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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나무' 아래서
오에 겐자부로 지음, 송현아 옮김, 오에 유카리 그림 / 까치 / 2001년 10월
평점 :
절판
상상을 해봅니다. 10여년 후, 우리 딸아이가 엄마의 서재 책꽂이 앞에 서 있습니다. 우연히 '나의 나무 아래서'를 뽑아들게 되고, 읽기 시작합니다. 학원에 가야 하는 것도 잊어버린채 몇 시간 동안 꼼짝 않고 다 읽습니다. 책을 덮은 후, 휴~ 한숨을 쉬고는 가슴에 꼬옥 끌어안습니다. 문득 생각난 듯 제 방에서 연필과 종이를 들고 와서는, 엄마에게 물어볼 질문의 목록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오에 겐자부로님은 읽고 싶지만 지금은 어려울 것 같은 책은 목록에 적어놓거나, 여유가 있으면 구입해서 '나중에 읽을 책 궤짝'에 넣어놓는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 책을 '아이에게 나중에 읽힐 책 궤짝'에 넣어두고 싶습니다. 위의 상상에서처럼, 제가 직접 권하지 않고도 아이가 이 책을 '발견'해주면 더욱 좋겠지만요.
읽는 내내 예전에 할머니가 자주 쓰시던 '자분자분'이란 말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사투리인줄 알았더니 침착하고 얌전한 모양새던가? 사전에 나와 있는 말이더군요. 하지만 할머니가 자주 쓰시던 상황을 떠올려보면, 대개 '차근차근, 조리있게, 또 작고 부드러운 목소리로'라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점잖은 할아버지 한 분이 '자분자분'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을 듣고 있는 듯 했습니다. 충분히 생각하며 인생을 살아온 작가의 '경륜'이 매 순간 느껴지고, 밑줄을 긋고 싶을 정도로 주옥같은 문장들이 군데군데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옥에 티라고나 할까요...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 추측되는 아귀가 맞지 않는 문장도 보입니다. 원작을 충분히 이해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 그럼에도 번역하면서는 자신의 냄새가 묻어나지 않게 철저히 사념을 버려야한다는 점. 모순되는 두 원리 가운데 역자는 후자에 신경쓰느라 전자에는 충실하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되는군요. 비슷한 의미에서 역주를 아꼈다고 역자 후기에서 밝히고 있지만, 저같이 일본어를 배워본 적이 없는 사람은 추측도 해볼 수 없는 일본어에도 일언반구 설명이 없는 것은 너무 과했다고 생각됩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의 청소년들을 위해 쓰신 글이라고 했지만, 성인인 저에게도 많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린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란 없다'라고 하셨는데요, 성인들도 강한 의지만 뒷받침된다면 어떤 일들은 꼭 돌이킬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