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부류의 인간이든 나름의 표식과 특징, 나름의 미덕과 악덕, 나름의 죄악이 있는 법이다. 황야의 이리의 특징은 그가 밤의 인간이라는 점이다. 아침은 무서운 시간이고, 좋은 일이라고는 일어나는 적이 없는 불쾌한 시간이다. 어느 아침이고  그가 정말로 즐거운 기분을 가져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오전 중에 좋은 일을 하거나 기발한 착상을 떠올리거나, 자신이나 남을 즐겁게 해준 적도 없었다. 오후가 지나면 비로소 서서히 몸이 달아오르고 활기가 차올랐고, 저녁 무렵에 되어서야 -물론 일진이 좋은 날에 해당되는 얘기지만- 활발하고 생산적이 되어서, 가끔은 정열적으로 일하면서 행복해지는 거였다. 고독과 자유에 대한 욕구 또한 이러한 생활과 관련이 있었다. 자유에 대하여 그 보다 더 깊고 열정적인 욕구를 가진 사람은 없었다. 젊은 시절, 가난 때문에 호구를 위해 애먹던 시절에도, 그는 한 조각 자유라도 건질 수만 있다면 차라리 다 떨어진 옷을 입고 굶더라도 그쪽을 택했다. 66

 

이 경우 <자살자>는 개성화에 대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다시 말하자면 인생의 목적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완성과 실현에 있지 않고, 자신의 해체, 즉 어머니에게로, 신에게로, 전체에게로 돌아가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러한 천성을 가진 사람들 대부분은 실제로 자살을 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자살이 죄악임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긴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그들은 자살자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삶에서가 아니라 죽음에서 구원을 보며, 자기 자신을 바치고, 내던지고, 지워버리고, 시원(始源)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70

 

저 낯선 세계의 소리가 나의 호기심을  강렬하게 자극했고, 나는 종종 몇 시간이고 그것에 대한 생각에 흠뻑 빠져들곤 하였다. 그럴수록 <보통 사람은 입장할 수 없음>,<미친 사람만을 위한 것임>이라는 경고가 나에게 와닿고, 저 세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걸 보면, 나는 <보통 사람>과 거리가 먼 미친 사람임에 틀림없다. 아뿔싸, 나는 오래전부터 보통 사람의 생활, 정상적인 사람의 삶과 사고와 멀리 떨어져 살아온 건 아닐까? 그렇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나는 이 부르짖는 소리를 충분히 이해했다. 이성과 속박과 시민성을 떨쳐버리고 광인이 되라는, 영혼과 공상의 풍요롭고 규범 없는 세계에 몰두하라는 요구를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102

 

나는 이 두려움을 벗어날 길을 찾지 못했다. 절망감과 소심함 사이의 싸움에서 오늘은 어쩌면 소심함이 승리할지 몰라도, 내일 또 매일 새로운 절망이 내 앞에 맞서 있을 것이다. 그것도 자기 경멸에 의해 고조된 절망이. 나는 언젠가 마침내 그것을 저지를 때깢는 면도칼을 손에 잡았다 다시 집어던지기를 되풀이할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해치워버리는 편이 낫다! 나는 마치 겁먹은 어린애를 타이르듯 내 자신을 차근차근 설득했다. 그러나 어린애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달아났고 살고 싶어했다. 그는 덜덜 떨면서 나를 온 도시로 끌고 다녔다.

 

내가 절망적으로 동경한 것은 지혜나 이해가 아니라, 체험과 결단, 충격과 도약이었다. 149

 

내가 당신 마음에 들고 당신에게 중요해진 건 내가 당신에겐 일종의 거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내 내면에는 당신을 이해하고 당신에게 답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요. 본래 모든 사람들은 서로서로 상대를 위한 거울이어서, 서로 답을 주고받고 서로 조응하는 거지요. 그러나 당신 같은 기인들은 괴팍하고 쉽게 마술에 걸리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고 읽어낼 수도 없고, 세상에 어느 것 하나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요. 153

 

대개 동물들은 슬픔에 싸여 있어요. 그녀는 말을 계속 했다. 그리고 한 인간이 매우 슬퍼하면, 치통이나 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무언지, 인생이 무언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슬퍼하게 되면, 그런 사람은 언제나 얼마간은 동물과 비슷하게 보여요. 그는 슬퍼 보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진실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당신이 그렇게 보였어요. 황야의 이리씨. 당신을 처음 보았을때 말이에요. 162

 

왜냐하면 내가 당신과 같기 때문이에요. 나도 당신처럼 외톨이이고, 당신처럼 인생과 인간과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고, 진지하게 대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인생에서 지고의 것을 요구하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조야함에 만족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죠.178

 

축음기는 금욕적인 정신으로 가득 차 있던 내 서재의 공기를 더렵혔고, 낯선 미국풍의 춤곡들은 내 정돈된 음악세계를 교란하면서, 아니 파괴하면서 밀어닥쳤다. 이처럼 모든 것을 해체시키는 두렵고도 새로운 힘이 지금껏 그렇게 정확한 윤곽을 지니고, 그렇게 엄격하게 폐쇄되어 있던 내 삶 속으로 밀려 들어온 것이다. 인간이 천 개의 영혼을 지닌다는 <황야의 이리론>과 헤르미네의 말은 옳았다. 182

 

나는 우연히 잘 할 수 있었던 서너 가지 능력과 수양만을 정당화하면서 하리라고 하는 사내의 상(像)을 그려내어 본래 문학, 음악, 철학에 지극히 빈틈없는 교양을 갖춘 전문가인 그자의 삶을 살아왔던 것이고, 그러면서 내 개성의 나머지 부분, 즉 그 밖의 모든 능력과 충동과 노력의 카오스를 부담스럽게 느껴 <황야의 이리>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182

 

옮겨 적다가 멈춘다...부분이 의미가 없다. 계속해서 필사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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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가 약자를 혐오할 때
@patriamea님의 트윗을 확인해 보세요 : https://twitter.com/patriamea/status/633773926535970817?s=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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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코엑스 갔더니 ㅂㄷ가 ㅇㅍ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서관에서 너덜너덜해진 책들을 보며, 4대강 예산이 생각나 울화가 치밀던 중이라 그랬는지. 평소 식겁하게 싫어하는 그 번잡한 공간 속에 의외로 깔끔하고 쾌적한 ㅇㅍ은 겁나게 좋더라. 한국소설 코너에 있는 책들이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보태준 바도 없이 질책하는 마음이 든 것도 미안해서. 8월이 가기 전에 한국소설도 두어권은 읽어야지 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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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08-16 07:57   좋아요 0 | URL
ㅂㄷ에서 ㅇㅍ으로~ ㅎㅎ
`투명인간`과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저도 참 아끼며 읽은 책들.^^

2015-08-16 0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책읽는나무 2015-08-17 15:17   좋아요 0 | URL
반디앤루니스 서점 맞는가요??
다른이름의 서점으로 바뀐건가요?
옛날,옛날에 그서점을 즐겨갔었는데ㅜ

2015-08-21 03: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19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21 0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런 배열이 내 것이었으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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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의 기타 선율만 들으면 이상하게 가슴이 무너진다.

어제 전철에서 흘러간 팝송 시디를 파는 아저씨가

이 곡을 틀어줬는데, 이런 경로로 구입한 두 세트의 시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덜컥. 사 버릴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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