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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테헤란 공항은 페르시아 문명이 지닌 역사적 무게에 걸맞지 않게 낙후된 느낌이었다. 국경 비자 발급은 중동 특유의 느릿한 행정으로 한 시간 넘게 걸렸다. 출장지에서 픽업 나온 택시는 예전 중국의 드럼통 택시를 연상시키듯 낡고 위태로워 보였다. 울퉁불퉁한 도로를 달리는 택시는 테헤란 외곽도로를 따라 우회하여 북서쪽 황무지로 들어섰는데 쿠션과 서스펜션이 거의 망가진 듯 도로 표면의 윤곽을 엉덩이와 척추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출장지는 그런 황무지를 세 시간 달려 북서쪽 어느 도시에 위치해 있었다.


이란은 경제 제재가 풀린 후로도 대금 지불 문제로 수출길이 열리지 않는 중동의 매력적인 시장이다. 주요 기술 선진국과의 경제 교류가 막힌 상황에서 금융 제재를 피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이 부상했고 마침 중국 법인을 가진 회사들이 중동과의 협업이 가능해졌다. 출장의 목적은 1DIN 오디오 품질확보방안을 고객사 사장에게 브리핑 하는 자리였지만 실상은 자체 기술력이 부족한 고객사에 기술 교육 및 불량 수리를 지원하기 위하여 엔지니어와 연구원을 대동한 자리였다. 관세 문제로 완제품이 아닌 SKD(Semi-completed Knock Down)방식의 수출이 이루어져 제품 수출에 비해 불량이 높은 상황이었다. 


고객사 사장은 중동 특유의 이목구비 뚜렷한 인상의 덩치 큰 남자였는데 기름 왕자 특유의 느끼함을 지니고 있었다. 첫 면담 자리에서 환전을 도와준다며 테헤란부터 동행한 운전사를 불렀다. 사장보다 더 덩치가 큰 그에게 육백 달러를 건네고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고 있으니 한참 후 돌아온 운전사가 작은 쇼핑백을 나에게 건넸다. 그때는 중국이나 중동이나 회사간 선물 증여가 당연한 시절이었다. 중국에서는 차를, 중동에서는 파스타치오가 들어있는 실타래처럼 둘러싸인 과자를 서로 교환하던 때이다. '출국할 때 주지, 벌써 주나' 싶은 마음으로 들여다보니 돈이 한가득이다. 순간 돈 액수가 너무 많아 보여 뇌물로 착각하여 손사래를 치니 기름 왕자가 '저 자식 케밥을 잘못 먹었나' 하는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환전해 온 돈이라며 웃었다. 그 당시 환율이 1달러당 32,000리알이었는데 이란은 공식 환율과 시장 환율이 다르게 작동하여 저 정도의 돈이면 아마도 시장 환율로 환전한 모양이었다. 다음날부터 난 일수 아줌마처럼 노트북과 노트를 다 빼 치우고 돈만 가방에 넣고 숙소와 출장지를 오갔다. 노트북 가방보다 조금 큰 가방은 터질 듯 옆으로 배를 불룩 내밀고 있었다. 직원들과 저녁 식사를 케밥 정식으로 먹은 날 계산대에서 가방을 열고 백만 단위가 넘는 돈 (그래봐야 40달러 남짓) 을 세어 넘겨주었는데 왠지 만수르가 된 느낌이었다. 괜히 어깨에 뽕이 들어간 것처럼 자꾸만 높아졌다. 

<육백달러의 마법>


기름 왕자는 나에게 주로 자신 회사의 앞으로의 비젼에 대하여 말하길 좋아했는데 그와 놀기에 내 영어가 짧아 주로 현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현장에는 현장 사무실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고 한 구석에 책상과 회의 테이블로 구성되어 있었고 불량 수리 및 교육도 현장 사무실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첫 날 라인 휴식 시간이 되어 작업장을 벗어나 담배를 피우러 가려고 하니 현지 관리자가 만류하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영문을 몰라 앉아 있으니 현장 출입구에서 백색 벨보이 복장을 정식으로 갖춘 말끔한 이란 남자가 쟁반을 받쳐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듯한 백색의 은쟁반에 날씬한 곡선을 자랑하는 콧대 높은 주전자와 본차이나 임을 한껏 자랑하며 반짝이는 찻잔에 파스타치오를 실타래같은 것으로 둘러싼 과자를 들고 나타난 것이다. 아마도 기름 왕자가 선사하는 이벤트일 것이었다. 10분간의 휴식 시간동안 옆에서 차 시중을 들던 벨보이는 그 이후로도 매일 오전 오후 한 차례씩의 휴식 시간마다 나타나 어색한 차 시중을 들다 사라졌다. 사실 현장 관리 측면에서 조언해야 할 일이었지만 기름 왕자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낼 수는 없는 상황이라 그냥 며칠 동안 만수르가 되기로 했다. 만수르처럼 '후루록' 소리도 내지 않고 우아하게 달큰한 홍차를 마셨다.  


