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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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다지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한 나이 한 나이 먹어가면서 <인연>이라는 것을 점점 더 믿게 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서서히 소소한 것에까지 옮아간다. 신접살림 준비하다 마주친 장롱을 쓸어보며 나는 <인연>을 느꼈고, 마치 우리를 위해 준비된 듯 오롯이 매물로 나와 있던 지금의 집에서도 <인연>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 <성에>를 펴들고 처음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도 그 <인연>이 느껴졌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오늘 밤을 지새우게 될 것이라는, <운명>도 함께. 책 한 권에 뭐 거창하게 인연이고 운명이냐고 할 지 모르지만, 이 책에 작용하는 그것들은 그리 어마어마한 것은 아니다. 과거 다른 책 몇 권에도 작용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드문 드문 맞닥뜨리게 될 작은 인연, 소박한 운명인 것이다.

혹자의 말마따나 김형경의 글은 읽는이를 꽉 조여온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에서 그랬다. 몇 페이지에 걸쳐 이어지는 긴 긴 나레이션은, 특별한 재미가 없었음에도 책장을 덮지 못하게 온 몸을 압박해 왔다. 그런데 <성에>에서는 그 포옹이 좀 달라졌다. 좀 더 노련해졌다고나 할까? 책은 사뭇 흥미진진한 미스테리를 품고 자유자재로 화자를 바꾸는 기교를 부리며 나를 안았다. 다만, 가끔 지나치게 유려한 언어를 구사하려 애쓴 나머지 과잉을 느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시키고 말겠다는 듯 늘어지는 설명에 지치는 대목도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그것은 그냥 과잉이나 피로가 아니라, 작가가 이 이야기에 거는 열정이라는 코드로 다가왔다. 결국, 그 뜨거운 노력마저 좋아하게 된 것이다.  

<성에>가 계속 납득시키려 한 것은 <사랑>과 <환상>에 대한 것이었다. <사랑의 환상>, 혹은 <환상으로서의 사랑>. 그녀가 이야기 하려는 환상에 대한 견해는, 많은 부분 나와 일치하여 반가웠다. 나도 그렇다. 내가 자주 잠겨드는 백일몽이, 삶의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간간히 느꼈다. 현실은 매번 환상에 관여하여 그 가지를 이렇게 저렇게 키우며 즐거워 하지만, 환상은 현실에 아무런 작용도 하지 않는다. 내가 품은 환상의 그러한 면모를, 나는 언제나 다행이라 여긴다.  

그러한 환상의 영역과는 별개로, <사랑>에 대해서는 한결 많은 것을 배워가는 것 같았다. 머리 속에 모호하게 스며 있던 사랑이라는 추상 개념이, 속속 선명한 활자로 나타나는 것은 생경하고도 아린 경험이었다. 책을 덮고 나면 모든 종류의 사랑에 한결 더 예민하게 반응할 것 같다는 그 예감은, 충만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불길했다.

그런데....그것이 아마, 포르노그라피로 키워 온 남자의 사랑과 로맨스 소설로 키워 온 여자의 사랑, 그 사이의 간격에 대해 두 번째로 이야기 할 즈음이었을 것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이 책도, 아직 채 자라지 못한 나에게 던져진 또다른 로맨스 소설이 아닐까.... 그리고, 곧 이 문장을 만나면서 유리창에 끼었던 성에가 녹듯, 잠깐의 격정이 사라졌다.

생애 전반에 걸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환상을 주었어.

그래. 내가 하룻밤, 책 한 권에 무어 그리 많이 깨달았단 말이냐. 사랑이고 환상이고 별거냐. 그저, 그런 환상 하나 품거나, 누군가 품은 환상의 실체가 되어, 그리 살아내면 되는거지. 작가가 마지막으로 힘을 짜내어 토해내는 그 말, 사랑에 대한 환상을 이루거나 깨려 하지 말라는 충고를, 나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단 말이다.

<성에>의 품에 안기어 뒤척인 이 시간,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없지만.... 내 영혼은 하룻밤 사이 한결 더 지치고, 노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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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아 2004-04-18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은 책 소개네요. 저도 한 번 읽어봐야 겠어요.

진/우맘 2004-04-19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쓰고 나서 계속, 감정과잉이 심한 글이라고 부끄러워하고 있지만....사실, 저 과잉된 글도 제 감흥을 다 담진 못했습니다. 책 자체보다, 책이 끌고들어오는 상념들이 더 좋은 책입니다. 꼭 보세요.^^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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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 개운하다. 만화책 아닌 그냥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키득거린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호어스트와 함께 한 일주일, 월-화-수-목-금-토-일.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다>라는 모호한 공통분모 하에 묶인 이 이야기들은, 원래는 시기가 뒤섞인 제각각의 이야기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만큼 매끈하다.

