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단장 죽이기] 2권 절반쯤 읽을 때.

'전이하는 메타포'..

이러니 하루키를 싫어할 수가 없다.

너무 웃겨.

 

 

 

 

 

 

 

 

 

 

 

 

 

 

살아있는 메타포라니...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어드벤쳐가 어김없이 나온다. ㅎㅎㅎㅎㅎ

미워하기엔 너무 귀여워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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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을 언제 했더라.. 예약 시작되고 하루이틀 후쯤?

여튼 오랜 기다림끝에 서점에 풀리고도 하루 뒤인 어제 오후에야 책을 받았다.

...... 으응?  ..... 잉? 이상하기 이를 데 없는 책 1권을 받았다.

책이 거꾸로 인쇄됐어. ....  아니 겉표지가 거꾸로 덮였구나.... 아니, 이건 뭐지? 겉표지를 책본문 방향에 맞춰 뒤집어 제대로 한 다음에 보니 하드표지가 잘못 입혀진 책이었다. 그러니까 겉표지를 제대로 하면 하드표지가 거꾸로 바뀌게 되고, 그나마 본문은 제대로 되는것이니 교환말고 그냥 읽자...로 마음을 잡았다. 재수가 없군.

 

그런데, .. 책끈이 밑쪽에 달려 책 위쪽에서 끝이 달랑거리는 책 읽어봤어?

그러니까 내가 받은 [기사단장 죽이기] 1권은 하드표지와 책끈이 제대로 달려있는 것에 겉표지와 책본문을 거꾸로 붙여 제본한 기괴한 책이었다. 

아, 진짜 재수없군. 표지와 책본문이 엇갈린 책을 받아받지만 또 책끈까지 제각각 노는 이런 책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지만 본문이 제대로 붙여져 있으니 기념이다 생각하고 그냥 읽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추상화와 초상화의 간격을 포착하며 전개해나가는 초반은 흥미롭다.

'얼굴없는 남자'와의 대면은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토마스 만의 [파우스트박사] 에서 비슷한 장면을 볼 수 있다.

아마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메피스토펠리스를 만나는 장면일 것이다. 아주 흡사한듯하다, 내 기억에 의하면.

프롤로그가 끝나면 어김없이 섹스이야기가 나온다.

알려졌다시피 아내로부터 이혼통보를 받은 30대 중반 남자(하루키가 가장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나이인듯)의 이야기다. 나는 혼자서 산 골짜기와 평지 사이 경계에 지어진 집에서 산 약 8개월남짓동안 두 여자와 관계를 가졌다고 알려준다.

뻔뻔한 자신의 유혹을 딱 잘라 거저하지 않았는지 모른다면서 '어쩌면 그 시기 내 몸에 특수한 자기磁氣같은 것이 흘렀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뭔가가 걸렸다.  

지극히 사적인 거지만, 세월이 지나고보니 나의 '어쩌면 그시기'도 내 생애 가장 좋은 운이 흘렀던 시기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나도 잘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호감있게만 봐줬던 시절. 그런 시절이 있었다, 분명. 기이하게도 일이 풀려가던 시절. 살다보면 어느새 자기 생에 써야 할 운을 다 쓴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온다. 운이 다했다는 느낌.

기괴하게 생겨먹은 책을 받아들고 문득 다시 한번 생각했다.

스무살이나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서른여섯에 과거를 그렇게 '어쩌면 그 시기'...로 회상할 것 같지않다.

 

멀고 먼길을 돌아 다시 일인칭 화자로 돌아와 초반은 마치 [태엽감는 새]를 다시 읽고 있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옛날보다 더 장황해졌다고 할까.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주변을 꾸리지 않고 바로 질러가는 맛, 이런 게 예전 하루키에겐 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이미 청년이라 할 수 없는 나이였고, 갈수록 무언가가 - 가슴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던 불길 같은 것이 - 내안에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 열기가 온몸을 덥히던 감촉이 점차 잊혀갔다."

