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슈퍼마켓 안에 갇히기

 

  사람 사이에 이상적인 궁합은 무엇일까. 충고하기 보다는 들어주는 관계일 때가 가장 바람직하다. 거기다 맞장구까지 쳐주면 더 바랄 게 없다. 옳은 말은 아낄수록 좋다. 어쩌다 바른 말을 하더라도 상대가 받아들이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이때도 원칙은 될 수 있으면 바른 말은 하지 않는 거다. 정답은 이미 너나 나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옳은 말을 하는 이가 아니라 내 말을 들어줄 친구가 필요하다.

 

 

  모든 이로부터 옳은 말을 들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한 스트레스는 없다. 그래서일까. 누구든지 빈틈없는 사람이 쏟아내는 충고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또한 내 말에 무심한 리액션으로 화답하는 친구들과는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다. 그건 인지상정이다. 자고로 사람이라면 흉도 보고 욕도 하면서 살아야 제격이다. 어딘지 맹탕이고, 알고 보면 허당이고, 배워도 기계치고, 작심해도 사흘파인 범부범부들에게 완벽한 사람은 부담스럽기만 하다. 자중자애하는 사람들은 말문을 트기 어렵다. 흉도 잘 보고 욕도 거하게 하는 맘 편한 사람이 제일이다.

 

 

  사람 사이에는 궁합이란 게 있다. 흔히 이런 경험을 한다. 어떤 사람과 만나면 나는 슈퍼에 갇힌 피의자이고, 상대는 투명 창을 사이에 둔 슈퍼 주인 같다는 느낌. 한 마디로 궁합 맞지 않는 관계일 때 이런 기분이 든다. 이 감정은 상대적이라 내가 피의자 역할일 때도, 상대가 피의자 역할 일 때도 있다. 물론 감정이입이 더 잘 되는 쪽은 아무래도 내가 피의자 입장일 때다. 왜냐면 잘난 슈퍼 주인 입장일 때는 사방 천지가 열려 있어 거리낄 게 없다. 하지만 코너에 몰린 피의자 입장 일 때는 사방이 벽이니 갑갑할 수밖에 없다. 당당하거나 잘났다고 생각할 때보다 수치심이 일거나 자괴감이 들 때 생각이 많아지는 건 당연하다.

 

 

  슈퍼 주인은 피의자를 감히 덮치지는 못하고 경찰을 부를 기회만 엿본다. 슈퍼 안 물건에 손댈 의향이 전혀 없던 피의자는 무슨 잘못을 한지도 모른 채 자책한다. 출구가 없다는 걸 알게 된 피의자는 자포자기한 채 급기야 슈퍼 안 물건에 눈을 돌린다. 진열된 에이스나 다이제 비스킷을 먹고, 나아가 냉장고안 박카스와 콜라마저 마셔버린다. 시간이 지나면 슈퍼 안의 모든 물건을 해치우고 만다. 슈퍼 주인이 경찰에 신고해봤자 때는 늦다. 쌀 다 퍼먹은 독안의 쥐가 주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슈퍼 안팎의 느낌이 드는 관계일 때는 맹렬히 맞설 자신이 없으면 서서히 정리하는 게 맞다. 얼굴 맞대고 힘들어 하느니 덜 보고 자유로운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맞는 사람 만나기에도 우리 생은 너무 짧다.

 

 

 

 

   

2. 각질은 없애는 게 아니더라

 

  뒤꿈치가 갈라졌다. 부옇게 각질도 일었다. 찬바람 몰아치고 공기가 건조한 겨울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청 현상이다. 물기 부족한 뒤꿈치에는 부스스한 각질이 돋고 나뭇잎맥 같은 잔금이 서렸다. 심한 곳은 골이 푹 파였다. 뒤꿈치가 거칠어지고 지저분해지는 데는 짧은 시간만이 필요하다. 각질이 증식하지 못하도록 연화제 화장품만 발라주면 되는데 그조차 귀찮다고 방치하다 생긴 일이다.

 

 

  어릴 적 풍경 하나, 겨울 대중탕에는 둥근 돌이 비치되어 있었다.(원래 있었는지 개인이 준비해왔는지는 확실치 않다.) 중년의 엄마들은 물에 불린 뒤꿈치의 각질을 일차로 면도칼로 도려냈다. 그런 뒤엔 뒤꿈치를 돌에다 대고 문지르고 문질렀다. 고정 그라인더 역할을 하는 돌 위에서 뒤꿈치를 갈고(?) 나면 일주일은 개운할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번 목욕탕을 찾을 때 각질은 다시 증식하고 골은 더욱 파질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 엄마들은 다시 물에 불린 뒤꿈치를 돌 위에다 갈곤 했다. 뒤꿈치 갈기의 악순환이었다.

 

 

  젊었을 때는 엄마들의 그런 풍경을 이해하지 못했다. 건강한 청춘의 뒤꿈치에는 각질이 잘 생기지도 않았고 골이 패지도 않았다. 해서 생업에 전력투구하는 엄마들의 고단한 땀이당신들 발을 거칠게만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뒤꿈치가 망가지는 건 열심히 산 흔적이라기 보단 노화 현상의 하나라는 걸 알겠다. 그 시절 엄마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온한 일상이지만 내 뒤꿈치는 그때의 엄마들처럼 물기를 잃고 살비듬을 만들었다.

 

 

  게을러서 방치한 뒤꿈치에다 보습제를 바른다. 뒤꿈치 보호용 양말도 챙겨 신었다. 물기 품은 화장품은 하룻밤 새 발을 파고들어 온 발바닥이 부들부들해졌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점점 생기를 잃기 마련이다. 푸석해지고 거칠어진 그것들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달래서 함께 가야 한다. 그 옛날 엄마들이 면도칼로 도려내고 돌에다 문질렀지만 근본적으로 각질이 사라지진 않았다.

 

 

  맘에 들지 않는 무언가를 없앤다고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다. 없어진 것 같은 그것은 어느 순간 증식해 어김없이 우리 곁에 와있다. 각질은 잘라내고 갈아내야 할 쓰레기가 아니라 부드럽게 숨죽여 함께 가야할 동반자이다. 연화제를 바른 뒤꿈치가 부드러워진 건 각질이 떨어져 나가서가 아니라 그것을 부드럽게 진정시킨 화장품의 원리 덕이다. 부끄러움이나 회한이나 까칠함이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그게 내 것이 아니라고 도려내고 깎아낼수록 더 두툼한 삶의 각질이 내 안에 자리 잡는다. 불편하고 까칠한 것들도 없애는 게 능사가 아니다.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함께 가는 것이란 걸 부드러워진 뒤꿈치가 말해준다.

 

 

 

 

 

 

3.춥지 않아도 떨리는 것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 작품집『디어 라이프』의「아문센」단편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말이다. 앨리스 먼로의 그 선언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결핵 요양원의 교사 일자리를 찾아 나선 나는 토론토에서 시골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기차역에서 열한 살의 메리라는 수다쟁이 여자애를 만나고 그 아이가 요양원에서 일을 돕는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육적 의미 부여보다는 하루하루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그곳이 지리멸렬하지만 숨통 틀 곳은 있다. 평판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흉곽 수술을 전담하는 외과의사와 데이트를 하고 결혼까지 약속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결혼 의사를 번복한다. 발목에 쇠사슬을 감은 심정으로 나는 그곳을 떠나는 기차를 타게 된다.

 

 

  기차 안에서 우연히 메리 일행을 만난 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고마울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감정에 충실한 나머지 그에게 달려가기 위해 기차를 내렸을지도 모른다. 의사에게 매달리지 않은, 수치심을 막는 계기가 되었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여러 해 동안 나는 언젠가 그와 마주치리라 생각한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토론토 북적대는 길에서 그와 재회한다. 별일 없는 것처럼 덤덤히 얘기하지만 그곳 아문센을 떠나올 때와 똑 같은 감정을 느낀다. 격한 울음도 없고, 내 어깨를 잡는 손도 없지만 멍한 상태의 나를 기차가 태우고 떠나올 때와 같은 감정을.

 

 

  사랑의 감정이 시간이 흘렀다고 없어지진 않는다. ‘팽팽하고 신경을 건드리는 기쁨’, ‘춥지 않아도 몸의 떨림을 멈추지 못’하게 하는 그 한때의 사랑! 하지만 운명처럼 헤어짐 앞에서 어느 한쪽은 ‘이 날이 당신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 될 거라고 발뺌을 하게 되리라. 그렇다고 그 사랑이 잊힐 리가. 어느 날 문득 그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집으로 돌아오던 그 기차안의 심정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건 없다. 변하는 건 현실이지 사랑했던 그 감정이 어떻게 변할까.

 

 

 

 

 

 

 

3. 통제라는 시선

 

  가끔 텔레비전 국제 뉴스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지역에 주민들 소요 사태가 생긴다. 건물 곳곳에 방화가 일어나고 거리엔 부서진 집기들로 가득하다. 거리로 몰려나온 수많은 인파 사이에 꼭 남의 물건을 약탈해가는 군상들이 있다. 무단이나 불법으로 취한 그 물건들을 카메라 앞에 들이대며 마치 개선장군이나 되는 것처럼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평화와 안전이 보장된 나날들에서는 결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질서와 규범이라는 합의 체제 안에서 세상은 별 탈 없이 굴러간다. 하지만 그 합의 체제에 조그만 균열이 생기면 그 틈새를 비집고 인간의 비양심적 근성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지고 만다. 위의 장면은 인간의 온전한 양심이 얼마나 유지, 발휘하기 어려운가를 말하는 좋은 예시가 되어준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통제’를  부르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꼴이다. 인간의 행동 양식이 양심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재해 앞에서, 또는 질서 유지가 전제된 공공 서비스에 혼란이 오면 인간 세상에는 약탈과 폭력이 급증한다. 사회적 합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상태에서 몇몇 집단들은 자신들의 사적 이익에 혈안이 되고 안달을 한다.

 

  들킬 염려가 적거나 처벌 받을 확률이 낮을수록 일탈 행위에 가담하는 횟수나 강도가 높아진다. 멀쩡한 배기통을 새것으로 갈아야 한다고 정비사는 거짓말을 하고, 실수로 거스름돈을 덜 줬다는 걸 알고도 가게 주인은 그냥 넘기며, 거리에 휴지를 버리고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다. 강력한 통제가 뒤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게 그 어떤 동물보다 통제나 강제된 규율을 싫어하는 게 인간이란 피조물인데, 막상 통제가 없거나 그것이 느슨한 경우에 양심 불량을 자청한다는 것이다. 양심만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는 걸 인간 스스로 인정하기에 통제라는 사회적 규율을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무너지는 순간 다시 양심 불량이 되는 인간 심리의 오묘함.

