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미건조한 오트밀에 레몬식초 2큰술을 더한 하루
타라 미치코 지음, 김지혜 옮김 / 더난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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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히 차곡차곡 쌓아온 시간 손길 하나마다

한 땀 한 땀 삶이 짜여간다

나의 경우 부모님이 바쁘셨던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는 내내 시골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서 지냈었다. 사과 농사를 크게 지으셨던 할머니는, 바쁘신 와중에도 손자 손녀들의 끼니를 잘 챙겨주려고 노력하셨고 그때 먹었던 할머니표 물김치나 된장찌개 맛은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난다. 투박하지만 정감 있었던 할머니의 요리와 손길들... 내 어린 시절의 한 5할 정도는 할머니 댁에서의 삶이 차지한다.

일본 할머니는 어떻게 생활하고 계실까? 8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본인만의 삶에 리듬에 따라 충만한 생활을 이끌어가고 계신다는 "타라 미치코" 할머니. 유튜브 스타가 되어 크나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는데 그녀의 어떤 매력이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일까? 7년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 55년 된 서민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는 할머니. 2020년 우연히 손자와 함께 유튜브를 시작했고 처음에는 구독자가 가족뿐이었지만 두 달 후에는 구독자가 1만 명, 2022년 기준으로는 15만 명으로 늘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7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할머니가 지향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의 리듬에 맞게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실용적이고 검소한 할머니의 살림 솜씨, 특히 요리 솜씨에 감탄했고 그녀가 삶의 어떤 부분에서 소소한 기쁨을 느끼는지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매우 긍정적인 그녀의 삶에 대한 태도였다. 30년째 쓰고 있다는 '10년 일기'를 3권째 쓰고 있다는데 기록이 길어지기도 짧아지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부정적인 내용은 담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한 번씩 꺼내서 읽어본다고 하는데 추억놀이가 얼마나 재미있을지 .. 상상이 된다.

" 세 권째 쓰고 있는 10년 일기. 쓰고 있는 내용이 있을 때는 길게 쓰기도 합니다. 

날씨가 맑았다, 보름달이 예뻤다, 등 날씨만 써놓은 날도 있어요.

'피곤하다' 같은 부정적인 내용은 쓰지 않아요. " - 161쪽 -

"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지요. 인간관계가 잘 풀리지 않고 좋지 않을 때도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고 좋은 교훈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 - 204쪽-

그러나 역시 내가 주부라서 그런지 책 속 내용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고 흥미로웠던 부분은 그녀의 부엌살림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간단하지만 맛깔스러워 보이는 반찬을 뚝딱 만들어내는 솜씨에 감탄하고 말았다.

" 혼자 먹기 딱 좋은 나만의 식단을 알차게 꾸립니다 " - 62쪽 -

" 예쁜 그릇은 오래된 친구입니다" -56쪽-

혼자 살다 보면 식사를 아무렇게나 하기 쉽다. 하지만 타라 미치코 할머니의 경우 프로 혼밥러라고 해야 할까? 혼자 하는 식사에 놓인 반찬이 이렇게 맛깔스러워 보일 수가 없다. 예를 들자면 시금치 깻가루 무침은 시금치 삶고 깻가루와 간장으로 바로 무쳐내면 되고 무 오이 간장 절임은 깍둑썰기를 한 무와 오이에 간장을 뿌린 뒤 몇 시간 재워두기만 하면 된다. 이 요리 외에도 달걀, 어묵, 양파로 간단히 볶아낸 사츠마아게 볶음밥도 굉장히 맛있어 보였다. 

