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과거 일본 황실의 의전에, 천황을 알현할 때는 <두려움과 떨림>의 심정을 느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나는 사무라이 영화의 인물들이 보여 주는 모습에, 사무라이들이 초인적인 숭배의 감정으로 목소리가 녹아들면서 자신의 두목을 배알하는 모습에 그렇게 딱 부합하는 이 표현을 늘 끔찍이도 좋아했다. -두려움과 떨림, 150p

자 그럼, 현대에 다다른 일본에서 그 <두려움과 떨림>은 어디에 적용되고 있는가? 품격 없게도, 직장 상사를 알현할 때에 쓰인다. 거 참.... <두려움과 떨림>은, 그 제목만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본의 대기업 생리 안에 던져진 한 서양인의 분투(참으로 특이한, 분투)를 다룬 책이다. 아.... 이 문장을 써 놓고 한참을 고민했다. 상당히 재미없고 딱딱하고 호전적으로 비치는 저 문장은, 이 종잡을 수 없이 매력적인 책에 적합한 표현은 아니다. 허나 가동률 떨어지는 머리가 딱 들어맞는 문구를 골라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냥 넘어가자.

이국의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며, 내가 한국사람이기에 이 책을 200% 즐길 수 있다고 쾌재를 불러보긴 처음이다. 서양인의 경우엔 작중 화자인 아멜리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는 있겠지만,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인 유미모토사(그렇다. 모리도 아니고 사이토나 오모치도 아닌, 유미모토사가 주인공이다. 아멜리의 지적대로, '일본에서, 존재는 바로 회사'이므로)에 대해서는 이해하거나 공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절반밖에는 즐길 수 없겠지? 그리고 만약 일본인이라면....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회의 부조리가 이방인의 눈을 통해 낱낱히 풍자되는 것에 초연한채로 소설을 즐길 수 있을까? ㅎㅎ, 하지만 나는 모든것이 가능했다. 사실 책 속의 <일본>이란 단어를 모두 <한국>으로 바꾸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아멜리 노통이 이국의 언어로 공들여 표현하고자 했던 일본 대기업의 상황과 그 이면의 묘하게 비뚤어진 의식들을 나는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작중 화자의 (너무도 투명해서) 신랄한 풍자에 보조를 맞추며 큰 소리로 웃을 수도 있었다.  

자살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일본 여성에게 찬사를 보내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분명 과장되고 왜곡된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그녀의 지적은 가슴이 서늘해지도록 예리하다. 일본에서(그리고 한국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에 겨운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기묘한 카리스마를 가진 이국 여성의 입을 빌어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고통스러우면서도 일면 후련한...그런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서재질(?)을 하면서 매번 통감하게 되는 두 가지 사실. 세상엔 책이 너무도 많으며, 그럼에도 그 중 상당수를 소화해 내는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책 꽤나 읽는다고 목에 힘을 주고 다녔건만....아멜리 노통, 이 작가를 이제야 만나다니.... 나에게 찍혔다. 어설픈 전작주의 대상 명단 말미에, 이 이름도 올랐다. 다음 타깃은, 당연히 요즘 뜨고 있는 그녀의 처녀작 <살인자의 건강법>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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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6-10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아멜리 책들 사시면 열린책들 판 양장본일 텐데, 이것만 페이퍼북이라 짝이 안맞겠네요... ㅡ..ㅡ;;;;

▶◀소굼 2004-06-10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의 화장법과 오후 네시도 읽어 보시와요![뭐 말안해도 다 읽으실테지만^^]

마냐 2004-06-10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저 지금 '살인자의 건강법' 읽고 있슴다. '두려움과 떨림'은 다음 타자로 대기시켜놓아야 겠군요.

sunnyside 2004-06-10 2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이(->아멜리 노통)이 맘에 들더라구요. 사랑의 파괴 밖에 안 읽어 봤지만. ^^; 곧 살인자의 건강법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이 책도 리스트에 업!

두심이 2004-06-11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다르게 꼬지않고도 재미난 구성과 화술이 재밌었습니다. 이책은 제가 안읽어본 책이네요.
저도 함 읽어 봐야겠습니다. 진우맘님이 별을 다섯개 주셨네요.

마태우스 2004-06-11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미 아멜리 노통 책을 다 읽었어요. 최근에 나온 것 빼구요. 그러니 진우맘님은 노통학에 있어선 제 후배!! 근데 리뷰 정말 잘쓰셨어요. 그래서 추천합니다.
-적이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는 마태우스-

진/우맘 2004-06-11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판다님> 그게 뭐 중요합니까! 판다님 아니었음 이 작가와의 만남이 더 늦어졌을텐데요. 고마워요~
소굼님, 마냐님, 서니님> 코멘트를 읽으니, 마음이 조급해 지네요. 헥헥.
두심이님> 사실, 제가 별점이 좀 후한 편이라..^^;;
마태우스님> 선배님!!!
 