 

 

 

 

 

 

   4. 도덕적으로 보이고 싶을 뿐

 

  학교 때 가정 선생님이 말했다. 가구 파트 부분을 공부할 때였다. 침대의 길이는 180센티미터니 그것을 교과서 아랫부분에 적어 넣으라고. 교과서에는 나오지 않는 부분이지만 혹시라도 대입시험에 나올까 첨가하는 형식으로 선생님은 참고 교재에 나오는 그 내용을 학생들에게 적어 넣기를 강요했다.

 

 

  몇몇 학생이 그 내용을 적지 않고 군소리를 했다. 아마는 이런 웅성거림이었을 게다. 키가 180센티미터 넘는 사람도 많은데, 왜 침대 길이를 180센티미터라고 규정하는 것일까. 설사 참고서에 그렇게 적혀 있더라도 선생님 선에서 그런 건 걸러버리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시험에 이런 불합리한 내용이 나올 턱도 없는데. 뭐 이런 내용의 불만이었을 게다. 물론 침대 길이를 교과서 밑 여백에 적으라는 선생님 지시 내용을 따르지 않은 학생들은 손바닥을 맞았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수학 시간이면 선생님은 일명 ‘ 빡빡이’라 불리는 숙제를 검사했다. 연습장 앞뒤로 빡빡하게 몇 장씩 수학 문제를 풀어오는 것이었다. 역시 몇몇 학생들은 일찌감치 숙제를 포기하고 손바닥 맞는 길을 택했다. 나머지 숙제를 해온 학생들도 제 스스로 문제를 풀어온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습관처럼 참고서 풀이내용을 그저 앞뒤로 빡빡하게 베꼈을 뿐이다.

 

 

  이제 도덕 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군사부일체에 대해 열변을 토하신다. 좀 부당하고 불합리하더라도 부모에 효도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일이야말로 도덕적 인간이며, 나아가 애국하는 시민이라는 논리이다. 앞선 두 시간에 손바닥을 맞지 않은 대부분의 아이들은 뿌듯한 심정이 된다. 자기들도 가정선생님과 수학선생님이 불합리하고 부당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선생님이 시킨 것은 그게 옳든 그르든 일단 하는 게 맞는다고 본다. 뭐 이런 취지에서 오는 뿌듯함이다.

 

 

  그들은 순간적이나마 손바닥을 맞은 친구들에 비해 훨씬 도덕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그날 아침 집단상담 시간에 그들의 개인적 가치를 물었을 때 그들은 스스로 손바닥 맞은 친구들에 비해 그다지 도덕적이라고 자부하지는 않았다. 어떤 불합리한 상황에 맞닥뜨리고 그것을 따랐을 때, 그것에 응원이 실릴 경우 우리는 스스로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포장하게 된다. 인간은 그저 비도덕과 도덕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인간적인’ 존재일 뿐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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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1-22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옳은 말하는 사람에 관한 어떤 사람이 그 사람 말이 전적으로 다 맞긴한데, 그 사람이랑은 관계맺기가 싫더라. 라는 말을 했던 적이 있어요. 그땐 옳은 말하는 사람이랑 왜 관계 맺기가 싫지 했는데, 피곤한거겠더라구요. 그냥저냥 넘기도 싶은 일들까지 시시콜콜 따지고드니 스트레스 받겠더라구요. 전 요새 말을 많이 아껴야겠단 생각을 많이 하는데도 여전히 잘 따지고, 여전히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고 들어요.ㅜㅜ 조심해야겠어요. 더더욱.

다크아이즈 2014-01-23 10:19   좋아요 0 | URL
ㅋ 저도 옳은 말 잘 안 하려고 노력해요.
옳은 말은 상대가 더 잘 알거든요. 알고 있는 그 말을 리바이벌하면 상대를 찌르는 것과 같잖아요. 잘 들어주려고 노력해요. 노력하는데도 물론 잘 안 될 때도 있어요.
(도저히 내 저질 인격으론 못 받쳐주는 상황이 발생할 땐) 조용히 접어요.
잘 들어주기, 공감하기 이것만 되어도...
해서 저는 제가 말해야 하는 쪽보다 제가 말을 들어야 하는 쪽 사람들이 더 편해요.
침묵은 싫으니 누군가 말은 해야겠고, 근데 상대가 말이 없으면 제가 해야하니 그런 상황이 너무 싫은 거예요. 해서 말 많고 잘하는 사람들 무리가 훨씬 제겐 편하답니다. 참고로 저도 말을 잘하고 많은 편이거든요. ㅋ

oren 2014-01-22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는 제목을 단 팜므 님의 이 글을 읽으니 "빈말은 친구를, 진실은 증오를 낳는다."는 말이 문득 떠오르네요. 이 말은 자신의 친구(테렌티우스)가 쓴 희곡 《안드로스에서 온 아가씨》에 나온다고 키케로가 알려주던데, 그 작품을 직접 읽어보려고 《테렌티우스 희곡선》을 샀더니 정작 그 책에는 엉뚱한 작품들만 여럿 담겨 있더군요.

다크아이즈 2014-01-23 10:36   좋아요 0 | URL
오렌님, 정말이지 어떨 땐 제가 슈퍼마켓에 갇힌 용의자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니까요. 아, 어쩐다, 어쩐다 이러면서 그 불편한 상황을 벗어나고플 때가 있어요.
빨리 집에 가서 잠자고 싶다, 이런 느낌 드는 상황 누구나 경험하잖아요.

빈말은 친구를, 진실은 증오를 낳아요. 확실해요. 현명한 테렌티우스에 더 현명한 키케로 할배 ㅋ
진실은 실은 상대도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 잘 들어주는 게 더 필요하지요.^^*

Shining 2014-01-2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글은 정말 좋아요 매번 언제나 항상. 단단하고 온도가 분명한데도 보들보들한 느낌이 구멍위로 따뜻한 숨이 퐁퐁 올라오는, 그런 기분이 들어요. 오늘처럼 심란하고 울적한 날, 팜님의 글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요 :)

다크아이즈 2014-01-23 10:27   좋아요 0 | URL
샤이닝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ㅠ
제가 꼽은, 글 잘쓰는 십대 알라디너에 속하는 님께서 이런 말씀 하시면 기분 좋아지잖아요. ㅋ
특히 님은 섬세한 사람의 감정에 대해 묘파를 잘하시지요. 깜짝깜짝 놀라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한두 번이 아니란 걸 제가 고백한 것 같은데요.
자주 알라딘 들러주시어요. 저도 노력할게요.^^*

페크pek0501 2014-01-22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굴 맞대고 힘들어 하느니 덜 보고 자유로운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불편하고 까칠한 것들도 없애는 게 능사가 아니다. 말랑말랑하게 만들어 함께 가는 것이란 걸 부드러워진 뒤꿈치가 말해준다. "

팜 님의 글은 저로 하여금 여러 번 읽게 만들어요. 아니 베껴쓰기를 하고 싶게 만들어요.
어느 정도로 공부하면 이런 필력을 보여 줄 수 있는 건가요?

저는 그런 역량이 없으니 요즘 글에 '재미'를 넣는 것에 치중하고 있사와요. ^^
많이 배우고 갑니다. ^^

다크아이즈 2014-01-23 10:34   좋아요 0 | URL
페크 언냐, 제가 좀 덜 떨어졌지요? 적극적 해결법을 모색해라, 가 아니잖아요.
무슨 말인고 하니 <힘들어 하느니 덜 만나라> 이런 요지는 심리학에서 치유하는 방법에 나오는 공식 같아요. 시간을 벌어라, 덜 만나라, 자신을 돌아봐라, 치유 되면 만남을 재개해라, 뭐 이런 식의 공식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정도가 심하면 아예 안 만나면 되니 그건 더 쉬운 방법일까요?

글 역량하면, 필력하면 페크언닌데, 거기다 재미까지 섭렵하시면 페크님 블로그 난리 나는 거 아네요? 저야말로 언니 글에서 많은 걸 얻습니다. 서로 힘을 얻자요~~~^^*
 

 

 

 

   

 

  1. 구기고 구긴다

 

  왼발을 삐끗했다. 밤길, 움푹 팬 아스팔트 웅덩이를 미처 보지 못해 발을 헛디뎠다. 창피한 것도 잠시, 이런 생각이 스쳤다. 어둠 속 허방이야말로 신의 한수가 아닐까 하는. 밝을 때 길을 걷는 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웅덩이나 돌부리가 보이더라도 건너뛰고 돌아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길을 걷는 건 조금 다르다. 잘 보이지 않아 허방에 빠지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확률이 낮보다 높다.

 

 

  허방 자체는 밝으나 어두우나 그 자리 그대로 있다. 하지만 허방이 제 가치를 발하려면 인간이 그 속에 제대로 빠져봐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둠의 조건이 낫다. 헛디디지 않기 위해선, 환할 때보다는 눈조리개를 더 열고 무릎이나 발목 관절도 더 굽혀야 한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삐딱한 시선과 뻣뻣한 관절로 밤길 걷다가는 허방 앞에서 제대로 고꾸라지고 만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밝은 면이 펼칠 때는 앞도 잘 보여 뻣뻣한 발걸음이라도 허방을 쉽게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흐린 날에는 장막이 눈앞을 가려 웅덩이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럴수록 무릎관절을 꺾어 조심스런 행보를 해야 한다. 고영민 시인의 말처럼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에 이를 수 있도록.

 

 

  미숙한 관용을 지닐수록 타인에게 엄격한 발소리를 내기 쉽다. 뻣뻣한 그 소릴랑은 제 속을 향할 때 제격이다. 허방 앞에서 고꾸라지는 건 내 무릎을 덜 굽혔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선 조심조심 부드러운 발걸음이라야 발밑 웅덩이를 제대로 보게 된다. 원칙보다 나은 건 상식이고, 상식보다 나은 건 이해이다. 원칙을 들먹이며 핏대를 올리기보다 이해할 수 있겠다며 손 맞잡는 일이 내겐 더 필요하다.  멋진 시가 적힌 뻣뻣한 책으로는 현실이란 똥구멍을 닦을 수 없다. 밑바닥 깊숙한 그곳을 닦기 위해선 그 종이 찢어 구기고 구겨야 한다. 마침내 부들부들해진 그것이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갈 수 있을 때 진짜 시의 날들을 맞는 거다.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 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2. 풍경을 읊는 재미

 

  문학적 눈썰미를 키우는 데는 사진만큼 좋은 것도 없다. 전혀 낯선 분야지만 맘에 드는 사진을 들여다보노라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파문이 일다 마침내 지층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일찍이 롤랑 바르트는 사진 읽기의 정서를  ‘스투디움’과 ‘푼크툼’으로 정의했다. ‘스투디움’ 은 사진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일몰 사진을 보고 ‘햐, 기막힌 풍경이구나.’ 단순히 이렇게 느꼈다면 이는 스투디움에 속한다. 반대로 사진의 구름 모습에서 어릴 적 술이 취해 살아있는 뱀 대가리를 조여잡고 휘두르던 옆집 아저씨를 떠올리게 된다면 이는 푼크툼에 해당한다. 스투디움이 보편적 일반적인 정서라면 푼크툼은 특수성과 개별성의 요소를 지닌다. ‘나를 끊임없이 찔러대는 그 무엇’이 푼크툼의 정서이다.

