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C버전으로 감상하시는 것을 권장합니다.

 

1. 인문학 열풍

  



고전 읽기가 유행하고 있습니다일상에 치이는 우리 시민들에게 고전을 직접 읽고 소화할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없지만 앎에 대한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니까요. 그래서 대한민국의 똑똑한 사람들과 출판사는 경쟁적으로 고전을 잘 정리하고 각색해서 시중에 여럿 괜찮은 입문서를 내놓고 있습니다. 어느 책을 골라도 쉽게 잘 설명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저는 제대로 된 입문서는 독자로 하여금 직접 원전을 찾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잘 소화하고 대신 씹어주는 해설서들은 읽기엔 편할지 몰라도, 스스로 노력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빼앗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턱을 낮추는 작업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직접 떠먹여 주는 것엔 반대합니다. 인문학 열풍 이면에 있는 손쉽게 무언가를 획득하려는 태도, 지식의 이해와 체화가 아니라 잘 정리된 지식의 단편적 암기로 빠지려는 경향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가이드북의 도움을 받더라도 여기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소화하려는 태도를 갖고 싶습니다.


 

(▲ 개인적으로 한길사의 인문고전 시리즈를 선호합니다. 모아두면 뿌듯해서요)


2. 인간의 고유 능력

 



학부생 4학년 시절, 문헌정보학과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한 적이 있습니다. 주요 업무는 강의실 청소였는데, 제가 청소하기로 배정받은 시간을 쓰시는 교수님은 항상 강의를 10, 15분 늦게 마치시는 분이었습니다. 그 덕에 저는 졸지에 청강생이 되어 문헌정보학10분 토막 지식을 듣는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보를 다루는 그 학과의 특성답게 요새 각광을 받는 ‘4차 산업혁명에 관해 교수님이 열정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정보의 분류는 크게 3가지가 있다. 날 것 그대로의 숫자는 Data, 맥락이 부여되면 Information, 그것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면 Knowledge. 여기서 4차 산업혁명이란 인공지능이 인간에게서 Data에 투여되는 단순 노동을 가져가는 것을 말한다.” 정치학밖에 모르고 살던 저에게는 굉장히 신선한 설명이었습니다. 이 설명을 거꾸로 뒤집으면 인공지능이 침범하지 못하는 인간 고유의 지적능력은 맥락을 부여하는 능력의미를 추구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강연을 듣고 고전은 사람맥락의미사이의 거친 호흡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고전을 읽음으로써 인간은 맥락부여와 의미추구라는 인간만의 재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시대마다 또 장소마다 새로 읽힘으로써, 읽는 이의 현시점, 현 상태, 현재 원하는 바, 읽는 이가 살아왔으며 또 살아갈 역사와 사회의 특정 한 국면이 우연의 도움을 받아 맞부딪힐 때, 독특한 어떤 의미가 창출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듯이, 한 사람은 같은 책을 두 번 읽을 수 없으며, 같은 책도 다른 사람은 다르게 읽힐 수밖에 없고, 사람마다 부여하는 맥락이나 창출해내는 의미, 고유한 개성이 부딪히며 나는 무늬()’ 또한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고유한 지문처럼요. 인간의 고유성과 개성을 동시에 확인하는 행위, 그리고 그것을 고양하기 위한 지적 노력이 고전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요?





3. 논리와 가치


 


▲좌 : 장현근. 2011.맹자 바른 정치가 인간을 바로 세운다한길사

▲우: 동양고전연구회. 2016.맹자. 민음


 

2014년 초에 맹자를 읽었습니다. KBS의 사극 정도전에서 고려의 신진사대부이던 정도전이 맹자의 역성혁명’ 부분을 읽고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겠다는 결심을 하는 부분에서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입니다정치학도로서 조선왕조를 주도적으로 설계했던 정도전의 삶과 혁명'이라는 키워드는 매력적이었습니다그래서 저는 그 당시 맹자의 수많은 대목 중 정치사상 부분을 특히 유심히 여기며 읽었습니다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는가에만 초점을 맞췄던 게지요그러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터진 이후, 1년 반 만에 다시 읽은 맹자는 저에게 새로운 의미를 주었습니다그리고 저는 유독 이 한 구절에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위해가 가해지는 것을 참지 못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 한 어린아이가 발을 헛디뎌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갑자기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런 상황에선 누구나 겁을 먹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그건 그 아이의 부모와 사귀려들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이나 친구들에게서 칭찬을 들으려고 그러는 것도 아니고, 비난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공손추 상·6 (장현근. 2011.맹자 : 바른 정치가 인간을 바로 세운다. 한길사. p.120)

