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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짜 엄마야?
버나뎃 그린 지음, 애나 조벨 그림, 노지양 옮김 / 원더박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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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니콜라스였으면 엘비를 박살내 버렸을 거야!”


8살이 된 딸아이는 이 책이 싫단다. 처음 읽었을 때도, 다시 읽었을 때도 싫단다. 책이 도착한 날 잠자리에서 이 책을 보여주며 나는 아이의 반응을 기대했었다. 책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고 집에서나 어린이집에서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책을 꽤 접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첫 만남부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책을 끝까지 읽은 딸은 반대편으로 돌아누우며 “이 책 정말 별로야!” 하고 선언했다.


며칠 후 딸이 말했다. “엘비가 마음에 안 들어.” 말인즉슨, 니콜라스의 질문에 대한 엘비의 대답이 영 약 올리는 거 같아서 기분이 나쁘단다. “누가 진짜 엄마야?”라고 묻는 말에 엘비가 수수께끼 하듯이 말을 빙빙 돌리면서 대답을 제대로 안 하는 게 딸의 성격상(?) 거슬렸던 것이다. 엘비의 대답에서 힌트를 찾기도 어렵고, 그림을 아무리 쳐다봐도 두 엄마의 성별은커녕 엘비와의 관계를 알 수가 없으니 속이 부글부글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 나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엘비의 머리스타일과 피부색을 저 두 엄마와 잘도 섞어 놓았네.’ ‘니콜라스 가족과는 얼마나 친하길래 저렇게 스스럼없이 아이를 맡기고 봐주고 할까? 부럽구만.’ ‘엄마가 둘이라 그런지 집안일도 육아도 평화롭게 같이 하는 것 같네.’ 딸은 ‘엄마 찾기’에 실패해 거칠게 성을 내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의 감상에 빠져 우리는 긴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엄마가 둘일 수도 있을까?” “아, 몰라.”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딸. “근데 니콜라스는 왜 ‘진짜 엄마’가 누군지 궁금해하는 것 같아?”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하는 딸. “그거야 대부분은 엄마 아빠랑 사니까 그런 거지. 이렇게 엄마 둘이랑 사는 애를 못 봤으니까.” “너는 엘비처럼 엄마 두 명 하고 사는 친구 본 적 있어?” “아니, 없어.” “맞아. 사실 엄마도 평생 한 번도 본 적 없어.” 아이들은 지금을 산다. 길 가다 만나는 외국인, 장애인, 아이 눈에 조금 달라보이는 사람들에 대해 아이는 호기심도 질문도 많다. 그러나 가족 구성에 대해서는 이 책이 확 들이댄 설정에 당혹감을 느낀 것 같다. 이혼 가정, 재혼 가정, 한부모 가정, 조손 가정 등 아이는 조금씩 다양한 가족이 존재한다는 걸 배워가고 있다. 엄마 둘은, 아마도, 조금 버거웠을 것이다.


그리고 또 당혹스러운 점. 다양한 가족 형태에 대한 호불호나 판단을 하기도 전에, “누가 진짜 엄마~게?” 하면서 (사실 독자가 궁금해하지 않을 수도 있는 질문을 굳이 먼저 하면서) 덫(?)을 놓는다. 응? 뭐야? 누가 진짜 엄마인 거지? 하면서 덫에 걸리고 나면 독자는 엘비의 대답과 함께 미궁 속에 빠진다. 그런데 마지막에 “누가 진짜 엄마인지가 뭐가 중요해~ 두 분 다 나를 사랑한다는 게 중요한 거지.”라며 덫에 걸린 독자를 약간 허탈하게(우습게;) 만들어 버린달까. 흥. 기분 나빠. 딸의 기분을 왠지 이해할 것도 같다.


