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테헤란 공항은 페르시아 문명이 지닌 역사적 무게에 걸맞지 않게 낙후된 느낌이었다. 국경 비자 발급은 중동 특유의 느릿한 행정으로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출장지에서 픽업 나온 택시는 예전 중국의 드럼통 택시를 연상시키듯 낡고 위태로워 보였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는 택시는 테헤란 외곽도로를 따라 우회하여 북서쪽 황무지로 들어섰는데 쿠션과 서스펜션이 거의 망가진 듯 도로 표면의 윤곽을 엉덩이와 척추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출장지는 그런 황무지를 세 시간 달려 북서쪽 어느 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이란은 경제 제재가 풀린 후로도 대금 지불 문제로 수출길이 열리지 않는 중동의 매력적인 시장이다. 주요 기술 선진국과의 경제 교류가 막힌 상황에서 금융 제재를 피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이 부상했고 마침 중국 법인을 가진 회사들이 중동과의 협업이 가능해졌다. 출장의 목적은 1DIN 오디오 품질확보방안을 고객사 사장에게 브리핑 하는 자리였지만 실상은 자체 기술력이 부족한 고객사에 기술 교육 및 불량 수리를 지원하기 위하여 엔지니어와 연구원을 대동한 자리였다. 관세 문제로 완제품이 아닌 SKD(Semi-completed Knock Down)방식의 수출이 이루어져 제품 수출에 비해 불량이 높은 상황이었다.
고객사 사장은 중동 특유의 이목구비 뚜렷한 인상의 덩치 큰 남자였는데 기름 왕자 특유의 느끼함을 지니고 있었다. 첫 면담 자리에서 환전을 도와준다며 테헤란부터 동행한 운전사를 불렀다. 사장보다 더 덩치가 큰 그에게 육백 달러를 건네고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으니 한참 후 돌아온 운전사가 작은 쇼핑백을 나에게 건넸다. 그때는 중국이나 중동이나 회사간 선물 증여가 당연한 시절이었다. 중국에서는 차를, 중동에서는 파스타치오가 들어있는 실타래처럼 둘러싸인 과자를 서로 교환하던 때이다. '출국할 때 주지, 벌써 주나' 싶은 마음으로 들여다보니 돈이 한가득이다. 순간 돈 액수가 너무 많아 보여 뇌물로 착각하여 손사래를 치니 기름 왕자가 '저 자식 케밥을 잘못 먹었나' 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환전해 온 돈이라며 웃었다. 그 당시 환율이 1달러당 32,000리알이었는데 이란은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이 다르게 작동하여 저 정도의 돈이면 아마도 시장 환율로 환전한 모양이었다. 다음날부터 난 일수 아줌마처럼 노트북과 노트를 다 빼 치우고 돈만 가방에 넣고 숙소와 출장지를 오갔다. 노트북 가방보다 조금 큰 가방은 터질 듯 옆으로 배를 불룩 내밀고 있었다. 직원들과 저녁 식사를 케밥 정식으로 먹은 날 계산대에서 가방을 열고 백만 단위가 넘는 돈 (그래봐야 40달러 남짓) 을 세어 넘겨주었는데 왠지 만수르가 된 느낌이었다. 괜히 어깨에 뽕이 들어간 것처럼 자꾸만 높아졌다.

<육백달러의 마법>
기름 왕자는 나에게 주로 자신 회사의 앞으로의 비젼에 대하여 말하길 좋아했는데 그와 놀기에 내 영어가 짧아 주로 현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현장에는 현장 사무실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한 구석에 책상과 회의 테이블로 구성되어 있었고 불량 수리 및 교육도 현장 사무실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첫 날 라인 휴식 시간이 되어 작업장을 벗어나 담배를 피우러 가려고 하니 현지 관리자가 만류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영문을 몰라 앉아 있으니 현장 출입구에서 백색 벨보이 복장을 정식으로 갖춘 말끔한 이란 남자가 쟁반을 받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듯한 백색의 은쟁반에 날씬한 곡선을 자랑하는 콧대 높은 주전자와 본차이나 임을 한껏 자랑하며 반짝이는 찻잔에 파스타치오를 실타래같은 것으로 둘러싼 과자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기름 왕자가 선사하는 이벤트일 것이었다. 10분간의 휴식 시간동안 옆에서 차 시중을 들던 벨보이는 그 이후로도 매일 오전 오후 한 차례씩의 휴식 시간마다 나타나 어색한 차 시중을 들다 사라졌다. 사실 현장 관리 측면에서 조언해야 할 일이었지만 기름 왕자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낼 수는 없는 상황이라 그냥 며칠 동안 만수르가 되기로 했다. 만수르처럼 '후루록' 소리도 내지 않고 우아하게 달큰한 홍차를 마셨다.
아마 사람이 돈에 대해 품는 어떤 가치는 그 절대치에도 영향을 받지만 부피나 무게처럼 시각적인 영향도 무시 못하는 것 같다. 출장 기간이 1주일인 직원들을 남겨놓고 3일후 먼저 귀국했는데 아직 절반이 넘는 돈을 넘기는 게 왠지 아쉬웠다. 어깨 끈 위에 올려졌던 묵직한 돈의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p.s)이 글을 쓰며 이란 리알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보니 현재 달러당 공식환율은 42,000리알 시장환율은 백만리알이 넘는다고 한다. 사진보다 30%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