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홍세화 > [씨네21] 한국 순정만화 되돌아보기

[씨네 21 No.489] 2005년 2월 4일

한국 순정만화 되돌아보기 - 깜악귀

탄생에서 하나의 사이클을 완결하기까지 그 20년의 역사










1979년 소개된 <캔디캔디>와 그 애니메이션의 열풍에 힘입어 한국 순정만화의 독자층과 그 시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다. 그리고 뒤이어 <베르사이유의 장미> <유리가면> 등의 해적판이 소녀들의 손아귀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맛을 본 소녀들은 더 많이 읽기를 원했고, 그 틈을 타고 해적판 및 일본소녀만화의 번안물이 그녀들의 손에 쥐어졌다. 80년대 ‘순정만화’는 한국에서 여성들이 최초로 전유한 자신들만의 욕망을 위한 매체이자 장르, 혹은 욕망의 구조물이 되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한국 순정만화는 어디쯤 있을까?

(Caution: 여기에서 제공하는 순정만화의 다이제스트는 몇몇 대형 히트작들을 완전 무시하는 등 편향된 시각과 무례한 요약, 일방적인 오독으로 가득 차 있음)

80년대 - 최초의 순정세대, 그리고 최초의 ‘여성’ 세대

80년대 중반, ‘온전한 자신의 창작 이야기’로 데뷔한 일련의 작가들에 의해 창작순정물의 시대가 본격화된다. 이 작가들의 이름은 김혜린, 김진, 신일숙, 강경옥 등이다. 그렇게 일본 소녀만화와 독립된 한국 순정만화가 본궤도에 오르는 것이다.

이때 순정만화 소비자들이었던 소녀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80년대 초·중반에 이런 만화들을 읽고 자란 소녀들이 지금의 30대 초·중반이다. 당시의 소녀들은 한국에서 ‘대량으로 직장여성이기 시작한’ 첫 세대였다. 동시에 이들은 ‘엄마로서 소비하기’, ‘주부로서 소비하기’가 아닌 ‘여성으로서의 욕망’을 가지고 떳떳하게 소비하고 행동하기를 막 처음 시작한 세대였다. 그녀들이 대학에 들어갔던 시기에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즉 이 세대들은 ‘엄마와는 다르게 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다. 이 새로운 여성들을 만족시켜줄 문화상품은 당연하게도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소녀만화가 그들의 욕망의 대리물이 되었다. 이 작품들의 도래는 잠재된 수요를 해방시켰다. 그리고 빅뱅. 새로운 시장이 형성되었다. 그렇게 ‘순정만화’는 한국에서 여성들이 최초로 전유한 자신들만의 욕망을 위한 매체이자 장르, 혹은 욕망의 구조물이 되었다. ‘순정만화’는 사회진출을 시작하는 여성들과 기대와 불안, 그리고 욕망의 행보와 함께 맥동하고 있었다. 진취적인 소녀들은 선행자 없는 자신의 불안한 욕망을 어떤 식으로든 자각하고 있었고, 그들이 나이가 들고 지식이 성장함에 따라 순정만화라는 장르도 정신적으로 성장해 나아갔다.

한국 순정만화의 역사에서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중반까지는 그야말로 신이 독자와 함께 성장해나가면서 ‘여성만화’로서의 역할까지 포용해나가는 진취적이고 아름다운 보기 중 하나이다. 그리고나서 순정만화는 다시 ‘소녀만화’로서의 속성으로 회귀하게 되지만. 좌우간 그 대목 중 몇 가지를 확인해보자(내 맘대로).