신탁의 밤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평점 :
절판


운동 중독자들이 그런다지. 우리몸은 사점(Deadpoint)을 지나면 운동의 희열을 느끼는데(검색해보니 이 상태를 second wind 라고 한단다) , 최근 발견된 사실에 의하면 그 시기에 엔돌핀과 유사한, 마약에 비할만한 어떤 물질이 생성된다고 한다. 한 번 그 희열에 발을 들이면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워서 운동 중독에 빠져든다는 것.

폴 오스터의 소설도 그렇다. 이해하기 어려운 개별적인 코드로 뒤엉켜, 조금은 난삽하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전반부...그 전반부를 넘어, Deadpoint를 통과하면, 소설은 글이 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희열을 맛보여준다. 몇 권의 폴 오스터로 단련되어 second wind가 빨리 다가오는 것인지 아니면 <신탁의 밤> 자체가 좀 더 탁월한 재미를 선사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 책을 몇 장 안 넘기고(대개, 기존의 폴 오스터 소설은 1/3 지점 정도까지는 지루했다.^^;) 확 빠져들었다.

문장을 가로지르는 눈의 속도가 머리 속의 궁금증을 못 이겨 단락을 건너뛴 것이 몇 번인지! 사실, 어찌보면 말초적인 궁금증을 자극하는 부분에서 저런 일을 저질렀다. 존 트로즈가 준 원고를, 지하철에서 잃어버릴 것인가? 제이콥이 과연 그레이스를 때릴 것인가? 이런 류의 궁금증은 단순한 호기심이라 취급될 수도 있겠지만, 그 호기심을 1초도 품고 있을 수 없을만큼 나를 흥분시켰다는 점....그 짧은 순간 내 머리 속에는 <죠스>의 OST가 울려퍼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는 점은, 작가의 필력 이외에 어떤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제껏 많은 작품에서 폴 오스터는 작가가 화자 본인이라는, 그래서 소설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뉘앙스를 교묘하게 풍겨왔다. 환상과 실제의 경계선을 지우는 작업에 매혹을 느꼈던 것일까? <신탁의 밤>에서는 한 술 더 뜬다. 소설 속 문장에 달린 기나긴 주석들은 작중 화자 시드니 오어의 것이면서, 그것이 '주석'이기에 폴 오스터의 것이기도 하다는, 무언의 주장을 펼친다. 정말이지, 본문보다 주석이 더 재미있었던 경우는 처음이지 싶다. (아, 아니다. '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의 황당무계한 주석에 이어 두 번째다.^^)

이 즈음 해서 고백하건데....사실, 얼마 전까지만해도 폴 오스터는 내게 <좋아하는 작가>이기보다는 <좋아하고 싶은, 좋아해야 할 것 같은 작가>였다. 그의 이름, 그의 소설,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풍기는 묘한 분위기에 현혹되어, 내 과도한 지적 허영심이 채근을 해댄 탓이었다. 그런데, 최근 <환상의 책>과 <신탁의 밤>을 거치면서 그런 불온한 의도(?)가 말끔히 걷혔다. 이제 난 정말 폴 오스터가 좋다. 얼른 읽으라고 몰아대는 격렬한 후반부가 좋고, 책장을 덮고 나서도 그가 건 마법에서 쉬이 깨어나질 못하는 멍한 상태가 좋다. 이 미남 작가의 눈 밑, 다크써클까지도 좋아질 것 같다.^^

야...행복하다. 신탁의 밤 표지 속, 작품들을 세어 보니, 나는 앞으로도 이 매혹적인 작가와 최소 9번 이상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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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6-10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는 공중곡예사나 달의 궁전은 피치를 올리며 읽었는데 환상의 책에서는 뒤로 갈수록 에, 이거 뭐야 하면서 읽었거든요..^^;; 님 리뷰를 읽고 나니 신탁의 밤이 궁금해집니다..^^ 추천 한표..

마태우스 2004-06-1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나빠! 언제는 제가 좋다고 하시더니! 참, 마이리뷰 밑에다 이런 코멘트 하지 말라고 하셨죠? 자꾸 까먹어서 큰일이야, 큰일....

진/우맘 2004-06-10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마태우스님이 책가방으로 열심히 가리는, 똥배까지 사랑해 드립죠!!!

▶◀소굼 2004-06-10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오스터의 사진이나 그림을 볼 때마다..드라큐라를 시켜봤으면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송곳니가 살짝 나오면 더 멋질텐데;;

마냐 2004-06-10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이토록 자극적인, 유혹적인 리뷰를 올리시다니....에잇 크을릭! 암튼, 보기는 봐야 할...그렇지 않으면 잔변감이 남을 그런 책이로군요. 에이구...읽을 책이 넘 많아서 정말 큰일입니다. 알라딘의 아주 큰 폐해여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아무것도 아냐. 아니, 기적이야. 하루를 또 살 수 있어."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명제를 바탕으로 책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에 다시 한 번 귀기울이도록 하는 일은 아주 어려울 테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파울로 코엘료는 대단한 구석이 있다. 그가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도달하고자 하는 명제는 이것이다.

