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미궁 -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은 과연 흐르고 있을까? 한림 SA: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3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엮음, 김일선 옮김 / 한림출판사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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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TIFIC AMERICAN 잡지 3번째 주제는 '시간'이다. 대중을 위한 과학잡지이면서도 전문성을 놓치지 않는 내용을 다룬다는 소개에 기대를 갖고 구입했었는데,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적당한 수준의 기사들에 만족하고 있다.


'시간이 흐른다.'는 표현은 워낙 자연스럽기 때문에 하나의 자연스러운 명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게다가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장치는 주위에 널려있기까지 하다. 스마트폰의 등장 이후로 우리는 일반 대중이 과거 어느 시대보다도 더 정확하게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시간'은 왕이나 일부 권력층의 전유물이 되어 권력의 상징과 도구로 사용되어 왔었다. 그런 귀한 '시간'을 이제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기처럼 문화와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은 '시간'은 실제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상의 허구일까? 시간이 흘러간다는 건 실제로 무엇일까? 시계가 알려주니까 시간이 흐르고 있다고 인지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찰의 결과이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이번 호에서는 '시간'에 대해 철학적인 물음으로 시작해서 생리학적으로 인지하는 시간의 본질과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기술의 발전 과정, 그리고 시간의 존재에 대한 과학적 고찰을 다루고, 궁극적으로 시간이 존재하기 전과 시간의 종말에 대한 사유로 맺고 있다.


불멸의 존재가 아닌 인간에 있어서 시간이란 한정된 재화인 동시에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 이어질 개념이자 실존적인 어떤 것이다. 내게 주어진, 혹은 남은 시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시간이었다.

과학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을 분석해가는 힘든 여정의 작은 발자국들이 모여서 그 대상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시간의 종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시간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우주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생명체라는 위치에 대해 더욱 감사하게 된다. 시간이 점점 부족해진다는 특징은 생명체의 존재에게는 필수적이다. 우리가 살아가려면 시간이 한 방향으로 흘러야만 한다. 복잡한 구조를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기간과 크기라는 개념도 있어야 한다. 사건의 과정이 존재하려면 원인과 결과라는 순서도 필요하다. 육체가 순서라는 작은 주머니를 만들어내려면 공간도 필요하다. 이런 모든 것이 녹아내린다면 우리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시간의 끝은 상상이 가능하지만, 아무도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죽음에 대해 의식하는 것처럼 이를 직접 경험할 일은 없을 것이다.

먼 후손들이 시간의 종말에 다가갈 때, 후손들은 점점 더 적대적인 우주에 맞서야 할 테고 애써본들 달리 피할 방법도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시간의 종말에 그저 앉아서 당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가해자다.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 에너지를 열로 바꾸며 우주의 쇠락에 일조하고 있지 않은가. 시간은 없어지겠지만 우리는 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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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솝 우화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4
이솝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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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동화책으로 읽었던 이솝 우화들 중 몇 가지는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거니와 여러가지 다른 버전으로 계속 들어왔었다.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나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반해 도끼와 나뭇꾼 이야기 같은 경우는 전래동화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 역시 이솝 우화였다!


동화 버전이 아닌 원전을 따른 번역이라 그런지 어릴 적 읽었던 말랑말랑한 재미는 느낄 수 없었지만 반짝이는 위트와 교훈은 여전히 재미를 준다.

옛날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빚어냈을 때 두 개의 자루를 사람의 목에 걸었습니다. 앞에 건 자루에는 타인의 결점이 가득 채워져 있고 뒤쪽 자루에는 자신들의 결점이 들어 있었지요. 그리하여 사람들은 동료들의 결점은 십 리 밖에서도 볼 수 있지만 자기 결점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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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17
T. S. 엘리엇 지음, 황동규 옮김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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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S. 엘리엇의 '황무지'라는 제목만 익숙한 시를 이제야 읽게 됐다. 20세기 시 중 가장 중요한 시중의 하나라는 찬사를 받은 시라는 무게감은 시를 읽는 동안 내내 나를 짓눌렀다.

시는 가슴으로 읽어야 한다고 하는데 시를 읽는 내내 먹먹한 느낌과 때로는 이해 불가한 소재와 내용, 흐름이 내게는 어려운 시였다. 다만, 황무지 첫 소절은 각 주를 통해 절절하게 와닿는 부분이 있었다.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네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거의 영원불멸한 삶을 약속 받았으나 젊음을 유지해달라는 청을 잊어 축복의 염원이 영원한 저주의 현실이 되어버린 무녀에게 '죽음'은 무엇보다 큰 염원이요. 축복이였으리라.