호어스트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십년 전만해도 그에 대해 표현하자면 <백수>와 같은 부적절하고 품격 없는 말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한국에는 딱 호어스트를 위해 생성된 것 같은 고상하고 근사한 표현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귀차니스트>! 아, 왠만한 귀찬내공으로는 이 초절정 고수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그가 어느 정도의 고수냐고? 그로 말할 것 같으면, 저승 문턱 너머까지 걷기가 귀찮아서 죽지도 못한 인간이다. 그래놓고 <절대절명의 순간 게으름이 내 목숨을 구했다>고, 적시에 구사하는 건강한 무기력은 황금이라고 떠벌이는 밉잖은 허풍꾼이다. 그리고 처리해야 할 일을 메모해서 붙이는 이외의 시간에 호어스트의 머리 속은 지치지도 않는 <쓸데없는 공상>으로 바삐 돌아간다. 그 공상 속에서 그는 브뢰첸(무슨, 빵이란다)과 부적절한 관계에 놓이기도 하고, <호어스트, 오늘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배> 결승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최근 <여자는성공남을좋아해>등의 강력한 신인을 영입해서 더욱 위협적인 <호어스트, 정신차려>팀과 <내일도 날>감독이 이끄는 만년 우승팀 <맥빠져>팀의 승부는 월드컵 결승전을 방불케 한다! 하긴, 이런 <쓸데없는 공상>들을 읽으며 전세계 많은 독자들이 배꼽을 잡고 있으니...이것은 이미 <쓸데가 아주 많은 유용한 공상>이 된 것인가?

사실, 월요일의 호어스트와 조우하며 배꼽을 잡은 이후 화요일과 수요일은 그닥 즐겁지만은 못했다. 호어스트의 활약은 계속되었지만, 이 수많은 에피소드를 꼭 외워서 써먹어줘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사오정 시리즈>나 <최불암 시리즈>를 능가하는 <호어스트 시리즈>를 구사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목이 뻣뻣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귀차니즘에 은근슬쩍 편입해서 그저 행간을 따르며 유유자적 낄낄거리기로 결정하고 나자 책읽기의 즐거움은 금방 배가되었다.

흐음...철학의 나라 독일에서 날아온 이 책을, 그냥 우습다고 날로 삼켜도 되는 것일까? 하는 고민도 잠시 있었다. 책 속에는 시간과 성취, 즉 일에 얽매여 삶을 누리지 못하고 삶에 지배당하고 있는 현대 사회인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녹아있는 것 아냐? 이런 걸 멋있는 말로 어떻게 정리할 수 있나....에이, 귀찮다, 그따위 <교훈>.^^ 조금만 더 고민하면 깨달아질지도 모르지만, 그 <교훈>보다는 호어스트와 함께 느긋하게 웃은 이 시간이 몇 배 더 가치있다.

오랜만에 얇고도 알찬 책을 만났다. 대개 이 정도 분량의 양장본을 읽고 나면 <이건 사기야, 함량 미달의 글을 책이랍시고 엮어 고가에 팔아넘기다니!>하고 투덜거리기 일쑤인데,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에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작은 사이즈, 얇은 두께... 볕 좋은 요즘, 어느 공원 벤치에 앉거나 풀밭에 자리를 펴고 누워 읽으면 딱 좋겠다.

참! 이 책을 읽으려고 하시는 분들께, 귀차니즘에 빠져 *가 붙어 있는 역자 주를 찾아보지 않고 건너 뛰는 우를 범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 역시 특별히 찾아 읽지 않아도 되겠기에 모조리 건너 뛰었는데, 마지막에 주석이 모여있는 페이지를 살펴보니 상황이 이렇다.

노이쾰른 :  베를린의 한 지역. 소문보단 낫지만, 그래도 뭐랄까....

놀겐도르프 광장 : 아무도 이 곳에 대한 책을 쓰지 않음.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 우리 두 사람은 자주 혼동됨. 그 자가 그사이 몸이 좀 불었나?

미국 : 설명할 방법이 없음.

맙소사... 이 엉뚱한 주석들과 함께 했다면, 두 배는 더 웃을 수 있었을텐데!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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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4-15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이 오랜만에 흡족한 책을 만나는데 제가 방해 세력이 될뻔 했군요. ^^;;;; 일단 읽어보실만 하다고 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네요. 암튼...다행임다. 뭐, 사람마다 감상이 다른거야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

진/우맘 2004-04-15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책도 <인연>이 닿아야 하나 보지요. 시기상, 마냐님은 <내가 전부터 말했잖아>를 읽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잖아요. 저는, 오랜만에 가뿐하고 즐거운 책을 만났거든요.^^
 