 




어린아이 하나가 우물에 빠진 것을 목격해도 겁을 먹고 불쌍히 여기는 것이 사람인데, 우물보다 넓은 바다에 하나보다 많은 304명의 억울한 목숨이 바다에 빠진 사건을 두고 우리 사회는 조롱과 비난과 편 가르기와 소모적 정쟁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방관했으며, 심지어 동조했습니다. 이 당시 저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격의 파탄공감의 부재에 큰 절망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1년 반 뒤에 다시 읽은 맹자의 글이 정확한 인과관계와 사실관계에 입각한 논리가 정연한 글이라기보다, 당위에 호소하며 가치를 추구하는 글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마디로 문장의 과학이 아니라 공감의 철학이었던 이지요. 다시 읽은 맹자는 제가 무의식적으로 듣고 싶었던 우리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라는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주었습니다. 저라는 사람맹자라는 책에서 세월호의 맥락을 부여해, 잠시 잊고 살았던 소중한 가치를 다시 얻어내고자 그렇게 발버둥을 쳤던 것이지요.


 


 

4. 기존의 사실과 새로운 의미

 



한 학기 동안 네이버 열린 연단의 고전강의를 들었습니다. 이승환 교수는 <동양의 고전 : 동양 고전 이해를 위한 방법론적 서언> 강연에서 고전 독서의 5단계를 제시했습니다. 앞의 4단계는 사실 확인을 철저하게 하는 일련의 과정이고, 마지막 단계는 확인된 사실을 바탕으로 나만의 새로운 해석을 보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이런 과정을 조금 삐딱하게 봤습니다. 저런 복잡다단한 과정이 일반인들의 지식 접근을 차단하는 높은 문턱이 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턱을 낮추는 과정과 지식을 대하는 자세는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접근성을 좋게 만드는 과정과 별개로, 지식을 추구하는 업을 가졌다면 소명의식을 가지고 문구 하나하나, 문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뜯어 살피는 데 영혼을 바쳐야 한다고 막스 베버 선생의 책,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읽었습니다.





일단 눈가리개를 하고서, 어느 고대 필사본의 한 구절을 옳게 판독해 내는 것에 자기 영혼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생각에 침잠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예 학문을 단념하십시오.() “네가 태어나기까지는 수천 년이 경과할 수밖에 없었으며”, 네가 그 판독에 성공할지를 또 다른 수천 년이 침묵하면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은 학문에 대한 소명이 없는 것이니 다른 어떤 일을 하십시오.



-(막스 베. 전성우 역. 2013. 직업으로서의 학문.나남. pp.33~34)





그리고 좌절했습니다. 엄격한 형식요건을 갖춰야 하기에, 사실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몇 없겠구나. 두려움과 막막함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래서 신뢰감이 생겼습니다. 가짜 뉴스와 권력을 등에 업은 방송신문사가 최소한의 객관성을 의도적으로 지키지 않아 생기는 문제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적어도 학문은 그렇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석사과정을 막 밟기 시작한 제가 고전을 어떤 자세로 읽어야 할지를 다시 한번 점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텍스트 하나하나의 의미를 이리저리 뜯어보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을 정신무장과 나의 고집을 위해 사실을 왜곡하거나 의도적으로 빼먹지 않는 양심을 갖춰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습니다.

 


동시에 강연에서 훈고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진시황의 분서갱유가 낳은 사생아였고, 고증학이 청 왕조의 폐쇄적 검열에 따른 불가피한 조처였다는 내용이 특히 귀에 잘 들어왔습니다. 동서고금의 부패한 집권세력이 객관성을 빙자해 새롭고 비판적인 의견을 탄압하는데 오용했던 역사적 상흔을 배운 탓인지, 저는 너무 사실관계에만 치중하려는 풍토가 힘없는 자들에게 불리한 여건을 만들 거라는 다소 좋지 못한 편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전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판결문의 형식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헌법재판소의 엄격함이 헌법 정신을 수호하듯, 형식의 굳건함은 가치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5. 번역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그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달성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천명한다. 지배 계급은 공산주의 혁명이 두려워 전율할지도 모른다.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공산당 선언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진우 역. 2015.공산당선언. 책세상. pp.59-60)

 