 

 

  롤랑바르트의 이 두 개념을 문학에서의 알레고리와 상징의 개념에 대입해도 무리가 없겠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알레고리는 어떤 보편적 정서를 이끌어내기 위해 다른 것으로 빗댄 것을 말한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는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를 구별하기 위한 교훈으로 기능한다. 이 알레고리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비교적 명확하다. 이는 롤랑바르트가 사진에 대해서 말한 스트디움의 정서에 가깝다. 반면 상징은 좀 더 다의적이고 개별적이다. 김춘수의 ‘꽃’은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게 아니다. 독자 개별자에게 가닿아 폐부 깊숙한 ‘찌름’을 유발한 채 저마다의 꽃으로 재탄생 된다. 롤랑 바르트 식 ‘푼크툼’이 되는 것이다.

 

 

  어느 시인이 말했다. 문학의 위치는 어디인가? 예술과 알레고리라는 양끝에서 예술 쪽에 가까운 게 문학이라고 했다. 문학을 이처럼 이분법으로 도식화할 수는 없겠지만 맞춤한 예시이긴 하다. 내 식으로 덧붙이자면 예술 옆에 괄호 열고 ‘상징’이라고 쓰겠다. 교훈을 일삼는 오른쪽과 완전한 예술인 왼쪽 사이에서 왼쪽으로 치우치는 자리에 문학이 있다. 이 문학이란 매혹적인 노동 가치를 위해 오늘도 눈썰미를 키우는 중이다. 나만의 푼크툼과 상징체계가 온전히 나를 찔러주기를 바라면서.

 

 

 

 

  3. 감정 동물 사람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단언컨대’ 내가 아는 한 이성적인 사람은 단 한 명도 만나 본 적이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이성을 지녔다는 건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보기보다 허술하고 솔직하며 단순한 동물이다. 이성이란 갑옷으로 아무리 무장을 해도 부지불식간에 감정이란 빨간 내복이 삐져나오기 마련이다.

 

 

  짐승은 본능에 충실하고, 괴물은 본능을 관장한다. 그러면 그 중간인 인간은? 본능을 억제하는 순간적 능력이 뛰어난 동물일 뿐이다. 짐승은 아예 번민이 없고, 괴물은 타자로 하여금 번민을 유발할 때 인간은 그 번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본능 억제 능력이 영구적이 아니라 순간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 판단을 빙자할 뿐 결코 이성적인 동물은 못 된다. ‘감정’에 따라 자신의 이성을 정당화하는 조작적 능력이 뛰어난, 이성적인 체하는 피조물일 뿐이다.

 

 

  그 책임은 하느님도 면키 어렵다. 성경에서 묘사되는 하느님조차도 온전한 이성으로 세상과 인간을 판단하지는 않았다. 당신 기준으로 인간을 비롯한 세상 피조물들의 생사를 관장했다. 이성보다 당신의 감정에 따라 그 잣대를 들이댄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 기준이란 것도 인간의 눈으로 봤을 때 결코 완벽히 ‘이성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당신 닮은 인간을 창조했다고 말한 하느님의 말씀은 솔직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흔히 ‘감정 섞지 말고 이성적으로 판단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적이 될 수는 있지만 그 이성이 항상 실천적 행동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이성적 판단은 결국 감정을 덜 섞는 타협으로 행동화될 뿐 이성 그 자체의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착각한다. 나는 감정적이지 않으며 이성적인 판단을 유지하고 있다고. 어림없는 소리다.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는 결정적인 부분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는 사실만 확인할 뿐이다. 행불행을 관장하는 인간적인 단어, 그 이름 감정!

 

 

 

  

 

 

4. 이해와 소통을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을 쉽게 말하는 것도 능력이다. 인문학 열풍을 타고 여기저기 좋은 강좌들이 넘쳐난다. 더 이상 의식주 해결만이 목적이 아닌 세상을 살고 있다는 이 느꺼운 호사. 신나고 감사할 일이다. 내게 관심 있는 주제거나 입소문이 난 강사의 강의는 아무래도 눈여겨보게 된다. 바지런을 떨어 강연장을 찾을 때도, 메모했다가 텔레비전으로 시청할 때도 있다. 타이밍을 놓친 경우는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보게 된다. 내용에서 명약관화니 그 명성이 명불허전임을 맛볼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쩜 하나 같이 저리도 똑떨어지면서도 유쾌한 강의를 하는지.

 

 

  사실 인문학 강좌라 해서 특별히 어려운 철학적 이해를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학문이나 학술을 위한 강의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대중을 향한 목소리다 보니 그들은 될 수 있으면 쉽게 얘기한다. 왜냐하면 그 인문학이란 게 결국 ‘소통과 이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살이에 소통과 이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학문적으로 접근하지 않아도 실생활에서 나온 예시들만으로도 훨씬 공감도를 높일 수 있다. 사람답게 소통하고 이해하는 데는 인간 자체에 대한 경험적 사유가 필요한 것이지 거창한 이론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학자가 아니더라도 대중 강연에서 성공적 데뷔를 하는 일반인(?)들이 많다. 그 중 유명세를 타는 분 중에 김창옥 강사가 있다. 변변한 스펙조차 없이 ‘언변과 사람에 대한 이해’ 하나로 이 업계에 뛰어든 이다.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그의 미니 특강을 인터넷에서 찾아본다. 어떤 격조 높은 인문학 강좌 못지않게 울림을 준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문학도 결국 소통과 이해와 공감에 관한 것이다. 그것을 깊게 파고들어 학문이란 미로로 이끄는 것은 학자들의 몫이고, 현실과 접목시켜 숨통 트게 하는 역할은 김창옥 같은, 이제는 전문 강사가 된 이들의 몫이 되어도 좋다. 노랫길 보다는 말길이 트여버린 그의 쉽고, 유머 깃든 말들의 향연 앞에서 너무 편안하게 ‘위로’라는 선물을 받아가는 게 어쩐지 미안해지는 하루다.

 

 

 

 

5. 케이크는 어떻게 나눌까?

 

  사람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정의의 개념은 다르다. 부자는 부자의 논리에 따라, 빈자는 빈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것을 주장하게 된다. 그 모순적 상황을 없앤 정의의 원칙으로 존 롤스는 ‘원초적 입장’이라는 가상적인 상황을 설정했다. 이를 ‘무지의 베일(the vail of ignorance)’이라 한다.

 

 

  예를 들면 내가 거지일지 백만장자일지, 장애자일지 건장한 사람일지 등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제대로 된 정의의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 계급장도 떼고, 지갑도 없앤 채 발가벗은 상태라면 사람들은 자신이 처하게 될 최악의 상태를 면하기 위해서라도 공정한 룰을 만들게 되기 때문이다.

 

 

  원초적 입장에서 도출된 합리적 생각은 두 가지 정의의 원칙을 지녀야 한다. 존 롤스는 이를 평등의 원칙과 차등 분배의 원칙으로 나누었다. 모든 사람은 기본적 자유에 대한 동동한 권리를 누린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균등한 기회 속에서라면 사회적 ․ 경제적인 차등 분배는 인정될 수 있다는 게 두 번째 원칙이다. 단, 불평등의 전제조건으로 ‘최소 수혜자에게 이익이 보장될 것’을 강조한다.

 

 

  쉬운 예로 케이크를 어떻게 나누는 게 좋을까? 존 롤스의 답은 이렇다. “칼을 잡고 케이크를 나눈 사람이 가장 마지막에 남은 조각을 가지는 것이 정의다.” 칼자루 쥔 자가 케이크를 많이 가져가는 세상은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다. 가진 자들이 최소 수혜자, 즉 약자를 최우선으로 배려한다는 전제하의 차등 분배를 인정하겠다는 존 롤스의 이론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인간의 선택된 능력이나 조건이 우연의 산물이지 그 자체의 우월성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는 게 존 롤스의 생각이다. 필연이 아닌 시대나 상황이 만들어준 ‘칼자루 쥔 자’는 자신의 케이크를 약자에게 좀 더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다.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 그것이 인간사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이기도 하다. 정의와 분배의 문제 때문에 누군가는 차디찬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찬바람 맞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게 현실이니.

 

 

 

 

6. 소크라테스의 질문

 

  소크라테스는 거리의 철학자였다. 아고라 광장에서, 지중해 바닷가에서, 또는 술집에서 사람들과 격렬한 토론을 할 때 애제자 플라톤은 스승의 말을 문자로 생중계했다. 그것이 플라톤의『대화편』이다. 철학을 골방 깊숙한 사색의 장에서 본격적인 격렬한 토론의 장으로 이끈 장본인이 소크라테스이다.

 

 

  왜 철학이 거리로 나왔을까. 소크라테스의 주장 요지는 이렇다. 참된 지식은 글이나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 들판을 뛰어다니는 토끼를 그림으로 나타내면 그건 더 이상 살아 있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말을 문자로 기록한다면 그것 역시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보았던 것이다. 질문과 대답이 자유롭지 못한 문자를 빌린 철학 방식은 소크라테스에겐 어울리지 않았다. 플라톤이 스승의 말을 대화 형식으로 옮긴 건 스승을 따라 한 셈이다.

 

 

  소크라테스 철학을 흔히 대화법 또는 산파술이라 한다. 산파가 산모로 하여금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도록 돕듯이 소크라테스는 대화상대자가 깨달음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질문하는 형식을 취했다. 말하자면 소크라테스는 답을 내놓는 자가 아니라 오직 질문하는 자였다. 가르치려는 자가 아니라 질문으로써 답을 숨기는 자였다. 논리의 허점을 파고들어 대화 상대자가 제 모순에 빠져 우물쭈물할 때까지 묻고 또 물었다. 당혹감과 혼란에 빠진 상대방은 지친 나머지 소크라테스의 입만 바라본다. 결론을 듣기 위해서다. 하지만 답을 내놓을 리 없다. 찜찜한 미완의 숙제만 떠안은 채 뚜렷한 결론 없이 대화는 마감되고 만다.