요리도 요리지만 평생 모아 오고 있다는 예쁜 접시와 그릇들도 요리를 한층 맛있어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역시 보기에 좋은 떡이 맛도 좋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만의 원칙을 담아서 이끌어오고 있는 충만한 삶! 타라 미치코 할머니가 이끄는 삶은 은은한 빛을 내면서 유튜브 구독자를 끌어모으는 것 같다. 연세에 비해서 굉장히 젊게 사시는 것 아닌가? 생각을 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긍정적인 마음 자세와 규칙적인 생활 태도 등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사는 삶도 좋아 보였다. 인간관계는 난로와 같은 것이라고 하는 말이 있다. 가까워지면 너무 뜨겁고 멀어지면 너무 춥고. 할머니는 독립적인 생활을 지향하면서 넓고 얕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모습이 정말 좋아 보였다. 순간순간에 충실하고 사람에 목매지 않고 자유롭게 그리고 충분히 삶을 만끽하면 살아가는 그런 인생... 나의 노년도 타라 미치코 할머니의 삶을 닮았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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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
한새마 지음 / 북오션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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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꽃을 의미한다는 "라플레시아". 이 꽃은 특히 고기가 썩는 듯한 고약한 냄새를 풍겨서 파리들이 왕창 꼬인다고 한다. 하지만 일단 파리가 꽃가루를 옮기면 금방 죽어버린다고 하니.. 그로테스크한 그 외면에 비해 생명력은 짧은 듯. 잔혹 범죄를 주로 전담하는 광역 수사대 팀장 강시호의 등에 이렇게 차마 꽃이라고 표현하기 힘든 거대한 꽃이 문신으로 떡하니 새겨져있다. 왜 하필이면 라플레시아일까?

수십 년 전 일본에서는 옴진리교가 살포한 사린가스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아침 통근 지하철 속 그 정신없는 와중에 독가스 살포라니 .. 양심도 없는 놈들 같으니..... 최근 우리나라에도 사이비 종교 문제가 아주 심각한 사회 문제로 자리 잡았다. 주로 가스라이팅을 당하기 쉬운 젊은이들을 노리고 접근한다니 교활하고 야비하기 그지없다. 이 소설 [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은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철저히 망가뜨리는 사이비 종교와 그 속에서 군림하며 사람들을 착취하는 추악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다룬다.

어릴 적 작은 어선에서 시체꽃 모양으로 죽은 여동생과 함께 발견된 시호. 그녀의 등에는 시체꽃 모양이 문신으로 새져겨 있었다. 아들을 잃은 강규식 형사에게 입양된 그녀는 이후 여동생 죽음의 진상을 밝히고자 형사가 된다. 낮에는 주로 잔혹한 범죄 현장을 뛰는 형사로, 밤에는 라플레시아 문신을 새겨주는 타투이스트로 바쁘게 살아가는 그녀. 인간관계는 사치.. 드라이하게 살아가며 오직 여동생의 죽음에 대한 진실만을 좇는다. 이 소설에서는 특히 강시호의 액션이 두드러지는데, 소설의 첫 장면에서 불법 격투기장에 들어가 몸소 격투를 벌이며 범죄자들을 때려잡는 모습은 진짜 박진감 그 자체였다!

그러던 중 대부 업체를 운영하는 신영호라는 사람이 한 고급 아파트 안에서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원한에 의한 죽음이었는지 어땠는지 얼굴은 곤죽이 되어 있고 범행에 쓰인듯한 다짐육 망치와 약간의 살점 그리고 치아가 식기세척기 안에서 발견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게 보안과 경비가 매우 삼엄한 아파트에서 일어난 살인이라는 점이다. 오직 지문으로만 드나들 수 있는 이 아파트를 드나든 사람은 본인 신영호와 아들 신태광, 가사도우미 김희령뿐이다. 그렇다면, 이건 흔히들 이야기하는 밀실 살인? 

한편 소설의 다른 화자인 민서는 가난한 집안 환경으로 인해서 힘들게 살아가는 청춘이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며 갑질 손님에게 시달리면서 살아가던 그때 인생의 멘토라고 할 만한 사람인, 제이 언니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할머니 손에 자란 제이 언니, 그러나 밝고 따뜻하며 인간적인 그녀에게 반해버린 민서는 제이 언니가 이끄는 한 공동체에 발을 내딛게 된다. 장터에서 열심히 물건도 팔고 밴드 공연도 하며 노숙자 쉼터에서 봉사활동도 하는 건전한 공동체로 보이던 그 종교 단체... 그러나 그들이 숨기고 있던 추악하고 거짓된 욕망.. 그 비밀스러운 모습이 민서 앞에 드러나는데...

