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 테드북스 TED Books 3
해나 프라이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평점 :
절판


테드 강연을 책으로 만날 수 있는 테드북스. 얇은 두께에 비해서 내용은 꽤 알차서 론칭 때부터 한 권씩 챙겨 읽고 있다. 독특한 건축물의 사진을 보는 재미가 쏠쏠한 <미래의 건축>이나 피해자의 입장이 아닌 가해자 가족의 관점에서 테러리스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 <테러리스트의 아들>도 물론 흥미로웠지만, 테드북스 세번째 이야기인 <우리가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은 제목부터 구미가 당겼다. '사람'이 아닌 '사랑'에 대해 착각하는 것들이라니, 대체 '수학'으로 어떻게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거지?

삼십대 이후, 미혼 친구들과 모이는 자리에서는 이 책의 띠지 문안과 같은 멘트, 그러니까 "괜찮은 남자는 다 어디로 간 걸까?"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뭐 거기에 곁들여서 '내가 만난 찌질남' 사연도 끊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번 생에 연애는 글렀나봐 …' 하며 자포자기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난제 앞에 무너지고 있는 수많은 미혼들을 위한 '궁극의 사랑 방정식'을 만나고자 책을 폈다.


 

내 나이 이제 삼십대에 접어들고 보니, 실제로 연애 시장에 남아 있는 아름답고 지적인 싱글 여성의 수와 잘생기고 괜찮은 싱글 남성의 수 사이에는 상당한 불균형이 있는 듯하다.이 점을 깨달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며, “괜찮은 남자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라는 한탄은 이제 뉴욕뿐만 아니라 런던이나 상하이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러한 불균형은 도저히 수학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양쪽의 숫자가 같아야 하지 않을까? _107쪽

 


이 지구상에 있는 70억 명의 사람 중에서, 아니 한국에 사는 5천만 명의 사람 중에서 내 짝은 어디 있는 걸까. 저자는 '배커스의 공식'을 통해 우리가 연애 상대를 찾을 확률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한다. 배커스라는 수학자가 사용한 공식에 따르면 그가 데이트하고 싶어할 여성은(여성의 의견은 일단 배제하고) 전 세계에 단 26명(!!!)이라고 한다. 아니 전 세계에 70억 명이나 사람이 있는데 그중에서 단 26명이라니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해나 프라이 또한 배커스의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고 하면서 좀 더 너그러운 태도로 이 공식을 적용하자고, 데이트 상대를 고를 때 온갖 종류의 필수 조건과 절대 불가 조건을 내세우면서 확률을 줄이지 말자고 하며 계속해서 논지를 전개해간다.

 

 

나는 수학자로서 인간 행동의 패턴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수학을 통해 거의 모든 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심지어 사랑처럼 수수께끼에 둘러싸인 대상까지도. _7쪽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이 책에서 해나 프라이는 사랑의 영역 또한 다른 생활의 영역과 마찬가지로 '패턴'이 지배함을 보여주지만,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팁을 제시해주기도 하는 등 은근 실용적이었다. 아무래도 '데이터' 측면에서 연구자에게 유용할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 대한 예시가 자주 등장하지만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다양한 소개팅앱이 인기인 만큼 유용하게 써먹을 팁도 많을 듯하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최대한 외모가 비슷하지만 아주 살짝 덜 매력적인 친구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더 매력적인 사람으로 비칠 것이라고, 어떤 경우든 누군가가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다가가는 편이 낫다고, 외모의 단점(그러니까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나 대머리처럼)을 가리려고 하기보다는 설령 누군가는 싫어하더라도 드러냄으로 자신을 차별화해야 한다고 제안하는 식이다. 어찌 보면 당연히 보이는 말이지만 이런 얘기를 수학적 근거를 들어 보여주니 괜히 더 믿음이 간달까.

 

 

다행히도 인생의 수많은 다른 일들처럼, 평생 성관계를 맺은 상대의 수에서 온라인 데이트 사이트에서 데이트 상대를 선택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사랑에서도 무수히 많은 패턴이 발견된다. 이러한 패턴은 사랑의 속성처럼 제멋대로 휘어지거나 방향을 바꾸는가 하면 뒤틀리거나 진화하기도 하는데, 이 모든 패턴을 특유의 방법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수학이다. _9쪽

 


어떤 상대를 만날 것인지부터 어떤 상대와 결혼을 결심할 것인지, 그리고 성공적으로 결혼식을 치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부부간의 관계가 삐걱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등등 사랑의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수학을 통해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다루면서 수학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매력적인 책. 제 짝을 찾아 헤매고 있는 분들에게도 권하고 싶지만 빅데이터나 응용수학에 관심 있는 분들도 흥미로워할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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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여행을 갈 때마다 직업병처럼 들르는 서점.

