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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평] 임명묵의 『K-를 생각한다』 





‘20대 담론’은 소위 ‘88만 원 세대’, ‘아프니까 청춘’, ‘N포 세대’ 등 기성세대에 의해 다양한 이름으로 정의되고 재현되곤 했다. 그런데 유독 하필 90년대생 담론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90년대생들이 가정·직장·정치 영역에서 부모인 386세대에 사사건건 도전하고 반발하는 자식 세대로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뒤따르는 것이 물리 세계의 법칙인데, 정치 담론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기성세대는 선거에 질 때마다 ‘역사의식’ 내지는 ‘안보의식’이 모자라다며 ‘20대 철부지론’으로 수렴되는 책임 전가형 프레임을 내세웠다. 이에 대한 청년세대의 반발은 늘 어느 정도 있어 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문재인 정권 탄생에 몰표를 주었던 청년세대의 이탈이 가시화되고, 정권과 386 운동권 세대에 적대적인 ‘이대남’이라는 집단의 출현이 최근 치러진 선거에 유의미한 결과를 몰고 왔다. 이로 인해 산발적이던 ‘90년대생 세대론’은 ‘이대남’으로 응축되며 본격적인 관심의 도마에 올랐다.


  강남역 사건 이후 세대를 초월해 여성들을 결집시키며 풍부한 현상 설명의 틀을 가졌던 페미니즘과 달리, 그동안 ‘이대남 현상’은 일시적 현상이거나 돌연변이 식이라는 피상적 분석만 있었을 뿐, 그것에 합당한 설명 틀을 가지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94년생 청년 작가 임명묵의 『K를 생각한다』가 일약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 아닐까 한다.


 


■ 386세대의 자아분열을 고발하려고 했으나... 여전히 찜찜한 무언가



  이 책의 부제는 ‘90년대 생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이지만, 이 책은 세대 일반을 다루기보다는 철저히 남성향이다. 여성의 경우는 90년대 생 특유의 ‘커뮤니티 화력전’을 창조하여 전이시킨 아이돌 팬덤 문화를 제외하고, 책에 별다른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영역에서는 독보적으로 페미니즘이 세대를 아우르는 설명력을 갖고 있고, 젠더를 담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저자 스스로 판단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저자 임명묵의 주된 비판 대상은 정치경제 엘리트 지위를 차지한 운동권 출신 386세대이자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의 허점이다. 그는 K-방역을 다루는 제2장에서 386식 세계관에 비판의 포문을 열기 시작한다. 민주화를 추종하는 세력의 소망과는 별개로 한국의 코로나19 방역 성공의 비결은 민주적 이념이나 시민의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권위주의 군사정부가 남겨준 강력한 행정 동원력과 반민주적인 동선 공개 및 추적, 말단 제조업 역량이라는 산업화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아예 책의 제4장은 통째로 386세대 비판에 할애했는데, 그 요는 ‘90년대 생이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세대 불평등 탓이며, 그 변화의 상당수를 기득권이 된 386세대가 주도하거나 이용한 탓’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저자가 더욱 집요하게 비판하는 지점은 386세대의 자아분열(책의 표현으로는 이중사고)이다. 즉, ‘평등의 낙원을 꿈꾸며 혁명운동으로 젊음을 바친 386세대가 이제는 선진국의 상류 중산층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했으면서도, 기득권이 된 본인 세대의 객관적 위치를 부정하며 아직도 청년기 비주류적 마인드로 투쟁적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에 직접 신음하는 90년대생은 386세대의 자아분열을 위선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386세대가 태극기 세대를 ‘시대착오’적으로 보았다면, 90년대생은 386세대를 ‘시대 고착’으로 생각한다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필자 또한 90년대생의 한 사람으로서, 386세대의 사회 경제적 위상에 대해 두 세대가 각각 내리는 가치평가가 크게 엇갈린다는 점, 386세대가 공동체의 평등을 추구하는 ‘공적 자아’와 개인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사적 자아’ 사이의 혼란이 존재한다는 분석에 충분히 동의한다. 그러나 여전히 전적인 책임을 어느 한 세대 일반에 지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른다.