아마 사람이 돈에 대해 품는 어떤 가치는 그 절대치에도 영향을 받지만 부피나 무게처럼 시각적인 영향도 무시 못하는 것 같다. 출장 기간이 1주일인 직원들을 남겨놓고 3일후 먼저 귀국했는데 아직 절반이 넘는 돈을 넘기는 게 왠지 아쉬웠다. 어깨 끈 위에 올려졌던 묵직한 돈의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p.s)이 글을 쓰며 이란 리알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보니 현재 달러당 공식환율은 42,000리알 시장환율은 백만리알이 넘는다고 한다. 사진보다 30%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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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국경을 넘는다는 건 너무나 생소한 일이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지리학적 특성상 하늘을 날아 다른 나라를 가는 것이 일반적 상식이었으며 북쪽의 국경은 스틱스 강을 건너는 것보다도 더 상상하기 힘든 곳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바라나시에 머무는 내내 나는 가끔씩 불현듯 떠오르는 스트레스에 빠지곤 했다. 그것은 다음 목적지가 네팔이었고 그곳을 가자면 인도-네팔 국경인 소나울리를 걸어서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별것 아닌 이 일이 계속 맘에 떠돈 것은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는 낯선 두려움 외에도 그 동안 인도 곳곳(특히, 기차역)에서 겪은 불합리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에 질린 이유도 있을 것이다. 


바라나시에서 새해를 맞이한 다음 날 길을 떠났다. 바라나시에서 오후 3시경 출발한 기차는 다음날 새벽이 되어서야 고락푸르에 도착하였고 간단히 배를 채운 후 올라탄 버스는 점심경이 되어서야 소나울리에 도착하였다. 그곳은 '나 면세점이요' 하는 콧대 높은 건물들이 서 있는 국경 특유의 어떤 특징을 갖추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고 마을 중앙의 꽤 넓은 길을 통해 사람과 소와 릭샤가 번잡하게 오고 가고 있는 그저 평범함 인도의 시골 마을 같은 풍경이었다. 


(인도 소나울리 국경 - 저 명확한 표지판을 못 본 것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국경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인파에 휩싸여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걸으니 허름한 일련의 일층 건물 속에서 그나마 관공서 같은 모습을 간직한 건물이 눈에 띄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두 명 정도의 사무 인원이 있는 공간에 뚱뚱한 중년의 남성이 미소를 띄며 맞이했다. 출국 수속을 하러 왔다고 하니 그가 큰 소리로 welcome to nepal 이라고 웃는다. 잘못 들었나 싶어 물어보니 이미 국경을 넘어 네팔에 도착했다고 한다. 아, X 됐다. 스틱스 강을 건넌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여행내내 가끔씩 나를 불안하게 하던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이다. 당황해 어쩔 줄 몰라하며 큰 죄라도 진 것처럼 최대한 비굴하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니 다시 인도로 넘어가서 도장을 받아오라고 한다. 국경을 넘어가는 일을 옆 마을 마실 가듯이 말하는 그에게 증명서라도 하나 써 달라고 하니 그냥 갔다 오라고 한다. 다시 발걸음을 돌러 인도로 향하니 그제서야 개선문 같은 아치형 건물이 하나 눈에 들어온다. 어떻게 저걸 놓칠 수 있을까. Indian Border Ends라고 선명히 적힌 저 글귀를 시장 같은 인파 속에서 보지 못하고 넘어선 것이다. 아마 보통 생각하는 국경의 모습이 내 눈을 가린 이유일 것이다. 그 글귀 아래에는 인도와 네팔 병사가 비슷한 색의 군복을 입고 벽에 기대어 웃으며 서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여전히 사람과 소와 릭샤가 넘어다니고 있었다. 군인을 보니 왠지 찔끔 쫄아 다시 무단 출국에 대해 고해성사를 하니 귀찮다는 듯 그냥 넘어가라고 한다. 다시 인도로 넘어와 눈에 불을 켜고 건물을 찾으니 오, 저기 한쪽 벽에 책상 두 개를 놓고 흰색 와이셔츠를 입은 인도인 두 명이 그제서야 '나 공무원이요' 하는 포즈로 서 있었다. 출국 절차를 간단히 마친 후 출입국 관리소를 찾기 어려워 네팔에 벌써 넘어갔다가 오는 길이라고 기절초풍할 고해성사를 하니 종종 있는 일이라며 허허 웃는다. 아무 일 아니라는 듯 겁나 해맑게. 