보통은 지나는 길에 서점이 있으면 들르곤 하는데,

이번 오사카 여행 때는 딱히 보고 싶었던 것이 없었던 관계로,

우메다에 가는 김에 마루젠&준쿠도 서점 우메다점을 일정에 넣었다.

마루젠&준쿠도 서점은 우리나라의 교보문고와 같은 대형서점인데,

그중에 우메다점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물로 유명해 겸사겸사 찾았다.

 

 

12월 초였는데도 크리스마스 특별 매대도 준비되어 있었다.

이렇게 모아놓고 보니 크리스마스 책들은

산타 때문인지 대체로 색감이 비슷비슷한 듯.

 

 

지하까지 하면 총 8층으로 규모가 굉장했던 마루젠&준쿠도 서점.

마루젠 서점과 준쿠도 서점.

두 개의 서점이 합쳐진 것으로

간사이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서점이라고 한다.

그냥 7층에서부터 슬렁슬렁 보면서 내려와야지 했는데,

봐도봐도 너무 많아서 2시간 가까이 책 구경만 했다.

 

대형서점인데 이렇게 아기자기한 매대가 많아서 재미있었다.

초등학교 때 이것저것 만들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던 매대.

 

젤 오른쪽에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였던

<모모>가 보여서 한 컷.

 

곧 국내에서도 개봉하는 <피노키오>.

일본에서는 11월에 개봉해 큰 인기를 끈 걸로 알고 있는데,

이를 반영하듯 <어린왕자> 관련서를 모아놓은 매대도 있었다.  

 

영어를 좀더 심플하게, 라는 띠지 문구가 눈에 들어와서

들춰봤는데 정말 띠지 문안처럼 심플한 구성.

 

예를 들자면 이런 식.

 

 

개인적으로 탐나는 외서 매대.

챈들러 소설 속의 장소를 담은 책도 갖고 싶었다.

저거 들고 LA를 누비면... 너무 덕후스럽나 싶지만. ㅎㅎ

 

셜록은 여기서도 인기인가봅니다.

 

전자회로, 반도체 뭐 이런 책이 있는

나름 전문서적 서가인데

표지가 인상적이라 찍어봤다.

나름 차별성은 있다 싶었던 ㅎㅎ

 

한정가격 100엔이 눈에 들어와서 보니
화장실 센류 대상 제11회라는 거 수상작(?)들을 판매하는 듯했다.

이거 뭐지 싶어서 찾아보니
일본의 욕실전문회사인 TOTO에서

비대 2천만 대 돌파를 기념해 만든 센류 대회라고 한다.
가정이나 직장, 학교 화장실에서 일어난
실패담이나 재미난 이야기를 담은 센류를 모집해
상위 수상작을 화장지에 인쇄해

화장실의 날인 11월 10일에 출판한다고.

얼마 전 출간된 <조선왕조실톡>에서 실톡 화장지 사은품으로 준 것도 슬쩍 생각났다.

 

한국 관련 서적 쪽에서 보인

박유하 교수님의 <제국의 위안부>.

 

향토사 책도 꽤 많이 출간되어 있었다.

이 서가 모두가 오사카 향토사에 대한 것.

오사카뿐 아니라 다른 지방 향토사에 대한 서가도 있었다.

 

사진집에 수록된 사진이나 포스터 등을

이렇게 에스컬레이터 옆쪽 공간에 홍보해놓았다.

살짝 산만해 보인 감도 있었지만

오며가며 한 번은 눈에 들어왔으니 나름의 홍보효과는 있는 듯.

 

 

매드맥스에 스타워즈에 007까지 있으니

정신 못 차리고 한 컷.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이렇게 변했다 ㅎㅎ

이런 식으로 귀여운 위작들이 담겨 있던 작품집.

 

 

반 고흐 컬러링북도 판매중.

컬러링북이 가끔 보이긴 했는데

한국만큼 컬러링북이 히트하지는 않는 듯했다.

 

한국에도 <스타워즈> 덕후들이 많지만,

역시 전문 서적(?)은 일본 쪽에서 더 쉽게 볼 수 있었다.