  사회 양극화와 신자유주의적 흐름은 민주정권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진행되어온 흐름이며, 자본소득이 노동 소득을 뛰어넘어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문제는 토마 피케티가 일찍이『21세기 자본』에서 선진국 자본주의의 병폐로 지적한 바 있다. 이중적 노동시장의 형성 또한 재벌 일가와 대기업, 그리고 부동산이라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이고 오래도록 해묵은 문제를 빠뜨릴 수 없다. 이것을 논외로 두고 특정 세대 일반의 욕망추구를 지나치게 과장했다는 느낌도 든다.


  한때 운동가가 소시민이 되자 (청년기의 이상을 배반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정권을 세워 지대를 추구하는 듯한 위선의 부각은,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애초부터 그런 구조를 의도적으로 설계하고 활용했다는 인상으로 흐르기 쉽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자칫하면 ‘386 원죄론’으로 쉽사리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90년대생 역시 지금은 공정을 부르짖지만 언제든 불공정의 유혹과 특권 활용을 서슴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결국에 이는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이익 추구의 방법이 달라질 뿐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될 뿐이라, 세대론의 독특성에서 출발하여 황급히 일반론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인상을 주어, 책이 제시한 분석과 진단 프레임이 갖는 논리적 정합성에 비해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 하층의 세계화에 대한 한국식 포용


  이 책에서 가장 살아있는 부분을 꼽자면, 아마도 한국식 다문화와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룬 제3장일 것이다. 저자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조치원 김밥 가게를 배경으로, 직접 여러 외국인 노동자를 마주하여 얻은 경험이 생생하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터넷상에서 난무하는 난민에 대한 혐오 발언의 정도에 비해, 실제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추정컨대 이촌향도로 인해 일손이 귀한 시골에서 관념적 혐오보다는 경제적 필요가 크게 작용해 외노자에 대한 차별이 상쇄되고 있다는 측면인 듯하다. 저자의 취재에 따르면 작업에 대한 특별한 교육 없이 고강도로 생산성을 재촉하는 한국적 노동 문화가 힘든 것은 사실이며, 이에 적응하지 못해 상처받고 탈락하는 외노자들도 물론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현장의 한국 사람들은 일만 잘하면 국적은 관계없이 ‘쳐주는’ 경향이 일반적이며, 언어장벽을 넘어서고 한국식 눈치 문화에 ‘빠릿하게’ 적응한 외국인들은 현지인만큼 ‘짬 대우’를 받아 작업반장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현장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은 외노자가 현지인을 지휘하는 ‘역전된’ 케이스도 존재한다고 소개한다.


  물론 살아남은 이들의 주관적 경험을 모아 객관적으로 외노자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의도는 도시 중산층이 외면한 지방 3D 업종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층의 세계화’ 속에서는 나름대로 ‘능력주의의 순기능’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코리안 드림’을 이루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능력을 매개로 하는 한국적 다문화는 꽤나 포용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 글쎄, 과연 K-능력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한국적 다문화에서 ‘쓸모있는 외국인은 한국에 포용된다’던 저자의 논리는 교육 파트에 들어서자 ‘쓸모를 찾지 못한 한국인을 그대로 배제된다’라는 전도 논리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저자는 외노자에 대해서는 온라인상의 혐오에 비해 현실이 덜하다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자국민인 90년대생은 유독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이 대상에 따라 각각 다르게 적용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나와 있지 않다는 것도 책을 읽을 때 상기할만한 지점이다.