다시 국경을 넘어가는 길 위에 섰다. 하얀 분필 가루로 그어진 선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사람과 소와 릭샤가 어지러이 넘나들고 있는 길 위일 뿐이었다. 양 국가에 한 발씩 걸치고 잠시 서 보니 문득 분단국인 우리에게 국경이란 하나의 엄청난 트라우마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철조망이 쳐지고 총검을 들고 경계 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곳, 한발짝 건넌다는 것이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길, 그렇게 형성된 국경에 대한 트라우마가 스스로를 금기라는 틀에 가두고 있었던 것이다. 여행길 내 맘 속에도 굳건히 또아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옆 마을 마실과 다름없는 이 길 위에서 오직 나만이 다른 풍경 속 다른 색채를 띄고 다른 길을 걷는 듯 긴장하고 어색한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치형 경계선에 기대어 담배 한 대를 물었다. 문득 존 레넌이 Imagine에서 노래한 곳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Imagine there's no con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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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5-26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여행은 아직 비교적 먼 미래의 꿈이고 워낙 못 가본 곳이 많아서 유럽만 해도 갈 곳이 많아요. 더운 날씨는 또 선호하지 않기도 해서 바라나시를 가볼 일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그곳에 간 사람들의 경험담에서 무려 3중으로 가위에 눌렸다 깨기를 반복했다는 이야기 등 뭔가 오랜 곳에 층층히 쌓인 시공간의 에너지가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는 것 같습니다.ㅎ

잉크냄새 2025-05-27 22:07   좋아요 1 | URL
인도는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동네입니다. 꼭 다시 갈꺼야와 두번 다시 안가로 나뉘는데 중간은 별로 없습니다. 전 전자에 가깝습니다. 쓰신 댓글에 적절한 글귀가 보이는데 제가 생각하는 인도의 매력은 다양성입니다. 인도 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묶을 수 없는 다양한 문화와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곳입니다.

페크pek0501 2025-06-04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 중인 나라의 뉴스를 많이 봐서 그런지 외국 나가는 게 좀 무서워졌어요.
인도에 관한 책을 읽은 책이 있는데 신비로운 무엇이 있는 것 같았어요.

잉크냄새 2025-06-04 20:00   좋아요 1 | URL
봉준호 감독이 자막 1인치를 뛰어 넘으라고 그랬듯이 1인치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외국 나가는 것 별거 아니더군요. ㅎㅎ
인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살아온 세상에 대한 상식과 기준이 다 무너지는 경험을 하는 동네라 여행지로서 매력적이라 생각해요.

감은빛 2025-06-13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예요.
무단 출국을 했다가 다시 돌아와 뒤늦게 출국 수속을 마치는 잉크냄새님.
심지어 국경선을 통과해놓고 거기가 국경인지 몰랐던 잉크냄새님.

저 이 이야기 나중에 소설에 써도 되나요?

저 오래 전에 군대에 있을 당시에 철책선에서 근무했었어요.
비무장지대. 한 가운데에 철책선은 3선이 있었어요.
가장 안쪽 철책은 정말 낡은 철책이고, 가장 바깥쪽(그러니까 가장 남쪽) 철책은
녹이 하나도 슬지 않은 튼튼하고 반짝거리는 철책이었죠.

통문을 통해 그 3개의 철책선 안쪽으로 들어가면
긴 시간 사람의 흔적이 없는 자연의 공간이 나오죠.
문제는 그 공간들 곳곳에 지뢰들이 깔려 있다는 것이죠.

