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지 않은 것에 대하여

 

간밤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못 잔 게 아니라 잠 잘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시간이 빨리 흘러가버렸다. 희붐한 아침이 왔을 때야 뭔가를 쓰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만큼 몰입도는 최상이었다. 평생 불면의 밤과는 친구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 만큼 잠과 친숙한 체질이지만, 더러 몰입의 밤과도 친구할 만큼 한 곳에 집중하면 시간이 어찌 가는지 잊어버리곤 한다. 시쳇말로 나는 ‘그분이 오시면’ 무작정 쓰게 되고, ‘필이 꽂히면’ 빨려들듯 읽게 되는 부류이다. 몸을 위해선 결코 좋은 생활 패턴이 아니다.

 

세상엔 잘 쓰는 작가들과 좋은 책들이 널렸다. 평생 읽고 쓰는 데만 온전히 시간을 바쳐도 그(것)들을 내면화하는 데는 시간이 모자란다. 한데 좋은 사람들 만나 수다 떠는 걸 즐기는데다, 짜인 일들까지 갈무리하면서 읽고 쓰는 나 같은 이는 늘 시간에 쫓길 수밖에 없다. 게을러서 생긴 강박관념은 몸의 피로를 몰고 오고, 그것은 자연히 마음의 불안으로 이어진다. 나름 열심히 하는 건 분명한데 늘 허망한 이 느낌. 실체를 알 수 없는 이 핍진감의 원인은 고백하건대 단 하나다. 뭔가를 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제대로 하지 않는 진실이 그것이다. 충만감에 가닿지 못하는 모든 열정은 몸의 피로와 마음의 불안을 낳는다는 것을 알겠다.

 

“미래를 낙관하는 사람은 현재를 넘어설 수 있고,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은 현재를 더욱 꼼꼼하게 채워간다. 미래란 현재의 동력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미래란 현재에서 이어지는 시간이지만, 반드시 현재의 결과인 것은 아니다. 때로는 현재에서 준비한 것들이 미래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을 수 있다는 걸 안다.”

 

『메이드 인 공장』에서 작가 김중혁이 한 말이다. 현재를 꼼꼼하게 채워가는 것 같은 데도 스스로 충족에 이르지 못하는 심리 상태는 작가의 말처럼 미래에 대한 비관 때문에 생긴 감정이 아닐는지. 현재에서 준비한 것들이 미래에서 소용에 닿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그것 때문에 몸과 마음의 피로가 누적된다는 것. 그 피로를 이기는 훈련이 필요한 시점이다.

 

 

2. 최소한의 양심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는 어렵지만 부자가 오만하지 않기는 쉽다.’ 공자가 한 말이다. 신체 건강한 사람이 살면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일까. 돈 없어 비굴하고 비참하고 불안하고 불편할 때일 것이다. 반면에 경제력을 갖춘 사람들의 오만은 허영심에서 오는 자기 과시욕에 지나지 않으니 힘든 것과는 그리 상관이 없다. ‘허영’은 ‘비참’보다는 덜 심각한 감정이다. 따라서 부자가 오만에서 벗어나는 건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보다 쉽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이 가졌으면서 더 오만하고, 덜 가졌는데도 전혀 원망하지 않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날 때가 있다. 왜 세상엔 이토록 착한 사람들이 많은지. 왜 한 편에선 저토록 양심 없는 사람들이 있는지. 가진 자들이 저들끼리 속이고 속으면 ‘그들만의 판’이려니 하면 그만이다. 한데 가진 자들이 없는 자들의 눈과 마음을 속이고 치졸하게 구는 걸 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작게는 너와 나의 인간관계에서 크게는 경제활동을 아우르는 기업의식에 이르기까지 그 양상도 다양하다.

 

가진 자들이 제 것 귀한 줄 아는 것 백만 배 이상으로 덜 가진 자들의 제 것은 소중하다. 덜 가진 자들은 원래 가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작은 것 하나도 귀할 수밖에 없다. 덜 가진 자들이 순진하고 바보 같아서 가진 자들의 더티 플레이를 방관하는 건 아니다.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거다. 약자이기 때문에.

 

법이 허용하는 안에서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하는 사업주가 있다 치자. 어인 일인지 그는 사회사업과 기부에 관심이 많다. 그런 그가 자신이 헌신하는 종교 단체의 사회사업에 기부금을 냈다 치자. 그는 착한 사람일까, 나쁜 사람일까. 정말로 선한 사람이라면 사업주로서 먼저 자신의 직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쳐주었을 것이다. 저보다 훨씬 못한 이들을 짓밟아 얻은 돈으로 행한 선행은 칭송 받아 마땅한 걸까.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라, 고 어른들이 말했다. 적어도 덜 가진 자들 앞에서 양심 찔리는 행동은 하지 말자. 종일토록 이런 화두에 매달렸다.

 

 

3. 마왕과 신해철

 

 

 

 

 

 

 

 

 

슈베르트 가곡 ‘마왕’을 여러 버전으로 보며 듣는다. 애니메이션이 따르는 몇몇 성악가 버전부터 흑백 화면으로 된 피터 디스카우를 지나, 바리톤 최현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해석을 접한다. 평소 좋아하던 가곡이긴 하지만 새삼 이 짧은 가곡 하나에 온몸과 마음을 빼앗긴다.

 

괴테의 시에 열여덟의 소년이었던 슈베르트가 곡을 붙였다. 셋잇단음표로 휘몰아치는 피아노 전주에 맞춰 노래가 이어지는데 성악가는 내레이터, 아버지, 아이, 마왕 등의 목소리를 차례로 연주한다. 폭풍우 휘몰아치는 밤 아픈 아들을 감싸 안고 집을 향해 말을 달리는 아버지. 꽃과 놀이와 소녀들이 있다며 아이에게 죽음의 세계로 유혹하는 마왕. 두려움에 떨며 마왕의 속삭임을 아버지에게 전하는 아들. 그것은 엷게 퍼진 안개 무리이며, 마른 나뭇잎들의 바스락거림이며, 오래된 버드나무의 음울한 흔들림일 뿐이라며 아이를 안심시키는 아버지. 하지만 안마당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 품에서 아들은 죽어있었다.

 

‘마왕’을 들으며 신해철을 생각했다. 아니 그 때문에 다시 슈베르트의 마왕을 클릭했다는 게 맞는 말이다. ‘마왕’ 별호는 그와 무척 잘 어울린다. 강렬한 울림의 그 이미지는 노래에만 머물지 않았다. 우리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했고, 정당한 이유 없이 개별자를 구속하는 것들에 반기를 들었다. 부패한 정치권이 도덕에 파격적인 유행가 가수들보다 더한 유해매체라고 일갈했으며, 부와 명성이 행복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바랐다. 세상을 바꿀 힘은 없어도 세상의 일부인 자신을 바꿀 힘은 있지 않겠느냐는 멋진 말도 남겼다.

 

음악인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인 아티스트였지만, 논객일 때의 그도 더할 나위 없는 멋진 사나이였다. 좀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음악적 열정과 사회적 패기의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마왕. 그 영역 안으로 유혹할 어린 양들이 이리도 많은데 정작 그 자신이 먼저 먼 길을 떠나버렸다. 안개 무리이며, 바스락거리는 나뭇잎이며, 버드나무의 흔들림인 모든 것들의 진실을 노래하고 품었던 그를 애도하는 아침이다.

 

 

4. 식구 모두의 배려

 

어쩌다 엄마께 전화하면 엄마는 올케언니 칭찬부터 한다. 언니가 얼마나 집안 대소사를 살뜰히 챙기며, 얼마나 자주 안부 전화를 걸어오며, 얼마나 형제들 간에 우애를 다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가를 조곤조곤 들려주신다. 엄마는 좋으시겠어요, 요즘 그런 며느리가 어디 있어요, 라고 맞장구를 치면서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완벽한 며느리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언니의 노고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 날이면 올케언니에게 전화를 건다. 좋은 며느리가 되려하지 말고,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일은 억지로 하지 말라고. 그런 내 충언(?)이 먹힐 리 없다. 사십년을 그렇게 살아온 언니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하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올케언니의 삶은 누가 보상해주나 하는 생각에 이르면 미안하고 혼란스러워진다.

 

엄마로서는 복 받은 노년을 보내는 거지만 그렇다고 올케언니의 정성에 박수만 칠 수도 없다. 가부장적 사고에서 비롯된 여성적 삶의 원칙들이 무조건 옳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 여성의 개성은 권력이나 집단의 하위 개념일 때가 많았다. 더구나 이런 여성상은 여성 스스로 강화하는 면이 없지 않았는데, 그들은 스스로 도리와 헌신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왔다.

 

전통적 권위는 남성 또는 아버지 차지였고, 헌신은 여성 혹은 어머니의 다른 이름이었다. 자연히 효 이데올로기의 최전방 행동대원은 여자들 차지였다. 젊디젊은 스타가‘결혼 상대는 우리 부모에게 잘 할 수 있는 여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잘못하기 때문’이라고 인터뷰를 하는 것을 보면 아직 멀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가부장적 질서를 유지하려는 근성이 여전히 여성에게만 강요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여성을 한 집안의 효(孝) 대리인쯤으로 생각하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참아내지 않을 만큼 여성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긴 했다. 그렇다고 남녀평등이 보편화되었다거나 여성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고 교묘하게 선전하는 집단들에는 여전히 동의할 마음이 없다. 가족 집단에 대한 희생이나 배려는 여성만의 몫이 아니라, 식구 모두의 것이 되어야 온당하다.

 

 

5. 꿈과 현실의 펄럭임

 

우리가 지닌 이미지 속에서 꿈과 현실이 완전히 분리되면 좋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 둘 사이의 이미지 중첩에서 오는 혼란 때문에 당혹해지질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이국의 도시를 둘러 본 뒤 몇 년이 지나, 그곳 풍광에 대한 실제 이미지가 희미해지면 그곳을 가기 전 꿈꿨던 상상 속의 이미지와 실제가 뒤섞여 혼란스러움을 맛보게도 된다.

 

예를 들면 리스본의 구시가 언덕 골목길 바닥에 깔린 오랜 돌들에 대한 이미지가 상상 속의 것인지 실제의 것인지 헛갈리고, 그 한갓진 골목에서 흘러나오던 파두의 목소리 주인공이 크리스티나 마데이라였는지 아말리아 로드리게스였는지 분명치 않게 된다.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을 기억한다면 그곳 노천카페에서 체질에도 맞지 않은 에스프레소를 마셨는지, 아니면 즐비하게 이어진 옷가게에서 이국풍의 티셔츠를 샀는지 아리송해지기 시작한다.

