의는 양성평등에 관한 주장이 아니라 사회 정의와 성찰적 지성을 위한 방법론이다.

 

논쟁은 승부가 아니라 참여하는 사람의 입장(지식)과 그러한 입장이 형성된 과정을 교환하는 것

 

 '페미니즘의 도전'은 이번에 읽으면 세번째이지만 여전히 곱씹을만한 책.

 

 아직 책을 읽고 앞으로도 읽을 것이다.

 

 마스터쉐프코리아와 무한도전, 최근엔 진행이 뻔해보이지만 첫회가 인상적인 드라마까지. 책에서 눈을 떼게 만드는 재미는 많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책의 개정판이 나오고, 하나의 팩트를 다양한 시각에서 다루고 나를 여전히 설레게하는건 책 밖에 없는 것 같다. 책을 읽고 같이 얘기할 수 있어 서재가 좋았는데 같이 놀던 친구들은 머리카락 한올 보이지 않는다. 해 저무는 날,  나 홀로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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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13-06-08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 타는 그네는 역시 재미 없죠. 그곳 생활은 어때요?? 난 여기가 너무 싫어요.

Arch 2013-06-10 16:40   좋아요 0 | URL
난 여기가 너~무 좋아요. 이러면 미움 돋을테니 좀 가감하자면 살짝 좋아요.
일이 좀 되긴 하지만 저를 믿어주는 상사와 말 편하게 해도 괜찮은 할머니 할아버지들.
지네에 물려서 식겁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아직 괜찮아요.
 

 버스 정류장에 어르신들이 많이 뵌다. 반갑게 인사드렸더니 내 주위를 둘러싸며 소속과 싹수 검사를 한다. 성실하게 답변했더니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 하 ㅂ 격인가요? 같이 사는 분이 분명 나를 교회 데리고 나올거라는 할머니의 단언에 잔뜩 쫄았지만 씽긋 웃었다. 제1 원칙, 어르신들 말씀에 토달지 않기.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건 그 사람을 이기기 위해서, 내가 옳다는걸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곳에서는 합리적인 접근보다 이곳의 문화적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한다. 그 바탕에서 지역분들을 이해할 수 있다, 고 누군가 얘기해주셨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맞으며 한가로운 잡담이 이어졌다. 할아버지는 그놈 하나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스무고개처럼 말씀을 하신다. 그놈이 왼쪽으로 가라고 하면 왼쪽으로 가고 빙 돌으라면 돌면 된단다. 주체는 그놈이니 그놈의 말을 듣는 사람은 아무래도 운전기사인가 보다.

 

- 북한이 잘못 생각했다니까. 가네들이 부러워서 그러는겨. 그놈도 있고 테레비도 접었다 폈다 하니께 부럽지 않것어. 쪼매만 있으면 테레비를 들고 다님서 볼 수 있것당게

(할아버지 지금도 그러고 있어요.)

 

 하, 본래 성질대로 했다면 이것저것 참견하고 훈수 뒀을텐데, 살짝 아쉬웠다.

 

 분명히 버스 시간표를 숙지했다. 헌데 어제는 조금 일찍 터미널에 도착해선 막차가 7시쯤이니까 어쩌고 하면서 터미널 사진 찍고 해찰을 부리다 2분 차로 버스를 놓쳤다. 헉. 구간별로 시간표가 있는게 아니라 종점별로 있는터라 착각을 했던거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차를 갖고 다닌다. 어른들이 버스가 많이 다닌다고 해서 맘을 놓아선 안 된다. 대부분 한시간에 한대 정도 있다는 소리니까. 이동해야할 일이 많은 사람들은 버스 시간표에 맞춰 움직일 수 없다. 그래서 나도 차를 살 생각을 했다.

 

 중고차를 사면 큰 부담은 없겠지만 차유지비며 보험비를 감당할 수 있을지 계산이 안 나왔다. 이곳으로 이사온건 적게 벌어서 적게 쓰며 살자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씀씀이가 늘어나면 곤란할 것 같단 생각도 있었다. 더불어 이곳의 모든 일상을 여행화 하려는건 아니지만 사람들과 풍경에 닿는 접점이 넓을수록 좀 더 깊고 크게 알 수 있을거란 계산도 있었다. 과연 내 깜냥이 '더 깊고 크게'에 닿을 수 있을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금욕주의는 아니고 그냥 내가 할 수 있을만큼만 궁상떨 정도는 아니게 살고 싶은데 남들은 궁상으로 보면 어쩌나 싶다 내가 남들 눈을 그리 신경 안 썼으니 괜찮겠다 싶다가도 한번씩 버스를 놓치면 또 어쩌나란 걱정도 들고 하는 오락가락한 상태이다.

 

 근무 이틀째

 업무를 인수인계할 분은 다른 일로 출장 중이고 뭔가 일은 벌어지고 나는 뭔가 해야할 것 같은데 감을 못잡고 심부름만 하고 있다. 업무 분장도 없고 단체별 연락처도 없다. 맨땅에 헤딩, 같이 하는 헤딩이면 힘이라도 나겠는데 같은 공간에 있는 분들도 들어온지 얼마 안 돼서 데면데면한 상태. 역동적이고 매순간 보람된 일을 할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왠지. 아냐아냐(자아분열?) 우선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한 책도 읽고 사람들 얘기도 들어봐야지. 너무 조급해하지 말아야겠다.

 

 낮에 있었던 뿌듯한 일 하나

  대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을 왔다. 의심쩍은 시중 도시락 대신 이곳 지역 협동조합에서 마련한 점심을 먹었다. 협동조합이 생긴지 얼마 안 돼 그릇이 별로 없어 일회용품을 썼다. 예전 같으면 많은 쓰레기가 그냥 버려지는걸 보고만 있어야했는데 지금은 종이는 종이대로 분리수거를 했고 컵도 다른 곳에서 급하게 얻어와 종이컵을 안 썼다. 누구 하나 아치 너는 왜 유난을 떠냐고 하는 사람도 없고 (다들 너무 바쁘다) 대학생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옆에서 도와주고 감사합니다, (잘못 버리면) 죄송합니다라고 하니 힘이 났다. 분리수거 열심히 해도 이 지역에선 폐지를 수거하지 않아 한꺼번에 쓰레기를 가져간다는게 함정.

 

  돈 때문에 택한 게 아니라 하고 싶어서 택한 첫 직장이다. 운이 좋았지만 앞으로도 좋을지 모르겠다. 아직은 좋다. 직장을 견디거나 어떤 일들에 대해 모른척하지 않아도 되고 주관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으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첫 마음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고 아치가 아치에게 얘기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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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13-05-04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축하해요 아치 님! 하고 싶어서 택한 첫 직장이라니, 좋습니다 좋아요.
저는 차를 사는 쪽으로 한 표. ㅎㅎ 주로 집에 두고 버스만 탄다 하더라도 있으면 왠지 급할 때 (막 아프다거나 ㅠ) 써먹지 않으까요.

Arch 2013-05-06 13:51   좋아요 0 | URL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무슨 강 같은게 흐르는 것 같지만 아직은 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욕이 생겨요.
그러니까요. 그런데 왠지 지금은 좀 이래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