언리미티드에디션에 사람들이 엄청 몰리긴 했었지만,

팬북류이나 아트북 시장은 작디 작은 듯.

하기사 애초에 파이가 다르긴 하지만. 

 

 

오다기리 조 주연의 영화 <후지타>가 개봉해 만들어진 것 같았던
일본인 화가 후지타에 대한 매대.
20세기 초 파리에서 성공을 거둔 화가로,
2차 대전 때 일본 정부에서 요청을 받아 선전용 전쟁 기록화를 그린 전범이다.

전범 논란이 커지자 프랑스로 망명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이름을 따서 레오나르도 후지타로 개명했다고 하는데,
뭐 이런저런 이유에서 영화는 아마 국내 개봉이 힘들지 않을까 싶다.

 

 

슬렁슬렁 보려고 해도

눈을 사로잡는 책이 워낙 많아서

정신을 못 차리고 계속 구경했다.

 

 

이렇게 중간중간 의자가 있어서

퇴근 후 온 듯한 사람들이 책 읽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도서관처럼 조용해서

카메라 셔터 소리도 살짝 민망할 정도였다.

  

 

기모노를 다룬 책 중에서

위쪽 맨 왼쪽에 있는 책이

표지만 봐도 왠지 기분이 좋아서 찍어왔다.

여러 가지 산만한 것보다 단정한 느낌이라 좋았던 표지.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요리법을 다룬

역사소설이 눈에 들어왔다.

시리즈인 듯한데 찾아보니 아마존 재팬에는 악평만 있네.

 

 

서점 직원들이 만든 듯한 POP.

너무 제각각이라 산만하긴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귀엽기도 ㅎㅎ

 

 

 

<아이보우(파트너)>의 12, 13시즌을 담은 책.

책 표지에는 나리미야 히로키가 그려져 있지만,

14시즌부터는 소리마치 타카시가 나오니

다음 책에는 그림이 바뀌어 있겠지.

파트너가 바뀔 동안 쭉 자리를 지키는 미즈타니 유타카 대단하다...

 

 

음식 에세이는 언제나 애정합니다.

 

 

니노미야 카즈나리와 기타노 다케시가 출연하는 <붉은 송사리>의 원작.   

12월 28일에 방영하는 특집드라마인데,
니노는 요새 계속 특집 드라마만 찍어서 팬 입장에서는 좀 아쉽지만,
이번엔 라쿠고가에 도전한다고 하니 궁금하다.
개인적으로는 1월에 방영하는 <도련님>이 더 궁금하긴 하지만.

 

 

서점을 방문한 작가들의 사인이겠거니.

아무래도 큰 서점이다보니 가득가득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들도.

 

 

1층에 자리한 지금 당장 읽고 싶은 YA 150선.

각각의 주제에 따라 청소년도서 150권이 놓여 있었는데,

각각의 추천코멘트가 붙어 있어서

많이 신경 쓴 매대구나 싶었다.

 

 

 

1층까지 와서 새삼 놀란 것은,

이렇게 규모가 큰 서점인데 계산대는 1층에만 있었다.

각각의 층에 안내 데스크는 있었지만,

게산은 모두 여기서 하는 시스템인 듯.

뭐 일본답게 질서 정연하게 계산하는 모습.

각각의 계산대 옆에 낮은 의자 같은 게 있어서

가방을 올려둘 수 있게 배치해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요새 교보문고 등 국내 대형서점이

책보다는 문구나 디자인용품 등에 치중한다면,

마루젠&준쿠도 서점 우메다점은 중간중간 변주가 있긴 했지만,

서점 본연의 기능에 충실하게 책에 집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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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5-12-24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엄청 성실한 서점방문기네요. 사진과 글에서 성실성실이 뚝뚝 묻어나요.
언급하신것처럼 게산대에 저렇게 의자를 하나씩 놓아둔 거 진짜 센스있어요! 센스쟁이들..

이매지 2015-12-24 17:28   좋아요 0 | URL
사진 찍어온 게 아까워서 열심히 썼습니다. ㅋㅋㅋㅋ
성실성실하게 서재도 좀 꾸준히 해야 할 텐데.... (먼 산)

비연 2015-12-25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좋아요. 서점이 아기자기한 게 좋네요.
매지님 오랜만에 서재에서 뵈는 듯. 내년에는 자주 뵈요!