루브르는 프랑스 박물관인가 - 문화재 약탈과 반환의 역사
이보아 지음 / 민연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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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글쎄, 나는 이 책에서 무엇을 바란 것일까. <재미>일까, <지식>일까. '문화채 약탈과 반환의 역사'라는 자극적인 부제에서, 나를 뭔가 후끈하게 달굴 수 있는 <꺼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책은 <재미>와 <지식>으로 양분해 볼 때 <지식> 쪽으로 더 치우쳐 있다. 서문에서 이 책의 모태가 몇 편의 논문이라는 얘기를 할 때 조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그 불안은 근거가 있었던 것. '박사 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학술적 논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박물관과 문화 유산에 관심 있는 일반 대중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형식으로 재구성'했다고 하는데...글쎄, 엘긴 마블스에서 이집트 문명으로, 히틀러에서 법정을 뒤흔든 문화재 반환 사건, 혹은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으로 두서 없이 왔다갔다 하는 글들은, 일관성이 좀 떨어져서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맨 뒤에 모아져 있는 주들도 찾아 읽기 귀찮았고.^^ 아무래도, 나같은 범인 보다는 문화적 소양을 조금 더 갖춘 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히틀러의 문화재 약탈에 대한 내용은 상당히 흥미진진했다.(흥미진진하라고 쓴 얘기는 아니겠지만.-.-) 역사에 길이 남을, 나폴레옹을 능가하는 문화재 약탈가라....히틀러, 정말이지 카리스마가 대단한 사람이다. 외규장각 고문서 반환 사건을 정리하면서는 잠시 발끈, 하기도 했다. '양도할 수 없는 프랑스 국민의 재산을 한국 대통령에게 넘겼다.'니...도대체 언제부터 조선의 서책이 프랑스 국민의 재산이 되었나? 관리 능력도 떨어지고 관광객의 발걸음도 뜸한 후진국에게 문화재를 돌려주는 것은, 세계의 문화인들에게 문화재 감상의 기회를 빼앗는 처사라고? 허허.... 그런 사람들이 남의 나라 서책 표지도 거꾸로 박아 놓나? 우리 나라가 비행기가 없어 차가 없어! 있어야 할 문화재가 남의 나라에 가 있으니 관광객이 없는 것이지, 반환만 되면 못 올 것은 또 뭐냐! 강대국들의 소행은, 정말 '내 것도 내 것이고 네 것도 내것'이라는 말로 밖엔 표현이 안 된다.

글을 쓰다 보니 뭔가 감이 온다. 내가 이 책에 몰입하지 못하고 겉 돈 이유. 책은 시종일관 객관적인 입장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물론 문화재 반환의 타당성을 들기는 하지만,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이유들을 열거한 후에 조심스레 내리는 소심한 결론 정도이다. 진정 일반 대중의 입장에 섰다면, 저자가 잠시나마 함께 분개해 줬어도 좋을텐데. 그 수 많은 사료와 자료들을 공부하고 당신이 판단하시오, 가 아니라, '내가 잘 아는데, 이건 잘못된 일이야~ 필히 반환 되어야지 무슨 쏘리!'하고 한 마디만 해 줬다면 책 읽기가 훨씬 신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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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첵 필립 K. 딕의 SF걸작선 4
필립 K. 딕 지음, 김소연 옮김 / 집사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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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필립 K 딕이란 이름을 처음 듣게된 것은 베르나르 베르베르로부터 였다. 존경하는 작가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필립 K 딕의 상상력을 존경한다고 했다. 세상에, 상상력이라면 베르베르를 따라갈 자가 또 있는가? 그런 작가에게 인정받는 작가라니! 놀라운 마음에 자료를 뒤져보니, 필립 K 딕을 아직도 모르고 있었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음....꽤 유명한 작가였군.^^;) 마침 영화 덕에 한층 유명세를 탄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구해 읽었다. 와, 머리 속에 폭탄을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정말! 이런 상상력도 존재하는구나!' 그 한 권에 홀딱 반해 팬이 되기로 작정한 것 치고는 다른 작품을 구해 읽는 것이 꽤 늦어졌다. 그런데, 이 작가의 상상력....첫 인상은 강렬하지만, 그것이 매번 같은 강도로 다가오지는 않는 것 같다. 작품의 스타일이 너무도 뚜렷하고 확고해서일까? 디스토피아인 미래세계, 시간여행, 기계와 인간....그런 고정된 분위기 때문에 사뭇 다른 소재와 다른 줄거리도 마치 전에 한 번쯤 본 것만 같은 기시감이 느껴진다.(하긴, 내가 필립 K 딕을 알기 전부터 각종 문학과 영상이 이 작가를 울궈먹었을테니....)

