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손님 - 제26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윤순례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아직은 멀어서 눈부시게 환한 하얀 불빛들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

기록되지 않은, 너무도 사적인 침묵의 역사 "

더 나은 삶을 찾아 고향을 버리고 자유의 땅인 한국으로 오게 된 탈북민들의 이야기인 [여름 손님]. 희망에 가득 찬 채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밝은 이야기를 기대했건만, 그들의 삶은 왠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마치 뿌리를 뽑힌 채, 불어난 강물에 휩쓸린 나무들처럼 안정을 찾지 못하는 모습, 여전히 한국 사회 주류에 속하지 못한 채, 주변부로 떠밀리는 듯한 모습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들이 아주 절망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이유는, 아직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열렬히 갈망하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었다. 구하면 열린다는 뜻의 속담도 있지 않은가? 길이 없다면 길을 만들어서라도 가려는 그들의 의지가 보이는 듯했다.

[ 여름 손님 ]은 6편의 단편이 내용상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연작 소설이다. 탈북의 여정, 그 고난의 한 가운데에서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가슴 아픈 추억을 그리거나 한국에서 새롭게 맺게 된 복잡한 인연들에 대한 내면의 소리에 중점을 두는 소설이라 그런지 자기 고백적 성격을 띠는 이야기라 느꼈다. 그뿐 아니라 이 소설집의 특징은, 연작 소설이니만큼, 각 단편에 등장했던 주인공이나 주변 인물들이 다른 단편에서도 불쑥 등장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단편 [ 심봤다 ]에서 한 심마니의 기억 속에서만 단편적으로만 존재하는, 그래서 밋밋한 인물인 탈북민 화진은 [ 사적인, 너무도 사적인 침묵의 역사 ]라는 단편에서는 적극적으로 인생을 개척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단편 [심봤다]에서 주인공 심마니는 삼을 캐면서도 머리로는 온통 전 부인이었던 화진을 생각한다. 결혼 생활 내내 성실하지 못했던 화진, 그녀는 술집을 나가거나 다른 남자와 바람을 피우며 주인공의 마음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오직 단란한 가정만을 원했던 그의 마음을, 화진은 왜 몰라줬던 걸까? 그녀가 미치도록 밉지만 동시에 미치도록 그리운 한 남자의 애타는 마음이 이 단편에서 잘 드러난다. 한편 [ 사적인, 너무도 사적인 침묵의 역사 ]에서는 자신의 행동의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던, 그렇기에 여전히 침묵 속에 갇혀있는 여자, 화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젖먹이 시절 북에 놔두고 온 아들과 중국에 두고 온 딸을 데려와서 잘 키우자는 트럭 기사의 달콤한 말을 믿고 불나방처럼 뛰어들었던 사랑,, 그러나 자신의 씨가 아닌 자식들을 키우느라 부담감이 컸던 것인지 남편은 어느 순간부터 술에 취한 채 쌍욕을 입에 달고 살기 시작하는데.....

이 책 [여름 손님]을 읽으면서 마음이 좀 답답하고 불편해지는 걸 느꼈다. 한국이라는 공동체가 여전히 탈북민들에게 씌우는 프레임, 그 편견에 찬 시선들이 너무나 따갑게 느껴졌다. 단편 [여름 손님]의 주인공 철진은 단지 탈북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래층 독거노인에게 끈질긴 괴롭힘을 당해야만 했고, 노인이 미스터리한 죽음을 맞이한 후 살인 혐의를 뒤집어쓰고 쫓기기까지 한다. 단편 [별빛보다 멀고 아름다운]에 나오는 탈북민 선화의 경우는 일하던 가게의 독일인 사장과 어울렸을 뿐인데, 그와 바람을 피우고 끝내는 그를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게 된다. 결국 독일인 사장이 심장 마비로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선화에게 사과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경 수비대에게 총 맞을 각오로 두만강을 넘고, 중국에 와서도 공안들에게 붙들려 북송될 위험을 극복하고 오게 된 자유의 땅..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간은 아직도 멀어 보였다.