불멸을 꿈꾸는 필멸자에게 주어진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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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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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단숨에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한 번 읽는 것만으로 온전한 이해가 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떻게 단세포로 시작해서 다세포로 진화하여 오늘 날과 같은 고도화된 생물체들의 세상이 되었는가에 대한 가능성을 살펴보기에는 충분했다. 특히 결말부에 다루는 '유전자의 긴 팔'인 확장된 유전자에 대한 논의는 가히 혁명적이었다.


유전자 수준의 진화를 다룬 글이지만 단순히 유전자 수준뿐만 아니라 개개의 독립된 구성원이 모여 군집을 이루는 사회적인 현상에도 응용이 가능한 이론적 배경과 설명이 가득해서 한 번은 더 정독해보고 싶은 책이다.


다음 이야기인 '확장된 표현형'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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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대디 2018-01-22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려고 여러 번 시도 했는데, 매번 재미가 없어 접어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두개의 판본까지 가지고 있는데요. 다시 한 번 시도해 봐야 겠습니다.
 
오리진 2
댄 브라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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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의 시작인 '알파'와 모든 것의 끝인 '오메가'라는 단어는 성경의 계시록에 나오는 말로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를 설명하신 말씀이다. 창조주를 갈망하는 피조물이 갖는 필연인지, 인간은 끝없이 시작인 기원과 끝인 종말에 대한 질문과 답을 과학적 발견과 종교에서 찾아왔다.

댄 브라운은 종교를, 특히 개신교와 가톨릭을 포함한 기독교를 철저한 회의론적인 시각에 입각해서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심지어 '다빈치 코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레나 사이의 아이의 후손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룸으로써 일부 종교계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 역시 '다빈치 코드'를 소설과 영화로 접하기 전에는 무신론자의 흔한 종교 비하적 작품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댄 브라운의 소설은 내가 보기에는 과학의 기반을 둔 철저한 회의론자의 창작품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반지성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게 보인다.

종교는, 특히 기독교는 암흑기로 불리는 중세를 회의론을 배격한 반지성주의적 리더십으로 이끌어간 주요 종교였기에 그의 소설에서 유독 차가운 대접을 받는 듯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댄 브라운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 보다는 불가지(不可知)로 돌림으로써 과학과 종교를 분리시켜 보고자 하는 관점으로 써내려 간 것으로 보여 반 종교적인 시각을 가졌다고 보기보단 반지성적, 근본주의적인 독단주의에 대한 경계로 읽혀졌다.

국내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 기사를 인용함으로 리뷰를 끝맺을까 한다.

"나는 아주 복잡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엄마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한 신실한 분이었고, 아버지는 학교 수학 선생이었다. 과학과 종교의 세계에서 자란 거다. 열 살 무렵부터 종교에 대해 궁금증을 품기 시작했다. 성경의 이야기가 더 이상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몇몇 종교적 주장에는 심각한 의문까지 품게 됐다. 그런데 과학 속으로 발을 디딜수록 종교와 과학이 결국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 과학을 깊게 파고들면서 들었던 궁금증은 점점 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됐다. 종교에 대한 내 궁금증은 종교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지, 지적인 사람은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만 믿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내 궁금증은 영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인 것이다."

[출처: 중앙일보] 책장을 넘기는 게 즐거운 스릴러 쓰고 싶었다


"지성을 가진 인간들이 어떻게 신의 이름과 그 망할 놈의 외계인을 들먹이지 않고는 자신의 기원에 대한 토론을 시작조차 못 한단 말입니까!"

"에드먼드 커시는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 최초의 무신론자가 아니고, 아마 마지막도 아닐 거예요. 커시 씨가 무엇을 발견했든 그게 공개되면 사방에서 논란이 벌어지겠지요. 유사 이래 인간의 지성은 늘 진화를 거듭해왔고, 그걸 막는 게 내 역할은 아닙니다. 물론 내 관점에서는 신을 포함하지 않는 지적 진보는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지만요."

"하지만 저의 신앙은, 저의 과학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진행형입니다. 저는 영혼의 문제에 관한 한 이 이론이 불가지론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제에 물질이 ‘존재‘하는 방식을 설명하려고 노력할 뿐이고, 그것이 영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성직자와 철학자 들의 영역으로 남겨놓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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