혁명순정물 대가 김혜린, 천재 김진의 대가족 잔혹사









김혜린은 83년 <북해의 별>을 위시한 일련의 작품으로 순정물 고유의 로맨스와 현실 사회변혁의 열정이 뒤섞인 경계에서 양쪽 다를 잡아내며 자신만의 사회파 순정물을 이끌어냈다. <북해의 별>을 당시의 운동권 학생들이 돌려 읽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한참 정국이 시끌시끌하던 88년에 <르네상스>에 연재한 <테르미도르>와 그 차기작인 <비천무>는 김혜린 미학의 완성이었다. <비천무>의 작화와 시가(詩歌)의 인용들은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인물들이 관통하는 사회적 현실과 비참함은 한국의 현실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시각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미리 말해두지만 영화와는 내용이 크게 다르다). 80년대 후반, 그 시기에 못사는 사람들의 혁명 이야기를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은 보통 일은 아니었다.

김혜린이 대가라면 김진은 천재였을 것이다. 대하판타지이든 소박한 가족물에서든 김진은 한국형 대가족 내부에 존재하는 가부장적 질서의 균열과 파멸을 노래했다. 그의 만화에서 아버지는 폭력적인 가부장이고, 아들은 그런 아버지와 반목하고 가족들은 그 사이에서 공포와 증오, 자폐적인 심리를 담은 눈으로 이를 목격한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는 살육과 몰락이 펼쳐지고 절대로 그 폭력을 멈추지 못한다. 그것은 일종의 광증이다. 게임화가 되기도 한 <바람의 나라>가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 <신들의 황혼> 나 이탈리아 갱단 <밀라노 11월> 에서부터 고구려 상고사 <바람의 나라> 까지 다양한 소재를 통해 이러한 주제의식을 변주하고 펼쳐내었다. 최근 <밀라노… 11월>이 재간되었다. 욕심이 있는 사람은 절판이 되기 전에 구할 것.

대화하는 강경옥, 한국 야오이의 선구자 이정애









강경옥이 86년 <이 카드입니까>으로 데뷔한다. 강경옥의 주인공들은 끊임없이 대화하고 생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넌 왜 나를 좋아하는지, 그리고 왜 지금은 또 나를 싫어하는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질문하고 그리고 납득하는 것이다. 강경옥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90년에 완결된 SF판타지인 <별빛 속에>이다.

강경옥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은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가”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이 강경옥의 어두운 점과 밝은 점을 모두 아우른다. 어두운 점이라면 영화화가 거론되기도 한 <두 사람이다>와 같은 최근의 공포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일상 속에서 항상 독백하고 생각하며 ‘내면의 필터‘를 거쳐서 사건을 받아들이는 강경옥의 인물들은 90년대의 순정만화의 경향을 미리 예시한 셈이었다.

86년에 데뷔한 이정애의 작품에서는 남성 캐릭터들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지 않고 서로의 육체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철학과 신학 등 현학을 내세우며 신과 인간이 반반씩 결합된 반신반인이다. 그들의 정념은 종교적 순수와 지식욕과 동일시된 플라토닉 러브의 변종이다. 지금과 같은 의미에서의 본격 야오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정애를 한국 야오이물의 선구자라고 평하는 것은 무리없는 일일 터이다.

94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이정애의 대표작 <열왕대전기>로부터 이러한 면모를 본격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원물로 시작해서 구세주와 적 그리스도의 대결을 그린 이 종말론적인 작품은 명실공히 컬트의 반열에 오르며 확고한 지지층을 결집하게 되었다. 이정애의 또 다른 걸작인 <소델리니 교수의 사고수첩>의 경우 심의의 제재에 의해 몇 장면이 수정되기도 했다. 이것은 한국 순정만화가 예술적으로 커나가는 방향에서 기존 만화에 대한 인식과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였다. 쉽지 않은 소재를 자신만의 개성과 주제의식으로 완성도 있게 풀어나간 뛰어난 작가였다.

90년대 - 새로운 감수성을 가진 작가들의 등장

드디어 90년대가 되면 순정만화는 이미 확고8한 자리를 잡게 된다. 순정만화의 독자들이 대학생이 되었고, 통신공간을 통해 순정만화의 작가론 등 담론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90년대 들어서 가장 큰 변화는 대하서사물의 맥이 끊긴 것이다. 물론 김혜린 등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었고 많은 작품들이 90년대에 새로 출발했지만, 적어도 이 시기에 새로 데뷔한 작가들 중에 대하서사를 그리는 작가는 없었다.