탈북민을 처음으로 본 것은 TV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눈물을 흘리면서 자신의 탈북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했던 그들. 탈북 과정에서 가족이 실종되거나 뿔뿔이 흩어지기도 하고 중국 공안에게 잡혀서 북송된 후 모진 탄압을 받은 사례도 있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가족을 이루고 사업체를 이끌며 나름 안정된 삶을 꾸리나 했는데, [여름 손님]에 나오는 탈북민들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벽에 가로막힌 채 주변부로 계속 떠밀리면서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윤순례 작가는 이 [여름 손님]이라는 책을 통해서 말하는 것 같다. 만약에 예상치 못했던 먼 친척이 우리 집에 갑작스레 손님으로 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이 온갖 트라우마로 점철된 삶을 살아야 했다면, 그런 황량하고 고통에 가득 찬 마음을 우리가 직면하게 된다면 어떨까? 외면하고 말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곁을 내주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인가? 그런 고민과 화두를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것 같은 소설 [여름 손님]이다.

" 깨소금 넣은 송편을 먹으려고 가보면 앙금은 누군가 쏙 빼먹은 것만 내 차지였다고, 

그래도 남조선에 도면 반짝반짝 빛을 내며 살 줄 알았다고,

낡은 지 오래인 꿈에 대해서도 말하기에는 불빛이 너무 밝았다. (...)

두서없는 사념들이 무엇에 가닿을지 모르는 채로 화진은 빛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아직은 멀어서 눈부시게 환한 불빛들을 향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렇게 할 수밖에 네오픽션 ON시리즈 5
최도담 지음 / 네오픽션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사건의 진실을 향한 숨 막히는 심리전과 가슴 아린 반전

타인의 죽음 그 이후를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위한 이야기 "

"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말이 있지만 일반인들이 그렇게 하기란 상당히 힘들다. 한 번이라도 희생자의 위치에 놓여본 적이 있는 사람들은 당한 그대로 갚아주는 통쾌한 복수극에 열광하기 마련이다. 최근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는 K 드라마 [ 더 글로리 ]는 학창 시절 모진 괴롭힘을 당한 한 여자의 철저한 복수극에 대한 이야기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시즌 1 에서는 발톱을 조금 드러낸 여주인공이 가해자들을 향해 복수를 예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시즌 2에서 본격적으로 펼쳐질 잔인하고도 소름 끼칠 복수극이 기대되긴 하지만 사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며 여주인공이 평생 견뎌내야 했던 몸과 마음의 상처, 그 고통의 깊이에 몸서리쳐졌다. 온몸을 뒤덮은 화상 흔적과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 속에 감춰진 깊은 상처... 이미 한번 죽은 듯한 그녀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복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도담 작가의 소설 [ 그렇게 할 수밖에 ] 도 복수라는 주제를 다룬다. 어릴 적 어머니와 재혼한 남자 이기섭에게 몹쓸 짓을 당했던 라경. 그 일로 인해 어머니는 자살을 했고 라경의 인생은 엉망이 되었다. 정신과 약을 복용하며 근근이 버텨왔던 그녀는 어른이 된 후, 우연히 이기섭이 운영하는 듯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게 되고, 그 이후 그녀는 " 복수 " 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오직 이기섭의 죽음만이 완전한 복수이기에 그녀는 완벽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소문난 살인 청부업자인 "연"에게 일을 맡기게 되고 곧 이기섭이 뺑소니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러나 반가웠던 소식도 잠시, 다시 "연"에게서 살인 청탁이 실패로 돌아갔고 그녀에게 다시 청탁 비용을 되돌려주겠다는 연락을 받게 되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기섭의 사망은 우연의 일치였던 것일까? 완벽하다고 믿었던 "연" 이 실수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살인이라는 중범죄가 등장하긴 하지만 이 소설은 잔인한 이미 지나 묘사와는 거리가 멀다. 범죄가 직접적으로 발생하는 상황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나 충돌하거나 갈등하는 상황은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소설은 실제 살인 사건보다는 " 우연 "처럼 보이는 사건 혹은 사고를 둘러싼 의문과 미스터리 그리고 그 주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복잡한 심리 묘사를 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쫓고 쫓기는 추격전만큼이나 이 소설도 팽팽한 긴장감과 신경전으로 가득하다. 사건이 이미 종료된 상황이긴 하지만 " 사고 "로 보이는 상황에서 기가 막히게 " 사건 " 냄새를 맡아내는 형사들이 라경의 뒤를 쫓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이기섭과 라경의 에전 관계를 알고 있는 듯 보이고 그 이상의 것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나 "라는 독자는 손에 땀을 쥔 채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오직 라경의 안위를 바라는 마음으로.