이매지 2015-12-28 11:17   좋아요 0 | URL
으하하하하.. 오랜만에 나타나서 이런 글이나 쓰고 민망하네요. ㅎㅎㅎ
내년에는 자주 나타날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당 ㅠㅠㅠ

BRINY 2015-12-25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여기 지하1층밖에 가본 적이 없네요ㅎㅎ

이매지 2015-12-28 11:18   좋아요 0 | URL
저는 지하 1층만 못 가봤는데! ㅎㅎㅎ
진짜 책이 엄청나게 많더라구요 ㅠㅠ
 
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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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영하의 `말`에 대한 기록. 시대에 대한, 책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프로 소설가로서의 자의식을 드러내는 다양한 목소리가 담겨 있어서 읽는 내내 흥미로웠다.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을 감성 근육을 키우는 짧지만 소중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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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통 2015-05-19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냥, 프로필 사진의 강아지가 좋아서..요.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나쓰키 시즈코 지음, 추지나 옮김 / 엘릭시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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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거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연상케 하는 제목을 본 순간부터 '이 책은 읽어야 해!' 하고 강한 지름신이 왔던 나쓰키 시즈코의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 국내에는 이미 몇 권의 책이 출간된 작가인데, 묘하게 인연이 닿지 않다가 이번 기회에 제대로 만났다. 엘러리 퀸의 '비극 시리즈'를 연상케하는 <W의 비극>이나 윌리엄 아이리시의 <환상의 여인>을 떠오르게 하는 <제3의 여인> 등 고전 미스터리를 맛깔나게 변형하는 작가인 듯하다는 인상이었는데,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를 읽으니 그런 인상이 영 잘못된 건 아니었던 듯했다. 아무튼 언제나 믿고 보는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는, 잘 알려졌다시피 고립된 섬으로 초대된 사람들이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이라는 노래 가사에 맞춰 한 명씩 살해되는 이야기다.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의 배경도 이와 마찬가지로 항해중인 선상으로 설정된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죄로 판결받았지만(혹은 유죄로 의심받지도 않지만),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살인을 저지른(살인으로 몰고간) 사람들을 한 명씩 단죄한다는 설정 또한 두 작품 모두 동일하다. 제목이나 대강의 얼개뿐 아니라 디테일 면에서도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그리고 누군가 사라졌다>는 닮은꼴이다. 인디언 섬은 인디아나 호로, 하나씩 사라지는 인디언 인형은 등장인물의 띠와 동일한 십이지 인형으로 변형되는 식이니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클로즈드 서클, 그러니까 폐쇄된 공간에서의 살인이라는 장치를 통해 긴장감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 모두 나름의 솜씨를 뽐낸다. '다음엔 내가 살해당할지도 몰라' '대체 범인은 누구지?' 하는 식의 의문을 끊임없이, 최후의 2인이 남을 때까지, 아니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도 그런 긴장과 불안은 유지된다.

 

  까딱하다가는 오마주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한 아류로 남을 것 같았던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는 의외의 전개를 통해 영리하게 유사 설정작이 가질 수 있는 덫을 피해간다. 아니, 오히려 꾸준히 독자에게 '이건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같은 프레임'이라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몇몇 다른 설정을 간과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독자의 뒷통수를 친다. 단순한 오마주, 패러디가 아니라 원작의 똑똑한 재해석이라는 보기 드문 기교를 발휘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뿐 아니라 뒷부분에서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또다른 걸작을 결합시킴으로써 <그리고 누군가 없어졌다>의 단죄는 얼얼하게 끝이 난다. 마지막 몇 페이지의 사족과도 같은 마무리만 아니었더라면 더 깔끔하게 끝나지 않았을까 싶지만, 나쓰키 시즈코라는 이름을 다시 한 번 되새기기엔 충분한 마무리였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이긴 했지만, 끝까지 긴장을 유지하는 솜씨도 꽤 볼만했던 작품. 애거사 크리스티의 팬이라면 그녀의 작품과 비교하며 읽는 맛이 있을 테고, 미스터리 초심자에게는 미스터리의 매력이 이런 것이구나 느낄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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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5-03-19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입해두었는데 이것도 어서 읽어 봐야겠습니다. ^^