이때 데뷔한 70년대생 작가들의 특성은 강경옥이 예시했던 경향을 가속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문화적 트렌드나 쿨한 감성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다. 80년대의 작품들이 외부의 사건에 의해서 운명적으로 지배당하는 주인공을 내세웠다면 이젠 일상의 사건에 대한 내면의 독백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나예리, 박희정, 이강주, 이진경, 한혜연, 문흥미 등의 데뷔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또한 90년대 후반에 잡지 <나인>(Nine)이 등장하며 ‘여성만화’를 표방했다. 이 잡지에는 작품성 위주의 수준 높은 선별이 이루어졌고 굵직한 신인들이 비평적으로도 뛰어난 수작을 내어놓으며 ‘제2의 르네상스’라고 일컬어졌지만 결국 2000년으로 넘어가서는 버티지 못하고 만다. 비평적 성취는 높았지만 상업적으로는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서 순정만화는 ‘여성의 사회진출’과 연결된 하나의 사이클을 종결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두 가지 경향을 예로 들어보자.

페미니즘과 지적 경향성의 공유









90년대의 대학의 지적 경향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인 경향성이다. 80년대 작가들의 작업에 현학적 경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를테면 이정애- 차이가 있다면,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의 문화적 코드를 주저하지 않고 사용하기 시작했다. 즉, 이들은 고등교육을 받는 것이 당연한 여성 세대이며 강한 페미니즘적 경향성과 지적 경향성, 그리고 문화적 차별성을 지녔다. 달리 말하면 여성으로서의 뚜렷한 자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논리적이고 성찰적이며 비판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그녀들은 교육받은 것이 부끄럽지 않으며 오히려 무기가 된다.

이러한 흐름의 작가로서 90년대 초반과 중반, 후반에 걸쳐 순차적으로 데뷔한 이진경, 유시진, 권교정을 들 수 있다. 가장 처음 데뷔한 이진경인데 잡지 <나인>에 <사춘기>를 연재하자마자 걸작의 칭호를 얻는다. 아직 학생운동의 기운이 남아 있는 90년대 초 대학의 풍경을 예민하게 포착한 <사춘기>는 페미닌하면서 고급했고, 퀴어적인 성향, 미술학도로서의 아트한 성향, 지식인적 성향을 고루 가지고 있었다. 1권에서 “남자 선배의 탈을 쓴 마초”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대거리하는 장면은 인구에 회자되던 명장면이었다.

뒤이어 유시진이 90년대 중반 <마니>로 자신의 지분을 선언하고 <쿨핫>으로 그것을 굳건히 한 뒤 <폐쇄자>로 자신의 세계를 ‘완성’하였다. 유시진은 폐쇄적인 자아의 심상판타지를 추구한다는 면과 가부장제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김진의 후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김진이 아들의 캐릭터를 통해서 가부장제를 관철한다면 유시진은 그 딸의 시각으로 가부장제에 대한 집착과 속박을 표현한다. 이 경우 가족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아버지와 그 저주받은 가부장적 후계로서의, 아버지를 증오하는 딸이 있다. 적어도 <쿨핫>의 살부 콤플렉스에 시달리며 타인과의 교류를 거부하는 주인공 김동경의 눈동자는 독자에게 강한 울림을 남겼다.

그리고 이 경향의 마지막 주자 권교정이 90년대 후반 <헬무트> 등을 위시해서 자신만의 울림을 가진 장르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권교정의 특징은 능숙하게 “장르의 핵심요소”를 분해-재결합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각색’된 장르물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셋 중 가장 유희적인 성격이 짙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러한 ‘각색‘을 통해서 장르에 대한 편견을 부수고 좀더 보편적인 방향으로, 그리고 좀더 생각하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것이 권교정의 가치다. 예를 들어 <헬무트>의 유명한 대목 중 하나- 영주의 딸이 지나가는데 하인 소녀가 피부가 곱다고 감탄하자, “너도 나처럼 밭일 한번 안 하고 실내에만 있고 가꿀 시간이 있으면 네 피부도 나만큼은 곱겠지”라는 식으로 언급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현대적인 시각으로 중세물 장르를 바라본 것이다).