실패로 끝난 살인 청탁... 그러나 여전히 라경의 뒤를 쫓는 형사들.. 그리고 이후 드러나는 놀라운 사실들. 단순하고 명백하게 보였던 사건의 이면에 복잡 미묘하게 얽혀있던 진실들을 맞닥뜨리게 되면서 독자들은 놀라움의 연속을 경험하게 된다. " 우연 "처럼 보였던 그 죽음 이면에 철저하고도 완벽한 " 필연 " 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마무리까지 완벽했던 계획을 알게 되는 순간, 꼬여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동시에 독자들은 경지에 이른 누군가의 예술혼까지 느끼게 될 수도 있다. 살인 청탁과 실질적인 누군가의 죽음, 그 잔인한 현실 앞에서 오히려 위대한 사랑과 배려를 느꼈다고 하면 아이러니한 건가? 악이 득세하고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데도 법과 규칙은 아무 소용 없는 세상.. 고구마같이 답답했던 그 세상 속에서 누군가의 철저하고도 완벽한 복수극은 사이다 그 자체였다.

"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고통에 매몰된 인생은 타인을 돌아보지 못한다. 나의 고통 너머를 보는 삶. 이제 달라진 삶을 살 수 있다는 징조를 읽는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 나는 너를 사랑한다 "라고 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사랑을 실천하기는 매우 어렵다. 더군다나 인생을 바쳐서 사랑을 실천하기는 더더욱 힘든 법이다. 단순히 복수극만은 아니었던 소설 [ 그렇게 할 수밖에 ] 누군가의 뜨거운 사랑과 차가운 계획, 냉탕과 온탕을 왔다 갔다 하는 짜릿함을 보여주는 이야기였다. 후련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아련한 슬픔과 안타까움도 느껴졌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세상 모든 고통받는 약자들과 그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어서 더 고통을 느껴야 했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쓰인 듯한 소설 [ 그렇게 할 수밖에 ]

* 출판사가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그리트의 껍질
최석규 지음 / 팩토리나인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르네 마그리트는 인간의 내면에 잠재하는 몽상의 세계를 잘 표현해낸 화가로 유명하다. 인간의 잠재의식을 파고들어 자아를 탐험하게 만들도록 자극하는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고 한다. 이 책의 제목이 왜 "마그리트의 껍질" 인가했는데, 다 읽고 나니, 책에 정말 잘 어울리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을 표방하고 있지만 인간의 본성을 첨예하게 파고든다는 면에서 심리 분석서처럼 느껴지는 "마그리트의 껍질".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자아를 깨닫게 만드는 마그리트의 그림들처럼, 주인공 강규호가 꾸는 악몽들은 그가 본인 스스로에 대해 뭔가 깨닫도록 계속 신호를 준다. 꿈이 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과연 뭘까?

CCTV 설치 회사를 다니는 평범한 회사원 강규호는 불의의 사고를 당해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다리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은 채로 발견된다. 사고로 인한 충격으로 2년 동안의 기억을 모조리 잃어버린 그는 심리 치료를 위해 찾아간 정신 병원에서 역행성 기억 상실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다른 기억은 모조리 남아 있는데, 하필이면 왜 사고가 있기 전 2년 동안만 몽땅 사라진 걸까? 잃어버린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던 와중에, 그는 화장실 벽에 감추어진 한 여성의 사진과 금고를 발견하게 되는데, 사진 뒤에는 자신의 필체로 " 뒤를 조심할 것 "이라는 문구가 적혀져 있다. 미스터리한 금고와 그것보다 더 미스터리한 사진 뒤의 문구... 이 두 가지가 과연 주인공 강규호의 잃어버린 2년을 되찾아줄 것인가? 강규호, 그는 과연 누구이고 그를 공격한 자들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이 책 "마그리트의 껍질" 은 인간의 본성, 즉 그 어두운 심연을 파고드는 소설이다. 겉으로 보기엔 주인공의 자아 찾기 혹은 그를 몰래 뒤따르며 위협하는 무리들과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정도로 볼 수 있겠지만, 사실 이 소설은 그보다 더 분석적이고 깊이 있게 인간을 통찰한다. 마치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사회에서 잘 교육받은 친절하고 예의 바른 시민의 겉모습 뒤에 감추어진 것이 과연 무엇일까? 인간의 원초적인 무의식에는 뭐가 있을까? 인간은 선하게 태어나서 악하게 길러지는 걸까? 혹은 그 반대일까? 등등을 다양한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소설이 묻고 있다. 주인공 강규호가 만나는 정신과 의사가 분석한 비정상적 뇌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강규호의 연인 차수림이 좋아하는 하드보일드 공포영화 속 잔인한 장면들을 통해 이 책은 끊임없이 묻는다. 인간의 본질은 뭔가?