 

 

  해결되지 않고 끝난 문제, 이것을 철학 용어로 아포리아(aporia)라고 한단다.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다’는 뜻인데 소크라테스 대화법을 설명하는 좋은 예가 되어준다. 통로 없는 그 지점은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사유의 출발점이 된다. 소크라테스가 그토록 집요하게 질문을 던진 이유도 이런 의도가 아니었을까. 대화의 막장까지 내려가 봐도 속 시원한 출구가 보이는 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 지점이야말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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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1-17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님 오랜만에 들러 정말 멋진 페이퍼에 넋을 빼고 읽었네요.^^

다크아이즈 2014-01-18 09:36   좋아요 0 | URL
뭐, 멋지진 않고 건조한 스똬일이죠 ㅋ
꿈섬님 무척 오랜 만이에요. 잘 살고 계시지요?

oren 2014-01-18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 님께서는 글을 한번씩 올릴 때마다 한 보따리의 책을 풀어놓으시는군요. ㅎㅎ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아포리아'를 통해 새로운 사유를 이끌어낸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군요. 등산에 있어서도 그런 철학을 도입한 사람이 있었어요. '머메리즘'의 창시자이며 1895년에 히말라야의 낭가파르밧(8,125m)에서 영원히 잠든 알버트 프레드릭 머메리가 주인공이지요.

그가 남긴 명언은 "길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등산은 시작된다."였어요.

다크아이즈 2014-01-19 02:07   좋아요 0 | URL
제 단상에서 보다시피 오렌님처럼 깊이 있게 다 다루는 건 아니고, (제 글이 짧은 글이니) 부분적으로 이해하고 끼적이고 있어요. 그래서 오렌님이 대단하게 보이는 거랍니다.^^* 머메리즘 관심 가네요. 일단 검색부터 들어갑니다. ㅋ

oren 2014-01-19 13:53   좋아요 0 | URL
저는 머메리를 '산'에서 처음 만났어요.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요. 제가 등산학교에 입학해서 암벽 등반을 배울 때 '이론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로부터 그 분의 '등산 철학'을 배웠었지요. 그리고 그가 쓴 명저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도 그때 사서 읽었고요.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존 메이나드 케인즈가 쓴 명저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라는 책을 읽을 때, 그 속에 그가 여러 훌륭한 논문을 쓴 '경제학자'로서 다시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그는 수많은 옛시인들의 시를 줄줄 암송하던 사람이었고 여러 철학자들의 책을 두루 섭렵한 인물이었어요. 많은 사람들은 그저 그를 '불세출의 등반가'로만 알고 있지만요.

2014-01-19 0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9 02: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9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1.새해엔 안녕하기를

  ‘안녕’ 패러디 열풍이 식질 않는다. 지난 연말 시작된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제목의 대자보는 내용의 공감 유무를 떠나 답답한 현실을 토로한 그 패기와 용기 자체만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사실 대자보란, 소셜 네트워크가 구축되지 않았던 70,80년대에 그 정점을 찍고 점차 사라져 가던 표현 방식이었다. 컴퓨터의 발달로 각종 세련된 문명 소통의 이기들이 속속 등장하자 대자보 형식은 대화의 장이라는 고유의 빛을 잃어갔다. 그렇게 잊혀 가던 대자보가 어느 날 아날로그적 감성과 진중함으로 무장한 채 대중들의 폭발적 공감대를 불러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대자보의 시발점이 되었던 고려대학교 담벼락은 아예 대자보길이 만들어질 정도란다. (여전히 그런지 궁금하다!!)

 

 

  새해가 된 지금도 수많은 ‘안녕’ 시리즈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단순 대자보로 그치지 않는다. 온라인으로 넘어온 대자보 열풍은 급기야 ‘페이스북’에 안녕하십니까, 라는 코너를 만들게까지 했다. 정책의 불합리, 공권력의 부당성, 노동자의 권익 등 묵직한 주제뿐만 아니라 살림살이의 힘겨움, 취업의 어려움, 연애사의 고달픔 등 개별자의 고민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안녕을 묻는 내용은 다양하기만 하다. 이성과 감성에 적절히 기댄 대자보가 전 국민의 안녕을 걱정하는 마음 어루만지기 프로젝트가 된 셈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지난 한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대체적 정서가 ‘안녕들 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셈이다. 대내외적으로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수십 년 째 이어오는 일본 정치인들의 반성 없는 망언, 속내를 종잡을 수 없는 북한 정권의 위협적인 언사 등 외적인 스트레스 받는 것도 모자라 내적으로는 정부와 국민 간의 매끄럽지 못한 소통 때문에 곳곳에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난무했다. 대자보가 나오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할 정도이다.

 

 

  새해엔 제발 안녕들 하시냐는 자조 섞인 인사말이 더 이상 유행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말로만!) 실현되기 힘든 꿈이 될지라도 명랑 사회가 가까웠으면 하는 바람이 단순한 새해 인사가 아니기를 바라본다.

 

 

 

 

 

2.아직 멀었다

 

  별 다를 바 없는 하루가 이어진다. 어제 뜬 태양이 오늘 그 자리에 다시 솟고, 어제 불던 바람이 오늘 그대로 겨울 나목에 스친다. 마음가짐이야 조금 달라졌겠지만 새해라고 별달리 거창한 계획을 세우진 않았으니 갑자기 일상이 변할 리 없다.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변한 것 없는 새 하루가 지나간다. 그저 누군가 신년 메시지를 희망차게 전할 때 다른 누군가는 절망의 장탄식을 호소하는 것, 삶은 그렇게 이어진다. 점진과 급속이란 완급의 페달을 조절하며 우리 삶은 그렇게 나아간다.

 

 

  가끔씩 잔잔한 파문 같은 뉴스에 생각이 많아지기도 하는 것, 그렇게 하루를 살아간다. 오늘의 단신 기사 하나.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는 이유로 생도를 퇴학시킨 육군사관학교의 처분은 위법하다는 항소심 내용이 눈길을 끈다. 도덕적 한계를 위반했다는 이유 등으로 임관을 앞두고 퇴학 처분을 받은 피고가 일반병으로 입영하라는 통지를 받자 소를 제기했다. 위법 판결이 내려졌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한데 학교 측 반응이 가관이다. 품위유지 의무 위반을 한 피고의 퇴학처분은 정당하다며 상고할 계획이란다.

 

 

  기사만 보자면 학생은 퇴학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니다. 성폭행을 한 것도, 교내에서 풍기문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다. 주말 외박 때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와 성관계를 했다는 사실이 퇴학당할 일인가? 국가인권위원회는 금주·금연·금혼 등 이른바 ‘3금 제도’ 위반자에게 내린 육사의 퇴교 조치를 인권침해로 규정해 개선 요구를 했다. 중요한 건 이것을 학교 측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성인의 내밀한 사생활까지 규제하는 웃지 못 할 사회를 살아가는데,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직은 많다. 질서유지라는 명분하에 개인의 기본 인권까지 억압하고 강제하는 것 이런 상황이 온당한 것일까. 재판부의 말처럼 ‘국가가 내밀한 성생활 영역을 간섭하고 제재하는 건 개인생활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 ‘도덕적 한계’는 양심이나 신념의 문제이지, 통제와 억압이란 규율의 잣대가 관장할 일이 아니다.

 

 

 

 

 

 

3.비인정(非人情)의 풀베개

 

  우리 일상의 큰 축은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달리 말하면 먹고 살기와 타자와의 관계 그 둘에서 벗어날수록 예술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상인은 갈등 속에 그 둘을 업고 지고 가는 사람들이고, 예술가는 그 두 짐을 과감하게 놓아버리려고 시도하는 자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완전하게 일상성에서 벗어나기도 힘들기 때문에 예술이 위대하게 보이는 거다. 따라서 예술과 일상은 멀고도 가까운, 가깝고도 먼 친구가 될 수밖에 없다.

 

 

  일상과 불화하는 예술인의 내면을 시원하게 보여주는 작가군 중의 한 명이 나스메 소세키이다. 예술가 소설에 속하는『풀베개』의 그 유명한 첫 구절을 보자. ‘산길을 오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지(理智)만을 따지면 타인과 충돌한다. 타인에게만 마음을 쓰면 자신의 발목이 잡힌다. (…) 여하튼 인간 세상은 살기 힘들다. 살기 힘든 것이 심해지면 살기 편한 곳으로 옮겨 가고 싶어진다. 어디로 옮겨 가도 살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가 태어나고 그림이 생겨난다.’

 

 

  세파에 영향 받는 인간 갈등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설득시켜주는 작가가 있을까. 먹고 살기 위해 사람 관계를 유지하는 소시민은 이지만을 따질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주변과 삐거덕거리게 된다. 반대로 타인을 너무 신경 쓴 나머지 이타심을 발휘하면 제 기가 다 빠져버린다. 둘 다 힘겹다. 이제 그만 악다구니와 눈치만 있는 돌베개 벤 것 같은 인간사를 벗어나, 시와 그림이 있는 풀베개 베도 좋을 신선의 세계로 도망가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소세키는 인정(人情)에서 떠나 비인정(非人情)의 세계, 즉 자연으로 떠나는 것으로 설명한다. 감옥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 행을 감행한다. 화공이 되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객관화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비인정의 세계에서 ‘나’의 세계관이 완전히 객관화될 수 있을까. 인간이기에 새로운 연민이 생기고, 새로운 갈등이 피어날 수밖에 없다. 다만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그 과정이 예술혼이 된다는 걸 알겠다. 소시민은 일상과 사투하고 예술가는 비인정의 세계를 갈망한다. 그렇게 세상은 돌아간다.

 

 

 

 

 

 

 

 

 

 

 

 

 

 

 

 

 

 

 4. 수많은 밥

 

  내 행동과 말은 내가 한 것이되 내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는 자의 것일 뿐이다. 나는 궁궐을 지었지만 상대는 초가를 보고, 한 번 뱉은 말은 발 없이도 천리를 내달린다. 무지개란 진실은 하나로 뜰 뿐인데(가끔 쌍무지개가 뜨긴 하는구나!) 그걸 전하는 자나 해석하는 자는 각자 다르게 말한다.

 

 

  내 의도와 상대방의 해석은 같을 수가 없다. 내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의도는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꽃을 꽃이라고 말할 땐 별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상황은 그처럼 명명백백하게 나타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은 우리 삶은 수많은 알레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빗대 말하는 그것의 최종 목표도 결국은 진실 그 하나이다. 하나인 진실을 두고 말하는 이나 받아들이는 자 각자 ‘다르게’ 말한다. 그러다 보니 그 둘 사이엔 완벽한 심상의 합일점을 찾기가 어렵다. 말하는 자는 돌려 말하고 이해하려는 자는 의중이 담긴 그 수수께끼를 제 식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되면 소통은 그만 너와 나의 게임이 되고 만다.