 

좀 더 대중적인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으로 기억을 돌리더라도 달라질 게 없다. 그 언덕길에 대한 이미지가 그곳에 가보기 전 몇 십 년 동안 꿈꿔왔던 내 안의 풍경인지, 실제 보고 난 뒤에 기억된 모습인지 확신하지 못하게 된다. 이런 혼란은 당혹감을 안겨주는 게 사실이지만 굳이 그런 느낌을 거부할 필요는 없다. 꿈이란 현실 속에서도 존재하고, 현실 자체도 꿈의 이미지로 조직화할 수 있다는 희망의 본보기로 삼아도 좋을 터이니.

 

“어느 날, 나이가 들면, 보르도에 실제로 도착하는 것보다 보르도를 꿈꾸는 것이 더 좋거니와, 더 진실하다는 걸 기억할 것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저 문장을 발견했을 때 조금만 자책하기로 했다. 환상과 현실의 뒤죽박죽된 이미지가 혼재해 있지 않는 삶이라면 얼마나 도식적이고 기계적일 것인가. 그곳의 빛깔과 맛과 냄새가 현실 속의 실체였는지, 머릿속 허상이었는지 불분명해지기 시작하면 다시 떠날 시기가 도래했다는 조짐으로 봐도 좋겠다. 상상으로 날갯짓하는 내 안의 펄럭임, 그것이 더 좋거나 진실할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 사람들은 지금도 떠나고 앞으로도 기꺼이 떠날 것이기에.

 

 

6. 검은 다이아몬드 문체

 

 

 

 

 

 

 

 

 

 

 

 

 

“나는 내 작품의 인물들이 체험하는 일을 모두 내 자신의 일로 느낀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슬픔에 빠지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나는 작중 인물들의 내부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는다. 그들이 말할 때도 나는 일체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다. 단지 외부로부터의 시선을 계속 유지할 뿐이다.”

 

헝가리 출신 작가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저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소설을 쓸 때 결코 인물 내부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은 옳다. 반면에 등장인물과 함께 슬픔에 빠지고 두려움에 떤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말처럼 보인다. 철저하게 외부적 시선을 유지하는 사람은 슬픔에 빠지거나 두려움에 떨게 될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감정적 시선에서 떨어져 있으려면 얼마나 많은 슬픔이나 두려움을 다스리고 잠재워야 할 것인가.

 

하지만 그녀의 대표작『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고 나면 첫머리에 인용한 저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의 문장은 지독히 건조하고 담담하다. 묘한 것은 지독히 건조하고 담담한 그 문장들이 독자에게 건너가면 바늘 끝 같고, 손톱 같은 ‘콕콕 찌름’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벌목장에서 베이는 나무처럼 무뚝뚝한 문장들이 툭툭 넘어졌을 뿐인데, 그것을 목도한 독자는 손댈 수 없을 만큼 아린 통증을 품어야 한다.

 

건조한 문투 덕분에 오히려 심장이 찢어질 것 같은 매혹을 앓게 하는 그녀. 너무 아프면 아프다고 말 못하고, 너무 사랑하면 사랑한다고 말 잇지 못하는 원리와 같다고나 할까. 과장이나 과잉 없는 서술로 사건 많은 쌍둥이의 일생을 전하는 아고타 크리스토프. 감정선을 드러내는 그 어떤 묘사 없이, 짧고 단호한 직설로 뱉어내는 발화법. 그 속에서 처절한 절망의 노래를 느끼게 되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느 비평가가 그녀의 문체를 ‘검은 다이아몬드’에 비유했다는 말이 어쩜 이리 와닿는지. 처절하고 냉엄하고 허위적인 삶의 조각들을 불러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는 그녀의 방식에 뒤늦은 찬미가를 보탠다.

 

 

7. 욕망이라는 양철지붕

 

예술의 효용은 진실 탐구에 있다. 보편적 정서라는 잣대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고, 추한 것을 추하게 보는 것은 너무 당연한 시각이라 굳이 예술의 범주에 넣지 않아도 된다. 현상의 그 모든 이면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과정 그것이 예술 행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한 예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들은 인간 욕망의 밑바닥까지를 들춰낸다.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인간 군상, 몸서리치는 자책으로 탈출을 꿈꾸거나, 환상과 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개인의 초상 등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작가의 경험과도 무관치 않은 이런 설정은 우리 일상과도 겹쳐 있기에 정당한 설득력을 얻는다.

 

누구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로 살아간다. 같은 제목의 윌리엄스 희곡은 제어할 수 없는 인간 욕망을 고양이에 비유했다. 뜨거운 양철 지붕 위에 올라가기를 좋아하는 고양이는 없다. 하지만 삶이란 무대는 만만치 않다. 욕망하는 무엇을 탐색하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의 판쯤은 견뎌내야 한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폴리트 할아버지의 생일 즈음, 모인 식구들은 평안과는 먼 분위기에 휩싸인다. 평생 남편에게 냉대 받으면서도 그를 사랑한 부인, 지나치리만큼 냉혹하고 현실적인 큰 아들 부부, 그들은 동생에게 거대한 아버지의 재산이 상속될까봐 전전긍긍한다. 둘째아들은 이런 상황과는 무관하게 개인적 고민으로 갈등한다. 동성애적 관심을 호소하던 절친한 친구의 죽음이 자신의 외면 때문이라는 자책에 시달리며 점점 비현실적 인물이 되어 간다. 그런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는 사랑의 결핍에 괴로워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처한 현실을 외면할 수 없어 시아버지의 재산에 집착하게 된다.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처럼 스스로의 운명에 발을 동동 구른다.

 

삶 자체가 달궈진 양철지붕이다. 억눌리면 억눌리는 대로, 냉혹하면 냉혹한 대로, 절실하면 절실한 대로 우리는 그 판 위에서 저마다의 발바닥을 단련시킨다. 뜨거운 지붕 위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발바닥의 동동거림만 더해질 뿐, 좀체 벗어나기 힘든.

 

** 가끔은 술을 마실 줄 알았으면 좋겠다, 고 생각한다.

    지금이 딱 그런 심정이다. 소주라도 마시면 밤은 안 새도 될 것 같은데

    계속해서 김광석만 듣는다.  소주 안주인 김광석은 있는데 소주를 못하니 무슨 재민겨ㅠ  

    그래, 그냥 밤을 새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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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11-17 0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자가 오만에서 벗어나는 건 가난한 자가 원망을 품지 않기보다 쉽다고 할 수 있다.

맞습니다. 부자 자식이 착해지는 건 쉬워요.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좋은 교육을 받으니깐 말이죠.
하지만 가난한 자식이 착해지는 건 쉽지 않습니다. 안 좋은 것을 많이 보면서 자라니까요.
착하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선하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선하다는 윤리적 기준에 의한 것이고 착하다는 윤리적 기준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동네 바보가 착할수는 있지만 선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하다는 윤리적 판단의 의거 저항할 수 있는힘이그든요... 선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11-22 11:28   좋아요 0 | URL
곰발님 착한 것과 선한 것 관련 페이퍼 읽고 넘 공감 돼서 저도 하나 건졌잖아요. 언어는 계급을 규정한다, 랄까요. 제 새 페이퍼 4번이 님의 글에 대해서 공감 버튼을 누른 거라 생각하심 되어요. 글로써 완벽한 님은 알라딘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자주 오소서.^^*

이진 2014-11-17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에 꽂혀서 밤을 샐 수 있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책을 읽다 글이 읽히지 않아 고개를 들어보았더니 밤이 되어 있었다는, 그런 경험이나 집중력이 제겐 없어요. 신체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건강이 따라주지 않는데다 사십 분 정도 집중하고 나면 슬슬 정신이 흐트러져버리죠. 그래서 저는 팜님의 그 몰입이 부러워요.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

저는 유자왕의 마왕을 보면 입을 다물 수가 없어요.
슈베르트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마왕을 그중에서 세 번째 정도로 좋아하죠.

다크아이즈 2014-11-22 11:30   좋아요 0 | URL
이진님, 이진님
클래식과 문학을 두루두루 섭렵하는 멋진 사나이.
서울 올라가도 알라딘은 죽 계속한다, 맞지요?
아직 한강 작가를 독파 못 하고 있는데 이진님 덕에 한강을 파야겠어요 ㅋ

라로 2014-11-21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니!!!!!!!!!!!! 자주 올려주세요~~~~~~~.

다크아이즈 2014-11-22 11:31   좋아요 0 | URL
알잖아요, 지가 월매나 게실러 빠졌는지를
근데 좀 바지런해지기는 해야겠어요. 그래도 글 쓸 때가 젤로다 살아있는 느낌이거든요.

시험 잘 치고, 여행도 잘 다녀오세요~~
 

 

 

 

 

 

 

 

 

 

 

 

 

 

 

 

 

 

 

 

 

 

 

 

 

 

 

1. 혁신이라는 말

 

“보수는 혁신합니다.” 여당 회의실 배경 현수막에 적힌 글귀가 뉴스 화면에 잡힌다. 곱씹자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 문학 용어의 ‘낯설게 하기’ 기법을 보여주자는 것일까. 말뜻만 살펴도 보수는 혁신의 대상은 될지언정 혁신의 주체는 될 수 없다. 즉, 보수를 혁신할 수는 있어도 보수가 혁신을 할 수는 없다.

 

 

보수의 사전적 풀이는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이고, 혁신은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이다. 한 마디로 전자는 지키려 하는 것이고, 후자는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가급적 지키려는’ 성질의 것이 어떻게 ‘완전히 바꾸려는’ 것을 실현할 수 있단 말인가. 어불성설이다.

 

 

혁신(革新)은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동물의 껍질을 벗겨 무두질하여 쓸모 있는 가죽이 되게 새롭게 만드는 일이 혁신이다. 피부를 벗겨낸 상태인 피(皮)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완전히 다른 제품인 혁(革)이 되려면 거기에다 여러 까다롭고 힘든 공정을 보태야 한다. 단순한 물리적 상황에서 완전히 새로운 인위적 제품이 되려면 피와 살이 찢어지는 고통을 지나, 가죽이 문드러지고 펴지기를 수십 차례 해야 한다. 극한의 고통 뒤에야 ‘혁신’이 오는 것이다. 따라서 지키려는 보수는 새로워지려는 혁신과 궁합이 맞으려야 맞을 수가 없다. 보수의 태생적 운명이 혁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혁신의 옷걸이에다 일말의 ‘개선’이라는 옷이라도 걸어보려는 시도, 혹 그것을 두고 ‘혁신’이라고 착각하는 것일까. ‘나쁜 것을 고쳐서 좋아지는’ 개선과 혁신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보수의 말뜻에는 미묘하나마 변화를 수용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으니 개선이라는 말과는 얼추 짝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완전무결한 변화를 뜻하는 혁신은 보수라는 말과는 상충될 수밖에 없다. 날마다 ‘혁신’을 부르짖는 그들 앞에서 국민은 ‘개선’의 기미조차 느끼지 못한다. 정치계의 말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심각한 인플레 놀이 중이시다!