일상성과 환상성을 결합하는 흐름

이와는 다른 축으로 잡지 <나인>을 통해 데뷔한 몇몇 작가들을 더 언급할 수 있다. 이것은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순정만화의 고급화의 흐름 중 일부로서 일상성과 환상성을 결합하려는 시도였다. 이전에도 활약하던 이강주가 <캥거루를 위하여>로 자신의 작품 활동에 한획을 그었다. 이 작품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니 내 얼굴이 캥거루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한다”라는 카프카와 하루키가 뒤범벅된 발상으로 시작한다.

비슷한 시기 같은 잡지에서 이향우가 1권짜리 <우주인>으로 여성 백수의 이야기를 큐티한 캐릭터와 세련된 에피소드로 보여주며 강한 인상을 남긴다. “나는 우주인이다, 이곳에서는 나를 일컬어 백수라고 한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우주인>은 이강주와 함께 잡지 <나인>에서 일상성과 그 일상에 대한 이질감에서 출발한 환상성의 결합을 추구하는 흐름을 이루었다. 2도 채색으로 인쇄되었던 이 만화는 선물용으로 적합하리만큼 충분한 팬시성을 갖고 있었으므로 일반 만화와 다른 마케팅과 홍보가 뒷받침되었다면 다른 지분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일상성과 환상성, 그리고 그로테스크함을 추구했던 이애림의 가 준 충격도 만만찮은 것이었다. 이애림의 체모에 대한 강박적인 묘사와 일그러진 우화의 전개는 강한 인상으로 다가갔다. 이러한 인디적인 흐름은 최인선 등의 ‘예쁘지 않은 스타일’과 결합하여 하나의 작은 흐름을 형성하였고 실제 인디만화의 흐름과 결합하기도 했다.

2000년대 - 하나의 사이클을 종결한 ‘순정만화’

2000년대의 흐름은 어떨까? 순정만화가 ‘사회 진출을 시작한 여성’들이 가지는 일단의 정체성과 결별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현재의 순정만화는 좀더 당연하게 유희적이며, 야심보다는 소녀들의 엔터테인먼트를 추구한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 흐름일 것이다. 이전의 순정만화가 ‘여성만화’로서의 진지한 흐름과 ‘순정만화’로서의 장식성과 유희적인 흐름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면 이 두 가지는 사실 분화되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오히려 지금의 흐름이 더욱 자연스러운 면이 있다.

사실 80년대의 몇몇 작품은 그 내용의 진지함과 무거움이 도저히 소녀가 볼 만한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프랑스 혁명의 구체상황이 연표와 함께 낱낱이 등장하며 그것이 극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테르미도르>와 같은 것이 그렇다. 역할모델로서의 성인여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은 이들 세대의 특성상 이때부터 90년대 후반까지 한국에서 ‘순정만화’는 ‘여성만화’로서의 속성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내용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의 진취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여성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위하여 즐길 수 있는 문화상품은 만화만이 아니며 지금 소녀들이 이러한 절박함을 가질 이유도 없다. 그리하여 순정만화는 10대들의 만화로 자신의 역할을 다시 확실히 한 셈이다.

20, 30대를 위한 ‘여성만화’는 이와 따로 자신의 길을 찾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풍경이다. 20대 여성들의 직장생활과 섹스, 삶을 만화장르로서 수용하는 일본의 레이디스 코믹스(Lady’s Comics)와 같은 흐름이 한국에도 등장하는 것이 좀더 자연스러운 일일 터이다. 결국 ‘순정만화’라는 이름은 이제 ‘여성들이 보는 만화’를 총칭하지 못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분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여성만화’를 표방한 잡지 <나인>의 폐간 이후 성인 여성잡지를 표방한 <오후>(Owho)의 창간(2003), 그리고 25∼30살 여성을 타깃으로 했음을 천명한 <허브>(Herb)의 창간(2004)이 이러한 변화한 지형도를 대변하고 있다. 창간 1년 뒤 폐간된 <오후>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경직, 축소된 만화시장이 그걸 녹록하지 않게 만들고 있지만 말이다. 더구나 30대에 만화를 읽는다는 게 어디 한국에서 평범한 일이겠는가? 선보는데 다음과 같이 말할 자신이 있는 사람이 어디 많을까?