 

 

  봉준호 감독의 걸작 ‘살인의 추억’ 마지막 신에서 송강호가 내뱉는 한 마디는 ‘밥은 먹고 다니냐?’이다. 명대사 중의 명대사로 뽑히는 이 말을 두고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한 수로 그 의미를 해석했다. 형사 역할인 송강호가 유력한 용의자 역할이었던 박해일에게 동질감과 연민을 느껴 한 말이란 게 당시 관객의 대체적 정서라고 했다. 지난 가을 영화 개봉 십 주년 행사 때 송강호가 그 대사의 탄생 비하인드 스토리를 내놓았다. 자신의 의도는 터널 속에 있을지도 모를 진짜 범인에게 ‘이런 짓 하고도 밥이 넘어 가느냐’라는 의미로 한 애드리브 였다고 했다.

 

 

  ‘내 의도와는 다르게 해석돼도 받아들이는 관객들이 느끼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라는 덧붙임 말이 눈길을 끈다. 내가 한 언행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을 공감하는 순간이다. 내가 한 말을 어떻게 받아 들이냐는 것은 순전히 상대에게 달렸다. 내 언행의 전부를 상대가 이해하기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고 욕심이다. 나는 말하고 상대는 해석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한 그것이 정답이다. 세상엔 수많은 밥이 있고, 그 밥을 먹는 방식은 입맛마다 다르니.

 

 

 

 

 

5. 찔레엔 가시

 

  찔레덩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일까? 보편적 정서를 가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얗게 핀 찔레꽃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반면에 오줌소태나 불면증으로 밤잠을 설치는 이라면 빨간 찔레 열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또한 천식이나 치통으로 고생하는 어른들이라면 그 효험을 상기하며 일찌감치 찔레뿌리라고 맞받아칠 수도 있겠다.

 

 

  이 모든 가정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것일 뿐이다. 찔레의 입장은 반영되지 않았다. 찔레에게 똑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꽃과 열매 뿌리 모두 중요하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가시’에 대해서는 왜 말하지 않느냐고 항의할지도 모른다. 성가시고 위협적이라서 부러 피했다고 변명하는 것이야말로 찔레의 화를 돋우는 일이다. 찔레 입장에선 가시 그 자체만으로도 존재 이유가 될 터이니. 질곡의 환경에서 제 한 몸 유지 보존케 하는 최소한의 보호막으로 가시는 필요했다.

 

 

  쌍둥이 소녀가 엄마랑 산책을 했다. 향기로운 찔레덩굴 앞에서 큰아이가 말했다. 여긴 이상한 곳이니 다른 곳으로 가자고. 왜 그러냐고 엄마가 물었다. 흰 꽃을 둘러싼 가시가 성가시다고 했다. 당황한 엄마가 대답을 놓치자 동생이 다가와 말했다. 여긴 참 좋은 곳이라고. 엄마가 다시 왜 그러냐고 묻자 동생이 답했다. 가시 사이에 흰 꽃이 피었지 않느냐고.

 

 

  긍정의 자세, 선한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 이런 비유가 진부하거나 조금은 불편하게 보이는 건 왜일까? 뭐든 한쪽 시선으로만 보면 교훈이나 길들이기 식이 되어 버린다. 좋은 소리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칼날은 칼등에 우선한다. 칼날이 위험하다고 칼등으로 스케이트를 탈 순 없다. 마찬가지로 멧돼지 앞의 찔레는 제 가시가 꽃보다 우선한다. 따가운 가시가 성가시다고 찔레꽃으로 멧돼지를 막을 순 없다. 찔레의 속성은 꽃과 가시를 모두 포함한다. 찔레덩굴에서 흰 꽃만 보는 건 제대로 본 게 아니다. 숨은 가시의 의미까지 보듬어야 제대로 보는 거다. 약자에게 가시는 위협용이 아니라 실존적 생존의 방식이다.

 

  왜 정치하는 사람들만 그걸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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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1-10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 님, 잘 지냈나요? 화제 글 보고 들어왔어요.
필력은 여전하시네요.

"‘도덕적 한계’는 양심이나 신념의 문제이지, 통제와 억압이란 규율의 잣대가 관장할 일이 아니다. " -에 동의합니다.

『풀베개』의 그 유명한 구절을 잘 읽었어요. 저는 나스메 소세키의 <도련님>을 읽고
작가에게 반해 버렸죠.

새해엔 자주 뵙기를...

다크아이즈 2014-01-13 11:40   좋아요 0 | URL
페크 언냐의 꾸준한 서재행보를 응원합니다.
저도 새해에는 꾸준하고 싶어요.
도려님도 좋지요. 독서클럽에서 읽은 기억이...
소세키의 매력을 느끼는 동지들이 많다는 건 고무적인 일이에요.
그렇게 쓸 수만 있다면, 그치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1-10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밥은 먹고 다니냐... 정말 촌철살인이었죠. 애드립이었다고 하더라고요.
송강호는 종종 정말 염통이 쫄깃해지는 순간에 엉뚱한 애드립을 해서
효과를 100배 더 올리는 재주가 있습니다.
< 복수는 나의 것 > 에서는 신하균 죽기기 전에 " 내가 너 미워하는 거 아닌 거 알지 ? " 하면서
죽이는데.. 아, 이건 진짜 송강호 아니면 생각할 수 업는 애드립 같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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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새키 읽으면서 정말 깜작 놀랐던 것은 구닥다리 옛날 분이니 구닥다리 소설이겠네, 라고 읽었다가 그 문장의 현대성에 깜작 놀라서 정자세르 하고 다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소세끼,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다크아이즈 2014-01-13 11:47   좋아요 0 | URL
송강호 좋아하는 분들이 많아서 전 놀랐어요.
제가 설경구 다음으로 별로 안 좋아하는 배우가 송강호예요.ㅋ
이유 같은 건 없어요. 답이 된다면 이병헌 같은 배우를 좋아해서랄까. 좋아하는 배우 성향이 다르다는 게 이유가 되는지조차 모르겠네요. 어쨌든 연기자 이병헌의 눈빛을 제가 무척 좋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마치 개그계의 신동엽을 제가 유재석보다 천만 배는 좋아하는 것처럼요. ㅋ 사설이 길었네요.

맞다, 신하균의 저 말도 있네요. 저것도 송강호의 에드리브란 말이지요? 못 말리는 송강호 ㅋ 그나저나 송강호 없는 한국 영화계의 흥행은 생각할 수조차 없는 현실이 되어버렸네요.

소세키는 현대적이다,에 절대공감이요. 소세키처럼만 쓸 수 있다면 지금도 통하지요. 언제나 글쓰기는 힘겹습니다. 즐건 작업이 되어냐 하는데...
곰발님은 새해엔 쭉 이대로만 가신다면 대박 터질 것입니다.^^*


2014-01-10 18: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13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프레이야 2014-01-10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송강호는 애드립을 잘한다고 들었어요. 내가 한 어떤 말이나 행동이 의도와는 달리 해석되고 과녁을 벗어날 때 당황스러워요. 그치만 과녁의 재질이나 각도를 내가 잘 못 이해한 경우일 수도 있겠거니 하지요. 오늘 점심 같이 하며 안녕들하십니까,와 가시에 대한 이야기도 잠시 했는데 또 보네요. 바쁘신 중에도 다양한 단상들을 이렇게라도 정리하며 넘어가는 팜므님.♥♡ 저도 오늘 분발해야겠다는 자극을 받았어요. 열다섯살 연상의 청춘에게서요.

다크아이즈 2014-01-13 11:49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러려니의 생활화... 그게 안 되면 스스로 힘들어지지요.
이건 나이가 들면서 훈련한 결과이지, 원래 성정과는 큰 관계가 없는 것 같아요.
박선생님에 대한 최대의 찬사 - 열다섯살 연상의 청춘, 맞지요? ㅋ
 

 

 

 

  

 

  1. 예쁜 것과 추한 것은 하나

 

  연말이다. 오라는 데도 많고 갈 곳도 많다. 그 모든 자리가 내게 맞춤할 리 없다. 가고 싶은 곳도 있고, 가야만 하는 곳도 있다.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실은 가고 싶은 곳과 가야만 하는 곳의 근본적 차이는 없다. 내 마음 한 끝에 달렸다. 굳이 구별하자면 내 마음이 그 둘의 상태를 분리해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석가의 유명 제자 중에 아난다가 있었다. 아난이라고도 하는데 ‘환희, 기쁨’이라는 뜻을 지녔다. 외모가 빼어나고 설법이 깊은 그를 여자들이 좋아했다. 백정의 딸인 프라크리티도 그 중의 하나였다. 아난이 탁발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천인들의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프라크리티에게 물 한 모금을 청하자, 자신은 천한 신분이기 때문에 물을 줄 수 없다고 했다. 아난은 부처의 가르침은 신분을 구별하지 않는 데 있다고 말했다. 아난의 출중한 외모와 자비심에 반한 그녀는 매일 탁발 나오는 아난을 기다렸다. 영문을 모른 아난이 왜 날마다 자신을 기다리느냐고 프라크리티에게 물었다. 스님 눈이 무척 예뻐서 그렇다고 그녀가 답했다. 아난은 주저 없이 자신의 눈알을 손가락으로 파서 그녀에게 주었다.

 

 

  우리가 선하고 아름답다고 본 것의 실체는 알고 보면 그냥 그 자체일 뿐이다. 아니 시신경과 핏줄이 선명하게 드러난 아난의 파헤쳐진 눈처럼 무섭고 징그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우리가 추하고 더럽다고 멀리하는 똥의 실체 역시 똥 자체일 뿐이다. 어쩜 거름으로 거듭나 푸성귀 맛을 북돋아 주는 역할이 똥의 실체일 수도 있다. 사물과 대상은 불변의 성격으로 그냥 거기에 있을 뿐이다. 거기에 적당한 상표를 붙이는 건 ‘내 마음’이다. 있고 없고, 예쁘고 추하고의 경계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아난다의 눈 이야기가 잘 말해준다.

 

 

  무엇이든 맘먹기에 달렸다. 하나인 실체를 두고 어떤 맘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로 다가오는 게 우리가 보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맘먹기의 장이 ‘환희와 기쁨’으로 거듭나라고 연말연시 모임은 해마다 되풀이 되나 보다.