우리에게 국경이란 그런 곳인데,
이 글에서처럼 인파를 따라가다 국경을 이미 지나버린 것도 모르다니!
비현실적인 현실이네요. ㅎㅎㅎㅎ

잉크냄새 2025-06-13 18:05   좋아요 0 | URL
와우! 소설의 소재가 된다면 저로서는 영광입니다. 어느 날 우연히 마주친 소설 속에서 제 추억을 떠올려보는 상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감동입니다.

그나저나 군생활을 엄청 힘든 곳에서 하셨군요. 충성, 존경합니다. ㅎㅎ 전 개인적으로 DMZ의 저 공간을 개발이 손대지 않은 천연의 모습 그대로 <DMZ 평화 트랙킹> 공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합니다. 길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는 철칙하에 주변 지뢰 주변 지역도 그대로 남겨두고요. 너무 위험한가요? ㅎㅎ
 

그 곳은 쯔마지에(깨거리)라는 도로변에서 사각형 모양으로 움푹 들어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가는 방향으로부터 살펴보면 먼저 꽤 큰 중국 음식점이 있었고 그 옆에 한국 음식점 대장금이 모서리를 끼고 위치해 있었다. 꺽인 모서리를 돌면 토속적인 이름을 붙인 조선족 식당이 있었고 다시 모서리를 끼고 북한 음식점인 대동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옆 도로변에 이어진 다시 중국 가게는 정확히 무슨 가게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국과 북한이 중국에 의해 꽉 막힌 지정학적 위치와 세 국가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을 조선족의 심리학적 상황를 반영하듯 옹기종기 붙어있는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한국 음식점 상호는 인기 드라마였던 대장금이 주류를 이루고 궁이나 한성같은 약간은 고전적인 명칭을 고수하고 있었고 조선족은 무지개, 진달래, 해당화 같은 유독 삼음절에 집착한 듯한 토속적인 명칭을 주로 사용했다. 북한은 대동관, 칠보산 등 국가는 곧 영토임을 반영하듯 지역명을 주로 사용했다.  


<굴뚝 산업이 제거되기 전 텐진은 세계 2위 오염도시로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그래도 퇴근후 쯔마지에로 가끔 타고 다니던 세냥 짜리 전철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아직 대북 제재가 이루어지기 전 북한 식당은 출장자들이 으레 한번쯤 들르는 필수 코스였다. 같은 민족이면서 이질적인 그들의 폐쇄된 사회에 대한 호기심에 저녁 한 끼 정도는 꼭 하는 편이었으나 그 호기심은 한두 번 만에 가라앉곤 했다. 먼저 음식이 특별하다고 할 수 없었다. 평양, 함흥 등 지역명을 달고 나오긴 하나 남쪽에 비해 아주 담백하다는 약간의 맛의 차이만 있을 뿐 이국적인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술 또한 솔잎주 등 명칭이나 맛에 대한 호기심에 마셔보긴 하지만 특별할 것 없는 싸구려 소주 맛에 금방 잔을 내려놓게 되었다. 가장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북한 사람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철저한 교육을 받은 탓인지 유독 한국인에 대하여 적대적이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 몇 번 말을 붙여보다 머쓱하게 말을 거두어 들이곤 했다. 그들은 주로 20대 초중반 평양 출신으로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졌으며 출신 성분이 꽤나 높은 여성들이었다. 고위층 자녀로서 볼모라는 설도 있었다. 미에 대한 평가도 세월을 타는 것인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면 그녀들은 곱다는 표현이 딱 맞아 떨이지는 분위기였다. 홀서빙과 저녁 공연 시간에 각자 악기를 연주하는 무대 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주고객인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중국 노래 공연이 주를 이루었고 북한 노래는 처음과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 같은 의미로 몇 곡 불려지곤 했다. 한국 노래는 김정일이 좋아했다는 이선희의 'J에게' 와 어떤 이유로 해금되었는지 모르는 노사연의 '만남'이 가끔 연주되곤 했다.  


