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웃음이 그 환한 박하꽃에 아주 가까이 다가간 별이었던 그때.

 

어느 밤,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두 편의 소설이 있었다. 아주 발랄하고 배부르고 따스하고 행복한 그런 밤이었는데 두 권의 소설을 만난 뒤 나는 울어버리고 말았다. 그 밤에 나를 달래기 위한 음악을 들었다. 그 밤을 다스리기 위해 환한 불을 밤새도록 켜두었다. 환하게 밝힌 밤에는 꽉 잡고 놔주지 않는 사랑이, 고통이, 세월이, 증오가 뒤섞여 넘실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단지 표면적이었을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슬아슬한 절벽이, 소리없는 번개가, 붙잡을 수 없는 시간이, 닿지 않는 마음이, 그렇게 모든 것들이 여전히 있다. 여기에, 환상처럼 뭉클하고 애닳게.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

 

죽어도 포기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을 거다 싶었던 그때. 그것이 우리에게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싶었던 그때. 그러면서 좋았던 그때.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떤 불구덩이에 뛰어들어서라도 네가 사랑하는 그 무엇을 구하고만 싶었던 그때. 바람이 많이 불어도 좋았고, 눈이 많이 내려도 좋았고, 비가 올 때 들리는 음악은 또한 얼마나 환상적이었나. 그리고 네가 거리에서 전경의 몽둥이에 맞아 쓰러질 때 너에게로, 너에게로 내 몸 다 주어서라도 가고 싶었던 그때. 그리고 그때. (<박하>중에서)

 


 

로렐라이

                   

                   - 하이네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하여 옛날의 동화 하나가
잊혀지지 않고 이토록
나를 슬프게 하는지

바람은 차고 날은 저무는데
라인강은 고요히 흐르고
산봉우리 위에는
저녁 햇살이 빛난다
저 건너 언덕 위에는 놀랍게도
선녀처럼 아름다운 아가씨 앉아
금빛 장신구를 번쩍이며
황금빛 머리칼을 빗어 내린다

소녀는 황금의 빗으로 머리 빗으며
나지막히 노래를 부른다
기이하게 사람을 유혹하는
선율의 노래를

작은 배에 탄 뱃사공은
걷잡을 수 없는 비탄에 사로잡혀
암초는 바라보지 않고
언덕 위만 바라본다

마침내 물결은 조그만 배와 함께
뱃사공을 삼켜 버렸네
그녀의 노래와 함께 이것은
로렐라이에서 일어났다

 

 

 

 

 

 

 

 

 

 

 

 

 

 

 

 

이제 제법 잊혀진 세 소설들의 공통점은 욕망이고, 사랑이다. 오래된 사랑소설을 읽는 일은 남모를 감정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결국 나오지 못하고 매몰되고마는 은밀하고 내밀한 경험이다. 새 것, 보편, 베스트, 고전에 무던히도 열올렸으니 탐독이 어디로 향해야 할까 생각하다 구멍난 시절의 독서를 메우기로 한 게 이 책이었을까. 언젠가, 사랑이 있었고, 가난도 있었다. 가난한 남자는 더 불우한 환경에 놓인 한 여자를 사랑했고,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어보였다. 가난밖에는. 내가 더 잘 나가를 몸소 부르는 다른 남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게다가 그 남자가 정말로 잘났을 경우라면 게임은 끝났다. 바보 아닌 이상 지는 쪽을 알 수 있으니 더 갈 필요도 없건만, 끝까지 가본다. 상상할 수 없는 파국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다. 그렇다. 이 소설은 확실히 이십세기의 감수성을 안고 있다. 다른 남자는 비교할 수도 없게 부자 할아버지를 가진, 가진 것들을 모조리 물려받을 유일하거나 유력한 핏줄이다.

 

그 역시 가진 이가 그렇듯 배려 대신 무례함을, 경쟁 대신 쟁취를, 그리움 대신 자신감을, 훈장처럼 입었다. 그가 유일하게 자존심을 굽혀도 괜찮은 대상은 그녀 뿐이다. 괜찮아서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아야 하므로 괜찮은 것이다. 현대사의 아픈 부분과 겹쳐져 때로 신파처럼, 실화처럼 그렇게 진행되는 소설은, 마음 먹지 않아도 갈길을 간다. 힘을 지닌 자가 그 힘을 휘두르면 사랑은 잔인하게 휘어지고 부서진다. 사랑은, 대상을 건드리면 소멸하기 마련이다. 탐욕과 도피의 끝. 체념과 포기의 시작. 이 길 끝에는 무엇이 더 기다리고 있을까. 여자 대신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괴롭힌 순간, 가난한 사랑은 자취를 감춰버린다. 사랑은 가난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고 확연하게 휘어잡는다. 가난한 자는 가진 자의 사랑을 빼앗을 수 없다. 그런 구조로 진행되는 <외등>은 <은교> 보다 더한 욕망의 사랑소설이다. 사랑의 비극이 갈 수 있는 최대치를 밟고도 한참쯤 더 멀리있는 소설이다. <은교> 속 욕망들이 방향을 잘못 찾았다고 여긴 적 없다. <외등>의 주인공들은 차라리 품지 말았음직한 욕망을 욕망함으로서 핏빛 사랑 속으로 서서히 걸어들어간다. 이제는 까먹어버려서 희미한 두 남자와 여자. 과거와 현실. 희생과 착취. 자유와 억압. 서로가 서로의 반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할 단어들의 대립만이 내 안에 남았다. 그들에게 희망은 한낱 실줄기이고, 외등이고, 기다림이고, 늦어버린다. 사랑은 어긋나고 삐뚤어져버린다. 한사람이 한사람을 지독히 사랑할 때 발생하는 모든 비극을 담아내지만 그 비극이 눈부셔서 차라리 비극적이어서 다행이라고 느끼게 한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목숨보다 더 아낄 때 한 여자는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 좋았을 것이다. 둘 다 움직였기 때문에 서로는 서로를 감지하지 못한다. 외등이 홀로 켜진 불이 아니라 각자 켜진 불이고, 홀로 켜진 불은 차라리 켜지지 않은 것보다 더 많이 외롭고 고독하고 아팠을 것이다. 남자가 여자를 외등 하나 밝힌 채 기다리다 떠났을 때 모든 것이 끝난 게 아니라 다시 시작되었던 것을 잊지 못한다. 슬퍼도 슬프다고 외치지 못하는 그녀를 비추는 평생 단 하나의 불빛이던 그. 그 불빛을 오래도록 생각한다.

 

한 남자가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못한 한 여자를 평생토록 기다렸다. 목숨은 끊어졌고, 여자가 돌아왔지만, 사랑은 저 멀리 있었다. 사랑 사이로 아버지라는 애증어린 존재의 기억이 끼어든다. 나는 의도적으로 아버지의 세월을 숨겨놓는다. 누구든 읽지 않았다면 그건 직접 읽음으로서 확인하면 좋겠다. 아버지와 여자. 누구였던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선택했다고한들 잘한 선택일 수 있었을까. 오래 전 서른쯤 되면 세상 누구보다 매력적인 남자와 세상 누구도 해보지 못한 사랑을 할 줄 알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는 나타나지 않았고, 목숨 따위 걸 사랑은 없었고, 세월이 흘렀고, 나는 감수성 돋는 소녀가 아니다. 소망이 이루어졌다면 늦어도 지금쯤은 진행중이었어야 한다. 두 사람의 그 무엇 이상을 원하고 또 방해하는 운명조차 피해갈 마음 말이다. 마음을 버리면 살지만, 품을 경우 파멸의 지름길로 걷게 되는 순간이 있다. 당신은 모른다. 서로에게로 휘감기듯 천착하던 순간들. 눈을 감아도 잊혀지지 않고 눈을 떠도 떠오르지 않는 세월들.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과 아프게 기억될 서글픈 사랑의 분열을.

 

<박하>는 오래 전 잃어버린 그 사랑을 찾으러가는 여정이다. 굉장히 호기롭게 시작한다고 여겼던 소설은 아내와 아들 둘을 잃은 남자가 잊혀진 사랑의 흔적을 찾아떠나는 고고학적 여정에서 그만 감수성을 잃어버리는데 그래서 차라리 신파에 가까운 <외등>의 감수성을 뛰어넘지 못한다. 길 위의 질문은 끝내 그곳에 닿지 못했고, 떠남은 결코 치유의 과정이 아니었다. '이무(李無) 혹은 칸 홀슈타인의 기록─1902년 봄에서 1903년 겨울까지'라는 글에 의지해 여행을 떠난 남자는 기록이 사라진 곳에서 다시 새 기록을 쓰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지는 못했어도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이제는 사라져버린 고대도시 하남을 찾아가는 칸이 드문드문 떠오른다. 어떤 사람들은 오로지 사랑으로 세상에 발자국을 찍고 간다. 이 소설을 읽으며 얼마나 많은 박하사탕을 빨았는지 알싸하면서 달달해질 때까지의 그 순간이 좋아 자꾸만 페이지를 앞으로 넘기기도 했다. 유영과 유예는 분명히 다른 단어지만 이 순간 같은 뜻으로 겹쳐진다.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파괴된 폐허도시, 사라진 언어, 잃어버린 사람, 잊혀진 기억에 대한 환기는 아련하고 또 아득해서 닿지 못할 곳에 떠있는 것만 같았고, 나는 닿지 못해 자꾸만 까치발을 했다. 닿을 수 있다면 붙잡고 싶었다. 만질 수 있다면 쓰다듬고 싶었다. 내 곁에 불러앉히고만 싶어 애가 탔다.

 

<사랑의 전설>은 답답한 첫사랑이라는 점에서 [건축학개론]과 닮아있다. 첫사랑이라고 무조건 감수성 돋는 게 아니라는 걸 이 영화로 배웠다. 마침 다시 보게 된 손예진,조승우,조인성의 [클래식]은 액자 속이나 바깥이나 거의 완벽할 정도의 감수성을 체험하게 하는데 [건축학개론]은 아니었던 것처럼. 감수성은 부족하지만 다이렉트로 닿지 못했던 감정이 공중을 배회한다. 정확한 문장으로 또박또박 써내려간 거짓없는 흔적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제 색을 거의 퇴색할 지경의 지점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이런 사랑은 폭발지점이 없고, 절정이 없으므로 욕망이 타오르지 않는다. 감동이 덜하다. 영화가 그런 것처럼 그들의 감정은 소멸되고 증발했다. 촌스럽고, 답답할 만치 느리게 닿는다. 결말이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사랑의 전설이 될 만한 연애소설은 아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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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3-03-02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님, 안녕^^
ㅎㅎ오랜만에 들러 좋은 글 읽고 가요. 도달불능의 사랑이라, 제목부터 멋져요.
인생은 소설 속 주제처럼 욕망, 사랑 그것들로 채워지는 것 같아요. 물론 완전한 사랑이란 없겠지만요.^^

아이리시스 2013-03-06 21:11   좋아요 0 | URL
꿈섬님 진짜 오랜만에 1등 댓글 고마워요. 사랑하면서 잘 지내고 계시죠? 애기들도 잘 있고?^^ 예전에는 몰랐는데요, 커갈수록 사랑을 하는 것보다는 지키는 게 훨씬 어렵다는 걸 깨닫고 있어요. 그리고 조건 따지며 이득산출하는 게 사랑이 아니랄 수도 없지만 꼭 순수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 같고요. 그렇다고 누구나 순수한 사랑을 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잖아요. 오랜만에 사랑론 쓰려니까 너무 어려워요@.@ 자주 오셔서 1등 댓글 부탁해요ㅎㅎㅎ

맥거핀 2013-03-03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새벽에 지나간 사랑이 생각나게 하는 글을 쓰시면 어쩝니까. 그런 건 소주를 한 잔 하면서, 열심히 잊으려고 애쓰면서, 아니 사실은 열심히 기억하려고 애쓰면서 생각해야 하는데. 그러다가 찌질하게 전화를 손에 들고 만지작만지작 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없는 번호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번호를 눌러 그 소리를 다시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찌질한 코스를 밟아야만 하는데 말입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냐구요..? 누구나 가슴에 삼천원 쯤은 있는 거잖아요..(하지만 이제 삼천원으로는 소주 한 병 마시기도 버거운 돈이 되었군요,라는 생활인으로서의 자세.^^)

저는 박범신의 <외등>을 드라마로 봤습니다. 홍수현이 쩔었는데...

맥거핀 2013-03-03 01:18   좋아요 0 | URL
그리고 노래방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찌질 2콤보를 달성해야..



아이리시스 2013-03-06 21:12   좋아요 0 | URL
저는 그런 생각하면서 쓰지 않았지만 이 사랑은 분명 도달불능의 사랑이에요. 사랑이라고 부르짖다가 끝난 것 같아서 몽글몽글한 기분으로 쓴 반면 창피해가지고 이제 왔어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저도 홍수현이 어떨지 알 것 같은데, 그거 어디서 볼 수 있지, 아! 홈페이지 다시보기! 근데 그거 아이디랑 비번 까먹어가지고 어쩔;; 정말 찾기 귀찮은데 오백만년정도 그래서 못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 제가 가장 자주 가던 게 방송 3사 홈페이지였는데 말이죠! 방송인 꿈꿀 때 얘기(풉).