이매지 2015-03-21 09:58   좋아요 0 | URL
페이지가 술술 넘어가더라구요. ㅎㅎㅎ
 
백년식당 - 요리사 박찬일의 노포老鋪 기행
박찬일 지음, 노중훈 사진 / 중앙M&B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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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교토에 갔을 때 가장 놀랐던 것은 몇 대째 이어가는 가게가 지척이라는 것이었다. 100년 정도 된 식당은 노포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오래된 가게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물론 가업을 잇는 일에 대해서 한국과 인식이 다르고, 전쟁 등 외부적인 상황 또한 우리와 달랐으니 단순하게 비교할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전통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무심하다. 사대문 안에서 옛 자취를 찾는 일은 쉽지 않다. 기껏해야 'ㅇㅇ터' 같은 표지석으로만 남아 있을 뿐 옛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다. 피맛골만 해도 그렇다. 재개발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하에 그 자체로 문화사적 의미가 있는 피맛골은 부서지고 멋대가리 없이 높게 솟기만 한 고층 빌딩이 그 자리를 채웠다. 그렇게 수많은 전통이 사라졌고, 또 사라져가고 있지만 그 흔적을 기억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키고 싶었다. 그랬기에 <백년식당>으로 박찬일 셰프와 함께 노포 기행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글 쓰는 요리사 박찬일의 책은 이번이 두번째인데 전에 읽었던 <어쨌든, 잇태리>와 <노포기행>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아무래도 본인의 체험담 위주의 글쓰기와 취재를 통한 글쓰기라는 태생적인 차이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유머러스하면서도 음식에 대한,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만은 여전했다. '맛있어서 오래된 식당' 즉 노포를 찾아 국내 방방곡곡을 찾아나서지만 30년만 되어도 노포 축에 들 정도로 우리나라에 노포는 드물다. <백년식당>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이 책에 실린 노포들은 50년을 너나드는 식당들로 선정되었다.

  <백년식당>에 소개된 노포들은 몇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식당뿐 아니라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생각해봄직한 대목이 아닐까 싶었다. 일단 맛있다. 맛이 없는데 오랫동안 살아남을 식당은 없을 것이다. 즉, 기본에 충실하다는 이야기다. 둘째, 주인이 직접 일한다. 노포의 주인들은 고령에도 새벽같이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제 좀 내려놓아도 될 것 같은데도 '한결같은' 맛을 지키기 위해 몇십 년이 지난 지금도 애쓴다. 셋째, 직원들이 오래 일한다. 50년 넘게 근속한 직원이 있을 정도로 노포는 '평생 직장'처럼 직원과 함께 세월을 뚫고 나아간다. 우래옥이나 청진옥처럼 내가 가본 식당이 아니고서야 글만 읽고 그 맛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지만, 노포의 활기찬 분위기만큼은, 그리고 그곳을 지켜가는 사람들의 고집에 가까운 의지만큼은 강하게 전해졌다.

  노포에 대한 책이지만, 민중들의 배를 채워준 음식에 대한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육개장이 보신탕의 이미테이션으로 출발했다는 이야기를 시작으로, 원래 저렴했던 갈비가 올림픽 이후 '가든' 열풍과 과소비가 시작되면서 고급 부위로 변모하는 것이나 어묵과 오뎅의 관계 등에 대해 읽어가노라면 우리가 익숙하게 먹던 음식에 어떤 역사가 담겨 있는지 그 미시사를 살펴볼 수 있어 즐거웠다. 국밥의 밥이 단순히 따순 밥을 말아주는 것이 아니라 토렴, 즉 찬밥에 뜨거운 국물을 여러 번 부었다 헹궈내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토렴을 하면 밥알 속까지 따뜻해지면서 국밥의 온도가 먹기 적당하게 변한다고 한다. 온도도 알맞을 뿐만 아니라 밥 알갱이의 씹히는 맛도 살아 있어 맛에도 좋다고 한다.

 

 

 

  책을 읽다가 내내 군침을 삼키다가 결국 오랜만에 청진옥에 들러 따뜻한 해장국 한 그릇을 먹었다. 오랜 세월을 버티며, 단단해진 맛이 그곳에 남아 있었다. "나는 이 집에서 쉬이 다리를 꼬지 않고, 큰 소리로 말하지도 않는다. 역사 앞에서는 다들 공손해져야 하는 법이니까"라는 박찬일의 말처럼, 나 또한 공손히, 그리고 감사히 앞으로도 살아남은 노포에서 역사를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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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01-13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우래옥으로 달려갔어요! ㅋ

이매지 2015-01-13 15:24   좋아요 0 | URL
으헝. 우래옥도 가고 싶네여.
저는 열차집이 막 땡기더라구요. ㅎㅎㅎ

유부만두 2015-01-13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같이 가요!!! 백년식객 합시다 ^^

이매지 2015-01-14 09:00   좋아요 0 | URL
백년식객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