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시계는 여섯 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일곱 살, 초등학교 1학년 이었을 수도...기억이 정확하질 않네.)

내 첫 시계는 과묵하게, 어찌보면 수줍다 할 정도로 은근하게 손녀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시던
외할아버지에게 얽혀 있다.

나 살던 친가와 외가는 어린 걸음으로도 채 십 분이 안 걸렸다.
게다가 성질 급하게 언니 돌도 되기 전에 태어난 연년생 여동생 때문에
어려서 난 외가집에서 많이 자랐다.
조용한 듯 하나 꼬장꼬장한 외할아버지와 작은 덩치지만 성격 괄한 여장부 스타일의 외할머니는
종종 다투길 잘 하셨고, 시베리아 버금가게 찬바람이 쌩쌩 도는 집안 분위기가 진력이 나면
외할머니는 몰래 엄마에게 전화를 거셨다.
"승희 좀 올려 보내라~"
예닐곱 살 어린 나는 적십자 못지 않은 평화유지군의 역할을 등에 얹고,
그러나 본인은 그런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타박타박 외가로 놀러 올라갔고,
며칠이라도 좋게 입을 꼭 다물고 냉기를 뿜던 두 내외는 나를 사이에 두고 그냥그냥 자연스레
봄눈 녹듯 녹아내렸다고 한다.
그렇다고 두 분이, 특히 외할아버지는 손녀딸과 살갑게 놀아주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재주를 가진 분이 아니었다. 그저 이쁘다는 표현이 문갑에서 동전을 꺼내어 "과자 사먹으라."며
내어주는 정도.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서 또래 여자 아이가 손목시계를 차고 나타났다.
지금 기억해 보건데, 진짜는 아니고 문구점에서 파는 장난감이었던 듯 싶다.
여하간 분홍 시곗줄에 백설공주인지 신데렐라인지 디즈니풍의 공주 그림이 그려진 것이
어린 것들의 혼을 쏙 빼놓기 딱 좋았다.
한 번만 차보자고 말하고 있는데 외할아버지께서 지나가신 모양이다.
나야 뭐, 어릴 때는 좀 기운 없을 정도로 유순하고 소심했던 스타일이라 안 된다는 한 마디에
그냥 포기하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헌데, 지나가던 외할아버지는 뱃속이 시렸던 모양.
집 앞에서 도로 돌아, 시내의 금은 시계방에 가셔서 뭐였지.....지금 들어도 아.....싶은,
꽤 알아주던 브랜드의 아동용 시계를 하나 사들고 들어오셨다.

졸지에 시계를 받게된 나는, 정작 그때즈음 해서는 시계 욕심은 까맣게 잊은 지 오래였고,
게다가....ㅎㅎㅎ 외할아버지야 그렇다 쳐도, 시곗방 주인장도 너무 하지.
손녀 줄 건지 손자 줄 건지 물어나 봤어야 할 일 아닌가.
내 시계는 파란 시곗줄에, 화면엔 마징가 제트인지 로보트 태권브이인지가 용맹하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지금말로는 기공사, 틀니 기술자였던 외할아버지.
덧니가 나면 정말 커다란 마취주사를 맞고 덧니 옆의 생니는 에누리 없이 잡아 뽑혔다.
어이없는 방법이라 할 지 모르지만, 그 덕일까. 내 이의 2/3는 치열이 가지런하다.
그런데, 외할아버지께서 기운이 떨어져 더 이상 이를 뽑지 못했을 때 자란 오른쪽 아래 송곳니를 기점으로
보이지 않는 어금니 치열은 어이없을 정도로 엉망진창.

증조할머니, 친할아버지, 외할아버지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아가신 게 나 고3때였다.
감정도 메마르고 눈물도 메말랐나.....그렇게 눈물 많은 내가, 말간 눈으로 앉아 있는 걸 보고
외할머니는 은근히 서운해 하셨다.

당시에 실컷 울었으면, 떠올리면서 눈물이 안 날 수도 있을텐데......
시계 얘기에 묻어 온 외할아버지 추억에, 식전 댓바람부터 때아닌 눈물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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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9-20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이야기네요.

물만두 2006-09-20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이 있어 좋은 가을입니다.