소설은 이야기 내내, 주인공 강규호가 거대한 음모의 덫에 갇혀있다는 떡밥을 던지지만, 사실 음모와 관련되어 보이는 사건들이 속도감 있게 펼쳐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조금씩, 천천히,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처럼 주인공의 숨통을 조여오는 식으로 전개된다. 그래서인지 소설 내내 불안감과 긴장감이 팽배하다고 느껴졌다. 예를 들자면, 평범하고 친근하게 다가왔던 주변 인물들, 편의점과 책 대여점 사장님의 친절했던 눈빛이 어느 순간 그를 감시하는 듯한 날카로운 눈빛으로 변해있고, 일하러 가던 도중, 도로 위에서 운전 시비가 붙은 사람들과 무기를 든 채, 살벌한 대치를 하기도 한다. CCTV를 설치하러 간 집의 고객은 열받는다는 단순한 이유로 골프채를 휘두르며 갑질을 해대고, 친하다고 생각했던 회사 상사는 갑자기 살기를 띈 채 주인공 강규호를 대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낯선 얼굴의 한 남자가 그를 계속 미행하기 시작하는데,,,,,, 그는 누구이고 왜 강규호를 미행하는 것일까? 내면으로는 끊임없는 악몽 그리고 밖으로는 지속적인 위협, 이 위험천만한 나날 속에서 주인공 강규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굉장히 감각적이고 신선하지만 동시에 매우 소름 끼치고 그로테스크하다고 느껴졌던 소설 "마그리트의 껍질". 인간들이 내면 깊은 곳에 감추어놓은 폭력성과 광기를 증명해 내려는 것 같기도 하고, 행하려는 "힘" 과 막으려는 "힘" 사이에 보이지 않게 벌어지는 팽팽한 대립 구도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거대한 미로 속에 갇힌 듯한 강규호가 비상한 머리와 엄청난 독서량 덕택에 얻은 지식을 이용하여 조금씩 사건의 중심에 다가가는 것을 보는 것이 대단히 재미있었다. 그의 무의식은 꿈속 이미지와 같은 매우 추상적인 단서도 놓치지 않고 사건 해결에 다가간다. 주인공 강규호가 가진 유난히 밝은 회색의 눈동자가 발산하는 싸늘함과 황폐함,, 피와 죽음이라는 이미지를 신봉하며, 그런 그림들을 그려내는 그의 연인 차수림... 그 두 신인류에 대한 보고서 같은 책이 수상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이 책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건 사실 강규호의 이야기도 아니고 차수림의 이야기도 아닌, 독자 바로 당신의 이야기라고.

* 출판사가 제공하는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거대한 회오리바람처럼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버리는 운명.. 그런 잔인한 운명 앞에서 개인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좌절한 채 주저앉아 울거나 분노할 수도 있겠지만, 적극적으로 운명을 받아들이는 방법도 있다. 소설 "원청"의 주인공 린샹푸는 자신의 삶을 할퀴고 가버린 사나운 운명에 의연히 대처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한 미래를 뚫고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는 린샹푸.... 소설 속에서 그가 보여준 용기와 고결함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애정과 의리 등등은 정말 인상 깊었다. 소설 "원청" 은 청나라에서 중화민국으로 넘어가던 시기, 격동의 중국이 겪었던 혼란과 아내를 찾아 정처 없이 떠돌다 낯선 땅에 정착하는 린샹푸를 동시에 비추면서 독자들에게 거대한 물음표를 던진다. 운명이라는 것, 인연법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삶은 그저 정해진 운명을 따라가는 것에 불과한 것일까?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았던 땅, "원청" 그곳을 찾아 린샹푸는 길을 떠났다. 중국 북쪽 지역 출신인 린샹푸는 갓 태어난 딸을 안고 자신의 몸만 한 거대한 봇짐을 맨 채, 원청이라는 땅을 찾아 남쪽 지역으로 향한다. 린샹푸의 삶에 조용히 들어왔다가 연기처럼 사라져버린 아내 샤오메이. 정직하게 삶을 살아온 린샹푸의 머릿속에는 의문만이 가득하다. 아름답고 친절했던 아내 샤오메이가 어떤 사연으로 그의 삶에 갑작스럽게 들어왔다가 가버린 걸까? 핏덩이 같은 딸, 애지중지하던 딸을 놔두고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인 걸까? 그리고 과연 고향땅 원청에 있기나 한 건지...