엄마 입장에서 별로였던 것도 있다. 엘비가 자기 엄마들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다 너무 훌륭하고 아름답다는 것. ‘아니 엄마가 둘인 집이라고 이렇게 이상적으로 그려도 되는 건가? 사람 사는 거 다 똑같지. 엄마 둘이 애를 키워도 이렇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런 걸 보여주려는 거야 뭐야.’ 얼마 전 아는 분에게 농반진반 양육자검사를 받아보면 어떻겠냐는 말까지 들은 터라, 엘비의 입을 통해 묘사되는 ‘훌륭한 엄마들’에 빈정이 상했다.


현실은 이런 거라고. 나는 마지막으로 딸에게 물었다. “엘비가 자기 엄마들에게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잖아. 너는 엄마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하고 싶어?” 난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음. 똑똑하고 멋진 엄마!” (이게 아닌데...) “응. 그리고 또?” “음......” “엄마가 늘 멋지지는 않잖아. 솔직히 말해도 돼.” “이렇게 말하면 좀 그런데....” (올 게 왔구나. 딸아 괜찮아.) “그냥 편하게 네 생각을 말해봐.” “보조개가 들어가서 귀여운 엄마!” 이 말을 하고 딸은 나를 안아주며 내 볼을 쓰다듬었다.


나는 깨달았다. 엘비 엄마의 실제 모습과 상관없이, 엘비에게 ‘내 엄마’는 그저 엄마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고 훌륭하다는 것을. 엘비의 말을 믿지 못했던 건 엄마로서 나에게 좋은 평가를 하지 않았던, 그리고 딸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자격지심이 발동한 탓이었다. 내가 귀엽다(?)며 나를 안아주고 자기 방으로 간 딸을 보며, 나는 엘비의 말이 백프로 진심일 거라고 믿어졌다. 그리고 딸의 말도. 난 똑똑하고 멋지고 보조개가 있어서 귀여운 엄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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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후
정여랑 지음 / 위키드위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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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시작'한다는 건, 결혼 10년 차에 접어들어 생각해보니, 차라리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둘이 같은 출발선에 나란히 서서 같은 길을 발맞추어 걷는 건 웨딩 로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후로는, 자신이든 배우자든 결혼에서 이탈하거나 잠시 멈추거나 결혼의 종지부에 먼저 도착한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게 바로 결혼이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결혼 갱신제’라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정부 주도로 시행되는 새로운 결혼 제도와 각종 교육 및 지원프로그램, 돌봄 시스템이 개개인의 삶에 어떤 ‘불안과 망상’, 혹은 ‘안정과 희망’을 만들어내는지 여러 인물의 삶을 통해 그려낸다. 아마도 이러한 상상이 앞으로 우리 사회가 이루어 나가야 할 아름답고 바람직한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제도가 사람(관계)을 바꿀 수 있는가? 누군가에게 갱신제는 불안을 앞당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놓고 갈등이 불거진다. 5년 '후'를 걱정하느라 5년 '동안'을 소모한다. 상대의 마음을 지레짐작해서 자신에게 미리 상처를 낸다. 상처가 난 마음은 솔직할 수 없다. 두려움이 틈탄 마음은 미래를 긍정적으로 상상하기 어렵다. 갱신제로 인한 선택의 기회는 누군가에게는 자유를 가장한 강요이고, 선택하지 않을 자유를 빼앗는 폭압이 된다.


제도의 갱신이 사람(관계)을 갱생시킬 수 있는가? 케케묵은 질문이지만, 사람은 과연 바뀌는가? 검은 머리 파 뿌리 될 때까지 유효한 종신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갱신제를 거론하는 것은 속편한 생각 같다. 결혼은 종신제여서(솔직히 종신제라고 믿고 있는 사람이 있나?) 괴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함께 시작'한 이래로 계속 동상이몽 상태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완벽한 타인이기 때문이다. 종신이든 갱신이든 서로를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동시에 합의점에 이르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나의 진심은 왜곡되고, 상대의 진심은 뒤늦게 도착한다. 서로를 이해해보려고 할수록 왜 더 꼬이는 걸까.