<악기는 주로 가야금과 전자 기타였고 가끔 트럼펫과 같은 관악기도 등장했다>


이런 호기심의 단계를 넘어서 마니아의 단계에 접어든 분이 계셨으니 천진 공장에 근무하는 총경리였다. 그는 출장자 식사도, 고객 접대도, 주재원 회식도, 점심 식사도 모두 대동관에서 진행하였다. 그의 연령대로 보아 북한이 고향일리는 없고 아마 부모님이 실향민이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잠시 돌았으나 끝내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은 년말 망년회조차 대동관에서 진행했기 때문이다. 원칙상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그 동안 올려준 매출을 이유로 VIP로서의 위상을 쯔마지에 만방에 휘날린 쾌거(?)였다고나 할까. 2층 제일 큰 홀에서 진행했는데 북한 여종업원 두 명이 밴드로 참석하였다. 식사가 끝나고 술도 몇 순배 돌면서 난 어떤 모습을 쭈욱 지켜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참석한 형수님들(주재원 아내) 대여섯분이 여종업원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모습이었다.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좀 흘렀었고, 상대방의 대화에 호응을 해주는 여성 특유의 감탄사도 들렸었고, 또 다시 중간중간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기도 했고, 가벼운 건배 제의도 이루어졌고, 간간히 웃음소리도 들리곤 했다. 술기운인지 어떤 미묘한 감정인지 알 수 없지만 그녀들은 김정일이 좋아하던 'J에게' 와 왜 해금인지 알 수 없는 노사연의 '만남'을 같이 부르기도 했다. 마치고 나오는 길 못내 아쉬운 듯 가볍게 마주 잡은 손을 쉽게 놓지 않았는데 그 이후로 만남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계 평화는 저런 섬세한 감수성과 친화력에서 올 것이라고.


두달여의 출장이 끝나고 돌아오기 전 총경리는 역시 대동관으로 향했고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어두운 홀 구석에 모여 눈물을 훔치는 그녀들을 보게 되었다. VIP급 총경리가 매니저급 남자 복무원을 닦달하여 물어보니 텐진 지역의 대동관을 폐쇄하고 북한 복귀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그 날은 영업을 하지 않았고 일주일여 남은 시간 영업이 어떻게 진행될지도 미지수였다. 돌아오는 길 총경리는 마지막 송별회라도 해야겠다고 굳센 의지를 불태웠다. 난 송별회가 진행되기전 귀국하였고 그 이후 진행 여부는 알 수 없었다. 2년여의 시간이 흘러 다시 업무로 그 곳을 방문했을 때 대동관이 있던 자리는 기념품을 파는 중국가게로 변해있었다. 한 귀퉁이를 차지하던 대장금과 무지개,진달래,해당화는 여전히 영업중이었으나 왠지 지정학적 심리학적 긴장감이 무너진듯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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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4-03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아직 친구가 아니었어요?? 😱

잉크냄새 2025-04-04 21:23   좋아요 0 | URL
네, 변방 아웃사이더라 아직....ㅎㅎ

transient-guest 2025-04-08 0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중국에 대한 글을 올리신 걸 보면 늘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중국어도 배워보고 싶고, 현지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구경도 하면 좋겠다 싶네요. ㅎㅎ

잉크냄새 2025-04-08 20:07   좋아요 1 | URL
땅덩이 넓은 나라는 그 넓이만큼이나 좋던 나쁘던 별의별일이 다 있기도 하지만 또 그만큼 다양한 삶과 문화가 존재하더군요. 중국에서의 생과 여행이 저에게는 삶에 다채로운 색채를 더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게스트님의 아이디가 여행과 너무 잘 어울리네요.ㅎㅎ

transient-guest 2025-04-09 03:20   좋아요 1 | URL
ID가 길손이죠.ㅎㅎ 반은퇴를 기점으로 보기는 하지만 이번 해부터 근처라도 열심히 다니려고 합니다. SV에 있으니 Napa Valley가 조금 무리하면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서 한두 달에 한번은 유명한 와이너리 하나씩 가보려고 해요.ㅎ

잉크냄새 2025-04-09 20:06   좋아요 1 | URL
경험상 여행을 멀리 장기적 계획으로 보면 참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지금 여기 일단 한 걸음 내딪는 걸음으로 여행은 시작됩니다. 좋은 여행 되시길...

감은빛 2025-04-15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한 음식점, 궁금하네요.
말씀처럼 그렇게 특별할 것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저도 북한 사람이 제일 궁금할 것 같아요.

