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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의 길 -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향한 카운트다운
에번 토머스 지음, 조행복 옮김 / 까치 / 202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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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하는 것은 정해진 결론이었지만, 일본이 항복할지는 미지수였다. 16쪽
까치 출판사에서 출간한 <항복의 길>은 핵폭탄을 제조하는 데 성공한 오펜하이머도, 히로시마 생존자도 아닌 지금껏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세 사람의 시선에서 당시 상황을 맞추어간다. 핵폭탄 투하를 명령한 사람, 그리고 실제 지시에 따라 폭탄을 터뜨린 사람 그리고 세 번째 폭탄이 터지지 않도록 일본이 항복하도록 애썼던 한 사람이다. 미국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 태평양 전략폭격 사령부 수장 칼 스파츠 그리고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
<오펜하이머>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내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혹은 나와 직접적인 조부모 중 누군가가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이어오고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건방진 생각들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때 느꼈던 감정과 무의미한 질문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저자가 왜 그들의 상황을 ’기록‘이 아닌 ’현재시제‘로 표현해서 마치 지금 벌어지고 있는듯한 실재감을 주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사람을 죽여 사람을 구할 (83쪽)‘수 밖에 없는 그 결정이 마지막까지 후회로 남을 줄 알면서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마음이 느껴져 괴로울 정도였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가장 걱정되는 일은 핵폭탄, 민간인의 죽음으로도 ’일본의 항복‘이 확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도고 시게노리의 활약을 눈여겨 봐야한다.
도고는 충격을 받는다. 군사참의원 회의는 항복은 없다는 ’기본 대강‘을 채택한다. (...)
그날 일기에 이렇게 쓴다. ”스즈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육군의 입장을 이해하고 예상도 했지만, 내각총리대신은 도대체 나라를 어디로 끌고 가는가?“ 116쪽
도고는 당연히 항복을 선택하고 기아로 고생하는 자국민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일본군부 내에서 항복을 하자는 의견과 반대의견은 3:3이었다. 심지어 일본이 여전히 승기를 잡고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나미 장군은 도쿄에 관한 맥딜다의 경고를 신뢰할 만한 정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믿을 수 없게도, 아나미는 미국이 핵폭탄 100기를 투하할 수 있어도 일본은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전히 말한다. 216-217쪽
만약 교토 혹은 도쿄에 핵폭탄을 투하했다면 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트루먼은 자신의 일기에 ’노아의 방주(146쪽)‘를 언급하며 ’불의 심판(같은쪽)‘이라고 표현했는데 지금껏 접한 비유중에 가장 적절했다고 느꼈다. 천황과 전통을 중시하는 일본의 교토, 그 교토에 떨어진 핵이라니. 이런 상황에서 도고가 선택한 것은 바로 천황을 설득하는 것이었고, 스즈키 수상의 도움으로 성단, 종전을 성공시켰다.
”나는 일본이 국내외에서 맞딱뜨린 상황을 진지하게 고려해본 뒤, 이 전쟁을 계속하면 그 결과는 조국의 파멸과 세상의 더 많은 출혈과 냉혹함뿐이라고 결론 내렸소.“ 223쪽
일본의 항복으로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았을테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이제 인류에게는 핵이라는 무기가 탄생했고, 그 무기가 미칠 파급력 또한 증명되었다. 다만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서도 냉전시대를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혹은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 또한 핵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런가하면 전범으로 형을 받은 도고의 말년은 정신적으로는 화해와 용서를 이루었지만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핵을 투하되고, 일본은 항복했다. 이렇게 간단했던 역사의 한 줄이 이 책을 읽는 내내 결코 ’간단할 수 없는‘문제라는 것을 새삼깨닫는다. 스팀슨의 말처럼 누군가를 신뢰하기 위한 방법이 먼저 신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대를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불신하는 것이라는 말이 무겁게 남아있다. 우리는 누군가 혹은 국가를 신뢰할 수 없는 대상으로 만든 것인가, 아니면 상대가 이미 우리를 그런 존재로 정해버린 것은 아닐까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