찌질은 쓰리콤보 달성해봅시다.. 이 노래 음.. 좋네요..노래방에서 혼자 부른 적 있기없기? 요즘은 시간이 흐른 후 걸어보면 대체로 더이상 없는 번호겠죠? 번호이동도 쉽고 마음이동도 쉽고 너무 쉽고.. 아..댓글에서 자꾸 뭐가 흘러나오려고해서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겠어요. 홍수현..나도.. 저 여자 혜주 말이죠, 누가 해도 완전 아름답게 빛날 거예요. 나름 수동적이기만 한 여인이 아닌 건 맘에 들어요. 박범신 작가님은 젊을 때도 완전 사랑 이야기를 잘 썼고, 나이 드셔서도 잘 쓰시는 것 같아요. 두 권 읽고 이런다..( '')

프레이야 2013-03-03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아이님, 오랜만이에요.^^
일단 '외등'을 담았어요. 중고도서가 있네요. 박범신의 '은교' 이전이 궁금해서요.ㅎㅎ
'사랑의 전설'은 품절이에요.ㅠ

아이리시스 2013-03-06 21:18   좋아요 0 | URL
아..책이 있으면 드릴텐데요, 제가 읽을 때도 '사랑의 전설'은 품절이었어요. 전자책 읽었거든요. 프레이야님, 오랜만이에요. 봄에 가장 걸맞는 감수성을 가진 분이실 것 같아요. <외등> 좋아요. 제일,은 아니고 모처럼 좋아하는 소설에 등극했어요. 현대사 얘기도 되게 좋아요. 남자의 아버지와 여자의 어머니의 삶도 슬퍼요. 문득 쓸쓸해지는 날에 또 읽을래요.

프레이야 2013-03-07 11:27   좋아요 0 | URL
외등, 중고샵에서 구입했어요. 어제 왔네요.
책장이 다 떨어진 누런 종이더라구요.ㅎㅎ 좋아요.
녹음할 책으로 찜했어요.
아이님, 화사한 봄날 누리세요^^

아이리시스 2013-03-11 19:26   좋아요 0 | URL
댓글이 늦었네요. 댓글조차 벅차게 느껴지는 봄이에요ㅠ.ㅠ
책장이 다 떨어진 누런 종이라니ㅠ.ㅠ ㅠ.ㅠ
화사한 봄날은 저를 울게 해요. 다 떨어진 누런 종이도..
하지만 재밌기만 하면 돼요. 가끔은 누런 책들을 다 갖다버리고 싶은 충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책은 책이고 세월은 세월이고, 프레이야님 (책구입) 추진력은 엄청나네요^^

자목련 2013-03-09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등>은 책으로 읽고 드라마로도 봤는데 전체 줄거리가 생각이 않아요. 다시 읽어야 할까요? ㅎ
허수경의 <박하>는 어떤가요?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니.. 시인이 쓴 소설은 궁금하면서도 선뜻 손이 닿지 않아요. 그나저나, 봄 잘 지내시나요? 늦어도 너무 늦은 안부로군요..

아이리시스 2013-03-11 19:29   좋아요 0 | URL
화사한 봄날에 조금 적절치 않지만 다시 읽어도 좋겠지만, 봄날을 너무 슬프게 만들 이야기예요. <박하>가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는데, 제 기대치가 기대치만큼 딱 그만큼 더 높은 곳에 있어서 그랬기도 하고, 주인공이 아내와 두 아들을 잃은 남자예요. 잃은 게 딸일지도 모름.. 제 기억력이 딱 그 정도랍니다..자목련님..으흙. 그 남자가 어느 기록을 따라 그 사랑을 찾으러 떠나는 여정인데요. 약간은 겉도는 느낌이에요. 시인은 시를 써야 하고, 소설가는 소설을 써야 해요. 음..저는..봄을 만끽하는 중이에요^^
 

 

 

 

사람 대 사람, 사람 대 세상, 세상 대 세상, 국가 대 국가, 이 싸움들 중에서도 가장 예측할 수 없는 게 '나 vs 나'인 것 같다. 잘난 작가들에 의해 이 모든 것이 문학이 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교훈이 된다. 전쟁문학을 추렸다. 추렸는데 읽히지가 않아서 여기가 끝이구나 했는데 무심하게 할퀴고 지나가는 어떤 감정들이 느닷없이 상처투성이 전쟁문학 속 주인공들을 돌아보게 한다. 누굴 위하여 종을 울리는 지도 모른 채 무조건 상대를 쓰러뜨려야 하는 전장에서도 가해와 피해의 차이를 극명하게 가리기 어렵다. 전쟁 뿐인가, 노조나 복수극에서도 매번 마주하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관계들. 신에게 맡겨야만 하는 실존의 문제, 옳고 그름의 잔인한 판단. 오히려 전쟁은 인간의 본성을 가장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종용되기도 한다. 왜 싸워야만 하는가. 세계는 '왜'라는 물음에 마침표 대신 필연성을 부여한지 오래다.

 

태초부터 엄청난 규모와 빈도의 전투가 있었다. 적어도 전쟁을 과거에 벌어진 한낱 다툼으로 축소시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20세기의 화두인 제 1,2차 세계대전을 비롯, 열거하기도 힘든 수많은 이름의 전쟁이 이후 문학작품들의 강력한 토대가 되었고,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다. 무엇이 그토록 치열하게 서로가 서로의 반대편에 서야 하도록 만들었는지가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오늘날에도 전쟁문학은 살아남았다. 전우애, 사랑, 그리움으로부터 오는 감정소모는 끊임없이 회자되며 문화적 코드로 자리잡아 잔인함과 감동을 거듭 교차시키며 세상으로 밀려나온다. 무력이라면 차라리 낫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명분이 버젓이 상대의 생명을 끊을 수도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


전쟁사, 선과 악 혹은 광기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희생양 매커니즘과 광기를 예술가의 것으로 치환해 이해하곤 했던 나는 히틀러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그러니까 아렌트가 나치즘을 향해 쏟아낸 울분이나, 이슬람주의자들이 비무슬림을 향해 갖고 있는 적대심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관련 문제들은 언젠가부터 관심주제에 등극했고, 뿌리없는 가지처럼 단편적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터지는 폭탄에 사지가 잘려나간 채 피투성이가 되어 벌벌 떨거나 우는 사람들을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가. 전쟁과 재난의 다른 점은 무엇인가. 의도의 유무라고 보기에 잘잘못을 따지기에 너무 많은 연결고리들이 줄기차게 엮여있는 것이 사실이다. 잘 모를 때는 겁을 낼 이유가 없다. 두려워지는 순간은 언제나 조금 알게 되기 시작할 때다. 삶이 두렵지 않은 이는 죽음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전쟁 얘기다. 전쟁문학에 대한 깊이 없는 고찰.


 
















전쟁통에 폐허가 된 이탈리아 마을의 한 야전병원에 홀로 남은 간호사와 남자환자를 오랫동안 상상했었다. 왜 버리고 가질 못하는가. 살아야 의미가 있지 않나. 내 물음은 허공을 맴돌았고, 답을 찾을 수도 없고, 찾아지지도 않았다. 잿더미 위의 불씨같은 희망처럼 서걱거리는 <잉글리시 페이션트>의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에 질식해 호흡을 중단한 적도 여러 번. 이 아연한 문장들을 대하자니 나를 둘러싼 세상이 더욱 비현실처럼 여겨졌다. 디테일한 묘사는 때로 독처럼 쓰고 두려웠다. 암흑 속 절망과 붉은 노을 위의 하얀 집 같은 것들이 생생히 대비되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존재를 감췄지만 누구보다 고귀한 사람, 내 눈은 잉글리시 페이션트를 그렇게 불렀다. 없는 듯 존재하면서 존재감이 적지도 크지도 않은 사람. 온 절망이 대부분의 희망을 꺼뜨리는 곳에서 단 하나의 희망이라도 있어야 한다면 반드시 내 곁에 있을 거라 말하는 사람. 하지만 언제 안녕해도 좋을 사람. 영화 속에서 한나가 읽어주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바흐의 아리아와 함께 시린 기억을 찾아가는 실마리로 기능한다. 저 책은 필독서지만 두께가 만만찮아 엄두도 못내는데 인용된 부분마다 좋다. 


 

















레마르크는 <서부전선 이상 없다>(1929)를 쓴 후 폭발적 반응으로 세계에 이름을 알리지만 나치스 지배 하의 독일에서 작품의 반전적 내용(시각) 때문에 1932년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다가, 9년 간의 미국망명 후 다시 스위스에 거처한다. 첫 작품 이외에는 대부분 망명생활 동안 집필했기에, 망명작가로 불린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개선문>, <그늘진 낙원>, <리스본의 밤>은 망명소설 4부작으로 불릴 만큼 유명하다.


독일군이 소련의 대평원에서 잠복중인 현재진행형으로 시작하는 <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 새파란 참전병사의 눈으로 본 세상과 체험을 서술해나간다. 죽고 죽이는, 시시각각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진군 중의 제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 독일은 패전의 내음을 진지하게 맡기 시작한다. 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접경선으로 후퇴하면서까지 상대 영토 쑥대밭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전쟁이란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 땅이 얼고 녹는 동안 흙구덩이를 파헤쳐 부지런히도 묻었다. 오랫동안 전쟁의 끝을 바라온 병사들의 소원은 원인 모를 병이라도 걸려 제대하는 것이다. 차라리 그 편이 더 행복할 지도 모른다. 2년을 전장에서 보낸 노련한 병사 그레버는 3주간의 휴가를 받고 고국으로 간다. 어렵사리 달려온 고향마을은 이미 몇 차례의 공습과 폭격으로 쑥대밭이 된 상태. 폐허더미에서 주소를 더듬어 집을 찾아헤매는 한편, 부모님의 생사를 수소문하지만 사망자와 부상자, 행방불명자가 속출하는 지옥같은 잿더미 속에서 그들의 생사조차 알아낼 수가 없다. 방방곡곡 묻고 찾다가 어릴 적 친구인 엘리자베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지옥불마냥 활활 타오르는 대지에서 울부짖으며 타죽어가는 이들이 지천에 널린 전쟁통에 사랑과 결혼이란 게 어떤 의미가 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고귀한 것이 누군가와 함께 이 위기를 헤쳐나가며 위로받고 사랑하고 싶은 감정이다. 전장에서의 결혼은 절차가 간단하다는 말에 휴가 막바지는 온통 그녀와의 혼인신고와 미래에 대한 꿈, 유예된 행복 앞에 바쳐진다. 마침내 복귀일이 다가온다. 그레버는 여전히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른다. 제 나라도 불바다가 되긴 마찬가지인 전쟁 앞에 어떤 태도와 자세를 취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소음과 절망과 파괴, 혹은 그 모든 것이 계속될 때, 그들의 작별은 결코 유예되지 않을 것이다. 


레마르크의 문장은 리얼리즘 혹은 사실주의에 가까운 묘사로 구성된다.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노래는 없지만 단 한 번의 사랑과 임시로 지어올린 집 안에서 지속된 평화를 꿈꾸는 이들의 소망이 모인 것만으로 낭만적이고 로맨틱하다. 말로 다하지 못하는 공포와 두려움의 잔해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언젠가 이 상황도 끝날 거라는 기대감이다. 눈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 도살장 같은 화염과 통증과 증오가 곧 증발할 거란 잔혹한 기다림만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다.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함께 스페인 내전이 배경인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 이전에 영화 <광대를 위한 슬픈 발라드>의 배경 또한 스페인 내전이다. 간단한 리뷰를 쓰면서 차마 역사적 배경까지 서술할 용기를 내지 못했지만 사실 이 영화는 서커스단이 압박받고, 아이들에게 웃음을 줘서는 안되는 강압과 같은 간섭을 스페인 내전상황 치하와 파시즘까지 연결시킬 수 있었다. 난 단지 전쟁통에 비수용적이고 광기어린 사랑을 할 수밖에 없는 세 남녀로 쓰는데 그쳤지만 배경이 좀 더 복잡했다는 점에서 단순히 멜로드라마로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차라리 르포에 가깝다. <위건부두로 가는 길>에 비하면 자진참전한 경험을 살려 그 현장을 생생히 복기한 체험수기 한 편을 가장한 소설이지만, 전달하려는 주제에 비하면 문학적으로 비틀지 않은 구성이 오히려 고맙다.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파시즘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가장 깊숙한 곳까지 경험하고 싶었던 그의 열정에 박수를 보내야 한다. 오웰의 모든 문학은 차라리 현실 비틀기로 읽힌다. 누군가 해야 할 말을 오웰의 작품에서 찾는다면 없는 게 없을 정도. <동물농장>이 그랬고 <1984>가 그랬듯. 오웰과 헤밍웨이의 건조함과 차가움은 닮고 싶은 점이다. 그들의 작품은 치렁한 장식도, 미사여구도, 뻔한 수식어도 뺀 상태에서 문학이 된다. 스페인 내전이라는 이상한 전쟁. 영국 식민지 인도 출신의 외국인. 아무런 준비도 훈련도 없이 대강 교육시킨 이방인조차 투입시키는 어떤 싸움. 오웰은 어떠한 상상과 극적 전개를 계산하지 않고 오로지 시간 순서에 따른 생생한 체험만을 기록했고, <카탈로니아 찬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한 지식인의 이데올로기 대한 환멸의 기록이라 칭한다. 이 소설에는 현대 정치가 다투는 모든 이념 전쟁이 모두 들어있다. 전쟁을 배우기에 오웰의 작품들은 더없이 알맞다. 매순간 적절한 깊이와 놀라움을 안겨준다.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어라>는 제1차 세계대전, 전장에 파견된 장교, 간호사와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잉글리쉬 페이션트>나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소재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어쩔 수 없는 공통된 전쟁문학의 한계점이기도 하다. 장교와 간호사가 전장에 있는 건 당연하다보니 예상 스토리도 크게 빗나가지 않는다. 초점은 자연스레 내용보다 '어떻게' 묘사하는가 하는 문체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레마르크는 병사들의 무의미한 대화와 기다림, 그레버와 엘리자베스가 꿈꾸는 평화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그렸다. 얼마나 더 깊고 간절히 혹은 생생하게 그려낼 것인가. 묘사나 문체, 기호에 판단의 근거가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서정적이라든가 관조적이라든가 하면 전장의 서걱거림을 담기에 무리가 있을 수 있다. 승화라면 모를까, 전쟁에 대해 미화하는 것도 그 반대도 좋은 방법이 아닐 것이다. 헤밍웨이의 장편들은 군더더기 없이 건조하다는 점에서 소재에 걸맞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다. 헤밍웨이를 읽으면 배가 고프다. 실제 여자관계가 그랬듯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마초의 이미지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심지어 칵테일조차 소다수와 설탕을 적게 넣는 대신 럼을 많이 넣어 독하고 차갑게 즐기는 게 취향이라니. 이쯤되면 내면에서 타협이 너울댄다. 그의 작품에서 남자에 비해 여자가 단조롭게 그려지는 것도 그의 성향과 관계가 있을까. 오웰과 헤밍웨이, 물론 레마르크도, 시대의 전장에 선 적이 있었으므로 그들에게 전쟁은 한낱 감정문학이 아니었을 것이다. 겪은 고통과 이미지로 환기되어 온 고통은 다른 것이다.