 

 

 

 

 

 

 

 

 

 

 

 

 

 

 

 

 

 

 2. 연민도 지나치면

 

정직하기는 쉬워도 편견을 버리기는 어렵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대상에 대해 축적된 지식이나 충분한 경험을 쌓기 전에,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섣불리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교육자 집안 출신이라니 믿을 만한 인품을 지녔을 거야, 동남아 노동자니 가난하고 지저분할 거야, 시각장애인이니 무조건 도와야 해.’ 이런 일상의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잘못된 예측을 했지만 새로운 사실이나 증거에 기초하여 잘못을 수정할 수 있는 경우에는 그것을 편견이라고 보지 않아도 좋단다. 편견을 지닐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관용하는 것 같아 맘이 한결 편해진다. 단순한 편견을 넘어 ‘골통’ 이 되는 경우도 있다. 뒷받침이 되는 근거나 정보 앞에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제 고집을 피우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은 가치 기준점이 오직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상황이나 대상을 바로 보려 하지 않는다. 모든 걸 제 기준에서만 실제보다 높이 평가하거나 낮게 평가한다. 편견이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편견이 무서운 건 여차하면 그것이 ‘집단의 결속’으로 이어진다는 거다. 귀속 본능이 있는 인간은 제 안정을 꾀하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대립 구도를 만든다. 잘 알지 못하고 친근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불완전한 감정은 집단적 편견으로 확대되고, 무죄한 대상들은 방패 없이 그 편견의 칼바람을 맞을 수밖에 없다.

 

 

시각장애인 문예 교실 종강을 했다. 개인적인 보람은 조금이나마 가졌던 그들에 대한 내 편견을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점이다. 그들에 대한 내 무지는 ‘무조건 보호하고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혹여나 상처 받을까 조심스레 접근했고, 그러다 보니 의도한 만큼 진솔한 시간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이 인다. 그들 말처럼 그들도 혼자 밥 떠먹을 수 있고, 지팡이에 의지해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연민도 지나치면 자만이고, 배려도 앞서면 편견이 된다. 이런 생각들이 집단적 편견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이 사실을 깨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다.

 

 

 

 

 

 

 

 

 

 

 

 

 

 

 

 

 

 

3. 예술혼 끝에는

 

‘천국의 문’이 서울에 왔다. 피렌체를 대표하는 이 걸작은 초기 르네상스 시대에 제작된 청동 문짝 부조물이다. 로렌초 기베르티의 작품인데 7미터 높이에 6톤 무게가 나간단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기념해 경복궁내 고궁박물관에서 다른 작품들과 전시되고 있다. 피렌체에 가면 이 ‘천국의 문’과 ‘두오모 쿠폴라’(대성당 돔)만은 꼭 봐야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는 작품이다. 피렌체의 산 조반니 광장에는 세 개의 중요 건물이 있다. 대성당, 세례당, 종탑이 그것이다. 그 중 세례당을 장식하는 세 문 중의 하나가 천국의 문이며, 대성당 두오모의 돔 지붕 형식이 쿠폴라이다. 구약성서의 주요 내용이 각 10장의 판에 새겨진 ‘천국의 문’은 동시대의 예술가인 미켈란젤로가 인정할 정도였다. ‘너무 아름다워 천국 입구에 그저 서있고 싶다.’ 라고 그가 말한 것을 계기로 ‘천국의 문’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문으로 만들 부조상을 현상공모했을 때 기베르티 외에 응모한 주요 인물은 금 세공사였던 필리포 브루넬레스코였다. 두 시작품은 지금도 전해져 관광객들은 비교해 볼 수 있다. 브루넬레스코의 것은 조각의 느낌이 강하고 혁신적인데 비해, 기베르티 것은 회화적이고 보수적인 느낌이 난다. 공모전의 최종 승자는 기베르티였는데, 실력이 나아서라기보다 기법 상 좀 더 가벼워 경제적인 측면도 고려되었다고 한다. 기베르티는 천국의 문과 다른 한 쪽문을 완성하는데 거의 한 평생을 쏟아 부었다. 브루넬레스코도 패배자로 남아있지는 않았다. 공동제작을 권유한 관계자의 청을 마다하고 건축 공부를 했다. 고대 로마 유적 및 구조물 연구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완성한 작품이 바로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이다.

 

 

진정한 예술가에게 승자니 패자니 하는 말은 무의미하다. 숭고한 예술혼 끝에는 완성된 작품과 무한한 감동이 있을 뿐이다. 두오모의 돔을 보러 당장 이탈리아까지는 갈 수 없고, 천국의 문 숨결이라도 느끼게 고궁박물관을 찾아가는 일만 남았다. 이 천상의 아름다움 전은 11월 중순까지 계속된다.

 

 

 

 

 

 

4. 이상적인 접근법

 

“인간에게는 크게 세 가지 접근법이 있다. 첫 번째는 자기 자신의 입장과 이익을 앞세우는 것이고, 두 번째는 늘 남을 자기보다 앞세우는 것이다. 세 번째는 자신을 처음에 두고 남들 또한 고려하는 것인데,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행동치료 전문가 조셉 월피의 말이다.

 

 

늘 남을 자기보다 앞세우는 이들 곁에는 사람들이 몰린다. 그런 현상은 인간 속성과 관련이 있다. 사람은 대접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대접받기를 더 좋아한다. 누군가를 인정하기도 좋아하지만 누군가로부터 인정받는 것을 더 좋아한다. 상대를 알아봐주려 하는데 상대가 먼저 나를 알아봐주니 싫어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도 약점이 있다. 바로 상처 받기 쉽다는 것. 베푼 만큼 상처 받기 쉬운 그들의 약점은 못된 타자들이 새긴 불 자국이다. 자신을 돌볼 틈조차 타자에게 기꺼이 할애한 그 맘을 염치 있는 상대라면 알아봐주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모색한다. 하지만 사람은 천차만별이다. 마음 결 고운 그런 사람들에 대한 겸허한 수용 없이 그들을 이용하고 제 악행의 희생양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소위 뒤통수를 치는 것이다. 이 뒤통수에 당해본 ‘남을 우선하는 사람들’ 몇몇은 화병이 생기고 심하면 우울증까지 앓게 된다. 주고도 잃게 된, 자기모멸을 경험한 이런 사람들이 전문 상담가를 찾는다. 그 데이터를 분석한 조셉 월피 같은 이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게 된다. 남을 생각하는 것도 나를 아프게 하는 선이라면 곤란하다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처음에 두고 남을 고려하라고. 그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그런데 나를 우선하고 잉여의 에너지로 타자를 고려하라는 전문가의 충고가 ‘이상적인 접근법’이긴 하지만 배려가 습관화된 사람들에게는 그것조차 어울리는 옷이 아니라는 것을 알겠다. 전문가의 그런 충고를 거부하는 착한 심성이 그들에게는 본능적으로 꿈틀댄다는 것. 그들을 보면서 내가 내린 결론은 배려 때문에 얻은 상처마저도 그들은 배려한다는 것. 그리하여 누가 뭐래도 자신보다 타자를 우선한다는 사실!

 

 

 

 

 

 

 

 

 

 

 

 

 

 

 

 

 

 

 

 

5. 청양고추

늦은 여름휴가를 간다. 안면도를 가는 중인데 경유 도시 중에 청양이 나온다. 유독 붉은 고추 홍보물이 여행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마침 청양고추 및 구기자 축제 기간이라 그 열기가 피부로 와닿는다. 청양도 영양이나 청송만큼 고추 특산지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모양이다.

 

 

‘청양고추’ 없는 우리식 밥상을 상상하면 싱겁기 그지없다. 흔히 ‘땡초’로 불리는 청양고추가 시중에 나온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 유래 논쟁이 자못 흥미롭다. 1980년대 초반 모 종묘업체가 개발한 고추 품종 이름이 ‘청양’이다. 품종개발자인 유일웅 박사의 공식 인터뷰에 의하면 청양고추 품종은 제주산과 태국산 고추를 잡종 교배하여 개발했다. ‘청송군과 영양군 일대에서 임상재배에 성공했는데, 현지 농가의 요청에 따라 청송의 청(靑), 영양의 양(陽)자를 따서 청양고추로 명명하고 품종 등록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름에 걸맞게 청양군도 청양고추의 연고권을 주장한다. 1970년대 모 종묘업체가 청양농업기술센터에서 매운 고추 씨앗 여러 종을 받아갔다고 한다. 개발 과정에서 여러 품종이 섞였다 해도 매운 고추의 뿌리는 청양 지역이 틀림없다는 논리다. 청양군 유래설은 설득력이 다소 약하긴 하지만 지방자치 시대를 살아가는 나름의 현명한 대처법으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청양고추는 브랜드 명이지 산지 이름이 아니다. 따라서 소비자로서는 원조 논쟁 자체가 별 의미가 없다. 고추가 그 세 지역에서만 나는 것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최대 청양고추 재배지는 밀양이란다. 선의의 경쟁이 좋은 품질을 낳는 것이지 원조라는 후광이 품질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 셈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손으로 개발한 그 품종은 IMF 사태이후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게 되었다는 사실. 경영난으로 대부분의 종묘 회사들이 다국적 회사에 흡수되었다. 막대한 로열티를 지불하고 청양고추를 먹고 있는 것이다. 청양고추의 빼놓을 수 없는 진실은 몹시 매운 맛을 지녔다는 것과 매운 값만큼의 톡톡한 로열티를 지불한다는 것.

 

 

 

 

<전주 PNB 풍년제과 수제 초코파이>

 

<군산 이성당 팥빵과 야채빵을 기다리는 사람들, 당근 우리 부부도 기다렸다!>

 

*늦휴가지는 군산과 전주였다. 빵집 두 군데 순례. 군산의 이성당은 예상대로 줄이 나래비로.

한 시간을 기다려 이름 세 타는 팥빵과 야채빵을 샀다. 인당 각 10개 5개씩 살 수 있다. 팥빵은 속이 꽉 찼다는 장점으로 승부하는 것 같고, 야채빵은 울 아저씨는 맛 나다는 데 미감 바닥인 나는 잘 모르겠다.

