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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들
최유수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0월
평점 :
모든 것은 시작과 동시에 영원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가벼워진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건 눈에 띄지 않는 모호한 미소.
너의 그 미소.
나는 평소에는 구조가 좀 뚜렷한 글을 즐겨 읽는다. 말하자면 서론, 본론, 결론이 뚜렷하고, 특히 광기 어린 반전(?)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추리 소설이나 범죄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성향 때문인 것 같다. 첫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문제가 발생하고 주인공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미친 듯이 쏘다니는 그런 글. 가독성도 높고 치열하게 읽을 수 있는 글. 그런데 이번에 읽게 된 책 [환상들]은 전혀 다른 글이다. 생각의 조각, 즉 편린들을 잠은 글이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 즉 "의식의 흐름"에 따라 쓴 글이라는 느낌이다.
이런 글을 "시적 산문"이라고 해야 하나? 작가가 살면서 깨우친 진리나 자유로운 상상 등을 담고 있는 글이라 문장 하나하나가 대단히 아름답고 밀도가 높다. 뚜렷한 주제의식이 있기보다는 내면의 소리를 담은 이야기 같기도 하다. 저자는 세상과 삶을 관조하는 듯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사실 삶을 경쟁적으로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기보다는 외부로 눈을 돌린다. 그들은 현상에 관심이 더 많고 추상적인 관념이나 개념에는 크게 관심이 없다. 저자는 그들과는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인 듯하다. 자신 안의 빛을 발견하려는 사람이다.
글의 소재들은 다양하다. 혼자만의 사색, 미술관에서의 체험, 노랫말이 있는 음악을 잘 듣지 않게 된 이유 등등등.... 어떻게 보면 사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이런 소재들이다. 아주 감각적이고 환상적인 작가의 시각을 담고 있는 글인데,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가서인지 굉장히 공감이 가는 대목들이 많았다. 요즘은 잔잔한 피아노 음악 아니 클래식에 이끌리는 편인데, 작가님도 그러신 듯. 32쪽 "노랫말이 없는 음악은 어떤 시간 속에 고정된 감정들이 내가 있는 공간을 배회하면서 가만히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다. 강렬한 뒤흔듦보다는 수평선의 고요가 좋아진다. (..) 어떤 말도 필요 없을 만큼 한없이 고요해지고 싶다."
32쪽에 나온 문장 말고도 공감이 가는 대목이 많았다. 42쪽에 등장하는, 홀연히 사라지는 인물이 되는 상상. "마치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심지어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모르고 있는,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뿐, (...) 연락이 닿는 모든 수단을 닫아두고 깨끗이 고립되는, 그래서 지금껏 '나'로서 존재해온 나 자신의 초기화하는 시간." 나도 완전히 혼자인 여행을 상상해 보는데 말이다. 작가는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건 바로 직전의 과거를 받아 적기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뭔가 알듯 말듯 아리송한 문장이지만 공감이 갔다. 언어란 형식일 뿐... 기억도 일종의 각본일 뿐... 작가는 진정한 감각을 위해서 껍데기를 버리려는 것 같다. "나는 일기를 쓰는 대신에 들판에 모닥불을 피운다. 들개 몇 마리가 불 곁으로 둘러 모인다. 우리는 함께 셀프 카메라를 찍는다. 그 사이 늦서리가 사르르 녹아내린다."
이 책에는 아주 추상적인 개념들이 많이 등장한다. 기억, 꿈, 사랑... 이 중에서 "기억"이라는 주제에 대한 글이 많은 편이다. 102쪽 "기억의 또 다른 이름은 무덤이다. 그것이 어디론가 파묻히고 안치되기 때문에. 그러니 잘만 묻어둔다면, 다시 파내고 끄집어내지 않는다면, 그곳에 영원히 고요한 안식이 있으리라. 186쪽 "다 타서 재가 된 시간들이 벚꽃잎처럼 흩날린다. 되감기와 되풀이. 맨 앞에 선 '나'는 백 년 무패의 영웅처럼 돌아선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것들 중 "기억"이라는 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는 이미 흩어져 버렸지만 어떤 기억들은 정말 뚜렷하게 남아서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행복하게 한다. 작가님이 그런 것을 말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나 싶었다.
작가님과 함께 아주 조용하고 차분한 음악을 들으면서 삶을 생각하고, 멀어진 인연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가진 기분이다. 철학적이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감각적이라고 느껴졌던 책 [환상들]
* 출판사에서 받은 책을 읽고 주관적으로 리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