2002년 아시안 게임 당시에 자원활동을 하면서 북한 선수들을 가끔 마주쳤었어요.
키가 엄청 큰 농구선수도 만났었고, 여러 종목의 다양한 선수들을 보았고,
응원단으로 온 여성들도 보고 했었죠.
동포라는 생각, 언젠가는 그들과 거리낌 없이 친구가 될 수 있는 날이 과연 올까?
이런 생각들이 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잉크냄새 2025-04-15 17:05   좋아요 0 | URL
네, 아마도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그 끈을 놓지 말았어야 했는데, 금강산도 그렇고, 개성공단도 그렇고 정치적 판단의 압박용 카드로만 활용되고 말아 아쉽습니다. 더 세월이 흐른다면 한민족이란 단어도 아득해지는 시절이 올까 막연해집니다.
 

<베이징 다스란 부근 후통 - 국제도시 베이징의 중심 반경 약 10킬로 정도가 이런 후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베이징은 십여년 전 두 시간 거리인 천진에 사는 동안 두세번 다녀온 적이 있다. 마지막 방문은 2010년도였는데 저장성 닝보에 거주할 때 분실처리한 신규 여권을 받기 위해 올라온 때이다. 그 당시 여권이 없어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버스와 기차로 북경에 도착(지금은 여권 없이 버스와 기차도 불가하다)했는데 무려 버스 5시간, 기차 21시간의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때의 기억이 선명한 건 상해-천진의 입석 기차 때문이다. 상해에 도착한 날 천진행 고속철이 매진되어 어쩔 수 없이 입석을 타게 되었다. 고속철이 8시간 걸리던 시절이라 입석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노선부터가 내륙 지역을 통과하고 왠만한 역은 전부 정차하는 느려 터진 기차였다. 중간중간 자리가 날때마다 긴 나무 의자 한쪽 귀퉁이를 차지하였는데 잠시만 자리를 비우면 바로 사라져 버렸다. 밤이 되자 낡은 기차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윗통을 벗어제낀 남성들이 노트북 하나에 영화를 틀고 커다란 스피커를 연결해 밤새 기차 한 칸을 서라운드 돌비 시스템 영화관으로 만들어버렸다. 객석 위에 위치한 짐칸에는 짐들 사이로 사람이 기어 올라 짐들과 한 덩어리로 잠들어 버려 짐을 내려야 할지 사람을 내려야 할지 구분이 안 갈 지경이었다. 낡은 의자 밑에도 누군가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오곤 했다. 내가 잠시 차지한 의자 밑에는 어느 앳된 여성 농민공이 잠들어 있었는데 자리를 양보하려 해도 그냥 슬며시 웃음만 짓던 그 모습이 얼마나 먹먹하고 아련하던지 위아래로 서로 쳐다보며 어색한 웃음 짓던 그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21시간 만에 끊어질 듯한 허리를 짊어지고 내리며 그들에게 무운을 빌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먼 39시간 짜리 단둥행 열차였다.



<스차하이 후통의 저녁 나절>

<스차하이 후통의 아침 나절>



베이징 후통北京胡同은 원나라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해 명,청을 거치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중국의 전통 골목길이다. 전통가옥 사합원四合院이 거미줄 구조로 골목길을 형성하고 골목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자금성을 중심으로 다스란大栅栏, 스차하이什刹海, 난뤄구샹南锣鼓巷 등의 유명한 후통 골목이 있다. 골목길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항상 골목길 위주의 여행을 하곤 했다. 실제 골목을 거닐기 전 후통은 그저 잘 보존된, 중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꽤나 큰 골목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현대화의 물결 앞에 무너지는 흐름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도심 구석에 고인돌처럼 보존된 생명이 다한 지역이라 생각했다. 따스란에 도착 후 걸어 들어간 후통은 단순히 보존을 목적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관리되는 골목이 아니었다. 베이징 시민이 아침을 맞이하고, 이웃을 만나고, 저녁을 먹고, 거리를 산보하고, 늦은 밤 하나 둘 불이 꺼지며 잠드는 그들이 여전히 삶을 영위하는 현장이었다. 단순히 생활의 편의성 만으로 그들의 삶을 제단할 수는 없다. 또한 그 규모에 깜짝 놀라게 된다. 자금성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는 후통은 직경이 대략 10킬로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규모이다. 각각의 명칭을 가진 후통이 거미줄처럼 엉키고 설켜 베이징 후통을 구성한다. 베이징 시민의 후통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나다고 한다. 중국의 정치,경제,사회, 문화적 상징성이 살아있는 후통은 당분간 사라질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아, 중국의 청와대격인 중난하이中南海도 후통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유명한 북경 오리집 췐쥐더, 문대통령 내외도 방문한 곳이다>