  전주의 PNB풍년제과는 수제  초코파이로 유명하다. 본점에 들러 열 개를 샀다. 단 것 좋아하는 내 입맛에 딱이다. 수제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엄청 복잡했지만 이성당처럼 사람 줄 서게 하는 수고는 끼치게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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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4-09-03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셉 월피의 이야기가 눈에 띄네요.
저도 그런 그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너무 착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 위주로 사는 사람들이 고생하는걸 많이 보게 되요.

줄 서는건 싫어하지만 팥빵, 야채빵은 먹고 싶군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4-09-03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성당과 풍년제과 반갑군요. 전 전주와 군산에서 각각 1년 씩 있었지만 막상 먹어보지는 않았네요. 단 음식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하지만 이성당은 정말 몇 번 사볼까 하고 갔다가 줄 서 있는 거 보고 식겁해서 지나치고는 했던 곳입니다.

라로 2014-09-04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각장애인들도 가르치셨어요!!!! 하여튼 대단대단!!!
청양고추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요~~~. 언니 최고!!^^
기베르티보다 브루넬레스코의 짧은 이야기(물론 길었을 인생이지만)가 더 감동적인 걸요!!! 저는 아무래도 브루넬레스코 타입~~~.ㅋ

저는 초코파이는 별로,,,야채빵에 10표요!!ㅎㅎㅎㅎ
대전 성심당에서 줄서서 튀김 고로케와 부추빵!!!!!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부추빵이 젤로 먹고 싶네요,,,!!성심당 부추빵에 100표. 튀김 고로케는 반 먹으면 벌써 질리지만 부추빵은~~~~~~.저 혼자 10개 먹을 수 있어요!!!ㅎㅎㅎㅎㅎㅎ
오늘 아침 직장 근처에 있다는 J.J Bakery라는 이름난 빵집을 어렵게 찾아가서
빵을 잔뜩 사가지고 왔어요.
홋가이도 쉬폰이라는 것도 샀는데 어찌나 부드럽던지;;;;
흐미,,,오늘 아침은 어째 빵 야그만~~~~~.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페크pek0501 2014-09-04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직하기는 쉬워도 편견을 버리기는 어렵다" - 이 말을 새겨 둬야 겠어요.
교단에 서는 선생님들이 학생들에 대해 어떤 편견을 가지고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어요. 그 편견으로 인해 조금 말썽 부린 학생들이 완전히 문제아가 되는 경우가 있어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상처를 주기보다 보듬어 줘야 하는 건데 말이죠. 더 코너로 몰아 부치는 경우가 있으니... 옳지 않은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세상이라는 게 슬픈 일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9-05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3자들이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자세를 취해도 되지만 지자체끼리의 원조논쟁은 해당 지역 이해관계자들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죠.청양고추 논쟁도 그렇습니다.일반인들은 청양고추하면 청양을 떠올리지 청송과 영양의 머리글자를 따서 청양고추가 되었다는 것을 모르죠.사실 보통 사람들은 타지역 지명에 대해 그리 신경을 안 쓰잖아요.게다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는 청양이 더 가까와서 놀러가기도 좋죠.칠갑산이 노래 덕분에 많이 알려지기도 했고.

아마 청송은 주왕산 국립공원 덕에 아는 사람이 있어도 영양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걸요.영양이 영남유림 전통이 강한 곳이지만 그런 전통하면 아무래도 인접해 있는 안동의 지명도에 밀리죠.영양 사람들에겐 자기 고장 지명도가 낮은 게 답답한 현실이겠지만...

다크아이즈 2014-11-23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단 님들,
지가 알라딘에서만 조울증이 있어서 바람처럼 왔다리 갔다리 합니다.ㅋ
알라딘 들른지 넘 오래 되어서 일일이 댓글 못 달아 드려요.
대신 윗 분들 서재 돌면서 이쁜 댓글을 달겠습니다.
지금 차례대로 달려가겠습니다.^^*
 

 

 

 

 

 

1. 스스로부터 보듬기

 

엘리베이터에서 이웃 아가씨를 만났다. 이십대 여성 특유의 새치름함과 쑥스러움이 없어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엘리베이터 안 그 짧은 시간 동안 말동무가 될 정도로 털털하고 밝은 아가씨였다. 오늘도 문이 열리자마자 예의 환하고 씩씩한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데이트 하러 가나 봐요.’라고 화답을 했더니 그녀의 반응이 이랬다. “아니에요. 이 몸에, 이 얼굴에 누가 데이트 신청이나 하겠어요? 살 빼고 더 예뻐진 다음에 생각해 볼 거예요.”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녀 스스로를 비하하는 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충분히 예뻤으며, 더 이상 뺄 살 같은 건 없었다. 참 밝고 유쾌한 아가씨다, 라고는 느꼈어도, 한 번도 그녀가 못생겼다거나 뚱뚱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충격을 먹은 것은 그 아가씨의 마음이 곧 내 마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타자의 생각은 나와 같지 않다. 특히 자신만이 생각하는 약점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타자는 나와 생각이 같을 리 없다. 타자는 내가 집착하는 나의 약점 같은 데 관심이 없다. 내 약점은 내 필터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지 타자에게 건너가면 시쳇말로 ‘의미 없다’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타자는 나만큼 알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누군가의 비난 서린 한 마디가 평소 자신이 생각한 약점에 관한 것이라면 그것이 트라우마가 되어, 모든 타인이 나를 ‘못생겼다’고 생각하거나 ‘뚱뚱하다’고 판단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게 된다. 십 퍼센트의 타자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약점을 인정한다고 해서 모든 타자도 그럴 것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오해이다. 타자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약점에 대해 눈치조차 채지 못한다.

그러니 부디 스스로부터 긍정하도록. 나를 내가 받아들이지 못할수록 타자의 시선도 곡해하게 된다. 호의적인 주변의 시선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마음껏 스스로를 옭아매고 불인정하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고, 스스로 버리는 사람부터 버린다.

 

 

 

 

 

2. 프로파간다

 

‘프로파간다’라는 말이 어제오늘 검색어 상위에 오르내린다. 모 연극배우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 관련으로 단식 투쟁 중인 유족 김영오씨에 대한 악담을 퍼부었다. “그냥 단식하다 죽어라. 그게 네가 딸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고, 전혀 ‘정치적 프로파간다’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말을 자신의 SNS에 남겼다. 배려 없고 무례하기 그지없는 이 충격적 발언의 조회 수 만큼 사람들은 일제히 ‘프로파간다’라는 뜻을 검색을 한 모양이다.

 

 

프로파간다는 원래 ‘선전, 홍보’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특정한 원칙이나 행위를 전파하기 위해 세우는 체계화된 계획이나 그 운동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선동’이라는 부정의 뉘앙스가 남아있는 말이 되어버렸다. 선전이라는 중립의 의미가, 새빨간 거짓말인 선동의 의미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차 세계대전 때였다. 연합국이 영미 대중들을 향해 이 말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이후 본뜻은 사라지고 사악한 의미만 남았다.

 

 

선전은 막강하고 대중은 어리석다. 아무리 현명한 민중도 보이지 않는 정부나 거대 손이 움직이는 선전 전략을 앞서기는 어렵다. 대중을 위한 선전에 잠식당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일수록 드러나지 않은 선전 기획팀에 휘둘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정치적 코드를 적절하게 활용하는 전문 선동가들 앞에서 우리는 내남없이 우중(愚衆)이 되기 쉽다. 전형적인 선동적 프로파간다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파간다의 원래 뜻만 되살릴 수 있다면 그것의 효용도 나쁘지는 않다. ‘선동’이라는 부정적 의미를 걷어낸 자리에 정치, 경제, 예술 등 다양한 분야를 불러와 다채롭고 창의적인 화법을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선전이나 홍보라는 말 자체가 어느 특정 집단, 특히 덜 가진 자보다는 더 가진 자, 약한 자보다는 강한 자의 논리와 맞물린다. “거짓도 천 번 말하면 진실이 된다”고 했던 괴벨스의 말도 결국 힘이 전제되었을 때나 통용된다.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몰리는 약자에게는 선동의 입김을 느끼기 전에 연민의 입술이 먼저 나가는 건 어쩔 수 없다.

 

 

 

 

 

3. 경원하면서 사랑하기의 고통

 

작가 곁에 가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항상 많았지만 그들을 좋아한 적은 없다.” 이런 말로 대변되는 작가적 투망에 잡힐 것을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머싯 몸의 저 말을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근원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부러 좋아하려고 노력할 필요까지는 없다, 라고.

 

 

서머싯 몸은 인간 내장에 돋은, 까칠한 돌기까지도 잡아낼 정도로 통찰 깊은 작가이다. 인간 관찰에 대한 그의 문장들을 읽다 보면 나쁜 짓하다 들킨 아이처럼 뜨끔해지곤 한다.

 

 

그가 작가로서 우뚝한 순간은 음악으로 치자면 감성 발린 발라드를 부를 때가 아니라 격정적인 몸짓까지 노래하는 락 음악을 보여줄 때이다. 이제 고전의 반열에 올라버린『인간의 굴레에서』에서를 살핀다. 인간을 노래하는 그의 발성법은 뼛구멍에 난 터럭까지 감지하고 표현하는 것을 택한다. 인간의 불가피한 이기심을 변론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 “타인에게 이기적이 아니기를 요구하는데 그건 당신의 욕망을 위해 타인더러 자신의 욕망을 희생하라고 하는 모순된 주장이다.”

 

 

사람에게 실망하지 않으려면 내 욕망과 같은 타자의 욕망을 인정하라는 것, 그것이 곧 자비라는 것, 저마다 추구하는 삶은 따지고 보면 ‘자기 자신의 쾌락’이라는 것. 맨 살에 바른 파스가 뼛속을 관통할 때의 시원한 쾌감 같은 이 기분. 다만 그 통찰이 시원함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마디마디 서늘한 후통증을 동반한다는 것. 매운 맛을 두려워하면서도 매운 떡볶이를 찾는 소비자처럼 그의 문장들에 중독된다.

 

 

인간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서머싯 몸은 친구하기에는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에두르지 않고 직설 화법을 구사하는 그가 미덥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 자체에 대한 애정 없이는 그토록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전우주적 이해의 접선을 시도하는 그의 말 안에서 우리는 따끔거리고, 찢어지며, 화끈거린다. 경멸하고 경원시하면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의 고통, 그것에 대해 그보다 더 잘 말하는 작가도 없다.