남자: 취미가 뭔가요?
여자: 만화 보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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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 축사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 축사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

그는 멋있게 산다는 게 무언지 아는 사람 같다.
멋있게 살기 위해선 단지 세 가지만 필요하다.

첫째. 상상력...
둘째. 그 상상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배고픔과 함께 할 용기...
셋째. 당장 그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속시킬 만큼 미련할 정도의 노력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

단지 그것만 있으면 되는데....
단지 그것만 있으면 되는데....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 뿐이다. 간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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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깨달음,묵상]묵상이 힘든 이유... 추천 : 0

씀을 통해서 지성소로 나아가 주님 존전에서 내 실체를 보여드리며 피조물로서 살아갈 바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장이 묵상입니다. 귀한 시간이니 만큼 실천과 결과가 수월하면 좋을텐데, (적어도 제게 있어서) 묵상은 항상 힘이 듭니다. 벌써 십 여 년, 말씀묵상을 해왔으니 '묵상의 프로'가 될 만도 한데, 묵상에 들어가면 항상 처음 같습니다. 궁금하고 부끄럽고 부담스럽고...

 

그런데, 얼마 전 교회 남선교회에서 청계산 산행을 한 후에 말씀묵상이 힘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조금은 알았습니다.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들에 무리가 갔는지 근육통이 왔거든요..^^

 

묵상은 하나님으로 부터 기독교인다운 관점을 받아 그것을 실천하는 훈련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인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전에는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한 근육의 존재를 새삼스럽게 인식하고 그것을 단련할 필요를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즉, 사용하지 않던 영적근육을 묵상이라는 자극을 통해서 움직여야 하니까 힘이 들게 되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영적훈련은 육체훈련과 흡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고된 육체훈련을 하고 나면 삭신이 쑤시 듯, 영적인 훈련을 제대로 하고 나면 매우 힘이 듭니다. 하지만 산행 후의 육체적 고통이 상쾌함을 동반하듯, 영적훈련의 어려움은 우리의 삶에 깊고도 상쾌한 관점과 가치를 제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묵상이 힘들어도 우리가 묵상을 포기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인 국가대표 운동선수 조차도 훈련이 쉽다고 말하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훈련이 어렵다고 포기하면 선수가 아닌거죠. 크리스천의 영적훈련도 마찬가지로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포기하면 영적전쟁에서 패전병이 되겠지요.

 

묵상을 제대로 한다면 부담감이 생기고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힘들어도 그것을 통해서 내 자아가 죽고 주님의 관점이 산다면 우리가 그 과정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말씀 묵상.. 힘들어도 포기하지 맙시다^^

(유난히 말씀묵상이 잘 안되서 죄송스러운 2004년 4월 봄날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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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목사(1879-1944)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순교자 소양(蘇羊) 주기철목사는 산정현교회의 빛나는 보석과 같은 신앙의 선열이다. 특별히 일제의 탄압 속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순교하다.
1879년 11월 25일 경남 웅천에서 태어났다.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연희 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눈병으로 중퇴하고, 1926년 장로회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일제의 말기 궁성요배를 비롯하여, 국민시암송, 일본 신사참배 등을 정면으로 규탄 반대하다가 여러차례 투옥당했다.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였다. 산정현 교회 시무시 마지막 양심의 보루로 남았던 장로교마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고 가결하자 일사각오의 설교를 통하여 주님 앞에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흘리셨읍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만 있을 뿐입니다"