인간은 죽음의 자각을 통해 더욱 치열한 삶을 살 수 있다.

TV에서, 영화에서, 책에서...얼마나 많은 매체에서 '죽을 뻔 했던 사람들'이 '새 인생을 살기로 한'이야기를 떠들어 댔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책상 머리에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꿈꾸던 내일이다>라는 금언이 붙어있던가. 그런데 이 노회한 작가, 코엘료는 시침을 뚝 떼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졸려는 독자의 머리를 툭툭 쳐서 깨워가며 자신이 정한 결론으로 끌고 간다. 

사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베로니카, 제드카, 이고르 박사, 마리아, 에두아르로 화자를 오가며 펼쳐지는 얘기들, 짧은 회상 안에 함축된 '소설 같은' 삶 이야기들이 억지처럼 느껴졌다. 습작이 아니라면, 짧은 소설 한 권에 그 많은 인물의 에피소드를 다 끼워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코엘료 본인의 소설 같은 삶(정신병원 경력)까지도! 그런데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이것이 다 의도된 바가 아닌가...생각된다. 최소한의 힘을 들여 독자를 승복시키려는, 그리고 '뻔한 얘기잖아"하며 몸을 뒤트는 것을 방지하는 과감한 술수.^^ 그 술수가, 영 밉지만은 않다.

그런데 나는 어떤가? 나는....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엔, 현실에 너무 깊이 안주해 있나보다. 남들 하는 대로 사는 게 제일 좋은거야, 라는 속삭임에 고개를 주억이며 결혼하고...아이 낳고...일을 하고...그렇게 편안하고 조용한 삶에 철푸덕, 엉덩이를 묻고 앉은 나는, 베로니카와 다른 등장인물들의 명민한 영혼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귀한 우화가 그냥 '이야기'로 읽혔다. 하지만 모르지. 이 책과 언젠가 다시 인연이 닿았을 때, 내가 일상의 권태로움에 치를 떨고 가슴 속의 광기를 풀어주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라면..... 만약 그런 때라면, 이 책은 나를 구하고 인생을 바꾸는 운명이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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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6-03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코엘료라 함은 그 11분을 썼던 그 작가 말인가요? 님의 글을 읽어보니 제게도 좀 난해할 것 같네요. 코엘류 감독 때문에 이 작가까지도 미움을 받는 게 아닌지...
그리고 님은 스스로를 '편안하고 조용한 삶에' 안주하신다고 하셨는데요, 아니죠. 저와 전쟁을 하는 등 다이나믹한 삶을 살고 계시잖습니까? ^^

진/우맘 2004-06-03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마태님과의 전쟁쯤이야 제게는 아주 쉬운 오락거리에 불과하지요. 으캬캬캬캬~~~
그나저나 마태님, 자꾸 리뷰에 딴 소리 하실래요?! 제 서재를 모르고, 책 정보 검색하던 분들이 이 코멘트들을 보고 얼마나 어이 없어 하실지...TT

두심이 2004-06-03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책은 터질듯한 빵빵한 풍선의 긴장감이 어느순간 아주아주 조그만 구멍이 나서 푸쉬쉬~하고 바람이 빠지며 그 긴장감을 해소하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진/우맘 2004-06-03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풍선의 비유, 멋져요.^^ 김이 빠진다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안도감....

책읽는나무 2004-06-03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딴지를 좀 걸자면.....그 11분이란 책 있잖습니까??
나는 열한분 뭐 이런식으로 해석해서 읽었거든요!!...추리소설 비슷한 소설인가?? 했더니...
나의 예상과는 아주 빗나간 책이더군요!!..ㅎㅎㅎ
님의 리뷰에 이런 코멘트를 달다니!!.....ㅡ.ㅡ;;

밀키웨이 2004-06-04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책나무님 황당하셨겠어요.

진우맘님 읽어야지...읽어야지...그러면서도 선뜻 손이 가지 않던 책.
이렇게 리뷰를 읽으니 확실히 땡겨집니다 ^^

진/우맘 2004-06-04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끄악~ 열 한 분! ㅋㅋㅋㅋㅋ
책나무님이랑 물만두님이랑 너무 귀여운 거 아시나요?!

진/우맘 2004-06-07 2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파울로 코엘료 책이 전반적으로 그런가는, 몇 권 더 읽어봐야 알겠다만....11분도 어거지 해피 엔딩 이더라.^^; 해피엔딩 좋아하는 나도 좀 어안이 벙벙해 지더군.
여관에서 자살한 그 사람....책 제목만 보고, 내용은 안 읽어본거 아냐???
 