계간 미스터리와 엘릭시스 미스터리 부문에서 수상을 한 한새마 작가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등장인물이나 스토리 면에서 굉장히 만족스러운 작품이었다. 등장인물의 경우, 여동생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과 죽음에 대한 자책감을 꾹꾹 눌러 담은 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위해 그리고 단서 하나라도 얻기 위해 현장을 발로 뛰며 고군분투하는 형사 강시호. 그녀가 가진 놀라운 범죄 해결력에 뛰어난 액션까지! 걸크러쉬가 따로 없다. 거기에 걸쭉한 사투리를 쓰는, 눈치코치 없는 우 형사가 콤비를 이루며 다소 코믹한 상황이 연출된다는 점도 마치 감초처럼 느껴졌다.

스토리 구성에서도 나무랄 데가 없는 듯. 강시호가 위험을 무릅쓰고 잔혹한 범죄현장을 뛰어다니는 것도, 밤마다 시체꽃 문신을 새겨가며 이와 관련된 단서를 얻는 것도 결국엔 여동생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고 하는 것. 끈질긴 추적 끝에 강시호가 타고 있던 어선에서 많은 아이들이 죽은 이유와 그녀의 등에 시체꽃 문신이 새겨진 이유가 밝혀지는데.. 그 더러운 욕망의 민낯을 보고 나니 씁쓸하기 그지없다. 개인과 사회는 동떨어질 수 없는 것. 추악한 욕망과 본래의 목적을 숨긴 채, 순수한 젊은이들을 가스라이팅해가며 몸을 불려가는 사이비 종교 관련자들.. 그 나쁜 놈들을 다 색출해서 관련자들을 다 감방에 처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시호의 액션이 그야말로 화려하게 묘사되기 때문에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진다면 더욱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소설 [잔혹범죄전담팀 라플레시아걸]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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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한강
권혁일 지음 / 오렌지디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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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렵게 죽음에 성공했다. 그러나 사라지는 데에는 실패했다.

자살한 이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동네 '제2한강'

완전 소멸에 이르기 전 마지막 기회인가 신의 장난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많은 발전을 이룬 인간이 유일하게 풀지 못한 미스터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삶과 죽음이 아닐까? 평소에는 바쁘게 살면서 '삶과 죽음' 특히 '죽음'에 대해 성찰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이 책 "제2한강"을 읽고 나니 그 미지의 영역에 대한 의문이 다시 생긴다. 주위를 둘러보면 살 만큼 살다가는 죽음도 있지만, 갑작스럽게, 그것도 제 손으로 세상을 등지는 안타까운 죽음도 있다. 물론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 그런 선택을 했겠지만, 남겨진 사람들은 그만큼의 자책과 슬픔을 떠안아야 한다.

이 책 "제2한강"을 쓴 작가 권혁일 씨는 갑작스러운 친구의 죽음 앞에서 매우 복잡한 감정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정신과 치료를 받긴 했으나 평소에 자살을 암시하는 행동을 전혀 보이지 않았던 친구. 세상은 변함없이 흘러가고 아름답기조차 한데 친구는 작별 인사도 없이 왜 그런 갑작스러운 선택을 했어야만 했을까? 남겨진 자의 슬픔은 작가를 오래도록 붙들고 놓아주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슬프지만 따뜻하고 아름다운 소설, "제2한강" 이 세상에 발걸음을 내디딘 것을 보면.

책 속에 나오는 "제2한강"은 자살자들이 흘러들어가는 곳이다. ( 자살자들은 죽음 이후 물에서 건져진다 ) 이곳은 여러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죄의 심판을 받는 지옥도 아니고 천사들과 노닐 수 있는 천국도 아니다. 자살을 마음먹은 사람들이 지겹도록 찾을 만한 그 한강, 실제 한강와 똑같이 생긴 곳이다. 그뿐 아니라 이곳에는 자살자들의 전입과 숙소를 관리해 주는 관리사무소도 있고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급식소도 있다. 한마디로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냥 공동체 같아 보인다. 현실과 다른 점은, 다른 색깔을 잃어버리고 푸르죽죽한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것과 죽을 때 나이를 그대로 가지고 사는 것. 그들이 먹는 된장찌개조차 푸르죽죽하다고 묘사되는 걸 보면... 마치 흑백 시대로 돌아간 느낌이랄까?