 

 

 

 

 

 

 

 

 

 

 

 

 

 

 

 

 

 

4. 완벽주의는 완벽하지 않아

 

조상들이 말했다. 아는 길도 물어 가고, 얕은 내도 깊게 건너라고. 흔히 완벽주의자들이라고 자청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다. 뭐든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실행하지 않는다고. 정말 그럴까. 그런 사람들은 끝내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잘 돼 가냐고 물으면 그들 대답은 한결같이 꼿꼿하다. 여전히 ‘완벽하게 준비하는 중’이다. 아는 길도 물어 가고, 얕은 내도 깊게 건너는 일에 열을 내고 있을 뿐이다.

 

 

위의 예는 스스로를 두고 한 말이다. 절대 완벽주의자가 못 되는 나는 스스로를 위로할 필요가 있을 때 그렇게 위로한다. 실천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가 둘러대는 핑계가 바로 ‘완벽주의론’이다. 예를 들어 다이어트를 곧장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혹시 불어난 몸피가 살이 아니라 붓기일 수도 있으니 병원부터 가야할 핑계가 남았고, 쓰다 만 단편을 완결 짓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내 문체가 원하는 만큼 완성도가 높지 못하니 될 때까지 다른 작품을 더 읽고 준비해야할 이유가 기다리고 있다. 진실로 진실이 아닌 핑계를 갖다 붙인다. 게을러서 실행 못하는 것을 마치 완벽주의자여서 그런 것처럼 포장할 뿐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미흡한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작이 반이다’ 라는 속담이 서두의 두 속담보다 훨씬 실용적이다. 아는 길은 곧장 가면 되고, 얕은 내는 가벼이 건너도 무관하다. 아는 길에 괜히 허비할 시간은 행동으로 옮기는 데 쓰고, 얕은 내를 건너는데 소비한 과도한 에너지는 심오한 창의력에 할당하면 된다. 이 세상에 완벽함은 없다. 완벽을 추구한다고 해서 완벽해지지도 않는다. 미완이고 어설프지만 일단 시도하는 게 완벽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백만 배는 낫다.

 

 

모든 완성은 불완전에서 출발한다. 완벽하게 준비한 사람이 끝낸 일보다 불완전한 상태에서 시도한 사람이 끝낸 일이 더 많다. 완벽한 사람은 시작한 일 자체가 드무니 성공할 확률도 낮을 수밖에 없다. 완벽주의연함은 완벽에 이르는 가장 나쁜 포장술이다.

 

 

 

 

 

 

 

 

 

 

 

 

 

 

 

 

 

 

5. 취향일 뿐

 

체리는 내가 좋아하는 과일이다. 체리가 드문드문 시장에 나오던 초창기에는 그것이 맛나다는 것조차 즐길 겨를이 없었다. 비싼 수입 과일이라는 현실적 판단이, 맛있다는 진심의 욕망을 막아버렸기 때문이었다. 흔히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라고 포기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과일 가게에 가면 산더미처럼 쌓인 체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여전히 비싸기는 하지만 원하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대중적 과일이 되어 있었다.

 

 

남유럽 여행에서 충격 먹은 것 중의 하나. 달리는 차창 밖으로 아름드리 체리나무 행렬이 이어졌다. 내게 로망이기만 했던 과일이 이토록 흔한 것이었다니! 제 철이라 그런지 값도 무척 쌌다. 체리 한 번 다시 실컷 먹어보기 위해 다시 여행을 하고 싶을 정도였다.

 

 

반면에 나는 토마토는 거의 좋아하지 않는다. 단맛에 길들여진데다 미감마저 약해 내 입맛에는 토마토가 영 밍밍하고 싱겁게 느껴지는 것이다. 찰토마토니 대추방울토마토니 등 온갖 세련된 맛의 품종이 쏟아져 나와도 내게 토마토는 다 같은 토마토일 뿐이다. 나를 뺀 나머지 식구들은 토마토를 좋아한다. 몸에 좋다니 자주 사서 갈아먹고 볶아먹고 하면 될 것을 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토마토에는 손길이 가질 않게 된다. 토마토나 식구들 입장에서는 토마토의 가치를 제대로 활용해주지 않는 내가 야속할 수도 있겠다.

 

 

체리든 토마토든 과일 자체의 본질이나 가치는 바뀌지 않는다. 체리는 체리 그대로, 토마토는 토마토 그대로 존재한다. 체리를 선호하거나 토마토를 우선하는 것은 선택자의 마음일 뿐이다. 내가 특정 과일을 선호한다고 해서 다른 과일의 본질이나 가치가 뒤로 밀리는 건 아니다. 그건 취향의 문제이지 당위의 문제가 아니다. 체리는 체리대로 토마토는 토마토대로 존재 이유가 있다.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사람마다 품은 향기가 다를 뿐이지 그 향 자체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건 아니다. 사람마다 품은 향기와 맛은 다르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본질과 가치가 변하는 건 아니다. 개성이라 불리는 그것들은 존중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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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26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팜므 님 글은 빠르게 읽히는 장점이 있씁니다. 군더더기가 없으니 쏙쏙 머리에 들어오거든요. 빠르게 잘 읽었습니다. 그나저나 김영오 씨 페이스북에 사람들이 음식 사진 잔뜩 올리고 조롱한다고 하네요. 참... 이게 할 짓인가.. 그런 생각이드네요. 정 마음에 안 들면 그냥 속으로만 욕하면 되지, 아니 굳이 43일 굶어서 걱정인 사람에게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는... 하여튼 답답한 시대입니다.

라로 2014-08-27 01:05   좋아요 0 | URL
곰발님~~~~한글 맞춤법 어떻게 공부했어요????응??

곰곰생각하는발 2014-08-27 12:57   좋아요 0 | URL
한글 맞춤법이라... 공부 안 한 것 같습니다. 제가 맞춤법이 좀 삐짜'로 배워서 잘 틀립니다..ㅎㅎㅎㅎㅎ. 그냥 책 많이 읽어서 그냥 무의식적으로 배운 것 같기는 하네요....

다크아이즈 2014-09-03 10:18   좋아요 0 | URL
딴 건 모르겠고, 곰발님 맞춤법 틀린 것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하십시요' 시리즈 ㅋ '하십시오' 로 고쳐달란 말이예요~~~휘리릭

프레이야 2014-08-26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든 다 드러내지 못하는 속사정이 어찌 없을까요. 김영오씨 경우도 그럴 거라는
심증이 갑니다. 너무 쉽게 조롱하고 너무 쉽게 찬양하는 세태라니..
그 연극배우는 누구인가요? 궁금합니다.

저도 체리 좋아해요. 과일도 체질에 맞는 게 있다네요. 토마토가 건강식품 중 하나라지만
모두에게 좋은 건 아니라고 해요. 입에서 당기는 게 몸에 다 맞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데
쉽지 않네요. 이제 정말 건강 생각해야 할 때인데 여의치 않아요. 습관이란 녀석이..


다크아이즈 2014-09-03 10:19   좋아요 0 | URL
체리는 이제 안 나와요. 내년 초여름을 기다려야 한다는
그러니 더 먹고 싶어요.

오늘은 제주 어디를 밟으실까나? 용감해서 부러운 우리 프레님~~

세실 2014-08-26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야언니 그는 뮤지컬 배우 이산이랍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원색적인 비난은 별로죠.
김영오씨의 사생활까지 들추어내는것도.....근데 김영오씨는 이혼하고 양육비도 못줬다던데....안준거랑 못준거랑은 큰 차이가 있겠지요? 서로를 정확히 알기까지는 섣부른 판단은 금물!!
저도 체리는 비싸서 안사먹었는데 요즘 저렴한 가격 덕분에 보림 챙겨주면서 먹고 있어요. 새콤, 달콤한 맛이 좋아요~~~~

다크아이즈 2014-09-03 10:21   좋아요 0 | URL
전 만날 섣부른 판단으로 그르치곤 해요. 그것이 인생ㅋ
내년에 체리 먹는 수다 모임 열어야 겠어요.
또 비와요. 여긴. 거기는요?
보림이 수시 때문에 신경 많이 쓰이지요?
잘 될 거예요. 원하는 곳 간다, 보림이 파이팅~~

라로 2014-08-27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정말 나의 약점은 내가 예민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네요.
그래서 그 부분을 남이 건들었다 싶으면 상처 받은 것처럼 느껴져서 아프고...

암튼 이상한 사람들 많아요,,,누구 말대로 세상은 넓고 이상한 사람도 많다,,,고 생각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상처가 될 듯.

체리 여기는 별로 안 비싼 편인데 하와이가 엄청 비싼가봐요.
지난 달 하와이에서 형님네 가족이 와서는 체리를 얼마나 사 먹던지!!
덕분에 저도 많이 먹긴 했는데,,,좀 놀랐다는;;;;
이게 다 희소성의 법칙이 아닐런지요????ㅎㅎㅎ거의 모든 코미디가 그렇게 만들어 지는 것 같아요,,,,

다크아이즈 2014-09-03 10:24   좋아요 0 | URL
학씨리, 그래요. 제가 예민해서 모든 게 일어나더라구요.
저도 예민하게 굴어서 만날 일을 그르쳐요.
방법은 예민함 자체는 버릴 수가 없고, 그것을 누르는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더라구요. 누구나 예민할 수 있지만 그것을 드러내느냐 안 내느냐는 마음 공부의 차이 같기도 하더라구요. 이래 말해도 저도 잘 안 돼요.
오늘도 알라딘하는 오피스 걸인지 점검하러 갈게요. ㅋ

[그장소] 2015-01-26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1. 질투의 속성

 

‘거지는 거지를, 시인은 시인을 시기한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헤시오도스가 한 말이다. 투박하긴 하지만 내 식 표현은 이렇다. ‘질투라는 것은 옆집에 사는 또래 아줌마에게 느끼는 감정이지, 강남 고급 아파트에 사는 젊은 새댁에게 느끼는 감정은 아니다.’ 하고픈 말들의 알짜배기는 언제나 선현들 차지이다. 어디 말 뿐일까. 인생 전반에 걸쳐 후대들은 선대들이 이미 이룬 것들을 인정하고 적용하고 재확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흔히 예술을 말할 때 지상에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질투는 같은 레벨 선상에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같은 목적 비슷한 상황에서 같은 산을 오르거나 같은 배를 탄 사람끼리 생기는 게 질투지, 다른 목적 다른 상황에서 다른 산을 오르거나 다른 배를 탄 사람끼리는 애초에 질투라는 감정이 생겨나지 않는다. 내 모의고사 성적의 비교 대상은 경쟁 상대인 내 짝지이지, 먼 학교에 다니는 나와 비슷한 성적을 내는 아이이거나 처음부터 비교대상이 아니었던 전교 일등 친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똑똑한 한 남자가 질투하는 대상은 똑 같은 레벨에 있는 사람이지 자신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는 다른 분야 또는 계급의 사람이 아니다. 정치인이 동료 정치인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권모술수를 동원하는 경우는 있어도, 노숙자에게 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할까봐 경계하지는 않는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가없는 사랑과 관심을 자신보다 계급적 하위에 있거나 또는 범접할 수 없는 상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베풀 수 있지만, 그것을 같은 경쟁자 입장에 있는 사람에게 할당하지는 않는다. 그들 서로는 질투가 어울리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기초는 질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질투는 뒤지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본성과 관련 있다. 따라서 질투라는 말은 좋게 보면 자기발전의 다른 말로 보아도 무방하다. 질투할 깜냥조차 되지 않을 경우 외면하거나 무시하고, 질투의 대상 위에 있을 때 인정하거나 고개 숙여 버리는 것 또한 인간 보편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2. 작은 차이