지훈은 선우를 이해하지 못한다. 연우는 한석을 이해하지 못한다. (끝내 이해하지 못한 것 같다.) 미영의 남편은 미영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기 마음대로 이해했다.) 경수는 순남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도 순남이 이해가 안 간다.) 정욱은 혜선을 이해하지 못한다. (못한다기보다는 이해하기 싫은 것 같다.) 승혁은 지안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소설 속에서 새로운 제도의 도입은 극중 인물 간의 차이를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며, 독자들을 그들과 함께 혼란 가운데로 내몬다.


알다시피,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고, 함께하려고 할 때 간신히 이해 언저리에 이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중 인물들의 갈등은 너무나도 바람직하고 교훈적으로 봉합된 느낌이 든다. 소설 속 돌봄지원시스템이나 적절한 교육 및 상담, 생활동반자법 등은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물론 그것이 국가 주도의 재생산 인구계획(?) 사업의 일환이라면... 솔직히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불쾌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갱신제 자체는 출생률이나 결혼 관계의 질적 개선, 가족제도의 확대에 직접적인 효과가 없을 것 같다. 제도가 보장해야 할 것은 결혼계약의 존속이나 해지에 대한 인위적인 개입이 아니라 더 다양한 ‘함께함’이 가능하도록 그물망을 넓히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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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이후, 교육을 말하다 - 페미니즘의 관점
김동진 외 지음, 김동진 기획 / 학이시습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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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이렇게 성실하게 만든 책이라니. 이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품이 들어갔을지 생각하니 페이지를 아껴 읽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교육’에 대한 이들의 고민이 진지하고 깊이 있다. 각각의 저자들이 던지는 문제의식마다 꼬리를 물고 생각이 이어지지만, 그중 나를 가장 당황스럽게 만든 문장을 한국문학 연구자 민지 님의 글에서 만났다. “대화는 무조건 ‘좋은’ 것일까?”(79쪽)


나에게도 대화에 대한 ‘환상’이 있다. 마음을 열고 경청하며 역지사지하다 보면 ‘해결점’ 혹은 ‘통하는 지점’을 찾게 된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물꼬가 트이면서 의도치 않게 서로의 마음자리에 닿았던 대화의 경험들이 한 번, 두 번 쌓이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인정해야 했다. 그런 경험은 정말 ‘한 번, 두 번’이었음을. 대부분의 대화는 뻔하고, 지루하고, 제자리를 맴돌고, 엉뚱한 곳으로 흘러가고, 소모적이었음을.


생각해봐야 했다. 나는 주로 ‘누구’와 ‘어디’서 어떤 ‘내용’을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하는가. 좋은 대화는 그저 어쩌다 운 좋게 얻어걸리는 경험인가. 나는 좋은 대화를 위해 얼마나 준비를 했던가. 나에게 좋았던 대화가 상대방에게도 좋았을까. 내 기존의 생각을 강화시키는 말만을 좇지는 않았나. 상대방의 틀 안에서 입맛에 맞는 말만을 하지는 않았나. 자유롭게 대화하고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자고 하면서 우리는 정말 자유로웠나.