목사파면의 위협 속에도 굴하지 않고 강단을 지키다가 40년 7월 다섯번째 검속되어 황실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 이란 죄목으로 10년 징역형을 선고 받은 후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렸다. 끊임없는 고문과 형편없는 옥중 음식에 병이 들어 병감으로 옮겨진 후 1주일만에 그는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라는 마지막 기도를 남기고 1944년 4월 21일 수감돼 있었던 평양 형무소 병감에서 49세의 일기로 순교하였다. 국가에서는 1968년 7월 9일 애국 선열의 한사람으로 후대하여 동작동 국립묘지에 그의 유해를 안장시겼다.

 

소양 주기철 목사 약력


1897. 11. 25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부친 주현성 장로와 모친 조재선의 4남으로 출생
1906. 03. 웅천 개통학교 입학
1912. 웅천 개통학교 보통과 졸업
1913. 봄.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 입학
1916. 03. 23 평북 정주 오산학교 졸업
1916. 봄. 서울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입학
1916. 여름. 안질로 연희전문학교 중퇴하고, 웅천으로 낙향
1917. 가을. 김해 안기영의 4녀 안갑수와 결혼함
1917. 웅천에서 교남학회 조직
1919. 웅천교회 집사 피택
1919. 04.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웅천 성내리 만세사건 행동책으로 참가하여 1개월간 경찰서에 구류
1919. 10. 25 장남 영진 출생
1922. 03. 평양 장로회 신학교 입학
1922. 11. 05 차남 영만 출생
1922. 겨울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무함(1925년 9월까지)
1925. 01. 09 3남 영묵 출생
1925. 02. 22 평양 신학교 19회로 졸업함
1925. 겨울 목사안수 - 부산초량교회 시무(1926년 1월 위임목사)
1927. 11. 13 4남 영해 출생
1928. 제24회, 제25회 경남노회 부노회장 역임
1928. 3남 영묵 병사
1929. 경남노회에서 주목사 주도로 신사참배 반대결의
1930. 03. 05 장녀 영덕 출생
1930. 제28회 경남노회 부노회장 역임
1931. 07. 마산 문창교회 부임
1931. 경남노회 제31회 노회장으로 피선
1932. 03. 18 4남 광조 출생
1933. 05. 16 안갑수 사모 급서(당34세)
1934. 08. 부친 주현성장로 별세(향년81세)
  1935. 5. 금강산 은정리 장로회 목사 수양관에서 “예언자의 권위” 설교
1935. 가을 오정모 집사와 재혼
1935. 12. 평양장로회 신학교 사경회 마지막날 “일사각오” 설교
1936. 주목사 장모 안부인 별세(향년 74세)
1936. 07. 평양산정현교회 부임
1937. 09. 05 신축 산정현교회 입당예배
1938. 02. 평양신학교 장홍련사건으로 신축 산정현교회 헌당예배 직전 제1차로 검속당함
1938. 06. 이유택, 김화식 목사와 함께 묘향산에서 금식기도
1938. 06. 30 일본기독교회 의장 도미다만 목사 평양에 와 산정현교회에서 신사참배 계몽강연
강행하다가 주목사와 새벽 4시까지 토론 격전이 벌어짐
1938. 08. 제27회 장로회 총회 직전 제2차로 검속당한 후,
1938. 08. 의성 농우회 사건에연루되어 의성경찰서로 압송되어 7개월간 구금됨
1938. 09. 10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신사참배 찬성결의
1939. 02. 04 의성경찰서에서 석방
1939. 02. 05 평양산정현교회에 돌아와 “5종목의 나의 기도” 설교
1939. 09. 평양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으로부터 해임시키고자 제3차 검속
1939. 12. 19 평양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주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처분결의
1940. 03. 24 평양산정현교회당 완전 폐쇄하고 목사관 사택에서 가족을 추방함
1940. 04. 주목사가 가석방되어 육로리 셋집으로 돌아옴
1940. 여름 제4차 검속
1941. 8. 25 평양경찰서에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2년 8개월간 유치당함
1944. 3. 31 4남 광조와 마지막 면회
1944. 4. 21 오후 4시 주목사와 오정모사모의 마지막 면회 후 밤9시 평양형무소 병감에서 순교
1944. 4. 25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
1947. 1. 27 오정모 사모 유암으로 소천
1950. 9. 주목사 장남 주영진 전도사 평남 대동군 김제면 장현교회에서 시무하다가 공산당에 의하여 순교
1990. 12. 21 주목사 3남 주영해 장로(신성북교회) 소천
1997. 4. 20 주목사 복권 및 복적