 

희로애락을 느낀다는 면에서는 누구나 비슷하지만, 그 감성이나 판단의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딘 사람이 있고, 뛰어난 직관을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리바리함 속에 헤매는 사람도 있다. 일반적으로 여성이 남성에 비해 눈치가 빠르고 직관 또한 뛰어나다고 한다. 단순 말싸움에서 아내가 남편을 압도하며, 어떤 상황에서 남성에 비해 여성이 빠르게 판단·결정한다는 점 등을 보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근본적으로야 눈치나 직관의 문제는 남녀 차이가 아니라, 개별자의 성정이나 처한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여러 경험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보면 남자의 직관보다 여자의 직관이 앞선다는 것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당신은 이미 읽혔다』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여자는 별로 말이 없었지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밥은 계속 대화를 시도했다. 때마침 밥의 여성 친구가 옆을 지나가다 이렇게 속삭였다. 밥, 포기해. 저 여자는 너를 얼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밥은 깜짝 놀랐다. ‘저렇게 날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데 믿을 수 없어.’ 보통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밥은 입술을 꽉 다물고 치아를 드러내지 않은 채 짓는 여성의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몰랐다.” 꽉 다문 입술을 옆으로 당겨 일자를 만들고, 치아를 거의 드러내지 않고 웃는 거짓 미소를 남자는 자신에 대한 호의로 착각한 것이다. 속마음을 감출 때 흔히 이런 미소를 짓는데, 여자들은 이것이 거절의 신호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리지만 남자들은 거의 눈치를 채지 못한다.

 

 

눈치나 직관이 반응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그들만의 정서적 기제가 발동하는 것일까. 여성이 비교적 눈치가 빠르고 직관이 뛰어난 것은 어느 정도는 선천적인 것과 관련이 있고, 달리 보면 사회화 과정에서 터득한 훈련의 결과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일상적인 면에서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하게 반응하는 남성에 비해, 오묘하고 복잡하게 반응하는 여성의 심리 기제가 이런 사소한 차이점을 낳게 한 것은 아닌지.

 

 

 

 

 

3. 한 호흡, 반 박자

 

“핵심은 상대의 말에 말려들어가 두 번째, 세 번째 발언이 이어지지 않게 하는 데 있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새로운 대화를 시작하는 것도 방법이다. ··· 정말로 무례하고 공격적인 말을 들었다면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다. 왜냐고? 침묵은 금일 뿐 아니라 잘못 인용되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적을 만들지 않는 대화법』에는 이처럼 매력적인 문구들이 많이 나온다. 여타 인간관계 관련 책보다 진솔하고 현실적이다. ‘웬만하면 참아라, 포용하면 언젠가 상대가 맘을 알아준다.’ 류의 원론적 자기 수양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이 책은 그런 소극적 방식을 넘어선 적극적 자기 표현법을 제시한다. 타자의 입장만을 우선하는 인간관계론은 반쪽짜리 가르침일 뿐이다. 자기 확신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책은 일깨워준다.

 

 

일상의 철학을 담백하게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 삶은 그런 것에서 멀어질 때가 있다. 매사가 피로하며, 어쩐지 귀찮고, 확실히 다혈질이며, 언제나 부서지기 쉽고, 자주 옹졸하다. 겉으로 단단하게 보이는 사람이라고 이 ‘저급하고도 진실한’ 인간 심성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사회지도층일수록 예상치 못한 일탈로 일반 대중을 충격의 도가니로 몰아넣는가 하면, 잘나가는 정치인일수록 허술한 수신제가 때문에 자가당착에 빠지게도 된다.

 

 

자기모순을 줄이고 자기 확신에 이르는 길목에서 필요한 것이 ‘한 호흡, 반 박자’의 원칙이다. 이 말은 내가 지어냈다. 위기가 닥치거나 흥분이 몰려오는 그 순간 한 호흡만 쉬고, 반 박자만 멈추면 된다. 침 한 번 삼키고 잠시 허공에 눈길 한 번 주면 될 것을, 찰나가 주는 침묵의 향연을 야무지게 새기면 될 것을. 그 리듬을 잃고 성급히 굴다가 자기모멸이란 자술서를 쓰게 된다. 회한과 후회와 번민의 모든 뒤안길에는 지키지 못한 한 호흡, 반 박자가 원죄처럼 남아 있다. 휘말리지 않고, 공격당하지 않을 가장 쉬운 전략은 한 호흡 가다듬고, 반 박자 멈추는 일이다. 언제나 그렇듯 실천이 어려운 것.

 

 

 

 

4. 잘 듣기

 

잘 말하기도 어렵지만 잘 듣기는 더 어렵다. ‘적당히 말하고 나머지는 잘 들어주기’ 이런 소통 자세야말로 가장 이상적이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른 법. 다양한 개별자만큼의 다양한 소통 방식이 세상에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떤 목적으로 누구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그에 따른 소통 방식도 달라진다. 일방통행으로 말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묻어가는 자세로 듣기를 좋아하는 이도 있다. 자신의 관심사와 조금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노골적으로 재미없어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재미없어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이도 있다.

 

 

이 모든 것 가운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조용히 묻어가거나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남의 얘기를 듣는 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말할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을 뿐, 결코 말하고 싶지 않거나 말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만큼 남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는 것, 거기다 기왕이면 잘 들어주는 것 이런 소통법을 실천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잘 말하는 것 못지않게 잘 들어주는 연습도 필요하다. 듣는다(listen)는 것은 영어에서 침묵하는(silent) 것과 같은 철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누군가 말했다. 잘 듣기 위해 잠시 침묵하는 일, 그다지 어려울 것 없어 보이는데 범부로선 얼마나 실천하기 힘든지.

 

 

잘 듣는 행위의 주체는 나이고, 대상은 너이다. 그 대상인 ‘너’는 당연히 강자가 아니라 약자여야만 한다. 약자 곁에서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직면한 아픔과 의혹을 덜어주는 데 도움이 된다. 비굴하고 비열하고 연약한 우리 영혼은 강자의 말을 듣는 것엔 잘 길들여져 있다. 반면에 약자에겐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선천적 재능과 후천적 학습 없이 약자 곁에서 잘 들어주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이번 방한 활동이야말로 ‘잘 듣기’의 최고봉이라 할 만한 행보였다.

 

 

 

 

 

 

5. 본다는 것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내 눈에 비치는 거울, 내가 지닌 프리즘, 내가 가진 가늠자를 통해서 본다는 것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주어진 대상에 대해 특별하거나 누적된 경험은 그것에 대한 고유한 이미지를 남기고, 그 이미지는 특정 대상에 대한 하나의 범주를 가능케 한다. 관찰자의 눈은 축적된 여러 경험의 씨날줄들을 엮어 그 사람은 참 착해, 그 사람은 에너지가 넘쳐, 이런 심상의 카테고리들로 대상을 범주화하게 된다. 그것이 비록 환상이나 오해에 지나지 않게 되더라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된다.

 

 

예를 들어 유도화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치자. 그가 그 나무를 좋아하는 것은 그 나무에 대해 축적해온 자신만의 이미지 때문이다. 좋아했던 여자애의 티셔츠에 그 꽃무늬가 등장했고, 한 때 근무했던 분위기 좋았던 사무실 복도에 그 화분이 있기도 했으며, 추억 속 방죽의 가로수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 때문에 그가 그 꽃을 좋아하게 된 거지 그 꽃 자체와 호불호는 별 관련이 없다는 얘기다.

 

 

한데 그 유도화 가지에 독성분이 있고, 그것 때문에 인체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정보 -비록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일일지라도 -를 얻은 뒤로 그는 유도화를 다시 보기 시작하게 된다. 긍정의 이미지가 강했던 대상이 어떤 상황에서 부정의 현실이라는 이미지를 연출하게 될 때 관찰자가 받는 심리적 타격은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크다. ‘믿음’이라는 환상이 깨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레 당하는 정서적 충격은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관찰자는 환상에 가까운 긍정의 편견을 그 대상에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대의 또 다른 현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된 틀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대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본질은 환상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관중석으로 뛰어드는 축구공처럼, 먼지떨이질에 살아나는 먼지처럼 느닷없고 자유분방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8월에 읽고 보려고 산 것들

동어반복인 줄 뻔히 알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글쓰기 관련 책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에 버금 가는 앨리스 먼로 것 두 권

언제나 사는 속도에 비해 읽는 속도가 느리다는 반성문을 쓰게 하는 책 사기

몰타의 매 DVD는 내 취향은 아니었어. 그놈의 샘 스페이드를 화면으로 보겠다는 호기심 때문이었는데 역시 데밋 해실의 문장으로 읽는 게 옳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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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8-2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호흡, 반 박자! 오늘 제 화두로 삼겠습니다^^
고종석의 문장 요즘 읽고 있는데 참 좋아요.

음성엔 비가 오락가락 합니다. 이런날엔 조용히 책을 읽으렵니다.
맛난 점심 드세요^^

다크아이즈 2014-08-23 09:35   좋아요 0 | URL
한 호흡, 반 박자가 안 돼서 문제를 그르친 경우가 많거든요.
스스로를 위한 반성문입니다. 반성은 잘 하는데 실천이 안 되는 게 문제라는 것ㅋ
근데 알라딘 글자 포인트가 높아졌어요. 한결 읽기 편하네요.

라로 2014-08-22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호흡, 반 박자!!ㅎㅎㅎ
제가 언니에게 글감을 많이 드리는 것 같아~~~~~.ㅋㅎㅎㅎㅎㅎㅎ
암튼 언니 좋은 글 감사해요. 귀감이 되는 분이시면서 귀감이 되는 글까지 쓰시는 분!!!
[아무래도 성악설인 게야]를 읽었던 날 언니 글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저렇게 글을 잘 쓸까? 혼자 생각하다가 그건 사유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부럽습니다.