이 책이 이야기하는 ‘교육’은 “정해진 답을 주입하고 외우게 하는 교육이 아니라, 자기 삶의 페미니즘 이슈를 스스로 성찰하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피드백을 주고받음으로써 자신이 속한 사회를 페미니즘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만드는 교육”(머리말)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의사소통할 수 있는 신뢰로운 관계, 평등한 관계, 열린 대화의 장, 기꺼이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 상대방에게 영향을 받겠다고 하는 부드럽고 낮은 마음이 필요하다. 대화는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지만, 페미니즘 교육은 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대화에 대한 환상은 버리지 않되, 감나무 밑에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어정쩡한 태도에서 벗어나, 좋은 대화를 위해 준비하고 더 많이 대화하고 더 자주 실패하고 바라건대 그러면서 더 자주 좋은 대화를 경험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고등학교 교사인 유진 님은 “평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면 평등한 관계 맺음이 되어 있어야 한다”(162쪽)고 말했다. 내 말과 내 삶의 괴리감, 내 말과 우리 관계의 괴리감, 좋고 아름다운 말들이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소외시킨다면, 그 말은 그냥 허공에 흩어지고 말 것이며 흩어져 사라지면 오히려 다행인데 상대방의 마음에 불쾌함과 상처로 남을 수 있다. 그런데 평등을 이야기하기 위해 평등한 관계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면, 어느 세월에 평등을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 우리의 엉망진창을 우리 자신이 익히 아는바, 유진 님의 말을 반대로 적용해본다면 ‘불평등한’ 관계일지라도 우리의 ‘불평등함’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대화를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덮으며 두 가지 메모를 했다. 타성에 젖지 말자. 내 삶에 등장하는 사람은 제각각 다른 존재들이며, 자주 익숙하게 만나는 사람도 매일매일 다른 맥락으로 나에게 온다. 정형화된 관계의 틀로 사람을 뻔하게 대하지 말자. 그것이 일차적인 나의 ‘준비’가 될 것이다. 또 하나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자. 어떤 사람이 기억에 남는가? 진짜 좋았던 사람과 진짜 별로였던 사람. 최악은 면하자는 것이다.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려다가, 임팩트를 남기려다가, 말실수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페미니즘 이슈는 특히나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쉽다. 나의 전략은 ‘다시는 저 사람하고 얘기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들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상대방이 뒤돌아서서 ‘흠, 내가 저 사람과 무슨 이야기를 했지?’ 하고 떠오르는 게 없는 사람이어도 괜찮을 것 같다.


계몽이 아닌 내가 속한 공간과 관계를 바꿔 가는 일. 우리의 현실이 아직 미미할지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성찰하고 고민하고 행동하는 저자들의 움직임에서 희망을 본다. 이 책을 읽은 우리들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 희망을 이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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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게 (양장)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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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수명이 길어지면서 대부분의 사람이 '나이를 먹어가는 자신' '노년의 삶'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마흔'이란 나이는 나에게도 상징적인 숫자였고, 늘 스스로 마흔이라는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그 전까지는 이러저러하게 이루어놓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던 것 같다.


이 책의 부제는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이다. 이는 저자가 병으로 쓰러진 후 다시 살게 된 스토리에서 뽑아낸 것 같지만, 실은 마흔을 앞둔 내가 느끼는 조급한, 허망함, 위축감 등에도 매우 필요한 문장이다. 아직 인생은 끝나지 않았고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보자고, 나를 일으켜세우는 말...


가장 인상적인 장은 5장, 어떻게 살 것인가, 였는데, '지금을 가장 잘 살기 위한 현명하고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소제목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예측할 수 없는 죽음 또는 나중의 일을 생각하느라 지금을 허비하지 말고, 미래는 그저 그 때가 되었을 때 '받아들이면 그뿐', 언제나 '지금'에 초점을 맞추고 살라고.


이 대목에서 나는 얼마전 타계한 국문학자 김윤식 교수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은퇴한 후에도 왕성한 저작활동을 이어간 그는 생이 끝나는 순간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처럼 늘 그랬듯 읽기와 쓰기에 매진했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 우리 생을 의미없게 만들지 않는다. 묵묵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해온 삶은 죽음마저도 그 연장선에서 승화해버리는 힘을 갖는 것 같다.


마흔, 쉰, 예순.. 이렇게 나이라는 숫자로 나를 가늠하지 말고, 중년의 나도 노년의 나도 그저 '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생의 끝자락까지 삶에 충실하자고 다시금 마음을 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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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프 : 이 정도면 충분해
제프 시나바거 지음, 이지혜 옮김 / 옐로브릭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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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읽으면서 바로 실천하게끔 되는 책.. `이미 충분하다`는 사실이 주는 만족감과 위안.. 꼭 한번 읽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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