 

어쩔 수 없이 하루키 자신이 개입되어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열기가 온몸을 덥히던' 그런 '감촉'을 하루키는 지금도 느끼며 소설을 쓸 수 있는 것일까.

소설가는 늘 그렇게 쓰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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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독서계획]에서 마거릿 애트우드를 찾아보니 '더 읽어야할 작가들' 부록에 올라있는 작가였다. 페미니스트 작가로 소개되어 있고 바로 이 [시녀이야기(하녀이야기)]부터 읽을 것을 권하고 있었다.

그래, 그럴만하군, 했다.

그러고선 더 읽어야할 작가들에 누가 있나 휘리릭 넘겨보는데, 로버트슨 데이비스 Robertson Davis(1913~1995)은 그렇게 발견한 캐나다 작가였다. 패디먼에 의하면 이렇다.

 

마거릿 애트우드보다 더 높이 평가되는 20세기 캐나다 문학의 대표작가이다. 데이비스는 유머와 언어감각이 뛰어나고 플롯의 조직 기술이 탁월하고, 주제를 형상화하는 솜씨가 노련하다. 이야기의 재미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그의 코니시 3부작을 권한다.

[반항하는 천사들 The Rebel Angels](1981), [뼛속에서 무엇이 자라나고 있나 What's Bred in the Bone](1985),  [오르페우스의 수금 The Lyre of Orpheus](1988).

 

애트우드가 1939년생이니 약 한세대 앞서는 작가인 셈인데 우리에게는 낯선 작가이다.

번역된 건 [숨어있는남자]가 유일하다. 절판된 상태다.

캐나다 대표작가 두명 모두의 작품을 읽어볼 수 있는 게 좋지 않는가? 어떤 색깔의 작가일지 궁금한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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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운 소설이다. 1985년에 나왔으니 이미 32년이나 세월이 흘렀다.

이런 원작을 영화화하지 않으면 도대체 뭘 영화화할만 하겠나 싶을 정도로  강렬한 이야기, 풍부한 상상과 이미지, 색깔을 구사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저 복지수준 높고, 평화롭고, 시민들이 대체로 안정적인 삶을 사는 선진국으로 알고 있는 캐나다가 미국이라는 거대국가와 인접한 국가로서 열등감과 살아남기라는 주제에 천착할만큼 국가 정체성을 고민하기도 했다는 거에 새삼 놀랐다. 

애트우드는 빅토리아기 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19세기 판타지작가 연구로 박사학위에 도전했지만 끝마치지 못했다고 한다. 60년대 하버드대학은 Lam ont 도서관에 여성을 금지시켰다. 현대시가 소장되어 있던 이 도서관의 자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버드대학 시절이 애트우드에게는 여성과 캐나다라는 국가에 대해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해준듯하다.

 

빅토리아기 문학과 판타지작가 연구. 애트우드가 천착하는 주제가 소설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눈먼 암살자]와 [시녀이야기]가 그녀의 작품으로 읽어본 전부인데 비슷한 느낌을 받게 된다.

구조라든지 특히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해석해볼 여지가 많은 작품을 쓰는 작가인데, 짧고 파편화된 지식만 가지고 있는 내가 이 주제에 대해 뭐라 말하기는 어렵겠다. 

 

[시녀이야기]의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시녀이야기의 역사적 주해"를 왜 붙여야 했는지 잘 모르겠다. 

'역사적 주해'는 세월이 흘러 2195년이라는 시점에 [시녀이야기]라는 텍스트에 대한 연구보고회 형식을 빌려 이 이야기가 어떻게 생산된 것인지, 이야기에서 충분히 밝혀지지 못한 점들을 조사연구한 결과를 말함으로써 독자에게 풀리지 않은 몇가지를 추론해볼한 키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시녀이야기'는 화자인 길리어드라는 국가에서 '시녀' 신분이었던 '나', 이름은 소유격으로 붙여진 '오브프레드(프레드의 것)'가 구술한(테이프에 녹음된 것이니까) 이야기이다.