가던 길에 회오리바람을 만나 딸아이를 잃을 뻔하고 눈 폭풍에 휘말리기도 하지만 린샹푸는 포기하지 않는다. 천명이 넘는 여인에게 젖동냥을 받아 가며 고생고생 끝에 남쪽 지역에 도달하는 린샹푸. 그러나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원청이라는 지역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던 중 아내가 평소에 말했던 원청 지역과 가장 흡사해 보이는 지역인 시진에 도착하게 되는 린샹푸. 눈 폭풍이 몰아치는 가혹한 상황의 한가운데서 자신에게 큰 도움을 준 천융량이라는 사람과 그 가족들이 베푼 친절과 너그러움에 반한 린샹푸는 그들을 믿고 시진에 정착하기로 마음먹는데... 한 가닥 희망의 끈을 찾게 된 린샹푸.. 과연 그는 시진에서 꿈에 그리던 샤오메이와 상봉할 수 있을까?

중국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이 소설 "원청" 은 그야말로 엄청나게 흥미진진하고 흡인력이 대단했다. 역시 대륙의 힘인 것일까? 굉장히 스케일이 크고 선이 굵은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개인의 심리 묘사와 같은 섬세함은 떨어지지만 끊임없이 몰아치는 여러 사건 덕택에 지루할 틈이 없었다. 특히 청나라에서 중화민국으로 넘어가던 1900년대 초반, 중국의 여러 다양한 모습과 사건들이 아주 스펙터클하게 그려져서인지 대단히 생명력 있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국가의 혼란을 틈타 돈을 얻기 위해 사람들을 납치하고 고문하고 살인을 서슴지 않았던 토비들, 그리고 그 토비들에게 맞서서 대항하다가 고통을 겪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 특히 가족과 친구를 위해 자처해서 납치당하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이 찡해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와도 인간성을 송두리째 내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말자. 우리가 인간이라는 걸 한시도 잊지 말자.

이 책은 드라마인데도 굉장히 미스터리하게 시작한다는 점과 예상치 못했던 샤오메이가 화자인 이야기가 불쑥 등장한다는 점에서 흥미진진하다. 린샹푸라는 화자가 풀어내는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주인공 린샹푸 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도대체 샤오메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원청이라는 지역을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지.. 낯선 지역에 머물게 되는 린샹푸의 운명은 앞으로 어떻게 될 건지.. 알쏭달쏭 한 의문을 가진 채 책을 읽게 된다. 이 책은 어쩌면 우리의 인생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점을 치거나 사주를 해석하거나 하면서 예측을 하려고 애쓰지만 결국 우리는 우리네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 그냥 담담히 받아들일 뿐. 두 번째 이야기에서 우리는 비로소 의문을 품었던 많은 것들에 대한 해답을 얻게 된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입체적이었던 린샹푸에 비해서 다소 그림자처럼 느껴졌던 샤오메이의 사연이 술술 풀리며 두 번째 이야기에서는 그녀도 입체적인 존재로 변한다. 이 소설이 독특한 게, 사랑한다는 말이나 애정 표현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데도 절절한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한 운명, 안타까운 인연법 앞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의 애절한 사연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웃다가 울다가 또 가슴 아팠다가 분노하다가.. 걷잡을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책을 읽어내려갔다. 작가 위화는 [허삼관 매혈기]로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작가라고 하는데, 이 책 [원청]을 읽고 나니 그가 왜 인기 있는 작가인지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가 풀어내는 이야기가 굉장히 드라마틱 하고 살아있고 힘이 있다. 누군가가 굵은 붓으로 선이 뚜렷한 중국 역사 속 한 토막의 그림을 그려낸 것 만 같다. 격동의 시대를 겪어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마치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무엇보다도 주인공 린샹푸와 샤오메이의 이야기는 한 편의 서사시 같기도 했다. 거부하고 싶지만 거부할 수 없었던 안타까운 운명,, 도대체 이 아이러니한 운명의 장난은 누가 시작한 것인가? 만약 신이 있다면 그들이 꼬아버린 누군가의 실타래에 대해 항의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주어진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살아낸 사람들의 용감한 이야기, 원청.