어릴 때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엄마에게 호된 질책을 들은 후 책임을 회피하며 살아온 주인공 형록. 일찍 엄마를 잃고 폭력적인 아빠와 살아서 부모의 따뜻함이라고는 모르고 자라온 이슬. 외모 콤플렉스로 시달리다가 뷰티 유튜버로 변모하여 찬란한 삶을 사는가 했지만 집요한 악플러의 공격에 무너지게 된 화짜와 업무 스트레스로 우울증과 공황 장애를 앓으며 살았던 오 과장까지....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제2한강의 주민들. 책을 읽다 보니 이들이 왜 "제2한강"에 와야 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은 " 다시 자살 "이라는 체계를 거쳐서 완전 소멸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곳에서 마음의 평온과 휴식을 얻은 게 아니었을까? 아무것도 할 필요 없고 아무 생각도 안 해도 되지만 아팠던 지난 과거를 정리할 수는 있는 곳. "제2한강"을 읽는 내내, 그들이 꾸깃꾸깃 구겨져 있는 지난 삶이라는 사진들을 곱게 펴서 재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선물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사랑하는 가족이, 친구가 혹은 아는 사람이 스스로 세상을 등진다면, 나는 크나큰 자책감에 시달릴 것 같다. 왜 그들의 일찍 고통을 눈치채지 못했고, 왜 더 관심을 보여주지 못했을까 하고 말이다. 실제로 몇 년 전에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운 여자 연예인이 스스로 유명을 달리했을 때 나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며칠 동안 계속 그녀 생각만 했었다. 한국의 악플러 문제가 너무 심각한 건 아닌지.. 그녀가 너무 일찍 연예계로 나와서 경험하지 않았어도 될 일들을 너무 많이 경험한 건 아닌지.. 그녀의 가족들은 앞으로 어떤 힘든 나날들을 보내야 할지.. 그런 생각들. 그런데 만약 신이 이 "제2한강"의 작가와 비슷한 생각을 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들에게 "제2한강"과 같은 환경을 만들어준다면 조금은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제2한강"의 사람들은 결국에는 자신의 삶이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지난 삶에서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을 결국은 찾아내니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안타까웠고 가슴 아팠고 눈물이 났다. 안 그런 척해도 결국 우린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바쁘다는 핑계 대신 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살아가야겠다는 다짐도 했다. 같은 나이의 친구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엔 나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가 친구였다는 걸 깨달은 이슬이처럼, 우리들이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뭔가를 되찾을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살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결국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끝난 소설 [제2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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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세계와 먼 우리 안전가옥 FIC-PICK 4
이경희.전삼혜.임태운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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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매트릭스]는 종말로 인해 황폐화된 지구에서, 컴퓨터의 배터리 노릇을 하며 가상 현실에 갇힌 채 살아가는 인류를 그린다. 주인공 네오를 비롯한 몇몇 깨어난 자들은 아직도 "가짜" 세상에서 살아가는 다른 인간들을 해방하기 위해 A.I. 들과 전면전을 펼치게 되지만, 그 와중에도 진짜 현실보다 가상 현실 속 달콤한 보상을 선택한 한 인간은 로그아웃을 온몸으로 거부한다. 이 책 " 가까운 세계와 먼 우리 "에 실린 단편집을 읽다 보니 내 최애 영화였던 [매트릭스] 속에서 해방, 즉 로그아웃을 하고자, 혹은 로그아웃을 막고자 엎치락뒤치락하며 싸우던 등장인물들이 떠올랐다. [매트릭스]를 보며 언젠가 아주 먼 미래에 인간이 인공 지능의 배터리 노릇을 하면서 가상 현실 속에서 비루하게 살아가는 디스토피아가 펼쳐질 가능성도 있겠구나.. 했는데?! 웬걸? 인간이 가상 현실 속에서 살아갈 미래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이 책을 보면서 들었다.

" 가까운 세계와 먼 우리 "는 3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 소설집이다. 3편 모두 가상 현실, 즉 메타버스를 주제로 구성된 이야기이다. 아직은 먼 미래가 아닌가 생각하던 차에, 기후 변화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는 현 지구의 상황이 떠올랐다. 단편 " 멀티 레이어 " 에서처럼 극심한 환경 변화로 인해 지구가 종말에 다다르게 되면 메타버스인 " 세컨드 서울" 을 택한 사람들처럼 우리도 가상 현실이라는 차선책을 택하게 되지 않을까?