길리어드에서 '시녀'는 임신가능한 여성으로 재혼과 혼외정사 관계를 맺고 있었던 여성들로 수급했다. 

'시녀'들은 고위관료계급 중 아이가 없는 집을 임지로 지정해 파견된다.

대재앙 후 권력을 탈취한 극단적인 근본주의 기독교정파의 전체국가 길리어드는 철저히 계급과 신분으로 위계화한 통제시스템으로 굴러가는 국가다. 억압되고 숨기고 억제된 감시사회지만 한편으로는 은밀하게라도 유통되지 않는 게 없고, 감추어지는 비밀도 없다.

 

처음부터 화자인 '나'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첫번째 '밤'에서 화자는 '이게 내가 꾸며내는 이야기라고 믿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건 내가 지어내는 이야기가 아니다'.

'청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에게.

소설 마지막에 '나는 이야기한다. 고로 당신은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계속할 생각이다. 그래서 스스로 견뎌낼 작정이다.'(457~458)라고 털어놓는다. 

'나'는 이 소설에서 화자인 동시에 굉장히 수동적 위치에 놓여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수동적이기도 하다. 

모이라, 재닌, 세에라 조이, 오브글렌, 그리고 인물들 사이에서 이야기될 뿐인 페미니스트 활동가로서 엄마 등에 비하면 분명해진다. 저항조직 '메이데이'라든지 수없이 어딘가에서 '암약'하고 있을 탈주자들.

 

'나'의 저항, '내'가 이 완전하게 숨막힐 듯 통제된 채 임신가능한 '자원'으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부여받은 역할에 도전하는 길은 '사랑'뿐이다.

닉에게 매달려 사랑을 갈망하는 '나'는 [눈먼암살자]에서도 나타났던 듯하다. 

사랑에 도전하면서 '나'는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것들에 게을러지며 해이해져간다. 

그렇게 다가온 파국. 

결국 내가 한 건 이 이야기를 남겼다는 것일 것이다. 나를 탈주시켜준 이들의 도움에 의해서 살아남아 이 이야기를 남긴 것이다. 

그런데 왜 이 이야기를 '역사적 주해'를 만나야 완성되게 작가는 했을까. 왜 이 이야기마저.

 

여성작가,여성화자가 하는 이야기. 그런데 [시녀이야기]는 '역사적 주해'에 따르면 [켄터베리 이야기]의 제프리 초오서를 기리기 위해 붙인 표제라고 한다. 굳이 왜?

오히려 무라시키 시키부의 [겐지이야기]처럼 여성작가의 여성화자의 이야기가 친연성이 있다면 친연성이 있었을텐데. ...하긴 캐나다지.

 

 

 

 

 

 

 

 

 

 

 

 

 

 

문득 생각이 나 [겐지이야기]를 찾아봤더니 oren님의 페이퍼에 이렇게 쓰여있다.

클리프턴 패디먼과 존 S. 메이저의 [평생독서계획]에서 인용한 글을 옮겨적어 놓은 것인데 ... 대단한 독서권유문장이다.

 

28. 무라시키 시키부, 976년경∼1015년, 겐지 이야기

독자가 『겐지 이야기』를 처음 집어 들면, 너무 두꺼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것을 극복하고 책을 읽어나가면 소설의 속도가 너무 느리고 너무 기이하여 인간의 세계가 아닌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어나가기를 바란다. 마르셀 프루스트[105]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마찬가지로 일단 다 읽고 나면 평생 되풀이하여 읽게 될 책임을 알게 된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기이함은 경이로움으로 바뀌게 된다. 무라사키의 산문은 너무나 세련되고 심리적으로 예리하여 독자를 상상력의 세계로 풍덩 빠트린다. 이것은 위대한 예술적 성취가 아닐 수 없다.