반딧불,, 2006-09-20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이제사..

책읽는나무 2006-09-20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제사 철이 드셨군요...ㅡ.ㅡ;;
저도 고등학교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그땐 그리 슬프다는 생각을 못했었는데...나이 삼십이 넘어 혼자 되신 우리 시아버님을 뵈면 어렸을적 홀아비로 오랫동안 혼자 사시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생각이 나 이제사 눈물이 종종 나올라고 하더군요.
님의 얘기를 들으니 님의 슬픔이 애잔하게 느껴지네요.

가을산 2006-09-20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진우맘님이 보셨던 그 시계가 제 마음도 홀딱 빼간 그 시계랑 같은 시계 같은데요?
 

 2006. 9. 19. - 올해의 25번째 책

★★★★★

제일 좋아하는 책 명단에 스즈키 코지의 '낙원'이 들어있는 이유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기교,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 엄청난 간극을 <딸깍> 하고 맞물리는 놀라움 때문이다.

온다 리쿠의 이 작품도 유사한 재미를 준다. 하지만, 잔 재미가 더 쏠쏠한 대신 <딸깍>의 느낌은 덜하다. 특히 네 번째 장은, 집중하지 않고 읽었더니 조금 산만하더라. 책 속 <삼월>의 4부도 그런 느낌이라더니....온다 리쿠의 영리한 의도인가?

여하간, 아영엄마님, 땡큐~ 다른 작품도 계속 찾아 읽을만큼 중독성이 생기는 작가임에 확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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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9-2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즈키 코지 아직 제가 못난 작가네요. 하긴 못 만난 작가가 어디 한둘이겠느냐만요. 흑
저도 곧 만나러 가야죠

진/우맘 2006-09-20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바람님> '링' 시리즈의 작가예요. '링'은 읽어보지 않으셨나요? ^^

물만두 2006-09-20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깍~ 그런 느낌이 드는 작가를 만난다는 건 행운이죠^^

아영엄마 2006-09-21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다 읽으셨군요. 저는 최근에 <밤의 피크닉>을 샀답니다. ^^
 



전호인님, 요즘 뜸하시네요.

지난 번 지붕이 너무 고상하다고...ㅎㅎ, 좀 더 밝고 경쾌한 걸 원하신 듯 한데,

이런 이미지는 어떠신가요? ^^

- 고객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철저한 사후 서비스, 서재지붕관리공단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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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9-1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서재 지붕 너무 예버요 어쩜 저렇게 예쁜 걸 만드셨나요?

전호인 2006-09-16 1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룬 이제야 들어왔답니다. 이렇게 감사할 수가 있나.
너무 바쁜 시간을 보냈는 지라 이곳에 들어올 여유가 없었답니다.
고맙게 개량하겠습니다. 꾸벅 ^*^

근데 서재타이틀이 보이질 않습니다.

진/우맘 2006-09-18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 ㅎㅎ 맘에 든다고 승인해주심, 그때 제목 박아드리려고 했죠.^^
하늘바람님> 히....제가 만든 건 아니구요, 전 주로 엠파스 스킨이나 편지지를 훔쳐다가 뚝딱뚝딱....저작권에 걸리려남? ^^;;;

2006-09-22 16: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진/우맘 2006-09-22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닥님! 거 참, 그런 건 안 갤챠줘도 되는디!!!!! ㅡㅡ;;;;;;
 



가을을 타서 기분이 늘어질 땐 말유, 지붕 공사가 최고 명약이라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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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엄마 2006-09-16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치.. 나는 안 만들어주구!! 하고 삐쳐있던 참이라구요~~. 고마워요. (__)

아영엄마 2006-09-16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옵션에 들어가서 임시 파일 삭제 했는데도 지붕이 안 바뀌어요. 와 그라지?? (알라딘에서 지원하는 건 되는디..) ㅡㅜ

전호인 2006-11-28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스모스가 멋져요 ^*^

진/우맘 2006-09-18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 코스모스죠? ㅎㅎㅎㅎ
아영엄마님> Ctrl+F5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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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09-16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stella.K 2006-09-1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멋있군요. 고맙습니다. 일단 모셔갑니다.^^

전호인 2006-09-16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정성이 대단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