 

 

 

 

 

 

 

 

 

 

 

 

 

 

 

 

 

 

 

   2. 꽃시 한 권

 

  언제 밥 한 번 먹자. 흔히 내뱉는 말이다. 동방예의지국의 후손답게 상대를 배려한답시고 우리는 그런 말로 제 겸양의 미덕을 발휘한다. 뇌에서 걸러 낼 틈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그 말의 대부분은 흰소리가 되고 만다. 그 속뜻은 ‘너와 밥 먹을 마음은 진심이지만 지금 당장이나 혹은 내일은 곤란해.’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밥 먹을 그 ‘언제’가 언제인지를 재야 사회학자가 ‘언제’ 발표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겠나.

 

 

  밥 한 번 먹자는 그 말에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분명 들어있다. 하지만 자기 마음 편하고자 하는 일종의 보험성 멘트인 것도 사실이다. 듣는 이나 말하는 이나 금세 잊어도 좋을 체면치례용 말로 활용되는 것이다. 어지간히 예민한 사람이 아니라면 상대가 애매하게 내뱉은 그 말에 책임지지 않는다고 불쾌해하거나 맘 상하지도 않는다. 영원히 만나지 못할 그 ‘언제’의 약속일지라도 냉랭한 무관심보다는 한결 낫기 때문이다.

 

 

  ‘언제’ 꽃에 관한 모음시 한 권을 주시겠다는 시인이 있었다. 시인의 그 말을 나는 흘려들었다. 언제 밥 한 번 먹자처럼 상투적 멘트로 이해했던 것이다. 우연히 시인을 만났을 때 한 권 남은 시집이라며 살뜰히 챙겨주시는 모습에 살짝 당황하고 많이 감동했다. 시인으로선 그냥 한 소리가 아니었다. 한정본으로 손수 제작한 맑고 투명한 꽃시집을 오래 쓰다듬는다. 글자 하나, 레이아웃 하나 전문 편집자처럼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다. 왜 꽃에 관한 시를 모으셨을까, 바쁜 가운데 언제 이토록 정갈하게 갈무리하셨을까, 이런 생각이 흐른 뒤 내 머리와 가슴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이름도 없이 피었다’지는 꽃 같은 삶, 얼마나 얕은꾀와 무신경한 말들로 타인에게 내 겸양을 구걸했던가. 타인을 배려한다는 명목으로 실은 내 체면과 안위를 위해 얼마나 많은 보험성 멘트를 날렸던가. 공허한 그 말 대신 실천할 수 있는 말들의 꽃을 피우라고 이렇게 눈시울 적시는『꽃시』는 내게 왔도다!

 

  *꽃시는 개인 편집본이라 시중에 없다.  최근 두 달 새 사들인 시집으로 대신^^*

 

 

 

  

 

 

 

 

  

 

 

 

 

 

 

 

 

 

  3.같은 꽃을 보고서도

 

  그녀는 예뻤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의 미모를 칭송했다. 그 소리를 안 들으면 허전하고 이상할 정도라고 했다. 어느 날 낯선 옷가게에 들렀다. 웬일인지 주인은 그녀더러 예쁘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늘 들어오던 말을 못 듣게 되자 그녀는 당황스러웠다. 그 상황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뭐가 잘못 됐지? 오늘 내 화장이 이상했나? 간만에 쓴 털모자가 안 어울리는 걸까? 혼란스러워진 그녀는 자신이 왜 옷가게에 들어갔는지조차 잊은 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희한하고 한심한 경험이라며 지인이 들려준 이야기다. 이해가 간다. 예쁜 사람들은 자신이 예쁜 줄을 안다. 해서 익숙해진 예쁘단 소리를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못 듣게 되면 자신에게 뭔가 잘못이 있나 싶어 그때부터 뒤죽박죽 엉망인 심사가 된다. 어찌 모든 이로부터 예쁘단 소리를 듣고 살겠는가. 말수가 적거나, 무심하거나, 혹은 미의 기준이 남다른 옷가게 주인을 만나기도 하는 게 우리 삶이다. 입에 발린 말을 못하는, 잘못 없는 그들 앞에 저 혼자 흔들린 심리상태를 보상하라고 할 수는 없다.

 

 

  ‘예쁜 사람, 멋있는 사람’ 등, 인정에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번민한다. 요즘 인기 있는 법륜 스님에게 조언을 구하는 이도 대개 이런 문제들로 고민한다. 인정받지 못해 내면과 갈등하는 소시민에게 스님은 이런 요지로 답한다. ‘내 존재를 제대로 알면 칭찬에 우쭐댈 일도 없고 비난에 신경 쓸 일도 없다. 칭찬이나 비난이 상대의 감정표현일 뿐이라는 걸 알면 내가 그 말에 구애받지 않게 된다. 같은 꽃을 보고서도 어떤 사람은 예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말한다. 말이 없는 꽃 보고도 서로 다른 표현을 하는데 각자 자기 생각과 감정으로 하는 말에 내가 흔들릴 이유가 없다.’

 

 

  이런 명답을 새기다보면 예쁘단 말 듣지 않아도, 넌 왜 그 모양이냐고 눈총 받아도 의연해질 수 있다. 내 심지 곧고 굳은 게 상대 감정보다 우선이다. 칭찬이나 비난에 일희일비하는 것만큼 내면을 갉아먹는 것도 없다.

 

 

 

 

 

 

 

 

 

 

 

 

 

 

 

 

 

 

 

 

 

 4. 삶의 본질은 부조리

 

  세상일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 아닌 것들의 뜻대로 되는 게 더 많다. 내 의지대로 될 수만 있다면 살맛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보다 위험한 발상도 없다. 천하가 제 것인 줄 알고 휘두르던 독재자의 비참한 말로를 우리는 익히 보아왔다. 저 높은 곳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일상사 잘잘한 것에서도 내 뜻보다 상황에 휘둘리는 사안들이 얼마나 많던가.

 

  ‘노나라의 술이 묽으면 한단이 포위된다.’ 장자에 나오는 말이다. 초나라 선왕이 제후들과 회의를 가졌다. 이때 이웃한 노나라와 조나라는 술을 바치는 게 관례였다. 노나라 술은 매우 묽었고, 조나라 술은 무척 진했다. 조나라가 좋은 술을 가져오면서도 자신에게는 선물꾸러미 하나 주지 않자 초나라의 담당 관리는 앙심을 품었다. 노나라의 묽은 술을 조나라의 것이라고 바꿔서 선왕에게 바쳤다. 노여움이 폭발한 선왕은 조나라의 도읍인 한단을 공격했다.

 

 

  노나라로서는 당황스럽고, 조나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조나라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초나라 선왕을 향해 외쳤다. 쑥대밭이 된 조나라 백성의 자존심은 누가 보상해주냐고. 초나라 술 관리는 웅변에 능한 사람이었다. 양심 상 상처 받은 한단 사람들을 물고 넘어질 수는 없었다. 방향을 바꿔 애초에 묽은 술을 제조한 노나라 잘못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구경꾼 놀이가 없어질까 심심하던 초나라 사람들은 술 관리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때 현자가 나타났다. ‘세상일은 노나라나 조나라 뜻대로 되는 게 아니노라. 막강대국 초나라 뜻대로 되는 것도 물론 아니지. 세상일은 되는 대로 되는 것이노라.’  - 이 부분은 내 맘대로 각색했도다!!

 

 

  이 고사를 현대 철학용어로 빗대면 ‘부조리’ 쯤이 될 것이다. 길 가다 보면 돌부리에 채여 넘어질 수도 있고, 날아오는 돌멩이에 맞을 수도 있다. 제 의지와 무관하게 어떤 상황에 의해 ‘들었다 놨다’ 요동질을 당하는 게 우리네 삶이다. 희망의 향연은 내 의지지만 상황의 심술은 신의 장난이다. 신이 즐기는 부조리라는 개그콘서트 덕에 인간은 그나마 겸손해질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5. 버드나무껍질 반지

 

『주석달린 월든』(현대문학, 2011)을 산 건 행운이다. (다 오렌님 덕분이다.) 별다른 해설 없는 숱한『월든』중의 한 권을 읽었을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읽어야한다는 강박이 먼저 작용했던 그때는 그 깊이나 가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자연과 벗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한때 경이로웠던 기록 정도로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해결해야할 숙제처럼 대하느라 그 진가를 미처 몰라봤다.

 

 

소로처럼 외딴 호숫가에 오두막 짓고 자급자족할 맘은 없다. 하지만 단순히 자연을 찬미하고 내면을 살찌우는 기록물이 아니라 텍스트 하나하나가 ‘문학적 성과’로 출렁인다는 점에서 놀랍기만 하다. 촘촘한 일상을 풍부한 관찰력과 서정적인 감각으로 묘사하는데, 그 방식이 구체적이고 섬세해 목이 멘다.

 

 

  ‘집에 돌아오면 방문객이 들렀다 남긴 흔적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한 다발의 꽃이나 상록수로 엮은 화관, 혹은 노란 호두나무 잎이나 나뭇조각에 연필로 써놓은 이름이다. 좀처럼 숲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오는 길에 숲의 작은 조각들을 취해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서 반지를 만들어 내 탁자에 올려놓고 간 사람도 있었다. (189쪽)’

 

 

  청년 소로는 콩코드의 월든 호숫가 오두막에서 2 년여의 자급생활을 하면서 기록물을 남겼다. 숲으로 가, 온전히 제 뜻에 살며 삶의 본질에 충실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소중한 삶, 제 아닌 삶을 살고 싶지 않아 선택한 길이었다. 독자로서는 거창해 뵈는 그 소명의식보다 기록물이 주는 잔잔한 감동 덕에 소로가 위대해 보인다. 물질문명을 거부한 그는 유유자적의 ‘팔자 좋음’이 아니라 육체노동의 신성함을 실천했다. 그런 그가 사람이 찾아온 흔적을 ‘굽은 잔가지’나 ‘짓눌린 잔디’, ‘한 움큼 뽑힌 풀’이나 ‘은은히 남은 시가 담배향’으로 짐작하는 서정적 붓대까지 갖추고 있으니 다시 보일 수밖에.

 

 

  삶과 사색을 실천하는 작가가 문학적 감수성까지 빛나기란 쉽지 않다. 구구절절 마음 끄는 문장을 건질 수만 있다면 그 누군들 오두막 지으러 제 마음의 숲으로 떠나지 않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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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12-22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든도 노장사상이나 불교사상 비슷한 면모가 있는데...팜므 님이 이런 취향이군요.