대표 단편인 <페이책>은, 이제껏 듣거나 본 시간여행에 대한 이야기들 중 가장 신빙성이 있고 현실감이 있다. 하지만 기대했던 것 보다는 반전이 좀 약했다. <황혼의 아침식사>와 <작은 도시>는 마치 예전의 인기 외화 시리즈 <환상특급>을 보는 것 같아 반가웠지만, 역시 그다지 놀라운 결말은 아니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과 <안정성>은 시간과 발전이라는 것에 대해 새로운 방식의 사고를 시작하게 했지만, 역시 별 재미는 없었고.

글쎄, 내가 필립 K 딕에게 계속 자극적인 반전의 말초적인 재미를 느끼고 싶어한다는 사실 자체가 좀 잘못된 것 같다. 이 작품들은 모두 50년 전에 쓰인 것들인데, 50년 전에 예견한 미래사회 이야기를 읽으면서 반전과 재미를 찾다니...^^ 그런 즐거움은 첫 작품에서 맛 본 것으로 만족하고, 앞으로는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진중한 메세지가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내 기대가 원체 컸던 것이지, 작품이 별로는 아니라고 변론하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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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이우일 그림 / 창비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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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보통 이상의 문학적 소양을 지닌 인간>이 되려고 애써왔다. 그런데, 역시... 아직은 먼 길인가보다. 김영하, 이 멋지고도 유명한 작가를 이제서야 알게 되지 않았는가! 평소 단편 소설은 무게감이 덜하다는 이유로 회피해 온 나에게, 엄청난 위력의 일격을 남긴 작품집이다. 머리 나쁜 나... 대부분의 단편소설집은 다 읽고 난 후 목차를 보면, 제목만 보고 내용을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김영하는 달랐다. 읽은 지 몇 주가 지난 지금도, 제목만으로 단편 하나하나가 머리 속에서 와글와글 떠들어댄다.

아빠는 아버지가 갖춰야 할 모든 것을 안 갖춘, 그야말로 나쁜 아빠 종합선물세트 같은 인간이다. ---p49

ㅋㅋㅋ. 그랬더냐? 이 책은, 빛나는 기지와 멋진 문장의 종합선물세트다!

"여자들을 위하는 문학을 하렴. 그럼 일생이 평탄할 거야. 여자는 아름답게 그려주고 남자들은 죽일놈들로 만들어. 그럼 아무도 널 미워하지 않을 거다."-p30  /  그러니까 술주정뱅이에 고발꾼인 아빠와 그 아빠를 작신작신 두들겨 패는 택배회사 직원인 아들, 그 아들의 미성년자 동거녀, 건설현장의 함바집 아줌마, 마지막으로 그 아줌마의 전남편이 탐내는 교복의 주인인 중학교 1학년짜리 소녀가 야유회를 간다는 거다. -p 61  /  "남자들이 왜 기를 쓰고 성공하려는지 알아?" "몰라요?"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서야." -p108  /  "미안해, 난 입만 열면 개구리가 나와."-p 117  /  야 임마, 냉소적인 인간이 함부로 진지해지면 큰일나. 갑자기 인생이 정색을 하고 달려들거든.-p120 

그의 작품 속 구석구석에는 꼭 외워뒀다가 써먹어야지...싶은 문장들이 번뜩인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문장들이 그냥 제 몸만 빛내는 것이 아니라 적재적소에 숨어 작품 전체에 힘을 실어준다는 것이다. 단순한 말장난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고나 할까.^^ 간만에 단숨에 읽히는, 재미있는 소설을 만났다. 이제 그의 전작도 훑어봐야 겠다. 김영하라는 작가를 되짚어 가는 여정이 매 순간 놀랍고 즐겁기를 바란다.

여담 하나. 책에 실린 그의 사진은, 글을 읽으며 저절로 떠올려 보게 되는 작가의 모습 그대로이다. 거참 복도 많다. 얼굴도 쿨하고, 글도 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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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04-01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저두 <보통 이상의 문학적 소양을 지닌 인간>이 되고픈데, 정말 갈 길 멀죠...흠, 그래도 제가 김영하에게는 먼저 반한듯 하네요.캬캬캬...(딴 작가 대지 마세욧. 밑천 딸리니까..)

책읽는나무 2004-04-0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까 님의 글을 읽고서 이리뷰를 읽으러 왔습니다....안그래도 이소설을 참 읽고 싶었습니다...님의 글을 보니 더욱더 그러하네요....그리고...아까 님이 말씀하신 책을 읽은 즉시 필에 꽂혔을때 리뷰를 써야 한다는것에 동감합니다....저도 그렇더군요...전 머리가 나빠서리...시간이 지나면 기억이 가물가물하는것이 안그래도 글빨이 딸리는데...더욱더 리뷰 쓰기 힘들더라구요..^^...님도 되도록...시간을 아끼어...책 읽고나면 바로 달려들어 리뷰쓰세요...ㅋㅋ...거의 24시간 서재에 붙어 있는것 같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