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condo라는 이 농장의 이름은 외할아버지를 따라 처음 여행을 다녔을 때부터 줄곧 내 관심을 끌었다. 이제 어른이 되고 보니 내가 그 이름의 시적 울림을 좋아했던 것이다. 나는 구가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도 없고, 나에게 그 이름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문해 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내 책 세권에 등장하는 상상의 마을에 그 이름을 붙였다. 우연히 어느 백과사전에서 그것이 나무의 이름이라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꽃도 피지 않고 열매도 맺지 않으며 가볍고 스펀지 같아 카누나 부엌 세간들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세이바 나무와 유사한 열대 나무, 나중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통해 탕가니카에서 마콘도라 불리는 유목 민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 부족 이름에서 나무 이름이 유래했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 하지만 그 문제에 관해 확인해 보지도 않았고 나무를 직접 본 적도 없었다. 사실, 바나나 재배 지역에서 여러 차례 그 나무에 관해 물었으나 내게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그런 이름의 나무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34쪽

어머니의 얘기에 등장하는 수치는 아주 미약했고, 그 무대도 내가 상상하던 대단한 드라마와는 달리 너무 시시했기 때문에 일종의 실망감마저 들었다. 나중에 생존자들과 증인들을 만나 얘기를 듣고 언론 매체에 보도된 내용과 공식 문서들을 조사한 결과, 진실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체제에 순응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사망자가 없었다고 말했다. 극렬 반대파들은 사망자가 100명이 넘었는데, 그들이 광장에서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는 것을 보았고, 썩은 바나나를 버리듯 바다에 버리기 위해 기차에 싣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증언했다. 그래서 내가 파악하고 있던 진실은 그 두 가지 극단 사이 어느 불확실한 지점에 영원히 머물러 있었다. 그럼에도, 그 기억은 끈질기에 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소설들 가운데 하나에 학살 사건에 대해 정확하게 언급했으며, 내 생각 속에 여러 해 동안 들어 있던 학살 사건에 대한 공포도 언급했다. 그렇듯 나는 그 드라마의 서사시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사망자 수를 3,000명으로 잡았고, 결국 실제 삶은 내 판단과 작업의 의미를 제대로 평가해 주었다. 불과 얼마 전, 그 비극적인 사건을 기념하는 어느 식장에서, 연설 순서가 된 상원의원이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무명 순교자 3,000명의 넋을 기리는 1분 동안의 묵념을 제의했던 것이다. 96쪽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썰렁한 어느 학교 기숙학생이던 사춘기 시절에는 한밤중에 울면서 잠에서 깨기 일쑤였다. 내가 이렇듯 작가로서 일말의 후회도 없이 늙을 필요가 있었던 이유는, 까따까의 외갓집에서 외조부모가 겪은 불행은 그들이 항상 자신들의 향수 속에 함몰되어 있었다는 것이며 그들이 그 향수를 떨쳐 버리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 깊이 함몰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실제 까따까에 살고 있었지만, 세상에는 다른 곳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우리가 지금도 달리 부를 방도가 없어 '쁘로빈시아'라 부르고 있는 빠디야 지방에서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창문 밖 길 건너편으로 메다르도 빠체꼬가 누워 있는 서글픈 공동묘지가 있는 바랑까스의 집을 의례적으로 모방한 집을 까따까에 지었을 것이다. 그들은 까따까 주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 곳 삶에 만족했으나, 삶은 자신들이 태어났던 땅에 대한 의무감에 예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호, 믿음, 선입견 안에서 버텼고,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이면 무엇이든지 단단한 결속을 과사하며 거부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쁘로빈시아에서 온 사람들하고만 돈독한 우정을 유지했다. 그들이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지난 세기 자신들의 조부모가 에스파냐에서 가져와 베네수엘라를 통하면서 우리의 언어에 한 방울씩 한 방울씩 스며들었던, 카리브의 방언들, 아프리카 노예들의 언어, 그리고 구아히라 원주민 언어 쪼가리들에 의해 새 생명이 부여된 언어였다. 외할머니는 내가 하인들과 직접적인 대화를 통해 그 언어를 당신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내가 당신 말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늘 그 언어를 사용했다. 나는 지금도 많은 어휘를 기억하고 있다. 99