  1장의 ‘90년대생은 누구인가’에 따르면 90년대생은 전반적으로 ‘탈 가치화’된 정보화 세대다. SNS를 통한 끊임없는 비교에 노출되는 인정투쟁 속에서 극심한 피로를 느끼는 상태다. 90년대생은 주로 익숙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불만을 분출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세계화로 인해 노동시장이 극단적으로 분화되자 양질의 취업 문이 급격히 좁아진 반면, 대학은 취업에 필요한 적절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구직으로 인한 좌절의 기간이 대폭 늘어난 것은 물론, 격렬한 경쟁 끝에 얻은 학벌이 취업시장에서 능력을 보여주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위와 같은 진단은 결국 원활하게 능력주의를 펼칠 공간은 ‘표준화된 시험’ 영역밖에 남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즉, 정보화 시대에 발맞춰 독창적 콘텐츠를 생산할 창의력이 없는 다수에게는 계층 상승을 위해서 유일하게 주어진 길은 오직 ‘공직 시험’만이 남는다. 따라서 ‘공정’이라는 가치는 90년대생에게 그 자체로 생존과 취업에 필수적인 토대이자, 건드려서는 안 되는 정치적 ‘뇌관’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해법이 ‘능력주의의 제대로 된 작동’임이 은근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마지막 장은 논리적으로 계층 상승의 기초 사다리인 입시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단호한 어조로 한국 교육은 능력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그 작동을 방해하는 자기 기만적이고 분열적 시스템이라 진단한다.


  즉, 386세대가 주도한 공교육이 표방하는 ‘겉의 가치’는 ‘좋은 말의 향연’에 불과하며, 명문대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부모·학생들의 ‘속의 욕망’과 어긋나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제도가 들어선들 본질적으로 제대로 된 효험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속의 욕망’을 겉으로 드러내 인정하는 쪽으로 유도하여, 제대로 된 능력주의를 구현한다면 학벌과 세대의 지대추구를 막을 수 있다는 쪽으로 귀결하는 듯 보인다.


  공교육의 표리부동이 낳은 저효율에 관한 문제의식에는 동의할 수 있더라도, 능력주의를 그대로 드러내 서열화를 양성화했을 때의 경각심은 부족한 듯 보인다. 학벌의 좁은 사다리마저도 특정 계층과 좋은 학군의 학생들이 독식하고 있으며, 사다리 바깥에는 ‘지잡대’로 추락한 이들이 영영 저자가 말한 하층의 노동시장에 그대로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학벌주의와 연동되어 작동될 수밖에 없다. 욕망을 무차별적으로 내버려둘 경우 학벌을 통한 지대추구는 오히려 공고해질 것이다.


  또한 사회 양극화와 대물림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그 속도를 늦추는 작업도 꽤나 의미 있는 일이다. 극단적으로 벌어지는 사회의 간극을 줄이려는 모든 노력은 다 무의미하고 무용한가. 저자는 위선마저 포기했을 때 벌어질 일들을 예상하지 못하는 듯하다. 무비판적으로 시장에 모든 걸 맡기면 알아서 잘 된다는 자유방임 논리의 아류로 흐르는 듯하다. 무의미와 무용의 레토릭에 90년대 청년의 시각이 녹아있느니 다소 어울리지 않은 부분도 느껴진다.




■ 90년대생의 초라한 자화상



 동 세대 청년작가의 혜안과 탁견에 감탄하면서도 위선에 대한 반감과 역설의 지나친 강조로 한 세대의 자기기만에 너무 천착한 나머지, 결론에서 급격히 무게중심을 잃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안에서 90년대생은 쪼그라든 자화상만을 갖기 때문이다.


  임명묵 작가가 그린 청년의 모습에는 공동체를 고민하는 공적 자아가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보다 주로 온라인에 서식하며 능력에 따른 서열화를 좋아하면서도 거기서 좌절된 욕구를 분출하는 청년 남성의 얼굴이 보인다. 이것은 현재 우리 세대의 상태에 대한 어느 정도 객관적인 묘사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머물러있어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을 낳는다.


  청년 세대의 자아 축소는 심각한 문제다. 공적자아를 형성할 기회가 부족한 청년의 삶에 대해 세상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청년의 불만을 정치권의 양지로 수렴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공적 자아 없는 청년의 욕망은 결국에 냉소로 흐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만큼 중요한 작업은 미래에 우리가 풍부한 표정을 갖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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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있는 책의 원고가 교정작업에 들어갔다. <여문책>에서 내 첫 책이 나올 예정이다. 20대 청년의 눈으로 세상과 고전을 읽는 일종의 인문 에세이다.
 