 


 

 



 


 





 

 

 

전쟁과 사랑. 또 하나의 빠질 수 없는 작가는 시배스천 폭스다. 2003년 BBC에서 조사한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소설 20위 안에 <새의 노래>가 들면서 위력을 증명했다. 영국 작가지만 프랑스를 배경으로 전쟁과 사랑, 전쟁의 상흔, 고독 같은 것들을 주제로 경건한 서사시를 펼쳐낸다. BBC 동명드라마가 있다.


1차 대전 중의 프랑스가 배경으로, 전쟁중의 사랑이 아니라 사랑에 실패한 스티븐이 상처극복을 위해 전장으로 들어간다. 전쟁이 사랑보다 컸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다. 폭스는 이제는 기억에서 지워져가는 전쟁과 전쟁으로 인해 상처입은 자들이 잊혀져가는 것이 두려워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1953년생인 그가 1993년에 발표해 일약 스타작가 덤에 올린 작품으로, 전쟁 전과 전쟁 중, 이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남편이 있는 아내와 불륜 관계를 지속하던 스티븐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나자, 전쟁에 참여한 그는 참혹하고 잔인하게 그 시간을 겪어낸다. 포탄이 날아다니고 불구덩이 속에 던져지는 사람의 시체 냄새마저 느껴질 정도로 생생한 묘사가 일품이다. 그 와중에도 이 상황을 타계하여 이성을 잃지 않으려는 스티븐의 의지가 눈물겹다. 몸과 마음, 영혼마저 잃을 만큼 처절한 상황 속에서 견디고 또 견디는 참전 병사들의 생생한 고통과 고뇌를 만지듯 느낄 수 있는 사실적 문체라는 점에서 헤밍웨이와 결을 같이한다.

 

 

 

 

 

 

 

 

 

 

 

 

 

 

 

 

문학은 문학이라서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된다. 사실적이지 않고, 사건을 직접적으로 건드리지 않으면서, 꼬마나 제3자 혹은 해설자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새로운 방식으로도 가능하다. 이질적인 문체와 낯선 개연성, 다 맘에 든다. 초반을 견뎌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더라도 괜찮았을 것이고, 기대 가득한 읽기 속에서 끝을 보기가 아쉬웠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 떠올랐지만 서정적인 내용과 소년소녀가 주인공이자 화자라는 사실 이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이 소설 속에서 건진 <나의 투쟁>을 찔끔찔끔 보기 시작한지도 몇 달이다. 히틀러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는 아니었다. 히틀러의 세계사적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고, 설마 히틀러가 글을 얼마나 잘쓰는지 보자는 의도는 절대 아니다. 그즈음 손대는 문학마다 히틀러가 등장했다. 지나면 또 기억을 못해서 동생한테 읽어놓고 왜 모르냐는 얘기를 듣고, 1년에 한 권 읽는 너랑 1년에 100권 읽는 내가 어떻게 같겠냐고 했더니 말이 안된다는데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돼서 왜 읽어도 기억을 못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봤다. 여러 권 내키는 대로 돌려읽기의 제대로된 폐해일 수도, 기억력이 원래 나쁠 수도 있다. 아니면 버려야 또 들일 수 있는 뇌구조로 자동설계 됐을지도.

 

실제로 제3국의 종족학살 같은 건 문학으로는커녕 언론기사로도 발화하지 못한다. 당장 먹고살기도 바쁜데 소설이 뉴스가 무슨 힘을 갖는가. 내 땅의 전쟁 보다 남의 땅의 전쟁이 눈에 들어올 리도 없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사진과 동영상, 언론에서 전해주는 뉴스화면과 기사로 엿본다고 일어나고 있는 일의 절반이라도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당장 옆집 싸움과 울음소리 신고에도 설마하다 결국 안하게 되는 게 실상이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모든 문학이 현실 같을 수 없고, 모든 문학이 현실이어야 할 리도 없지만, 전쟁이란 것을 겪었기에 위의 문학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전쟁이란 두 글자 앞에 문학은 이보다 더 나약할 수 없다. 전쟁이란 두 글자 앞에 문학은 대단한 힘을 갖는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쟁의 의미와 상태를 생생히 전달한다.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일본의 군국주의 등장에 위협을 느낀 유럽의 좌파가 형성한 인민전선 정부에 대항해 군부와 우익 진영이 일으킨 내란, 뭘 어떻게 정의해야 간단해지는지 도통 모를 것 같은 20세기 두 번의 세계대전, 이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읽으면서도, 읽고나서도 여전히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구분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고, 내 곁에 있지 않다는 걸 느낀다.


한낱 인간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현상을 두고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오늘도 누군가를 상처 입히거나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차라리 눈과 귀를 모두 닫아버린다. 한마디 더 보태서 상처 주느니 그냥 내가 상처 입고 말겠다. 언젠가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는 나를 떠났고, 나는 친구를 이미 보내고 난 후였다. 한 번도 슬프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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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2-01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아이리시스님. <잉글리쉬 페이션트> 너무 좋아해요. 레마르트의 <개선문>도요.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는 읽어보지 못했어요.<새의 노래>에 관심이 가네요. 전쟁문학으로 이렇게 정리해서 한 편의 잘 정리된 페이퍼로 보니 더 알차게 다가옵니다.

아이리시스 2013-02-02 16:40   좋아요 0 | URL
저도 좋아요. <개선문>도 읽어보고 싶어요. 어딘가 비슷하게 닮아있는 점들이 많아서 레마르크를 바로 또 읽을 엄두가 나질 않아요. 잘 정리하지 못했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힘이 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02-0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부전전 이상없다가 출판된 것은 아직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였어요.하지만 이미 우익이 득세하기 시작하고 있었죠.그가 망명한 이듬해인 1933년에 나치가 집권합니다.

요즘 아이리시스 님이 제 블로그에 방문이 뜸해서 서운해요.

아이리시스 2013-02-02 16:31   좋아요 0 | URL
풉 저도 노자님 귀여우시다고 생각했어요=33333333333

왜 뜬금없이 바이마르 공화국 얘기를 하시지, 노이에자이트님은 항상 뼈가 되는 말씀만 해주셨는데 저 얘기가 중요한가..왜 바이마르 공화국 나왔지, 라고 곰곰 생각하다가요, 저는 똑똑하니까요(!) 발견했지 뭡니까. 오류를(!!) 그러니까 베껴도 좀 알고나서 베껴야 하는 건데, 푸핫 하하하 하하하(민망)

그래서 손 안대고 코를 풀었지 뭡니까! 문장 순서를 한 번 바꿔봤어요. (감쪽같죠?) 내용을 몰랐다고 해도 말이 안되는 짓을 제가 본문에 떡하니 적어놨지 뭡니까. >.< --;;;;;; (__) 이건 인사예요. 고맙다는.

아니, 노자님은 제 방문이 뜸한지 아닌지 어떻게 아시고.. 움화화홧. 갑니다, 댓글을 못 쓸 뿐.

댈러웨이 2013-02-0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쟁문학 몰아서 보고 있다더니 드디어 올라왔네요. 그게 언제였더라. 우힛. 별 걸 다 기억하는 댈러웨이! 아직 이 페이퍼는 안 읽었어요. 미리 잘 읽겠다고 갑자기 댓글을 다는 이유는...서운하다고 말씀하시는 노이에자이트님이 귀엽게...여...여...겨져서... =333 =33333 =333333333333

아이리시스 2013-02-02 16:37   좋아요 0 | URL
맞아, 전에 제가 얘기 했었죠. 소문냈어 막. 페이퍼가 좀 오래 묵었어요. 전쟁 페이퍼가 세 개나 있었는데 그건 차차--;; 이상한 거 있죠. 시간이 조금만 지나고 나니까 그 글을 왜 시작했는지 내가 쓰고자 했던 게 뭔지 감이 오지 않아요. @.@@@@@@@@

아, 그리고 댈러웨이님, 댈러웨이님이 절 위해서 번역에 도전하실 책을 하나 발견했어요(무슨 소리지;;).

2013-02-02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2 16: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2 14: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2 16: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3-02-02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책요? (폰인데 연결 댓글 기능이 없었네요...)

아이리시스 2013-02-02 18:40   좋아요 0 | URL
행진의 끝Parade’s End, 포드 매독스 포드.

transient-guest 2013-02-04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도 몇 권 보이네요. 제가 가진 해원에서 나온 옛날판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에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도 같이 들어있었지요. 어린 나이였었고 해서, '서부전전 이상없다'의 속편인줄 알았어요.ㅎㅎ 지금은 이스라엘의 극단적인 action, 그리고 유대계 주류의 여러 이슈들 때문에 덜 공감하지만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도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이리시스 2013-02-06 18:01   좋아요 0 | URL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에 그 책 맞나요? 제가 [동유럽의 조각들]이란 페이퍼에 넣었던 책이랑 제목이 같아요. 그 책은 보스니아 내전에 대한 기록이었죠, 아마. 소설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 그 두 작품이 같이 있는지 신기해요. 레마르크는 다 비슷비슷해보여서 한꺼번에 읽는데에 무리가 따라요. 저는 한 작가를 쭉 읽어내는 재주가 없는 것 같아요. 아무리 좋아하는 작가여도 불가능해요. 트란님 요즘은 어떤 책 읽고 계세요? :)

transient-guest 2013-02-14 04:01   좋아요 0 | URL
레마르크도 theme이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있죠. 저는 위의 두 작품들하고 '사랑할때와 죽을때'까지는 잘 읽었는데, '개선문'은 조금 그랬구요.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읽으면서, 국경과 국경을 방황하는 운명의 당시 유태인들 생각에 좀 짠한 기분이었구요. 그래도 비교적 happy ending이라는게 좋았어요.ㅎ

아이리시스 2013-02-14 19:1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 빌리러 도서관에라도 가야겠어요. 레마르크는 한 권 봐서 궁금하지 않지만 유태인이라니, 관심사라서요. 해피엔딩 원어로 쓰니까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요, 트란님. 멀리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3-02-07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7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침대 머리맡에는 그리스 기행서가, 거실에는 보스니아 배경의 문학이, 책상 위에는 비엔나를 비롯한 오스만 제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이어지는 발칸반도의 역사를 픽션으로 재구성한 인문서, 종일 검색하며 찾아헤매는 책은 터키사나 터키여행서, 궁극적으로 알고 싶은 건 보스니아 내전을 구성하게 된 오래된 역사와 발칸반도에 속하는 국가 그러니까 그리스,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터키-이스탄불의 유럽 부분, 마케도니아 공화국 그리고 루마니아와 슬로베니아의 19세기-20세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상황, 결국은 동유럽 전반에 걸친 교양지식이다. 쿠르드족의 수난 같은 건 덤으로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려면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걸 문학이 해줄 리가 없다. 문학은 언제나 작가의 눈으로 걸러진 세상을 담기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안된다고 배웠다. 쉽게 흥미를 주지만 문학에서 멈추면 아무 것도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바로 그 상반된 매력이 문학을 놓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예전에는 멋모르고 읽어내린 <석양 녘의 왈츠>를 먼지 탈탈 털어 다시 들춘다. 지난 번에 헷갈리는 이름들만 확인하며 간신히 덮으며 내 머릿속 세계사의 부재를 실감하게 한 책이다.