학부 2학년 때, 묘한 호기심에 공산당 선언을 읽어 보았습니다. 도대체 이 책이 뭐길래 전 세계의 절반이 붉게 물들고, 청년들의 가슴이 식지 않는 정열로 타올랐던 것일까가 너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바로 서점에 가 이진우 씨가 번역한 문고판 공산당 선언을 사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불같은 성격으로는 누구에게 뒤처지지 않는 저였기에, 당연히 이 책을 읽으면 가슴이 두근거릴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독서는 지루함이 멈추지 않았고, 실망은 곱절로 돌아왔습니다



명색이 선언문인데 글에서는 전혀 리듬감이 느껴지지 않았고 어떤 기백조차 담기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뒤흔들 유령을 보낼 두 철학자의 혼백은 전혀 담기지 않았습니다. 특히 프롤레타리아들은 공산주의 혁명에서 자신들을 묶고 있는 족쇄 외에는 잃을 게 없다. 그들에게는 얻어야 할 세계가 있다.” 라니요. 냉정한 머리로만 한 딱딱한 번역은 내용은 담고 있으나 느낌은 전혀 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글을 읽고 누가 혁명에 가담하겠습니까? 지루하고 난삽한 번역 탓에, 저는 처음 접한 맑스의 저작에 굉장한 실망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학부 4학년의 필자는 서점가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삽화와 새로 번역된 공산당 선언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본능적으로 맨 마지막 장을 펼치고 앞에 언급한 해당 구절을 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소리 내어 읽어봤습니다. 그래 이 맛이지. 이래야 선언문답지. 원작이 아닌 번역의 문제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스러운 일로 여긴다. 그래서 자신들의 목적이 기존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타도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힌다. 지배 계급들을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벌벌 떨게하라. 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가 잃을 것은 쇠사슬뿐이요,

얻을 것은 세계 전부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일러스트 공산당 선언 · 공산주의 원리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박종대 역. 2015.공산당선언. 미메시스. p.93)

 





잘못된 번역이 놓치는 것은 내용뿐만이 아닙니다. 뉘앙스나 맥락이나 감정, 정신, 기백과 같은 부분도 함께 사라집니다. 책이 어떤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은 탄탄한 논리 구조와 내용의 알참도 있지만,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과 호소력 짙은 문체도 한몫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소실된 내용을 각주를 덧붙여 복원하는 과정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저는 이 책이 그 시대 그 사회에 주었던 느낌을 잘 살려내는 과정도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 시대 사람들이 왜 이 책에 매혹되었고, 오늘날의 우리는 이것을 다시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 차이점이 명확해지면서, 거기서 엄청난 가능성이 뿜어져 나오는 게 아닐까요? 그러다 보면 현재의 시점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편견으로 그 시대의 단점만 들추거나 덮어놓고 무조건 숭상하는 오류가 좀 줄어들진 않을까요?


 

 

6. 주체성의 실종

 


앞서 저는 인간 고유의 능력은 그 자체로는 죽어있는 단순한 숫자나 조각 사실들을 외우는 능력이 아닌, 맥락을 부여하고 의미와 가치를 찾는 능력이야말로 인간 고유의 능력이며, 고전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가장 활성화된다는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스스로 꾸역꾸역 거친 책을 읽으면서 머리가 트이고 사고력이 향상되고 책의 기술적인 논리와 테크닉을 파악하고, 또 나만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면서 나만의 무늬, 주체성이 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고전 교육은 주입식입니다. 남이 간결하게 정리한 요약본을 그냥 암기하는 방식이지요. 이렇게 해서는 어떠한 인간의 지적능력도 자극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독서는 스스로 괴롭게 고민하며 읽되, 다채로운 시각은 즐겁게 함께 공유하는 기쁨이 있길 바랍니다.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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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그.. 택시..” 매표소 직원이 너무 예뻐서 말을 더듬었다. 오랜만에 어머니께 효도 좀 할 겸 영화를 보여드리러 갔다. 어찌저찌해서 할인과 포인트를 사용하니 기분 좋게 반값에 영화표를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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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과 영화 보러가는 일은 항상 즐겁다.)