*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폴론 저축은행 - 라이프 앤드 데스 단편집
차무진 지음 / 요다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주시하는

서늘하고도 사려 깊은 여덟 개의 시선

삶과 죽음은 과연 명확하게 나누어질 수 있는 걸까? 끊임없이 서로를 들여다보고 있는 쌍둥이거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돌다가 결국 하나가 되는 두 마리 도마뱀은 아닐까? 니콜 키드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 [디 아더스]는 엄연히 다른 세계에 속한 두 존재들이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며 경험하는 혼란과 착각을 다룬다. 두 아이와 함께 조용하게 살아가던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낯선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갑작스럽게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아이는 여주인공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사람들이 집에 머무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과연 그들은 누구고 여주인공이 겪는 혼란은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혼란스러워하는 등장인물을 보다가 예상치 못했던 결론, 즉 반전에 깜짝 놀라게 되는 영화 [디 아더스]. 나는 이 책 [아폴론 저축은행]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전율 혹은 소름을 느꼈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닷가가 그러하듯 물과 땅이 혼재하는 곳에서는 그 경계를 제대로 알 수 없는 법, 이 책 [아폴론 저축은행]에서도 죽음이라는 파도가 끊임없이 넘실대며 삶이라는 육지를 침범한다. 갑작스럽게 경계가 무너진 곳에서 질서가 흐트러지고 시공간이 뒤집히면서 "내"가 그들을 들여다보는지 "그들"이 나를 들여다보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는 책.. 작가의 그 서늘한 시선이 머무르는 곳으로 들어가 본다.

8편의 기묘하고 오묘한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책 [아폴론 저축은행].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작품 4편을 꼽아보자면 [그 봄], [아폴론 저축은행], [상사화당] 그리고 [비형도]이다. [그 봄]은 남편을 잃고 악착같이 살다가 결국엔 생활고로 추측되는 어떤 사유로 아이들을 절에 맡기게 되는 엄마와 그 엄마를 그리워하며 외로운 절간 생활을 이겨내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주지 스님이 살뜰하게 돌봐주기는 하지만 뼛속 깊이 엄마의 부재를 느끼는 아이들의 외로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이야기인데,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 때문에 제일 깜짝 놀랐던 소설이다.

[그 봄]이 아련하고 쓸쓸한 기운을 가진 소설이라면, [아폴론 저축은행]은 모든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고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단편이라고 볼 수 있다. 시나리오 작가이자 택시 운전사인 주인공. 혈액암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들어간 엄청난 병원비에 최근 일어난 외제차와의 교통사고까지.. 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주인공과 아내는 자살 시도를 하지만 결국 실패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택시 손님인 한 노신사가 소개해 줘서 알게 된 [아폴론 저축은행]이라는 곳에서 자신이 빌릴 수 있는 돈이 10억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주인공. 신용 불량자인 주인공이 그렇게 많은 돈을 대출할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뭘까?

[아폴론 저축은행]이 벼랑 끝에 서 있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매우 날카로운 시선으로 담아내었다면 [상사화당]은 "염매"라고 하는 고약하고 괴기스러운 귀신술을 부리는 남자 밀봉과 며느리와 아이 그리고 가진 것 전부를 일본에 빼앗겨버린 한 독짓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이 전달하는 황량함과 절망 그리고 "염매"라는 기묘한 저주술이 섞여 한 편의 그로테스크한 심령 영화가 탄생한 듯한 소설이다. 그리고 [비형도]는 그야말로 삶과 죽음, 이승과 저승이라는 시공간이 뒤집히는 것을 가장 절묘하게 보여주는 소설인데, 마치 도깨비에게 홀려서 밤새도록 빗자루와 씨름을 하고 깨어난 옆집 아저씨가 들려주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정말 신묘하고 신비롭게 다가왔던 단편이다.

죽음과 저승 그리고 영혼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에 속한다.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폐가 투어 같은 활동을 통해서라도 우리가 함부로 넘나들 수 없는 세계로 침범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죽음의 영역은 우리가 속한 세계와 동떨어져있는 걸까? 이 책 [아폴론 저축은행]은 독자들에게 묻고 있는 듯하다. 과연 죽음이 저 멀리 떨어져 있을까요? 혼자만 있는 줄 알았던 공간인데 만약 수많은 눈들이 그동안 내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면 그 기분이 어떨까요? 라고 말이다. 죽음이 내내 검은 입을 벌린 채 산자의 주변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려주는 듯한 소설 [아폴론 저축은행]. 읽고 나니 책 자체에 서늘한 귀기가 서려있는 느낌이다. 영혼의 존재와 초자연적 세계 등에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적극 추천한다.

*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