다크아이즈 2013-12-23 14:45   좋아요 0 | URL
그럴 리가요? ㅋ
어쩌다 보니 비슷한 주제로 흘러갔어요.
노장사상은 아리까리하지만 주시하고 있어요^^*

세실 2013-12-23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난처럼 초연한 삶을 사는 지혜도 필요하겠어요.
나보다 예쁜 사람 많던데~~~~~ 예쁘다는 표현보다는 분위기 있다, 우아하다는 표현에 더 끌립니다. 요즘은^^

다크아이즈 2013-12-23 14:49   좋아요 0 | URL
아난처럼 해버리면 부처되어요.ㅋ
부처보단 사람이 더 사람답잖아요. 말 되네~~
세실님은 상큼, 긍정 마인드를 가진 분위기파!
귀요미 느낌도 강해요. 어딜 가나 사랑 받는 캐릭터지요.^^*

oren 2013-12-23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우 님의 여러 책들을 두루 읽어보니 그가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홀로 살고자 했던 진정한 뜻은 '남들에게 방해받지 않고' 자신만의 사업에 몰두하기 위해서였더군요. 물론 자신만의 사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콩코드 강과 메리맥 강에서 보낸 일주일』과 『월든』이라는 책을 쓰는 일이었지요. 책읽기, 자연과의 교제,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등도 물론 소로우에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업이었고요.

저 역시 팜므 님처럼 『주석달린 월든』을 읽으면서 맨처음 『월든』을 읽었던 때와는 비교하기 어려울만큼 깊은 감동을 느꼈답니다. 팜므 님이 인용해 주신 부분도 정말 인상적이었고요. 저는 「콩밭」과 「난방」을 읽는 동안만 하더라도 제가 시골에서 자라면서 겪었던 무수한 옛 추억들을 고스란히 떠올릴 수 있어서 너무 좋았더랬습니다.

다크아이즈 2013-12-23 14:53   좋아요 0 | URL
그쵸? 단순히 자연이 목적이 아니라 책을 쓰는 일, 그래서 방해 받지 않기 위해서 월든을 선택하고 오두막을 지었다는 사실 맞지요?
자연친화가 주목적이 아니라 목표지향적인 삶을 위해 자연을 선택한 사람이었지요.
어쨌거나 남들 안 한 거 시도하면서 소기의 목적도 달성했으니 이래저래 대단한 사람은 맞아요. 2년 2개월의 월든 생활 뒤에도 계속 자연 생활을 고집했나요?

페크pek0501 2013-12-23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양한 생각들을 건드려 주는 유익한 님의 글을 읽고 가는 월요일 오후입니다. ^^

다크아이즈 2013-12-23 14:56   좋아요 0 | URL
페크 언냐 글이 더 유익하지요.
문체나 방법은 전혀 다르지만 페크언냐량 비슷한 주제를 말할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살이가 비슷해서 그렇겠지요? ㅋ

프레이야 2013-12-24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욱 훑어읽고 공감만 누르고 가요. 헤헤 저 조금 마셨어요. 내일 찬찬히 읽을거에요. 팜므언니 굿나잇^^

다크아이즈 2013-12-25 16:54   좋아요 0 | URL
프레님, 오늘도 와인 한 잔 땡기는 날인데요~ 메리크리스마스니까요.
내리 나흘째(여행 다음날부터ㅠ) 장염에 시달리는 남푠 땜에 심란해요.
글도, 책도 손에 잘 안 잡혀요. 그나마 성경의 역사, 흥미 있게 읽고 있어요.
남은 시간 가열찬 메리크리스마요^^*


순오기 2014-01-06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아요!
이런 글쓰기로 알라딘 이웃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팜님!^^

다크아이즈 2014-01-09 21:38   좋아요 0 | URL
아, 오기 언니, 저 알라딘에 넘 소홀했어요.
새해엔 알라딘에 충성하자, 이 소박한 계획도 있답니다.
이틀 강행군에 몸살 나지 않으셨는지요?^^*

순오기 2014-01-10 18:14   좋아요 0 | URL
즐겁게 놀고 왔는데, 몸살이라뇨?
있던 몸살도 날아갈 판인데요!!^^
 

 

 

 

 

 

 

1.신춘문예 단상

 

  신춘문예의 계절이 돌아왔다. 출판 매체가 다양하지 않고, 신인 등용문이 넓지 않았던 한때 그것은 문학청년의 로망이었다. 요즘은 굳이 신춘문예를 통하지 않아도 작가가 되는 길은 널렸다. 성실한 열정으로 매진하는 사람이라면 출판사가 먼저 알고 작가가 되도록 도와준다. 일제강점기 때처럼 신춘문예라는 등단 제도가 꼭 필요한 시대는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면 쓰는 데 관심이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춘문예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 한 분야에 몇 백 명이 응모하는데 달랑 한 명만 뽑는 신춘문예 제도는 어찌 보면 잔인한 게임과도 같다. 게다가 완전무결하게 공정한 게임도 아니니 부조리한 면도 있다. 최종심에 안착한 작품들이 모두 좋아도 한 편만 뽑아야 되니 심사자의 성향과 주관에 따라 당락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 자연스레 운 있는 자가 당선이란 왕관을 쓰게 된다. 출판 매체들이 내거는 신인상 쪽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신춘문예에 응모하지만 출판사 쪽보다 나은 작가를 발굴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런데도 신춘문예에 사람들이 몰린다. 왜일까?

 

 

  신춘문예 제도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이다. 우선 새해 첫날, 제 이름 자가 박힌 작품이 버젓이 지면에 실릴 수 있는 (정치적 성향을 떠나 그것도 메이저급 신문이라면!) 영광을 얻는다는 거다. 일회성일지라도 쓴 글에 대한 보상 치곤 쏠쏠하다. 두 번째로 문단에서 신예작가로 인정해준다지 않는가. 새해 첫날부터 새로운 작가 탄생을 신문사에서 홍보해주니 그 매혹을 떨치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두둑한 상금이다. 짧은 소설 한 편에 몇 백만 원부터 천만 원에 이르기까지 고액의 고료를 준다. 이보다 달콤한 유혹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이게 함정이다. 잔치는 금세 끝나고, 당선자는 머잖아 잊힐 이름이 되고 만다. 신춘문예 당선 자체는 작가의 길과 별 상관이 없다. 작품이 자기를 말해준다. 꾸준한 작품 생산력 없는 작가에게 신춘문예란 타이틀이 무슨 소용인가. 단발성 등단 절차가 아니라 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우선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십이월이다. 그 진지함의 제일 순서는 ‘부지런히 쓰기’라는 건 두 말할 필요조차 없다.

 

 

 

 

 

 

2.목소리의 진실

 

  흔히 착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내 목소리와 상대가 받아들이는 내 목소리의 느낌이 같은 것일 거라고. 하지만 그 둘은 엄연히 다르다. 공기 중에 퍼지는 내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몸주체가 각각 나와 상대로 다르니 목소리도 달리 들릴 수밖에 없다.

 

 

  비염 목소리를 달고 사는 나는 걸려온 전화를 받을 때 주로 오해를 산다. 부러 목소리 톤을 높이지 않는다면 십중팔구는 ‘어디 아프냐, 감기 걸렸냐, 자다 일어낫냐’고 상대는 조심스레 확인한다. 아프기는커녕 혼자 빈둥거리며 잘 노닐고 있다 받는 전화일 때 주로 상대는 그런 느낌을 받나 보다. 혼자 있다 보면 말에 노출될 기회가 없고 그러다 보니 목소리 톤은 낮아지고 분위기도 가라앉게 된다. 여기다 오래 앓아온 비염으로 코 기능이 망가져 왜곡된 목소리로 상대에게 들리는 것이다. 감기 걸렸냐고 상대방이 되물을 때마다 ‘멀쩡한데 비염 목소리 때문에 그래요.’라고 변명하려니 스스로 한심해질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사람 고유 목소리의 진실은 어디일까, 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있었구나! 김중혁의 에세이『모든 게 노래』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진짜 목소리는 내가 내는 목소리와 상대방이 듣는 목소리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 역시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진짜 나는 어디쯤 있을까. 내가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아니면 상대방이 생각하는 나에 가까울까. 어쩌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39쪽)’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내가 생각한 내 목소리는 상대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않는다. 공기라는 중재 과정과 상대 청각이란 거름망을 거쳐 상대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나와 상대방 모두 진실을 말하고 듣지만 그건 온전한 진실로 전달되지 못한다. 진실한 목소리는 상대에게 전달되기 전, 공기 중을 통과하는 그 찰나에만 존재한다.

 

 

 

 

 

 

 

 

 

 

 

 

 

 

 

 

 

 

  3. 사람이 우선이다

 

  하반기 독서 관련 프로그램이 끝나간다. 독서 방법이니 논술의 개념이니 하며 회원들과 열 올려가며 공부하지만 실은 그런 것이 우리 삶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프로그램 막바지에 이르면 ‘사람에 대한 이해와 희망’만으로도 충만해진다. 어느새 너와 나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그 자리엔 사람의 훈기로 가득하다. 공기 중에 떠도는 그 다사로운 분위기를 아무도 말하는 이는 없지만 서로 감지하게 된다.

 

 

  추위에도 빠지지 않고 아기 손잡고 오는 것도 모자라 따뜻한 차를 준비하는 분, 남들보다 먼저 와 원탁 대형 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분,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챙기며 관심을 가져 주는 분, 유머와 생활의 지혜로 주부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주는 분 등등 다양한 개성만큼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밴 분들을 우리는 만났다.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건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서로를 공감하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이번 프로그램의 세부 목표 중의 하나는 ‘짧은 글로 힐링하기’였다. 각자 추천한 그림동화 한 편씩을 매주 돌아가면서 읽었다. 한정된 시간, 서로의 마음을 보듬기엔 그림동화보다 나은 것도 없었다. 누군가 동화를 낭독하면 여기저기서 공감의 감탄사나 탄식의 한숨이 섞여 나오곤 했다.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를 낭독하면서 부모가 된다는 것, 올바른 자녀관을 갖는다는 것 등에 관한 진지한 성찰이 있었다. 말썽을 부려도 내 아이, 기쁨을 선사해도 내 아이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내가 살아있는 한 너는 늘 나의 귀여운 아기’ 로 자식은 엄마에게 존재하고, 그런 자식에게 한결 같이 자장가를 불러주는 상징적 존재로 엄마 또한 존재한다. 세월이 흘러, 늙은 엄마 앞에서 어른이 된 아들이 불러주는 자장가 앞에 서면 끝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사람이 희망이며 사랑이 곧 삶의 의미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사람 사이에 흐르는 훈훈한 공기를 공유하는 것 그것이 사람 모이는 궁극의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넬슨 만델라

어제는 넬슨 만델라의 추모식이 있었다. 비 내리는 요하네스버그 월드컵경기장엔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자유를 향한 여정으로 일관한 한 생애 앞에 드리는 찬사와 존경의 물결이었다.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캐머런 총리,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과 로하니 이란 대통령 등 내로라하는 각국 정상들도 참석했다. 한 인권지도자의 추모식 앞에서는 니 편 내 편의 경계가 필요치 않았다. 적대와 연대를 아우르는 평화의 기치, 그것은 넬슨 만델라가 추구한 궁극의 목표였다. 인권 전도사였던 그의 죽음 앞에서 겨우 화합과 우의의 그림을 연출할 수 있다니 삶이란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인지.