 

 

 

 

 

 

 

 

 

 

 

 

 

 

프레더릭 모턴은 소설의 형식을 빌어 역사를 말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유대인 작가다. 픽션과 논픽션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드는 방식을 선호하지만 이질적인 난해함 대신 이해가 쉽도록 풀어쓴다.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클림트, 테오도어 헤르츨 등의 천재를 낳은, 1888~188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비엔나의 화려함과 황태자 루돌프의 사랑에 관한 비극을 그린다. 그가 특출나게 그리는 배경 역시, 출생답게 오스트리아 역사, 동유럽 역사, 나아가 유럽의 역사로, <석양 녘의 왈츠> 역시 제1차 세계대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데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힌다. 사실 전쟁은 겉으로 밝혀진 가장 큰 불이었을 뿐, 그 전쟁의 밑바닥에 도사린 음모와 어긋난 거래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라데츠키 행진곡>은 할아버지가 전장에서 황제의 목숨을 구하여 귀족이 된 트로타 가문 3대의 융성과 몰락에 초점을 맞춰 1차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의 모순과 문제를 파헤치는 소설이다.

 

 

*

 

 

 

 

 

 

 

 

 

 

 

 

 

동유럽 구공산권의 붕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경제성장과도 맞물려 있다. 아르네 달의 <미스테리오소>에서는 비셰그라드라는 지명이 반복적 등장할 정도로, 스웨덴 대기업 성장과 구공산권 스탈린체제 붕괴가 맞닿아 사건이 진행된다. 소련과 독일, 구공산권 동유럽 국가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를 배경으로 삼은 <밀레니엄> 시리즈는 한층 더 복잡하다. 이 페이퍼를 쓰기 시작하면서 책을 하나하나 사고 읽기 시작할 땐 스티그 라르손을 읽기 전이었고, 이제 완독한 상태다. 북유럽 추리소설에서 동유럽의 지명을 익히고, <드리나 강의 다리>에서 발칸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주렁주렁 매달린 삶을 본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도시 비셰그라드는 드리나 강과 세르비아와 접한다. 보스니아 내전 때 보스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마을이 파괴되고 많은 보스니아인들이 세르비아인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사실을 초점에 놓고 그린, '발칸의 호메로스' 이보 안드리치의 소설은 빽빽하고 막막하다.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차 다리 (위키백과 펌)

 

11개의 석공 아치, 길이 180미터, 1577년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보스니아에서 태어나 오스만 제국으로 끌려가 출세한 정치가 메흐메드 파샤 소콜리의 지시로 완성한 다리.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다리. 인종과 종교 간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던 보스니아의 상처가 고스란히 담긴 소설 <드리나 강의 다리>의 배경이 되는 다리이기도 하다. 베를린의 유고슬라비아 대사였던 안드리치가 베오그라드를 점령한 독일군에게 감금되었을 때 쓴 '보스니아 3부작(드리나 강의 다리, 트라브니크의 연대기, 아가씨)'은 4년 후 한꺼번에 발표되었다. 보고 들은 것, 경험하고 느낀 것을 전설과 경험 속에 녹였다. 하지만 다리를 놓는다고 무조건 화해가 가능한 것은 아니라서 이들의 상처는 여지껏 단단히 봉인된 채 호전되지 못하고 있다.

 

 

**

지구상 나라 없는 최대 민족 쿠르드족의 수난 역사와 억압 받는 현실에 대해 그려온 쿠르드족 출신의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 [거북이도 난다]를 거쳐 2012년 BIFF에서 [코뿔소의 계절]이란 영화를 공개했다. 쿠르드족에 관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해진 이란을 떠나 터키로 망명해 만든 첫 영화라고 한다. 모니카 벨루치의 출연으로 올해 BIFF 제3세계 영화목록 가운데서도 가장 독특해 보이는 영화였다. 한편 [디야르바키르의 아이들]은 역시 쿠르드족 출신인 미라즈 베자르 감독이 쿠르드족 아이들의 암울한 현실을 알리기 위해 최초로 쿠르드어로 만든 영화다. 디야르바키르는 터키의 지명이다. 터키에서는 쿠르드어 사용 자체가 금지되어 있지만 이 영화는 터키에서 만들어졌으며, 감독의 결단어린 용기로 가능했다. 역시 BIFF의 쿠르드 특별전에 어렵게 허가받아 출품되었다. 중동 지역 곳곳에 흩어져 살기에 제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어린 남매의 현실수난을 그린다. 그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한 감독은 역시 쿠르드족 출신으로, 터키에서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이런저런 일들로 터키 군사정권의 억압을 받는 통에 수감되어 쓴 시나리오 [욜]로 1982년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한, 쿠르드 영화의 아버지로도 불리는 일마즈 귀니 감독이다.

 

 

 

 

 

 

 

 

 

 

 

필요하다면 영화는 보면 되고 책은 읽으면 되는데(이보다 쉬운 일이 또 있을까) 이 페이퍼의 영역을 어디까지 확장시키고 또 어디까지 좁혀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대략 2500-4000만명으로 추정되는 쿠르드족의 역사는 웬만한 국가사를 쓰고도 남을 만한 양이다. 이라크, 터키, 이란, 시리아까지 공간적 배경을 넓혀야 하고 무엇보다, 어렵다. 1970년대 이라크 정도가 쿠르드 자치구를 인정했고, 대부분의 국가가 그들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거나 부정했다. 가장 많은 수의 쿠르드인이 사는 터키가 중점이 되겠지만, 쿠르드족의 존재를 부정해온 터키와의 공존관계 역시 현재진행형으로 뭐라 결론내기 어렵다. 유럽연합 가입을 손꼽아 고대하는 터키에게 유럽연합이 쿠르드 인권문제에 대해 난색을 표하면서 터키에서도 조금씩 쿠르드족에 대한 입장이 호전되는 분위기라고 한다.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에 의해 탄압받던 쿠르드족이 후세인 사망과 이라크내 미군부대 주둔을 환영하는 건 역평등에 기인한 일이다.

 

1차 대전에서는 영국, 2차 대전에서는 미국에 협력(이용)당하고, 현재도 국가,영토,지도자 없이 터키,이라크,이란을 오가며 외로운 전쟁을 벌이는 쿠르드족은 현재 미국이 이란을 압박하는 협상카드로 이용되고 있다. 2004년에서 2008년까지 이라크에 파병된 자이툰 부대가 주둔했던 아르빌 지역이 쿠르드자치정부가 통치하는 지역으로 그들은 명백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거라던 어느 의원의 말이 이렇게 한참 세월이 흘러서야 떠오른다. 당시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훗날 이렇게 알게 되는 뜻도 있기 마련이다. 아주 사소하지만 쨍하게 만드는 울림. 여기서 서방 세계의 우상 살라딘과 십자군까지 운운하면 미친 페이퍼가 될 것이므로 까먹지 않도록 살짝 언급만. 잘 알지도 못하는 걸 말하는 건 여기까지. 그리고 네이버 포털에서 한눈에 쏙 들어오는 쿠르드인 분포도를 표시한 지도를 찾았다.

 

 

빨간색 부분이 쿠르드인 분포 거주지다. 터키에 천대 받고 미국에 이용당하는 쿠르드인들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이 구석진 곳에 단일민족이라 자랑하는 내 민족이 제 터전을 잡고 제 땅이라 부르며 제 언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일은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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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사는 아브라함의 순례까지 거슬러 올라가 4대 문명의 발상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를 찍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휘감고 내려와 사도 바울과 헤로도토스의 국가 아나톨리아였다가 동로마 제국의 비잔티움이었다가 이웃나라 그리스와 앙숙인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아시아 땅 97%와 유럽 땅 3%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EU에 속하길 꿈꾸는, 그리스와의 로잔조약에서 에게해의 모든 섬을 내어주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이스탄불을 가진,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기독교와 이슬람이 융합된 복잡한 국가. 무스타파 케말이 아타튀르크의 칭호를 가진 나라. 성 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가 유명한 나라. 푸르고 고즈넉한 곳. 내가 아는 모든 것이 그곳의 모든 것일 리는 없지만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다.

 

많은 국가들이 포진해 있는 동유럽의 사정을 쓰자면 연재로도 모자랄 것이다. 더한 비극은 다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쓰고 있는 것 외엔 더 이상 파헤칠 여력이 없다는 것. 그래봐야 지금도 허우적대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아마 이 두 사람을 알면 윤곽이 잡힐 지도 모르겠다. 모든 국가는 독재자로부터 시작되고, 민주주의를 획득했다고 믿는 순간 진정한 민주주의는 막을 내린다는 사실을 동유럽 역사가 증명해줄까. 나치스와 볼셰비키 없이 발칸을 얘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 또한 그 주범들.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헤르타 뮐러에게 노벨문학상을 안겼고, 케말 파샤(무스타파 케말)는 터키의 영웅이자 독재자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롤모델로 여겨질 만큼 비슷하다. 그들은 오늘날의 근대화를 이뤄낸 걸로 각자의 나라에서 인정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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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와 헤르타 뮐러 외에 내가 아는 루마니아 출신이 있었나. 도나우 강을 여행다큐에서 봤거나 한창 피바다에 빠져 분노할 때 차우셰스쿠를 안 것 이상은 그야말로 백지에 가까워서 지인이 여행을 간다고 해도, 여행기를 들려줘도 아무런 실체적 관념이 생기지 않던 곳. 루마니아 음식은 신맛과 짠맛으로 양분되는데 맛있지만 우리 입맛과는 맞지 않는다고 한다. 드라큘라의 브란성과 요구르트로 구별하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유명하지만 생소한 루마니아 출신의 게오르규가 쓴 <25시>는 제목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내용을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구상 존재하는 누구에게도 25시는 주어지지 않는다. 루마니아의 시골농부가 유대인 오명을 쓰고 붙잡혀 13년간이나 수용소를 전전하며 희생양이 되어가는 과정을 순차적 구성으로 그린다. 쿤데라의 <농담>과 닮은 스토리. 문명 아래 자행되는 이데올로기 다툼과 강대국의 전쟁에 휩쓸린 약소국의 힘없는 자들을 묘사한다. 희생양과 구원의 매커니즘. 혐오와 공포, 인간성 소멸을 파란만장하게 그리는 작품이다.  

 

 

 

 

 

 

 

 

 

 

 

 

 

 

 

체코를 쿤데라와 카프카로 알고 평생 사는 건 자만의 오류다. 모두 아는 것 이상을 알아야 하는 게 현대인이 정보를 대하는 자세이다 보니까 그 정도로는 명함도 못 내미는 세상이 왔다. 터키를 파묵, 루마니아를 뮐러로 배운 문학애호가들에게 우리도 동유럽 출신이라고 자신있게 외칠 작가에 이 정도 더 보태도 좋을 것이다. <대머리 여가수>와 <외로운 남자>로 유명한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극작가 이오네스코, 알바니아의 이스마일 카다레, 오스트리아의 헤르만 브로흐, 헝가리의 임레 케르테스와 몰나르 페렌츠, 폴란드의 여류시인 쉼보르스카, 체코의 이반 클리마와 보흐밀 흐라발은 내가 아는 동유럽 작가들이다. 더 있겠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히 내년에 읽을 문학을 획득하는 관계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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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을 강타한 두 번의 세계전쟁과 그로인해 오랜 공산화를 겪어야 했던 파란만장한 동유럽의 암울하고 막막한 분위기는 문학 속에 살아숨쉰다. 때로 프라하의 카를교를 보며 다리가 눈물을 뚝뚝 흘린다고 표현하던 누군가의 심정이 수긍된다. 그럼 비잔틴 제국에서부터 시작해볼까. 세상에, 이제서야 말인데 세상에는 왜 이렇게 읽을 책이 많고 나는 왜 이렇게 책을 안 읽는 걸까. 대체 가루로 흩어진 시간들은 뿔뿔이 해체되어 어디로 가서 쌓이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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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0 2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31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12-31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분야에 대해 관심있는 이들에게 유용한 내용입니다.저도 관심이 많거든요.
나치 점령 하의 발칸반도도 관심을 가질 만합니다.특히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는 대학살로 악명을 떨쳤죠.옛 유고연방 지역에서 나치에 대항하는 우익과 좌익의 제휴와 갈등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에도 많은 시사를 해줍니다.티토 전기를 참조하세요.
터키에서 오르한 파묵과 함께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야샤르 케말이 쿠르드 출신 소설가입니다.대표작<메메드>는 절판이지만 아직도 그 외 몇 몇 작품의 번역본이 있습니다.

아이리시스 2012-12-31 17:31   좋아요 0 | URL
노이에자이트님이 세계사 분류별 강의 하시면 저는 손 들고 신청할텐데요 :) 뭔가 수준에 맞는 강의가 필요해요. >.<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라는 악마도 있군요. 역시! 티토 전기도 꼭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치에 대항하는 우익과 좌익의 제휴와 갈등은 한국독립운동사의 김구,이승만,박헌영,여운형,김규식 같은 분들 얘기가 맞나요?(제가 제대로 알아듣는 건지..) 야샤르 케말은 처음 들어봐요. 쿠르드 출신 문학가 찾기도 재밌겠어요. 그런데 문학이 영 이질적으로 다가오는 터라 제대로 읽어낼 자신이 없다는 게 문제예요. 뮐러와 파묵도 사실 먼 이야기..