다크아이즈 2014-08-23 09:41   좋아요 0 | URL
잘쓰는 건 아니고, 늘 잘 쓰고 싶지요. 잘 쓰는 분들 보면 신기하고 부럽고...
근데 고수들이 포진해 있으니 더 위축되고 뭐, 늘 도돌이표로 진행되는 고민이지요.
아주 잘 쓰는 사람들은 태어나는 것 같고,
노력해서 기본이라도 극복하자, 이런 맘으로 써요.
사유도 지나치면 엉뚱한데서 예민해지거나 예리해져서 별로 도움이 안 되어요.
일상에 무디면서 사유의 끝자락을 부여잡는, 그 고충도 제가 바라는 바는 아니에요. 저는 아롬님 글과 생활 다를 부러워한다니깐요~~


페크pek0501 2014-08-23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올라온 새 글, 반갑습니다.
역시 잘 쓰시는구나, 하면서 읽었네요. 글을 쓴 세월이 많다는 흔적을 느낍니다.
제가 이 글을 책으로 읽었다면 여기에 밑줄을 긋겠습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정된 틀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대상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본질은 환상 속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관중석으로 뛰어드는 축구공처럼, 먼지떨이질에 살아나는 먼지처럼 느닷없고 자유분방한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다크아이즈 2014-08-25 20:39   좋아요 0 | URL
넘 오랜 만이라 감을 잃었어요.
알라딘은 안 보면 보고 싶은 친구 같은 느낌.
가끔 들어와서 페크님 글 읽는 기쁨을 맛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제가 들어올 수 있을 때 언니 새글 많이 올라왔으면 좋겠습니다.^^*

[그장소] 2015-01-2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침없는 사색과 명쾌한 글들..즐겁게 읽고 갑니다.
 

 

 

 

 

 

 

 

 

 

 

 

 

 

 

 

 

 

 

 

 

 1. 교황, 교종

 

  프란치스코 교황이 출국했다. 평화와 화해를 위한 명동 성당 미사를 끝으로 4박5일 간의 방한 일정을 무사히 마쳤다. 시종일관 약자와 낮은 곳에 대한 관심과 배려, 어린이와 상처 받은 이에 대한 사랑과 시선을 우선한 행보를 보이셨다. 순수와 위안과 평화를 전하고자 한 당신의 발걸음에 감동을 받은 이들도 많았고, 직간접으로 그 순간을 체험한 이들은 마음가짐을 다잡는 계기도 되었을 것이다.

 

 

  낮고 비루한 일상을 보듬는 그 마음결을 되새기자니 문득 ‘교황’이라는 말 자체가 당신의 행보와는 걸맞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 권위적이고 정치적인 용어 같다. 일반인의 생각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교황이란 말이 오랫동안 쓰여 입에 붙어 간간이 쓰긴 하지만 일부러 황제의 이미지를 떼어버리는 자극을 주기 위해 교종이라는 단어를 고집스럽게 쓴다.” 교황방한 준비위원장인 강우일 주교도 이처럼 ‘교황’이라는 명칭 대신 ‘교종(敎宗)’이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었다. 교황(敎皇)이라는 명칭에 담겨 있는 권위적이고 세속적인 의도를 경계하는 마음이 느껴져 공감이 간다.

 

 

  교황이라는 말에서 황제, 임금이라는 뉘앙스가 떠올려지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낮고 평범한 것을 지향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복음 가르침과도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교황(pope)이라는 말은 아버지를 뜻하는 라틴어 ‘파파스’(paps), ‘파파’(papa)에서 유래했다. 지역교회의 최고 지도자를 부르던 말이 아시아에 번역되면서 교종, 교황으로 정착되었다. 일본에 교황으로 번역되어 온 말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 교과서에도 자연스레 교황이란 용어로 자리잡았다. 어색할 겨를도 없이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애초의 ‘pope’라는 말에는 ‘교황’이란 말이 풍기는 봉건적 군림의 의미가 있었을 리 없다. 교황이니 교종이니 하는 용어 자체가 사실 중요한 건 아니다. 다만 그 옛날 전제군주제 식의 무조건적 추앙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라는 진심이 아니다. 그건 낮은 행보를 하시는 당신의 뜻에도 반하는 행동일 것이다.

 

 

 

 

 

 

 

 

 

 

 

 

 

 

 

 

 

 

 

 

 2-1. 참으로 천행이다

 

  “죽은 적병의 시체들을 헤치고 함대는 북서진했다. 깃발을 내리고 돛을 접었다. 물살이 함대를 목포 앞 암태도까지 데려다 줄 것이었다. (···)허기진 사부들이 갑판에 주저앉아 마른 미역을 씹었다. 새떼들이 끝없이 배를 따라왔다. 다시 거꾸로 흐르는 북서 밀물 위에서 나는 몹시 피곤했다.”

 

 

 『칼의 노래』명량해전 마지막 부분 묘사 장면이다. 흥행가도를 달리는 동명의 영화 덕인지 요즘만큼 ‘명량’이란 말이 회자 된 적도 드물 것이다. 백의종군하게 된 이순신의 눈에 비친 순천·여수 앞바다 정경 묘사로부터 칼의 노래는 시작된다. 볼수록 전율이 돋는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라는 문장은 내가 만난 가장 강렬한 소설의 첫 구절이 되었다. 전반부에 비치된 명량해전에 대해 작가는 무려 4장에 걸쳐 그리고 있는데, 그 어디에도 소설적 과장이나 영화적 긴장감 같은 걸 빌려 담진 않았다. 오직 객관화된 인간 이순신의 내외적 발화가 있을 뿐이다. 담담하고 냉정한 그 방식 때문에 오히려 더 절절하다. 주관이 배제된 물리적 사실을 진술함으로써 실체에 가닿으려 한 방식은『난중일기』의 문체적 특성이기도 하다.

 

 

  “적선 30척을 쳐부수자 그들은 달아났다. 다시는 우리 수군에 가까이 오지 못하다. 그곳에 머물려고 했으나 물살이 무척 험하고 형세 또한 외롭고 위태로워 건너편 포구로 새벽에 진을 옮겼다. 당사도로 진을 옮겨 밤을 지내다. 이것은 참으로 천행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난중일기의 명량 전투 당일 자 마지막 문장이다. ‘외롭고 위태로워’라는 말이 참으로 걸린다. 이어진 날들의 일기를 보면 진도에서 싸움을 끝낸 뒤 무안을 거쳐 영광과 변산을 지나 닷새 뒤에는 군산 선유도까지 북서진해 물러났음을 알 수 있다. 군량미 확보와 배 정비의 필요성 등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앞에 장군인들 외롭고 위태롭지 않았을 것인가.

 

 

  ‘참으로 천행이다’라는 그날의 저 마지막 문장은 우뚝한 장수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심회에 자주 젖었던 인간 이순신으로서의 참모습을 말하는 것 같아 백번 공감이 가는 것이었다.

 

 

 

  2-2. 명량해전 간단 공부

 

  개봉 영화 ‘명량’ 관람을 계기로 명량해전에 대한 간단 공부를 한다. 관련 다큐멘터리나 기록물이 다양하다. 밤새 영상물을 찾아보고 기록물을 검색하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전쟁사가 이처럼 호기심과 흥미와 감동과 짠함 등을 동시다발로 줄 수 있다는 것이 묘하긴 하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에게 남은 건 실의에 빠진 수군과 열세 척의 군함뿐이었다. 그에 비해 진군하는 왜군함은 무려 삼백여 척에 달했다. 애초에 이길 수 없는 무모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 전쟁을 필사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죽으려는 자는 살 것이고, 살려는 자는 죽을 것이라는 각오를 몸소 실천했다.

 

 

  명량해전이 승리할 수 있었던 실질적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 첫 번째는 배의 구조이다. 조선의 주함 판옥선은 왜의 주함 안택선에 비해 튼튼했다. 만드는 방법과 구조의 견고성이 안택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회전력도 우수해 울돌목의 빠른 유수에도 적응할 수 있었다. 무기의 활용 면에서도 조선해군이 유리했다. 일본군의 주력 무기는 조총이었다. 살상 무기로서 가공할만한 위력을 지녔으나 해전에서는 조선의 함포가 나았다. 천자총통을 비롯한 각종 화포는 원거리 사격이 가능한데다 화력이 우수했다. 튼실한 배와 위협적인 무기는 이순신 해군 전투력의 바탕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이순신의 전략전술과 리더십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명량 일대의 해류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해 치고 빠지는 전법을 구사했다. 좁은 물목에 왜함대를 몰아넣어 옴짝달싹못하게 만들었다. 수중 철쇄를 해협 양쪽에 걸어 몰려드는 왜함을 뒤집어지게 했다는 설도 있지만 이런 기록들은 전쟁이 끝난 한참 뒤의 것들이라 믿음을 주진 못한다. 굳이 쇄사슬 전법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이순신의 지략은 여러 기록들이 충분히 검증해주고 있다. 이순신 없는 명량의 승리를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해협의 언덕에서 장군과 수군들의 승리를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응원하고 환호했던 당시 백성들의 마음이 기록으로나마 그들을 기리는 후대들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3-1. 차이는 차별 아닌 구별

 

  “차이가 없으면 소통의 필요가 없다고 아렌트가 생각한 것은 옳았다. 차이가 없다면 말과 행위도 필요 없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우리 모두 똑같다면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 한나 아렌트의『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앞 부분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코스트 전범 중 한 명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취재기인 이 책은 얼핏 보기에 대중성과 흥미를 갖춘 것 같은데 쉽게 읽히지 않는다. 당시 유럽이 처한 정치적 환경과 아렌트가 추구하는 철학적 배경에 대한 독자로서의 지식 부족 탓도 있고, 내용 및 용어 등에서 매끄럽지 못한 번역에도 어느 정도 원인이 있다. 그럼에도 밑줄 긋기 할 곳이 많은 건 전적으로 아렌트가 발하는 통찰 덕이다.