 

 

'아툰케쉬'는 나 졸립다. '하무사이취따야'는 나 배고프다, '이푸워츠'는 임신한 여자, '아리후나'는 외지인을 의미하는데, 할머니는 '아리후나'를 가끔씩 에스파냐 사람, 백인, 말하자면 적을 언급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구아히라 원주민들은 항상, 촌이 사용하는 방언처럼 기지가 번득이지만 일종의 뼈대 없는 에스파냐어를 사용했는데, 촌의 경우는 지나치게 정확하고 세밀하게 표현으로써 항상 그 뜻이 애매해졌기 때문에 외할머니는 그렇게 말하는 것을 금지했다. '입의 입술들'이 그런 예였다. 99쪽

 

바나나 회사 매점에서는 박엽지에 싸인 캘리포니아산 사과, 얼음 속에서 꽁꽁 언 도미, 갈리시아산 햄, 그리스산 올리브 열매 등을 염가로 판매했다. 하지만 외갓집에서는 그리움이라는 육수 속에서 맛이 들지 않은 음식은 먹지 않았다. 수프에 넣을 말랑가는 리오아차산이어야 했고, 아침에 먹는 아레빠는 폰세까에서 만든 것이어야 했고, 염소들은 라 구아히라의 소금을 먹고 자란 것이어야 했으며, 거북과 바닷가재들은 디부야에서 산 채로 들여와야 했다.

 그래서, 매일같이 기차를 타고 찾아왔던 손님 대부분은 쁘로빈시아에서 온 사람들이거나 쁘로빈시아에 사는 누군가가 보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리아스꼬스, 노게라, 오바예 같은 성을 지닌 사람들로, 종종 꼬떼스, 이구아란 같은 신성한 종족과 피가 섞여 있었다. 그들은 배낭 하나만 달랑 짊어진 채 외갓집에 들렀는데, 찾아오겠다는 기별을 하지 않고 불쑥 찾아 올 때도 점심 식사는 으레 외갓집에서 했다. 나는 외할머니가 부엌에 들어서면서 내뱉는, 의례적인 언사에 가까운 말을 절대 잊지 못한다. "찾아 올 손님이 무엇을 좋아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모든 걸 준비해야 해."100쪽

 

그처럼 항상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정신은 지리적인 현실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콜롬비아 카리브 지역에 위치한 시에라 네바다 데 산 따마르따와 빼리하 산 사이 협곡에 위치한 쁘로빈시아는 하나의 독립적인 세계로, 밀도 있고 유서 깊은 문화가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콜롬비아의 다른 지역과 의사소통을 하기 보다는 세계의 다른 지역과 직접 하는 것이 더 쉬웠다. 자메이카나 쿠라사오 같은 지역과 교역이 용이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일상적인 삶은 안티야스 제도권과 더 동일했고, 사회적 계급과 인종을 구분하지 않고 문호가 개방되어 있는 국경선을 통해 베네수엘라의 일상적인 삶과 거의 혼동될 정도였다. 미적지근하고 의뭉스러운 사람들이 사는 내륙 지역(보고타 등지), 즉 고도가 2,500미터 달하는 지역, 장작을 연료로 운행하는 증기선을 타고 마그달레나 강을 8일 동안 항해해야 도달할 수 있는 지역에서 획책된 법률들, 세금들, 군인들, 좋지 못한 소식들 같은, 권력의 녹은 이  지방에 거의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1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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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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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인형과 놀고 싶은 아이 손에 레고가 들려 있다면, 놀이 시간도 지루할 뿐인거지. 오늘 일정이 남아 있지만, 심리적 연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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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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