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 그들이 선택한 것은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는 작자라면 나의 친구가 될 수 있다...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상실의 시대)"같이, 지극히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방식으로 도시에서의 불안감과 청춘의 허기를 달래는데, 바로 이 점이 가장 하루키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도시적이고 감각적이라고 불리우는 하루키 소설은 문화적 기호 혹은 문화적 할부의 소비와 연관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할부란 무엇인가? 그것은 헤어지는 형제 또는 연인, 동지가 먼길을 떠나기 전날 반씩 쪼개어 갖는 거울이나 금속붙이며, 훗날 서로를 알게 하는 징표가 아닌가. 낯선 두 젊은이가 절친한 친구가 되는 데는, 할부처럼 내어보인 피츠제럴드라는 기호밖에 아무것도 없다. 자기 또래의 젊은이들이 모르는 지나간 시절의 작가를 할부로 삼았다는 데서 두 사람의 엘리트 의식이 불거지긴 했지만, 다른 많은 젊은이들 역시 암호와 같은 문화적 할부를 은밀히 내어 보이는 비교의례를 통해 이합집산을 거듭한다. 과장이 아니라, 현대의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 전체를 할부를 발견하거나 만드는데 바친다. 이들이 친구가 되는 것은 꼭 이데올로기가 같거나 삶의 지향점이 같아서일 필요가 없다. '나는 비틀즈를 좋아한다. 너도 비틀즈를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다'라도 말하게 해주는 것이 현대의 할부모 문화적 할부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기호시대의 청춘과 문학> 중
낮에 사진을 올린, 제가 마구마구 밑줄을 그으며 더럽힌 페이지의 일부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서재지인들이 떠오르더군요. 할부...카드 할부가 아닌, 쪼개어진 내 거울의 반쪽. 서재지인들과는 서로서로, 저 수많은 할부를 나누어 가졌으니까요. 오늘도 앤티크님과 <Perhaps love>라는 할부를 맞춰보며 좋아했고, smila님의 <현명한 부모는 아이를 느리게 키운다>라는 코드를 보고 달려갔다가 책나무님까지 셋이서 조각 맞추기를 했지요. 어제 올린 <비처럼 음악처럼>을 보고는 잽싸게 뛰어 온 마태우스님이 "저도 이 노래 좋아하는데!"하며 각자 품고만 있던 작은 조각이 들어맞는 것을 기뻐했구요. 내 머리속에 쌓인 지식, 경험, 추억...그런 작은 편린들의 짝을, 다른이의 공간에서 찾아내는 기쁨. 그것이, 내가 서재에 붙어있는 몇 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자, 품 속의 깨어진 조각을 꺼내보세요. 그리고 저랑, 맞춰 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