노이에자이트님께도 한 해 동안 감사했어요. 새해에는 정체를 좀 드러내주시길..그리고 재밌고 유익한 글도 많이 부탁드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또 뵈요^^

노이에자이트 2013-01-01 11:58   좋아요 0 | URL
예.제대로 알아들으시네요.역시...유고연방에서 티토는 좌익 게릴라였는데 우익에도 게릴라들이 있었어요.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은 이들 중 누구를 더 지원할까 고심하죠.물론 티토로 결정났지만요.
우리나라에선...임정 쪽에서 루스벨트에게 면담을 여러번 신청하지만 성사되지 못했어요.무장세력의 규모가 너무 적고 분열되어있다고...


2차대전 당시 폴란드 유고 조선의 좌우익 저항세력들의 제휴와 갈등을 비교연구해 보시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 연구에도 도움이 많이 될 거에요.아이리시스 님 정도면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겁니다.

제 정체는...음...그냥 평범한 대한민국 남자? 흐흐흐...저를 여자로 착각하진 않았죠?

댈러웨이 2013-01-01 21:15   좋아요 0 | URL
저 이거 별찜한 페이퍼인데 안그래도 노이에자이트님께서 인정해주셨네요. 일전에 노이에자이트님께서 페터 한트케를 언급해주셔서 관심을 좀 두려고 하고 있는 부분이에요. 저는 이렇게까지 광범위하게 정보 커버는 할 수도 없겠지만, 아이님 정리 고마워요. 그리고 저도 노이에자이트님이 어떤 분이실지 정말 궁금한 사람중의 일인입니다. ^^

아이리시스 2013-01-03 20:10   좋아요 0 | URL
사실은 근현대사 특히 독립운동사 정말 헷갈리고 또 거의 몰라요. 노이에자이트님이 환기시켜주신 거예요. 빨리 더 읽고 공부해서 이 댓글의 정보를 몸소 흡수하겠어요ㅎㅎㅎ 그 당시 루스벨트가 대통령이었군요. 저는 이제 연대 조금 외웠는데..

하긴, 무슨 정체를 더 알겠습니까? 이런 정보라면 언제나 환영입니다. 여자로 착각은 안했지만 친구로 착각할 수는 있을 것 같... 그런데 어떤 책을 보면 될까요, 가능하면 추천도서 부탁드립니다^^

아이리시스 2013-01-03 20:16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페터 한트케는 독일사람인 줄 알았어요. 비엔나 커피의 나라ㅎㅎㅎ 작가였구나. 당연히 독일작가라고 생각해서 저기 넣지도 않았어요. 그럼 혹시 페터 한트케의 작품에도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나오나요?(궁금궁금..)

노이에자이트 2013-01-01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말 소설 재밌어요.<메메드>가 제일 재밌는데 다른 것도 괜찮아요.쿠르드의 민담이나 풍속에 대한 지식도 덤으로 얻을 수 있고요.

아이리시스 2013-01-03 20:20   좋아요 0 | URL
우와 책 두 권 나와요. 메메드는 간만에 원서로 독파해야 하는 건가요?ㅎㅎ 줄거리만 봐도 세상에, 재밌어 보여요.

댈러웨이 2013-01-0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뭐했는 줄 알아요? 전작하겠다던 오르한 파묵, 드디어 번역본 다 구입했어요. 올해 가열차게 읽으려면 배경지식도 좀 필요하겠죠. 이럴 땐 정말 머리 밀고 싶어요. --; 눈 많이 왔어요?

아이리시스 2013-01-03 20:27   좋아요 0 | URL
네, 잘했어요. 짝짝짝 도장 쾅. 다 합해서 몇 권이예요? 거짓말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 새해부터 인증사진 한 장ㅎㅎ 부탁드려요. 그런데 파묵이 하고 싶어하는 얘기는 궁극적으로 뭘까요? 이것도 알려주세요. 저는 도대체 뭔가요ㅠ.ㅠ 읽은 게 하나도 없어요. 창피해, 꺅=.=3

춥기만 진짜 춥고요, 눈은 안왔어요. 여긴 다른 곳 눈올 때 비가 내리거든요. 눈이 뭐 좋다거나 낭만적이라든가 하는 로망이 있는 건 아닌데도, 겨울에 한 번 정도는 발이 푹푹 빠지도록 쌓이는 걸 보고 싶어요.(이런 소심한 소원이라니!)

노이에자이트 2013-01-05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시정부 연구로 주제를 좁히자면...백범일지가 필독서라 하지만 배경지식 없으면 무슨 말인지 몰라요.이 당시 연합국과의 외교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면 이승만과 김구로 독서범위를 좁히세요.임시정부는 상해시절보다는 중경시절이 외교사에서는 더 중요해요.
자세한 것으로 이승만 전기 두 편---정병준 것은 이승만에 비판적이고, 이한우 것은 이승만에 우호적입니다.중경임시정부 시절 외교에 대해 자세해요.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이정식의 여운형 전기도 보세요.

아이리시스 2013-01-05 19:10   좋아요 0 | URL
아..이 댓글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아요. 쉽지는 않겠지만 백범일지, 중경시절, 이승만 전기, 여운형 전기 다 기억할게요, 노이에자이트님. 여운형 전기나 평전은 "좌우합작운동"에 대한 궁금증으로 작년에 계속 읽을까말까 하던 거라서 눈에 확 들어오네요^^

자, 이제부터 폭풍책검색과 장바구니 결제ㅎㅎㅎ

노이에자이트 2013-01-05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터 한트케는 자신을 슬로베니아계 오스트리아인이라고 말합니다.그런데 밀로세비치 장례식에 참석해 찬반논란을 일으키죠.세르비아인들에게도 말할 기회를 주자고 하는 게 한트케의 주장인데, 밀로세비치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주장이냐 하면서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죠.
우리나라에서 연극 좋아하는 사람은 한트케를 '관객모독'의 작가로 기억합니니다.

아이리시스 2013-01-05 19:14   좋아요 0 | URL
페터 한트케를 댈러웨이님도 지난해 내내 추천해주셨는데 한 권도 안 읽어봐서 생각도 못하고 있다가 이 페이퍼 쓰고 제가 얻는 게 많네요. 슬로베니아계 오스트리아인 그리고 밀로세비치까지요. 아 이번에 민음사 출간된 '관객모독' 말이군요^^

노이에자이트 2013-01-05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트케 소설 중 유고내전에 대한 것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다만 2차대전과 그 직전에 일어난 나치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다룬 것은 <소망없는 불행>이 있어요.

아이리시스 2013-01-05 19:16   좋아요 0 | URL
하나씩 댓글 다 달아주신 고마움에 각각 댓글 다는 이런 성실함ㅎㅎㅎ 암요, 새해에는 성실해져야 합니다! <소망없는 불행>이 그런 내용이군요. 저 이 책은 추천도 여러 번 받아서, 더블린에 있는 제 친구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입니다ㅋㅋ 제목만 완전 잘 알고 있어요. 하긴 제가 제목만 알고있는 작품들이 참 많죠. 거의 다예요, 다.
 

 

 

 

"누군가 그랬다.

간절함은 인연을 만들고, 기억만이 그 순간을 이루게 한다고."

-드라마, <신의>

 

 

올해는 정말 많은 시간여행자를 만났다. 사실 시간여행자는 할리우드 영화의 단골 주인공이다. 영화 [나비효과]는 시간여행 자체가 아니라 사소한 행동과 말, 상황 하나를 원인으로 해서 결과가 뒤바뀐다는 사실에 중점을 두므로 제외. 끝난 후 시간이 꽤 흐른 몇몇 드라마들도 제외. 할리우드 영화가 가장 많이 써먹은 시공간적 소재들 전부 제외. 더불어 어릴 적 모험소재로 가장 좋아한 만화 돈데기리의 [시간탐험대]도 제외. 그러면 뭐가 남냐면, 음, 일단 점과 선에 대해 말해보자. 책제목 말하는 거 아니다. 그리고 평행이론에 대해서도. 과학이 아니다. 과학은 모른다. 잘난 척할 철학자의 견해에 대한 지식이 없다. 생각해보면 이 모든 것은 유지태와 김하늘이 나오던 영화 [동감]에서 시작됐는데, 그 영화를 떠올리면 그저 지금은 스타가 된 두 배우의 신인시절만 기억난다.

 

고1때 불어시간. 교과서에 실린 [그랑블루]라는 영화의 포스터에 대해 눈짓발짓 동원해 잡담하다 딱 걸려서 짝꿍은 교실 밖에 서있고, 나는 교실 뒤에 무릎꿇고 앉아야 했던 그때를 말해볼까. 나무로 된 바닥이 차고 딱딱하다며 뒤에 앉은 친구들이 저마다 교과서 한 권이나 책받침을 내밀던 사랑스러웠던 순간. 친구들아, 그때 정말로 사랑스러웠어, 소리라도 치고 싶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그 짝꿍과 나는 키가 비슷해 키순서대로 하면 언제나 짝이 되었는데(전혀 서로에게 호감가질 타입들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 걸 보면;; 걔는 새침한 모범생 타입이었고 나는ㅠㅠ), 그래서 억지로 우정과 신뢰를 같은 시공간에서 쌓아나갔다는 게 더 정확한데, 어쨌든 또 다른 어느 날에 우리는 연습장인가 노트에 동그라미를 크게 하나 그려놓고 공간의 1차원,2차원,3차원에 대해 논하는 중이었다. 공대 지원이 당연시되는 조숙한 이과반 여학생들의 드물게 쓸데있는 쉬는 시간의 심오한 대화였달까. 1학년 때는 문과/이과를 나누지 않았지만 친구와 나는 이과반을 지망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지구와 우주를 갈라놓고 인간은 동그라미 선 위에 살고 이것이 1차원,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면 2차원, 동그라미를 벗어나 살면 3차원 뭐 그렇게. 쉬는 시간이 지나도록 계속하다가 까다로운 과목쌤 수업시간에 또 걸렸을 때 우린 벌서며 킥킥댔고 교무실까지 불려가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우린 어떤 프랑스 영화와 시공간의 과학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혼나야 하는 건가, 뭐 그런 대화를 하면서 다시 교실로 돌아와서도 대화를 이어갔던 웃긴 기억이 있다. 1999년의 일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시간여행자 얘기를 하고 있다.

 

그러면 하루키. 그의 소설은 대부분 그렇지만 일단 이 긴 리뷰를 써갈겨댔던 <1Q84>는 어떤가. 난 언제나 하루키 소설에 대해 할 말이 참 많았지만 경이로울 만큼 매료되어서는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가지치기가 가능해 다채롭게 읽히고 또한 해석이 가능한 그의 소설리뷰를 쓸 때 주목한 부분 역시 여러 명으로 쪼개지는 '나'라는 존재와 시공간여행이었다. 두 개의 달이 가르는 세상. 나이와 시간이 인위적으로 가르는 나. 방금 전의 나와 잠시 후의 나. 10년 전의 나와 10년 후의 나를 상상하면 충분히 하루키 소설 속 인물이 되고도 남았다. 이 모든 시작이 반드시, if에서 비롯되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드라마가 끝난 지금도 은수는 시간여행을 하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 그러니까 대장을 구하기 위해 태양의 흑점이 폭발하는 때마다 제모습을 여는 하늘문을 오가며 외롭고 아프게 혼자만의 시간여행을 진행중일 것이다. 시간여행은, 영원히 함께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면, 언제나 비극일 수밖에 없다. 필연적으로 하늘 아래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이들은 결코 없지만. 내가 여기, 그가 거기 있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에 그런 것. 하나의 선에서 두 개의 점이 함께 평생토록 행복하기란 애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처음 하늘문을 넘어 그를 구할 온갖 약과 도구를 챙겨 다시 하늘문을 넘었을 때 하늘문 너머 세상은 그와 함께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울고 웃었던 그 세상이 아니었다. 그를 만나기 100년 전의 세상이었다. 제기랄, 그녀를 만나는 곳 100미터 전도 아니고-_-;;

 

그래서 그녀는 쓴다. 방금 살았던 그와의 추억 속에 있는 시간들 중에 겪었던 수많은 고비마다의 해결법을, 사실 해결이라기에는 가이드라인에도 못 미치는 메모이지만 혹시 몰라서, 그가 위험한 순간, 왕에게로 가야 하는 순간, 사랑한 순간, 아파한 순간, 헤어질 지도 모르는 순간들에 대해서. 그리고 여기저기 숨겨놓는다. 100년 후 고려 공민왕 시대. 세상을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기철은 이것들 중 몇 개를 손에 넣는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온 것이라 굳게 믿은 나머지 거의 유물 다루듯 그렇게. 거기에는 100년 후 나타날 은수가 쓰던 의료도구와 은수만이 읽을 수 있는 '글자'가 적힌 수첩, 빼곡한 일기와 메모들. 앞으로 펼쳐질 미래들. 100년 후 맞닥뜨려 헤쳐나가야 할 시간들이 빽빽히 적혀있다. 그것들이 허기를 채울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갖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는 고려의 현대인이었던 것이다. 가지고 더 가지고 손에 넣고 다시 버리고 그렇게 공허와 탐욕 사이를 한없이 방황하는 그런 현대인.