 

 

  크고 작은 갈등의 바닥엔 ‘차이를 인정하지 못함’이라는 인간의 기본 성질이 깔려 있다. 욕심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차이의 불인정에 기인한다. 한나 아렌트의 생각처럼 인간에게 ‘차이’라는 게 없으면 ‘소통’도 필요치 않다. 같은 생각 같은 모습, 즉 모든 인간이 내외적으로 획일화 되어 있다면 갈등도 소통도 애초에 없는 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갈등과 소통 이전에 모든 답이 똑같아 버리는 현실이라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따라서 갈등하는 인간은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 갈등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소통이 문제이다. 잘 소통하려면 차이를 인정해야 하고, 차이를 인정하려면 ‘타자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감각했던 아이히만의 가장 큰 문제는 ‘차이’에 대한 무지였다. 한나 아렌트의 표현에 의하면 악한 게 아니라 그저 ‘특별히 천박했던’ 아이히만은 사유도 의지도 판단도 할 수 없었다. 타자의 관점에 대한 학습에 노출될 기회가 없는 만큼 악의 평범함에 길들여졌다고 할 수 있다.

 

 

  차이란 차별이 아니라 구별을 의미한다. 너와 나를 차별해도 좋다가 아니라, 너와 내가 다름을 구별하고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타자의 관점을 훈련하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악의 평범성에 감염될 수 있다는 무서운 가르침!

 

 

 

  3-2. 악은 멀리 있지 않다

 

  악은 저 멀리 있지 않다. 악은 특별하지 않다. 악은 평범하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전언이다. 아렌트 여사의『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쉽게 읽힐 거란 내 예상은 빗나갔다. 유대인 학살의 핵심 책임자 아이히만의 전범 재판 방청기로 알려져 있는 이 책은 단순한 기고문이 아니었다. 철학자의 글답게 시종일관 심오한 문투다. 호기심이나 흥미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이다 보니 대중성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몰입이 잘 되는데도 금세 읽을 수 없는 것은 공감이 가는 장면마다 생각이 가지치기를 하기 때문이다. 그 상황, 그 환경에서 아이히만과 다를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삼라만상 그 무엇을 내 잣대로 규정짓거나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인가. 내 안의 선이 그리 특별하지 않듯 내 안의 악 또한 그러하거늘 왜 우리는 타인의 악행에만 그토록 분개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이 책이 그토록 회자되는 건 단연 부제 때문이다. 대놓고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고 잘라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란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인간 보편성의 기저에는 악의 평범성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한나 아렌트의 주장이다. 보통의 악, 평상의 악이라니 섬뜩한 면도 없지 않지만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절대의 선, 객관의 선을 행사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재판을 방청한 그녀의 눈에 비친 아이히만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직책과 명령에 충실한 평범한 직장인이었을 뿐, 어디에도 광적 학살에 집착하는 악의에 찬 기질을 숨기고 있는 자는 아니었다. 그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던 건 ‘무능성’ 때문이었다고 아렌트는 짚어낸다. 판단의 무능성은 사고와 성찰이 부족할 때 생겨난다. 악의 평범성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의 지속을 경계할 수 있는 사고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게 문제인 것이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악에 대한 보편적 통찰이 철학적 사유의 반성으로 확장되는 힘, 그것이 한나 아렌트의 성과라면 성과일 수 있겠다.

 

 

 

 

 

 

 

 

 

 

 

 

 

 

 

 

 

 

 

 

4. 인간의 광기

 

  포화 속 가자지구 사망자 수가 거의 이천 명에 이른단다. 전쟁을 멈추라는 세계 곳곳의 목소리가 간절할수록 양측의 전의는 맹렬하기만 하다.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서로 공격을 멈추지 않겠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이스라엘은 안보가 확보돼야 군사작전을 멈출 것이라 말하고, 하마스 측은 가자지구 봉쇄를 풀지 않는 한 휴전은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죄 없는 민간인 피해자만 늘어나는 안타까운 현실이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 상황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에 얽힌 요소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 세 종교의 탄생지인 예루살렘은 인류의 광기 때문에 폭력과 전쟁의 주요 진원지가 되었다. 가톨릭 사제였던 제임스 캐럴의 신작『예루살렘 광기』는 이러한 종교의 허상과 인간의 광기에 대한 고백서이다.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하던 그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환멸을 맛본다. 성지 안에 있는 복제화들과 ‘십자가의 길’로 상징되는 열네 곳이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적 서사임을 알게 된다. 중세 후기 그리스정교회의 관광 독점을 막기 위한 프란체스코회의 조작임을 알고 회의를 느껴 사제직을 물러난다. 신앙을 들먹이며 예루살렘을 성지화한 것은 바로 인간들이며, 그곳만이 메시아의 재림과 계시가 보장된다고 병적으로 열광하고 집착한다는 것이 캐럴의 시각이다.

 

 

  종교적 열망은 배타적 적대감을 낳고,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된 그 신념은 무자비한 살육을 부추긴다. 그렇게 인간의 허상이 만들어낸 예루살렘이라는 환상은 역사 속에서 아수라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무서운 광기가 오늘날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종교가 폭력 앞에 무기력한 장면 앞에서 인간의 근본이 선하다는 주장에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살육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그 희생제의가 곧 종교라는 캐럴의 일침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신의 명분을 빌려 야만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광기와 이기심, 이것이 인류의 실체기이도 하다는 씁쓸한 진실!

 

 

 

  * 8월 한 달은 그나마 조용했다. 좀 읽고, 많이 쓰고 싶었지만 그리하지 못했다.

    상념은 부풀었으나 언어가 되지 못했고, 게으름은 나무늘보로 늘어지는데 시간은 야속하게도 급류처럼 흘렀다. 아까운 8월, 벌써 반 이상 보내버렸다. 한 것도 남은 것도 없다.  익어가는 저 열매처럼 되고 싶었으나 마음만 익었지, 몸과 행동은 익지 못했다. 오호통재, 오호 애재라, 아흐 다롱디리여ㅠㅠ  

 

 그나저나 저 열매 이름이 뭘까요?

 어느 착한 분이 저 과일을 후식으로 내놓고 맞혀 보랬는데 아무도 못 맞혔다는...

 자연보다 책을 우선하는 알라디너 여러분도 잘 모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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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8-19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과 배려, 소통과 나눔을 몸소 실천하고 떠나신 프란치스코교황님을 잊지 말아야 겠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간결하게 살아야 겠습니다.
향기나는 사람도 좋겠죠?
비 오는 화요일....의외로 고요합니다^^

다크아이즈 2014-08-19 10:17   좋아요 0 | URL
어제 진종일 비 내리더니 여긴 이제 그쳤어요.
가을 장마 전선이 북상 중인가 봐여ㅠ
지금은 커피 타임? 비 오는 날 커피 갈아 한 잔 하면 음메, 미치지요.
저도 커피 돌리러 갑니다~~
재미난 하루 보내시어요.

세실 2014-08-19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두나 살구는 아닌가봅니다.

다크아이즈 2014-08-21 09:15   좋아요 0 | URL
매실이랍니다.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매실이 익으면 저렇게 되고, 먹을 수도 있어요.
많이 시고, 약간 달달했어요. 살구보다 약간 강렬한 맛...

초록색 매실만 있다는 생각을 버리게 됐다는...'
여긴 또 비와요, 좋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4-08-19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어째 반가운 이웃의 글이 많이 올라왔네요. 팜므 님 반갑습니다. 확실히 이젠 가을이란 생각이 듭니다. 참 신기해요. 계절이 바뀌는 거 보면 참 신기합니다. 여름만 있다거나 겨울만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얼마나 지루하겠습니까. 계절이 바뀌니 늘 하던 패션이 지겨워지는 순간 다른 코디를 할 수도 있고 말이죠. 여전히 1.2.3.4 형 포스트는 여전하시군요.

아이히만... 요 책 대단합니다. 왜 정치가들은 프레임 설정을 잘해야 한다고 하잫아요. 아렌트는 짧은 문장 하나로 전체를 보여줬습니다. 악의 평벙성 말이죠. 기회만 된다면 기냥 한길그레이트북 컬렉션으로 뽑아다가 고것들만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천도복숭아 아닙니까 ? 저 과일.. 답이 쉬울리는 없으니 아닌 거 같디만...

다크아이즈 2014-08-21 09:20   좋아요 0 | URL
한나 아렌트의 철학은 성찰 깊고 위대했으나
그녀의 문체나 구성은 지랄 같다. - 제 독서 후기입니다.
번역도 온통 비문투성이라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재판방청기를 고스란히 옮기면서 자신의 생각을 쉬운 문체로 정리하면 독자들이 파악하기 쉬웠을 것을, 너무 왔다갔다해서 정신이 혼미했어요.
철학자연한 그 문투는 또 뭐랍니까? 과연 저 번역서를 꼼꼼하게 음미하면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날도 우중충한데 그런 생각으로 우울해지지 뭡니까.
악의 평범성이란 화두를 건진 것만으로 만족해야지, 문투는 정말이지 요령부득이었지요.


과일은 매실~~

라로 2014-08-20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협박이 힘이 세긴 센가봐요~~~.ㅋ
늘 이렇게 자신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하는 저는 진정 구순기시절 결핌의 영향이 맞는 것 같아요.ㅎㅎㅎㅎ
암튼 많이 배우고 가요,,,언니의 글쓰기를 배워서 영문페이퍼에 그대로 적용하여 멋드러지게 페이퍼를 써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mirabelle 이라는 과일 아니에요????( ")

다크아이즈 2014-08-21 09:25   좋아요 0 | URL
무미건조한 제 문체를 이쁘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ㅋ
상냥하고, 재간 있는 에피소드 성 강한 아롬님 글을 저는 더 좋아합니다.

미라벨이란 과일 검색해봤다는, 이미지도 안 떠요.
프랑스 쪽에서 많이 나는 자두과인 모양이에요.
미라벨 맛이 자두맛이려나?

설마 미라벨 같은 이쁜 과일 이름이 나오길 바란 것 아니었지요? ㅋ
매실 익은 거라기에 충격 먹었어요.

페크pek0501 2014-08-23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시는 동안(알라딘을...) 쉬시기만 한 게 아니라 요런 글을 쓰기 위해 사유의 시간을 가지셨나 봅니다. 많이 배우고 갑니다. ^^ 자주 글을 올려 주시길... 많이 배우게요...

다크아이즈 2014-08-25 20:41   좋아요 0 | URL
사유하면 페크언냐죠~~
배움하면 또 페크 언냐고.
언니의 글 쓰는 방식을 무척 좋아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지요.
이해하기 쉽게 잘 쓴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2015-01-26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5-01-26 2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장소님, 닉마저 매력적인 님을 알게 되어 감사 드립니다. 한 주 잘 시작하시고 많이 배울게요^^

[그장소] 2015-01-26 22:19   좋아요 0 | URL
으..감사해서 ^^ 어쩔 줄 모름.
저 역시. 다크아이즈 님께 많이
배울까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남은 오늘..잘 마무리 하시길...빌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