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밸런시 로망스 ㅣ 그린게이블즈 앤스북스 9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김유경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1월
평점 :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공간은, 통나무로 만들어진 오두막이다. 장대비가 내리면... 방음판넬 따위는 끼어들 틈이 없었을 그 자연의 집은, 온 몸으로 빗소리를 전한다. 바깥은 으슬으슬 춥고 습하지만, 벽난로가 있기에 실내는 전혀 눅눅하지 않고 보송보송하다. 아, 그런 오두막에서 눈을 떠 볼 수 있다면!
두고두고, 숨겨 둔 과자를 꺼내 먹듯이 상상해 온 그 환상의 공간이, 여기 한 권의 책에서 재현되었다. 밸런시 로망스! 빨간머리 앤의 바로 그 저자,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로맨스 소설이다.
주인공 밸런시의 푸른 성, 미스타위스의 오두막집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이 벅차 견딜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나의 은밀한 꿈 속을 이리도 완벽하게 재현해 낸 것인지! 나만의 것이라 여기던 그 환상은 어쩌면 모든 소녀들이 한 번씩은 꿈꾸는 그것인가보다. 그리고, 그 공통분모를 모으고 걸러서 이렇게 결 곱게 펼쳐주는 것...그것이야말로 작가 몽고메리의 진정한 역량 아니겠는가?
여하간에 그 행복한 오두막에는 사랑하는 남자 - 완벽하게 통나무집과 어울리는 강한 매력의....부르르 - 까지 구비(?)되어 있는 것이다! 오...맙소사.
밸런시가 미스타위스에서 보낸 행복한 시간들의 기록은 독자가 미처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꿈과 환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행복한 순간을 유독 탐하는 나같은 사람도 배불리 즐길 수 있는 그 충만한 기쁨들은, 모든 희망이 거세된 삶....말 그대로 죽음만큼 아득한 삶을 탁월하게 묘사해 낸 도입부를 딛고 한결 아름답게 빛난다.
그 행복의 기록이 너무도 압도적인 매력을 발산하기에, 후반부의 약간 성급한 듯한 전개나 상투적인 결말도 다 덮어 용서할 수 있었다.
잠깐, 상투적이라니? 원전(原典)에게는 상투적이라 말할 수 없는 노릇. 그 숱한 <상투적인> 로맨스 소설들은 모두,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책들에서 뻗은 가지가 아니던가?
밸런시 로망스를 만난 시간은 너무, 너무, 너무 달콤했다. 이제껏 읽었던 로맨스는 모두 잊겠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내게 있어 로맨스는 <밸런시 로망스> 하나다!
ps. 권말에는 <예기치 못한 결혼식>, <미시의 방>, <속죄>, <신부의 장미> 등 네 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예상하지 못한 덤이라 당혹스러웠지만, 짧은 가운데에도 작가의 재치가 순간 순간 엿보이고, 작품의 배경이 된 시대를 넘어다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괜찮은 읽을거리들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