책을 내면서 많이 배운다. 책 한 권에 글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책 한 권 나오는데 여러사람의 상당한 노동이 들어간다는 것을 몸으로 배우고 있다. 책을 읽기만 할 때는 전혀 몰랐었다.
 

편집 과정에서 지적해주신 내용이 무척이나 도움이 된다. 나의 잘못된 글쓰기 습관이 군데군데 드러난다. 논문을 쓰다보니 번역투가 옮아 간 것들이나, 불분명한 표현들을 잘 잡아주셨다.
 

스무 살의 목표는 딱 두 가지였다. 서른이 되기 전에 내 이름으로 된 논문 한 편과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보이는 것. 대학원 휴학을 하면서 원고를 써 작년 여름에 출간계약을 했고, 이제 고지가 눈 앞에 있다. 이런 기회를 얻게 되어 정말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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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된 세상의 비릿한 죽음을 애도하며


언젠가 평론가 신형철이 이렇게 말했다. 죽은 노무현은 희화화할 수 있어도, 노무현의 죽음은 희화화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극단적인 폭력이자 시신의 훼손이라고 말이다. 이 한 구절을 두고 나는 한국 사회의 몇 가지 도착과 그 비극적 결말을 떠올린다.

먼저 사퇴한 조국을 비웃을 수는 있어도 조국의 사퇴는 비웃을 수 없다. 개인으로서 조국 일가가 몇몇 얄미운 짓으로 인한 도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면야 충분히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개혁을 하려다 개혁대상의 폭력적인 압력에 못 이겨 물러난 그의 사퇴를 조롱할 수는 없다. 사퇴한 조국은 흠결 있는 개인이지만, 조국의 사퇴는 기득권에 의한 개혁 의지의 축출이기 때문이다.


하나 더 있다. 설리의 죽음은 그 자체로 한 개인의, 나아가 한국 사회가 낳은 비극이다. 그러나 언론이 죽은 설리의 사진을 찍어 전시하는 행위는 그보다 더 큰 비극이다. 그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비윤리다. 아니 몰윤리다. 이는 한 인간의 죽음을 극단적으로 훼손하는 행위이자, 개념으로서의 인간의 존엄 그 자체를 망가뜨리는 행위기 때문이다. 사체를 전시하여 돈벌이로 삼는 짓은 결코 언론의 자유가 될 수 없다.

또 하나의 비극이 더 발생했다. 구하라의 죽음이다. 노무현의 죽음과 조국의 사퇴가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면, 이 두 죽음은 사선의 근처에 있던 모두가 염려하던 예견된 죽음이었다. 우리 사회 모두가 한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연이어 목격하였다. 끝끝내 82년생 김지영에게 부정했던 혐오는 94년생 설리와 91년생 구하라에겐 엄연히 실존했던 폭력이었다. 죽은 구하라는 법의 '복수'를 기대할 수 없다.


표현의 자유와 자유로운 인신공격, 죽음으로 이끈 표현과 죽음이 다 표현하지 못한 이 세상의 부조리들. 도착된 세상에서 죽어가는 이들과 살아가고 있는 자들의 비릿함. 인터넷의 몇 바이트 남짓한 활자가 그녀들의 가슴에 남긴 것을 보아라. 우리 시대의 칼은 6인치의 액정과 108자의 키보드다. 연예인은 보호받지 못한 노동자였고, 악플은 산업재해였다.


정치의 발전은 누군가를 축출해서, 의식의 발전은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쫓아야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왜 이 세상은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을 세상에서 쫓아내고자 하는가. 왜 자꾸 세상은 누군가의 부재로 존재의 소중함을 깨우치려 하는가. 죽음이 윤리의 교본이 되기 전에, 윤리가 죽음을 막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또 한 번 보아라. 모든 죽음은 사회적 타살이다. 시대 어느 한 귀퉁이가 썩어가는 대한민국에서 모두들 안녕들 하시길 바란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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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필자가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고문입니다. 