 

 

  만델라의 삶은 투쟁의 역사였다. 우연히 한 친구가 백인에게 모욕당하는 걸 보고 인종차별의 부당함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에 영향을 받아 변호사가 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격리정책) 반대운동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했다. 인종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수감되기를 몇 차례, 종신형을 선고 받아 삼십 년 가까운 투옥 생활을 했다. 옥중에서 받은 각종 인권상을 계기로 그의 명성은 알려졌고, 어느새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1990년 석방된 그는 인권지도자로 돌아왔다. 시련은 계속되었다. 흑인 극단주의자들에게는 온건하다는 비난을 들었고, 종족 간의 복잡한 갈등에도 진저리를 쳐야했다. 그 상황에서도 백인 정부와 협상의 끈을 놓지 않아야했다. 민주 선거를 관철시켰고 노벨 평화상도 받았다. 1994년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로 흑인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 종결은 물론, 350여 년에 걸친 인종 분규의 핵심적 리더가 되었다.

 

 

  추모식장에서 만델라의 오랜 비서를 지낸 이가 말했단다. “적대적 관계였던 사람들이 서로 손을 붙잡는 모습을 만델라도 보고 싶었을 것”이라고. 그의 전언은 곧 세계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서로 손 잡는 것, 어려워 보이지 않는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만델라를 떠나보내면서 깨친다.

 

 

 

 

 

 

  5. 안과 밖

 

  모든 사람에게 맞는 사람은 없다. 하물며 가족끼리도 서로 맞추기 어렵지 않은가. 오렌님의 서재에서 이런 독서 메모장을 봤다. ‘어떤 사람도 자신의 하인에게는 보통사람이다.’ 옳다구나 싶다. 서양 속담인데 몽테뉴의 수상록이 원 출전이다. 오렌님이 안내하는 책이라면 무조건 믿고 사고파 장바구니에 담았다. (『주석 달린 월든』을 이야기하면서『수상록』을 언급하셨다. 전자도 물론 장바구니 행이다.)

 

 「후회에 대하여」부분에서 몽테뉴는 ‘가족에게 존경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고 일갈했다. 프랑스 어로 말한 몽테뉴의 그 말이 영어 식으로 바뀌어 위의 속담으로 정착한 모양이다. 명쾌한 이 한 마디 말로도 고전은 공감의 온상지요, 서늘함의 확인처라는 걸 알겠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한 패턴을 따른다. 바깥에서는 제 주어진 역할을 무리 없이 감당한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서면 조금 달라진다. 그건 긴장감의 차이일 것이다. 평판이 두려워, 체면이 깎일까봐, 좋은 인상을 얻기 위해 등등, 사람들은 집밖을 나서면 최소한의 페르소나(가면의 인격)를 연기한다. 그래야만 사회가 돌아간다. 하지만 집안에 들어와서까지 그렇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있다면 너무 완벽해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집안에서의 나는 야무지지 못하고 일을 잘 벌인다. 허탕도 잘 치고 허튼짓도 많이 한다. 주책 부리고 실수하는 것은 내 담당이요, 주워 담고 뒤처리하는 것은 언제나 나 아닌 가족이다. 예를 들면 게르마늄 찜기는 당연히 직화 방식으로 불을 쏘이면 안 된다. 엉뚱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하던 어느 날, 먹다 남은 갈비찜이 든 그 도자기 재질 찜기를 가스렌지 불 위에 곧바로 올리고 말았다. 채 삼 분도 지나지 않아 용기는 퍽, 하고 파열음을 냈다. 도자기 파편과 내용물로 범벅이 된 주방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화를 낼 힘마저 놓아버렸다.

 

 

  이럴 때 눈썰미 강한 몽테뉴의 사색을 빌리면 된다. ‘아내와 하인이 보기에도 눈에 띄는 허점 없이 사는 자는 놀라운 인물이다. 집안사람들에게 추앙 받은 인물은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인격의 가면을 집안까지 끌어들여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뜻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 경구인지. 집안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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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2-12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글에서 힘을 얻습니다. 둘째딸이 초등학생일때부터 둘이 말장난으로 재밌게 놀곤 하는데
고2가 된 그 애가 어느 날 그러더군요. "엄마 이제 수준을 높여. 나 다 컸단 말이야."
헐... ㅋㅋ 멍했어요. 이럴 땐 자식 크는 게 싫어요.
이젠 제가 자식 앞에서 '수준'을 검사 맡아야 하는 상태에 도래했어요.

다크아이즈 2013-12-16 20: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딸 아들 앞에서 언제나 점검 받고 검사 맞는 인생인걸요.
믿음을 못 주니 외식 때 화장실 가서 조금만 늦게 자리에 와도 식구들은 안절부절못합니다. 변기에 빠졌을까봐라네요, 나 원 참 ㅠㅠㅠ

oren 2013-12-1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여름에 집안 잔치에 오셨던 '아제' 한 분께 여쭤봤더랬어요. (그분의 둘째딸인) '○○는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요. '갸는 아직도 소설을 열심히 쓰고 있다...'고 하시더군요. 그 여동생은 국문과를 졸업한지 벌써 10년도 더 지난 듯한데 말이지요. '가능성은 좀 있어 보이나요?' 하고 다시 여쭤봤더니, 그 아제가 지갑 속에서 무얼 꺼내시더군요. 느닷없이 불려나온 그 '신문 쪼가리'에는 뜻밖에도 해마다 신정연휴때면 방바닥에 배깔고 읽어보던 익숙한 모습의 '신춘문예 심사후기'가 담겨 있더군요. 그 내용인즉슨 한결같이 '뽑아줘도 충분한...' 또는 '탈락시키기 아까운...' 식의 말투여서 더 기가 막혔고, 그 아제의 '진한 아쉬움'이 심사평 하나하나에 콕콕 박혀있는 듯싶더군요. 당사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다가 결국 '운수'를 탓하는 쪽으로 서둘러 방향을 틀고 말았지요.

다크아이즈 2013-12-16 20:31   좋아요 0 | URL
일치감치? 방향 잘 틀었다고 생각합니다.^^
심사평을 지갑에 넣어 다닐 정도면 최종심에는 이름이 오르락내리락 하셨나 봐요.
그게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거니 그 분도 미련을 못 버렸을 것 같아요.
젊은이들에게 전업작가를 꿈꾸라고 하기엔 우리 현실이 넘 암담해요.
그래도 그 분도 글쓰기 자체는 포기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천형이라잖아요ㅠ

마녀고양이 2013-12-12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자란 친정의 분위기는, 뭐랄까, 가족끼리도 체면을 차려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그것은 할아버지 댁도 마찬가지였지요, 거기서부터 내려왔나봐요. 저는 결혼하고나서 많이 자유로움을 느꼈는데, 그런데 집안 식구들끼리 방귀를 용납하게 된지가 얼마되지 않아요. 실은 남편과 딸은 마음대로 자유로왔는데, 저는 매우 어려웠던거지요. 요즘 우리 식구는 이상한 소리를 내고, 맘대로 퍼지고 이러고 살아요. 페르소나를 벗을 공간이 있다는 것, 이거 행복 같아요.

언니, 거기는 오늘 눈이 오나요?

다크아이즈 2013-12-16 20:36   좋아요 0 | URL
마고님은 정돈된 분^^*
전 아부지한테도 할 말 안 할 말 다하고 자란 분위기라 집안에서는 체면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났던 것 같아요. 그게 또 좋은 게 아니더라구요. 방귀 정도는 당근 신혼 때부터 텄구요.
마고님처럼 스스로 품위를 유지하는 게 어느 정도는 맞는 것 같아요. 저처럼 너무 풀어져도 실수가 잦으니 안 좋아요.

그러면서도 페르소나를 벗을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데는 절대 공감이요. ]
밖에서도 체면 치레하는데 안에서라면 룰루랄라해야지요.
답이 늦어뿌맀어요. 마고님...^^*

노이에자이트 2013-12-1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예인 운동선수 작가의 공통점...신인 때 유망주였는데 그러다 끝나는 사람이 많다는 거죠.신춘문예 당선으로 끝나는 사람들도 많고요.데뷔작이 은퇴작이 되어버리면 참 허망하죠.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이 교사 공무원이 되길 바라나봐요.

다크아이즈 2013-12-16 20:38   좋아요 0 | URL
연예인, 운동선수, 신인작가들 - 비슷한 조건 맞지요?
연예인은 운이 좋아서 살아 남을 수 있지만
운동선수와 신인작가는 부지런히 몸을 놀려야 살아남는다는 차이랄까요?^^*

양철나무꾼 2013-12-12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카.톡과 문자 메시지가 발달해서 덜 하지만,
아니다, 핸드폰과 거기에 뜨는 프로필 사진 때문에 덜한가보다, ㅋ~.
한때는 전화만 받으면 너 말고 어른 바꿔하는 통에 아주 괴로웠었습니다.

아직도 목소리를 트라우마로 달고 살지만,
그래도 가까운 지인들에게 때때로, 인사 차 듣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사실 일거라고
굳게 믿씁니다여, ㅋ~.

다크아이즈 2013-12-16 20:40   좋아요 0 | URL
양철님 목소리 톤이 맑으시구나.
저는 크고 저음 비음 뭐 이런 목소리에요.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 보면 부럽부럽 모드가 됩니다.
목소리도 타고난 게 반이니 꾀꼬리 목소리 주신 부모님께 감사를.
저랑 바꾸실래요, 양철님 목소리? ㅋ

단발머리 2013-12-13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집안에서 존경받는 사람은 별로 없죠. 저도 일 벌이는 거는 완전 전문가인데, 요즘은 딸롱이가 제 몫을 해내서, 저는 치우기 담당이 되었어요.

저를 닮아 덜렁거리는 딸애에게 부드럽게 말해야겠지요.

"언제나 너를 사랑해"를 읽어주는 마음으로요~~

다크아이즈 2013-12-16 20:42   좋아요 0 | URL
단발님 그쵸? 집에서까지 존경 받으면 그건 넘 심한 페르소나 쓴 거 맞지요?
자고로 일을 벌여야 수습하는 가족도 있는 거잖아요.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넘 짠해요. 돌려 읽기 하면서 다들 울컥했어요.
단발님 따님에겐 조금 어려울까요?
무척 쉽고 짧은데 내용이 깊어 이건 어른용 그림동화로 읽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