 

시간은 평행하다. 과거를 보내고 미래를 맞이하는 게 아니라, 100년 전의 나와 10년 전의 나와 1000년 후의 내가 모두 이 세상 아래 존재하는 거라고 시간여행자는 말한다. 각자의 내가 동시에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이걸 인정해야 당신과 내가 지금 이 순간 만난 일이 기적이 된다고. 은수에게 최영이 그랬던 것처럼. 그를 되살리기 위해 시간여행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은수의 운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쯤에서 이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른 세상에 떨어져 나의 그리움이 모자랐을까, 아니면 믿음이..라고 자책하던 은수는 언제까지나 그를 만나기 위해, 다시 사랑하기 위해 그에게로 가는 시간여행자를 자처할테니까. 그의 목숨이 곧 사랑이었음을 알고 있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사랑은 그것 뿐일테니까.

 

이것이 이 모든 시간여행자들의 사랑과 추억을 가능하게 하는 동시에 이야기를 불러일으키는 이론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 시간은 앞으로만 흐를 뿐 절대 뒤로는 흐르지 못한다. 하늘문이 열려야만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뿐. 100년 전 써둔 바위틈의 이끼낀 필름통 속 메모를 100년 후에 발견할 수는 있어도 시간을 거스르거나 빨리감지는 못하는 법. 그래서 시간여행을 잘못한 그녀를 그는 알아보지 못한다. 아직 그는 그녀를 만난 기억이 없으니까. 손택은 저서 [문학은 자유다]에서 "시간은 모든 일이 동시에 일어나지 말라고 존재하는 것이고 공간은 모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말라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바로 이 시공간을 시간여행자들은 초월하는 것이다. 두 개 중 어느 하나만 벗어나도 나와 너는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데 두 개 모두 합치하거나 하나도 합치하지 못하는 건 그야말로 기적이다. 읽지 않은 책임에도 기억하고 있었다면 확 빨려든 문장이었단 얘긴데, 우연찮게 얼마 전 신형철의 칼럼에서도 손택의 이 문장을 만나고는 얼마나 반갑던지. 손택은 진리다. 어제는 손택의 비평집을 후보군의 책들을 끌어내리며 눈물을 머금고 질렀다. 다른 텍스트에 대해 얘기해보자.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보다 이곳과 저곳이라는 공간으로 더 먹혀드는 곳이 있다. 드라마 [울랄라 부부]에 의하면 전생의 원수가 이승에서 부부로 만나는 거란다. 개는 인간들로부터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 이승의 인간이 죄를 많이 지으면 다음 생에 개로 태어난다는 말까지 있다. 게다가 나는 이 말이 사실이라면 좋겠다. 다음은, 바로 그 사랑이 이뤄지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으로 이승과 저승을 말하는 드라마 [아랑사또전] 얘기다. 아랑은 무슨 연유인지 모른 채 저승사자를 따라 망각의 강을 건너 저승의 숲으로 들어간 와중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지만 이승에서 대체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누구였는지, 왜 죽었는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랑은 자신에 대해 찾기 위해 사또 은오를 찾아갔다 사랑에 빠진다. 억울하게 죽은 아랑은 맘씨 좋은 옥황상제에게 보름달 세 개의 시간을 받고 죽음의 비밀을 찾아나선다. 둘 다 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면서 사람으로 이승을 떠돌다 만나 사랑에 빠진 이들을 가로막는 건 한 공간에 있을 수 없고 한 시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은오는 아랑을 살리기 위해 저승길로 가고 아랑은 한 번 가본 저승길을 떠올리며 가는 길에 만나는 망각의 물을 절대 떠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옥황상제의 배려로 환생한 그들은 꼬마로 만난다. 이승과 저승 두 개만 있는 게 아니다. 이승에 살더라도 이 시대와 저 시대가 또 두 사람을 가를 수 있으니까. 그럼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는 또 어떤가.

 

이 소설은 수없이 많은 갈래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일단 30년의 세월에 초점을 맞춰보자. 다분히 의도로 보이는 장면이고 그래서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갈등이 첨예하지 못하다. 더 깊고 뭉클한 데가 많다. 여백의 美 보다는 보여주기가 우선하는 영화로는 적합치 않다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문학으로만 존재해야 할 이 소설은 바로 그 문학적인 면이 해석과 상상과 비극을 동시에 불러온다. 과거의 일을 원인으로, 미래의 일을 결과로 규정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 모든 이들은 자기가 처한 혹은 만들어낸 현실의 기준으로 사건을 천명(闡明)하는 것. 해석. 시공간의 괴리는 그것을 불가능케 하고, 소설의 바깥에서 우리가 보는 진실 역시, 마지막 남은 이의 목소리 뿐이다. 마지막 남은 이가 바라보는 시점에서의 보이는 진실이다. 시공간의 왜곡이란, 진실을 얼만큼 빗겨갈 수 있나.

 

천산수도원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자국. 30년의 시차를 두고 각각 펼쳐지는 두 개의 진실들. 마주하는 명제는 이것. 시공간의 일방향성. 내가 존재하지 않아도 시공간은 변하는 것. 나 없이 만들어지는 영화같은 것. 과거는 미래를 바꾸지만 미래는 과거를 바꿀 수 없다. 닮았을지언정 둘은 결코 뫼비우스의 띠처럼 결합할 수 없으므로. 천산수도원 묘지 안의 벽서. 성경구절들. 맞춰지는 퍼즐은 누군가의 상상 속 소설이 아니라 진실이 확실한가.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이제는 확인해줄 수 없는, 누구도 전체조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각각의 입장에서 서술될 수밖에 없는 이야기. 그게 이 소설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인현왕후의 남자] 속 남자 붕도는 저곳에서는 쿠데타에 얽매인, 왕비를 지켜야 하는 비운의 무사로 적에게 죽임 당할 위기에 있지만, 이곳에서도 인현왕후의 남자로밖에는 살지 못한다. 조선 숙종 시대의 인현왕후 시해시도의 밤과 재기를 앞둔 발랄한 스캔들메이커 여배우 희진을 이어주는 건, 조선시대 붕도를 마음에 품은 어느 유곽의 기생이 준 부적 한 장이다. 이 드라마는 로맨스면에서만 탁월하다. 그리고 생생히 재생되는 조선시대상. 현대는 억지스럽지만 그 긴박함은 좋았다. 그리고 애정씬. 둘은 미치게 잘 어울렸다. 사랑을 하고 싶어질 정도로 잘 어울렸다. 함께 있지 못하면 어떻게 서로가 서로의 체온을 느끼고 서로가 서로를 껴안을 수 있을까. 둘은 늘 헤어지고 다시 만난다. 경복궁에서도 제주 공중전화박스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기다린다. 시공간을 다루는 어느 드라마도 이토록 빈번히 이동을 시도하지는 않았는데 이 드라마만은 유일하게 이곳에서 필요할 때마다 이곳에 나타나고, 저곳에서 필요할 때마다 저곳에 나타나는 인현왕후의 남자를 만들어냈다. 그는 동해번쩍, 서해번쩍 홍길동 아니 이 세상에 번쩍, 저 세상에 번쩍 하는 인현왕후의 호위무사 김붕도였다. 둘이 처음 만난 경복궁. 지금 이 순간, 인현왕후와 그녀의 잊혀진 무사에 대한 숨겨진 역사다큐의 내레이션을 맡은 희진. 희진은 붕도를 느낀다. 둘은 그렇게 400년의 역사를 뛰어넘어 한곳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그렇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진실을 부여잡은 채, 자신의 목숨보다 서로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모든 인간, 모든 식물, 모든 동물이 모두 같은 방법으로 성장하고 서식하며 서로 파괴하는 과정에서, 절대 실질적인 죽음을 맞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 속에서 하나의 다양성을 맞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모두 무심하게 서로 밀치고 파괴하며 번식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형태를 가지고 잠시 나타났다가는 얼마 후 또 다른 형태를 취하며, 그들을 움직이기를 원하거나 혹은 그렇게 할 능력이 있는 존재의 뜻에 따라, 단 하루 사이에도 수천 번씩 그 형태를 바꿀 수도 있으되, 자연의 어느 한 법칙도 그 일로 인해 단 한순간이나마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사드, <미덕의 불운> 중에서]

 

사드의 소설 속 맥락은 그런 게 아니지만, 딱 이 문장만 놓고 본다면, 그래, 괜찮다. 우리가 어떤 존재라도, 어떤 형태라도, 어떤 변화를 맞이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니. 시간여행자를 이해하려면 남이 볼 수 없는 것까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내 생각은, 사드의 문장을 끌어오기 전 이 페이퍼를 딱 끝냈으면 좋을 뻔했다. 말이 길어지면 늘 후회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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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11-17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저는 시간 여행 보다는 평행 우주에 대한 이야기가 더 좋아요. 어쨌든, 이건 할 소리가 아니고, 저는 예전에 시간여행자의 아내 였던가 하는 책에 구미가 당겨 언젠간 읽겠다 다짐을 했었지만 입때껏 읽지 않고 있어요. 시간 여행은 그 이름 만큼 흥미롭고 다채로운 주제이지만 또 그만큼 뻔하고 지루한 소재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나저나 아이님 아랑사또전 정말 좋아하시나봅니다ㅎㅎ 또 오랜만이에요!

아이리시스 2012-11-17 15:57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안녕. 우왕 반가운 마나짱!!! 안녕안녕.

저도요, 그때 그 책 구판으로 우리집에 있다니까요. 먼지 쌓여서. 별로 재미가 없었던 걸로 기억해요. 읽다 말았어--; 아랑사또전(이거 말하기 싫지만) 진짜 재미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근데 나는 스무번을 봤어요. 스무시간을 넘도록 봤어..( '')

오랜만이에요! 주말에 뭐해요?

댈러웨이 2012-11-17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새로운 거 하나 배웠어요. 시간여행이라는 용어가 있는 거네요. 상대성 이론이랑 막 연결되네요? (지금 공부 못한 거 티 내는 거죠? --;)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저는 올해 그런 걸 다룬 책이나 영화를 뭘 봤나 싶은데, 생각나는 게 마땅히 없네요.

이 다방면으로 커버한 페이퍼에 어떤 댓글을 달까 무지 고민하다가, 1. 손택 질렀군요? <타인의 고통>은 완독한 거에요? 2. <지상의 노래>는 이번 주문에서도 밀렸어요. 생각도 못하고 있었네요. ㅠ.ㅠ 3. 저 문단만 저렇게 떼어놓고 보니까 사드의 <미덕의 불운>이 정말 읽고 싶어지는 거에요. orz.

한 페이퍼당 한약 일주일치, 도합 한약 2주일치를 폭탄으로다가! 이 페이펀 참 재미나서 용서해주겠어요! 아이님, 안녕!

아이리시스 2012-11-17 21:51   좋아요 0 | URL
저도 그게 뭔지 모르겠어서 시간여행자라고 했어요. 과학공부하기 싫어요. 재밌을 것 같은데 혼자하기는 싫어요. 멋지지 않아요? 시간여행해서 꼬마 댈러웨이님 만나러 가거나 20대 댈러웨이님 만나러 가고 싶어요. 사실은 저를 만나러 가고 싶어요. 못다한 사랑을 이루러..( '')

<타인의 고통> 다 못 읽었어요. 매번 펼쳐서 읽다가 자고 읽다가 자고 그래요. 어제는 [해석에 반대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훑어보고 잤어요. 논문공부하는 줄 알았;; <지상의 노래>는 재미있어요. 그러니까요. <미덕의 불운>의 가독성은 저한테 짱이었어요. 그리 길지도 않았지만 최근에 그렇게 잘 읽히는 책이 없었거든요.

사실은 이거는 <신의> 마지막회볼 때 썼던 거니까 오래 전에 쓴 건데, 지난 달에 쓴 거예요. 지금 끝나고 시작한 드라마가 2주나 방영했어요--; 게으름이 하늘에 닿으려 하고 있어요.

댈러웨이 2012-11-17 22:03   좋아요 0 | URL
저는 못 읽은 책들을 좀 읽으러..(쿨럭~) 그리고 저는 지금의 모습이 더 나아요! 근데 꼬마 때는 정말정말 구엽긴 했어요..(쿨럭~) 아 이 페이퍼는 이런 댓글 다는 페이퍼가 아닌거죠??? 저는 제 방인줄 알았다는. --;

아이리시스 2012-11-17 22:18   좋아요 0 | URL
댈러웨이님, 거긴 지금 12시 17분이예요? 그러니까 일요일? 저는 지금까지 쭈욱 우리가 처음 알게된 때부터 방금까지 쭈욱 제가 더 빨리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저는 말을 안하고 있으면 꽤 똑똑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페크pek0501 2012-11-18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리시스 님, 안녕? 여전히 잘 하고 계세요. 흐뭇...ㅋ

아이리시스 2012-11-19 02:07   좋아요 0 | URL
페크님, 우리 오랜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맥거핀 2012-11-18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 솔직히 추천을 잘 안하는데 이글에는 추천을 눌렀습니다. 드라마나 소설, 영화 같은 수많은 이야기들은 결국 시간이나 공간을 늘이거나 줄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뭐 꼭 시간여행이나 시간 거스르기 같은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예를 들어 어떤 영화에서 어떤 한 장면에서 며칠 후의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은 시간을 압축하는 것이고, 그 시간을 생략하겠다는 작가의 결단이기도 하고, 또 그 (압축된) 중간을 상상하라는 관객에게 보내는 권유이기도 하죠. (물론 공간에 대해서도 비슷한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구요.) 그런데 그것이 종종 색다른 패턴을 보여주는 경우들이 있고, 그런 영화들, 그런 이야기들에는 늘 매료되는 것 같아요. (오..진짜 손택의 저 말은 명문이군요.)