<요리사가 직접 시연을 보여준다>



후통은 개발이 불가한 이유로 현지인도 공중 화장실을 사용한다. 동행한 친구가 공중 화장실에서 튀어나오며 '도저히 안될 것 같다'는 푸념을 털어놓을 때 그저 불결한 위생 상태에 대한 불만인 줄 알았다. 상태를 확인할 겸 화장실 문을 여니 엉덩이를 깐 남성이 담배를 물고 핸드폰을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사선으로 빗겨서도 아니고 바로 정면에 조금의 동요도 없이 그가 당당하게 앉아 있었다. '어쩌다 마주친 그대 모습에 내 마음을 빼앗겨 버렸네~~~~(이건 배경음악) ' 추억은 똥가루를 타고 그 먼 길을 기어코 달려 오고야 말았다.그러니까 문이 없는 개방된 화장실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2012년 상해 남부 터미널이다. 배낭여행을 할 때는 내륙 오지 지방이었으니 그러려니 받아들였으나 상해에서 마주한 장면은 경험에도 불구하고 꽤나 충격적이었다. 상해는 열 몇 칸 정도의 긴 화장실에 앞 뒤로 허리 높이의 칸막이가 쳐져 있고 옆이 개방된 형태이다. 상해 남부 지역으로 가는 승객수가 우리 명절때보다 많으니 항상 대기자가 길게 옆에서 기다리는 상황이다. 담뱃불을 빌리다 한국인임을 들켜버린 후 나는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는데 친절한 아저씨는 그 공간까지 들어와 친히 담뱃불을 붙여주며 말을 걸었다. 한국 드라마가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 그들은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할 엉덩이 깐 한국인을 옆에 두고 '김희선이냐 이영애냐'로 의견이 갈라졌고 긴장감에 뒤가 길어지던 난 엉덩이를 깐 채 짧은 중국어로 뭐 그리 열심히 김희선과 이영애의 얼굴 품평을 하고 있었던가. 똥가루 난분분하던 그 곳에서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며 굳세게 마주잡던 굳은 악수는 또 어떻고. 일정 시간 단위로 수세식을 가장한 수로가 열리며 맨 뒤부터 똥물이 콰~~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면 쪼그려 쏴 자세에서 기마 자세로 긴급히 바꾸며 뜻하지 않게 파도타기를 하며 장강의 똥물이 튀는 걸 피하곤 했다. 그때 얼쑤~ 하는 추임새가 절로 나오곤 했다. 그와의 눈맞춤을 통해 상해 화장실의 잔상이  기어코 그 먼 길을 추억으로 달려왔다. '너에게 가장 잊지 못할 중국여행이 될거야' 라며 친구의 얼굴을 보니 여전히 똥색이었다.     



<오래된 북경 자장면집>



중국여행에서 전자화폐의 사용은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듯 하다. 물론 현금이나 카드로도 불편을 감수하며 지낼 수는 있으나 택시 이용만큼은 전자화폐없이 불가능해 보인다. '띠띠따쳐嘀嘀打车'로 알려진 공유택시가 호황을 누린 이후 일반 택시는 거의 멸종 위기에 처한 듯 하다. 막 도착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공항 영업외에 일반 관광지에서 택시를 본 기억이 없다. 중국여행을 계획하는 분들은 알리페이나 웨이신페이를 사전에 준비하고 방문해야 원만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사용하니 그 편리함은 가히 막강하다. 한 번의 현금 사용도 없이 이번 여행을 마쳤다.