남은 유족은 차남 주영만(미국 거주), 4남 주광조 장로(서울 영락교회), 손자는 소룡, 소원, 소현, 승중, 소웅, 현, 원 등 7명, 손녀는 소희, 미경, 미혜 등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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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각오 (一死覺悟)

 

                            요한복음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동무에게 말하되 우리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 하더라』


요한복음 11장 16절은 나사로의 부생장으로 읽게 되다. 예수님 전도의 시기는 점점 끝나게 되고 십자가는 차차 가까워 오는 때 마침 사랑하는 친구 베다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그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급히 오시어 병고쳐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이틀이나 지체하는 중 나사로는 그만 죽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 형세이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다니를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올라가시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라 위험한 곳에 전진하는 제자들은 위구(危懼)한 생각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에 도마가 동무에게 이르되 우리들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고 부르짖었나니 이는 솔직한 도마가 위험 직전에 일사를 각오하는 말이다.

비판의 사람 도마도 사선(死線)을 넘어선 이상 창검이 족히 두려울 바 없는지라 후일의 도마는 과연 피사와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인도인의 창에 피를 뿌려 순교하므로 인도 교회의 터를 개척하였다. 그래서 7월 1일은 도마의 순교일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도마와 같이 일사 각오가 있어야 한다.


1.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


이제 위험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를 따라가려면 생명을 아끼고는 따라갈 수 없다. 도마의 생각에 금번 행차에는 위기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수난의 최기(最嗜)는 멀지 않은 장래에 닥쳐올 것을 직감(直感)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한 도마는 「우리도 또한 같이 죽자」고 일사를 각오한 것이다.

예수를 환영하던 한 때도 지금 지나가고 수난의 때는 박도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를 각오하고 나서라.

『무릇 나에게 오는 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의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저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그리스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들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신지라』(벧전2:21) 이 천지간 머리 둘 곳 없는 곤궁의 자취 사람들에게 쓸어버리우는 고독의 자취를 우리도 밟아야 하고 병자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의 자취, 도처에 핍박하던 곤고의 자취를 우리도 따라 나가야 한다. 망하여가는 예루살렘 성 하에 눈물의 자취! 겟세마네 동산의 피땀의 자취! 우리도 일보 이보 눈물과 땀방울의 자취 걸어야 하고 골고다의 흘리신 피의 자취, 우리도 이 피자취에 엎디어 이몸을 십자가의 제단에 드려야 한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십자가 각기 있으니 내게도 있도다. 성 도마의 일사 각오 인도 도상(印度途上)에 뿌리는 피!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를 따라 일사각오!


2. 남을 위하여의 일사각오


주님의 이번 베다니 행차는 한 사람 친구 나사로를 위한 모험이오, 마르다와 마리아의 간구에 응하여 수고하시는 것이니 남을 위한 모험이다. 이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의 일행도 남을 위한 수고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가서 함께 죽자』는 도마의 결심은 남을 위한 일사각오다.

