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사랑의 잎' 때문에 <정확한 사랑의 실험>을 빼들었다. 신형철의 글을 읽으면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이선희가 부르는 J에게를 들으며 음치인 내가 카타르시스를 느낀 상황과 비슷한 게 아닐까 싶은데, 펼쳐든 부분이 마침 '타인의 불행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글이 참 분명하고 겸손하다. 맥락을 따져주고 경계를 넘나드는 강의가 매력있는 것 처럼 신형철의 글 또한 그렇다.
많은 훌륭한 이야기들의 원천이 대체로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불행인 것은 왜인가. 말년의 프로이트는 인간이 행복하기보다는 불행해지는 데 많은 재능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착잡하게 인정해야만 했다. "인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의도는 '천지창조'의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문명속의불안>1930.2장) 세 종류의 고통이 우리를 지속적으로 위협하기 때문이라는 것, 자주 고장 나고 결국 썩어 없어질 '육체', 무자비한 파괴력으로 우리를 덮치는 '세계', 그리고 앞의 두 요소 못지 않게 숙명적이라 해야 할 고통을 안겨주는 '타인'이 그것들이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 본 영화들만을 생각해봐도 <아무르>는 육체 때문에, <라이프 오브 파이>는 세계 때문에, <더 헌트>는 타인 때문에 불행해진 인간들을 그렸다고 할 만하다. 이런 식이니까 비평적 글쓰기라는 것은 많은 경우 타인의 불행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 난감한 일을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원칙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불행의 해석학'이 갖추어야 할 '해석의 윤리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결혼을 한 뒤 과연 내가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불안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게다가 부시 정권에 대한 불신이 싹 텄고, 미국 경제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런 느낌을 담아 시나리오를 쓴 것이다. 말하자면 커티스는 당시의 나다."('위기의 중산층',<씨네21>,831호) 제프 니컬스 감도기 이렇게 말하기도 했으니, '금융 대란 이후 중산층의 불안을 표현한 영화'라는 일각의 지적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표현들과 함께 하나의 텍스트는 너무 빨리 보편화되고 만다. 앞에서 사용ㅇ한 개념을 다시 가져오자면, '주석'은 최대한의 정확성을, '해석'은 최대한의 단독성을, '배치'는 최대한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작업이다. 어떤 텍스트가 최대한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배치'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텍스트를 세상에서 하나뿐인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며, 그것이 바로 '해석'이라 불리는 행위의 이상理想일 것이다. 특히 그 텍스크가 타인의 불행을 다룬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타인의 불행을 놓고 이론과 개념으로 왈가왈부하는 일이 드물게 용서받을 수 있는 길 중 하나는 그 불행이 유일무이한 것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래서 쉽게 분류되어 잊히지 않도록 지켜주는 일이다. 1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