광주역에 운집한 시민들이 나왔다. 알 수 없는 감정에 눈물이 복받쳤다. 한상 푸짐히 차려놓고 차린 게 없다고 너스레 떠는 사람. 남일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사람. 정 많고 잘 부러워하고 눈에 자주 밟히는 사람. 내가 느껴온 전라도 사람. 차별과 핍박의 역사적 소용돌이에 부당하게 쓸려갔던 순박하고 평범한 사람들. 나는 1년 전 오월에 5·18 국립 민주묘지와 망월동 묘역에 방문했다. . 이 사람들이 여기서 졌겠구나.

 



삼수해서 그것도 정외과를 간다니까 어머니께서 신신당부했다. 데모하지 말라고. 잡혀간다고. 나는 어머니께 요즘 시대에 그런 게 어딨느냐 호들갑 좀 떨지 말라며 성내고, 종종 집회에 나갔다. 원래 사람 심리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법이다. 처음엔 심심해서, 때로는 궁금해서, 어쩔 땐 누가 가자 길래, 탄핵 땐 열불 나서 데모 하러 갔다. 세월호 집회 때는 불법 채증 당할 뻔했다. 탄핵 땐 한겨울에 비를 맞았고, 아스팔트에 시린 엉덩이와 저린 발로 앉아있었다. 몇 번 안 나갔는데도 많은 일이 있었다.

 



( 차린게 별로 없어서... @택시운전사 공식 포토갤러리)




영화가 끝났다. 한껏 상기된 어머니는 생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전남 완도 출신이다. 어머니네 마을 회관 맞은편 집 아들내미가 그날의 5월에 광주 갔다 죽었다고 했다. 그 사람의 딸이 바로 175월 문 대통령이 껴안아준 광주 유족이라고 했다. 어머니 말로는 805월의 신군부는 고금도 충무리, 그 깡촌의 선착장마저 틀어막았다고 했다. 닫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닫으려 들었다고 했다. 빛고을 광주. 그 틈새에서 새어나온 한줄기 빛의 굴절. 사실이 영화를 좇는게 아니라, 영화가 사실을 흉내내는 굴절된 빛의 탈출사.

 



문 대통령이 유가족 손을 잡고 추도식에 입장한 날 광주가 뒤집어 졌다고 했다. 우리 어머니 단톡방이 요란했다. 우리에게 이런 날도 있다고. 한을 풀겠다고 했다. 멀쩡히 내 옆에도 나도 몰랐던 한 명의 광주가 살아있었다. 그 빛고을을 지켜본 어머니의 눈빛, 그 빛은 산란하며 세월호 때도 탄핵 때도 글을 쓰는 지금도 꼭 한마디씩 당부한다 잡혀가지 마라장난인 줄 알았더니 진심이었다. 광주의 겁을 갖고 있는 엄마가 반골 아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단 한 가지 잡혀가지 마라였던 게다. 나는 돌아가는 버스에서 애처럼 배가 고프다 칭얼거렸다. 엄마는 배가 고프지 않다고 했다. 잡혀가지 말라면서. 그리고 여느 날처럼 차린 것 없다며 한 상 크게 내주셨다. 물론 설거지는 내가했다. 효도할랬다가 되려 사랑을 말로 받았다.



-2017.9.8 @PrismMaker


※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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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dla2189 2017-09-08 2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화한편 더 본 느낌. 잘 읽었습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09-08 23:0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syo 2017-09-08 21: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 틈새에서 새어나온 한 줄기 빛의 굴절. 사실이 영화를 좇는 게 아니라, 영화가 사실을 흉내내는 굴절된 빛의 탈출사˝

크- 너무 멋지고 적확한 문장이라 몇 번을 봤는지 외울 지경입니다. 글 정말 잘 쓰십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09-08 23:07   좋아요 1 | URL
칭찬 감사합니다!! 올해 안에 에세이 집을 출간하고 싶은데 좋은 반응 보여주셔서 용기가 납니다!!
 

(▲사진 속 글쓴이는 대학에서 돈 안 되는 공부만 열심히 골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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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어떠십니까? 아. 남들보다 뒤 처진 것 같아 불안하다. 매일매일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고 답답하다. 또 주변사람들 기대에 못 미칠까봐 숨이 막힐 지경이군요. 무얼 위해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지 의문이 가면서도 다른 도리가 없어 하고 계신다.

 

  하는 일마다 잘 안돼서 위축되고, 아주 단순한 일상생활에도 잔 실수가 잦아지니, 무얼하든 내 자신부터 의심이 가는 군요. 남들은 저렇게 행복하고 다들 열심인 것 같은데, 그에 비해 내 자신은 한없이 초라하죠? 남들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자기비하는 멈출 줄 모르고.
 