예수의 일생은 순전히 남을 위한 일생이니 이 세상에 탄강하심도 남을 위하심이오 십자가에 죽으심도 죄인을 위하심이었나니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이라야 한다. 세상 사람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예수교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

살신애인(殺身愛人) 그 얼마나 숭고한 정신이며 그 얼마나 거룩한 행위이냐! 감리교 제 일대 선교사 아펜셀라 목사는 조선 감리교의 기초석이오 배제와 이화학교의 아버지다. 이보다 저의 최후는 더욱 고귀하였나니 마지막 전도 여행에 수증기선으로 남행하다가 그 배는 불행히 파선하였다. 자기는 일등실(一等室) 손님으로 구조를 받아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행자인 조선인 여학생을 건지려다가그만 죽어버렸다. 오! 이 얼마나 거룩한 죽음이냐! 남을 위하여, 일개 외국인 여학생을 위하여 만리 타국에 그 생명을 버리는 그 정신은 우리 조선 교회 역사상에 살아있고 그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빛나리로다. 더구나 그 아들 그 딸도 조선을 위하여 선교를 계속하고 있지 아니한가?

흑노 해방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아브라함 링컨의 아름다운 일생, 아프리카 개척을 위하여 몸을 드린 선교사 리빙스톤의 장열한 일생! 이는 다 남을 위한 제물이다. 남양군도와 인도와 중국의 선교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자 백이요 천이다. 이들은 다 예수의 정신을 계승한 희생이다. 당년 나사로를 위하여 일사를 각오한 도마는 후일 억만의 인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었도다! 숭고할거나! 도마의 일사각오! 오늘 우리에게도 남을 위한 일사각오.


3.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


주님 이번 베다니 행차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서의 모험이다. 주님이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벌써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애곡의 베다니었나니 주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인생의 비극을 눈물뿌려 곡하시었다. 기도와 함께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하여 천지도 놀라는 듯 나사로는 부생하였다. 아! 부활! 할렐루야! 영광일세.

나사로의 부생은 이적중 최대의 이적일 뿐 아니라 부활의 최대 교리를 산 사실로 보여주는 이적이오 또한 장래에 예수의 부활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래서 『너희들을 위하여 기뻐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믿게 함이라』(요11:15)고. 『이 말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사 람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함이라』(요11:42)고 예고한 대로 나사로는 부활하였다. 이는 주님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을 믿게 하는 큰 이적이다.

도마가 이번에 예수를 배종(陪從)하여 부활의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우리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함은 미리 안 것은 아니나 부활의 목도할 수 있는 일사의 각오라 할 수 있다. 후일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고 대오철저(大悟徹底)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라』고 증거하였다. 그런즉 도마는 나사로의 부생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는 동시에 신자의 부활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도마는 이 부활의 복음을 파사와 인도에 전하였다.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진리의 발명은 모두 희생의 결과 아닌 것이 없다. 아메리카 대륙이 인간의 복지되기까지 콜럼버스 이래허다한 항해자의 수고가 있었고 전기등이 우리 앞에 밝아지기까지에는 에디슨 같은 과학자들의 뇌고가 쌓였던 것이다. 陷之(함지) 死地面後生(사지면후생) 유사이생(有死而生) 죽음이 있는 뒤에 삶이 있다. 한신(韓信)의 배수진(背水陣)도 일사각오다. 일사각오 한 뒤에 승리가 있고 발명이 있고 살 길이 있다. 하물며 천래의 진리 부활의 진리라오. 내세를 부인하는 공산당 무리도 그 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늘 영생을 믿고 부활을 소망하는 신자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부활의 복음이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피로써 전지 우전하여 나려오는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하에 오십만 성도의 피가 흐르고 참 복음을 위하여 로마교 법왕 악형하에 백만 신자의 피가 흘렀다. 바디칸 궁중에 봉쇄된 성경을 개방하여 만민의 성경이 되기 위하여는 위크리프의 백골이 불에 타지고 틴달의 몸이 재가 되지 않았는가? 신학생 여러분, 제군의 읽는 성경은 피의 기록! 피의 전달이다. 신학을 말하므로 제군의 사명이 다 되는 것인가. 피로써 전하여 온 부활의 복음을 우리 또한 피로 지키고 피로 전하시이다. 일사각오 도마는 부활의 복음을 위하여 인도도상에 피를 뿌리었소. 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의 복음을 위한 일사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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