<반일 종족주의> 이전부터 한번 총체적으로 정리를 해야겠다 싶었습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15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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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치하겠다는 청년들은 하나같이 양복 차림일까? 교복도 자율화가 이루어진 마당에 ‘양복의 교복화’ 현상이 눈에 자꾸 밟힌다. 두발 규제도 사라진 마당에 2대 8의 머리칼 분배는 국정 가르마라도 되는 것인가. 도덕 교과서적인 발성법은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 것인가. 연장자를 예우하고자 빼입었다는 궁색한 대답은 듣고 싶지가 않다. 청년 세대의 정치혐오를 생각할 때면, 나는 왜 정치 지망생들의 차림새부터 떠올리는 것일까?




정치가 영화와 닮았다면, 정치 지망생들도 ‘정치인’이라는 캐릭터를 해석한다. 문제는 그 해석이 양복에 갇혔다는 것이다. 빈약하고 획일적이며 낡은 내가 난다. 으레 정치인이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지레짐작들이 모여 굳어진 일종의 업계 상식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눈여겨볼 점은 젊은 정치 지망생이 기존 문법을 그대로 답습하거나 오히려 강박적으로 선호한다는 점이다. 다 큰 어른에 대한 복장 지적이 양복이 상징하는 비릿한 청년 정치의 한 단면으로 드러났으면 한다. 




정치학을 전공하면서 가장 기분 나쁜 순간은 “시장은 유능하고 정치는 무능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다. 그러나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있노라면 딱히 할 말이 없다. 최소 인재풀에서 만큼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공시생이 시험공부를 할 때, 취준생이 사회 경험을 쌓을 때, 정치 지망생은 자신의 시간을 어디에 투자했을까? 행사에 기웃거려 가방을 들고, 술잔을 따르며 불콰한 사진 찍는 허드렛일 외에 특기할 것이 없다. 이른바 ‘존재 노동’도 노동이라면 노동이지만, 이력서의 공란처럼 헛되기 그지없는 것이다. 그 일회용 존재 노동의 필수품이 양복이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실제로 청년 정치 지망생은 동년배 취업 준비생보다 확연히 스펙과 역량이 뒤떨어진다. 사실 청년이라는 기회를 이용했으나 사실 그게 전부기 때문이다. 어리다고 하대 받을 이유가 없다면, 사실 젊어서 우대받을 이유도 없다. 젊음은 사회가 특별히 배려하는 하나의 상태일 뿐이지, 정치의 이유나 자격이 될 수 없다. 생물학적 청년이 꼭 청년의 사회 문제를 잘 푼다는 보장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귀속된 정체성이기보다는 자질과 능력이다. 무엇이든 업(業)이 되려면, 시각이 독특하거나, 컨텐츠가 새롭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남들 하는 것을 더 잘해야 한다. 정치도 그렇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청춘이면 아파야 한다로 둔갑하더니, 청년 정치가 필요하다니까 정치 청년들만 몰려온다. 청년성을 양복에 포장하는데 급급한 정치풍토의 범람에서, 나는 공부하는 청년 정치인을 보고 싶다. 기성 정치인은 학창 시절 사회 운동에 전념하느라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손 쳐도, 우리가 이끌어갈 새로운 시대의 정치인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 자기자본과 원천기술 없는 기업이 오래 버티지 못하듯이, 자기 분야가 없는 청년 정치인이 자라 정치 자영업자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청년을 위한 것과 청년에 의한 것은 다른 개념이다. 준비 부족이 기회 부족의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 세상이 청년 정치를 일회용으로 소비할지라도, 정치 지망생들은 배움을 멈춰선 안 된다. 그래서 한 정치학도가 다른 정치 지망생들에게 감히 고하고 싶다. 취준생들과 자신을 구별 짓기 전에, 최소한 취준생만큼은 공부하시라고. 적어도 알맹이 없는 정치의 시대는 우리 손으로 끝내야 하지 않겠냐고 말이다.


나호선(정치외교학 석사 17)  press@pusan.ac.kr


<저작권자 © 부대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_ 본문은 필자가 <부대신문>에 보낸 기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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