숙소나 음식점등 편의 시설을 추천하지는 않는 편인데 이 곳은 그냥 지나치기 아까워 이 곳에 정보를 남긴다. 스차하이什刹海에 위치한 호텔이다. 후통에 위치하여 번잡함 없이 조용하다. 중국 전통 사합원을 개조한 호텔인데 중간의 정원 자리를 그림자 연극 무대로 바꾸었다. 정통 사합원의 풍취를 느낄 수 없는 점이 좀 아쉽다. 이 곳 주인장이 중국 그림자 연극 전수자로서 호텔을 그림자 연극 관련 예술관으로 병행 사용하고 매주 화,목,토에 그림자 공연을 진행한다. 숙박자에 한하여 공짜다. 외지에서 관란시 100RMB이다. 스차하이피잉이수관(什刹海皮影艺术馆 스차하이 그림자 연극 예술관)과 스차하이피잉원화주티쥐덴(什刹海皮影文化主题酒店 스차하이 그림자 연극 문화 주제 호텔) 두 개의 명칭을 사용한다. 구글맵에서 검색이 가능하다.




<시끄러운 걸 좋아하는 중국에서 조용한 술집을 찾기는 힘들다. 대부분이 디스코텍 수준이다. 발품을 팔아 어렵게 찾은 조용한 라이브 술집, 스차하이 호수변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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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3-17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사진들 모두 직접 찍으신 건가요? 전문가 포스가 물씬 풍기는 것 같습니다^^

잉크냄새 2025-03-17 19:42   좋아요 0 | URL
네 . 그냥 잘 얻어 걸린 경우라고 봐야 할 듯 합니다. ㅎㅎ

transient-guest 2025-03-21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사진도 멋지고 추억은 더욱 향기롭네요 (여러 모로 ㅎㅎ) 중국은 역사 고전 음식
사람 다 너무 궁금하고 가보고 싶은 곳인데 심정적으로는 시진핑 독재에 저항하는 맘으로 보이콧 하게 됩니다 저 멋진 풍경과 음식을 담을 날이 올지 모르겠어요

잉크냄새 2025-03-22 20:57   좋아요 1 | URL
거시기 해도 좀 향기로운 추억이죠. 그에 어울리는 향기로운 댓글이네요.ㅎㅎ
말씀하신 것처럼 중국은 다방면에 걸쳐서 흥미로운 것들이 넘쳐 납니다. 넓은 땅덩어리 만큼이나 많은 볼거리들이 존재하죠. 독재에 저항하는 맘으로 보이콧 하시니 당분간 보기 힘드시겠지요. 저도 위안부 관련하여 일본 여행을 보이콧 합니다. 뭔 소용이냐 하겠지만 그게 소신이니 그냥 지키고 살아봅니다.
 



도착지에서의 이동성을 고려하여 주로 낮시간대 비행기를 이용하는 편인데, 가끔은 비행기 연착으로 인해 어쩔수 없이 야간 비행을 경험하게 된다. 대합실에서의 긴 대기 시간이 불편하고 짜증나기도 하지만 날개 끝에서 피어오르던 노을의 향연을 본다던지, 뾰족히 박힌 별의 뒷통수를 본다던지 하는 날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그래 가끔은 연착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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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12-03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보니 생텍쥐페리의 야간 비행, 이 떠오르는군요. 만약 혼자서 밤하늘을 난다면 아름답기도 하지만 고독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할 듯요. 연착하는 날을 새로운 구경거리가 생기는 날로 받아들이시는 님의 자세, 바람직한 것 같아요.^^

잉크냄새 2024-12-03 22:31   좋아요 1 | URL
고독은 혼자 있는 즐거움이고 외로움은 혼자 있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생텍쥐베리는 아마 고독에 더 가까운 비행을 했을것 같네요. 어쩌면 고독을 추구하는 비행이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감은빛 2024-12-26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사진이 정말 멋져요. 저는 어딘가 먼 곳을 간다면 열차도 비행기도 밤에 도착하는 것이 좋아요. 왠지 밤에 낯선 곳에 도착한다는 것이 더 설레는 일이라고 느껴져요.

잉크냄새 2024-12-26 22:10   좋아요 0 | URL
저도 여행중에는 주로 밤에 이동합니다. 시간과 숙박비를 절약할 수 있어서 배낭 여행시에 유용하죠. 또한 말씀하신대로 낯선 곳에 도착했을때의 설레임이 더 배가되곤 합니다. 이스탄불 술탄아흐멧 광장에서 맞이하던 이슬비 내리던 봄날의 새벽이라든가, 시와 사막을 달리던 버스 안에서 맞이한 일출도 잊지 못할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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