  당신. 옛 영광과 무너진 자존감 사이에서 방황하고 계십니다. 지금 당장 방에서 나와 양지바른 곳에서 하루 30분, 따사로운 햇빛과 선선한 바람을 쐬면 조금 낫지요. 또 적당히 조용한 카페에서 향 좋은 커피한잔 앞에 두고 세상구경 역시 권하는 바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루 한번. 아래의 마법의 주문을 ‘손 글씨’로 베껴 적을 것을 이 글을 읽는 당신께 처방합니다.

 

<주문>
  나는 실수투성이에 못난 구석이 많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사람이다. 잘난 모습뿐만 아니라, 찌질 하고 겁 많은 모습도 나의 모습이다. 무엇하나 똑부러지게 못해도 나는 여전히 나를 신뢰한다. 잘난 사람 앞에 기죽지 말고, 못 한 사람 깔보지 않는다. 부족하지만 나는 내가 좋다. 다시 고를 수 있더라도 나는 나로 산다.
 

  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살고 싶다. 남의 시선에서 자유롭다. 남들은 생각보다 내 생각 안한다. 주변사람 눈치보다 기회 놓치지 말자. 주저하다 후회하지도 말자. 자신에게 만큼은 솔직해져 본다. 인정 받으려 구걸하지 말자, 강요하지도 말자. 나는 타인의 기대와 인정 속 안정된 노예가 아닌, 내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나 자신의 ‘불안한 왕’이다.
 
 
  신세한탄 하지 말자. 나 자신을 자기만의 드라마 속 비극의 주인공으로 끊임없이 포장하지 말자. 돈과 가난에 무덤덤해지자. 가난은 불편할 뿐 고개 숙일 이유 아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당당히 살자. 사람 죽으란 법 없다. 이제까지 돈 없어 굶어 죽은 적 없었다.
 

  되도록이면 당장한다. 하고싶은건 그냥한다. 물론 대부분 실패하겠지. 그러나 한다. 거절당하기 위해 다가간다. 실패하기 위해 시도한다. 예상치 못한 불행이 닥칠까 지레 겁부터 먹지 않는 것. 사서 괴로워하지 말자. 너무 마음쓰다 속 앓이 않겠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나는 적절히 대처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는 없다. 미래를 예측하여 들지 말 것. 알 수도 없을 뿐더러, 막상 그때가면 미래는 달라져 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하자. 눈 앞에 있는 것에 집중해보자. 굴러온 행복에 불안해말고, 오늘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
 

  부디 종이가 아닌 그대의 가슴에 새겨지길 바라며. 인생에 한번은 시처럼 살아야 한다.



-2017년 9월 5일 @PrismMaker


※ 본 글은 2016년 부대신문 1490호 [청춘, 펜을 들다] 섹션에 실린 필자의 기고문 입니다.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3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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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dla2189 2017-09-05 20: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있습니다! ^^

프리즘메이커 2017-09-05 21: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빅대디 2017-09-05 2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처럼 살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프리즘메이커 2017-09-05 22:15   좋아요 0 | URL
까뮈 사진이 멋지십니다. 감사합니다.
 

(▲부산대학교 사회관에는 붙임성 좋고 귀여운 고양이가 산다/ 사진 : 글쓴이)


  우연히 터키의 길고양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곳의 고양이는 고양이답다. 마음먹은 대로 누워 편히 쉬고 걸어 다니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먼저 다가가 안긴다. 우리네 길고양이들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이 땅의 가여운 친구들은 단지 그 어떤 악의가 실리지 않은 발걸음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도망부터 치고 본다. 후미진 골목 자동차 밑바닥에 웅크려 언제 어디서든 바로 피신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어째서 같은 유전자를 가진 고양이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나는 정답의 자명함을 뒤늦게 인식했다. 이들이 눕는 아스팔트가 정반대의 정서를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아스팔트는 석유의 찌꺼기이다. 주로 길바닥을 포장하는데 쓰인다고 고등학교 기술 시간에 배웠다.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필자는 더 이상의 전문적인 내용은 알지 못한다. 다만 포장된 도로가 갖는 객관적인 기능이 아닌, 사회적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뿐이다. 이 땅에 흘겨진 시선을 포착하고 그려내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이 글은 추상화 일지도 모르겠다. 