첫 번째 단편 " 멀티 레이어"에서 극심한 기후 변화로 인해 지구가 물에 잠긴 후 인류는 "세컨드 서울"이라는 가상 공간에서의 삶을 택했다. 기한은 100년, 그 사이에도 기후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 회사가 로그아웃을 해주는 게 약정이었으나 100년이 지난 후에도 로그아웃 버튼은 활성화되지 않았다. 유저들은 항의 끝에 결국 혁명단을 조직하여 고객 센터로의 침입을 노렸지만 첫 번째 시도는 누군가의 우유부단함으로 인해 실패했고 이제 두 번째 기회가 왔다. "세컨드 서울" 을 테스트하던 시기부터 참여하며 그 세상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유저 정민에게 인클루드라는 닉네임의 유저가 다시 한번 의뢰를 해온 것. 가상 현실의 삶에 그럭저럭 만족하며 살아온 정민이 이 의뢰를 받아들일 이유는 별로 없지만, 문제는 이 혁명단을 이끄는 중심부에 자신의 수양딸인 수현이 있다는 것! 그는 과연 로그아웃을 애타게 원하는 수현을 위해서 고객센터로의 침투를 감행할 것인가? 그리고 성공을 거두고 로그아웃을 감행할 수 있을 것인가?

" 멀티 레이어 "를 쓴 작가 이경희는 다른 SF 작품인 [테세우스의 배]나 [모래 도시 속 인형들] 등을 통해서 주로 서열이나 권력을 이야기하는 편인데 이 작품에도 다르지 않았다. 가상 공간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자들, 즉 자유와 개혁을 원하는 무리들과 가상 공간에서 자신들이 쌓아 올린 부와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무리들 사이에 뚜렷한 갈등 관계가 드러난다. 사실 " 세컨드 서울" 은 붕괴하고 있고 붕괴 후 시스템이 셧다운 되어버리면 접속한 사람들은 어떤 부작용에 시달릴지 모를 일이다. 현실에서든 가상 현실에서든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소수 기득권과 불의와 불합리에 맞서 싸우는 다수 대중들이 있을 수 있다는 설정이 대단히 흥미로웠다.

메타버스 속 가상의 전시장에 걸릴 NFT 사진. 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손 사진들이 자신들의 것임을 알게 되는 현준의 구 여자친구들. 주인공 미현은 선배이자 절친이었던 소리의 작품을 무단으로 NFT 창작자에게 빼돌린 현준을 용서할 수가 없다. 구여친들이 연대하여 전남친의 불법 행위에 대한 응징을 가한다는 다소 코믹 발랄했던 작품 [구 여자친구 연대]와 메타버스 세계에서 아바타를 납치하는 일당들이 머무르는 요굴에 언더커버 요원으로 들어가서 테러 행위를 사전에 예방한다는 설정의 [바람과 함께 로그아웃]도 굉장히 신선하고 재미있었다.

사실 [구여친 연대]를 제외하고 다른 2단편들의 경우는 스토리가 있는 롤 플레잉 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만큼 그래픽 묘사와 장면 전환 자체가 상당히 화려하고 속도감이 있었다. 마치 평행 우주를 연상케 만드는 여러 레이어들, 그런 레이어들을 뛰어넘으면서 고객 센터로 질주하는 " 멀티 레이어" 속 정민의 모습과 " 바람과 함께 로그아웃 "에서 거대한 방망이를 휘두르며 날아다니는 도깨비의 모습에서 마치 신의 영역을 넘나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나 할까? 온라인 게임에 열광하며 오랫동안 가상의 공간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바로 그런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잠시였지만 가상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아바타로 변신한 듯한 느낌을 갖게 해 준 책 [가까운 세계와 먼 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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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질주 안전가옥 쇼-트 17
강민영 지음 / 안전가옥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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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질주]를 읽고 나니 내가 수영을 처음 배웠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어색했던 수영복과 너무 꽉 끼는 수영모 때문에 안 그래도 불편했는데 1시간을 꼬박 발로 물장구치는 연습만 했었다. 뭔가 멋있고 화려한 영법을 배울 것을 기대하고 갔으나 수영 초보자의 현실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몇 년이 흐르고 열심히 수영장을 다닌 결과, 나는 접영을 배울 수 있었고 똑같은 수영모를 쓴 아줌마들 사이에서 물살을 가로지르는 한 마리 돌고래가 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준 운동인 수영,, 그런데 이 책 [전력 질주] 속 주인공들이 재난을 만난 장소가 하필이면 수영과 달리기를 할 수 있는 생활 체육관이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장마로 인해 침수되어 점점 무너져가는 건물을 탈출하는 생존기를 그리는 소설 [전력 질주]