아..물론 이 글의 핵심은 나는 고딩 쉬는 시간에도 '차원'이라는 것에 대해서 논했던 여자야, 라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

아이리시스 2012-11-19 02:13   좋아요 0 | URL
우왕, 추천 잘 안하는 남자 맥거핀님께 낙점된 글입니다(으쌰으쌰).. 그런데 같은 이유로 저도 이 글이 맘에 들어요. 살짝 서정성도 있고 철학성도 있고. 그런데 텍스트를 드라마로 채워버린 건 어쩔 수 없는 제 드라마 편애 때문이기도 하고, 제 생각에는 맥거핀님이 이 주제로 글을 쓰면 참 재밌을 것 같아요. 좋은 영화들이 등장하는 멋진 글이 나올 것 같아요. 저는 이미 손택의 저 말을 외워버렸어요..

네, 이 글의 핵심은 고딩 쉬는 시간의 심오한 대화로 타임슬립한 저의 시간여행에 대한 얘기랍니다. 딴 얘기를 시작하면 오늘 안에 안 끝나고 또 오글거리니까..

굳나잇ㅡ 맥거핀님.

Shining 2012-11-19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드라마... 나는 왜 드라마를 못 보는가... 네, 저 그래서 아이님 드라마 얘기는 타임슬립(!)합니다. 고백할게요, 저는 드라마를 못 볼 뿐 아니라 드라마 관련 얘기도 못 읽더군요(흑).

지상의 노래, 에서 죽어가는 아내와의 이야기, 가 제일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신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아내의 말, 그런 아내를 이해할 수 없는 남자의 말. 전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용서하거나 용납하는 데 결코 관대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주말 내내 초바빴어요_- 오늘 새벽에 글 하나 올리고 지금 다시 보니까 오타와 비문이 장난 아닌... 부끄러워요_-

아이리시스 2012-11-19 15:54   좋아요 0 | URL
어.. 나는 아내와의 이야기 따위는 완전히 까먹어버렸는데요? 저는 교차편집만 기억에 남아요. 그리고 성서구절.. 저 성경책 펼쳐서 사무엘하 13장 읽었어요. 요즘은 랭보의 시를 베껴쓰고 있어요!

같은 드라마(적 요소라고는 해도) 저는 시트콤을 못보거든요. 그냥 그렇게 안되는 것들이 있더라고요. 왜 그런 지는 나름 분석이 가능하고 샤이닝님도 알 것 같은데 그거에 대해서는 패스. 저는 아마 잠을 줄여서라도 볼 것 같은 이런 집착--;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 배우들의 필모그래피 확인차원이랄까. 얼마 전까지는 송중기의 사랑을 받는 문채원한테 빙의했다가.. 이제는.. [뮤직뱅크 in 칠레] 이런 거 보면서 흐뭇하다는;; (도대체 나의 취향은--;)

그러면 샤이닝님은 미드나 영드도 안봐요? 이건 좀 궁금하다.. 그건 뭐랄까, 좀 아쉬운데요?

Shining 2012-11-20 11:55   좋아요 0 | URL
일드는 본 적 없지만 미드나 영드는 꽤 좋아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다만 많이 본 건 아니고 보다가 중간쯤 버려둔(로스트, 나 그레이 아나토미, 위기의 주부들 등등) 것들이 많구요_-; CSI는 광팬이고 멘탈리스트나 캐슬, 화이트 칼라 같은 거 잘 보는 편인데 대신 한 시즌을 이틀에 다 보는ㅋㅋㅋㅋ

그러니까 저는 연재를 못 기다리나봐요! 연재소설도 연재만화도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보는 걸 보면 그것도 하나의 요인인 것 같아요. 드라마는 최소 16시간 적어도 20시간의 연재를 기다려야하고 클리셰를 견뎌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요_- 한 번 보고 오 재밌네, 해도 잊어버리는; 그 다음날 챙겨보는 건 못해요. 아니다, 사실 TV 자체를 잘 안 봐요. 뉴스, 스포츠채널, OCN이나 채널 CGV, 주말 예능(무한도전 빼곤 그것도 챙겨보진 않고;) 이 정도만 봐요ㅎㅎ

근데 뭐지... 쓰다 보니 저의 TV시청 패턴을 다 쓰고 있어ㅋㅋ

아이리시스 2012-11-20 17:04   좋아요 0 | URL
응, 샤이닝님 얘기를 똑같이 하는 동생이 우리집에도 있거든요. 미드나 영드는 원래 한 시즌을 이틀에 다 끝내는 게 정석입니다(!) 요즘 물이 올라서 우리나라 것도 그렇게 보고 있어요. 근데 역시 드라마는 일상 속으로 침투시켜서 하루에 한 회씩 보는 연재물 같은 느낌이 더 좋은 것 같다고 송중기를 주말 내도록 보면서 생각했어요ㅋㅋㅋ

게다가 드라마 보다는 늘 제 '드라마에 관한 글'이 더 재미있다고 확신합니다!!!(응?)
^_______________^

2012-11-19 2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0 17: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9 2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너무 길어서 중간쯤의 감흥과 댓글용 코멘트를 다 잊어버렸어요. 핸폰으로 읽고 쓰는 중이라 정교하지 못해요~. 아 컴터하기 넘 힘들어요. 집에선 인터넷이 안 되고 직장에선 빨리 퇴근하고 싶고.. 집에 가면 전 석기시대여요. 요즘은 티비도 안 보니까 집에 가면 목욕하고 음악듣고 책읽으며 동굴 파다가 잔다지요~.ㅎㅎ 아이님 이 글 중간에 좋은 게 많았어요. 1q84부분, 고딩회상부분, 손택의 명문장.. 다른 부분의 글이 나쁘다는 건 아니고 특히 더 좋았더라는.. 신의, 마지막 세 개만 봤는데 그런 내용이었군요~. 댓글 엉망이죠? 이해하세요.. 투썸에서 야밤에 마땅히 멀리 해야 할 케잌과 커피를 먹고 마시며 검지만으로 이 글 쓰고 있어요~~*

아이리시스 2012-11-20 17:18   좋아요 0 | URL
아니 핸폰으로 이렇게 긴 댓글도 쓰다니, 섬님 짱!! 집에서는 왜 인터넷이 안되는 거여요? 저희집에는 제가 와이파이도 손수 넣어놓고 원래 데스크탑에 들어오는 과속 케이블로부터 연결된 공유기도 있고, 다른집 인터넷도 엄청 잡히던데 그래서 하나 드리고 싶은 심정이여요. 그런데 케잌과 커피와 함께하는 야밤의 알라딘도 재미가 있으니까요. 시골가면 그렇게 되잖아요. 예전에는 산으로 뛰어다니고 나가서 숨바꼭질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커서 각자 노트북/스맛폰 이런 거 다들 들고 시골로 모여드니까 여튼 풍경이 확 변했어요. 동굴 파는 느낌 그것도 굉장히 괜찮은데~ㅎㅎ

제 글이 좋은 건 저도 알아요. 제가 요즘 좀 미친 것 같으니까요, 제 말은 걸러서 들으셔야 돼요!! 꼭이요!!!

루쉰P 2012-11-1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시간여행자 한 명 돌아왔어요 제 서재 가 보세요 ^^

아이리시스 2012-11-20 17:19   좋아요 0 | URL
루쉰님 진짜 시간여행자 같아요. 다른 세계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낯설고 반갑고!!
 

 

 

 

활력과 탐구가 동시에 필요해서 사드의 소설을 몇 권 사들였다. 사상가인지 문학가인지 사이 어디쯤 존재하는 일명 사드 후작(1740-1814)은 스물 두 살즈음 영화로 처음 만났다. 누구와 함께 볼 영화는 아니고 스무살이 되기도 전에 나온 영화라 혼자 보게 됐던 것 같다. 이제 그를 단지 외설적이고 도착적인 성적묘사로 이루어진 형편없는 작품 몇을 발표한 퇴폐적이고 난잡한 성생활을 한 프랑스 어느 작가라고만 기억하기엔 세월이 많이 흘렀고, 그에 대한 평가나 판단 또한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왜 그런 작품들을 썼는지, 어째서 그토록 방탕한 성생활에 몰두했는지 같은 것들을 아는 게 어떤 도움이 될 지는 모르지만 욕 듣고 씹히는 와중에도 시대를 뛰어넘어 여전히 읽히고 회자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의미는 충분하리라.

 

읽기를 멈출 수가 없다. 재밌다기 보다는 호기심에 가득차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읽는다. '초롱초롱한'은 역시 내 바람일 뿐이겠지만. 하지만 처음 사드를 만났을 때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출생으로 어떤 시대와 환경에서 자랐는지 관심없었다. 음란하고 외설적인 글 때문에 쓰지 못한 채 감옥에 갇히자, 배설물로 벽에 글을 휘갈기던 광적존재로 기억에 남아있는데, 그 영화는 사드의 여느 작품이 아닌 사드의 일대기를 다룬 [퀼스]였다. "쾌락은 내 인생의 모든 것, 생명과도 바꿀 수 없다"던 사드의 목소리가 두 시간 러닝타임 내내 머릿속에서 뱅뱅 울리는 그런 충격의 도가니를 체험했다. 외설적이거나 사디즘적인 면들이 거부스러웠던 게 아니라, 이토록 쾌락에만 집중하여 온갖 스캔들을 뿌리고 다니다 장모에 의해 감옥에 갇히고, 그녀의 호소로 왕에게 사면장 없는 구금명령을 받았던 그가 문학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다. 사드가 주목받는 이유는 음란하고 외설적인 작품을 썼다는 것 뿐 아니라 실제 삶이 방탕과 쾌락으로 점철되어 감옥과 정신병원을 오가며 일생을 보냈다는 사실이 논하기 좋기 때문이다. 이후 우연한 호기심으로 파졸리니의 [살로 소돔의 120일]을 보는데 구역질이 올라왔다. 한편 처절하면서도 잔혹한 성적묘사로 일관하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올 여름 동서문화사에서 <살로 소돔의 120일>을 출간했는데 적나라한 내용 때문에 문화부에서 배포와 수거를 결정중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설마 이런 시대, 이런 세상에서 책 한 권을 수거한다고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말이다.

 

 

 

 

 

 

 

 

 

 

 

 

 

 

파졸리니의 영화는 차라리 고어에 가깝다. 좀비물,하드코어 심지어 뱀파이어물에도 그다지 흥미는 없는데, 이성의 분뇨에 흥분하고 심취하여 먹고 먹이기까지 하는 장면을 흥미와 경악의 중간 즈음한 비명과 탄식 없이 지나치기는 힘들다. 사드는 귀족의 아들이었다. 인간답지 않은 성적취향을 논할 때 처제와의 불륜을 예로 드미는 건 이제 그리 수위높은 예는 아닌 듯하다. 문정희 시인이 골반 위에 부서지는 집으로 그 인생을 표현한 프리다 칼로의 사랑 디에고 리베라 또한 처제 크리스티나 혹은 아내의 친구와의 관계가 탄로나면서 그녀와 이혼한다. 아내가 해주지 못하는 욕구충족을 했다고 말하면 할말 없지만 이후 프리다 칼로와 재혼을 하면서 평생 그녀에게 절망과 고통, 상처를 안겨준다.

 

칸트와 사드와 라캉을 한 번에 철학과 정신분석학적으로 비교하면 재미나겠지만 일단 사드만. 그는 프로방스 지방의 명문 출신으로 통칭 사드 후작으로 불리고, 사디즘이란 명칭을 낳았다. 가학적 변태성욕의 대명사로 자신의 가문마저 사디즘의 대명사로 만들어버렸다. 부친이 죽으며 물려받은 후작 지위에도 불구, 가산을 탕진할 정도로 마르세유의 홍등가에서 매춘부들과 쾌락을 즐겼다. 성 도착증과 매춘, 음란물 유포죄 등 줄줄이 열거가능한 죗값을 치르느라 인생의 3분의 1을 감금당한 채 살던 그는 정신병원 또한 번갈아 들락거렸다.

 

 

 

 

 

 

 

 

 

 

 

 

 

 

 

두 자매가 있다. 쥘리에뜨와 쥐스띤느는 분명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매가 맞다. <미덕의 불운>(1791)과<악덕의 번영>(1797)은 두 자매의 이야기를 각각 담는다. 두 자매 중 언니인 쥘리에뜨는 <악덕의 번영>, 동생 쥐스띤느는 <미덕의 불운>의 주인공이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유산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가문을 나와 세상에 내던져진 어린 두 자매는 갈 곳을 잃고 헤매다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든 살기로 다짐하는데, 그 다짐의 양상이 자매치고는 판이하다. 언니 쥘리에뜨는 여자로서 할 수 있고 팔 수 있는 모든 것을 팔거나 그러모아 남자를 홀리거나 재산을 모아서 돈 많은 남편을 가진 귀부인의 자리에 오른다. 일명 악덕의 번영. 동생 쥐스띤느는 몸을 팔거나 훔치거나 거짓을 말하는 일을 모두 거부하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는 이들은 누구나 그녀를 이용하고 짓밟고 팔아넘기고 성적학대하는 이들 뿐이다. 길에서 굶거나 맞고 있는 거지를 도와 일으켜세워도 그들은 은혜를 갚겠다며 어디론가 데려가서는 팔아넘겨 이득을 취하거나 성적노리개로 이용하거나 일을 시켜먹거나 하는데 일명 미덕의 불운. 두 자매의 일생은 보여준다. 미덕과 악덕의 역설을 논하며 선과 악을 전복시키고 어느 쪽이 더 견디기 쉽고 이용하고 쉽겠냐고 묻는다. 먼저 출간된 <미덕의 불운>에서는 나열할 수도 없을 만큼의 역경과 고통 끝에 귀부인에게 당도해 죽지 못해 산 이야기, 죽을 뻔하다 도망친 이야기, 죽음에서 갓 도망쳐나온 이야기를 열거하며 도움을 요청하던 동생 쥐스띤느의 얘기를 듣던 귀부인이 바로 언니와 형부임을, 그래서 지금껏 받고 있던 모든 혐의를 벗겨주는 운명론적 결론으로 약간 김빠지지만 그 과정이 워낙 흥미진진하고 생생한 고통 속 증언이라 어렵지 않게 문학성을 획득한다. 구구절절하고 눈물겹다.