 

http://blog.aladin.co.kr/oren/4369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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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신작이 곧 나온다는 소식에 흥분한 어제 이 [어군기]라는 소설을 발견했다.

알라디너 생쥐스트님의 별점 리뷰가 꽤나 인상적이어서 어, 일본의 이런 문학도 살펴볼 필요가 있긴 하겠다 싶었다.

"전후 오키나와 문학에 대해서 주의깊은 시선"을 요구하며 "메도루마의 작품세계는 처참한 전쟁과 학살을 경험한 사회에 나타나는 뜬것의 세계,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 지속되는 폭력의 문제를 소설의 언어로 집요하게 추적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작"이라고 평했다.

오래전 생쥐스트님 서재에 우연히 한번 들렀다가 댓글을 남겼는데 아예 서재를 안들리시는 건지 반응이 없어서 조용히 댓글 지우고 나온 적이 있었다. ㅋㅋ 소심한 마음에 상처입었다는 ......

그건 그렇고 여튼, 일본문학도 소세키나 오에 겐자부로, 하루키와  장르소설 정도만 읽었지 독서폭이 그다지 넓지 못하는데, 그렇다고 욕심낼만한 필요를 느끼는 것도 아니어서 잘 읽지 않게 되는데 특히나 사회적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소설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우리 소설도 지나치게 현실이 전면에 드러날때 읽고 싶지 않는다. 피하고 싶다. 뉴스를 통해, 내가 생각하는 올바름, 올바른 해결이 왜곡되고 모욕받는 현실을 만날 때 견딜 수 없어지기 때문에 굳이 소설에서까지 그런 현실을 만나고 싶지 않다. 아니, 우리 현실은 이미 잘 알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이 아닐까. 너무 잘 알고 있어. 더이상 그현실을 새롭게 내게 다가붙여줄만큼 소설이 뛰어나지 못할거야, 라는 가정. 

일본 오키나와는 일본 서남부끝에 위치한 섬으로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과 미국간의 치열한 전투가 치뤄졌던 섬 정도만 알고 있다. 

지금도 미군기지가 있는 곳 아닌가. 

우리처럼 수도 서울 한복판 가장 좋은 금싸라기 땅들을 미군에 내준 우리같은 나라도 있는데 전범국가의 섬 하나에 미군기지가 있는 거 가지고 .... 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어쨌든 일본의 역사, 아마도 이건 십중팔구 우리와도 밀접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에 오키나와문학, 오키나와학이라고까지 확장된 일본의 문학과 역사를 들여다볼 필요도 생길 수 있겠다. 

스바, 미군에 무상으로 내준 땅들이 전국에 있는데 그러고도 마치 우리가 무임승차하고 있는 것마냥 큰소리치면서 돈돈돈 돈내노라는 미국을 상대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배알이 뒤틀리는 지경인데.. 

 

역시나 이 길목에서 필히 만나게 되는 로쟈님이 소개한 책도 언젠가 읽어보고 싶다. 우선은 메도루마의 [어군기]부터 시작해볼까...

 

 

 

 

 

 

 

 

 

 

 

 

 

 

 

 

 

 

 

 

 

 

 

 

 

 

 

그러고보니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에서 지로네 가족이 도쿄를 떠나 간 곳도 바로 이 오키나와였다.

아, 꽤나 깊은 역사와 사연이 있는 설정이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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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페이퍼 써놓고보니 읽기 싫다. 우리가 돌아봐지기 때문이다. 아, 스바, 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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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7-07-0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오키나와는 일본이긴 하지만 문화 자체가 좀 독립 국가다운 풍경을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요 ? 하여튼 일본 내에서 이국적인 느낌이 듭니다..

포스트잇 2017-07-01 14:48   좋아요 0 | URL
문제적 지역인듯요. 우리에겐 너무 많은 오키나와가 있지 않나 싶을 지경입니다 .. 강정도 있고 이젠 성주도 .. 오키나와문학을 보고 싶기도 하면서도 보기 싫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