  아스팔트를 덧칠한 우리 사회의 시선은 무엇이었을까? 이 사회의 구성원인 나 자신부터 돌이켜 본다. 멸시 풍토가 빚어낸 위축된 반경을 원래 그런 것인 양 당연하게 여긴 건 아닌지. 나와 너의 단 한 번은 수백 번의 폭력으로 불어 날 수 있다는 걸 간과해온 건 아니었는지. 두려움을 장난으로, 정당함을 과민함으로 치부해버린 건 아닌지. 외려 화가 가득 찬 변명부터 해오지는 않았는지. 인과를 뒤집어 책임을 전가한 건 아니었는지를 말이다. 아스팔트의 두께에는 나의 편협함과 고양이의 두려움이 퇴적되어 있었다. 이렇게 보면 나 역시 아스팔트를 쌓아 올린 주주(株主) 중에 한 명임이 틀림없다.


  어느 영화 속 소녀의 대사처럼 무엇이 중한 것인지,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생각해본다. 대를 이어 걷어 차여왔던 고양이들이 본능적으로 체득했을 공포감의 누적치를 먼저 이해하고 반성하는 것. 무엇이 고양이로 하여금 사람의 발소리에 발길질부터 떠올리도록 학습시켰는지부터 파악하는 것. 그래서 강자의 불쾌함과 약자의 공포감 사이의 제대로 된 경중을 아는 것. 그냥 걷는 누군가와 누워 쉬는 어떤 존재 사이에 어울리는 감정은 불쾌한 공포가 아닌, 문제없는 평온함이어야 한다는 것. 아스팔트 위에 깔릴 서사는 공포와 혐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인지하지도 못하고 내는 평범한 발소리조차 누군가에겐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일 수 있다. 악의 없는 평범함이 어쩌면 얼굴 없는 혐오 일지 모른다. 도망치는 고양이를 탓하기 전에 바로 이 길에 깔렸었던 수많은 발길질과 발자국부터 지워내야 한다. 이 글은 고양이 이야기이기도 하고 사람 사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글은 못난 사람에 의해 벽에 던져져 세상을 떠난 새끼 고양이를 위한 애도이기도 하고, 못난 나의 뒷발질에 알게 모르게 몇 번이고 채였을 웅크린 소수자들을 향한 나의 진중한 사과문이자 반성문이기도 하다. 강남역과 고양이의 사잇길에서, 얼마간의 고민을 글로 적어 보낸다. 선(善)의 평범성을 위해서.


-2017년 9월 3일 @PrismMaker



※ 본 글은 2016년 부대신문 1526호 [청춘, 펜을 들다] 섹션에 실린 필자의 기고문 입니다.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http://weekly.pusan.ac.kr/news/articleView.html?idxno=5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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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중학교 3학년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열심히 수학문제를 풀고있는 동안, 나는 친구들 뒤에서 이 글을 적는다. 


 ˝엄마하고 나하고는 연결되어 있잖아, 그래서 아픈거야˝ 


  이 좋은 봄날에, 봄 기운이 꽃송이에 가득 맺힌, 밝고 따뜻한 날에 나는 이 책을 집었다. 글자가 무거웠다. 맑고 밝은 계절에, 생명이 역동한다는 이즈음에도 글자는 검었고 글은 탁했다. 







이 아이들도 봄 좋은지 알았겠지. 봄 내음 나리면 공부하기 싫고, 잔디밭 보면 주저앉고 싶고 그랬겠지. 훈풍에 봄볕 같은 아이들이 시린 물에 잠겼고 세상을 떴었다. 애석하게도 세상은 바닷물보다 더 차디찬 냉골이 됐다. 금요일엔 돌아오라니, 돌아왔으면 어제 만우절이라고 교복입고 하하호호 돌아다녔겠구나.


2년이 지났다. 속으로 아니 벌써? 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내 마음도 여전히 병들어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있지? 언제고 변명않고 죽음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두렵고 무섭다. 사실 자신, 없다. 다만 이 글로 죄책감을 좀 달랠 수 있을지, 나는 비겁하게 오늘도 세상 분위기 파악 못하고 혼자 공상에 젖어 있을 뿐이다. 부끄럽다.


장난기 어린 친구들과 장난기 어린, 자칭 선생인 내가 같은 공간에서 다른 생각을 한다. 부디 모두가 행복하길, 봄 날에 빈다.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잊혀진 사람들을 위해. 안녕히


               - 2016년 4월 2일 @PrismMaker


※ 본 에세이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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