11분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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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격적인 책읽기에 앞서, 나는 머리말에 반했다. 자신의 팬이라고 밝힌 노신사에게 (11분이 충격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려) 바치는 머리말.

'이 책을 당신께 바칩니다. 모리스 그라블린. 저는 당신과 당신 부인, 당신의 손녀, 그리고 저 자신에게 한 가지 의무가 있습니다. 모두가 듣고 싶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저를 사로잡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의무 말입니다. 세상엔 우리를 꿈꾸게 하는 책도 있고, 또 우리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책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책도 작가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 자신에게 얼마나 정직하게 글을 쓰느냐 하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11분>은 코엘료의 책 중 <연금술사>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난 책이다. 책 두 권을 읽고 그 작가를 알 수는 없는 일이라(아니, 책을 백 권 읽었다 해도, 작품을 통해 작가의 됨됨이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 할지도..) 이 머리말이 코엘료의 진심인지, 아니면 어느정도 팬들을 의식한 쇼 비지니스의 발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작은 에피소드가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진다.

<11분>을 읽는 내내 시드니 셀던이 생각났다. 시드니 셀던을 처음 만난 게 아마도 초등학교(그 때는 국민학교^^) 때 같은데...사랑과 배신이라는 만고불변의 주제에,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치밀한 플롯, 거기에 적절히 스며든 성적인 문구들은 어린 나를 얼마나 매료시켰는지. 그러니, 이것은 내 입장에서는 칭찬이다. (코엘료 본인과 그의 골수 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손에 남지 않아, 마치 천자문 읽듯 힘겹게 책장을 넘겼던 <연금술사>의 기억이 무색하게, <11분>은 단숨에 읽혔던 것이다. 어찌보면 연금술사와 11분이 가고자 하는 도착점은 같다.(거기가 어딘지는 언제나 헷갈리지만.^^;) 그런데 가는 길이 판이하게 다르다. 연금술사가 택한 길은 방랑에 가까운 여행이고, 11분이 택한 길은...섹스다! 어느 길이 더 재미있을지는, 매우 뻔한 일이다. (내 경우에만 국한되나?^^)

책 속에 삽입된 마리아의 일기도 제법 근사했다. 사랑과 자아에 대한 그녀의 발견들이 가끔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리기는 했지만, 수첩에 적어 놓고 써먹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인 부분이 있었다. 아, 무엇보다도,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결말 부분인데... 추리소설은 아니지만, 내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 결말이기에, 자칫 스포일이 될까 두렵다. 그래서 이만 입을 다물어야 하겠다.

ㅎㅎ 난삽한 리뷰라 정리가 필요할까? 나는 이 책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그것은 내가 기존의 코엘료를 단 한 권밖에 모르고 그 한 권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짐작컨데, 코엘료의 팬들에게 <11분>은 극찬, 혹은 비난과 실망...중도가 없는 극단적인 반응을 얻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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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5-29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의 리뷰를 올리고 나서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었다. 정말, 극단적이군.^^;;;

waho 2004-06-06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주문했는데 아직 읽어보진 못했어요. 전 실망일지 극찬일지 모르지만 빨리 읽어봐야겠어요.

럼피우스 2004-06-27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저역시두 머릿말에 아!하고 반한 사람입니다.
저도 <연금술사>다음으로 읽은 책이 이거였더랬죠..
기대했던것 보단 별로였지만..술술 잘 읽히긴 하더라구요

진/우맘 2004-06-27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요, 티파니블루님.^^
 
아이들에게 배운 것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서혜영 옮김 / 다우출판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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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교육 에세이>이다. 에세이류를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따분하기 그지 없을 거라는 추측이 앞섰다. 하지만 그것은 오산이었다. 너무도 재미있었다. 그리고 감동적이었다. 재미와 감동이라....이 진부한 표현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책은 참 오래간만인 것 같다.

재생지에 제법 널찍한 편집, 큼지막한 글씨. 평소같았으면 출판사의 상술입네 하고 분개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그것이 너무도 잘 어울린다. 줄간의 여백이 방금 읽은 문장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게 하는 쉼표 같았고, 큰 글씨는 마치 동시를 아이들의 공책에서 그대로 옮겨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가볍고 가슬가슬한 촉감. ^^

그냥 읽고 있는 것만으로....시원한 감로수를 마신 듯 한 좋은 책이다. 그저 재미있게 읽었을 뿐인데, 손끝 발끝까지 어떤 <영양분>이 전해지는 느낌이 든다. 만약 책이 <교훈>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 교훈은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전해져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책 자체가, 하이타니 겐지로가 구현하고자 하는 <교육>의 결정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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