" 실제 나이는 20대인데, 신체 나이는 80대라고요. 지금까지 이런 몸 상태로 어떻게 버텼어요? "

[전력 질주]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진은 온몸이 아파서 간 정형외과에서 신체 나이가 80대라는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란다. 걷기와 달리기를 통해서 신체 나이를 끌어올려 보려고 애쓰는 그녀. 하지만 오히려 여기저기 다치기만 한다. 그런 그녀를 보다 못한 의사는 진에게 다치지 않는 운동인 수영을 해보라는 처방을 내리고, 진은 의외로 수영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야근을 한 다음날에도 수영장에 갈 만큼 열심히 훈련을 한 결과 진은 바다 수영에 도전하게 되고, 결국엔 전국 여성부 수영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는 쾌거를 얻게 된다.

"뛰어서 회사 출근 안 한 지 꽤 되었죠? 왜, 항상 형광색이 이렇게 멋있게 있는, 그 예쁘게 생긴 운동화 신고 왔잖아요."

한편, 또 다른 주인공인 설은 회사에 달리기로 출근할 만큼, 달리기가 생활화되어 있다. 그러나 장마철이 왔고 밖에서 뛰다가 물웅덩이에서 미끄러진 경험을 한 후, 현재는 열흘째 달리기를 쉬고 있다. 마라톤 대회를 비롯한 여러 대회를 목전에 두고 있는 터라 일요일 오후 이렇게 쉬고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던 설은 거대한 트랙을 실내에 설치했다는 송도 트라이 센터를 찾게 된다. 매우 훌륭한 시설 안에서 열심히 훈련을 하고 있던 중, 아주 미묘하지만 분명한 '텅' 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 설. 지하 5층에서 4층으로 이어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계속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찝찝한 마음에 에스컬레이터로 다가간 설은, 레일 끝자락에 겨우 매달려 있는 진과 그 밑으로 넘실대는 잿빛의 탁한 물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과연 무슨 일일까?

안전가옥 쇼트 시리즈 17 [전력 질주]는 요즘 기후 변화가 극심한 우리나라에서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재난과 그 재난에 대처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삶을 변화시킨 수영과 달리기, 그러나 하필이면 진과 설이 휴일에 훈련을 위해서 찾은 곳이 바로 송도 트라이 센터였다. 장기간 내린 비 때문에 신도시의 주거지가 침수되었고 송도 트라이 센터가 그 중심지에 있었던 것. 건물 안으로 들이닥친 거대한 물로 인해 지하층이 무너지고 에스컬레이터가 부서졌으며, 정전으로 인해 앞이 거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점점 불어나는 물은 그녀들의 목숨을 시시각각 위협하게 된다. 그러나 각종 대회에서 상을 휩쓴 진과 설이 아니었던가? 누구보다 빠른 그들의 팔과 다리, 그리고 서로를 위한 마음은 위기 상황에서 그녀들을 구출해내는데......

재난 상황이라는 게 멀리 있지 않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책 [전력 질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기후 변화로 인해서 언제 어떻게 재난과 맞닥뜨리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책의 주인공 허진과 김설은 각종 대회에서 만나게 되는 일종의 라이벌 관계이지만 우연하게도 재난의 상황에서 맞닥뜨리게 되면서 서로 연대하게 된다. 그러면서 서로의 약점과 아픈 곳을 알게 되면서 더욱더 끈끈한 관계를 만들어간다. 과거 반려견을 바다에서 잃어버린 트라우마 때문에 수영을 두려워하는 설과 무릎을 크게 다친 경험 때문에 달리기를 두려워하는 진. 그러나 이들 둘이 힘을 합치게 되면서 위험천만한 상황에서도 용감히 대처해 나가는 그녀들의 든든한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은 약하지 않고, 외롭지도 않다!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더 큰 힘을 발휘하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용감한 여성들의 이야기 [전력 질주] 였다.

* 출판사가 제공한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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