 

<살로 소돔의 120일>은 루이 14세 치하 4명의 권력자가 젊은 남녀 노예들을 거느리고 120일간 벌이는 향락을 그린다. 파졸리니의 영화에서는 파시즘 정권하로 무대와 시대가 옮겨진다. 권력과 향락이 닿아있고, 쾌락과 허무가 다르지 않음을 이 한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증명된다. 시대와 배경을 완전히 옮겼는데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 기존의 것들. 가만보면 쾌락을 즐기는 자체가 문제라기 보다 노예라는 이름으로 거부할 특권도 없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근친상간, 남색, 혼음 등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모든 것을 누리고 살았을 그지만 결혼 6개월도 지나지 않아 신성모독으로 체포된 걸 보면 그의 변태성과 가학성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그는 온갖 묘사로 이 작품을 채우면서 비록 어긋난 방향인지도 모르지만 기성의 종교와 도덕에 반기를 들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도가 지나쳐 인생을 감옥과 정신병원, 작품을 검열의 표적으로 만든 것만 제외한다면 그는 기실 가장 강하게 기존질서를 반박하는 혁명분자였던 셈이다. 실제로 훗날 반혁명분자로 찍혀 나폴레옹 치하에도 자유롭지 못했다.

 

사드를 두고 성윤리를 논하는 것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쾌락을 인생 최대의 가치이자 모든 것으로 여겼고, 권력과 기성질서와 도덕에 매인 삶을 부정하고 오로지 자유로움을 추구했던 그의 작품묘사 중 가학적이고 변태적인 상당수는 나치정권에서 상대에게 가혹함을 가할 때 응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오늘날 그가 추구한 쾌락적 가치는 독재와 권력, 강요와 부자유 등 기존의 것을 반박하는 하나의 혁명 혹은 반항의 이미지로 여겨지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가 새로 쓰여지고 있긴 한 모양이다. 더불어 사드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수도원의 풍경은 스산하고 타락한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가장 성스럽고 경건해야 할 지상 유일한 장소의 추악한 면을 들춰내 상세하게 묘사한다. 하루도 참지 못한다는 비금욕의 수도사들. 같은 대상인 것조차 지겨워 이틀에 한 번씩 다른 여자들을 안는 것. 감금된 여자들을 차례로 취하다 지겨워지면 방사한다는 명분으로 아무도 모르게 죽이므로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것. 종교가 성스럽다는 건 오늘날도 통용되지 않는 일인데, 역사상 한 번도 그 성스러움과 경건함을 가진 적이 있을지 의심되는 그 종교라는 이름으로 도덕을 요구받고, 정치라는 이름으로 억압을 강요당하는 현실이 그는 싫었던 것일까. 눈에는 눈, 이에서 이를 명분삼아 같은 방법으로 이 모든 벽을 허물어보려 한 것일까.

 

 

 

 

 

 

 

 

 

 

 

 

 

 

 

 

사드를 검색하니 이렇게 많은 책들이 딸려나왔다. 사드를 시대의 혁명아나 반항아 혹은 사상가로 접근하다가 나도 안드로메다 갈지도 모른다. 역시 사드를 두고 성윤리와 종교적 성에 대한 철학과 사상 강의하기가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는 역시 변함이 없다. 다소 어릴 때는 뭘 몰라서 비위가 좋았나 보다. orz 다시 본 파졸리니의 영화는 몇 장면만 겨우 봤는데도 토할 것처럼 메슥거려 참기 힘들었다. 그의 생애와 몇 작품만 보고는 단지 외설적이라든가 저질 작품성이라든가 근본적으로 뒤틀린 반항아라든가 그런 판단을 내릴 수도 없어 보류하겠다. 사랑과 쾌락이 맞닿아 있을 수 있을까. 정작 중요한 건 내가 사드의 작품 속에서 남성의 성적쾌락을 만족시키기 위해 또 다른 인간(약한 남녀 모두)이 존재하는 것이지, 사랑이라든가 증오라든가 미움이라든가 그런 감정들을 하나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한없이 회자될 작품이자, 종교계에서도 거부하겠고, 문학계나 예술계도 미쳤다고들 하는데 대체 이 괴짜 사드를 어디에다 끼워야 하나. 절대본능과 절대자유를 추구했다고 한다면 지독한 쾌락주의자로 보겠는데, 그렇다면 자기 쾌락을 최대한으로 달성하기 위해 끼친 방탕아적 실생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작품 속 권력자/수도자/가해자들에 자신을 빙의한 채 써내려간 저 많은 작품들 속 피해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자유를 추구하기만 하면 쾌락이 달성되고, 쾌락이 달성되기만 하면 끝인가. 실제 그는 감옥과 정신병원을 들락날락거리며, 어린시절 봐온 아버지의 권위와 강요당한 정략결혼에서 폭력과 억압을 당했고 그것을 사디즘의 시초라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상대방에게 가하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 받은 상대방의 '반응'에서 쾌락을 얻는다는 사디즘의 어디쯤.

 

그의 상상력이 끼친 나치즘의 어마어마한 가학적 고통의 끝에 사드를 올려놓으면 그가 약간은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살로 소돔의 120일]을 제정신으로 보면서 나는 적어도 사흘 내내 끼니 때만 되면 떠올리지 말아야 할 것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이건 사드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파졸리니의 잘못으로 돌려도 맞다. 문화부에서 거부하는 책 <소돔의 120일>을 읽지 않고 파졸리니의 영화 만으로도 충분히 지옥을 경험했으니, 역으로 더욱 더 그의 작품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미덕의 불운>에 상응하는 <악덕의 번영>과 <소돔의 120일>을 나도 모르는 내 손으로 결국 장바구니에 넣어 주문버튼을 누르고 만다. 고통을 가하며 받는 자의 얼굴에 드러나는 고통의 적나라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흥분과 쾌락을 즐겼던 이들, 나중에는 눈을 뽑고 혀를 자르고 유방을 잘라냈다. 나는 책을 주문하는 내 손을 자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떤 상상력이 더 필요한 건지 기어이 보겠다고 사드와 맞짱을 뜨려하나 말이다. 백발백중 내가 질 것 같고, 나는 기대와 충격을 동시에 경험하는 색다른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참, 4년 전에는 그래도 (아직은) 어디가서 나 젊어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스물 몇 살이었다. 최초로 흑인 대통령을 뽑은 백인 나라는 지금도 그때도 오바마를 선택했지만 나는 그들의 선거제도에 대해 몰랐다. 그리고 이제 공부한다. 알고 싶었다. 혹자는 세상에서 가장 복잡한 룰을 가진 선거제도라고도 한다. 1787 헌법 규정 후 단 한 번도 바뀐 적 없는 선거인단을 통한 간접투표.. 25년간 미국이 현재 우리나라처럼 직선제를 하는 줄 알았다가 (내) 무식함에 충격이 컸다. 미국은 대선을 치르고 다음날 오후에나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당연히 3억표를 다 개표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줄로만 알던 것이다. 동서부 시차가 만들어내는 당연한 현상인 줄은 몰랐다. 이제와 보니, 아무와도 미국의 선거제도를 주제 삼아 대화라는 걸 하지 않았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튼 몇몇 티비 프로그램에서 미국대선이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 같은 것들을 얘기하는데 다른 건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지금껏 많이 봐주고 있는 오바마가 2기 행정부에선 북한의 비핵화를 더욱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북한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일 거라고 진단하는 어떤 교수 앞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별로 좋지 않잖아-_-;; 전투와 전쟁과 갈등조장에서 쾌락을 얻는 이들도 다소 있는 것 같으니, 자, 이제 사드에게서 우리가 취해야 할, 상상의 강도를 가장 높여줄 쾌락적인 무언가를 취할 때다.

 

p.s 동서문화사 번역은 여기저기 말이 많다. 보지 못했는데 말로만 들어도 질릴 만큼 많다. 이상해도 구체적으로 무엇이 이상한지 콕 집어내지도 못하는 독자에게, 좀 많이 가혹한 일인데, 일단 이 정도 사전지식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또 산다.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궁금하니까. 그리고 또 읽는다. 읽고나서 낱낱이 까발려준다. 그러다가 내가 번역한다. 마지막 문장은 거짓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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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6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16 18: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댈러웨이 2012-11-17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이 페이퍼 정말 잘 읽었어요. 별 체크! 사실 이런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저는 너무 궁금한 거에요. 사드라는 사람 말만 들었지, 요목조목 정리가 잘 되서 따로 알아볼 필요도 없겠어요. 내숭을 떠는 게 아니라 읽으면서도 저는 속이 안 좋아져서. 그런데, <미덕의 불운>이나 <악덕의 번영>은 재미있기도 할 것 같은데 좀 세요??? 문학적 가치가 있어요? 저는 <피아노 치는 여자>를 너무 못 읽어서, 이쪽으로 한 번 어떻게 계통을 세워봐야 하나 싶은데, 어떻게 읽기 시도를 해야할지 감이 안 와요. 저 이런 쪽으로 너무 모르니까 (음 저는 순수하니까. --;) 아이님이 좀 알려줘요. 땡큐! ㅎㅎㅎ

아이리시스 2012-11-17 21:44   좋아요 0 | URL
저는 <미덕의 불운> 괜찮은 것 같아요. 소돔만 빼면 둘은 함께 읽어야 좋을 것 같고, 문학성도 어느정도(생각보다) 획득하는 것 같아요. 저도 <피아노 치는 여자>를 안 읽어봐서(몇 번 중단;;) 비슷한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안 순수한가 봐요--; 재밌어요ㅎㅎㅎ 댈러웨이님 근데 자카란다는 봄꽃이예요? 보라색이 봄에 피는 건 좀 안 순수한 것 같아요.(뭐래?)

댈러웨이 2012-11-17 21:58   좋아요 0 | URL
자꾸 그럼 정말 맨날맨날 빵꾸똥꾸라고 그럴꺼에요. ㅠ.ㅠ 봄에 피니까 봄꽃인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ㅠ.ㅠ 보라색이 그럼 언제 피어야 하는 거죠? 여름?이 더 적격일까요? 가을은 좀 아니고... 멀리서 보면 색감이 정말 끝내줘요. 드문드문 가로수로 있어도 그렇게 끝내주는데 자카란다가 서울 윤중로 벗꽃나무들처럼 있다고 생각해봐요! <미덕의 불운> 장바구니에 넣었어요. <피아노->는 한 번에 주욱 읽었는데, 너무 건조하게 읽었어요. 그러니까, 작품에 이입이, 그게 뭐였든, 전혀 안된 상태에서, 그래서?라는 토를 달고 계속 읽은 꼴. 그러니까 다 놓친거겠죠??? --; 이 페이퍼도 드문드문 위트! 아이님 위트!

아이리시스 2012-11-17 22:31   좋아요 0 | URL
아니 예전에 퍼플 웨이브 나왔을 때는 봄이 아니어서 그때 피는 꽃이라고 생각했다가 봄에 또 피길래 일 년내도록 피는건가 싶어서요(푸핫). 소나무인가;; 바보 인증--;

아이리시스 2012-11-17 22:38   좋아요 0 | URL
그럼 기다려주세요, 제가 올해 안에 <피아노->읽고나서ㅎㅎㅎㅎㅎ 비교문학을 한 번 해본 담에 댈러웨이님이 감정이입이 안되는 이유로 저 작품을 비판하는 레포트 쓸게요..(라고 거짓말한다..)

맥거핀 2012-11-18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는 잔혹함이나 외설적인 무엇인가를 보기 위해서 이 영화를 보게 되면 필시 실망하게 될 것 같은데 말이죠(라고 짐짓 3인칭으로 말해봅니다). 제 생각에도 (그런 것을 보기 위해서) 파졸리니의 작품을 보느니 책을 보는 것이 훨씬 낫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아이리시스 2012-11-19 02:18   좋아요 0 | URL
파졸리니는 저 영화 속 어떤 소년에게 촬영 후 살해당했다는 게 제일 충격적인 반전인 것 같아요. 의외로 벗고있어도 포르노적 느낌보다는 비위상한다는 느낌이 압도적인 영화여서 잔혹함이나 외설적인 것을 기대하면 말씀대로 실망이예요;; 그런데 저 이제는 밥을 잘 먹습니다..

저도 책이 더 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